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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SCP2/2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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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묵상글.
1차(0701. 22:45), 2차(05:25), 3차(09:05)
7월 2일 묵상글, 1일 22시 45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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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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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9,1-8
주님께서 가장 먼저 보신 것은
중풍 병자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곧 그를 평상에 누여 데려온 친구들의 믿음입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없던 한 사람을
주님 앞으로 데려간 것은
바로 그 곁의 사랑과 돌봄이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남의 믿음’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 기도할 힘조차 없을 만큼
무너져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를 들어 주님께 데려갈 때,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말합니다.
서로를 위한 기도와 돌봄이
이토록 큰 힘을 지닌다고.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몸보다 ‘죄’를 먼저 고치셨다는 점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크리소스토모는 여기서
주님께서 겉으로 드러난 병보다
그 아래 숨은 더 깊은 상처를 먼저 어루만지심을 봅니다.
참된 치유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죄와 상처가 용서받을 때,
비로소 사람은 안에서부터 일어섭니다.
율법 학자들은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하며 속으로 분개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용서를 보이는 치유로 증명하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들고 집으로 가거라.”
한때 그를 실어 나르던 평상을
이제는 그가 들고 걸어갑니다.
치유받은 사람은
자기를 짓누르던 것을 도리어 짊어지고 일어섭니다.
사랑·기쁨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주님께서 건네신 첫마디는 “얘야, 용기를 내어라”였습니다.
치유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나를 들어 데려간 이들과 함께 받는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을 때 도움을 청할 줄 아는가?
나는 누군가를 주님께 ‘데려가는’ 친구인가?
나는 겉의 문제 뒤에 숨은 깊은 상처를 보는가?
나는 “용기를 내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주님,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저를 친구들의 믿음에 실어 보냅니다.
겉의 병보다 깊은 제 상처를 먼저 어루만지시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하시며 저를 일으켜 세우소서.
저 또한 연약한 이웃을 들어 당신께 데려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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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옛 어른들은 ‘갓’을 쓰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갓과 관련된 말도 있습니다. 그중에 “배밭에서는 갓끈을 매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밭에서 갓끈을 고쳐 매면, 혹시 배를 따 먹으려는 행동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행동의 신중함을 가르쳐 줍니다. 아무리 내 마음이 깨끗해도, 다른 사람이 오해할 수 있는 행동은 조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중국에도 갓끈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불이 꺼진 사이, 한 신하가 왕이 총애하는 여인의 뺨을 만졌습니다. 그 여인은 그 신하의 갓끈을 떨어뜨렸고, 왕에게 갓끈이 없는 신하가 범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모든 신하에게 갓끈을 풀어 버리라고 명했습니다. 왕은 신하의 잘못을 드러내어 벌하기보다, 그 허물을 덮어 주었습니다. 취중에 일어난 잘못을 지혜롭게 용서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과 행동은 이렇게 드러내는 데 있지 않고, 때로는 덮어 주는 데 있습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이나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정치인은 말을 늘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사제인 저도 늘 말을 조심하려고 합니다. 제가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결정이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쓸데없이 오해를 살 수 있는 행동도 조심해야 합니다. 또 때로는 작은 허물을 묻고 가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습니다.
지난 5월 18일, 한국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습니다. 스타벅스코리아에서 고객을 위한 행사를 기획했는데, 그 행사 제목이 ‘탱크 데이’와 ‘책상 탁’이었습니다. 한국인에게 5월 18일은 슬프고 아픈 날입니다. 5.18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날입니다. 무고한 시민들이 탱크와 전차를 앞세운 군인들에게 맞고, 죽임을 당한 날입니다. 그래서 5월 18일에 기획된 ‘탱크 데이’라는 말은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책상 탁’이라는 말도 한국인에게는 또 다른 슬픈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형제의 사망 원인을 발표하면서 경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 많은 국민이 그 표현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결국 스타벅스 본사는 공개적으로 사과했고, 스타벅스코리아의 대표는 해임되었습니다. 말 하나, 표현 하나가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신문사에서 일할 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는 것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사목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그때 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본당 사목도 좋고, 신문을 만드는 일도 좋습니다. 본당 사목은 신경 쓸 일이 많지만, 신자들과 함께 지내며 사목의 기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신문을 만드는 일은 홍보를 다니는 부담이 있지만,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보람이 있어서 좋습니다. 본당 사목도, 신문을 만드는 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감사할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이 쉽고 어려운가가 아닙니다. 그 일이 하느님의 뜻을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구름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도,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것도 세상을 위한 것이라면 지나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존경받는 것도 감사이고, 조롱받는 것도 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는 혼자서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중풍병자를 평상에 눕힌 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직접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은 수고와 사랑은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드러납니다. 중풍병자를 평상에 들고 온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들은 큰 기적을 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병을 고칠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도 아닙니다. 다만 아픈 이웃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갈 수 없는 사람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께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됩니다.
