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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경기(京畿) 1798
지평(砥平)
운계서원(雲鷄書院) 계사년에 세웠고 숙종 갑오년에 ‘용문(龍門)’이라 사액하였다. : 조성(趙晟) 호는 양심당(養心堂)이며, 벼슬은 의영 고령(義盈庫令)에 이르렀다. ㆍ조욱(趙昱) 명종조의 유일(遺逸) ㆍ신변(申忭)ㆍ조형생(趙亨生) 호는 둔곡(遯谷)이며, 벼슬은 현감이고 욱(昱)의 손자이다. ○ 위의 두 위[二位]는 처음에 함께 배향[幷亨]하였다가 숙종 갑오년에 전교로 인하여 따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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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계서원(雲鷄書院) 계사년에 세웠고 숙종 갑오년에 ‘용문(龍門)’이라 사액하였다.->운계서원(雲谿書院)
*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 경기(京畿) / 지평현(砥平縣)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운계서원(雲谿書院) 선조(宣祖) 갑오년에 세웠다가 숙종 갑오년에 사액(賜額)하였다.
明臯全集卷之八 明臯徐瀅修汝琳著 / 記 / 重修雲溪鄕賢祠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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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숙종 39 1713 계사 康熙 52 - 砥平의 雲鷄書院에 享祀되다.(龍門書院으로 賜額) ->운계서원(雲谿書院)
숙종 39 1713 계사 康熙 52 - 砥平의 雲鷄書院에 享祀되다.(龍門書院으로 賜額) ->운계서원(雲谿書院)
*운계서원(雲鷄書院) 계사년에 세웠고 숙종 갑오년에 ‘용문(龍門)’이라 사액하였다.->운계서원(雲谿書院)
*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 경기(京畿) / 지평현(砥平縣)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운계서원(雲谿書院) 선조(宣祖) 갑오년에 세웠다가 숙종 갑오년에 사액(賜額)하였다.
明臯全集卷之八 明臯徐瀅修汝琳著 / 記 / 重修雲溪鄕賢祠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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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 경기(京畿) / 지평현(砥平縣)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운계서원(雲谿書院) 선조(宣祖) 갑오년에 세웠다가 숙종 갑오년에 사액(賜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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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門先生集卷之六 / 附錄 / 龍門書院賜額致祭文
中廟在宥。眞儒輩出。大禍中搆。棟樑摧折。紛紜狼狽。背師諱學。蘭芷亦化。涇渭一濁。疇能確然。惟乃弟兄。抱經空谷。身困道亨。心存括囊。誠切築場。默護士氣。潛扶國脈。尙功誦義。砥柱松柏。自悼之詞。聞者興悲。含光蘊寶。百世俟之。鶴聞九皐。旌招屢聘。銅儀復修。雅樂待正。間出糠粃。世或驚倒。倘究其用。曷量其造。丘園歲暮。師友周旋。講磨精微。菀有緖言。龍門一曲。山高水長。生焉考槃。沒而祭饗。多士來籲。表章敢緩。錫名竝祀。眷爾興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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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1661년(현종 2)~1733년(영조 9)자빈(子賓) 전주(全州) 문정(文靖)
屛山集 卷八 / 應製文 / 龍門書院賜額致祭文
中廟在宥,眞儒輩出。
大禍中構,棟樑摧折。
紛紛狼狽,背師諱學。
蘭芷亦化,涇渭一濁。
疇能礭然,惟乃弟兄。
抱經空谷,身困道亨。
心存括囊,誠切築塲。
默護士氣,潛扶國脉。
尙功誦義,砥柱松栢。
自悼之詞,聞者興悲。
含光蘊寶,百世俟之。
鶴聞九臯,旌招屢騁。
銅儀復修,雅樂待正。
間出糠粃,世或驚倒。
儻究其用,曷量其造?
丘園歲暮,師友周旋。
講劘精微,菀有緖言。
龍門一曲,山高水長。
生焉考槃,沒而祭鄕。
多士來籲,表章敢緩。
錫名竝祀,睠言永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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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1661년(현종 2)~1733년(영조 9)자빈(子賓) 전주(全州) 문정(文靖)
