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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녕(金壽寧)
[문과] 단종(端宗) 1년(145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壯元]위(01/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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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이수(頤叟)【補】(주1)
호(號) 양소당(養素堂)【補】(주2)
시호(諡號) 문도(文悼)
생년 병진(丙辰) 1436년 (세종 18)
졸년 계사(癸巳)【補】(주3) 1473년 (성종 4)
향년 38세
합격연령 18세
본인본관 안동(安東[舊])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대사간, 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이수(頤叟), 호는 소양당(素養堂).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안숭선(安崇善)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집현전수찬에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헌납·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인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1463년 집의에 오르고 그 뒤 동부승지, 1465년에는 좌승지를 거쳤다.
1468년 호조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였다.
1466년(세조 12) 공조참의가 되고 이어 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47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직시에는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명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사재(史才)가 있어서 1458년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수령(金壽寧))]
[생원] 단종(端宗) 1년(145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생원]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丁23]
전력 생원(生員)
품계 가정대부(嘉靖大夫)
관직 호당(湖堂)
관직 호조참판(戶曹參判)
공신 좌리공신(佐理功臣)
봉호 복창군(福昌君)
문과시험답안 책문(策問):수성난(守成難)
기타 이문명세(以文名世) 18장원즉배집현수찬(十八壯元卽拜集賢修撰) 경연청복석강구규종지(經筵請復夕講舊規從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숙(金潚)
[조부(祖父)]
성명 : 김익정(金益精)[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휴(金休)
[외조부(外祖父)]
성명 : 안숭선(安崇善)[文]
본관 : 순흥(順興)【補】
[처부(妻父)]
성명 : 이지(李祉)
봉호 : 혜령군(惠寧君)
본관 : 전주(全州)【補】
[주 1] 자 : 「『성종실록』 32권, 성종 4년(1473) 7월 3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자를 추가.
[주 2] 호 : 「『성종실록』 32권, 성종 4년(1473) 7월 3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호를 추가.
[주 3] 졸년 : 「『성종실록』 32권, 성종 4년(1473) 7월 3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김익정(金益精)
[문과] 태조(太祖) 5년(139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壯元]위(01/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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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자비(子斐)【補】(주1)
졸년 병진(丙辰)【補】(주2) 1436년 (세종 18)
본인본관 안동(安東[舊])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참판,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비(子斐). 김구(金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성목(金成牧)이고, 아버지는 한성부윤(漢城府尹) 김휴(金休)이며, 어머니는 김효신(金孝信)의 딸이다.
1396년(태조 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문하부의 요직을 지냈고, 1409년(태종 9)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
그 뒤 헌납(獻納)·직제학(直提學)·우대언(右代言)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관찰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承政院知申事)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
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익정(金益精))]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생원(生員)
관직 이조참판(吏曹參判)
관직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휴(金休)
[조부(祖父)]
성명 : 김성목(金成牧)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구(金玖)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효신(金孝信)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권담(權湛)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제(弟) : 김익렴(金益廉)[文]
[가족과거]
손(孫) : 김수녕(金壽寧)[文]
[주 1]자 : 「『세종실록』 71권, 세종 18년(1436) 1월 26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자를 추가.
[주 2]졸년 : 「『세종실록』 71권, 세종 18년(1436) 1월 26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一(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김효신(金孝信)
[문과] 세종(世宗) 11년(142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17위(27/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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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 김효손(金孝孫)
본인본관 김녕(金寧)【補】(주1)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생원(生員)
문과시제 책문(策問):제도‧조묘‧군현‧관직(制度祧廟郡縣官職)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김지(金智)【補】(주2)
[조부(祖父)]
성명 : 김순(金順)【補】(주3)
[증조부(曾祖父)]
성명 : 김광저(金光儲)【補】(주4)
[외조부(外祖父)]
성명 : 육기(陸圻)【補】(주5)
본관 : 옥천(沃川)【補】
[처부(妻父)]
성명 : 이○○(李○○)【補】(주6)
본관 : 전주(全州)【補】
[안항(鴈行)]
형(兄) : 김효온(金孝溫)【補】(주7)
[주 1] 본관 : 『김녕김씨보(金寧金氏譜)』(1921)를 참고하여 본관을 "김녕(金寧)"으로 추가.
