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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시 깊이 들여다보기 / 박선경
인식의 한계를 통찰하는 힘
―마경덕 시인의 신작시
“우선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고 힘이 있다.”
“시를 가지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터득하고 있는 시들이다.”
2003년 세계일보로 등단한 마경덕 시인에 대한 심사평의 일부이다. 등단작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는 마경덕 시인의 대상을 향한 시적 통찰력을 높이 산 심사평이었다. 2005년 첫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신발論」에서 화자는 “묵은 신발 한 보따리”를 내다버리며 버림받은 자신을 발견한다. “막막한 세상”에 선뜻 맨발로 나서보지 못한 자신을 싣고 “파도를 넘어온 한척의 배”는 이제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신발의 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신작시 5편 앞에서 굳이 등단작을 떠올리는 이유는 바로 등단작부터 꾸준히 이어온 그녀만의 독특한 삶의 통찰력 때문이다. 시의 외양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그 내면적 깊이에는 인식의 한계를 갈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발과 자신의 처지를 바꿈으로써 대상에의 감정이입을 시도하지 않는다. 신발의 고단함이나 자신의 일부였음을 위무하기보다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를 발견하고 자신이 “짐”이었음을 통찰한다. 여기서부터 이 시의 중요한 의미는 버려진 낡은 신발의 묘사에 있지 않다. 묵은 신발은 “맘먹은 대로 끌고” 온 불가항력적인 생(生), 즉 망망대해를 항해해온 무한의 시간으로 확장되고, 신발의 주인인 ‘나’는 오히려 지나온 생의 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시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떠나는 묵은 신발들처럼 우리들 역시 이 생(生)은 잠시 짐처럼 옮겨 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녀의 시들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가장 확실한 앎의 세계이자 현실로 명명되는 세계에서 그녀는 언제나 익숙한 정의와 진리의 명제들을 나란히 세우고, 양립할 수 없는 명제들 사이의 모순 속에서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통찰한다. 이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현실 재현이 그녀만의 힘이다.
적막을 오래 쓰다듬은 손바닥에 푸른 물이 들었다. 내 오른쪽 어금니처럼 한쪽이 닳아버린, 부르면 혀가 서늘한 적막. 소란한 틈으로 잠깐 뒤태를 보이고 사라진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불쑥 내 몸을 치고 사라지는 그 짧은 1초의 정전(停電)…내 몸의 플러그가 뽑힌, 그 1초.
떠밀리고 발등을 밟히는 사이, 방심한 내 어깨를 치는 순간, 울컥 혀끝에 닿는 찰나의 암전(暗轉). 그는 인파 속에 나를 홀로 세워두고 길을 끌고 흘러간다. 세상과 불통이 되는 그 시간,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타전할 수 없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그 1초는 적막이 나를 다녀간 시간.
후박나무 빈 가지에 걸린 낮달을 보듯 그의 쓸쓸한 이마를 바라보고 싶었다. 계절이 한 페이지 넘어가고 공원 분수에 물이 마를 즈음, 무릎에 원고지를 펼치고 그가 네모난 칸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한동안 그를 오독(誤讀)하였다.
등 떠밀려간 노래방에서 흘러간 노래를 선곡하고 있을 때, 어쩌다 잡은 마이크를 들고 설쳐대고 있을 때, 그를 바라볼 수 없는 난감한 사이, 그 틈으로 반짝 적막은 출몰하는 것이었다.
