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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원불교의 다른 점
1. 이끄는 말
많이 받는 질문 - 불교와 원불교는 무엇이 다른가?
과거의 불법과 미래의 불법
물건을 파는데 우리 상품의 우수성을 알아야
예) 겔럭시가 아이폰보다 무엇이 다른지?
좋은 기능이 있어도 활용하지 않으면 – 사용해 보고 좋더라
교화가 되지 않는 것은 제품에 대하여 모르든지, 활용을 안 했든지
2. 불교와 관계
1) 불교와 인연
예화) 금강경을 꿈에서 보시고 일산 이재철님께 부탁하여
불갑사에서 구해보았다.
금강경을 보시고
서가모니불은 성인들중 성인이라.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예화) 연원 – 고구려와 고려
예화) 서희의 담판
·연원이신 부처님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 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서품 2>
2) 월명암에 정산종사를 보냄
대종사님은 석두암에 계시면서
정산종사님은 월명암에 – 백학명 스님
※ 앞으로 불교는 원불교 같이 하여야 한다고
내장사로 가면 함께 해보자
3) 불교와의 관계
·석가모니불과 대종사님은 둘이 아니다.
예화) 대종사님과 봉서사
·살림을 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수 성가 하였음
·금강경에 예언
연등불이 서가모니불께 수기(授記)
서가모니불이 2500년 후 예언
금강경) 17. 是故로 然燈佛이 與我授記하사 作是言하사대
汝於來世에 當得作佛하야
號를 釋迦牟尼라하리라 하셨나니라
금강경) 6. 須菩提-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頗有衆生이 得聞如是言說章句하고 生實信不이까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莫作是說하라
如來滅後後五百歲에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에 能生信心하야 以此爲實하리니 當知하라
是人은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에 而種善根이라
已於無量千萬佛所에 種諸善根하야
聞是章句하고 乃至一念生淨信者니라
滅後後五百歲 ~
正法時代 1000년, 像法時代 1000년, 末法時代 1000년,
靈山會上 석가모니불 - 龍華會上 미륵존불, 2010년 북방불교 3036 남방불교 2554
부처님(석존)은 자신이 열반한 뒤에 다가 올 일들을 500년씩 다섯번으로 잘라서,
그 각각의 500년을 1기로 하는 예언을 하셨다.
이것을 오종오백년(五種五百年), 오오백년(五五百年), 오오백세(五五百歲)라 한다
解脫堅固, 禪定堅固, 多聞堅固, 塔寺堅固, 鬪爭堅固 /1956년이 2500년
3. 불교와 다른 점
1) 불상 숭배와 일원상 숭배
·불가 – 불상 - 형체 – 화신불 – 육신 – 서가모니불의 육신 모습
·우리 – 일원상 – 심체 – 법신불 – 영혼 - 천지 만물의 본원
예화) 불상의 유래
진짜 나는 영혼인가 육신인가?
부처님이 육신이 멋있어서 우리가 따르는가?
부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감명을 주는가?
등상불이 죄주고 복주고 하는가?
우주를 움직이는 영이 그렇게 하는 것 – 진리라 한다.