[주 2] 부 : 『김녕김씨보(金寧金氏譜)』(1921)를 참고하여 부를 추가.
[주 3] 조부 : 『김녕김씨보(金寧金氏譜)』(1921)를 참고하여 조부를 추가.
[주 4] 증조부 : 『김녕김씨보(金寧金氏譜)』(1921)를 참고하여 증조부를 추가.
[주 5] 외조부 : 『김녕김씨보(金寧金氏譜)』(1921)를 참고하여 외조부를 추가.
[주 6] 처부 : 『김녕김씨보(金寧金氏譜)』(1921)를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주 7] 안항 : 『김녕김씨보(金寧金氏譜)』(1921)를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권담(權湛)
[고려문과] 우왕(禑王) 6년(1380) 경신(庚申) 경신방(庚申榜) 동진사(同進士) 8위(18/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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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년 계묘(癸卯) 1423년 (세종 5)
본인본관 안동(安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공주목사, 황해도관찰사, 전주부윤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괴정(槐亭). 할아버지는 찬성사를 지낸 권렴(權廉), 아버지는 개성윤(開城尹) 권호(權鎬)이다. 어머니는 구영검(具榮儉)의 딸이다.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시역사건에 관계한 권진(權瑨)의 일족이라 하여 한때 원주(原州)에 유배되었다.
1380년(우왕 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389년(공양왕 1)사헌장령이 되어 우왕(禑王)을 옹립한 변안열(邊安烈)의 죄를 논할 때 이에 가담한 이경도(李庚道)를 국문하였다.
이듬해 남원부사가 되고 곧 간관(諫官)이 되었으나,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간관 진의귀(陳義貴)·정습인(鄭習仁)·맹사성(孟思誠) 등과 함께 멀리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사면되고 조선(朝鮮)이 건국된 뒤에는 다시 중용되어, 1402년(태종 2) 우사간을 거쳐 1412년 공주목사, 1419년(세종 1) 황해도관찰사, 1423년 전주부윤 등 외직(外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괴정집(槐亭集)』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권담(權湛))]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규정(糾正)
관직 부윤(府尹)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권호(權鎬)
[조부(祖父)]
성명 : 권렴(權廉)
[증조부(曾祖父)]
성명 : 권준(權準)[麗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구영검(具榮儉)
[처부(妻父)]
성명 : 허강(許鋼)
[처부(妻父)2]
성명 : 조무(趙茂)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권준(權準)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99년미상(未詳) 시년미상(未詳)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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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년 임진(壬辰)【補】(주1) 1352년 (공민왕 1)
본인본관 안동(安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밀직부사, 지밀직사사, 첨의찬성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중(平仲), 호는 송재(松齋). 할아버지는 찬성사 권단(權㫜)이고 아버지는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권보(權溥)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충선왕을 중국 연경에서 만나 대언(代言)에 발탁되고, 원나라 왕에게 아뢰어 무위장군합포만호(武衛將軍合浦萬戶)에 임명되었다.
1310년(충선왕 2) 밀직부사(密直副使), 1313년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다.
조적(曺頔) 등이 충숙왕을 모함하여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에게 왕위를 넘기도록 책동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심왕에게 붙었으나 의리를 지켜 변하지 않았다.
변이 평정되자 첨의찬성사에 임명되고, 또 조적이 패하자 충혜왕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으로 봉하고 부(府)를 열어 요속(僚屬)을 두었다.
충목왕이 돌아가자 기로대신(耆老大臣)들과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공민왕을 세울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권씨는 할아버지 권단 이래 명문가가 되었고 외손녀가 충혜왕 때 화비(和妃)로 책봉되니 권세와 부귀를 크게 누렸다. 임금으로부터 제택(第宅)과 금잔(金盞)이 하사되기도 하였으며 가속들이 죄를 지어도 순군(巡軍)이 감히 처벌하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충숙왕이 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국왕으로서도 미치지 못하겠다고 한탄한 것은 그 저택의 호화로움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도를 믿고 뇌물을 받아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들었다.