―「한때 적막이란 말에 집중한 적 있다」 전문
그녀가 그려내는 현실의 재현은 분명하나 그녀가 시 속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세계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드러나 있는 현실에는 커다란 인식의 틈이 존재한다. 때로는 시적 정황들 속에서, 때로는 언어의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그녀가 벌려놓은 현실의 틈에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너무도 확실하게 알지만 보이지 않았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신작시 「한때 적막이란 말에 집중한 적 있다」에서 ‘적막’과 ‘현실’은 서로의 명제를 교환한다. 즉 외롭고 쓸쓸한 ‘적막’의 순간은 현실 속에서 집중하려고 해도 만날 수 없는 세계이고, 소란한 현실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소음 속의 현실은 적막하고, 집중하고 가닿으려는 소통의 의지는 적막을 향한 채,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그려낸다. 이런 시적 효과는 ‘적막’보다 더 외롭고 고요한 ‘현실’의 모습을 그려내고, 현실보다 더 치열하게 적막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적막’의 순간은 “오래도록 쓰다듬은 손바닥에 푸른 물”이 베이거나 “한쪽이 닳아버린” 채 그리움의 대상이다. 오래도록 집중하려 하지만 “떠밀리고 발등을 밟히”거나 “소란한 틈”속의 ‘나’와 먼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의 주체인 ‘나’와 ‘적막’이 마주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것은 “소란한 틈”이거나 누군가 “내 몸을 치고 사라지는 그 짧은 1초”이며 “떠밀리고 발등을 밟히는 사이”그리고 “방심한 내 어깨를 치는 순간”처럼 수동적인 상태로서 ‘내(나)’가 노출되어 있는 현실이다. 이곳에서 적막은 잠시 “나를 다녀간”다고 시인은 말함으로써 ‘적막’은 이미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능동적 주체임을 암시한다.
‘적막’을 마주하는 순간은 가장 복잡하고 소란한 현실 속에서 고개를 내민다. ‘나’는 이것을 위해 집중하려 했지만 그것은 “오독(誤讀)”이었음을 고백한다. 적막은 “노래방에서 흘러간 노래를 선곡하고 있을 때” 그 “틈”으로 반짝 출몰하듯 현실과 ‘나’의 불일치를 경험하는 순간 드러난다. 마치 군중 속의 고독처럼 적막은 현실과 인식의 상대적 괴리감으로 인한 “틈”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한때 적막이란 말에 집중한 적 있다”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소란한 현실은 적막하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제시한다. 이렇듯 마경덕 시인의 시에는 모순적 상황을 향해 던져진 의문들이 서로 순환한다.
지하도 입구
삼 년 경력 절름발이 사내
졸다가 자다가, 누웠다가 앉았다가 늘 근무태만
돌아앉아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지나가는 여자에게 쌍욕도 하고,
오줌 누러가고 밥 먹으러 가고 비 온다고 눈 온다고
아프다고, 생업을 작파하고 수시로 자리를 뜨는 그 부지런함에
늘 배가 고프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
걸인(乞人)이 되려면 이 모든 것을 통과해야 한다
―「프로의 힘」 부분
외로울 때면 거들을 입었어. 낯선 그 사내보다 외로움이 더 무서웠어. 허술한 아랫배를 꽉 조이고 그 남자를 만나러 나갔지. 여의도광장에서 롤러스케이트를 가르쳐준, 그 변태는 미니스커트를 걸친 내 다리가 예쁘다고 말했어. 팔랑거리는 치마 속, 거들은 나의 힘, 거들이 없는 데이트는 정말 끔찍해. 맛있는 돈가스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디제이의 목소리도 시들해지고, 막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그러나 나에겐 거들이 있지. 자취방 거울 앞에서 간신히 추켜올린 짱짱한 거들, 힙을 받치고 흘러내리는 불안을 받쳐주는 거들. 굵은 팔뚝 보다 여관 앞을 서성이는 사내보다 힘이 센,
―「그때 거들을 입었어」 부분
위의 시 「프로의 힘」에서 “걸인”과 “프로”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이다. 걸인은 남에게 빌어먹거나 구걸을 하는 사람이고, 프로는 전문적이고 능숙한 능력을 말한다. 상반된 두 가지 의미가 불러오는 모순적 상황은 “걸인”과 “프로”의 의미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두 가지의 시적 의미가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지만 이 모순적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반적 의미 뒤편의 심층에서는 일맥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일상적인 관찰을 통해 얻어낸 시인의 직관에는 삶의 깊이가 묻어난다. 시인은 그 사물과 대상의 심층적인 이면에 대해 고심하면서 인식의 한계를 통찰해내기 위해 집중한다. 이것이 마경덕 시인의 시적 특징이다.