2) 견성(見性) 중심과 견심(見心) 중심
고의 해결 방법,
부처님은 離苦得樂 - 해탈
자성 – 영원, 諸相이 허망한 것, 분별이전
자성 반조
마음(생각) - 괴롭다, 화난다, 편치않다, - 요란하다
경계 발견 – 마음 운전
목적 달성 – 기쁨, 보람, 유익 /행복
목적 반조
자성의 정 혜 계 – 참선 영이 맑아져
마음의 수양 연구 취사
견성과 견심
3) 불교의 혁신 (서품 15~19)
조선불교 혁신론 - 대종사
조선불교 유신론 - 한용운
불교혁신론
① 사·농·공·상을 여의지 아니하고,
또는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불법이 될 것이며,
(선의 혁신 – 무시선 강조)
② 부처를 숭배하는 것도 한갓 국한된 불상에만 귀의하지 않고,
우주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로 알게 되므로
일과 공부가 따로 있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개념)
③ 세상 일을 잘하면 그것이 곧 불법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요,
불법 공부를 잘하면 세상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마음중심)
④ 불공하는 법도 불공할 처소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공하는 이의 일과 원을 따라
그 불공하는 처소와 부처가 있게 되나니,
(불공법 혁신 – 실지불공 강조)
4. 맺음말
1) 원불교는 시대 따라 나온 법
국제화 : ① international(국제) ② internationalization
세계화 : ① globalization ② global society
세계화는 단일화, 국제화는 고유영역 인정
예) 의학 – 한의, 중의, 양의
건축 – 한옥, 양옥
음악 – 국악, 양악
미술 – 한국화, 서양화
사상 – 동양사상, 서양사상
국제화 세계화 되는 시대에 맞는 사상의 출현
2) 방편설과 진리설
어린 아이 – 과자나 노리개 - 우상
큰 아이 – 이름 - 명상
어른 – 경위 설명 - 당체
방편이 시기를 따라 다를 뿐이니라.<인도품 57>
천만 방편으로 제도하여 주시는 것<불지품 3>
과거 시대에는 인심이 대개 미개하므로
모든 교법이 방편과 장엄을 많이 이용해 왔으나,
앞으로는 인심이 차차 밝아지므로
사리를 바로 해석하고 사실로 활용하는 법이 아니면 <도운편 7>
3) [주로 창조하시고, 혹 혁신, 혹 인용(因用) 하셨나니라.] <경의편 39>
유대교와 기독교
바라문과 불교
창조 – 일원상, 사은, 사요, 삼학, 팔조
혁신 – 무시선, 불공법
인용 – 목탁, 불조요경,
4)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
「대종사께서 밝히신 법은 불법(佛法)을 시대화·생활화·대중화하여 부처님 은혜 속에서 영생을 잘 살도록 하는 법이라, <교리편 20>
시대화 – 조직, 교단,
생활화 -
대중화 -
참고 자료
소태산 대종사는 1916년 깨달음(大覺)을 얻은 후 그 과정을 생각하여 보니
순서를 알지 못하겠으나 강연이 말하자면 자력으로 구하는 중 사은(四恩)의 도움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과거의 종교 중요 경전을 참고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나 스스로 의심하고, 스스로 닦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으나, 바른 공부 길의 순서를 알기가 참 어렵구나. 동양 도덕에는 유·불·선의 경전과 근래에 몇 가지 신흥종교의 학설이 있고, 서양에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하니, 그 교리의 강령을 한 번 참고하여 내가 깨친 바와 대조하여 보리라"고 하였다.
대종사는 의형 김광선에게 부탁하여 먼저 인근에서 유서(儒書)인 〈소학〉과 사서(논어, 중용, 대학, 맹자) 등을 구해 대략 보았다. 그리고 동학과 선도를 신앙하는 친지들을 통해 동학의 〈동경대전〉 〈용담유사〉, 선서(仙書)인 〈음부경〉 〈옥추경〉, 기독교 성경인 〈신약〉과 〈구약〉을 구해 대략 열람한 뒤 탄식하였다.
"나의 아는 바는 옛 어른들이 이미 간파하였구나! "소태산 대종사는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에도 전적으로 긍정하지 아니하며 생각했다. '모든 경전의 의지(義旨)가 대개 적절하여 별로 버릴 바가 없으나 그 중에도 진리의 심천(深淺), 시대에 적부적(適不適)이 있구나.
'소태산 대종사는 사월초파일 전날 새벽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어느 절로 갔다. 처음 가보는 절이었으나 산수 경치며 절 모습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 옛집을 찾아온 것 같은 편안한 마음으로 절 구경을 하다가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소태산 대종사를 보더니 큰절을 올리며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래세계의 주세불께서 어찌 이제야 오십니까. 제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인 어른께서는 저를 아십니까. "후천개벽 시대의 주세불께서 천만 방편으로 천하 만민을 널리 제도하려면 이 경전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노인이 보여준 경전은 〈금강경〉이었다.
