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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연보 제1권
[연보(年譜)]
명(明)나라 세종 숙황제(世宗肅皇帝) 가정(嘉靖) 22년 우리나라 중종 공희대왕(中宗恭僖大王) 38년 계묘(1543)
○ 7월 9일 임자 자시(子時)에 선생이 성주(星州) 사월리(沙月里) 본가에서 출생하였다. - 성주부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9리 지점에 있다. ○ 선생의 선대는 서원(西原) 사람이며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다. 조부 승지공(承旨公)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김 선생(金先生)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승지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부친 판서공(判書公)이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서울에서 내려와 현풍(玄風)에 살던 외조모 박씨(朴氏)를 찾아뵙고, 성주 이씨(星州李氏)에게 장가들어 마침내 이 고장에 자리를 잡았다. -
23년 우리나라 중종 39년 갑진(1544) 선생 2세
24년 우리나라 인종 영정대왕(仁宗榮靖大王) 1년 을사(1545) 선생 3세
25년 우리나라 명종 공헌대왕(明宗恭憲大王) 1년 병오(1546) 선생 4세
26년 우리나라 명종 2년 정미(1547) 선생 5세
○ 똑똑하고 영리하여 보통 아이와는 달랐으므로 보는 이들이 신동(神童)이라 불렀다.
27년 우리나라 명종 3년 무신(1548) 선생 6세
28년 우리나라 명종 4년 기유(1549) 선생 7세
○ 타고난 자질이 늠름하고 지기(志氣)가 원대하여 얼굴빛이며 말하는 속에 영기(英氣)가 충만하여 사람들이 모두 능력을 크게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 백씨(伯氏) 참찬공(參贊公) 정괄(鄭适)이 일찍이 어떤 손님과 앉아 있을 때의 일이다. 선생이 붉은 명주띠를 몸에 두르고 나와 손님에게 절하자, 손님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너는 무슨 벼슬을 할 것이냐?”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경(卿)을 지냈습니다. 저는 꼭 금띠를 띠고 붉은 옷을 입을 것이므로 한번 허리에 띠어 본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백씨가 꾸짖으며 말하기를, “이 애가 제 정신이 아니구나.” 하자, 선생은 말하기를, “저는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라 요순(堯舜)과 같은 기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였다. -
29년 우리나라 명종 5년 경술(1550) 선생 8세
30년 우리나라 명종 6년 신해(1551) 선생 9세
○ 3월에 판서공의 상(喪)을 당하였다. 상례를 받들어 행하면서 극도로 슬퍼하는 모습이 마치 어른과 같았다.
31년 우리나라 명종 7년 임자(1552) 선생 10세
○ 1월에 성주부 서쪽 회봉산(回峯山)에 판서공을 장사 지냈다. ○ 학문에 뜻을 두고 분발하여 글을 읽었다. - 이때 선생은 이미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를 읽어 그 대체적인 뜻을 알았다. 백씨가 일찍이 울먹이며 말하기를, “선군(先君)이 살아 계실 적에 네가 학업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되어 항상 근심하셨다. 너는 부디 노력하기 바란다.” 하니, 선생은 각오를 새롭게 다져서 스스로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
32년 우리나라 명종 8년 계축(1553) 선생 11세
○ 3월에 탈상(脫喪)하였다.
33년 우리나라 명종 9년 갑인(1554) 선생 12세
○ 선성(先聖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손수 모사하여 벽에 걸어 두고 매일 반드시 우러러보며 절하였다.
34년 우리나라 명종 10년 을묘(1555) 선생 13세
○ 덕계(德溪) 오 선생(吳先生)에게 수업하였다. - 덕계의 휘는 건(健)이다. 이때 성주부 학궁(學宮)에서 생도들을 가르쳤다. 선생은 나아가 《역전(易傳)》을 배웠는데, 건괘(乾卦)와 곤괘(坤卦) 두 괘를 겨우 배우고 나머지는 다 유추하여 막힘이 없이 완전히 이해하였다. 덕계가 함께 배우는 제생(諸生)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마땅히 정생(鄭生)을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 하였다. ○ 하루는 학궁에 와서 글을 배우는 읍내의 유생 한 사람이 신분이 미천한 사람을 학궁으로 불러들여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 선생이 소리를 가다듬어 말하기를, “이곳은 존엄한 곳이므로 이런 무리가 감히 들어올 데가 아니다.” 하고, 그를 이끌고 나가게 하였다. 덕계가 이런 말을 듣고 한층 더 기특하게 여겼다. -
35년 우리나라 명종11년 병진(1556) 선생 14세
36년 우리나라 명종 12년 정사(1557) 선생 15세
○ 〈취생몽사탄(醉生夢死歎)〉 시를 지었다. - 문집에 나와 있다. -
37년 우리나라 명종 13년 무오(1558) 선생 16세
○ 가을에 〈천손하고칠석회변(天孫河鼓七夕會辨)〉을 지었다. - 문집에 나와 있다. -
38년 우리나라 명종 14년 기미(1559) 선생 17세
39년 우리나라 명종 15년 경신(1560) 선생 18세
40년 우리나라 명종 16년 신유(1561) 선생 19세
41년 우리나라 명종 17년 임술(1562) 선생 20세
42년 우리나라 명종 18년 계해(1563) 선생 21세
○ 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 선생(李先生)을 찾아가 인사드렸다. - 이 선생이 유희범(柳希范)에게 답한 편지에 말하기를, “정구(鄭逑)라는 자가 와서 하루를 머물러 있다가 갔는데, 매우 영민(英敏)하였네.” 하였고, 구암(龜巖) 이정(李楨)에게 답한 편지에 말하기를, “일찍이 정곤수(鄭崑壽)와 그의 아우 정구를 본 적이 있는데, 이들은 다 학문에 뜻을 두고 선(善)을 좋아하는 선비였네. 한훤당(寒暄堂)의 외손이니만큼 어찌 그 유풍이 없겠는가. 이와 같은 사람들이 《경현록(景賢錄)》 속에 보이지 않는다면 이 또한 흠이 될 것 같으니, 따로 외손도(外孫圖)를 만들어 기록해 넣는 것이 좋을 것이네.” 하였다. 또 덕계에게 편지를 보내 극구 칭찬하였다. -
○ 풍기(豐基)로 가서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상사를 조문하였다.