이를테면 “악취/배뇨/가려움/추위/소음/먼지/화”를 참아내는 지하도 사내의 모습은 “무릎을 꿇고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채 마치 도를 닦는 수도자의 모습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사내의 행위는 현실 속에서 보면 “게으름”에 가깝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런 게으름이 사내를 “걸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즉, 가장 열심히 남에게 빌어먹기 위해 게으름의 길을 걷고 있는 사내는 이 노력을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반복한다. 여기서 “게으름”과 “부지런함”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의미가 공존하게 된다. 외부 환경의 제약으로부터 참아야 하는 그는 “졸다가/자다가/누웠다가/앉았다가/담배도 피우고/술도 마시고/쌍욕도 하고/수시로 자리를 뜨는”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늘 배가 고픈 것이다. 또한 이것이 사내를 걸인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이 모순적인 상황이 바로 “프로의 힘”이 된다.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인 “걸인” 즉 남에게 빌어먹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또한 ‘프로의 힘’이란 바로 부지런함에 늘 배가 고픈 ‘걸인(乞人)’의 의미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녀의 시에서는 종종 ‘게으른 부지런함’, ‘남에게 빌어먹는 걸인과 프로의 힘’, ‘부지런함의 배고픔’처럼 아이러니한 상황이 드러난다. 자칫 언어유희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시인의 이러한 시선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시적 의미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걸인과 프로는 상반된 인식으로 자리 잡고 있으나 남에게 빌어먹기 위해 부지런함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공통된 행위의 결과를 드러낸다. 하지만 걸인에게서 부지런함이란 “게으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프로의 힘” 역시 진정한 자신의 의지로부터 멀어지는 “게으름”을 내포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새로운 인식의 확장을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마경덕 시인의 비유적 상상은 익숙한 우리의 인식을 향해 언제나 문제제기를 한다.「그때 거들을 입었어」에서도 마찬가지로 “거들”의 의미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외로울 때/불안을 받쳐주는/힘이 센” 거들은 무방비 상태인 “나”를 지탱시켜주는 힘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것의 역할은 “조이고/가르쳐준/단단한/뿌리치”는 강한 힘으로 그려지고 있다. 여성의 속옷을 통해 스스로를 지키고 강력한 힘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오히려 억압받고 있는 주체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여성의 굴레가 자신을 지탱해온 위안이자, 힘이자, 더 나아가 억압처럼 그려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자신을 지탱시킬 수 있었던 강력한 힘에 의해 오히려 지배를 받는 듯한 종결형은 여성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킨다. 마지막 “딸 셋을 키우는 우리 집 빨랫줄에 힘센 갑옷”의 의미는 또 다시 속박, 지탱, 위안으로 반복되고 있는 억압된 여성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해 가을, 젖꼭지가 불거진 개 한 마리가 죽었다. 새끼를 배에 넣고 죽은 떠돌이 개는 언덕배기 개살구나무 밑에 묻혔다. 늙은 개살구나무는 허기진 개눈깔을 눈깔사탕처럼 천천히 빨아먹고 사타구니에 낀 꼬랑지까지 다 녹여먹었다
깨갱깨갱, 언덕길을 지날 때 들었다. 돌멩이에 달아나던 그 울음, 언제 바람을 물어뜯었나. 살이 오른 봄바람의 목덜미에 이빨자국 몇 개 박아놓았나.
밑동에서 지린내가 날아오르고 비루먹은 개살구 발그레 화색이 돌았다. 회춘한 가지마다 꽃눈이 터지고 눈도 못 뜨고 죽은 새끼들 개밥그릇 핥듯 만삭인 봄을 핥더니, 연분홍 혓바닥 스친 자리 고물고물 개살구 솟더니,
봄이 언덕에서 내려오고 해소를 앓는 노인이 자루를 챙겨 비탈을 올라갔다. 담배 한 대 태울 동안 개살구나무, 다 털렸다. 죽은 개를 나무 밑에 묻은 노인이었다.
―「개살구나무」 전문
소리가 몸을 치고 빠져나갔다. 나직한 말이 고함으로 바뀌고 몸집을 키운 소리가 바깥으로 뛰
어 나오며 좁은 통로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 파장으로 성대에 금이 갔던 것.
한때 그의 마음이 나를 다녀간 적 있다. 언젠가 허공으로 흘러가버린 소리들, 그 떨림이 고물 녹음기에서 빠져나와 나에게 고스란히 옮겨 붙었다. 오래 보관된 결이 고른 목소리에 물기가 돌았는데,
어쩌다 한 술 떠먹는 마음도 찬밥처럼 쉬어… 희고 반짝이는 돌기, 꺾이고 굳은살 박인 소리를 녹이려 모과차 한 잔으로 마음을 적시는데, 어느 사이 입술 붉은 말들이 창백해지고 지문이 닳아버린 마음 따라 목소리도 닳았다.