屛山集卷之八 / 應製文 / 龍門書院賜額致祭文
中廟在宥。眞儒輩出。大禍中構。棟樑摧折。紛紛狼狽。背師諱學。蘭芷亦化。涇渭一濁。疇能礭然。惟乃弟兄。抱經空谷。身困道亨。心存括囊。誠切築塲。默護士氣。潛扶國脉。尙功誦義。砥柱松栢。自悼之詞。聞者興悲。含光蘊寶。百世俟之。鶴聞九臯。旌招屢騁。銅儀復修。雅樂待正。間出糠粃。世或驚倒。倘究其用。曷量其造。丘園歲暮。師友周旋。講劘精微。菀有緖言。龍門一曲。山高水長。生焉考槃。沒而祭鄕。多士來籲。表章敢緩。錫名並祀。睠言永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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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芸 1517 1572 龍門書院賜額致祭文 致祭文 李觀命 屛山集 -> 龍門書院 顯廟壬寅 賜額祭文。[知製敎李殷相製進。] 賜祭文* 李殷相 一蠹集
*趙昱 1498 1557 龍門書院賜額致祭文 致祭文 李觀命 屛山集 조성,조욱 형제의 양평 서원이다. 임훈,임운 형제의 안의 서원은 아니다. 안의 용문서원은 1662년(현종 3)에 사액되었으니 1714년(숙종 40)에 사액된 양평 용문서원과 상관없다. 이름이 같으면 같은 자료인가. 수정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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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집 제8권 / 응제문(應製文) / 용문서원에 사액하며 치제하는 글〔龍門書院賜額致祭文〕
중종께서 인정을 베푸시어 / 中廟在宥
참된 학자들이 배출되었으나 / 眞儒輩出
큰 사화에 얽혀 / 大禍中構
나라의 대들보가 꺾였도다 / 棟樑摧折
어지러이 낭패하여 / 紛紛狼狽
스승을 배반하고 학문을 꺼리니 / 背師諱學
자질 있는 인재들도 변화하여 / 蘭芷亦化
옳고 그름이 한결같이 흐려졌도다 / 涇渭一濁
누가 확고할 수 있었는가 / 疇能礭然
오직 형제뿐이었네 / 惟乃弟兄
빈 골짜기에서 경서를 끌어안고 / 抱經空谷
몸은 고단했으나 도는 형통하였도다 / 身困道亨
마음은 주머니를 묶는 데 두고 / 心存括囊
정성은 스승 추모에 절실하였고 / 誠切築塲
묵묵히 선비의 기상을 수호하여 / 默護士氣
조용히 국맥을 부지하였도다 / 潛扶國脉
공덕 높이고 의리 칭찬한다면 / 尙功誦義
지주이자 송백이로다 / 砥柱松栢
스스로 애도하는 글에 / 自悼之詞
듣는 사람은 슬픈 마음 일어나도다 / 聞者興悲
자취 감추고 보배를 간직한 채 / 含光蘊寶
오랜 세월을 기다렸네 / 百世俟之
학 울음소리 구고에서 들려오니 / 鶴聞九臯
조정에서 예우하여 여러 번 불렀다오 / 旌招屢騁
동의를 다시 개수하고 / 銅儀復修
아악이 바르기를 기다렸네 / 雅樂待正
겨와 쭉정이를 내놓아도 / 間出糠粃
세상 사람들 더러 화들짝 놀랐더니 / 世或驚倒
만일 끝까지 등용했다면 / 儻究其用
그 성과를 어찌 헤아리리 / 曷量其造
노년에 은둔한 곳에서 / 丘園歲暮
사우들이 서로 어울렸네 / 師友周旋
강마하여 정미해졌나니 / 講劘精微
완연히 말은 두서가 잡혔도다 / 菀有緖言
용문산 한 굽이 / 龍門一曲
산은 높고 물은 길었도다 / 山高水長
살아서는 은거했고 / 生焉考槃
죽어서는 고향에서 제사 받네 / 沒而祭鄕
많은 선비 와서 호소하니 / 多士來籲
표창을 감히 늦추리오 / 表章敢緩
편액을 내리며 제사 올리니 / 錫名並祀
돌아보며 길이 탄식하노라 / 睠言永歎
[주-D001] 용문 서원(龍門書院)에 …… 글 : 용문 서원은 용문(龍門) 조욱(趙昱, 1498~1557)과 형 양심당(養心堂) 조성(趙晟, 1492~1555)을 함께 배향한 서원이다. 조욱은 조광조(趙光祖)와 김정(金淨)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과거에 뜻을 버리고 조성과 함께 경기도 삭녕(朔寧)에 들어가 강학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정(二程)에 비유하였다. 1714년(숙종40)에 사액하였다.[주-D002] 어지러이 …… 꺼리니 : 기묘사화 이후 상황을 송나라 때 형서(邢恕)의 경우에 비교한 것이다. 형서는 원래 정호(程顥)의 제자였으나 뒤에 정호를 배반하고 당시 권세가에게 빌붙어 도리어 스승을 해쳤다. 어떤 이가 정이(程頤)에게 “형칠(邢七)이 오랫동안 선생을 시종했으나 전혀 지식이 없으므로, 후일 매우 낭패할 듯하다.”라고 하니, 정이가 대답하기를 “전혀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의리(義理)의 마음이 이욕(利慾)의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宋元學案 卷30》[주-D003] 마음은 …… 두고 : 괄낭(括囊)은 속에 감춰 두고서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역》 〈곤괘(坤卦) 육사(六四)〉에 “주머니를 묶으면, 허물도 없고 칭찬도 없을 것이다.〔括囊, 无咎无譽.