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집 제12권 / 묘표(墓表) / 참판 민공 묘표〔參判閔公墓表〕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 뒤편 2리쯤에 큰 봉분이 있으니 예부터 고(故) 참판 민공(閔公) 휘 불탐(不貪)의 묘소라고 전해지고, 족보를 상고해 보아도 역시 그렇다. 참판공의 아들 대사헌 휘 건계(騫繼)가 그 아래에 묻혀 있고, 자손들 가운데 근방에 거주하는 자가 지금까지 끊이지 않아서 대대로 그 선영을 지키고 있다. 후손인 우연(友淵)과 우염(友冉) 등이 함께 상의하기를 “우리 선산에는 예부터 비석과 묘표가 없어서 후인들에게 알려줄 수가 없으니, 어찌 작은 비석을 세워서 지나가는 이들이 공의 묘소임을 알도록 하지 않는가.”라고 하고, 이에 친척인 우수에게 묘표를 부탁해 기록하게 하였다.
공이 살았던 시대는 이미 몇 백 년이 되었는데 옛 전적 가운데 보존된 것이 없다. 다만 세종(世宗) 때의 청백리(淸白吏)를 기록한 것이 세상에 전해지는데 공의 이름이 그 안에 실제로 있고 참판 박팽년(朴彭年)의 이름이 또 그 아래에 있으니, 그 선발된 수준을 알 수 있다. 인재가 성대했던 영묘(英廟 세종) 때 공의 청렴한 명망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중되었고, 도헌공(都憲公 민건계)은 유일(遺逸)로 발탁되어 장절(章節)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아 역시 명망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그 대략이니 또 굳이 많은 사실이 필요하겠는가.
아아! 공의 부자는 대대로 그 훌륭한 덕을 이루고 당대에 이름을 드러냈으나 묘소에 표지가 없어서 후대 사람들이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여러 친척들이 슬퍼한 바이었는데, 우연 형제가 여기에 뜻을 두었으니 선조를 받드는 의리를 깊이 터득했다고 이를 만하다.
숭정(崇禎) 기원 후 110년(1737, 영조13) 친척 우수가 삼가 기술하다.
[주-D001] 참판 민공 : 민불탐(閔不耽)으로, 초명(初名)은 민함(閔緘), 자는 중결(仲潔)이다. 경상 감사(慶尙監司)ㆍ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청렴하여 황희(黃喜)ㆍ맹사성(孟思誠)ㆍ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었다. 아들은 대사헌을 지낸 민건계(閔騫繼)로, 역시 재물에 욕심이 없었다.
[주-D002] 박팽년(朴彭年) : 1417~1456.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집현전 학사로 여러 가지 편찬 사업에 종사했고,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김질(金礩)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고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다.[주-D003] 세종(世宗) …… 있으니 : 청백리(淸白吏)는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ㆍ근검ㆍ도덕ㆍ경효ㆍ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조선 시대에는 제도적으로 청백리제도를 운영하였다. 청백리로 녹선(錄選)되면 품계가 오르고 그 이름이 기록에 남아 추앙을 받았으며, 그 자손들도 부조(父祖)의 음덕(蔭德)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으므로 그 종중과 자손들이 큰 자랑으로 삼았다. 선출 방법은 의정부ㆍ육조의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ㆍ사간원의 수장이 천거하고 임금의 재가를 얻어서 의정부에서 뽑았다. 조선 시대 청백리는 총 217명이 배출되었는데, 《동국문헌(東國文獻)》, 《대동장고(大東掌攷)》, 《청선고(淸選考)》, 《전고대방(典故大方)》 등에 청백리에 관한 자료가 전한다. 세종 때 청백리로 녹선된 자는 정척(鄭陟)ㆍ황희(黃喜)ㆍ맹사성(孟思誠)ㆍ이석근(李石根)ㆍ홍계방(洪桂芳)ㆍ이정보(李廷俌)ㆍ황효원(黃孝源)ㆍ김장(金廧)ㆍ최만리(崔萬理)ㆍ유관(柳寬)ㆍ유겸(柳謙)ㆍ민불탐(閔不貪)ㆍ박팽년(朴彭年)ㆍ이지(李知)ㆍ유염(柳琰) 등이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김진경 (역) | 2018
參判閔公墓表
驪州神勒寺後二里許,有大葬之地,舊傳故參判閔公諱不貪衣履之藏,而考之譜書亦然。參判公之男大司憲諱騫繼葬於其下,子孫居於傍近者至今不絶,世守其先墓云。後孫友淵、友冉等相與謀曰:“吾先山舊無碑表,無以示後人,盍立小石,使過者知爲公之墓乎?” 於是屬筆於宗人以記之。
蓋公之世已累百年,舊籍無存者,而獨世宗朝淸白吏錄有傳於世者,公之名實在其中,朴參判彭年又在其下,其選可知也。夫以英廟得人之盛,而公之淸名爲世所重,都憲公以遺逸見擢,賜諡章節,亦爲聞人。此其大略也,又何必多乎哉?