노인이 말했다. "이 경전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본 적은 없으나 보면 알 것도 같습니다. "소중히 간직하시고 잘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늙은이는 이 책을 전해드리기 위해 이처럼 오랜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해야 할 일이 끝났으니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소태산 대종사는 예사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꿈에서 본 절의 모습과 주변의 산수 경치를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불갑사란 절과 흡사하다고 했다. 불갑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이재철이 찾아오자 그를 보내어 〈금강경〉을 구해오게 했다. 구해온 금강경을 보고 "석가모니불은 성인들 중의 성인이다"고 말했다
그 후 불교의 〈선요〉 〈팔상록〉 〈불교대전〉등의 관련된 서적들을 차례로 본 후 말했다.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장차 회상을 열 때도 불법으로 주체 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 "소태산 대종사는 불법을 주체 삼고자 하는 이유에 대하여 "불법은 천하의 큰 도이다.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 있다"라고 했다.
정산종사께 한 제자가 여쭈었다. "대종사님은 어찌하여 부처님께 연원을 대셨습니까? 수운 선생과 증산 선생은 연원이 없는데요. ""수운 선생이나 증산 선생은 그냥 일어난 분이요, 대종사님은 불법을 주체로 회상을 펴고 교화하시려니 그러신 것이다."
서희의 담판 (세 치 혀로 거란군을 물리침)
993년(성종 12년) 거란의 소손녕 장군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담판이 벌어집니다.
소손녕은 “너희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들이 강점했다. 또 국경을 마주한 우리 대신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니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며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하면 무사할 것”이라고 협박했습니다
이에 서희는 ”우리야말로 고구려의 후예이고, 그런 이유로 국호도 고려라고 칭했다“며 ”거란이 차지한 만주 역시 우리 땅“이라고 당당히 맞섰습니다.
서희는 ”송과 교류하면서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는 것은 여진족 때문이다. 그들이 압록강 인근을 점거하고 있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육로로 교통하기가 어렵다”며 “여진을 내쫓고 압록강 일대를 되찾으면 우리가 왜 너희와 굳이 국교를 맺지 않겠느냐”고 역제안을 합니다. 즉, ‘고려-거란’ 간 국교를 위해서는 양국 사이에 있는 압록강 일대를 안정시켜야하니 이에 협조해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책임을 여진족에게 떠넘긴 셈이죠.
이를 들은 거란 측은 군사를 철수시킬 뿐 아니라, 압록강과 접하는 강동 6주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합니다. 덕분에 청천강에 머물렀던 고려의 경계는 순식간에 압록강까지 확대됩니다.
거란군이 고려에 쳐들어와 처음 공략한 곳은 봉산성(황해도 봉산군)입니다. 이곳엔 고려의 최정예인 선봉군(先鋒軍)이 배치되어 성문을 잠그고 버티는 농성작전을 벌입니다. 거란의 주력군은 기병입니다. 평야와 구릉이 펼쳐진 만주와 황하 일대와 달리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는 상당히 애를 먹습니다. 거란은 봉산성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병력 손실을 꽤 입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고려 조정은 거란이 봉산전투 직후 보낸 항복 서신에 일절 답하지 않았습니다.
조바심을 느끼게 된 거란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안융진과 연주성을 공격했습니다. 당시 안융진에는 발해 왕족 대도수(大道秀)가 1000여 명의 군사와 지키고 있었는데, 결사적인 저항으로 거란군을 막아냅니다. 연주성도 마찬가지입니다. 2400여명의 군사들이 역시 거란군을 패퇴시킵니다. 만주와 북중국 일대에서 승승장구하던 거란으로서는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희가 담판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 적으로 하여금 추가 군사행동에 대한 의지를 꺾어놓은 뒤 비로소 화의(和議) 협상에 들어간 셈입니다. 서희의 역제안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전과(戰果)가 담보됐기 때문입니다.
※ 고려와 발해는 형제의 나라였나? - 고구려의 후예
고구려와 고려
원래 조선은 고대시기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나라 이름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근세에 있었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옛조선이란 뜻으로 고조선이라 부른다. 고조선이란 나라는 존재는 했지만 역사적으로 고증이 어려울뿐 아니라 기록이 미미한 수준이어서 아마도 역사적으로 근세 조선을 더 비중있게 본 결과 이 나라를 조선이라 한다.