우리의 몸은 밭과 같고, 우리의 마음은 그릇과 같습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삶의 향기가 달라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으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미움과 분노와 욕심과 악한 생각을 담으면 우리의 삶은 악한 기운에 이끌려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마음에 담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배밭에서 갓끈을 매지 말라는 말처럼,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 작은 허물은 덮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고 정죄하는 것만이 정의는 아닙니다.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용서가 더 큰 정의입니다. 셋째, 누군가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착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병을 고칠 수는 없어도, 아픈 이웃을 예수님께 데려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 말씀은 중풍병자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상처와 두려움, 죄와 오해, 분노와 미움에 묶여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상처만 붙잡고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미움과 원망의 평상에 누워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기다리시는 사랑의 집으로, 공동체의 집으로, 평화의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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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는 몸이 마비가 된 지라 제 발로 걸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치유에 앞서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사실, 이미 앞의 5-7장에서는 ‘율법에 대한 권한’을, 8장에서는 ‘질병과 마귀와 사람과 자연에 대한 권한’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을 밝히십니다.
당시에 질병은 죄의 벌로 여겨졌고, 이 병자 역시 ‘자신의 죄책감’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감히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 이 놀라운 사실,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아니 이 무뢰하고 불경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마태 9,3)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감히 “죄를 용서받았다.”고 누가 선언할 수 있을까요? 용서할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히에리무스는 말합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중풍병자가 용서받았는지는 용서하실 수 있는 오직 한 분만이 확실히 아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모독이라고 여기는 율법학자들의 “생각을 아시고”(마태 9,4) ‘전지하신 하느님’의 특성을 드러내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테 9,6)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7)
그리고 ‘중풍병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이 아담의 죄로 떨어져 나온 낙원으로 가는 길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힐라리우스).
이렇게 ‘영혼과 육신의 마비’ 모두를 고쳐주시며, 당신께서 영혼과 육신 모두의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마태 9,8).
한편, 오늘 <복음>은 ‘용서’가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셨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처럼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
주님!
평상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평상을 들고 가게 하소서.
평상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 드러내신,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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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신형철 문학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합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다른 이의 고통과 아픔, 슬픔에 온전히 가닿을 수 없는 “한심한 한계”를 인정할 때 공부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고통에 대한 공부”라는 표현이 새삼스럽지만, 이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 공부 없이는 ‘너’를 이해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은 중풍 병자가 겪는 고통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누워 있는 중풍 병자에게 눈길이 쏠려 있을 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지켜 온 율법의 전통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평가하고, 속으로 그분을 죄인으로 낙인찍기에 바쁩니다.
하느님의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법이 향하고 있는 본질과는 한참 멀어져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다른 이들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만들어 온 세계가 무너지는 데에 더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달랐습니다.
그분께는 중풍 병자가 용기를 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다시 일어나 걷는 것만이 중요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까닭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한심한 한계”, 곧 나 자신에게만 쏠리는 눈길을 부단히 넘어서고자 공부하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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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오셨습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하느님의 은총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의 도구로서 모든 이를 향해 흘러갑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모든 이는 이미 선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오셨습니다.