○ 가을에 향시(鄕試)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 12월에 부인(夫人) 광주 이씨(光州李氏)에게 장가들었다. - 봉사(奉事) 이수(李樹)의 딸이다. -
43년 우리나라 명종 19년 갑자(1564) 선생 22세
○ 봄에 회시(會試)에 응시하러 갔다가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고 그만 돌아왔다. - 선생은 집에 돌아와서 윤화정(尹和靖)의 고사(故事)를 들어 대부인(大夫人)에게 여쭈었는데, 대부인이 말하기를, “네가 옛사람의 일을 따라 행하고 싶으면 네가 좋은 대로 하라.” 하였다. 선생이 이때부터 과거공부를 그만두었다. ○ 덕계가 일찍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그대 같은 재주와 기량으로는 분명히 세상에 크게 쓰일 수 있을 것이네. 그러니 어찌 세속 사람들이 하는 대로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나서 그다음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르는 것보다 더 나을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으나, 선생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도(道)를 얻기를 추구하는 뜻을 더한층 가다듬고 성리학(性理學)에 종사하였다. -
○ 4월에 백씨 참찬공(參贊公)의 상을 당하였다. 겨울에 창녕(昌寧)에 장사 지냈다. - 백씨가 창녕 조씨(昌寧曺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처가에서 죽어 그 고장에 임시로 무덤을 썼다. -
44년 우리나라 명종 20년 을축(1565) 선생 23세
○ 봄에 퇴계 선생에게 가서 《심경(心經)》의 의심난 부분을 질문하였다. - 이때부터 퇴계 선생에게 몸소 직접 왕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편지를 써서 질문한 일도 계속 이어졌다. -
○ 12월에 딸자식이 출생하였다. 장성하여 교리(校理) 강린(姜繗)에게 시집갔다. -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유징(有徵)이며 생원(生員)이다. -
45년 우리나라 명종 21년 병인(1566) 선생 24세
○ 봄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조 선생(曺先生)을 찾아가 인사드렸다. - 남명이 후일에 선생에게 이르기를, “사군자(士君子)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너는 출처에 대해 약간 아는 것이 있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너를 인정한다.” 하였다. ○ 남명이 일찍이 병석에 누웠을 적에 선생이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함께 찾아가 뵈었는데, 남명이 선생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고질병을 앓는 가운데 그대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니 마치 왕마힐(王摩詰)의 망천도(輞川圖)를 감상하는 것처럼 황홀하네.” 하였다. ○ 대곡(大谷) 성운(成運) 선생이 두터운 덕과 큰 명망이 있어 선생이 일찍이 찾아가 인사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그 제문은 문집에 나와 있다. ○ 이 조항은 어느 해의 일인지 알 수 없어 우선 이곳에 덧붙였다. -
목종 순황제(穆宗純皇帝) 융경(隆慶) 원년 우리나라 명종 22년 정묘(1567) 선생 25세
2년 우리나라 선조 소경대왕(宣祖昭敬大王) 1년 무진(1568) 선생 26세
○ 봄에 천곡서원(川谷書院)의 이름을 퇴계 선생에게 여쭈어 정하였다. - 고을 사람들이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과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을 위해 연봉산(延鳳山) 밑에 서원을 세웠는데, 선생이 그곳에 이천(伊川)ㆍ운곡(雲谷)의 지명이 있음으로 인하여 와룡(臥龍)의 고사(故事)에 따라 이 선생에게 여쭈어 천곡(川谷)이라고 이름을 정하였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두 선생을 받들어 향사(享祀)하고 한훤당 김공을 배향하였으며, 서원 곁에 따로 사우(祠宇)를 세워 문열공과 문충공을 향사하였다. 서원 규약을 정했으며 봄가을로 석전제(釋奠祭)를 행할 때는 제생(諸生)이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일을 보았다. -
○ 11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 이때는 상례(喪禮)가 훼손되어 세속에서는 무당의 굿과 불가(佛家)의 의식을 뒤섞어 따르고 있었다. 선생은 상례를 치르고 상복을 입는 방식을 오로지 《의례(儀禮)》의 내용대로 따랐다. 또 도식(圖式)을 살피고 제도를 상고하여 처음으로 작은 방상(方床)을 만들었는데, 그 방식이 매우 신기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그것을 본떠 만들었다. -
3년 우리나라 선조 2년 기사(1569) 선생 27세
○ 5월에 성주부 남쪽 대리(大里) 창평(蒼坪) 감좌(坎坐 남향) 언덕으로 장지를 바꾸어 잡아 그곳에 판서공을 이장(移葬)하고 부인과 합장(合葬)하였다. - 선생은 극도로 슬퍼한 끝에 병을 얻어 거의 위급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남명 선생이 편지를 보내 위문하였고 주위 사람과 이 상황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
○ 6월에 아들 장(樟)이 출생하였다.
4년 우리나라 선조 3년 경오(1570) 선생 28세
○ 11월에 탈복하였다.
○ 12월에 퇴계 선생의 부음(訃音)이 이르자 자리를 만들고 곡하였다. - 선생이 모친상을 당한 뒤에 여러 해 동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해 퇴계 선생의 장례 때 달려가지 못하였다. -
5년 우리나라 선조 4년 신미(1571) 선생 29세
6년 우리나라 선조 5년 임신(1572) 선생 30세
○ 2월에 남명 선생이 별세하였다. 장지로 달려가 곡하고 아버지와 임금을 위하는 정도와 같은 정성을 충분히 다하였다. - 제문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이달에 딸자식이 출생하였다. 장성하여 봉사(奉事) 노승(盧勝)에게 시집갔다. -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형우(亨遇)이다. -
신종 현황제(神宗顯皇帝) 만력(萬曆) 원년 우리나라 선조 6년 계유(1573) 선생 31세
○ 12월에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선조(宣祖)가 산야에서 조행(操行)이 있는 선비를 발탁하라는 명을 내리자, 김동강(金東岡)이 수찬(修撰)으로 입시하여 아뢰기를, “정구는 일찍이 이황(李滉)에게 학문을 배웠고 또 일찍이 조식(曺植)의 문하에 왕래한 자로 학문이 통명(通明)하고 재주와 기량이 넉넉합니다. 마땅히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입대(入對)하게 하여 그에게 나라를 다스릴 방도를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벼슬을 제수하더라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조가 6품에 서용(敍用)할 것을 청하자, 대신(大臣)의 의견을 수렴할 것을 명하였다. 그 결과 대신이 의견을 올리기를, “일찍이 관직에 제수된 자만 6품에 서용하고 관직에 제수되지 못한 자는 참하직(參下職)을 제수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
○ 한강정사(寒岡精舍)가 완성되었다. - 한강은 창평산(蒼坪山) 선영(先塋)의 서쪽 기슭에 있다. 선생이 선영을 돌보기 위해 그 자리에 집을 짓고 주자(朱子)의 한천(寒泉) 의미를 취해 이름을 붙였다. 북쪽 바위 위에는 어시헌(於是軒)이 있고 남쪽 산마루에는 유연대(悠然臺)가 있다. ○ 〈우음(偶吟)〉이란 제목의 절구 한 수가 있는데, “솔숲 사이 집에서 잠자리 들고, 물가의 누각에서 새벽잠 깨네. 앞뒤에 우렁차다 솔과 물소리, 이따금 고요 속에 들려오누나.〔夜宿松間屋 晨興水上軒 濤聲前後壯 時向靜中聞〕” 하였다. -
○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총목(總目)을 고쳐 확정하였다. 《가례집람보주(家禮集覽補註)》를 편찬하여 세상에 간행하였다.
