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치기
이상호
겨울에 많이 했던 놀이로 얼음판 위에서 팽이치기, 언덕 위에서 하던 연날리기, 눈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하던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하기, 아랫목에서 다리를 쭉 펴고 하던 다리셈놀이 그리고 구슬치기가 있다.
이 중 구슬치기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주로 남자 아이들이 모여서 눈이 녹은 곳을 찾아 언 손을 호호 불며 구멍 들기(범 들기), 삼각형 따먹기를 많이 했고 양지바른 구석에서 삼삼오오 모여 주먹 안에 숫자를 맞추는 홀짝과 으찌니 쌈(일본말로 1,2,3을 나타낸다)도 많이 했다.
손이 터서 빨간 생살이 나오면 무척 아팠다. 뜨거운 물에 오래 불궈 때를 벗기고 글리세린이나 바셀린을 바르면 다음 날 아물지만, 구슬치기를 하면 또 금방 터진다. 나중에 놀이를 연구하면서 ‘왜 구슬치기를 추운 겨울에 했을까?’란 궁금증이 생겼다. 주로 손으로 하는 놀이인데 다른 계절도 아닌 찬 공기에 손이 그대로 노출되는 겨울에 했느냐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러나 공부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의문을 품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겼기에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보았다.
구슬치기가 소개된 자료에는 놀이방법과 주로 겨울철에 많이 하고 남아들이 했다는 정도에 그칠 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열심히 찾아도 빈 메아리라 아쉬움만 남았고, 마음 속에 의문을 묻은 채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2002년 마을 민속을 조사하기 위해 경북 안동시 풍상읍 서미2리에 현지 조사를 갔는데 남자 어른들이 겨울에 가장 많이 했던 놀이가 '돈치기'란다. 설날 전후로 '돈치기'를 했는데 놀이방법이 놀랍게도 구슬치기와 너무 흡사했다. 심지어 돈이 없는 아이들은 돈과 비슷한 크기의 돌 또는 기왓장을 작게 다듬어서 했다고 했다.
순간 묻어두었던 문제의 실마리와 연결되었다. 물론 겨울철에 구슬치기를 한 이유가 돈치기를 겨울에 했기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다른 근거를 찾을 수 없기에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구슬치기 놀이 방법
구슬치기는 우리나라만 하는 놀이가 아니다. 인도, 네팔을 비롯하여 터키,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했는데 방법은 우리와 비교할 때 단순하다. 놀이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이 했고 다른 측면에서는 돈치기의 방법을 차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구슬치기는 상대방의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딸 수는 없고 누군가 잃는 사람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아이들마다 잘하는 종목이 있다. 구멍들기를 잘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벽치기를 잘하는 아이가 있다. 그 종목에 특출한 능력을 가진 아이와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잃지 않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도망갈 수 없는 막다른 길이 있는데 모든 아이들이 늘 하는 삼각형 따기가 그것이다.
놀이하기 전에 삼각형과 던지는 선을 그린다. 삼각형은 보통 한 변이 15cm 남짓으로 그리는데 놀이하는 아이들이 여럿이면 더 크게, 반대면 작게 그린다. 할 사람은 그 안에 구슬을 넣는다. 5명이 하고 3개씩 넣는다면 모두 15개의 구슬이 삼각형 안에 놓여있게 된다. 여기까지가 준비다.
그다음 누가 먼저 할 것인지 순서를 정한다. 방법은 삼각형 옆에서 던지는 선을 향해 엄지 구슬을 던진다.(돈치기 방법과 동일하다) 던지는 선에서 가까운 사람이 앞 순위가 되는데 선을 넘어가면 아무리 가까워도 후 순위가 되기에 적당한 세기로 던지는 기술이 필요하다. 놀이에서 먼저 하는 사람이 유리하다. 많은 구슬을 딸 수 있고 삼각형에서 가까운 곳을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 나 없이 앞 순위를 차지하려고 하는데 결국 1등과 꼴찌로 나눠질 수 밖에 없다.
순서가 정해지면 차례로 던지는 선에서 삼각형에 모여 있는 구슬을 맞춘다. 엄지구슬(던지는 구슬)에 맞아 삼각형 밖으로 나가는 것을 따 먹게 된다. 맞아서 1개라도 밖으로 내 보내면 엄지구슬이 있던 자리에서 또 맞춰 밖으로 내 보낸다. 같은 방식으로 계속 하다가 잘못하여 따 먹지 못하면 차례가 바뀐다. 다음 사람도 위와 같이 한다. 꼴찌는 따 먹을 것이 없어 해 보지도 못하고 끝날 수 있다.