백제는 온조왕이 나라를 세워 수백년 이어졌지 만 의자왕 때 나당 연합군에 망하여 없어졌다. 신라가 혼란기를 겪는 시기에 견훤이 백제를 계승한다고 나라를 세우고 백제라고 하였다. 하지만 후세의 우리는 원래의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이를 후백제라고 부른다.
똑같은 이유로 궁예가 세운 나라도 마찬가지로 후고구려라고 하였다. 중국의 나라 명칭도 나중에 똑같은 이름의 나라가 생기면 역사가들이 나라이름에 '후'자를 넣어 후한, 후연, 후금이라 한 것도 처음으로 이름을 쓴 나라가 우선권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은 고조선을 잇는다는 의미이고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선언이다. 이는 한민족의 정통성을 물려 받은 권력으로 인정하라는 말이었다. 이처럼 정통성을 따지는 것은 옛날 만이 아니다. 해방 후 남한이 세운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 이어 임시정부 대한민국을 계승한다는 의미고 북쪽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조선을 잇는다는 선언이다. 한마디로 각자 정통성을 표방하는 것이다.
고려의 국호는 본래 고구려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삼국 시대에 궁예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한때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가 태봉으로 바꾸었다. 이후 태조 왕건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국명을 고려라 하였는데 이것이 500년 간 고려의 국명으로 되었다. 태조 왕건이 국명을 고려로 선포한 것은 『고려사』의 태조 원년 6월 병진조에 기록되어 있다.
대종사 대각을 이루신 후 모든 종교의 경전을 두루 열람하시다가 금강경(金剛經)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서가모니 불(釋迦牟尼佛)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淵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하시고, [장차 회상(會上)을 열 때에도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 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 하시니라. <서품 2>
부처를 숭배하는 것도 한갓 국한된 불상에만 귀의하지 않고, 우주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로 알게 되므로 <서품 15>
우리 회상에서 일원상을 모시는 것은 과거 불가에서 불상을 모시는 것과 같으나, 불상은 부처님의 형체(形體)를 나타낸 것이요,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心體)를 나타낸 것이므로, 형체라 하는 것은 한 인형에 불과한 것이요, 심체라 하는 것은 광대 무량하여 능히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하였나니, 곧 천지 만물의 본원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라, 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태극(太極) 혹은 무극(無極)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이를 일러 자연 혹은 도라 하고,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청정 법신불이라 하였으나, <교의품 3>
시자 사뢰기를 [우리 회상을 과거 회상의 한 종파로 아는 이가 있나이다.] 말씀하시기를 [과거 부처님께서 바라문의 교리를 인순(因循)하신 점이 있고, 예수께서 구약(舊約)을 연원하시었으되, 불교나 기독교를 과거종교의 한 종파라 하지는 않나니라.] 또 사뢰기를 [과거 교법과 우리 법과의 관계는 어떠하나이까.] 말씀하시기를 [주로 창조하시고, 혹 혁신, 혹 인용(因用) 하셨나니라.] <경의편 39>