〕”라고 하였다.[주-D004] 스승 추모 : 원문의 ‘築場’은 스승이 돌아가신 뒤에 무덤가에 움막을 짓고 거상(居喪)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공자께서 돌아가시자 3년이 지난 다음 문인들이 짐을 챙겨 돌아갔지만, 자공(子貢)은 다시 돌아와 묘 마당에 집을 짓고서 홀로 3년을 거처한 다음에 돌아갔다.〔昔者孔子沒, 三年之外, 門人治任將歸……子貢反, 築室於場, 獨居三年然後歸.〕” 하였다.[주-D005] 스스로 애도하는 글 : 《용문집(龍門集)》 권1 〈스스로 애도함〔自悼〕〉을 가리킨다.[주-D006] 학 …… 들려오니 : 구고(九皐)는 벼슬하지 않고 은둔한다는 뜻이다. 《시경》 〈학명(鶴鳴)〉에 “학이 깊은 구덩이에서 맑은 울음 쏟아내니, 그 소리가 하늘에까지 사무치도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하였다.[주-D007] 동의를 …… 기다렸네 : 동의(銅儀)는 간의대(簡儀臺)를 말하는데, 조성이 흠경각(欽敬閣)을 고치고 간의대를 개수한 일을 말한다. 또 조성은 음악〔律呂〕에도 정통하였다. 《承政院日記 肅宗 39年 4月 4日》 《국역 명종실록 6년 10월 2일》[주-D008] 겨와 …… 놀랐더니 : 이황(李滉)이 조성에 대해 “당시 그를 한 번 등용한 것은 단지 그의 먼지나 겨, 쭉정이였을 뿐 그의 지극한 것은 아니었으며, 내가 질문하여 배우고자 한 것도 그의 한 점 남은 단서였을 뿐 그 전부는 아니었다.”라고 칭송하였다. 《退溪集 卷43 養心堂集跋》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황교은 채현경 오항녕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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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고(明臯) 서형수(徐瀅修)1749년(영조 25)~1824년(순조 24)유청(幼淸), 여림(汝琳) 오여(五如) 달성(達城)
明臯全集卷之八 明臯徐瀅修汝琳著 / 記 / 重修雲溪鄕賢祠記
祀先賢於東序。鄕先生沒而祭於社。皆古禮也。而其爲禮。雖有輕重。所以觀德行而風世敎。則爲義一而已。如永嘉書院之中宣尼配伊洛。梧溪書院之主先聖從忠賢。此東序之遺義也。石慶有家行而齊有石相之祠。欒布有淸德而燕有欒公之社。此祭於社之遺義也。我東則又有異焉。自朝廷宣額者。謂之書院。自鄕社私享者。謂之祠。若將以祀之輕重。較品藻之軒輊。固矣哉。奚有於是。苟有明信。澗谿沼沚之毛。潢汙行潦之水。可薦於鬼神。可羞於王公。曾序與社之謂足以考其德乎。雲溪之有鄕賢祠。刱於孝廟甲午。而合祀養心堂趙公。葆眞庵趙公。持平申公者也。及肅廟甲午。一鄕多士䟽請宣額。則有司之論。以爲額固可宣。而故持平之爲己卯名賢。特傳聞也。未見有實蹟可据。宜別建一祠以妥之。上可之。於是宣額曰龍門書院。以祀養心葆眞兩趙公。而申公則與遯谷趙公亨生。癡軒權公景裕。幷享於別建之鄕賢祠。盖自是而院與祠始分。然其爲朝廷之所許而非士林之私享則均也。祠之建且近百年。春秋之牲醴。晨夕之絃誦。非不亦藏厥事而講厥職。惟是風雨攸萃。上漏下穿。廟貌浸以傾圮矣。遯谷公五世孫時復。慨然於斯。鳩財募工。積費營度。乃以今年仲春。修舊增新。木以章計者幾。瓦以枚計者幾。丹靑黝堊以斤計者幾。梓匠役徒以口計者幾。而屋凡幾間。墻凡幾尺者煥然。而不數月改觀矣。旣而走京師。徵記於不佞。夫義取於東序。則臨以夫子而配以先賢。可也。義取於祭社。則卽其鄕而或專享或幷享焉可也。今尊夫子於學。而院與祠。皆以其鄕之先賢先師主享焉。則院亦祠也。祠亦院也。又何輕重之可論。况是祠之設。亦出朝廷之旨依。而三賢之德行。爲可以風動世敎云爾。則額雖未及宣。是亦一院也。夫旣院矣。則古有司之必別於申公。得無隘乎。雖然。此天意也。非人爲也。夫以雲溪之多賢。而鄕人所以崇報之者。一院而止。可乎。苟止一院也。又安知不地拘於列侑。禮難於追躋。有當祀而不祀者乎。然則是祠之在是鄕。名雖祠而實則院也。其軆貌之重。當與龍門匹美共傳。而不僅與鄕先生私享之宇。同其興替而已。於是乎時復不特能孫。亦能儒矣。不佞先祖忠肅公。於遯谷公。有深契。甞與往復質難於出處行藏之義。而遯谷公爲暫屈其志。赴禮山之檄。其於記是祠也。曷敢以不文辭。至於三賢名德之卓異。有國史野乘在。此不復及。獨於祠院離合之故。不厭反復。使百世之下。瞻禮起敬。知所重而悠久不廢云。
명고전집 제8권 / 기(記) / 운계(雲溪)의 향현사(鄕賢祠) 중수기〔重修雲溪鄕賢祠記〕
선현(先賢)을 동서(東序)에 향사하는 것과 향선생(鄕先生)이 죽으면 사(社)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모두 고례(古禮)이다. 예의 위상(位相)에 비록 경중(輕重)이 있기는 하나, 덕행을 본받아 세교를 교화한다는 측면에서는 그 의미가 한가지이다.
예컨대 영가서원(永嘉書院)에서는 공자를 중앙에 모시고 이락(伊洛)의 제현들을 배향하였고, 오계서원(浯溪書院)에서는 공자를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충현(忠賢)을 종향으로 모셨으니 이것은 동서(東序)에서 선현을 향사하던 유풍이다. 석경(石慶)에게 가문에서 물려받은 덕행이 있자 제(齊)나라에서 석상사(石相祠)를 세워주었고, 난포(欒布)에게 청덕(淸德)이 있자 연나라에서 난공사(欒公社)를 세웠으니 이것은 향선생을 사(社)에서 제사 지내던 유의(遺義)이다.