2026년 7월 1일 수요일
Brian McLaren은 창세기 12장 1–4절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묵상하면서, 그 약속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 자신이 속한 복음주의 전통의 배타적 시각을 누그러뜨렸다고 말합니다:
영국의 저명한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egin)은 창세기 12장 1–4절의 말씀을 성찰하며, 그것이 일신교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이단(가장 위험한 오류) 바로잡는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배타적으로 이해하여,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만을 선택하시고 다른 이들은 제외하신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관념을 교정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뉴비긴은 단호히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이미 드러나듯, 하느님께서는 낮과 밤, 땅과 바다, 식물과 동물, 짐승과 인간 모두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곧, 하느님의 축복은 언제나 보편적이었고, 이는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어떻게 살아 계신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넘쳐흐르는 샘처럼 은총을 흘려보내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그때는 아브람이라 불렸던)을 부르실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그의 후손만을 배타적으로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다른 모든 이들이 은총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도구적이며 보편적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어떤 이들을 제외하기 위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이들을 통해 모든 이들이 은총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맥라렌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 종종 배타적으로 해석되어 온 전통을 되짚으며, 성경의 참된 메시지는 언제나 타인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데 있음을 강조합니다. 곧, 하느님의 은총은 선택된 이들을 통해 모든 이에게 흘러가는 보편적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 왔습니다. "손을 들고, 선택된 이들에게 약속된 특권에 '예'라고 응답하기만 하면 곧바로 '새로 난 그리스도인'으로 선포된다."라고요. 이는 마치 하늘나라에서 자신만을 위한 안전과 보장, 그리고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자유이용권을 얻는 것처럼 이해되곤 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이나 요한복음 3장 16절은 흔히 알려진 대중적 해석과는 달리, 배타적 특권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선택하실 때, 그의 후손만을 위한 엘리트적 특권을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위한 깊은 책임과 봉사의 소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곧, 아브람과 그의 후손은 다른 이들을 배제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한 은총과 축복의 통로로 선택된 것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이 강조했듯, 하느님의 축복을 자기 자신이나 특정 민족, 문화, 종교만을 위해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이 언제나 보편적이며, 선택된 이들을 통해 만민에게 흘러간다는 진리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바람은 누구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축복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도구적 축복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를 배제하고 '나'만을 위해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축복하기 위해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도 하느님의 넉넉한 은총의 '우리'(circle) 안에 포함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하느님의 눈에는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곧 나의 이웃입니다. CAC와 리처드 신부님의 매일 묵상에 감사드립니다. 그 덕분에 저는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열어 주시는 새로운 문들을 기대하며, 사랑과 기쁨의 여정을 계속 걸어갈 수 있습니다.
— Bill W.
References
Adapted from Brian D. McLaren, “Seeing the World in Radically New Ways,” The Cottage, Substack, February 28, 2026. Used with permission.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Credits: Tony Sebastian, untitled (detail), 2019,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여러 가지 꽃으로 엮어진 꽃다발처럼,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존재로 온유하게 품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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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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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7.02 05:18
- 심판은 No! 용서는 Yes
단죄와 용서의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다는 것이 구약의 믿음이자 우리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묶고 푸는 권한이 하느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를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단죄도 용서도 인간의 권한이지 하느님은 상관이 없다고 무신론자들은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이것이 하느님의 권한을 인간이 빼앗는 것이거나
인간이 하느님의 위치로 감히 올라가려고 드는 무도함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 같은 인간에게 심판과 용서의 권한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주님께서는 그 권한이 사람의 아들인 당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시고,
마태오복음은 그 권한이 점점 확장되어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게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들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사람이 자기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은 두려워할 일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것 때문에 하느님을 찬양할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남의 죄까지 용서해주는 것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권한 밖의 일이고,
그래서 16장에서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당신 교회의 반석이라는 이름과 함께 처음으로 주어진 권한입니다.
그리고 18장에서는 마침내 보통 사람인 우리에게도 용서의 권한이 주어집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러니까 마태오복음 전체를 놓고 볼 때 심판은 우리에게 여전히 불허되고,
용서는 이제 우리도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으로 확장하여 허용된 것입니다.
심판은 No! 용서는 Yes입니다.