[신앙을 하는 데 세 가지 구분이 있나니, 하근기는 우치하여 무슨 형상 있는 것이라야 믿고, 좀 지각이 난 이는 우상은 배척하고 어떠한 명상에 의지하여 믿으며, 좀 더 깨치면 명상도 떠난 진리 당체를 믿나니라. 어린 아이는 과자나 노리개로 달래고, 좀 더 자라면 어른의 이름을 빙자하여 이해시키고, 어른이 되면 경위로 일러 주어야 자각하는 것이 각각 지각 나기에 있는 것 같나니라. 지금 시대의 일반 정도는 어른의 이름을 빙자하여 달래야 하는 정도나 앞으로 차차 모든 사람의 지각이 장년기에 드나니 멀지 아니하여 천하의 인심이 일원대도에 돌아 오리라.] <경의편 4>
또 묻기를 [재래 풍속에 부모가 열반하시면 자손이 음양 지리에 의하여 산지에 장사함으로써 모든 정성을 다하며 그로써 자손의 화복을 말하옵는데, 우리 회상에서는 매장이나 화장 간에 적당한 대로 하라 하였사오니 그것이 어떠한 까닭이오니까.] 답하시기를 [부모가 열반하시면 자손이 토질 좋은 산지를 골라 장사하는 것은 좋으나, 거기에다 자손의 화복을 부쳐서 공연한 노력을 과히 하며 혹 무슨 연고가 있으면 백골 천동(遷動)을 자주 하는 것은 옳지 못하나니, 보통 식물도 살아 있는 때에는 땅의 정기를 받으나 말라 죽은 이상에는 땅의 정기를 받지 못하거늘 생기가 이미 떠나서 토석으로 화한 그 백골이 어찌 땅의 정기를 받아서 자손의 화복을 좌우할 수 있으리요. 이것도 또한 과거에 보은 사상을 장려한 한 형식이요 방편인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니라. 또는 화장이 우선 보기에는 좀 박절한 것 같으나 영식이 이미 없고 토석으로 화한 백골에 매장과 화장이 무슨 차별이 있으리요. 불교의 해석에는 사람의 육체는 이 업의 결합된 바라 하였으니 영을 위하여서는 화장하는 것이 도리어 유익될 점이 없지 아니할 것이니라.]<예도편 8>
인이 묻기를 [등상불 숭배는 한갓 헛된 형식일 따름이오니까.] 답하시기를 [등상불을 숭배하여도 그 마음 가짐에 따라 실효를 얻을 수도 없지 않나니, 그 앞에 알뜰히 예배 공양할 때에 그 마음은 청정하여 질 것이며, 그러한 마음으로 착한 인을 지으면 또한 선한 과보를 받을 것이니, 이도 한 방편은 되나니라.] 또 묻기를 [그러하오나 음식 불공은 허례가 아니오니까.] 답하시기를 [마음의 표현을 물질로써 나타내는 한 방편은 되나, 마음의 정성은 마음의 재계(齋戒)와 실다운 사업으로 하는 것이 그 실효가 훨씬 크나니라.]<경의편 50>
학인이 묻기를 [돌아 오는 세상에는 어떠한 법이 제일 주장이 되겠나이까.] 말씀하시기를 [제일 원만하고 바르고 사실된 법이 주장이 되리니, 과거 시대에는 모든 교법이 각각 편협한 지역에서 일어나 그 시대의 인심에 맞추어 성립되었으므로, 비록 일면에 치우치는 법이라도 능히 인심을 지도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는 세상의 교통이 더욱 열리고 시대의 사상이 서로 교환되므로, 사면을 다 통하는 원만한 법과 과불급이 없는 바른 법이 아니면 대중의 마음을 두루 지도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또는, 과거 시대에는 인심이 대개 미개하므로 모든 교법이 방편과 장엄을 많이 이용해 왔으나, 앞으로는 인심이 차차 밝아지므로 사리를 바로 해석하고 사실로 활용하는 법이 아니면 또한 대중의 마음을 지도하기가 어려운 까닭이니라.]<도운편 7>
대종사, 그 동안의 취지와 경과를 백 학명 주지에게 말씀하시니, 그가 크게 동감하여, 자신의 새 임지인 내장사의 일부를 빌려 드릴 터인즉 거기에서 취지를 실현해 보시라고 제의하였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사찰은 공유라, 어찌 한 두 사람의 생각대로 되리요마는, 될 수만 있다면 미래 불교계에 많은 서광(瑞光)이 될 것이라] 하시고, 우선 송 규 등 5인(별록4)을 내장사로 보내시었다.
원기 9년(1924·甲子) 2월에, 대종사, 이리 김제를 거쳐 내장사에 이르시니, 전 날의 의논은 승려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백 학명 주지는 크게 미안히 여기는지라, 대종사 여러 모로 그를 위안하신 후, 몇 몇 제자들을 데리고 서울에 가시어 서 중안이 주선한 집(唐珠洞)에 임시 출장소를 정하시고, 한 달 동안 머무시며 여러 인연들(본장4절 기술)을 얻으시었다. <교사>
만해의 불교유신론과 소태산의 불교혁신론
1. 제안자
1) 만해 한용운(1879~1944)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동학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27세(1905년)때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득도하여 1944년 열반에 들기까지 항일민족운동과 불교개혁에 몰두하였다. '불교유신론'이 쓰여진 때는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이다.