우리 조선에서는 또 이와 다르다. 조정에서 사액한 곳을 서원(書院)이라고 하고, 향사(鄕社)에서 자체적으로 제향하는 곳을 사(祠)라고 한다. 제사의 경중을 가지고 등급의 고하(高下)를 비교한다면 실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진실로 마음이 광명(光明)하고 신의(信義)가 있으면 개울이나 못에서 자라는 물풀과 웅덩이나 도랑에 있는 물도 귀신에게 바칠 수 있고 왕공에게 올릴 수 있다. 어찌 서(序)와 사(社)에 대해 그 덕을 고과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운계의 향현사는 효종 갑오년(1654)에 창건되어 양심당(養心堂) 조공(趙公), 보진암(葆眞庵) 조공(趙公), 지평(持平) 신공(申公)을 합사하였다. 숙종 갑오년(1714)에 이르러 온 고을의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사액을 청하였다. 이때 예조의 논의가 “사액함이 마땅합니다. 다만 고(故) 지평(持平) 신공(申公)이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단지 전설만 내려올 뿐 근거할 만한 실제 사적이 없으니, 사우(祠宇) 하나를 별도로 건립하여 모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성상이 허락하였다.
이에 ‘용문서원(龍門書院)’이라고 사액하고, 양심당과 보진암 두 분의 조공을 제향하고, 신공은 둔곡(遯谷) 조형생(趙亨生), 치헌(癡軒) 권경유(權景裕) 두 분과 함께 별도로 향현사를 건립하여 다 같이 제향하였다. 대개 조선에서는 이때부터 서원과 사(社)가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인정한 것이요 사림에서 사사로이 향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향현사를 건립한 지 거의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봄가을의 향사와 아침저녁의 강학에 있어 또한 그 일을 훌륭히 행하고 직무를 잘 닦아 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비바람에 많이 시달려 지붕은 새고 바닥은 패어져 사당의 모습이 점차 허물어졌다. 둔곡공(遯谷公)의 5세손 조시복(趙時復)이 이것을 안타까워하여 재정을 모으고 목수들을 모집하여, 갖은 노력을 기울여 경영한 끝에 올해 중춘에 향현사를 중수하여 새로 단장하였다.
들어간 목재가 몇 장(章)이며, 사용된 기와가 몇 매(枚)이며, 단청(丹靑 물감)과 유악(黝堊 석회)이 몇 근이며, 목수와 일꾼들이 몇 명이었다. 그리고 건물의 규모 총 몇 칸과 담장의 길이 총 몇 자가 훤칠하게 되어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면모가 일신되었다. 이윽고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무릇 의미를 동서(東序)에서 취하였다면 공자를 모시고 선현을 배향하는 것도 좋고, 의미를 향사(鄕社)에서 취하였다면 그 고을에 나아가 전향(專享)을 하거나, 병향(幷享)을 하는 것도 좋다. 지금 성균관과 향교에서 공자를 모시고 있기에 서원과 사(祠)에서는 모두 자기 고을의 선현과 선사들을 주향(主享)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서원도 사이고, 사도 서원이다. 또 어찌 경중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이 향현사를 설립한 것도 역시 조정의 뜻을 따른 것이요, 삼현(三賢)의 덕행은 세교를 진작시킬 수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사액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서원이다. 이미 서원이나 다름없고 보면 앞서 예조에서 굳이 신공을 따로 떼어 논한 것은 협소한 견해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는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다. 현철이 많이 배출된 운계에 이 고을 사람들이 존숭할 공간이 하나의 서원에 그친다면 말이 되겠는가. 만약 하나의 서원에 그칠 뿐이라면, 지역이 열유(列侑 서원에 여러 유현을 향사함)에 구애되고 예법상 추제(追躋 추가 배향)가 어려워 마땅히 향사해야 할 분임에도 향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또 어찌 보장하겠는가.
그렇다면 이 고장에 있는 이 향현사로 말하면 이름이야 사(祠)라고 붙였지만 실제로는 서원이니, 그 체모의 중대함으로 말하면 마땅히 용문서원과 아름다움을 나란히 하여 함께 전해져야 하고, 한갓 향선생을 자체적으로 향사하는 사우와 흥망성쇠를 같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조시복은 훌륭한 자손일 뿐만 아니라 또한 훌륭한 선비이기도 하다.
나의 선조 충숙공(忠肅公)은 둔곡공과 깊은 친분이 있어 일찍이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의 의리에 관하여 편지를 주고받으며 거취를 물었다. 그리하여 둔곡공이 잠시 자신의 뜻을 굽히고 부름에 응하여 예산에 부임하였던 것이다. 이 향현사에 대한 기문을 쓰는 일에 어찌 감히 내가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양을 할 수 있겠는가.
삼현(三賢 신변, 조형생, 권경유)의 우뚝한 명덕(明德)으로 말하면 정사(正史)와 야사(野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와 서원이 분리된 전말에 대해서는 가급적 자세히 말하여, 백세 뒤에도 예를 올리고 존경심을 일으켜서 소중하게 여겨 영원히 폐하지 않아야 할 것임을 알게 한다.
