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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전라도(全羅道) 1813
금구(金溝)
귀성사우(龜城祠宇)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윤증(尹拯)
육송사우(六松祠宇) 현종 계묘년에 세웠다. : 김관(金瓘)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공양공(恭讓公)이다. ㆍ김승서(金承緖) 호는 귀암(龜巖), 참봉이다. ㆍ송정기(宋廷耆) 호는 죽계(竹溪), 추향되었다. ㆍ김천서(金天瑞)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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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송사 六松祠
정면 3칸, 측면 3칸
요약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 거야마을에 있는 개항기 언양김씨 관련 사당.
언양김씨(彦陽金氏)인 김관(金瓘)·김승적(金承績)·김승서(金承緖)·김천서(金天瑞)·김인후(金仁后) 등을 모신 사우로 조선조 숙종 때에 건립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1869년(고종 6)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98년 후손들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건물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건물이고, 사당의 앞 좌우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두 채의 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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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송사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길 203-7 (금산면)
언양김씨를 배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에 있다. 본래 육송사에는 송정기, 송정구, 송정모 등 효자로 이름난 송씨 삼형제가 배향되었으나 금구면 불로마을 낙양사로 옮겨갔고, 그 자리에 김관, 김승속, 김승서 등 언양김씨의 뛰어난 선비들을 모시고 있다. 김관은 전라도관찰사와 황해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고 찬성 벼슬에 이른 인물이고, 김승속은 우애와 효심이 깊었던 인물로 어려서 사마시에 급제했다. 김승서는 예번시참봉의 자리에서 뭇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육송사는 숙종 때 창건되어 고종 때 잠시 철폐되었다가 1898년(광무 2) 그 후손들에 의해 복원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맞배지붕 형태의 사당과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 형태의 재실 두 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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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송사 六松祠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 369[삼봉길 203-7]
집필자
이용엽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에 있는 조선 후기 사당.
[개설]
육송사(六松祠)는 본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에 살고 있는 언양김씨(彦陽金氏)의 집안 사당으로 창건된 것이어서 육송사에 모셔져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언양김씨이다. 당초 배향되었던 송씨 3형제[송정기(宋廷耆)·송정구(宋廷耈)·송정모(宋廷模)]가 제외되고, 현재는 묵제 김관(金瓘)[1425~1485]을 중심으로 용암 김승속(金承續)·구암 김승서(金承緖)·축영 김천서·찬촌 김인후가 모셔져 있다.
김관의 호는 묵재(黙齋), 시호는 공양으로 언양인이다. 정치가로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급제하고 1451년(문종 1)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시애의 난에 도총부사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워 적개공신이 되었다. 언양군에 봉함을 받았고, 전라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찬성에 이르렀다. 산수화도 잘 그렸다고 하나 남아 있는 그림이 별로 없다.
김승속의 호는 용암으로 언양인이다. 9살에 소학을 통하고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도를 밝혔으며, 12살~13살에 성리학을 배워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효도와 우애를 겸하여 향린(鄕隣)이 흠모하고 사림이 추앙·존중하였다. 김승서의 호는 구암으로 언양인이다. 맏형 김승적을 따라 공부하여 성리학과 예를 전공하고 천거받아 예번시참봉이 되니 모두가 추앙·존중하였다.
송정기의 호는 죽계로 여산인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인효하고 지조가 단결하였으며, 9살에 『소학(小學)』을 송독하여 선생을 놀라게 하였다. 부모가 병환에 있으면 병세를 살피기 위해 그 변을 맛보았으며 하늘에 기도하고, 부모상에는 형제가 모두 여묘하니 호랑이가 와서 지켜 주었다 한다. 묘 근방에 소나무를 심으니 울창하게 되어 세상에서 효송(孝松)이라 불렀다. 1797년(정조 21) 효로 정려를 받았다.
송정구의 호는 백재로, 송정기의 가운데 동생이다. 부모의 병환에 손가락을 찢어 피를 바쳤고 상을 당하여 여묘하며 소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어느 해 송충이 성하여 효송까지 만연하니 송정구의 형제가 각각 송충을 잡아 씹어 뱉으니 다시는 범하지 않았다 한다. 형을 엄부(嚴父)와 같이 섬기며 효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예로써 가르치니 향인이 흠모하여 송정구와 그 형제를 사(祠)를 세워 육송사에 배향하였다. 정조 때 정려를 받았다.