2) 소태산 박중빈(1891~1943)
소태산은 1891년 3월27일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났다. 스승의 지도 없이 1916년(원기 1년) 스스로 진리를 깨쳤다. 첫 사업은 제자들에게 허례허식과 미신을 타파하고 근검절약의 생활습관을 갖게 하며, 교단의 재정기반을 위한 저축조합운동이었다. 1943년에 열반하였고, 불교혁신론'이 쓰여진 것은 1935년(원기 20년)이다.
2. 주요 내용
1) '불교유신론
① 신앙의 면에서, 불교를 진리적 종교, 합리적 철학으로 보아
우상숭배와 미신신앙을 타파하기 위하여서는 ‘가상(假相)의 가상’에 불과한 소회(塑繪 : 癩漢, 十王, 神像 등)를 폐지하고 염불당을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금강경의 말씀처럼 소리와 형상으로서는 여래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다. 부처를 팔아 먹는 '매불(賣佛)사업'에 대한 일대 경종을 울리었다.
② 수행의 면에서 참선을 마음을 스스로 밝히는 길로 보아 참선을 통하지 않고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여 참선수행을 강조하였다.
③ 교육의 면에서는 배움이 없으면 정신적 노예가 된다고 하여
보통학(교양학), 사범학, 외국유학 등 승려교육을 주장하였다.
④ 교화의 면에서는 신문 잡지 경전번역 자선사업을 통한 포교방법을
개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⑤ 행정의 면에 있어서는 승려의 단합된 활동과 분립된 사원을 서로 통할하고
문란한 승규를 바로 잡으며,
주지의 급료제도를 현실에 맞게 합리화시켜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2) 불교혁신론
① 사·농·공·상을 여의지 아니하고,
또는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불법이 될 것이며,
(선의 혁신 – 무시선 강조)
② 부처를 숭배하는 것도 한갓 국한된 불상에만 귀의하지 않고,
우주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로 알게 되므로
일과 공부가 따로 있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개념)
③ 세상 일을 잘하면 그것이 곧 불법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요,
불법 공부를 잘하면 세상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마음중심)
④ 불공하는 법도 불공할 처소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공하는 이의 일과 원을 따라
그 불공하는 처소와 부처가 있게 되나니,
(불공법 혁신 – 실지불공 강조)
세계화 즉 글로벌(Globalization)이란 각 국의 경제가 세계경제로 통합되는 것을 뜻하였다.
즉 국가 간에 존재하던 상품이나 서비스, 자본, 노동, 정보 등에 대한 장벽이 제거되어 세계가 거대한 단일시장으로 통합되는 것을 말하며, 이른바 '국경 없는 세계(Borderless)'를 의미하는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데오도르 레빗 교수가 1983년 ‘Globalization of Markets’란 글을 발표하면서 등장한 말로 알려졌으며, 레빗은 “각국 소비자의 기호에 맞게 상품을 생산·공급하는 다국적 기업시대는 가고, ‘규모의 경제(economics of scale)’를 실현한 글로벌 기업이 활약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로 인해 국경개념이 무너지고 경쟁력 있는 글로벌기업이 세계 소비시장을 석권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세계화(Globalization)는 지구 전체가 마치 한 마을처럼 나라간의 국경을 초월하는 하나의 지구촌이 된 세계를 의미한다.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는 다른 나라의 국경과 고유성을 인정하면서 이루어지는 국가 간의 교류를 말하므로 그 의미가 다르다. 즉 나라간의 국경을 서로 인정하고 보호하면서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다른 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뜻한다.
소규모 부족국가가 아니라면 다른 나라와의 관계가 생기게 될 것이므로 국제화는 오랜 역사의 소산이며,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화로 변화해 가는 일종의 과정일 것이다. 즉 세계화와 국제화의 차이는 국경의 존재를 인정하는가의 여부이며, 이에 따라 국가정책에도 큰 변화가 발생한다. 김영삼 정부시절, 미처 개념정리가 안된 체 ‘이제 세계화’라며 성급히 목청을 높이다가 결국 구호로 끝났으며 임기가 되기도 전에 세계화란 용어자체가 쏙 들어가 버린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