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절사(彰節祠)
아산 ・ 2024. 4. 29. 17:08
창절사(彰節祠)
항목 ID | GC08300649 |
한자 | 彰節祠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60[영흥리 1063-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윤석 |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 1685년 - 육신사 창건 |
이전 시기/일시 | 1705년 - 육신사 이전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09년 - 창절사로 개칭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1년 12월 16일 - 창절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 |
현 소재지 | 창절사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60[영흥리 1063-1] |
원소재지 | 육신사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영흥리 1090-1] |
성격 | 사당 |
관리자 | 창절서원 |
[정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사육신 등이 배향되어 있는 사당.
[개설]
창절사(彰節祠)는 원래 단종의 묘 옆에 세운 육신사(六臣祠)였다. 1685년(숙종 11) 강원도관찰사 홍만종(洪萬鍾)과 도사(都事) 유세명(柳世鳴)이 영월군수 조이한(趙爾翰)과 상의하여 단종의 묘우(廟宇) 옆에 건물 3칸을 세워 사육신의 신주를 봉안하였다. 1698년(숙종 24) 단종의 복위가 이루어지면서 왕릉 곁에 신하들의 사당을 둘 수 없다고 하여 1705년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로 옮겼다.
[위치]
창절사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63-1번지에 있다.
[변천]
1709년 ‘육신사’를 ‘창절사’로 고쳐 사액(賜額)을 내리면서 몇 사람을 더 배향하고, 창절서원(彰節書院)이라고 명칭을 고쳤다. 창절서원은 배견루(拜鵑樓)가 정문이고, 안에 강당이 있으며 뒤쪽으로 가면 창절사가 있다. 창절사로 들어가는 문에는 옛날 ‘육신사’ 현판이 걸려 있는데, 원래 송시열이 쓴 현판이 오래되어 없어져서 영월군수 박기정(朴基正)이 다시 썼다고 한다. 창절서원의 현판은 1791년 윤사국(尹師國)이 쓴 것이고, 창절서원 건물은 여러 차례 중수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창절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현재 창절사에는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엄흥도(嚴興道)·박심문(朴審問) 등 10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창절사에 모신 10명의 신위는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동등하게 봉향(奉享)되어 있다.
[현황]
창절사에서 봄가을로 봉행되는 제향(祭享) 가운데 가을의 제향을 ‘창절사 대제(大祭)’라고 이름 붙이고, 매해 10월 9일 대제를 봉행한다. 창절사 대제는 창절서원이 주관하는데, 영월군수가 초헌관(初獻官)이 되고, 영월군의회 의장이 아헌관(亞獻官)이 되며, 종헌관(終獻官)은 문중 대표가 맡는다. 그리고 영월군의 유림과 주민 등이 참석하는 상당한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육신사기(六臣祠記)』
김문식, 「영월부사 박기정의 활동」(다산연구소, 2012)
김태숙, 「영월지역 서예문화 자료에 관한 연구」
[지식연계]
문화재청: 창절사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창절사
영월군
디지털영월문화대전
[출처] 창절사(彰節祠)|작성자 아산
창절서원
GC08301064 |
彰節書院 |
Changjeol Seowon|Changjeol Confucian Academy |
종교/유교 |
유적/건물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60[영흥리 1063-1] |
조선/조선 후기 |
유흔우 |
[상세정보]
[정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사육신 등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후기 창건한 서원.
[개설]
창절서원(彰節書院)은 단종(端宗)[재위 1452~1455]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世祖)[재위 1455~1468]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사육신(死六臣)과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을 제향한 사액서원이다. 1685년(숙종 11) 노산군(魯山君) 묘 경내에 건립한 육신사(六臣祠)가 전신이다. 1705년(숙종 31) 현재 위치로 이건되었다. 1709년 창절사(彰節祠)로 개칭되고, 1828년(순조 28) 창절서원(彰節書院)으로 개칭되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며 강원도 내 사당이나 서원 중 가장 규모가 크다. 1971년 12월 16일 창절서원 내 창절사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창절서원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63-1번지에 있다. 영월읍 사무소에서 제천 방향으로 약 50m 지점의 도로변에 있다.
[변천]
1685년 7월에 노산군[단종] 묘 아래에 사육신[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건립한 3간의 육신사가 창절서원의 전신이다. 1698년 단종이 복위되면서 노산군 묘가 장릉(莊陵)으로 추증되고, 왕릉 곁에 신하들의 사우가 있는 것이 문제가 되면서 1705년(숙종 31)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또 영월 유생 엄야영 등의 소청에 따라 1709년(숙종 35) 사우가 창절사로 개칭되면서 사육신 외에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와 박심문(朴審問) 등을 모시는 ‘팔현사(八賢祠)’가 되었다. 1791년(정조 15) 창절사에 단(端)을 세우고 생육신(生六臣) 중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을 추가로 배향하여 총 10인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창절사는 원래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사당만을 지칭하였지만 1828년 창절서원으로 개칭되면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향교와 유사한 모습으로 확대되었다. 1788년(정조 12)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와 보수를 거쳤다. 1999년 10월 5일 사단법인 영월창절서원으로 법인화하였다.
[형태]
창절서원은 정문에 해당하는 문루와 서원과 사당을 갖추고 있다. 정문인 배견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익공계 건축이고, 강학 기능을 갖춘 창절서원은 중앙에 6간 대청을 갖춘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삼문을 지나 한 단 높은 제사 공간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창절사와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창절서원의 전신인 육신사의 현판은 송시열(宋詩烈)이 썼고, 창절사 사액 현판은 권상하(權尙夏)가 썼다.