아버지 권보의 지시로 이제현과 함께 『효행록』을 지었다. 아들로 권염(權廉)과 권적(權適)이 있다. 시호는 창화(昌和)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권준(權準))]
[이력사항]
관직 찬성사(贊成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권부(權溥)[麗文]
[조부(祖父)]
성명 : 권훤(權晅)[麗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권위(權韙)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朴龍雲, 一志社, 1990.[452_766])
권부(權溥)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5년(1279) 기묘(己卯) 기묘방(己卯榜) 을과(乙科) 3위(3/4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AD8CBD80FFFFB1262X0
이명(異名) 권영(權永)
자(字) 기경(耆卿)
호(號) 국재(菊齋)
시호(諡號) 문정(文正)
생년 임술(壬戌) 1262년 (원종 3)
졸년 병술(丙戌) 1346년 (충목왕 2)
향년 85세
합격연령 18세
본인본관 안동(安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우정언, 시강학사, 삼중대광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영(權永), 자는 제만(齊滿), 호는 국재(菊齋).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권단(權㫜)이며, 어머니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노연(盧演)의 딸이다.
15세에 진사가 되고 1279년(충렬왕 5) 18세로 급제, 이듬해 전시(殿試)를 거쳐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에 보임되었다.
국자학유(國子學諭)를 거쳐, 박사(博士)에 올랐다가 우정언(右正言)에 이르렀으며 여러 번 옮겨 첨의사인(僉議舍人)이 되었다.
1298년 1월 충선왕이 즉위해 사림원(詞林院)을 설치, 개혁을 시도할 때 시강학사(侍講學士)가 되었는데, 박전지(朴全之)·오한경(吳漢卿)·이진(李瑱)과 함께 4학사의 일원으로 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이 해 8월, 왕이 원나라에 소환되고 충렬왕이 복위하자 조간(趙簡)·김태현(金台鉉)·김우(金祐)와 함께 전선(銓選)을 맡기도 하였다.
여러 번 옮겨 우부승지 판예빈시사(右副承旨判禮賓寺事)에 오르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올랐다. 밀직사사로 있으면서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또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예부시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거쳤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자 찬성사에 올랐다. 이어 정승이 되었으며 판총부사(判摠部事)를 겸해, 왕명에 따라 무선(武選)을 전주(銓注)하였다.
그 뒤 수문전대제학 영도첨의사사사(修文殿大提學領都僉議使司事)가 더해지고 부원군이 진봉되었으며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호(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號)가 더해졌다.
1313년 영가군(永嘉君)이 되었다. 충숙왕 이후 미묘하였던 대원관계에서 국로(國老)의 자격으로 여러 차례 어려운 정국을 해결하였다.
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의 다섯 왕을 섬기면서 벼슬은 8품의 승사랑(承事郎)에서 시작해 정1품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고, 85세를 누렸으니 당대의 부귀로 견줄 자가 없었다.
아들은 권준(權準)·권종정(權宗頂)·권고(權皐)·권후(權煦)·권겸(權謙)이고, 사위는 안유충(安惟忠)·이제현·순정대군(順正大君) 왕도(王璹)·회안대군(淮安大君) 왕순(王珣)인데 모두 봉군되어 9봉군 집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형(銓衡)을 맡으면서 가산을 늘렸다는 비난도 받았다.
학술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겨 역사학에 있어서는 민지(閔漬)를 도와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하였다.
