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熱河日記) / 피서록(避暑錄) / 피서록(避暑錄)
기려천(奇麗川)은 만주 사람이다. 그는 성격이 몹시 교만하여 윤형산(尹亨山)을 멸시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으나, 형산은 일부러 알지 못하는 체하고 얼굴에나 말씨에도 겸손할 뿐이다. 대체로 윤(尹)은 기(奇)에 비하여 나이가 20여 세나 많고 벼슬도 역시 조금 높은 편이다. 그러나 그는 한인이라 해서 마치 나그네처럼 된 처지였으니, 그 정세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여천이 거처하고 있는 방이 나의 사관과 문이 마주 보이는 터라, 내가 형산을 찾아서 이야기를 하려면 반드시 여천의 문 앞을 지나치게 되므로 나는 반드시 여천에게 먼저 들른다. 그러면 형산은 나의 뜻을 모르고서 반드시 나의 뒤를 따라서, 그곳에 잠깐 지체했다가 곧 일어서면서 다른 곳에 약속이 있다고 핑계한다. 여천은,
“윤공(尹公)이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야.”
하고,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깔깔대고 웃는다. 그리고 형산도 언젠가 돌아앉아서,
“저 비둘기처럼 생긴 눈이 여태껏 탈을 벗지 못해.”
하면서 악평한다. 만족과 한족 사이의 심한 알력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겠다. 또 어느날 여천이 나에게,
“전에 어떤 산동에 포정사(布政司)로 부임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탐관으로 이름이 높았답니다. 그가 일찍이,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자 / 視民若子
법률은 산같이 엄중하리 / 立法如山
라는 주련(柱聯) 두 구를 지어서 아문(衙門)에 붙였더니, 그날 밤에 어떤 이가 그 끝에다 잇달아서,
우양도 어버이 것 창고도 어버이 것이니 / 牛羊父母倉廩父母
우리는 다만 아들 직분을 지키자 / 共爲子職而己矣
보물도 예서 일고 재산도 예서 생기니 / 寶藏興焉貨財興焉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일까 보냐 / 此豈山之性也哉
라고 썼더라는군요.”
하면서 말을 나직이 한다. 이는 아마 형산을 가리키는 듯싶기에 나는 그 뒤에 우연히 형산더러,
“당신은 일찍이 산동 포사로 부임하신 일이 있소.”
하고 물은즉, 형산은,
“그런 일이 있었지요.”
하였다.
그 뒤에 연경(燕京)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 인사들과 이야기하다가 기(奇)를 아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머리를 흔들 뿐이다. 풍병건(馮秉健)이 홀로 분개하는 어조로,
“점잖은 선비가 어찌 되놈의 새끼를 안단 말이요.”
한다. 나는 또,
“윤형산은 어떤 인물인가요.”
하고 물은즉, 모두들 기쁜 빛으로,
“그는 참으로 백락천(白樂天)과 같은 유의 인물이지요.”
하였다.
열하의 술집들은 몹시 번화하여 연경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다. 바람벽 위에는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이 많이 붙어 있다. 유하정(流霞亭)에는,
높은 이름 좋은 벼슬 이제야 아랑곳가 / 功名富貴兩忘羊
나의 삶이 얼마런고 이 술 한 잔 기울이세 / 且盡生前酒一觴
고운 꽃 삼백 포기 심어 두고 보려무나 / 多種好花三百本
낮은 울타리 비바람에 향내 줄곧 풍기리라 / 短籬風雨四時香
라는 시가 붙어 있다. 또 취구루(翠裘樓)에 들렀더니 역시 벽 사이에 써 붙인 시가 있는데 먹 흔적이 아직도 젖은 듯싶다. 우민중(于敏中)이나 아극돈(阿克敦)의 필치인 듯싶기에 술아범더러,
“이 글씨 쓴 분이 누구냐.”
고 물으니, 그는,
“아까 어떤 손님이 이걸 써서 걸어 두곤 막 나갔답니다. 그러니 그의 성명이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한다. 그 시에 이르기를,
님을 섬겨 하올 맘은 한당만 못잖건만 / 致主初心陋漢唐
이 몸이 늙어 가서 밭집 아비 되었구나 / 暮年身計落農桑
내 낀 숲 속 소 발자국 동문 밖 나는 길에 / 草煙牛跡東郊路
술다락에 높이 누워 저녁 볕을 보내누나 / 又臥旗亭送夕陽
(육유(陸游) 작)
라고 하였다. 이 두 시는 모두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바람을 쏘이면서 한 번 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감개가 무량하게 할 뿐이다. 둘 다 부채에 써 두었다가 돌아와서 윤형산에게 물은즉, 그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으나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윤형산이 나더러,
“고려의 박인량(朴寅亮 고려 문종(文宗) 때 문학가. 자는 대천(代天))이 당신에게 어떻게 되시나요.”
하고 묻기에 나는,
“귀국을 말한다면 모수(毛遂)와 모담(毛聃 미상)과 같은 터수일 것입니다. 저는 애초에 토성(土姓)으로 여덟 집이 나눠졌으므로 관향이 각기 달라서 서로 한 겨레가 되지 못하며, 역시 감히 분양(汾陽)을 통곡(痛哭)할 수도 없는 터수입니다.”
한즉, 형산은 또,
“그러면 강희 연간에 박뇌(朴雷)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자는 명하(鳴夏)요, 역시 조선 사람이라 합디다. 이제 대청(大淸)이 천하를 통일하여 중외가 한 집이 되고 보니 결코 푸른 입술의 혐의란 없을 것입니다.”
한다. 나는,
“푸른 입술의 혐의란 무슨 말입니까.”