위의 설명은 기본 방법인데 여기에 규칙이 보태진다.
첫 번째는 따 먹다가 엄지구슬이 삼각형 안으로 들어가면 지금까지 딴 모든 구슬을 토해내고 놀이판에서 빠지게 된다. 따라서 엄지구슬이 삼각형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세게 치거나 끌기(구슬을 맞추고 엄지구슬이 뒤로 나오는 기술)를 한다. 세게 치기는 들어갈 염려는 없지만 엄지구슬이 멀리 가서 다음에 따먹기가 불편한 반면 끌기는 삼각형 주위에서 계속 따먹을 수 있지만 자칫 안으로 들어가는 위험부담이 있기에 상황에 따라 적절한 기술을 구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엄지구슬을 맞추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아이가 구슬을 많이 따 먹은 상태라면 그의 엄지구슬을 맞추면 맞은 사람은 딴 구슬을 모두 상대에게 주고 놀이에서 탈락한다. 따라서 구슬을 많이 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맞추지 못하게 멀리 도망가서 놀이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엄지 구슬을 모두 맞추면 모든 구슬을 다 가지고 놀이가 끝난다. 그러면 맨 처음과 같이 일정한 수의 구슬을 내고 놀이를 다시 시작한다.
삼각형을 해서 10알을 따기는 힘들어도 쌈치기나 홀짝해서 100알을 잃기는 쉽다. 아니 그 반대로 100알을 쉽게 딸 수도 있다. 일종의 모험인데 구슬이 많고 큰 아이들은 한 쪽에 모여서 홀짝이나 쌈치기를 하고 작은 아이들은 가슴을 조이며 지켜본다. 손이 터가며 오랜 시간에 걸쳐 삼각형을 해도 고작 10개도 따기 힘든데 불과 10~20초 사이에 20~30개의 구슬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면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간다.
사라져 가는 놀이
이번 호의 글을 쓰다가 구슬을 만져보고 싶은 생각에 문구점에서 500원 주고 20개를 샀다. 양손에 넣고 흔드니 구슬 부딪치는 소리가 정겹다. 예전에는 다른 아이가 구슬 소리를 내면 몇 개가 손 안에 있는지 거의 정확하게 맞췄었는데 지금은 어림도 없다.
혼자 삼각형을 그려놓고 제일 크고 이쁜 구슬을 엄지 구슬 삼아 해 보았다. 그런데 구슬이 자꾸 미끄러진다. 10개를 넣고 따먹어 보려는데 끌기는 전혀 되지도 않을뿐더러 삼각형 안으로 자꾸 기어 들어가고, 던지는 선을 가깝게 했는데도 영 맞질 않는다. 10개를 따먹는데 거의 20분이 넘게 걸렸는데 혼자 계속해서 그 정도 시간이니 다른 사람이랑 했다면 다 잃었을 것이다.
작고 매끄러운 구슬이 손에 착 달라붙어 끌기, 밀기, 미끄러치기 등 다양한 기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긴 겨울 거의 모든 시간을 구슬치기에 바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전에는 가장 큰 재산이 구슬이었는데 이젠 빛을 잃어 버렸다. 또한 여러 기술이 몸에 배서 자유롭게 구사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필요한데 그럴 시간도 없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더 이상 구슬치기를 하지 않는다. 결국 이 놀이는 60~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어른들의 기억 속에만 있는 놀이인 셈이다. 이렇게 잊혀지고, 조건이 맞지 않고, 환경이 바뀌고, 더 자극적이고 손쉬운 놀이가 예전 놀이를 대체하면서 하나하나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구슬치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걸을 때마다 주머니에서 구슬이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나와 겨울의 중간에 구슬이 끼어 겨울은 춥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끝)
첫댓글 물질적 풍요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인도나 네팔에 가면 아직도 어린 아이부터 청소년까지 구슬치기에 열광한다. 구슬의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내 어릴 때 10원으로 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10원으로 구슬은 문구점에서 5개, 아이들에게 헌 구슬을 사면 7~10개였다. 10원을 얻기 위해 엄마를 졸랐고 귀한 손님이 오시면 10원을 얻었을 때 너무 행복했었다. <오래된 미래>의 부탄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 풍요함을 보여준 좋은 예이다. 구슬치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되살아 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 같아 슬프다. 현덕의 <잃어버린 구슬>이나 포도와 구슬을 바꾸자고 하는 동화가 새삼스럽다. 요즘 아이들이 이런 동화를 이해하기나 할까? 한 번 해보는 구슬치기가 아닌 일상에서 반복되는 놀이로서 구슬치기는 풍요가 앗아간 슬픈 놀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