이 통증은 사소함에도 파르르 끓어 울대가 화상을 입었다는 것, 소리가 뭉쳐 소리에 옹이가 박혔다는 것.
―「성대결절」 전문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도 많은 가치의 기준들이 얽혀있다. 문학이 언어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사물의 본질에 대해 묻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현실이란 각자 자기 경험의 시작을 기준으로 나눈 시공간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경험과 시간을 나열해 보면 가치의 혼란은 물론 모순적 상황을 경험하게 되며, 인식의 한계 또한 느끼게 된다. 아마도 시인은 그것들의 한계를 뛰어넘어 ‘나’라는 시공간을 재구성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언제나 불일치 또는 모순, 딜레마적 상황을 전제로 한다. 그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는 갈등적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
마경덕 시인은 이러한 과정을 「개살구나무」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새끼를 가진 어미 개는 언덕배기 개살구나무 밑에 묻히었다. 개의 죽음을 묻고 자란 개살구나무는 봄날 “고물고물 개살구”로 솟아나지만 늙고 병든 노인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다. 하지만 개살구나무 밑에 죽은 어미 개를 묻어준 것은 노인이다. 여기서 시인은 삶과 죽음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은 결코 분절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죽음/봄/해소를 앓고 있는 노인’의 삶과 죽음이 한 공간 안에 그려지는 순간이다.
자연의 순환처럼 현실 속에 일어나는 모든 삶과 죽음의 원인들은 순환한다. 때로는 죽음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 하며, 때로는 생(生) 앞에 소멸하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에 빚을 지기도 한다. 이러한 순환은 몸을 빌어 살아가고 있는 주체로부터 육체를 분리한다.
「성대결절」에서 ‘육체’는 ‘나’라는 존재가 다녀간 흔적의 결과이다. 이 시에서 성대란 몸의 안팎 또는 육체와 존재의 의미를 구분하는 중요한 경계로서 등장한다. 성대는 몸의 일부이지만 몸이 밖의 세상과 소통하는 중요한 입·출구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몸 안의 소리들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동시에 달아나는 소멸의 이미지를 동시에 갖는다. 시인은 소리의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 “마음”으로까지 확장시켜낸다. 몸속에 머물던 마음과 몸 밖을 빠져나간 마음들이 생성·소멸하는 과정을 통해 ‘육체’는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 ‘나’라는 존재에 대해 되묻는다. 결국 ‘나’는 성대결절의 육체를 지닌 채, 몸의 안팎을 넘나드는 고통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소리가 “몸을 치”고 달아난 육체는 그 파장을 간직한 채 몸에 상처를 남긴다. 육체가 소유하는 것은 소리가 아니다. 오로지 육체가 소유하는 것은 통증과 옹이처럼 상처로 남은 소리들뿐이다. 그러니 그녀의 시에서 ‘나’라는 존재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고통일지 모른다. 이미 사라지고 남아버린 빈 집과도 같은 육체 역시 “창백해지고”, “닳아버리고” “통증”뿐인 ‘나’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녀의 시를 읽고 있으면 현실 속에 갇힌 ‘나’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 지적 사유가 늘어날수록 대상의 본질로부터 얼마나 멀어지게 되는가를 마경덕 시인은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이러한 익숙한 현실을 사고의 전복으로서 보여준다. 그녀가 시도하는 전복은 불일치를 보여주기 위한 강렬한 이미지나 또다른 세계의 판타지가 아니다. 우리의 지극히 일상적인 경험의 현실을 재구성한다. 무심코 마주쳤던 삶에서 모순적 상황을 포착하거나, 무심했던 일상의 문제들 앞에서 우리를 딜레마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 속에서 불일치가 일어나고, 뜻하지 않은 결합의 재구성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그녀의 시는 익숙하면서 낯선 세계이며 동시에 분명하다. 아마도 이 문장 역시 그녀의 시적 정황들처럼 모순되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시를 읽고 난 후라면 가능한 감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2010, 봄호)
마경덕 시인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5년 시집<신발論> 문학의전당
'시마을문학대학' 시창작 강사
MBC 롯데문화센터 시창작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