송정모의 호는 송정으로, 송정기의 막내 동생이다. 나면서부터 성품이 순화하고 효우하며, 학문에 힘써 모든 일에 의리로써 대하여 가히 범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덕원으로 귀양 가게 됨에 항소하여 그 후로는 두문불출하고 과장에 나갈 뜻을 끊으니 향린의 감복으로 사림들이 사(祠)에 배향하였다.
[위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 낙수동에서 금구 방면으로 약 500m쯤 가면 오른쪽에 거야마을이란 표지석이 서 있다. 이 길을 따라 850m 더 가면 거야마을인데 마을 동쪽 200m 지점에 육송사가 자리하고 있다.
[변천]
육송사는 숙종조에 창건되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철거되었다가 1936년 재건되었다. 재건과 동시에 배향된 인물은 김관·김승속·김승서·김천서·김인후로 바뀌었으며, 원래 배향되었던 송씨 3형제는 제외되었다.
[현황]
현재 육송사에는 김관·김승속·김승서·김천서·김인후가 모셔져 있다. 육송사에는 김천서·김인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전자권 편, 『금구읍지』(대흥정판사, 1981)
[지식연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육송사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김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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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묵(成近默)1784년(정조 8)~1852년(철종 3)
果齋先生集卷六 / 祝告文 / 金溝六松祠。栢齋宋公 ▣▣ 春秋享祝文
以古純孝。爲鄕先生。玆値仲 春秋。享祀孔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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果齋先生集卷六 / 祭文 / 金溝六松祠。追享栢齋宋公祭文。
礪良華胄。斗南遺賢。兄弟三孝。多古二連。寅徵孝感。里號孝松。孰非人子。獨全天衷。縣誌可驗。童土攸許。宗黨交稱。有不勝數。猗公篤學。豈惟一善。明經好禮。力行實踐。問業有師。無訟於官。嘉惠一鄕。永世不諼。㫌固統昆。貤亦嫌卑。睠玆松祠。止躋竹溪。曷俾金氏。世德專美。鄕學國庠。公議僉同。追擧闕典。躋享我公。竹溪之左。栢齋是配。靈儀以秩。精靈如在。非後承私。章甫咸慶。庶佑斯文。俾大而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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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20년 병진(1796) 12월 29일(경자)
20-12-29[23] 예조가 충신(忠臣), 효자, 열녀의 별단(別單)에 고쳐서 부표(付標)하였다고 아뢰었다.
○ 효자 정려 별단(孝子旌閭別單)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함양(咸陽)의 고 사인(士人) 하원룡(河元龍)이다. 어미가 병들자 대변을 맛보았고 손가락을 잘라 어미의 목숨을 몇 년간 연장하였다. 병든 아비가 90세가 되어 귀도 먹고 눈도 보이지 않아 사지를 쓸 수 없게 되자 일거일동을 자신이 대신 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1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그 아비가 임종할 때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내 의향을 네가 먼저 헤아렸으니 마음을 알아준 자도 너이고 나를 알아준 자도 너이다.” 하니 향당(鄕黨)이 모두 칭찬하였다. 무신년(1788, 정조12)에 본도(本道) 유생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도신에게 생존 여부를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금구(金溝)의 고 사인(士人) 송정기(宋廷耆)이다. 