이것이 심판과 용서와 관련하여 머리로 아는 가르침의 내용인데
실제는 곧 이와 관련한 실제의 실천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그 반대인 경우가 많지 않은지,
곧 하지 말아야 할 심판은 자주 하고 해야 할 용서는 겨우 하는 내가 아닌지,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유보된 권한 침범은 너무도 쉽게 하고
이웃에게 하라는 용서는 하지 않는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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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프란치스칸 기도의 영성
프란치스칸 기도의 영성은 단순히 기도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삶이 그리스도의 삶으로 변화되는 여정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 기도는 일정한 시간을 떼어 하느님께 말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 전체가 하느님을 향하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육화의 신비를 오늘 나의 삶 안에서 계속 살아내는 사건이며,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처럼 나 역시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과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도구가 되는 과정입니다.
프란치스칸 기도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바라본 그리스도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성부와 성령 안에서 살아 계시는 분이며, 삼위일체 사랑의 영원한 흐름 가운데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기도는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상호 내어줌과 받아들임, 끊임없이 자신을 선물하는 사랑의 순환 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프란치스칸 신학은 그리스도를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영원한 말씀이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고 그분 안에서 완성된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세상을 떠나 하늘만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현존하는 창조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얻는 일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흔적이며, 모든 생명은 그분의 숨결을 품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칸 기도는 무엇보다 마음의 기도입니다. 머리로 많은 것을 이해하는 것보다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프란치스코는 학문보다 사랑을, 논쟁보다 일치를, 설명보다 체험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마음이 하느님 안에 머물기 시작하면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더 이상 경쟁과 소유의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길가의 작은 꽃 한 송이,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가난한 이의 눈빛, 병자의 신음, 형제의 미소까지도 모두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성사가 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중심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기도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은 점차 하느님께서 세상을 바라보시는 시선으로 바뀌고, 사람을 판단하던 마음은 품어 주는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나를 증명하려는 욕망은 형제를 살리는 사랑으로 변하고, 소유하려는 손은 내어주는 손으로 바뀌며, 지배하려는 권력은 섬김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기도가 이루는 가장 깊은 열매입니다.
프란치스칸 기도는 또한 육화적입니다. 기도는 성당 안에서 끝나지 않고 식탁으로, 일터로, 공동체로, 길 위로 이어집니다. 기도는 무릎을 꿇는 순간보다 형제를 만나는 순간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이를 품어 주는 순간, 먼저 인사하는 순간, 아픈 사람의 손을 잡아 주는 순간, 말없이 기다려 주는 순간,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순간, 기도는 육체를 입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듯이 우리의 기도도 사랑이라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기도와 삶을 결코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에서 복음으로, 복음에서 삶으로" 끊임없이 왕복하였습니다. 복음은 삶을 비추고, 삶은 다시 복음을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기도는 현실을 떠나는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며, 하느님 나라를 오늘 여기에서 살아 내는 능력입니다.
프란치스칸 기도는 관상적이면서도 우주적입니다. 관상은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는 것입니다. 태양은 창조주의 사랑을 노래하고, 달과 별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바람은 성령의 숨결이 되고, 물은 생명의 은총을 전하며, 흙은 겸손을 가르치고, 불은 사랑의 열정을 증언합니다.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의 찬가」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숭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안에서 창조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프란치스칸 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으로 이끕니다. 더 이상 나는 혼자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전체와 함께 호흡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의 기도는 교회의 기도가 되고, 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며, 나의 삶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공간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삼위일체의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성부께 모든 것을 내어드리시는 성자의 순명, 성부와 성자를 하나로 묶으시는 성령의 사랑이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프란치스칸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평화를 얻거나 위로를 경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삼위일체 사랑의 순환 안에 참여하는 것이며, 육화의 신비를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더 이상 하느님이 멀리 계신 장소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께서 거처하시고 일하고 계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 성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부르며, 자신의 존재 전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복음이 됩니다.
프란치스칸의 내적 가난(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붙들지 않음)은 혼자만의 수행이나 자기 비움의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생명에 참여하는 존재 방식입니다. 만일 내적 가난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상호 내어줌 안에서 이해되지 않고, 형제와 자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안에서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칫 자신의 경건함에 만족하는 영적 자기애로 끝나고 맙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한 가난은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는 자유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영원히 서로를 위해 존재하십니다. 성부는 자신을 모두 성자에게 내어주시고, 성자는 자신을 모두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은 그 사랑의 순환 자체이십니다. 그 안에는 지배도 경쟁도 비교도 소유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기쁘다."라는 사랑의 기쁨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적 가난이란 내 존재의 중심을 '나'에게서 '관계'로 옮기는 일입니다.