2년 우리나라 선조 7년 갑술(1574) 선생 32세
○ 7월에 오덕계(吳德溪 오건(吳健))가 별세하였다. 슬픈 정과 예의를 극진히 하기를 남명의 상사 때와 똑같이 하였다. - 제문(祭文)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8월에 딸자식이 출생하였다. 장성하여 부사(府使) 홍찬(洪燦)에게 시집갔다. -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이직(李稷)에게 시집갔다. -
3년 우리나라 선조 8년 을해(1575) 선생 33세
○ 《한훤당연보(寒暄堂年譜)》와 《사우록(師友錄)》을 편찬하였다. - 모두 문집에 나와 있다. -
○ 6월에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년 우리나라 선조 9년 병자(1576) 선생 34세
5년 우리나라 선조 10년 정축(1577) 선생 35세
6년 우리나라 선조 11년 무인(1578) 선생 36세
○ 6월에 이조가 6품에 서용할 것을 청하여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 가을에 의흥 현감(義興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12월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와 삼가 현감(三嘉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7년 우리나라 선조 12년 기묘(1579) 선생 37세
○ 3월에 지례 현감(知禮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9월에 가야산(伽倻山)을 유람하였다. - 그에 대한 기록이 문집에 나와 있다. -
○ 겨울에 《혼의(昏儀)》를 편찬하였다.
○ 학도(學徒)를 모아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다.
8년 우리나라 선조 13년 경진(1580) 선생 38세
○ 2월에 창녕 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이 내렸다.
○ 4월에 폐사(陛辭)하였다. - 선조가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오래전에 그대의 이름을 듣고 만나 보지 못해 한스러웠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그대는 이황과 조식을 스승으로 모셨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은 두 사람의 문장(門墻)에 출입하면서 의심나는 부분을 물어본 일은 있으나 책을 들고 글을 배우지는 못했습니다.” 하였다. 선조가 묻기를, “이황과 조식은 기상과 학문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황은 덕량(德量)이 혼후(渾厚)하고 실천이 독실하며 공부가 매우 숙련되어 그 단계가 분명하므로 배우는 자가 그 길을 쉽게 찾아 들어갈 수 있는 반면, 조식은 기량(器量)이 엄정하고 재기(才氣)가 호탕하며 초연히 스스로 도를 깨달아 우뚝 서서 혼자 나아가므로 배우는 자가 그 요체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그대는 무슨 글을 읽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이 《대학》을 배웠습니다.” 하자, 묻기를, “《대학》 공부는 무엇이 본령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이 다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도입니다만, 선유(先儒)의 말씀에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그 본령이 다만 근독(謹獨)에 있다.’ 하였습니다. 제왕의 학문과,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과, 마음을 정밀하고 전일하게 지니는 공부와, 온갖 변화의 근원이 다 근독에 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뜻을 세우는 일과 실천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였다. 묻기를, “그대는 고을에 부임하여 어떻게 백성을 다스릴 것이며, 또 무엇을 먼저 시행할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본디 재능이 모자라고 학문이 얕아 맡은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다만 옛사람의 말에 ‘어린아이를 보살피듯 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이 말을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으며 먼저 학교의 교육을 진흥시키겠습니다.” 하였다. 선조는 매우 감탄하며 이르기를, “그대의 명성은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니구나.” 하였다. -
○ 윤4월에 부임하였다. - 옛날 가숙(家塾)의 제도를 본떠 사방 각지에 서재(書齋)를 설치하고 선비를 양성하였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문묘(文廟)에 나아가 참배하고 제생(諸生)을 불러다가 의리(義理)에 관해 설명하였다. 지난날 각처에 단(壇)을 쌓아 제사 지냈던 곳은 그림을 살펴 고쳐 쌓았으며, 효자와 열녀의 정문(旌門)을 다시 새롭게 수리하였는가 하면, 향사례(鄕射禮), 향음주례(鄕飮酒禮), 양로례(養老禮)를 행하고, 선행과 악행을 문서로 기록하여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을 보이기도 하였다. 기타 모든 일을 다 옛 법을 본떠 행하여 위아래 사람들이 안정되고 화합함으로써 치적을 이루어 명성이 크게 드러났다. 감사(監司)가 포상을 내리자고 아뢰어 특별히 표리(表裏)를 하사하였다. 고을살이를 떠나 돌아올 적에 사류와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그 공덕을 회상하는 정성을 부쳤다. ○ 이때 시를 짓기를, “관아와 산림 일이 그 어찌 같을쏘냐, 장부며 문서 속에 끊임없이 시달리네. 백성 고통 그대론데 신병만 더해 가니, 아서라 돌아가서 북창 아래 누워 볼까.〔官府山林事豈同 勞勞終日簿書中 民病未醫身病急 何如歸臥北窓風〕” 하였다. -
○ 《창산지(昌山志)》가 완성되었다.
9년 우리나라 선조 14년 신사(1581) 선생 39세
○ 9월에 승의랑(承議郞)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어 사은(謝恩)한 뒤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이 내렸다. 이리하여 창녕 현감 재직 시에 추고(推考)받은 일로 인혐(引嫌)하여 체직(遞職)되었다.
○ 10월에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제수되자 정순(呈旬)하였다.
○ 11월에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에 제수되자 정순하였다.
○ 12월에 사직서 영(社稷署令)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탑전(榻前)에서 아뢰어 선생에 대해 비록 해유(解由)하지는 않았더라도 격식을 무시하고 녹을 지급하자고 청하였으나, 선생은 장차 요행을 바라는 길을 열어 놓는 일이라 옳지 않다고 하며 재차 상소하여 극력 사양하였다. -
10년 우리나라 선조 15년 임오(1582) 선생 40세
○ 봄에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중씨(仲氏) 서천군(西川君)을 파주(坡州)로 찾아가 뵈었다. - 서천군의 휘는 곤수(崑壽)이고 자는 여인(汝仁)이며, 이때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있었다. ○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왕래하며 서로 찾아다녔다. -
○ 4월에 남쪽으로 돌아왔다.
○ 《관의(冠儀)》를 편찬하였다.