[주-D001] 운계(雲溪)의 향현사(鄕賢祠) 중수기 : 【작품해제】 이 글을 지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운계(雲溪)는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龍門面)이다. 기묘명현을 모신 운계서원(雲溪書院)과 그 자손 및 무오명현 권경유(權景裕)를 제사하는 향현사(鄕賢祠)가 분리된 전말을 서술한 다음, 조시복(趙時復)이 향현사를 중수한 전말을 기록하였으며, 이어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서원과 사(祠)가 분리된 기원이었음을 밝혔다. 운계서원과 향현사는 현재 덕촌리(德村里)에 남아 있다. 참고로 운계서원은 본래 숙종조에 용문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는데, 헌종 4년(1838) 이곳에 행차한 헌종이 서원의 이름에 불교의 색채가 있다는 이유로 운계서원이라 고치라고 명하여 이로 인해 이름이 바뀌었다. 글의 말미에는 명고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이 명고의 선조 서성(徐渻)과 조형생(趙亨生)의 교분 때문이었음을 서술하여 두 집안의 오랜 세의를 은근히 밝혔다.[주-D002] 선현(先賢)을 …… 것 : 선현은 한 나라가 존경하는 국로(國老)를 가리킨다. 동서(東序)는 태학이다. 《예기》 〈왕제(王制)〉에 “하후씨는 동서에서 국로를 봉양하였다.[夏后氏養國老於東序]”라고 하였고, 〈소목(昭穆)〉에 “선현을 서학에 향사한다.[祀先賢于西學]”라고 하였는데, 원나라 학자 웅화(熊禾)가 “예서에 ‘선현을 동서에서 향사한다.’ 및 ‘향선생을 사에서 제사 지낸다.’는 문장이 있다.[禮有祀先賢于東序及祭鄉先生于社之文]”라고 하였다. 이 말은 뒤에 명나라 구준(丘濬, 1421~1495)의 《대학연의보》에 인용되었다. 명고가 인용한 것은 《대학연의보》의 말일 것으로 추정된다.[주-D003] 향선생(鄕先生)이 …… 것 : 향선생은 한 고을에서 존경받는 원로이다. 옛날 늙은 관원이 치사(致仕)한 뒤 고향으로 내려올 경우, 중대부(中大夫)로서 치사한 사람은 태사(太師)로 삼고 사(士)로서 치사한 사람은 소사(少師)로 삼아 향학(鄕學)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 노선생들을 향선생이라고 한다. 《儀禮 士冠禮》 향선생이 죽으면 사(社)에 제사를 지낸다는 말은 예서(禮書)에 있는 것은 아니고, 당나라 한유(韓愈)의 〈송양소윤서(送楊少尹序)〉에서 “옛날에 이른바 ‘향선생이 세상을 떠나면 사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람에 해당하는 것이리라.[古之所謂鄉先生沒而可祭於社者, 其在斯人歟!]”라고 한 데 근거를 둔 말이다. 이 말은 뒤에 명나라 구준의 《대학연의보》에 인용되었다. 명고가 인용한 것은 《대학연의보》의 말일 것으로 추정된다.[주-D004] 영가서원(永嘉書院)에서는 …… 배향하였고 : 영가서원은 절강성 온주(溫州) 서남쪽에 있는 서원으로, 남송 순우(淳祐) 연간에 건립하였다. 중앙에 선성연거상(宣聖燕居像)을 모셔놓고, 동실(東室)에는 이락(伊洛)의 제현들을, 서실(西室)에는 향선현(鄕先賢)을 향사하였다고 한다. 《大明一統志》[주-D005] 오계서원(浯溪書院)에서는 …… 모셨으니 : 오계서원은 강서성 영주(永州) 기양현(祁陽縣) 남쪽에 있다. 현위 증규(曾圭)와 그의 아들 증요신(曾堯臣)이 창건하였다. 중앙에 대전(大殿)을 만들어 공자를 제사 지내고, 대전 왼쪽에 사(社)를 세워 원결(元結)과 안진경(顔眞卿)을 제사 지냈다. 《大明一統志》 저본에는 ‘梧溪’로 되어 있으나, 《대명일통지》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주-D006] 석경(石慶)에게 …… 세워주었고 : 석경은 한 문제 때 만석군(萬石君) 석분(石奮)의 둘째 아들이고, 석상사(石相祠)는 ‘석 재상 부자(父子)를 모신 사당’이다. 석분은 높은 지위에 이르러 부귀해져서도 언제나 근검절약하였다. 이 때문에 석분의 작은아들 석경이 태자태부(太子太傅)ㆍ어사대부(御史大夫)를 거쳐 제(齊)나라의 승상(丞相)이 되었을 때 온 나라 사람들이 그 가문의 덕행을 존모하여 절로 제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뒤에 제나라 사람들이 석분과 석경을 위하여 석상사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史記 卷103 萬石君列傳》[주-D007] 난포(欒布)에게 …… 세웠으니 : 난공사(欒公社)는 난포를 모신 사당이다. 〈난포열전〉에는 “전투에서 세운 공훈으로 유후(兪侯)에 봉해졌다가 다시 연(燕)나라 승상(丞相)이 되었다. 연나라와 제나라 지역에서 모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난공사로 불렀다.”라고만 되어 있고 청덕(淸德)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난포는 자신이 곤궁할 때 도움을 준 팽월(彭越)에게 의리를 지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그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史記 卷100 欒布列傳》[주-D008] 진실로 …… 있다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에 “진실로 마음이 광명하고 신의가 있으면 시내나 못에서 자라는 수초(水草)와 부평이나 마름 같은 채소와 광주리나 솥 같은 용기와 웅덩이나 길에 고인 물이라도 모두 귀신에게 제물로 바칠 수 있고 왕공에게 올릴 수 있다.[苟有明信, 澗溪沼沚之毛, 蘋蘩薀藻之菜, 筐筥錡釜之器, 潢汙行潦之水, 可薦於鬼神, 可羞於王公.]”라고 하였다.[주-D009] 양심당(養心堂) 조공(趙公) : 조선 초기 용문(龍門) 출신의 학자 조성(趙晟, 1492~1555)이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백양(伯陽)이고, 양심당은 그의 호이다. 음률에 밝았을 뿐 아니라 의약(醫藥)과 산수에도 정통하여 군직(軍職)에 나가서는 의술을 가르친 바도 있다.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거문고의 명인이기도 하여 《고금금보문견록(古今琴譜聞見錄)》과 《송씨이수삼산재본금보(宋氏二水三山齋本琴譜)》에 〈조성보(趙晟譜)〉가 전한다. 저서에 《양심당집(養心堂集)》이 있다.[주-D010]