이 진실은 우리의 일상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더 인정받을 때 마음이 편안하다면, 내 안에서 '내 왕국'이 조금씩 무너지고 삼위일체의 사랑이 숨 쉬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는데도 기쁨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미 나의 가치는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도 공동체의 선을 위해 기꺼이 양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성자의 순명을 배우는 순간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을 이해하려고 그의 삶을 먼저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성령께서 내 마음 안에서 그의 아픔을 품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성공을 시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다면, 삼위일체 안의 상호 기쁨이 내 안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칸의 내적 가난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도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향기를 내어주고도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스스로 먹지 않습니다. 묵묵히 타인을 위해 익어 갑니다. 강물은 자신을 붙잡지 않고 언제나 흘러갑니다. 그래서 수많은 생명을 살립니다. 태양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빛을 내어줍니다. 흙은 누구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씨앗을 품어 줍니다. 프란치스코가 이들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른 이유는 단순한 자연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피조물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삼위일체의 내어주심을 삶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관계의 현장에서 내적 가난은 더욱 분명하게 검증됩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듣는 사람이 되는 것. 이기려고 말하기보다 이해하려고 침묵하는 것. 내 시간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는 것. 가장 좋은 자리를 찾기보다 가장 필요한 자리를 선택하는 것. 누군가의 부족함을 판단하기보다 함께 짐을 들어 주는 것. 실수한 사람을 비난하기보다 다시 시작할 용기를 건네는 것. 이러한 작은 행동들은 모두 삼위일체의 관계가 우리의 육체를 입는 순간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평생 추구했던 '작음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작은 사람이란 자신을 작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이 살아나도록 자기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내적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며, 포기가 아니라 사랑이 흐를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 두는 자유입니다. 결국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의 가장 깊은 열매는 '나는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나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존재하고, 형제와의 관계 안에서 성장하며,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안에서 완성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은 이러한 관계의 흐름 속에서만 살아 움직입니다.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것을 관계 안에서 선물로 받아들이고, 다시 선물로 내어주는 삶입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더 이상 골방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형제의 미소가 기도가 되고, 가난한 이의 손을 잡아 주는 일이 기도가 되며, 나무 한 그루를 아끼는 일이 기도가 되고, 공동체 안에서 먼저 화해를 청하는 일이 기도가 됩니다. 그곳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우리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계속 육화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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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1.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생명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
(시편 36편 9절)
생명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비 오는 날에 부르는 생명의 노래)
거대한 대지의 숨결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온 땅의 핏줄이 되어 산과 들을 적셔 갈 때, 세상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침묵을 풀어 놓고 저마다의 목소리로 생명의 노래를 시작합니다. 한 방울의 물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되며, 바다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비가 되어 돌아오는 그 끝없는 순환 안에서 창조는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은 언제나 그렇게 흘러갑니다. 멈추어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비워 모두에게 내어 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 메마른 땅을 적시고 죽어 가는 생명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한 톨의 씨앗이 어두운 흙 속에서 자기 몸을 찢으며 여린 초록의 손을 내미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발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씨앗은 살아남기 위해 단단한 껍질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기 위해 자신의 형체를 잃습니다. 