11년 우리나라 선조 16년 계미(1583) 선생 41세
○ 1월에 아들 장(樟)의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 2월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3월에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여름에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문하의 제생과 함께 매달 초하룻날 강회(講會)를 갖는 계(契)를 결성하였다. - 그 약조는 모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떴으며 선생은 또 권면하고 경계하는 내용을 지어 유시하였는데, 그 대략에, “계원으로 들어온 사람은 각자 마음을 가다듬고 행실을 닦아야 한다. 반드시 의(義)를 바르게 하고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도(道)를 밝히고 공(功)을 계산하지 않아야 하며, 부귀를 지나치게 추구하지 말고 빈천을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이처럼 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미 우리들과 어울릴 사람이 아니니, 비록 약조에 정해 놓은 벌칙은 없다 하더라도 어찌 함부로 한자리에 끼어 우리 계 모임에 수치를 끼치게 할 수 있겠는가. 도덕을 증진하고 행실을 삼가는 문제는 이미 ‘덕과 업을 서로 권한다.〔德業相勸〕’라는 조항에서 충분히 거론하였으니, 대체로 우리 함께 약조를 맺은 사람은 어찌 서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 회연초당(檜淵草堂)이 완성되었다. - 회연은 창평(蒼坪)에서 남쪽으로 1리 남짓한 지점에 있다. 선생이 그곳의 천석(泉石)이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여 작은 집을 짓고 머물러 있을 장소로 삼았다. 침실을 이름하여 불괴침(不愧寢)이라 하고, 창문을 매창(梅窓)이라 하고, 헌(軒)을 옥설헌(玉雪軒)이라 하였으며, 또 죽유(竹牖)니 송령(松欞)이니 하는 이름이 있었다. 100그루의 매화와 대나무를 정원에 심고 백매원(百梅園)이라 이름하였다. ○ 절구를 지었는데, “변변찮은 산 앞에 자그마한 초당 하나, 동산 가득 매화 국화 해마다 늘어난다. 게다가 구름 냇물 그림같이 꾸며 주니, 세상에서 내 생애 누구보다 호사로워.〔小小山前小小家 滿園梅菊逐年加 更敎雲水粧如畫 擧世生涯我最奢〕” 하였다. -
○ 겨울에 형조 정랑(刑曹正郞)과 호조 정랑(戶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 이해 봄에 임금이 비변사로 하여금 각자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였는데, 이율곡(李栗谷)이 선생을 천거하여 임금의 명에 부응하였다.
12년 우리나라 선조 17년 갑신(1584) 선생 42세
○ 5월에 특별히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제수되어 7월에 폐사(陛辭)하였다. - 선조가 인견(引見)하여 고을을 다스릴 방도를 묻고 아울러 정중히 효유한 뒤에 보냈다. 임지에 이르러 학교의 교육을 진흥시켜 가르침을 베풀기를 창녕에 있을 때처럼 하였다. -
○ 10월에 봉훈랑(奉訓郞)으로 품계가 올라갔다.
○ 12월에 변산(邊山)을 유람하였다.
○ 《동복지(同福志)》가 완성되었다.
13년 우리나라 선조 18년 을유(1585) 선생 43세
○ 1월에 《소학》과 《사서언해(四書諺解)》 교정청 낭청(校正廳郞廳)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갔다.
○ 공조 정랑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이 내렸다.
○ 2월에 봉직랑(奉職郞)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에 제수되었다.
○ 5월에 다시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 7월에 재차 상소하여, 체직하고 집으로 돌아가 책을 교정해서 올려보내겠다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길을 떠나려던 차에 또 정원(政院)의 계청으로 인해 도로 머물게 되었다.
○ 8월에 말미를 청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 10월에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12월에 고부 군수(古阜郡守)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14년 우리나라 선조 19년 병술(1586) 선생 44세
○ 2월에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8월에 함안 군수(咸安郡守)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이 내려 10월에 부임하였다. - 백성으로부터 조세를 거두어들일 때 그 기준을 올바로 헤아려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이웃 고을의 백성이 자기 고을의 관아에 베를 바쳤는데, 수령이 그 길이가 짧은 것에 화가 나서 태형(笞刑)을 가하려고 하자, 백성이 말하기를, “제 밭이 함안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함안 고을에 바칠 것인데 착오로 뒤바뀌어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니, 수령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
15년 우리나라 선조 20년 정해(1587) 선생 45세
○ 고(故) 사문(斯文) 박한주(朴漢柱)를 위해 사우(祠宇)를 창립하였으며 그의 무덤 위에 흙을 더 쌓고 제사를 지냈다. - 박한주는 연산조(燕山朝) 사람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에 관련되었다. ○ 제문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관해정(觀海亭)을 지을 터를 창원(昌原)의 회원(檜原)에 미리 정하였다. - 회원은 바닷가에 있는데 옛날에 최 문창후(崔文昌侯 최치원(崔致遠))가 놀았던 곳이다. 선생이 그 경치를 사랑하였고 또 선현의 유적을 경모하여 이곳에 오가며 놀면서 구경하였다. 고을 선비들이 이 때문에 나중에 정사(精舍)를 세웠는데, 선생이 그 이름을 취백당(聚白堂)이라 하였다. ○ 함께 온 사람들에게 절구 한 수를 지어 보여 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는야 바닷가에 정자 하나 지으련다, 이 좌중에 그 누가 채서산이 되려는가. 치자, 유자, 매화, 대 일찌감치 심어 두고, 여섯 해를 비바람에 시달리지 않게 하소.〔我欲爲亭近梅灣 座中誰作蔡西山 梔橘梅筠須早植 莫敎風雨六年間〕” 하였다. -
○ 수우(守愚) 최영경(崔永慶)을 진양(晉陽)으로 가서 방문하였다.
○ 다물(多勿)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 다물은 노예로서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손가락을 잘라 약에 섞어 아비의 병을 낫게 하였다. 이때 선생이 그의 무덤에 제사 지내고서 무덤의 흙을 더 쌓고 나무를 심었다. 제문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함주지(咸州志)》가 완성되었다.
16년 우리나라 선조 21년 무자(1588) 선생 46세
○ 4월에 통선랑(通善郞)으로 품계가 올라갔다.
○ 5월에 조봉대부(朝奉大夫)로 품계가 달라졌다.