한즉, 형산은,
“송(宋)의 원풍(元豊 송 나라 신종(神宗) 때의 연호) 연간에 고려 사신 박인량이 명주(明州)에 이르렀을 때에, 상산위(象山尉) 장중(張中)이 시로써 전송하였더니, 박인량의 답시(答詩) 서문에,
‘꽃 같은 얼굴이 곱게 불을 부니 이웃 여인의 푸른 입술이 움직임을 부끄럽게 하고, 상간(桑間)의 야비한 소리로써 영인(郢人)의 백설(白雪) 곡조를 잇노라.’
는 글이 있었습니다. 언관(言官)이 낮은 벼슬에 있는 장중이 사사로 외국의 사신을 교제함은 부당한 일이라 하여 탄핵했습니다. 신종(神宗)이 좌우에게 ‘푸른 입술’이란 어떠한 고사인가 하고 물었으나, 대답하는 자 없어 조원로(趙元老)에게 물었더니, 원로가 아뢰기를,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어떤 이가 본즉 이웃집 사내가 그 아내의 불 부는 것을 보고,
불 부는 예쁜 맵시 붉은 입술 오물오물 / 吹火朱唇動
섶나무 때고 나니 하얀 팔뚝 드러났네 / 添薪玉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저 얼굴이 / 遙看煙裏面
피는 것이 꽃이런가 안개 더욱 은은해라 / 恰似霧中花
는 시를 읊었답니다. 그 아내가 그의 남편에게 하는 말이, 당신도 어찌 그를 본받지 않느냐고 하였을 때에, 남편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먼저 불을 불면 내 응당 본떠서 시를 지으리라 하고, 이내 읊되,
불 부는 님의 양은 푸른 입술 벌렁벌렁 / 吹火靑唇動
장작을 때고 나니 검정 팔뚝 비꼈구나 / 添薪墨腕斜
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그 상판은 / 遙看煙裏面
무엇에 비할쏜고 구반다(추악한 귀신의 이름)가 이 아니냐 / 恰似鳩槃茶
라고 하였었는데, 이 이야기는 본래는 왕벽지(王闢之)의 《민수연담록(澠水燕談錄)》에서 나왔다 하였습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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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을 말한다면 모수(毛遂)와 모담(毛聃 미상)과 같은 터수일 것입니다.->모담은 실제 모국과 담국으로 모담이란 가상인물이다. 그러므로 전국시대 조나라 평원군 식객인 모수자천의 모수하고는 촌수를 따질 수 없이 먼 관계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古文眞寶 後集 卷四 毛穎傳
太史公曰 毛氏有兩族하니 其一은 姬姓이니 文王之子라 封於毛하니 所謂魯衛毛聃者也요 戰國時에 有毛公毛遂로되 獨中山之族은 不知其本所出이요 子孫이 最爲蕃昌하니 春秋之成에 見絶於孔子나 而非其罪라 及蒙將軍이 拔中山之豪하여 始皇이 封諸管城하여 世遂有名이요 而姬姓之毛는 無聞하니라 穎이 始以俘見하여 卒見任使하여 秦之滅諸侯에 穎與有功이어늘 賞不酬勞하고 以老見疏하니 秦眞小恩哉인저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권 하 癸卯年(B.C. 258)
趙王이 使平原君으로 求救於楚할새 約其門下文武備具者二十人與俱러니 得十九人하고 餘無可取者러니
毛遂自薦이어늘 平原君曰 夫賢士之處世는 如錐處囊中이라 其末이 立見注+하나니 今先生이 處勝門下가 三年於此矣로대 勝이 未有所聞호니 是는 先生이 無所有也로이다 遂曰 臣이 乃今日에 請處囊中耳로리라 使臣으로 得蚤處囊中이면 乃脫穎而出이니 非特其末見而已注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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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년(영조 13)~1805년(순조 5) 반남(潘南)
燕巖集卷之十四○別集 潘南朴趾源美齋著 / 熱河日記 / 避暑錄
熱河酒樓繁華。不減皇京。壁上多名人書畵。流霞亭。題功名富貴兩忘羊。且盡生前酒一觴。多種好花三百本。短籬風雨四時香。又飮翠裘樓。壁間所題。墨痕猶濕。類于敏中阿克敦筆。問諸酒傭知此書主名否。對俄有一客。寫揭纔去。不知書者姓名。其詩致主初心陋漢唐。暮年身計落農桑。草烟牛跡西郊路。又臥旗亭送夕陽。兩詩不知何代誰作。而臨風一咏。令人感慨。俱書扇面。歸問尹亨山則俱以名對。而余又忘之。
尹卿問高麗朴寅亮於君爲何。余曰。猶毛遂之於毛聃。僕是土姓。分爲八望。貫係各異。不相爲族。亦不敢慟哭汾陽。尹卿曰。康煕中。有朴雷字鳴夏。朝鮮人。今大淸中外一家。俱無靑唇之嫌。余問何謂靑唇之嫌也。尹卿曰。宋元豊中。高麗使至明州。象山尉張中以詩送之。朴寅亮答序。有曰。花面艶吹。愧隣婦靑唇之動。桑間陋曲。續郢人白雪之音。有司劾中小官。不當私交外彛。神宗問左右靑唇何事。皆莫能對。乃問趙元老。元老對曰。太平廣記。有覩隣夫見婦吹火。爲詩云。吹火朱唇動。添薪玉腕斜。遙看烟裏面。恰似霧中花。其妻告其夫曰。君豈不能學耶。夫曰。君亦吹火。我當效之。夫乃爲詩云。吹火靑唇動。添薪墨腕斜。遙看烟裏面。恰似鳩槃茶。此出王闢之澠水燕談錄云。
첫댓글 《左传·僖公二十四年(公元前637年)》提到"鲁卫毛聃,文之昭也。"意思是鲁、卫、毛、聃这几个侯国是周文王亲生儿子们的封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