[현황]
창절서원은 강원도 내에서 가장 큰 사당으로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강원도에 있는 사당이나 서원 중 대문이 문루인 곳은 창절서원뿐이며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영월의 새 보물_ 창절사(彰節祠)
충신(忠臣) 넋 기리는 사당… 역사·학술적 가치 높은 평가
월간조선
글 최덕철 기자 dch@chosun.com
사진 양수열 C영상미디어 기자
입력 : 2023.04.17
조선의 6대 국왕 단종(端宗, 1441~1457)의 유배지로 잘 알려진 영월은 충절(忠節)의 고장으로 불린다.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세조(世祖, 1417~1468)에게 죽임당한 충신들의 넋이 잠든 곳이기 때문이다. 그 충신들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지난 연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
영월 창절사. 사육신을 비롯한 충신 10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지난해 11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단종 복위 꿈꾼 충신 10인 위패 모신 사우
창절사(彰節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63-1)는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어간 충신 10인의 위패(位牌,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을 적은 나무패)를 모신 사우(祠宇, 위패를 모셔 놓은 집)로 지난해 11월 25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은 중요도와 가치가 뛰어난 유형문화재 중 지정되며 국보와는 구분된다.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의 문화에 있어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대상으로 지정한다.
창절사는 원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죽임당한 사육신(死六臣)의 위패를 모시고자1685년 장릉 경내에 지어졌는데 170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이후 경내에 유학(儒學) 교육 기관인 창절서원(彰節書院)이 세워지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건립 당시엔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이개(李塏, 1417~1456), 하위지(河緯地, 1412~1456), 유성원(柳誠源, 미상~1456), 유응부(兪應孚, 미상~1456) 등 사육신을 모신 곳이란 의미로 육신사(六臣祠)라 불렀으나 1709년 조선 19대 국왕 숙종(肅宗, 1661~1720)이 창절사라 이름 짓고 사액(賜額, 왕이 지은 사당·서원 등의 이름을 적은 액자를 하사하는 것)해 지금의 명칭을 갖게 됐다. 지금은 사육신의 위패에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한 충신 엄흥도(嚴興道, 생몰년 미상), 생육신(生六臣) 중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사육신의 참형 소식을 듣고 자살한 박심문(朴審問, 1408~1456)의 위패를 더해 충신 10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충신 10인의 위패를 모신 창절사 내부.
18세기 건축 양식, 조선시대 서원 구성 한눈에
창절사는 다른 사우에 비해 큰 규모와 함께 새 날개 모양의 지붕 장식인 익공식(翼工式) 등 18세기 건축 양식의 특징이 잘 반영돼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이 창절사를 보물로 지정한 사유다. 또 사우 외에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이용했던 강당과 기숙사 역할을 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정문 누각(樓閣)인 배견루(拜鵑樓) 등을 갖춰 전형적인 조선시대 서원의 구성을 보여준다는 점도 높이 평가된다.
창절서원과 창절사의 관리는 ‘사단법인 영월창절서원’이 맡고 있다. ㈔영월창절서원은 창절사에 모신 충신들의 후손을 비롯해 영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형성된 비영리단체다. 현재 3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며 충신들의 충절을 기리고 창절사와 창절서원의 문화·역사적 가치를 알려가고 있다. 회원들은 매월 음력 1일과 15일 창절사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대제(大祭)는 1년에 한 번, 매년 한
글날에 지낸다. 사육신의 대부분이 한글 창제에 힘쓴 집현전 학자였다는 점에서 한글날을 대제일로 정했다는 게 ㈔영월창절서원 측의 설명이다. 창절사와 창절 서원은 평소에는 닫혀있지만 제삿날을 비롯해 학교 등 기관·단체의 견학 요청이 있을 경우에 한해 일반에 공개된다. 문의 (033)373-3113
인터뷰_ “충절의 소중한 가치 후손들에게 이어지길”
[출처] 창절사(彰節祠)|작성자 아산
인터뷰_ 정태교 (사)영월창절서원 원장
“왕조에 대한 충절이 요즘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굳은 절개는 시대를 막론하고 존경받을 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소중한 가치를 전하고자 수백 년간 창절사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온 거죠.”
정태교(75·사진) (사)영월창절서원 원장은 ‘바람직한 충신상’을 전하는 것을 창절서원과 창절사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는다. 보물로 지정될 만큼의 문화재적 가치 못지않게 충신들의 충절 또한 잊혀선 안 될 숭고한 가치란 설명이다. 국가가 주도해 만든 서원이란 점도 창절서원이 타 서원과 비교해 높은 가치를 평가받는 부분이다. 정 원장은 “다른 서원이 특정 문중이나 학파에서 세운 것과 달리 창절서원은 국가가 주도해 세운 곳”이라며 “많아야 너덧 분을 모신 타 서원과 달리 10명의 충신을 모시고 있어 규모 면에서도 따라올 곳이 없다”고 소개했다. 이어 “세계문화유산인 장릉과 함께 단종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건립된 역사적 주요 건축물”이라며 “후손들이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덧붙였다.
정 원장은 창절서원의 관리 못지않게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리는 일을 (사)영월창절서원의 중요한 책임으로 삼고 있다. 실제로 (사)영월창절서원 회원들은 매년 봄·가을마다 장릉과 청령포에서 자연 정화 활동과 함께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자는 취지의 캠페인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다.
정 원장은 보물 지정으로 창절서원의 위상이 더욱 높아진 만큼 유지·관리에 대한 책임감도 늘었다고 말한다. 그는 “보물에 걸맞은 보존 및 관리 계획의 수립은 물론이고 세제 혜택이나 전문 관리 인력 지원 등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실질적인 지원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출처] 창절사(彰節祠)|작성자 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