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단풍이 그림 같은 삼화(三花),봉화(鳳花), 화암(花岩),내산(內山)
여고시절 교내 글짓기 대회에 장원을 하고 그해 그림으로 장원을 한 아이가 내산에 산다는 아이였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고시절 그림으로 장원을 한 그 아이의 그림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 그림 밑에서 한 참을 서서보고는 했었다. 단풍이 비단처럼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공부를 잘 했던 그 아이와는 별로 친하지는 않아서 물어보지도 못 하고 ‘저곳이 어디쯤에 있을까? 그냥 상상으로 그린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세월 지나 결혼을 하고 28살 남해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을 때 가을날 내산을 가보고 그 아이가 그린 곳이 내산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 그 친구가 그때 그린 그림은 상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자기 동네를 그린 것이네....정말 그 그림과 똑 같네.’ 혼자 감탄을 했다.
우리남해는 남쪽이라 기온변화가 그렇게 심하지 않아 단풍이 아름답다고는 크게 느끼지 못 하고 자랐는데 유일하게 초등학교 5학년 가을에 금산으로 수학여행을 가서 단풍의 향연에 눈이 동그래졌었고 나이 들어 찾아갔던 내산에서 단풍의 아름다움을 느끼곤 했다.
그런 내산가는 길에는 ‘바람흔적미술관’도 있고, ‘나비생태공원’도 있고 ‘내산자연편백휴양림’도 있다. 우리남해 관광의 자랑거리가 무더기로 있는 곳이다. 동천인근에 있는 ‘독일마을’이나 ‘원예예술촌’ 못 지 않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할 볼거리들이 즐비한 것이다.
특히 10월말쯤 봉화에서 내산으로 가는 길에 서 있는 단풍나무 가로수는 그 색의 향연이 예술이다. 남편과 나는 가을이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내산 길을 드라이브한다. ‘내산자연편백휴양림’까지 가는 길에서 보는 단풍으로도 먼 곳에 가지 않고도 충분히 단풍놀이가 되는 것이다.
아직 가보시지 못한 않은 사람들은 이번 가을에는 꼭 가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기온차가 심한 내륙의 그 어떤 단풍보다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가을단풍이 있는 곳이 내산이다. 그리고 내산마을에는 우리 현대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정치인 한 분이 있다. 금암 최치환!
만나본 적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흘러 다니는 말을 들어보면 금암 최치환의 지극한 고향사랑은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남해대교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이 현실로 이루어져 고향 사람들이 육지로의 왕래가 자유롭게 해 주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남해로 초청해 남해군민들의 염원을 전달하였으며 다리를 건설하는데 반대하는 수많은 국회의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다리 건설의 필요성을 호소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금암 최치환에게는 국가발전 공적을 높이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65세를 일기로 영면한 선생에게 대한민국 국회 장으로 영결식을 치르고 국립 서울 현충원에 모셨다. 엄정한 역사의식과 치열한 애국심으로 다져진 정치인 최치환 의원은 늘 ‘대한민국이 상식이 통하고 더불어 번영하는 사회가 되려면 사회정의와 국가 가치관의 확립이 절대 필요하다’는 정치적 이념을 확고히 했고 1986년 6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최치환 의원은 ‘삼평삼민주의’를 제시 했다는 것이다. “… 한 민족으로서 우리가 생존해야 될 것입니다. 독립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번영을 누려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족으로서 단결과 존경의 상징은 어디다 둡니까? … 한 나라의 국력은 자본과 교육, 그리고 사회정의입니다. 옳은 것·그른 것·좋은 것·나쁜 것에 대한 가치관, 사회정의가 땅에 떨어져 있는 요즘의 우리 행태를 볼 때, 우리민족은 정신적인 바탕을 물질적인 외형보다 더 소중한 자본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라고 호소를 했다는 글을 읽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더러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서재심씨는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요...” 그럴 때마다,
“나는 좋으면 좋다하고 싫으면 싫다하고 옳으면 옳다하고 그르면 그르다 하고 알면 안다 하고 모르면 모른다 하는데 그런 것이 사람들에게 좋아하지 않는 요소가 된다면 나도 어찌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아직 껌 종이 하나도 거리에 버리는 적이 없는데...왜 싫어할까요?” 그렇게 답을 하고는 했는데 금암 최치환의 연설 중에, ‘... 옳은 것·그른 것·좋은 것·나쁜 것에 대한 가치관, 사회정의가 땅에 떨어져 있는 요즘의 우리 행태를 볼 때, 우리민족은 정신적인 바탕을 물질적인 외형보다 더 소중한 자본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 문구가 가슴에 확 와 닿았다.
또 금암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이 발발하자 치안 책임자인 치안국장은 찾을 길 없고, 내무부장관마저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데 최치환 선생은 내무부 비상경비사 작전계장으로 동원계장이었던 이성우씨와 함께 전국의 경찰에 내무부장관인 비상경비총사령관 명의의 전투명령과 후퇴명령을 하달하는 엄청난 결단을 내렸다고 전한다. 일개 계장으로서 위계질서를 완전히 무시한 결단은 목숨까지도 담보로 하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선생은 나라와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결행했던 것이다. 겨우 27세의 청년 최치환은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목숨을 던지는 것도 헛된 삶이 아니라’는 애국심을 발휘했다. 충신열사가 아니면 결단하지 못했을 영웅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이 대목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이 연상된다. 늘 ‘인명재천’이란 사생관으로 싸움에 임했던 충무공 이순신과 흡사한 모습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