죽음처럼 보이는 그 허용과 내려놓음이야말로 생명이 시작되는 자리이며, 모든 창조가 다시 태어나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지는 죽음을 품는 곳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하는 거룩한 자궁이며, 흙은 우리에게 사라짐이 끝이 아니라 사랑으로 흘러가는 또 다른 시작임을 조용히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이 거대한 생명의 샘을 자주 잊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이 오르려 하며, 더 크게 보이려는 욕망 속에서 생명은 경쟁으로 오해되고 사랑은 소유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자연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숲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나무들은 같은 빛을 나누고 같은 바람을 마시며 같은 비를 받아들입니다. 큰 나무는 그늘을 만들어 어린 나무를 품고, 낙엽은 썩어 다시 뿌리의 양식이 되며, 마른 가지조차 작은 생명들의 집이 되어 자신의 마지막까지 내어 줍니다. 창조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를 살리는 관계의 복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른 새벽 숲을 채우는 미루나무 잎사귀의 사각거림과 이름 모를 새들의 맑은 지저귐은 모두 생명의 샘에서 길어 올린 투명한 찬미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을 흔들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빛은 소리를 내지 않지만 모든 꽃의 얼굴을 피워 냅니다. 강물은 한 번도 자신을 위해 흐르지 않았고, 태양은 누구를 차별하여 비추지 않았으며, 구름은 누구의 밭인지 묻지 않고 비를 내립니다. 창조는 처음부터 무상의 사랑으로 움직이는 하느님의 성품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언제나 깊은 중심에 머물러 있습니다. 눈에 띄는 화려함보다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떠들썩한 성공보다 침묵 속의 충실함에서, 높은 곳보다 낮은 자리에서 조용히 세상을 살려 냅니다. 나무는 뿌리가 깊을수록 더 높이 자라고, 강은 낮은 곳으로 흐를수록 더 많은 생명을 품으며, 사람은 자신을 비울수록 더 많은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질서이며 복음의 방향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비밀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해를 형제라 불렀고 달을 자매라 불렀으며, 바람과 물과 불과 흙을 한 가족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시적 표현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을 본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의 생명에서 태어났고, 하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며, 하나의 찬미를 부르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작은 풀잎도 함부로 꺾지 않았고, 가장 작은 새 한 마리에게도 형제라 불렀으며, 가난을 가장 아름다운 신부라 노래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비울수록 세상은 더 깊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그 생명의 강가에 서 있습니다. 서로를 귀하게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 하나, 먼저 용서하는 작은 용기 하나, 기다려 주는 침묵 하나, 상처 입은 이를 품어 주는 손길 하나가 모두 생명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줄기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일상 속 작은 친절과 자비를 통하여 오늘도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관계 안에서 선이 흐르기 시작할 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으며, 우리는 그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난 들꽃 한 송이도, 굽이굽이 흘러가는 푸른 강물도,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한 포기의 풀도, 그리고 그 모든 풍경 앞에서 깊은 숨을 쉬는 우리 자신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생명에서 태어난 형제요 자매이며, 하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진 존재들입니다. 별들은 밤을 밝히기 위해 빛나고, 꽃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내어 주기 위해 피어납니다. 사람 또한 사랑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랑을 흘려보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더 깊이 흘러가는 일입니다. 더 높아지는 일이 아니라 더 낮아지는 일이며, 더 강해지는 일이 아니라 더 투명해지는 일입니다. 생명의 샘은 언제나 가장 깊고 가장 낮은 곳에서 솟아오르기 때문입니다. 그 샘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다시 하나의 샘이 되어 메마른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숨결은 대지를 지나 비가 되어 우리의 심장까지 흘러들어 옵니다. 그 숨결이 우리 안에서 사랑이 되고 자비가 되며 평화가 되어 다시 세상으로 흘러갈 때, 우리의 삶 전체는 더 이상 혼자의 노래가 아니라 창조 전체가 함께 부르는 거대한 찬미가가 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생명의 원천은 멀리 있는 하늘이 아니라, 사랑을 내어 주는 모든 관계의 중심에서 지금도 쉼 없이 솟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샘에서 흘러나오는 한 줄기 맑은 물이 오늘도 온 세상을 살아 있게 하고, 우리 또한 그 거룩한 흐름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존재임을 다시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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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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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느 날 기적처럼 따스한 예수님의 손길이!
‘평상에 뉘어’라는 표현을 묵상하다 오래전 여기저기 자주 아파 구급차며 응급실 신세를 지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아직 갈길이 구만리인데, 벌써 이렇게까지 약해지다니,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참으로 비참해지더군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 역시 얼마나 중증이던지 스스로 걸을 수가 없어 당시로는 응급 구조 설비였던 평상에 뉘어 예수님 앞으로 왔습니다.