아비가 병에 걸리자 하늘에 자신이 대신 죽기를 빌고 상이 나자 마실 것을 입에 대지 않았다. 묘 옆에 집을 짓고 3년 동안 죽만 먹고 상복을 벗지 않았는데 뒤에 난 어미의 상에도 똑같이 하였다.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에서 발췌하여 여러 아우들을 가르치자 향속(鄕俗)이 크게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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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宋秉璿)1836년(헌종 2)~1905년(고종 42)
淵齋先生文集卷之四十一 / 墓表 / 竹溪宋公 廷耆 墓表
宋廷耆 1623 1684 礪山 俊在 竹溪
有至性篤行。而浸晦以沒其世者。曰故礪山宋公諱廷耆。字俊在也。公幼而岐嶷。長益莊重。從季舅李公學。文藝夙就。亟被奬許。嘗歎張公藝九世同居。居家敦行孝悌。事親克勤。怡愉順志。貧無以供甘旨。則躳漁獵以養。或遇美味。輒裹歸獻。父母病。嘗糞驗其劇歇。泣禱家廟。以身願代。居憂廬墓。毁瘠踰禮。塚傍素多鬼火。忽不復見。手植松樹。使之成林。內艱夢占吉兆。人謂之孝感。服闋。仍構數椽。扁以永慕。每値夫日。前期齊沐。克盡著存。生日輒倍悲痛。不御酒饌。因心篤友。析箸均分。奴婢田宅。取其老孱荒廢。咸得歡心。庭無間言。國恤居外行素。當孝廟昇遐之日。北望痛哭曰。有爲之主。今已賓天。吾民無祿矣。凡遇國忌。不設酒肉。整衣端坐竟日。嘗於民俗。慨其不淑。遵依呂氏鄕約。陶山立議。嚴立科條。行之數歲。鄕風丕變。傾財賙急。遠近悅服。尤謹於師友之義。服朞於季舅之喪。又於洪判校南立。柳白石楫。盡其若喪之痛。同春先生嘗以愼重之士稱公者。斯可以驗公所造也。臨事斷以義理。凜乎有不可犯者。揚善隱惡。朋儕敬憚。抄出小學家禮等書。作爲一圖。訓示子姪。又諺飜居家雜儀,祭儀及女史中最切者。誨曉婦女。晩築精舍于竹溪村。優遊涵泳。若將終身。疾旣革。以忠孝遺戒子孫。淨掃室堂。設席于南牖下遷卧。而啓手足。以示全歸之意。逌然而逝。卽肅廟甲子三月二十四日也。距其生天啓癸亥正月二十七日。壽爲六十二。是年五月丙子。葬于本縣東面弁山坐酉原。哲宗丁巳。命旌閭。又立祠祀之。其先胄於高麗樞密院副使惟翊。傳至礪良府院君貞烈公松禮。卽公遠祖也。高祖諱氐。縣監。曾祖諱起門。不仕。祖諱濂。武科。考諱台壽。妣全州李氏。忠義衛麟祿女。配韓山李氏。其父定州牧使興祿也。閫範咸備。克配公德。擧五男三女。男擧龍光龍翼龍武龍雲龍。女適申碩輔楊湛趙相天。內外孫曾。多不盡錄。公羣行焯焯可述。而皆源於孝。至於臨歿之際。置蓼莪篇于枕上。披覽流涕。其可謂終身慕也歟。文學亦邃。服事小學以爲人而不知小學。居家何以事親。立朝何以事君。專於內修。不務邊飾。迹其始終。允矣一鄕之善士也。公後孫東燦。謁余以不朽之圖。靡敢以癃廢辭。略書其墓石如此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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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宋秉璿)1836년(헌종 2)~1905년(고종 42)
淵齋先生文集卷之四十一 / 墓表 / 贈敎官宋公 廷模 墓表 *松亭其自號也
宋廷模 1637 1678 礪山 汝範 松亭
余旣爲竹溪公廷耆。記其表陰矣。宋寢郞秉浩。今又以贈敎官公墓文。來請甚懇。公。竹溪之弟也。一門之內。何其多篤行之士也。遂袵斂而敍之。公諱廷模。字汝範。松亭。其自號也。礪山人。高麗府院君貞烈公松禮。爲上祖。屢傳至縣監氐。生諱起門。習讀。生諱濂。奉事。寔公高曾祖。而考諱台壽。娶全州李氏忠義衛麟祿女。以崇禎丁丑十一月三日。生公。公淳和成性。纔學語。能知辨事是非。以善惡爲己勸戒。故深得父母心。十歲失怙。恒侍母側。承順無違。志物之養。便身之方。靡不殫誠。出於外遇異物。輒袖而歸獻。嘗在客中。手指忽痛。急歸則母遘疾卧席。此殆如黔婁之心驚汗流。人皆感歎。湯藥煎粥。日夜親執。不委僮僕。劑藥。必禱天而煎。後亦如之。先嘗而進之。設壇露祝。願以身代。三年如一日。及其證㞃。嘗糞甘苦。斫指灌血。遭艱。哀毁。幾絶復甦。與竹溪公。廬墓三年。餟粥。母稍解文字。嘗好女史。公日夜讀于墓側。涕淚如流。手植松楸。靑亘數里。樵牧相戒以勿剪。名之以孝松亭。服闋。哭諱如袒括。力求其所嗜。必薦而後已。友愛昆季。析箸田宅奴婢。誠諫于母。優歸伯兄。又以公所取。分給諸姪。竹溪公專務學業。疎於治家。公盡誠看護。撫恤寡妹。