○ 8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공덕을 기렸다. - 비문은 “후(侯)는 이름이 구(逑)이고 자가 도가(道可)이며, 서원(西原)의 명망 있는 가문이다.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창녕 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자리를 옮겨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벼슬길에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였는데 조정에 들어가 있는 날이 비교적 얼마 되지 않았다. 다섯 번에 걸쳐 벼슬을 역임하고 이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때는 만력 병술년(1586, 선조19) 겨울 10월이었고 3년이 지난 무자년(1588) 가을에 수령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후(侯)의 정사는 효제(孝悌)를 독실히 하고 절의를 장려하며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제사를 중히 여기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는데, 상벌이 엄격하고 분명하며 몸가짐이 청렴하고 신중하여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화합을 이루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는 외로운 배가 가볍게 흔들거렸던 옛사람도 그보다 더 홀가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 산천과 귀신도 못내 그리워할 터인데 더구나 사람이겠는가. 이에 고을 사람들이 가신 이를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 남기신 은택을 칭송하는 뜻을 비석에 새겨 잊지 못해하는 의미를 부치는 바이다.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후(侯) 오심 어이 저리 더디셨으며, 후 가심 어이 이리 이르단 말가. 가뭄 끝 구름 일어 단비 뿌리고, 맑고 밝은 정사는 얼음이요 달빛. 끼치신 은택 받은 고을 백성들, 가슴속 길이길이 간직하리라.〔侯來何遲 侯去何疾 沛雲甘雨 淸氷皓月 民受其賜 永懷無射〕’ ” 하였다. -
17년 우리나라 선조 22년 기축(1589) 선생 47세
○ 배우는 자들과 《심경》을 강론하였다.
○ 최수우(崔守愚)가 찾아왔다. - 이때 선생은 회연(檜淵)에 있었다. -
18년 우리나라 선조 23년 경인(1590) 선생 48세
○ 배우는 자들과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였다.
19년 우리나라 선조 24년 신묘(1591) 선생 49세
○ 봄에 사창(社倉)으로 머물러 살 곳을 옮겨 정하였다. - 회연 아래 10리 거리에 있다. ○ 신축한 집을 주제로 지은 절구 한 수가 있는데, “변변찮은 생애에 아담한 보금자리, 앉을 자리 있으면 그걸로 만족이라. 초가지붕 밑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몸, 기와집 새집살이 호화롭기 그만일레.〔小小生涯小小家 志存容膝更無加 半生已熟茅茨下 瓦覆新居便覺奢〕”라고 하였다. -
○ 11월에 통천 군수(通川郡守)에 제수되어 12월에 폐사(陛辭)하였다.
○ 양주(楊州)와 양근(楊根)에 있는 선영(先塋)을 둘러보았다. - 5대조의 무덤은 양주에 있고, 6대 조비(祖妣)의 무덤은 양근에 있다. -
20년 우리나라 선조 25년 임진(1592) 선생 50세
○ 1월에 통천 임지에 부임하였다.
○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 여름에 왜노(倭奴)가 침략해 들어와 삼도(三都 경주, 한양, 평양)를 잇달아 함락시키고 대가(大駕)가 서쪽의 용만(龍灣)으로 피난가자, 마침내 각 고을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 변란이 뜻밖에 터져 그 상황이 몰아치는 비바람처럼 걷잡을 수 없었다. 감사와 수령들은 모두 도망쳐 버려 대가가 파월(播越)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임금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때 선생만 홀로 음식을 바치자 임금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
○ 《통천지(通川志)》가 완성되었다.
21년 우리나라 선조 26년 계사(1593) 선생 51세
○ 8월에 품계가 특별히 통정대부로 올라가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이 내렸다. - 이때 선조의 동복형 하릉군(河陵君 이린(李鏻))이 전란을 피해 통천의 산골에 숨어 있다가 토적(土賊)이 왜적을 인도하여 갑자기 들이닥치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선생이 죄인들을 문초한 끝에 비로소 그 사실을 알고 직접 그 장소로 가 시신을 찾아서는 관곽(棺槨)을 갖춰 임시로 매장한 뒤에 토적을 체포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상은 매우 슬퍼하고 전교하기를, “정구의 은혜를 내가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 우선 당상관으로 품계를 올려 나의 고마운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 11월에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조정으로 들어와 폐사(陛辭)하는 것을 면제하라고 명하였다.
○ 윤12월에 부임하였다. - 전란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여 공사 간의 재정이 고갈되었다. 선생은 모여드는 사람을 위로하여 안착시키고 많은 정사를 치밀하게 처리하였다. 둔전(屯田)을 통해 곡물을 비축하여 군량을 대주고 자신의 녹봉을 떼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함으로써 많은 생명을 건졌다. -
22년 우리나라 선조 27년 갑오(1594) 선생 52세
○ 《임영지(臨瀛誌)》가 완성되었다.
○ 11월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이 내렸다.
23년 우리나라 선조 28년 을미(1595) 선생 53세
○ 2월에 우부승지에 승진되고 겸직은 예전과 같았다. - 하루는 경연에 입시하여 《역전(易傳)》을 진강(進講)하는데, 선조가 묻기를, “《주역》의 정전(程傳)과 본의(本義) 가운데 무엇을 먼저 익히고 무엇을 나중에 익혀야 하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역(易)의 도(道)는 오직 사물의 성쇠 변화하는 이치와 진퇴 존망하는 기미를 밝혀 시의적절한 조처를 잃지 않는 것이니, 한갓 점을 쳐서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것은 역의 말단입니다. 그러니 신의 생각으로는 정전을 먼저 익혀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주자(朱子)는, 한탁주(韓侂胄)가 권력을 장악하고 조여우(趙如愚)가 문책을 당한 일 때문에 봉사(封事)를 갖춰 한탁주의 간사한 실상을 극론하였다. 그 글이 만일 조정에 들어갔더라면 송나라 판도가 어쩌면 달라질 수도 있었을 법한데 도리어 둔괘(遯卦)를 만나 그 희망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점대로 길흉화복을 점치는 방법은 천하에서 지극히 신통한 것이라 할 수 없는데도 주자가 반드시 이 점괘에 의존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송나라 영종(寧宗)이 과연 성상의 말씀대로 그 봉사를 한번 보고 곧바로 한탁주를 축출할 것이라면 그 점괘는 필시 둔괘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이 점대로 길흉화복을 점치는 일이 지극히 신통한 이유입니다.” 하자, 임금이 기뻐하는 기색을 띠고 한자리에 있던 경연관들이 탄복하였다. -
○ 4월에 좌부승지로 승진하였다.
○ 6월에 체직되어 의흥위 상호군(義興衛上護軍)에 붙여졌다가 조금 뒤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제수되었다.
○ 7월에 우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 8월에 호분위 호군(虎賁衛護軍)으로 붙여졌다.
○ 9월에 다시 우승지에 제수되었다.