웬만한 중풍 병자들은 힘겹지만, 안간힘을 다해 홀로 걷고자 애를 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병자는 병세가 깊을 데로 깊어진 말기 중풍 환자였음이 확실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 고장 나고 AS를 받으러 부지런히 병원을 다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초기 증세라든지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으면 대체로 스스로의 힘으로, 아니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을 가는데,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온 병자의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워 보입니다.
중증 중풍 병자의 하루는 어떠했을까요?
보통의 사람들은 기상 알람이 울리면 힘겹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기상 알람이 울려도 스스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워서 떡 먹기인 화장실 한번 가는 것이 세상 어렵습니다.
세수를 할 수 있나, 샤워를 할 수 있나?
매사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도움받는 것도 한두 번이지 도우미의 짜증이 하늘을 찌릅니다.
누군가가 밥 한 숟갈이라도 떠먹여 주면 감지덕지한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쫄쫄 굶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어 백방으로 노력해 보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이런 중풍 병자가 기적적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갖습니다.
측은지심의 주님께서 세상 가련한 그를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그를 눈여겨보시며 격려하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이어서 놀라운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일어나 내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
우리도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중증 중풍 병자 못지않은 심각한 고통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비참한 현실 앞에 서게 됩니다.
아무리 발버둥쳐 봐도 그물에 걸린 가련한 한 마리 물고기처럼 참혹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벽 앞에 서게 됩니다.
다 때려 치고 싶은 순간, 모두 포기하고 싶은 순간...
그러나 결코 때려치우거나 포기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하느님의 시계는 우리 인간의 시계보다 훨씬 더디게 때문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충분히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조금 더 기다려봐야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날 기적처럼 따스한 예수님의 손길이 내 혹독했던 삶을 어루만져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상 따뜻한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애야, 고생 많았다.
그 모진 세월 견디고 기다리느라 애썼다.
이제 고생 끝이니 안심하거라.
이제 나와 함께 새 삶을 한번 멋지게 살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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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1-8)>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증언입니다.>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는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에 구멍을 내고 예수님 앞으로 병자를 내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마르 2,4; 루카 5,19), 마태오는 그것을 생략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기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 것 같습니다.
<지붕에 구멍을 내서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낸 일은 그들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에서 ‘그들’은, 병자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병자 자신의 믿음’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는 생각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맞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준으로는 ‘틀린 생각’이고, ‘악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메시아이신 분으로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려고 오신 분이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라고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시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메시아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못하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을 속이려고 한다면, 죄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쉬운 일입니다.
용서의 결과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일어나 걸어가라.”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쉬운 일입니다.
용서는 죄인 자신의 회개와 합해져야만 완성되는 일이지만, 병의 치유는 병자 자신의 믿음, 응답, 노력과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치유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써 ‘용서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으로 중풍을 고쳐 주셨음을 믿는다면,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씀 때문에, 율법학자들에게 보여 주려고 병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 자리에 율법학자들이 없었어도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하셨을 것이고, 그의 병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설정한 배경과 같습니다.>
3) 사람들이 병자를 데리고 온 것은, 누가 보아도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용서’부터 말씀하셨을까?
병자 자신이 그것을 더 간절하게 원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게 더 중요하고 더 급한 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그의 병이 죄 때문인
것은 아니고, 그의 병 자체가 죄인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실제로 무슨 중병에 걸리게 되면 그것을 계기로 해서 자신의 죄를 더 잘 의식하게 되고,
더 잘 회개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4) 용서도 받고 병도 고친 그 병자는 그 뒤에 어떻게 살았을까?
“집으로 갔다.” 라는 말은, 병에 걸리기 전의 삶으로 돌아갔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일상생활을 회복했다는 뜻일 수도 있는데, 만일에 조금도 달라진 것 없이 원래 살던 대로 사는 것으로 그쳤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어버립니다.