嗚呼!公之父子,世濟其美,顯名當時,而墓無表識,後之人無得以知焉。此諸宗所慨然,而友淵兄弟有志於此,其可謂深得奉先之義也已。
崇禎後百有十年,宗人遇洙謹述。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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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건(閔騫) (?~1460)
조선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족친(族親)이며 부사과(副司果) 민예달(閔禮達)의 아버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ㆍ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을 지냄.
장절(壯節)@민건 장절(章節) 여흥백(驪興伯)@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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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77권 / 기(記)
조룡대기(釣龍臺記)
이첨(李詹)
친구 민건(閔騫)이 몇 해만에 나를 찾아왔는데, 그 용모와 말소리가 맑고 고상하며 간결하고 담박하여 의젓한 신선같으니, 처음 만나서는 누구인지를 몰랐다. 내가 이상하게 여겨 묻기를, “요즈음 그대는 성인(聖人)의 글을 읽었는가, 도덕을 갖춘 선비와 함께 놀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집에 있으면서 선한 일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는가? 어찌 자네의 행동과 모습이 전일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인가?” 하니, 민건이 말하기를, “나는 뭐 마음먹고 하는 일은 없소. 다만 거처하는 집 서쪽 큰 강가에 낚시터가 있는데, 산이 가로로 있고 뒤가 끊겼으며 들이 넓고 앞이 열려서 굽어보면 깊은 못에 임하는 훈계를 조심하게 되고 쳐다보면 더욱 높아지는 탄식을 일으키게 되오. 내가 일찍이 그 사이에 왕래하며 낚시를 던져 고기를 잡고 칼을 들어 잘게 다져서 맑은 냇물을 길어다 빚은 술로 취하고 배불리 먹으며 혼자서 즐거워하니, 내가 날마다 하는 일이란 이것뿐이오. 여름철 장마가 크게 나서 강물이 넘쳐흐르게 되면, 밭갈고 씨앗 뿌렸던 것이 깨끗이 씻겨 나가고, 편안히 의지하여 살 곳도 없으며 거친 밥도 달게 먹지만 감히 여기를 버리고 다른 데로 가지 못하는 것은 오직 낚시터의 즐거움을 즐기기 때문이오. 나의 행동과 모습이 그대의 말하는 것처럼 변한 줄을 모르오.”라고 하였다. 참으로 그 거처하는 위치가 그 기운을 옮기기에 넉넉함을 알겠다. 그러므로 왕공과 대인은 기운이 성하고 뜻이 가득차며 산림에 있는 선비는 기운이 고되고 마음이 맑으니, 사람이 각각 위치대로 기운도 변하는 것이다. 민자(閔子)의 변한 것은 낚시터가 그렇게 한 것이다. 여기서 엄자릉(嚴子陵)이 천하를 오만하게 여기는 것은 반드시 그가 낚시질하던 칠리(七里) 여울의 도움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되니, 민자의 강변 생활도 먼저 이러한 뜻을 통한 것이다.
민건이 그 낚시터의 이름을 고쳐줄 것을 청하자, 내가 조룡대(釣龍臺)가 어떠냐고 하니 민건이 말하기를, “고기를 낚으면 먹을 수 있지만 용은 낚아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소견이 작소. 옛날에 환룡씨(豢龍氏)가 있고 도룡자(屠龍者)가 있었소. 기르고 도살하였으니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겠소. 대개 용이라는 것은 고기의 큰 것이오. 만일 큰 낚시질을 한다면 고기와 용을 어찌 구별하겠소.” 하며 억지로 권하여 조룡대라고 편액하게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용국 (역) | 1968
釣龍臺記
友人閔騫。輟數年而過余。其容貌辭氣。淸遠簡澹。儼若神仙。初遇之而不識也。余恠問焉。比君讀聖人書歟。道德之士。與之遊歟。抑居家爲善以爲樂歟。何子之擧止。與前日殊異乎。騫曰。余無所用心也。惟吾居第之西大江之濆。有釣臺焉。山橫後斷。野闊前開。俯視而謹臨深之戒。仰觀而興彌高之嘆。余甞往來於其間。投竿得魚。引刀斫縷。挹淸流而釃酒。旣醉飽以自嬉。余之日用。止此而已。當其夏潦方漲。河水汎溢。畊種掃地。無寧巢居。糲飯是甘。而不敢舍玆他適者。惟樂乎釣臺之爲樂也。余自不知擧止之如子之言變也。信夫所居之位。足以移其氣。故王公大人。則氣得志滿。山林之士。則氣苦心淸。人各素位。氣亦變焉。騫子之變。釣臺爲之爾。因知子陵之傲天子。必其七里之助與也。其若閔子之汶上。則先得乎此志者也。騫仍請改其臺名。余擬釣龍臺。騫曰。釣魚可以利其肉。釣龍安用。余曰。子之所見小也。古有豢龍氏。又有學屠龍者。擾而屠之。人其舍諸。夫龍。魚之大者也。若其大釣。魚龍何擇焉。强扁其臺曰釣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