보진암(葆眞庵) 조공(趙公) : 조성의 아우 조욱(趙昱, 1498~1557)이다. 본관은 평양, 자는 경양(景陽), 호는 용문 또는 보진암이다. 조광조와 김식(金湜)을 사사하였다. 기묘사화 때에 어리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였다. 형제 모두 학행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조성과 조욱 형제를 두고 중국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에 빗대어 칭송하였다. 명종 때 성수침(成守琛)ㆍ조식(曺植) 등과 함께 천거되어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장수 현감(長水縣監)에 이르렀다. 저서에 《용문집(龍門集)》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주-D011] 지평(持平) 신공(申公) : 조선 초기의 학자 신변(申抃, 1470~1521)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낙천(樂天), 호는 귤우정(橘宇亭)이다. 기묘사화 때에 파직되어 지평에 은거하였다. 1521년에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신(貞信)이다.[주-D012] 둔곡(遯谷) 조형생(趙亨生) : 1564~1628. 보진암 조욱의 손자이다. 본관은 평양, 자는 달가(達可), 둔곡은 그의 호이다. 조부의 유훈을 따라 경수(耕叟)라 자호하고, 광해조에 용문산에서 은거하며 농사짓고 살았다. 잠시 공조 좌랑과 예산 현감(禮山縣監)으로 나아갔다가 관직을 사퇴하고 지평 둔촌(遁村)의 옛집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정묘호란 때에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강화도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 별세하였다.[주-D013] 치헌(癡軒) 권경유(權景裕) : ?~1498. 자는 군요(君饒) 또는 자범(子汎)이고, 치헌은 그의 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16)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90년 사가독서를 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아들 권연(權沇), 벗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다.[주-D014] 성균관과 향교 : 저본의 ‘학(學)’을 풀이한 말이다. 학은 국학(國學)인 성균관과 향학(鄕學)인 향교를 모두 포함한다.[주-D015] 선조 충숙공(忠肅公) : 명고의 6대조 서성(徐渻, 1558~1631)이다. 본관은 달성,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충숙은 시호이다.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에 선조를 호종하였고, 도승지, 개성 유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1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조정에 들어와 대사헌,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인기(李麟奇), 이호민(李好閔) 등과 교유하였으며, 저서에 《약봉집(藥峯集)》이 있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이규필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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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溪書院誌 / 발행 및 형태경기도 : 楊平文化院, 1998 / 1책
1594년(선조 27) 조광조의 수제자인 趙昱과 그의 형인 趙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양평군 용문면의 사림들이 건립한 용문서원의 후신이 雲溪書院이다. 조욱이 말년에 은거하며 제자를 양성한 곳이 용문산이었으므로 서원의 건립은 그의 제자들이 주도적으로 나섰다고 본다. 1713년경(숙종 39) 사액된 후 헌종이 용문사에 거둥하다가 용문서원에 臨御하고서 서원명을 운계서원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후 운계서원은 고종때 서원훼철령으로 그 기능을 상실했다가 1935년 지방 유림의 노력으로 다시 復設된다. 이처럼 《운계서원지》는 일반적인 한 서원의 연혁, 배향인물, 운영 등에 대한 기록을 말한다. 국역서는 6편 1책으로 구성되어, 1편은 운계서원의 연혁·사액문·축문·홀기 등, 五賢의 행적과 향사의식 등을 기록하였다. 2편은 조욱의 사적을, 3편은 조성에 대한 사적 중 自敍詩를 중심으로, 4편은 申抃의 사적을, 5편은 조욱의 孫 亨生의 사적을, 6편은 조욱의 증손 能趾의 사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책의 주요내용은 운계서원의 전모와 여기에 배향된 인물들에 대한 것이다. 운계서원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각 지방에 설립된 서원의 기능과 운영형태 등에 대한 한 실례를 보여주어 조선 왕조의 정치·문화·교육 등 다양한 방면의 연구에 자료로 쓰일 수 있다. 특히 배향인물은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조욱과 그 후손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으로 조선 전기 사림의 학맥 형성에 대한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국역문은 세로쓰기로 탈초 원문과 번갈아 가며 기재되었다. 연대기표는 단기를 표기하고 뒤에 서기를 붙였으며 주석과 색인은 없다.이왕무(李旺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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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1610년(광해군 2)~1669년(현종 10) 길보(吉甫) 노서(魯西), 산천재(山泉齋) 파평(坡平) 문경(文敬)
현종 5 1664 갑진 康熙 3 55 市南 兪棨를 곡하다. ○ 金剛山, 頭陀山, 太白山을 유람하고 龜潭, 島潭을 둘러보다.
魯西先生遺稿續卷之三 / 雜著
巴東紀行 甲辰
[正月]
二十一日。惠哀疑返哭送岐路。奉仲氏行。尋雲溪書院。爲諸生草呈院長文。夕抵砥平縣底宿焉。搢姪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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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부록 제14권 / 어록(語錄) 1 / 이희조(李喜朝)의 기록
갑인년(1674, 현종15) 5월 20일, 이형 행(李兄涬)ㆍ김형 창협(金兄昌協)과 함께 동행하다가 선생을 양주(楊州)ㆍ여주(驪州) 사이의 길에서 만나 말에서 내려 잠깐 휴식하고는 이어 모시고 용문사(龍門寺)로 향하였다. 오후에 용문서원(龍門書院)을 지나는데, 서원 앞에 조그만 나무를 세워 ‘대소인 모두 하마하라[大小人皆下馬]’고 써 놓았다. 송군 이석(宋君彝錫)도 이때 함께 따라왔었는데, 즉시 하마하면서,
“아차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났구나.”