○ 명(明)나라 사신을 문안하는 문안사(問安使)에 차임(差任)되어 남원(南原)을 거쳐 밀양(密陽)으로 갔다. - 이때 명나라가 일본 관백(關伯)을 국왕으로 책봉하기 위해 사신을 내보냈다. 정사(正使) 이종성(李宗城)은 남원에 머무르고 부사(副使) 양방형(楊邦亨)은 밀양에 머물러 있었는데, 선생이 왕명을 받들고 이들을 문안하고 돌보아 주기를 예법에 맞게 하니, 명나라 사신이 선생을 공경하였다. -
○ 10월에 좌부승지로 옮겼다. 24일에 복명(復命)하였다.
○ 12월에 체직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붙여졌다가 다시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24년 우리나라 선조 29년 병신(1596) 선생 54세
○ 1월에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폐사(陛辭)하였다. - 선조가 인견하여 산성을 수축하고 군량을 조처하여 준비할 것을 애써 당부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우둔하지만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서의 온 힘을 쏟겠습니다.” 하였다. 아울러 고(故) 김성일(金誠一)을 포상하고 높여 충성을 장려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 교서(敎書)는 부록에 나와 있다. -
○ 2월에 원주(原州)에 도착하여 석전제(釋奠祭)를 몸소 행하였다.
○ 강원도 지역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각 고을을 순행하던 중에 영월(寧越)에 이르러 노산군(魯山君)의 제단을 봉심(奉審)하고 강릉(江陵)에 이르러 몸소 순국열사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또 부패된 시체를 매장하게 하면서 각 고을로 하여금 다 그와 같이 하도록 하였다.
○ 영원산성(鴒原山城)을 쌓았다. - 이때 왜적이 해변에 주둔해 있고 명나라 군대가 대거 남하하고 있었다. 선생은 각 고을에 엄히 신칙하여 병력을 이동하고 군량을 운반하여 전장(戰場)으로 보냈다. 그리고 영원산이 험한 강 상류에 위치함으로 인해 보루가 될 수 있겠다 하여 마침내 승려를 모아 산성을 쌓은 뒤에 장졸들을 뽑아 들여보냈으며 무기를 꼼꼼히 수리하고 기율을 확립하여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
○ 4월에 체찰사(體察使) 막부(幕府)에 모여 군무(軍務)를 논하고 아울러 선대의 묘소를 살펴본 뒤에 돌아왔다. - 이때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서 성주(星州)에 머물러 있었다. -
○ 5월에 병으로 정고(呈告)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이 내렸다.
○ 8월에 고려 원충갑(元沖甲)의 사당을 영원성 위에 세웠다. - 원충갑은 원주 사람이다. 충렬왕(忠烈王) 때 합단(哈丹) 적병이 치악성(雉岳城)을 포위하고 온갖 꾀를 써 가며 공격하여 성이 거의 함락될 상황에 처했을 때 원충갑이 진사(進士)의 신분으로 별초군(別抄軍)에 소속되어 열 번의 전투 끝에 크게 승리하였다. ○ 치악은 지금의 영원이다. -
○ 고려 처사(處士) 운곡(耘谷) 원공(元公)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 원공의 이름은 천석(天錫)이다. 우리 태종(太宗) 공정대왕(恭定大王)이 평민이었을 때 함께 공부하였는데, 뒤에 보위(寶位)에 오르자 치악산에 숨어 버렸다. 임금이 그의 집에 거둥하여 그를 기다렸으나 천석은 피하고 만나 보지 않았다. ○ 제문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9월에 참봉(參奉) 정사철(鄭師哲)과 문생(門生) 진섬(陳暹)을 그들의 고향에 반장(返葬)하라고 명하였다. - 정사철은 대구(大丘) 사람으로 선생이 일찍이 그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고, 진섬은 경산(慶山) 사람으로 또한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임진년 전란 때 정사철은 거창(居昌)에서 죽고 진섬은 영천(永川)에서 죽었는데, 이때 선생이 그들이 타향에서 죽은 것을 슬퍼하고 관곽을 갖춰 반장하게 하였다. -
○ 《관동지(關東志)》가 완성되었다.
○ 10월에 재차 사직한 끝에 체직되고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붙여졌다. 얼마 뒤에 우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여주(驪州)에 이르러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 11월에 용양위 대호군(龍驤衛大護軍)에 붙여졌다.
○ 12월에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25년 우리나라 선조 30년 정유(1597) 선생 55세
○ 1월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 2월에 의흥위호군 겸 오위장(義興衛護軍兼五衛將)에 붙여졌다.
○ 3월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제수되었다.
○ 6월에 성천 도호부사(成川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 장단(長湍)을 지나가다가 선영(先塋)을 둘러보았다. - 조부 승지공의 무덤이 그곳에 있다. -
○ 7월에 부임하였다. - 이때 왜구가 다시 호남과 호서를 침범하여 장차 횡행할 기세가 있었으므로 제궁(諸宮)과 왕자들이 성천에 머물러 있었다. 선생이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을 깍듯이 예우하면서도 어김없이 법도를 준용하여 여러 왕자와 시종하는 신료들이 공경하고 삼가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임금도 여러 왕자에게 하교하기를, “성천 부사는 어진 인물이다. 경계하고 삼가 허물을 짓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26년 우리나라 선조 31년 무술(1598) 선생 56세
○ 10월에 품계가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라가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이 내렸다.
○ 조정의 명을 받고 무학사(武學祠)를 세워 고려 때의 상장군(上將軍) 정의(鄭顗)와 자주 부사(慈州副使) 최춘명(崔椿命)을 향사하였다. - 상장군은 선생의 선조로 서경(西京)의 난리에 죽었고, 부사도 선생의 외선조로 자주성(慈州城)을 지키며 적과 대항하고 굽히지 않았다. 모두 큰 절의를 세웠다. 이때 조정에서 각 도(道)의 진관(鎭管)에 무학사를 세워 전대의 충신을 향사할 것을 명하였으므로 선생이 명을 받들어 시행하고 아울러 무학사서(武學祠敍)와 시를 지어 이들 두 사람의 훈업과 절의를 드러냈다. -
○ 《중화집설(中和集說)》과 《고금충모(古今忠謨)》를 편집하였다.
27년 우리나라 선조 32년 기해(1599) 선생 57세
○ 《고금회수(古今會粹)》, 《낙천한적(樂天閒適)》, 《주자시분류(朱子詩分類)》를 편집하였다.
28년 우리나라 선조 33년 경자(1600) 선생 58세
○ 1월에 임기가 차서 체직되어 충좌위 부호군(忠佐衛副護軍)에 붙여졌으나 병 때문에 맡지 않았다. 서울로 들어가던 중 양덕현(陽德縣) 촌가에 머물러 있으면서 상소하여 직명을 벗겨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이 내렸다.
○ 6월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서거하여 대궐로 달려가 곡림(哭臨)하였다.