은총을 받았다면 받은 사람답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더욱더 새로워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중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회개하다가, 다행히 치유되어서 퇴원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간절했던 마음’이 슬그머니 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감사기도를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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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자비로운 선하심을 드러내는 복음의 한 장면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죽은 이를 살리시거나 나병환자를 치유하시고, 공개적으로 죄를 지은 여인을 용서하시는 데까지 미칩니다. 또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회개한 죄인들을 받아들이십니다. 이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루카 15장)에서 잘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자비가 두 가지 차원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곧 육신의 병과 영혼의 병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과 그로 인한 사랑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영혼을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은 병자가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음을 아시고, 또 그와 그를 데려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청하지 않았는데 먼저 죄를 용서하셨을까요?
사실 주님은 병자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시며,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십니다.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서 병자는 자신의 죄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럽고 부끄럽게까지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감정은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니다. 율법학자들이 마음속으로 수군거리는 것을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임을 드러내시고, 이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보고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사실 당시 율법 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하느님께만 있다고 믿었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어리석게 그런 생각을 하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왜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생각한 것이 과연 "악한" 것일까요? 액면 그대로만 본다면 악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 생각 깊은 곳을 보게 되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서로의 빚을 탕감해 주고 죄를 용서할 권한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 즉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신 말씀은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품어 주라는 하느님의 명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잠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는 것은 사람의 식견이고, 남의 허물을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은 그의 영광이다."(잠언 19,11). 또 집회서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이 악하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고 서로를 치유할 힘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는데,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그러한 권한을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해 두고 자신들은 자기들의 자리를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라고요!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이미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용서의 권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본질이고, 또한 그 본질(모상)에 따라 창조된 존재가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사랑의 차원에 있어서의 전능하심이지, 세상적인 차원이나 권력의 차원에서의 전능하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하느님)과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선언의 핵심은 사랑과 용서에 있어서의 진정한 "하느님다움"을 의미하는 것이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 절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교만에 눈이 멀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진정한 사랑의 권위로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진실하게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바로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베푸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큰 비참함이 있도다, 교만한 인간이여!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자비 또한 있나이다, 겸손하신 하느님이시여!"
그리고 이번 경우에는 자비가 더 깊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의 육신까지 치유해 주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 예수님은 죄인이 그 영혼과 육신이 모두 용서와 치유를 받아 온전히 기뻐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대한 신뢰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죄인임을 기억하며, 그분의 은총에 마음을 닫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서로를 용서하고 치유할 힘이 주어져 있음을 자주 기억하고 새기며 이를 실생활에서 살아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항구하게 실천해야 진정한 수양이요 수행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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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2.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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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체험> 박영희님이 올리심.
| ++++++++++++++++++++++ 12:10 추가 마태 9,1-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링컨 대통령의 참모가 기도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에 서 주시도록 하기 위해 기도합시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링컨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시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하느님보고 내 편에 서 주시라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걸 이루어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하느라, 내가 하느님 편에 서게 해 주시라고, 그래서 그분이 원하시는 걸 따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데에는 소홀하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내 기도를 안들어주신다고 불평 불만을 늘어 놓으면서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는 전자의 모습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를 용서받았음’을 선언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분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못마땅하게 여기지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 뜻이 옳음을 드러내기 위해 하느님을 끌어들이는 모습입니다. 즉 자기 생각과 뜻이 옳고 상대방은 틀렸으니, 하느님께서 내 편을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반면 예수님은 후자의 모습으로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중풍으로 고통받는 병자의 모습을 보시고, 또 그를 평상에 뉘어 당신 앞까지 데려온 이들의 정성과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단순히 병을 고쳐 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의 죄까지 용서해주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대처가 병자에게는 위로가 되고 그를 당신께로 데려온 이들에게는 보람이 되었겠지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용서와 치유를 통해 그들의 마음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율법학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무엇이 악한 생각일까요? 윤리 도덕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겠다는 생각만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뜻만 고집하는 완고함이 악한 것입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는 나태함과 안일함이 악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 율법학자들이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지 않았다면 예수님께 더 큰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그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해보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시며 그들의 죄까지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발견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던 군중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 눈 앞에서 하시는 일을 보며 마음 속에 ‘경외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 경외심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자기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지지요. 그것이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그리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추종으로 완성된다면 그들도 오늘 복음 속 중풍병자처럼 구원이라는 큰 은총을 입게 될 겁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우리도 그래야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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