하였다. 선생은 우리들을 돌아보면서,
“문묘(文廟)ㆍ향교(鄕校) 외에도 지나다가 말에서 내리는 곳이 있느냐?”
물으시므로 우리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대답하였다.
서원에 이르자, 선생이 즉시 강당에 앉으시니, 제생들도 모두 자리를 정하였다. 이행이 나아가 물었다.
“오현(五賢)의 서원과 사당에는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합니까?”
[선생] 알지 못하겠다. 다만 조정에서 그분들을 심히 우대하시니, 마땅히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보다. 내가 일찍이 공암서원(孔巖書院)을 보니, 여기에는 주자(朱子)를 제향하기 때문에 모두들 말에서 내렸다. 이는 그 사람이 얼마만큼 경앙(景仰)하느냐에 달려 있으니, 한결같이 법을 세워 단정할 수는 없다.
내가 나아가 여쭈었다.
“일찍이 들으니, 선생께서 회연서원(檜淵書院)을 지나시면서 ‘한강 선생(寒岡先生)을 절하고 뵈었다.’고 쓰셨다 하는데 과연 그러하셨습니까?”
[선생] 그때에 조근(趙根)이 이와 같이 썼는데, 나는 진실로 이미 시끄럽게 될 것을 염려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곧 ‘만일 비방하는 자가 있으면 내 스스로 당하겠다.’ 하였다. 그후로 비방하는 말이 떠들썩하여 모두 나에게 죄를 돌렸다.
선생은 또 말씀하셨다.
“들으니 영남(嶺南)에 문경호(文景虎)의 서원이 있다 한다.”
이어 당시의 박성(朴惺)ㆍ경호ㆍ정인홍(鄭仁弘) 등의 일을 자세히 말씀하고, 또 말씀하셨다.
“인홍은 높은 풍도의 정맥(正脈)이 있어 글을 꽤 잘 지었으니, 한번 구해서 볼만하다.”
[희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박성의 행장(行狀)을 찬하면서 지극히 칭찬하고 우계(牛溪)를 공격한 한 조항은 언급하지 아니하여 자못 그 사실을 인멸했으니, 이는 크게 의심스럽습니다.
[선생] 그러하나 또한 약간은 알 수가 있다. 연전에 윤길보(尹吉甫)가 여헌이 지은 박성의 행장 가운데에 ‘인홍이 잘못 데리고 들어갔다.[仁弘誤入]’는 말 때문에 자못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희조] 여헌이 인홍에게 어찌 과격하지 않은 말을 했습니까?
[선생] 아마도 평소에 잘 아는 사이라서 잊기 어려워 그랬는가 보다.
[희조] 일찍이 김우옹(金宇顒)의 문집을 보니, 신덕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는 일로 상소하여 이의를 제기했었습니다. 그 말이 어떠합니까?
[선생] 크게 옳지 않다. 만일 임금께서 재취할 때에 간했다면 괜찮지만, 이제 이미 국모(國母)가 되었고 또 일찍이 부묘하고 능(陵)을 봉했으니, 어찌 《춘추(春秋)》의 재취하지 않는 의(義)로써 논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심히 미혹(迷惑)된 것이다.
선생은 제생들을 거느리고 사당 문 안에 들어가 계단 아래에 선 다음, 우리들을 돌아보시며,
“제군들은 이미 자리를 정했는가?”
하시고는 두 번 절하고 물러 나오시며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봉심(奉審)하는 것이 좋다.”
저녁 때에 용문사에 이르러 곧바로 법당(法堂)에 올라가 두루 보신 다음 서쪽을 향하여 앉으시니, 제생들도 앉았다. 중들은 모두 법당 앞에서 합장하였다.
[선생] 내가 일찍이 계해년(1623, 인조1)에 이곳에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당시의 중으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가 있는가?
이어 세조(世祖)의 고적(古蹟)을 하나하나 말씀하셨다. 정원(淨源)이라고 하는 중이 있었는데, 꽤 이야기할 만하였다. 선생은 그에게 물으셨다.
“선(禪)과 교(敎)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그는,
“선이 어렵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인하여 그와 한동안 토론하시고는,
“이 중은 향도(向道)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하시고, 또 한 중에게 묻기를,
“너희 도는 천지(天地)와 인물(人物)을 모두 환망(幻妄)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이는 전체가 도무지 환망인 것이다. 비록 해와 달이 박식(薄蝕)하고 애비와 임금을 해치더라도 나쁠 것이 있겠느냐?”
하시자, 그는,
“환망 가운데에도 선과 악이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웃으시면서,
“이는 너희 불가의 군색한 변명이다. 이미 환망이라 하였는데 또 어찌 선이 있단 말인가.”
하시고, 이어 존심(存心)의 어려움은 유가(儒家)나 석가(釋家)가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셨다.
“유주상(流注想)이 가장 두렵다.”