○ 9월에 충무위 사직(忠武衛司直)에 붙여졌다.
○ 10월에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제수되었다.
○ 상소하여 산릉(山陵)의 일을 논하였다. - 이때 산릉의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장사를 치를 기일이 목전에 닥쳤는데, 지사(地師) 박자우(朴子羽)가 요망한 설을 주장하여 장차 큰일을 혼란스럽게 할 판이었다. 선생이 상소하여 그의 황당무계한 작태를 극력 개진하였다. 상소는 문집에 나와 있다. -
○ 형조참판 겸 관상감제조(刑曹參判兼觀象監提調)에 제수되었다.
29년 우리나라 선조 34년 신축(1601) 선생 59세
○ 3월에 체직되어 의흥위 사정(義興衛司正)에 붙여졌다.
○ 9월에 영월 군수(寧越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10월에 용양위호군 겸 경서언해교정청당상(龍驤衛護軍兼經書諺解校正廳堂上)에 붙여졌으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횡성(橫城)에 임시로 몸을 부쳐 살았다.
○ 《성현풍범(聖賢風範)》을 편집하였다.
30년 우리나라 선조 35년 임인(1602) 선생 60세
○ 1월에 용양위 호군에 붙여졌다가 얼마 뒤에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 탄금대(彈琴臺)에서 전사한 장졸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 임진년 전란 때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탄금대에서 패배하여 장졸들이 모두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때 선생이 몸소 그곳을 찾아가 제사 지냈다. 제문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2월에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선영을 살펴본 뒤에 신연(新淵) 송사이(宋師頤), 송암(松庵) 김면(金沔),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존재(存齋) 곽준(郭䞭), 청휘(晴暉) 이승(李承)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 제문은 모두 문집에 나와 있다. -
○ 4월에 경서언해교정청 당상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달려갔다. 용양위 호군에 붙여졌다가 또 본위(本衛)의 사직(司直)에 붙여졌다.
○ 7월에 호분위 호군에 붙여졌다.
○ 8월에 용양위 부사직(龍驤衛副司直)에 붙여졌다.
○ 10월에 호분위 사직에 붙여졌다.
○ 11월에 중씨(仲氏) 서천군(西川君)의 상을 당하였다. - 이때 선생이 서울 도성에 있으면서 몸소 초상을 치렀는데 정리(情理)와 예법이 다 곡진하였다. -
○ 12월에 용양위 부호군에 붙여졌다가 또 의흥위 호군에 붙여졌다.
31년 우리나라 선조 36년 계묘(1603) 선생 61세
○ 2월에 중씨(仲氏)를 장단(長湍)에 장사 지냈다. - 제문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3월에 정사(呈辭)하여 체직되자 물러나 목천(木川)에 우거하였다. - 본 고을 선비들이 선생으로부터 장려를 많이 받았다. -
○ 여름에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9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 숙야재(夙夜齋)가 완성되었다. - 재(齋)는 한강(寒岡) 북쪽에 있다. ○ 〈가야산을 바라보며〔望倻山〕〉라는 제목의 절구 한 수가 있는데, “전신의 참모습을 아니 내놓고, 기묘한 한 꼭대기 살짝 드러내. 조물주 숨은 뜻을 알겠고말고, 인간 행여 천기를 보게 할 수야.〔未出全身面 微呈一角奇 方知造化意 不欲露天機〕” 하였다. -
○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과 《심경발휘(心經發揮)》 등 서적을 편찬하였다.
○ 겨울에 김동강(金東岡)의 상을 당했다. - 선생은 동강과 한고을에 살면서 한선생의 문하에 유학(遊學)하여 살아생전에는 도(道)가 서로 부합하는 낙(樂)이 있었고 그가 죽었을 때는 문운(文運)이 쇠퇴해진 데 따른 아픔을 지녔다. 제문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정인홍(鄭仁弘)과 절교하였다. - 선생은 처음에 정인홍과 함께 남명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때부터 이미 그의 기질이 강퍅하여 남을 시기하고 해치는 성향이 있으므로 그와는 함께 선(善)을 도모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정인홍이 남명의 문집을 엮으면서 자신의 편견을 고집하여 초고의 취사선택을 부당하게 하는가 하면 거침없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退溪)를 비방하였으므로 선생이 그와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
32년 우리나라 선조 37년 갑진(1604) 선생 62세
○ 봄에 오창정(五蒼亭) - 오창정은 한강 북쪽에 있다. 위도 푸르고 아래도 푸르고 앞쪽도 푸르고 뒤쪽도 푸르며, 그 중앙에 창안백발(蒼顔白髮)의 자신이 있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 과 천상정(川上亭) - 천상정은 한강 서쪽에 있다. - 을 지었다.
○ 여름에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무흘정사(武屹精舍)가 완성되었다. - 무흘은 성주의 서쪽 수도산(修道山) 속에 있는데, 천석(泉石)이 정갈하고 인가(人家)가 멀리 떨어져 있다. 선생이 이곳에 초가삼간을 세워 서책을 보관하고 편히 쉬는 장소로 삼았으나 그 깊은 뜻은 사람들을 피해 있고 싶어서였다. 편액을 서운암(棲雲庵)이라 하였다. 서운암 밑에는 비설교(飛雪橋)와 만월담(滿月潭)이 있고, 만월담 위쪽에 자이헌(自怡軒)이 있는데 나무를 얽어 만들었다. 서운암 동쪽에는 산천암(山泉庵)이 있다. 바위틈에서 샘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소리가 마치 옥을 굴리는 것처럼 맑다. 주자가 지은 ‘깊은 밤 베갯머리 산골 샘 소리〔夜枕山泉響〕’의 뜻을 취해 이름하였다. 그 위쪽에는 와룡암(臥龍巖)이 있고 그 위에 장암(場巖)이 있는데, 바위 비탈이 깎아지른 듯 서 있고 반석이 평평하게 깔려 있다. 그 위에는 폭포가 흐르고 높이가 100여 척이나 된다. 그 왼쪽 곁으로 가서 말라죽은 고목을 태우고 터를 고른 뒤에 정자를 짓고 완폭정(玩瀑亭)이라 이름하였다. ○ 〈야영(夜詠)〉이란 제목의 절구 한 수가 있는데, “산봉우리 지는 달 시냇물에 어리는데, 나 홀로 앉았을 제 밤기운 싸늘하다. 여보게 벗님네들 찾아올 생각 마소, 구름 짙고 쌓인 눈에 오솔길 묻혔거니.〔峯頭殘月點寒溪 獨坐無人夜氣凄 爲謝親朋休理屐 亂雲層雪逕全迷〕” 하였다. -
○ 《염락갱장록(濂洛羹墻錄)》과 《수사언인부록(洙泗言仁附錄)》 등 서적을 편집하였다.