『사서집주(四書集註)』의 간행을 건의해 간행됨으로써 성리학의 전파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은대집(銀臺集)』 20권을 주석했으며, 아들 권준(權準), 사위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역대 효자 64명의 행적을 기린 『효행록』을 편찬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권부(權溥))]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6년(1280) 경진(庚辰) 문신친시방(文臣親試榜) 병과(丙科) 1위(4/9)
[이력사항]
선발인원 43명
관직 영도첨의(領都僉議)
기타 병자진(丙子進)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권훤(權晅)[麗文]
[조부(祖父)]
성명 : 권위(權韙)
[증조부(曾祖父)]
성명 : 권수평(權守平)
[외조부(外祖父)]
성명 : 노연(盧演)
[처부(妻父)]
성명 : 유승(柳陞)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권단(權㫜)
[고려문과] 고종(高宗) 41년(1254) 갑인(甲寅) 갑인방(甲寅榜) 병과(丙科) 1위(4/4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AD8CD6E4FFFFB1228X0
이명(異名) 권훤(權晅)【補】(주1)
자(字) 회지(晦之)
호(號) 몽암(夢菴)
시호(諡號) 문청(文淸)
생년 무자(戊子) 1228년 (고종 15)
졸년 신해(辛亥) 1311년 (충선왕 3)
향년 84세
합격연령 27세
본인본관 안동(安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밀직제학, 지첨의부사, 찬성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지(晦之). 스스로 몽암거사(夢巖居士)라 하였다.
아버지는 한림학사 권위(權韙)이다. 어머니는 잡직서령(雜織署令) 이영(李榮)의 딸이다.
일찍이 숨어 살 뜻을 가졌으나,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장단현위(長湍縣尉)로 벼슬을 시작하여, 1254년(고종 41) 문하녹사(門下錄事)로 나갔다가 재상 유경(柳璥)의 권유로 과거시험을 보아 급제하였다.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예산(禮山)·승주(昇州)·맹산(孟山)·개천(价川) 등의 부사를 역임한 이래 중외에 기용되었다.
뒤에 동경(東京)을 유수(留守)하면서 중앙에 바치는 능라(綾羅)를 지나치게 거두어 저장하였던 갑방(甲坊)을 철폐해 지방민의 부담을 경감하였다.
또한 백성의 조세를 훔치는 사호(司戶)가 있자 아문에서 격살해 다시는 범법하지 못하게 하였다.
3도의 안찰사를 역임했는데, 경상도안찰사 때에는 진주부사 백현석(白玄錫)과 보주부사(甫州副使) 장전(張悛)의 부정을 탄핵하였다.
국자좨주(國子祭酒)·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옮겼을 때에, 진주지방관 최참(崔旵)이 바친 능라가 조잡해 왕이 읍리(邑吏)를 고문하게 하였더니, “권단이 안렴사가 되어 실값을 감한 까닭”이라 대답해 최참과 함께 파직되었으나, 백성의 폐단을 제거했다는 공으로 복직되었다.
1272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원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279년(충렬왕 5)에는 충청도도지휘사(忠淸道都指揮使)가 되어 전란 중의 산적한 문제를 처리하였고, 당시 미결 중이던 농민의 송사를 맡은 7인 중의 하나였다.
1284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로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김주정(金周鼎)과 함께 과거를 주관해, 권한공(權漢功)·김원상(金元祥)·최성지(崔誠之)·채홍철(蔡洪哲)·백이정(白頤正) 등 명사를 배출하였다.
1287년 밀직학사(密直學士)에 임명되었다.
성품이 남에게 영합하지 않아 3품에 제수된 지 10년이 넘어서야 승지에 제수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랐다. 그러나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해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서 치사(致仕)하고, 뒤에 다시 찬성사(贊成事)로 치사하였다.
권단은 성품이 청렴, 겸손하고 불교를 독신하여 만년에는 선흥사(禪興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권단(權㫜))]
[이력사항]
선발인원 40명
관직 학사(學士)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권위(權韙)
[조부(祖父)]
성명 : 권수평(權守平)
[증조부(曾祖父)]
성명 : 권중시(權仲時)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노연(盧演)
[주 1] 이명 : 『고려사(高麗史)』에 권단(權㫜)과 권훤(權晅)이 혼재되어 기록되어 있음. 권훤이 오기인 듯함.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