[희조] 선생의 현재 지위는 어떠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생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비록 주자 같은 아성(亞聖)으로서도 오히려 스스로 ‘종소리가 그치기 전에 이 마음이 벌써 달아났다.’ 하셨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이겠는가. 아마도 변화될 날이 없을 듯하다. 시험 삼아 독서할 때로써 말하건대, 마음이 보존되어 있을 때에는 그 맛이 매우 진진한데, 마음이 보존되지 않았을 때에는 전혀 의미가 없다.”
[희조] 독서할 때에 마음을 보존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선생께서도 젊었을 때에 이런 병통이 계셨습니까?
[선생] 어찌 없을 수 있었겠는가. 책을 이리저리 보면 기억되고 외는 것은 비록 쉬웠으나 의미가 진진하지 못하였다.
[희조]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 말하면 혼매(昏味)하지 않으면 반드시 산란하여 잠깐 동안이라도 청정(淸淨)한 때가 없습니다. 혼매와 산란 중 산란한 때가 더욱 많아, 졸음이 오는 때가 아니고는 모두 밖으로 향하여 달아납니다. 생각건대 성인은 잠깐 동안이라도 이러한 병통이 없으리니, 이것으로 보면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선생] 이 때문에 율곡 신생은 ‘보통 사람의 마음에는 미발(未發) 상태인 때가 없다.’ 하셨으니, 비록 잠깐 동안 한번 깨닫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극히 적고 약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인의 마음은 밝은 거울과 잔잔한 물과 같으니, 삽시간인들 혼매하거나 산란함이 있겠는가. 학문하는 길이 네 가지가 있으니, 격치(格致)ㆍ존양(存養)ㆍ성찰(省察)ㆍ역행(力行)이 바로 그것인데, 존양은 종(終)과 시(始)를 꿰뚫는다. 성인(聖人)을 어찌 대번에 배울 수 있겠는가. 다만 순서를 따라 서서히 공부해가면 자연히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 석시(釋氏)처럼 하루아침에 돈오(頓悟)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은 또 물으셨다.
“혼매와 산란 중 어느 것이 다스리기 쉬운가?”
[행] 혼매한 병통이 혹 다스리기 쉽지 않습니까?
[창협] 이 두 가지는 아마도 두 병통이 아닌 듯합니다. 산란한 나머지에는 곧 혼매해집니다.
[선생] 그렇다. 이 두 병통은 정히 서로 원인이 된다. 비유하면 마치 물을 하루종일 교란시키면 마침내 혼탁해져서 맑힐 수 없는 것과 같다.
[희조] 한가하게 홀로 있을 때에는 혹 안정했다가도 일이 목전에 닥쳐오게 되면 곧 어그러지니, 이런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선생] 이런 곳은 참으로 성찰(省察) 공부를 하여야 하니, 한갓 존양(存養)만 해서는 되지 않는다. 옛사람들의 이른바 ‘거처하기를 공손히 하고 일을 집행하기를 공경히 한다.[居處恭執事敬]’는 말씀은 학자들의 법이라 할 수 있다. 또 이 마음은 활동하는 물건으로서 제어하기가 극히 어렵다. 마음을 유지해서 뜻을 보존하는 것은 독서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독서를 오래하면 점점 방심(放心)되지 않을 것이다. 주자의 글이 제일 보기가 좋다. 이천(伊川)의 글은 사람들이 읽기가 지극히 어려우니, 끝내 주자의 명백하고 통쾌한 것만 같지 못하다.
[희조] 학자로서 주자의 글에 익숙하지 못하면 유학자의 일을 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선생] 그렇다.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이 정원(淨源)에게 물었다.
“도겸(道謙)이 어느 곳에 거처했느냐?”
[정원] 복당(福唐)에 거처했습니다.
[선생] 도겸이 개선사(開善寺)에 거처했으니 연평(延平 주자의 스승인 이동(李侗))의 이른바 ‘겸개선(謙開善)’이란 것으로, 겸은 곧 도겸이고 개선은 곧 절 이름이다. 그런데 퇴계께서는 ‘성명(姓名)’이라고 하셨으니, 잘못인 듯하다.
또 물으셨다.
“옛사람들은 도를 깨달았을 때에 온몸에서 땀이 나온 자가 있었는데, 무슨 까닭인가?”
[정원] 참으로 있었습니다. 이는 자기가 아직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달아, 기쁨을 이기지 못한 때문입니다.
[선생] 이것은 그러한 이치가 없지 않다. 무릇 사람들이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면 곧 땀이 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
선생은 저녁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선당(禪堂)에 내려오시어 또 정원과 불경을 논하셨는데 매우 자세히 하셨다.
[선생] 내가 일찍이 각성(覺性)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이 선사(禪師)와 서로 사귐은 심히 두렵다. 옛날 한 문공(韓文公)은 평생 동안 불교를 배척했었는데, 뒤에 중들은 「문공이 태전(太顚)의 도통(道統)을 이었다.」고 하니, 이는 두렵다.’고 하였다. 각성은 ‘지금 세상에는 문공 같은 분은 계시지만 태전 같은 승려는 없으니, 공은 두려위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는 은연중 내 말을 기롱한 것이다.
[희조] 박숙(朴叔)이 명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한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은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처음에 이미 이렇게 자처하였으니, 이제 와서 곧바로 돌아가는 것은 심히 이유가 없는 짓이다. 어찌 기한을 둘 수 있겠는가. 《주역》의 이치로 보면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반드시 10년마다 변한다. 우선 10년으로 기한을 삼으면 그사이에 어찌 결말이 없겠는가.”
[희조] 만일 10년 안에 결말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 그렇다면 형편상 그대로 머물러 기다려야 한다. 갑인년 용문사어록(龍門寺語錄). 이하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