情事備至。遘癘方危。驚奔救療。不畏侵染。無愧庾袞。敎子姪。有義方。推以敦睦宗族。忠厚接人。恤貧助婚。恒若不及也。公每以早年失學爲恨。不輟講讀。從遊於李草廬之門。激磨淬礪。見重於鄕黨。或欲薦其孝行。公力挽止之。乙卯。禮訟禍作。尤菴先生遠竄德源。公與鄭公祥龍。上章鳴寃。歸鄕杜門。絶意科塲。以明陵戊午四月二十五日。告終。壽四十二。憲廟朝命贈童蒙敎官。與竹溪公。幷享于六松祠。初葬于金溝洪洞浦先麓。後移窆于縣北蛇洞里坐艮原。配羅州羅氏。察訪晟之女。擧二男。秀龍。其次英慧。早殤。嗚呼。孝悌。爲仁之本。而公之篤行。孚感鄕隣。竟蒙天襃。士林又俎豆之。可想公議不泯於百世之下矣。烏不休哉。謹書此。俾鐫諸石陰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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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崔益鉉)1833년(순조 33)~1906년(고종 43)
勉菴先生文集卷之十九 / 序 / 宋氏三孝實紀序
嗚呼。此故孝子宋公竹溪,柏齋,松亭三昆季實紀也。三公生於萬曆天啓間。隱德於湖南金溝縣。敦本篤行。以至孝聞諸鄕邦。鄕士久而誦慕。
憲廟癸卯。設六松祠。俎豆之。並享三公。先王朝又褒揚之。或蒙貤贈。或㫌門閭。其實行表出殆盡。當世名家。靡有憾矣。今伯公後孫東燦。篤於闡先。將謀合錄。付剞劂傳後。踵病門。請一言。余雖隣鬼關。不可抽管於是役。何忍牢拒。夫孝爲行源。實踐於此。百行可推。而名實文質相副者鮮。一門兼全。尤往牒罕見。故晦翁以二連居喪。揭示後學。况三公幷美。難兄難弟。實浮質勝。遺風永久。何其盛也。是卷之行。庶可警起衰俗矣。烏可已乎。伯諱廷耆。仲諱廷耉。季諱廷模。礪山望族。麗朝礪良若松禮。其遠祖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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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朝礪良若松禮->麗朝礪良君松禮
*원문이미지 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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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추천 0 조회 9 11.02.05 10:52 댓글 0
六松祠 沿革
1) 1663年 顯宗 4年 創建(儒敎大事典 參照)
2) 1675年 肅宗 o 額 (恭讓公 龍巖公 龜巖公)
3) 1800年 純祖 竹溪先生 追享
4) 1848年 憲宗 14年 栢齊先生 松亭先生 追享
5) 1868年 高宗 5年 大院君 書院撤廢令 o 撤
6) 1897年 光武 內三門 建立,壇, 碑石을 세워 行事
7) 1936年~1938年 撤廢 70餘年後 六松祠 復院
8) 1975년 先生 遣墟 不老里 洛陽祠 復設.송정기(竹溪先生)송정구(栢
齊先生) 송정모(松亭先生) ,三兄弟 倂享
(配享~恭讓公 龍巖公 龜巖公 杻嶺公 倉村公)
9) 2009年 長次歲月 風磨雨濕 管理不實 崩壞卽前 再重建
1) 1663년 현종 4년 창건(유교대사전참조)
2) 1675년 숙종 o 액 공양공 용암공 구암공
3) 1800년 순조 죽계선생추향
4) 1848년 헌종 14년 백제선생 송정선생 추향
5) 1868년 고종 5년 대원군 서원철폐령 o 철
6) 1897년 광무 내삼문 건립,단을 모시고 비석을 세워 행사
7) 1936년~1938년 철폐 70여년만에 육송사 복원
8) 1975년 선생 유허 불노리 낙양사 복설.죽계선생 백제선생
송정선생 ,삼형제 병향
(배향~공양공 용암공 구암공 뉴령공 창촌공)
9) 2009년 장차세월 풍마우습 관리부실로 붕괴즉전에 재중건
신위배치도
공양공 관
(17세)
구암공 승서
(21세)
용암공 승적
(21세)
창촌공 인당
(26세)
뉴령공 천서
(25세)
신위배치도
요점정리
1675년 공양공 용암공 구암공
1800년 공양공 용암공 구암공 죽계선생
1848년 공양공 용암공 구암공 죽계선생 백제선생 송정선생
1868년 대원군 서원 철폐령
1897년 내삼문 건립,단을 모시고 비석을 세워 행사
1936년~1938년 철폐 70여년만에 육송사 복원
1975년 선생의 유허(遣墟)인 불노리에 낙양사(洛陽祠)를 복설(復設)하여 죽계,
벽제, 송정 삼형제를 병향하기에 이르렀다.
(배향~공양공 용암공 구암공 뉴령공 창촌공)
2009년 붕괴즉전 재중건
http://blog.daum.net/dhsong21/8746719
송정기 - 죽계
송정구 - 백제
송정모 - 송정
동학혁명의 총참모장 김덕명(金德明)장군 (1845.10.29~1895.4.23) 전주종친회
初名은 준상(峻相), 자는 덕명(德明), 호는 용계(龍溪). 동학 금구 대접주(金溝大接主)로 본관은 彦陽 金氏며. 전북 金堤출신으로. 아버지는 한기(漢驥),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다.
1845.10.29일 김제군 수류면(水流面-현 금산면) 삼봉리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학문과 경전에 몰두하였고, 1891년 동학의 접주가 되어 이 지방에 순회 온 제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았다.
이듬해에 전북 삼례에서 벌어진 동학교도 교조 신원운동에 많은 활동과 교도들을 동원, 참가하였으며, 1893년에는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 참가, 여기서 금구포(金溝包)라는 포명과 대접주의 임첩(任帖)을 받았다.
1894년에 전봉준(全琫準)․손화중(孫華仲)․김개남(金開南)과 더불어 호남 창의 소를 설치, 동학운동의 횃불을 올렸는데, 오시영(吳時泳)과 더불어 총참모가 되어 운동 초기부터 전봉준 장군과 함께 주력을 이루었다.
원평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졌는데, 그 휘하의 유명한 접주로 최경선(崔景善)․김봉년(金奉年)․김사엽(金士曄)․김봉득(金鳳得)․유한필(劉漢弼)과 같은 패기에 넘치는 젊은이가 있었다.
전봉준과 행동을 같이하여 전봉준이 공주 공략에서 3~4일동안 공방전을 벌이다가 12월5일 牛禁峙에서 패하여 원평에 와서 재수습할 때 그와 함께 동학군을 재편성, 12월 21일 8천명의 병력으로 포진, 일본군과 항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몸을 피해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安靜寺洞)에 숨었다가, 1895년 1월1일 원평(院坪)의 수성군(守城軍)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押送), 일본 영사가 주관하는 임시 재판(臨時裁判)에 회부되어 4월 23일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成斗煥)과 함께 51세로 처형(處刑)되니, 공의 정충(精忠)과 대의(大義)는 역사에 빛나게 되었고, 묘소는 김제군 금산면 장흥리안정사동(安淨寺洞) 巳坐기슭에 있으며 배(配)는 전의 이씨며 아들은 洪九 昌九둘을 두었다.
참고문헌 : ◉ 天道敎創建史 ◉ 東學과 東學亂 ◉ 綠豆將軍全琫準 ◉ 東學思想과 東學革命 ◉ 東學革命과民衆 ◉ 辛巳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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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
낙양사는 송정기, 송정구, 송정모 등 3형제의 위패를 봉안한 조선시대 사당으로 김제시 금구면 청운리 불로마을에 있습니다.
이 마을은 여산송씨의 집성촌으로 그 시조는 고려 때 진사를 지낸 송유익입니다.
김제에는 여산송씨가 두 개의 파로 나뉜다.
금구면 입향조인 송윤 후손의 불로파와 청하면과 백산면 일대에 주로 거주하는 여꾸다리파다.
낙양사 외에 불로파와 관련된 문화재로는 금구면 낙성리 하사마을에 송윤유허비와 절부문화유씨정려가 있습니다.
여꾸다리파 관련 문화재로는 백산면 상리 자학동에 병암서원이 있습니다.
낙양사는 1910년(순조 4) 지어졌으나 그 역사는 훨씬 깊다.
본래 1675년부터 동도면 상학리 학천사에 위패를 모시다가 화재 소실 후, 수류면 거야마을 육송사로 옮겨 배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탓에 다시 육송사에서 옮길 수밖에 없게 됐고, 마침내 지금의 낙양사에 배향하게 되었습니다.
낙양사에 배향된 3형제는 모두 효자인 데다가 성품이 올곧기로 유명했습니다.
첫째인 송정기는 호랑이도 감복할 정도였다고 전합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초막을 짓고 무덤 곁에서 생활했는데 호랑이가 그를 보호했습니다고 합니다.
둘째 송정기는 형을 부모와 같이 따르고 섬기며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막내 송정모는 효와 우애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에 뛰어났고 그 성정이 대나무와 같았습니다고 합니다.
현재 봄가을로 낙양사에서는 3형제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청운4길 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