○ 《경현속록(景賢續錄)》을 저술하였다.
○ 《와룡암지(臥龍巖志)》를 저술하였다.
○ 9월에 지지당(止止堂) 김 선생(金先生)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 김 선생의 휘는 맹성(孟性), 자는 선원(善源)이며 성종조(成宗朝) 사람이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당시의 명현(名賢)들이 모두 스승으로 섬기고 존경하였다. -
○ 현풍(玄風) 사류들과 의논하여 송림(松林)에 서원을 세웠다. - 현풍현 동쪽에 지난날 쌍계서원(雙溪書院)이 있었다. 이곳은 한훤당 김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었는데 임진년 전란에 불타 버렸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김 선생의 무덤 밑에 터를 잡아 서원을 옮겨 세웠다. 방백(方伯)이 계청(啓請)하여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
○ 《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를 저술하였다. - 선생이 일생 동안 주자를 존경하여 주자가 도를 강론하거나 깃들어 쉬었던 장소까지도 상상하며 흠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운곡(雲谷)ㆍ무이산(武夷山)ㆍ백록동(白鹿洞)ㆍ회암(晦庵) 등지에 관련된 서(序)ㆍ기(記)ㆍ제영(題詠)ㆍ사적(事跡)을 수집하여 모아 한 책으로 만들고 그와 같이 이름하였다. -
33년 우리나라 선조 38년 을사(1605) 선생 63세
○ 3월에 팔거현(八莒縣) 대곡(大谷)을 찾아가 외선조 이공(李公) 휘 철돈(鐵墩)의 무덤을 둘러보았다.
○ 4월에 해주 목사(海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10월에 백씨(伯氏)를 창평(蒼坪) 선영의 왼쪽으로 반장(返葬)하였다. - 백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 후사가 없었다. 선생은 맏형수를 받들어 모시되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고 그 두 딸을 시집보내 줬는데 다 제때를 놓치지 않았다. 또 서천군(西川君)의 막내아들 직(㮨)을 후사로 삼아 종가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
○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재건하였다. 초당 동쪽에 초가 한 칸을 따로 짓고 편액을 망운암(望雲庵)이라 하였다. - 선생은 회연이 선영이 있는 곳과 가깝다는 이유로 이 망운암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한가로이 지내면서 선영을 우러러 바라보는 정성을 들였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
34년 우리나라 선조 39년 병오(1606) 선생 64세
○ 5월에 초하루와 보름에 모여 통독(通讀)하는 모임의 규약을 정하였다. - 선생은 본 고을의 자제들이 전란으로 인해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걱정한 끝에 과조(科條)를 만들어 공부를 권장하고 감독하였다. 회의(會儀)와 강법(講法)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8월에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9월에 현풍(玄風)으로 가서 도동서원 사우를 참배하고, 10월에 김 선생(金先生 김굉필(金宏弼))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11월에는 삼가(三嘉)에 가서 용암서원(龍巖書院) 사우를 참배하고 이어 진주(晉州)로 가서 덕산서원(德山書院) 사우를 참배한 뒤에 조 선생(曺先生 조식(曺植))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산음(山陰)을 지나가다가 오덕계(吳德溪)의 무덤에 제사 지냈으며, 함양(咸陽)에 이르러 남계서원(蘫溪書院) 사우를 참배하고 정 선생(鄭先生 정여창(鄭汝昌))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 제문은 모두 문집에 나와 있다. -
○ 《치란제요(治亂提要)》를 저술하였다.
35년 우리나라 선조 40년 정미(1607) 선생 65세
○ 1월에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자, - 선생은 은명(恩命)을 여러 번 입고서도 고향에 물러나 있는 것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조정에 들어가 사은숙배하였다. 그러고 나서 몸이 늙고 병들어 백성과 사직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을 개진하고 아울러 국법에 나이 65세가 된 자는 수령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인용하여 사양하였다. - 대답하기를, “경은 지난날의 시종신(侍從臣)으로서 고향 집에 오랫동안 물러나 있으니, 나는 그 이유를 몰라 항상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정으로 들어와 벼슬살이를 해야 한다. 어찌 물러가서야 되겠는가. 경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기력이란 각자 같지 않은 법이니, 구애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다시 사직소를 올려 체직해 줄 것을 청하려 하던 중에 어느 대신이 임금에게 자신을 단단히 만류하라고 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 두 건의 사직소는 모두 문집에 나와 있다. -
○ 3월에 폐사(陛辭)하고 조촐한 행색으로 부임하였다.
○ 도중에 양근(楊根)을 지나가다가 선대 조상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 제문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4개 고을의 산수를 두루 찾아본 뒤에 죽령(竹嶺)을 넘어 풍기(豐基)에 도착하여 황금계(黃錦溪 황준량(黃俊良))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예안(禮安)으로 가서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역동서원(易東書院)의 사우를 참배하고 퇴계 선생과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 제문은 모두 문집에 나와 있다. -
○ 안동부에 도착해서는 외선조인 태사(太師) 권행(權幸),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과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 제문은 모두 문집에 나와 있다. -
○ 유서애(柳西厓)의 상을 당해 두 번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 서애의 휘는 성룡(成龍), 자는 이현(而見)이다. ○ 제문은 모두 문집에 나와 있다. -
○ 한 사노(寺奴)가 권세 있는 재상의 위세를 믿고 약한 백성을 침해하자 그를 잡아들여 죄를 다스렸다. 많은 사람이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결국 그의 죽음을 용서하지 않았다.
○ 조정의 명에 따라 《역전》을 판각하였다. ○ 《태극도설(太極圖說)》과 《계몽도서(啓蒙圖書)》를 판각하였다. - 《도서(圖書)》에 발문을 썼다. 문집에 나와 있다. -
○ 《서원세고(西原世稿)》를 판각하여 무흘정사(武屹精舍)에 수장하였다. - 앞서 서천군(西川君)이 선대 조상들이 남긴 글을 수집하여 모아 한 질의 책으로 만들고 이름을 《서원세고》라 하였는데, 이때 선생이 그 판본을 가지고 판각하였다. -
○ 선대의 묘지문(墓誌文)을 지었다. - 지문(誌文)은 모두 문집에 나와 있다. -
○ 《고금인물지(古今人物志)》와 《유선속록(儒先續錄)》 등 서적이 완성되었다.
○ 《복주지(福州志)》가 완성되었다.
○ 11월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36년 우리나라 선조 41년 무신(1608) 선생 66세
○ 1월에 정인홍(鄭仁弘)이 나포되어 가까운 지역을 지나가자 아들 장(樟)을 보내 위문하였다. - 정인홍이 나포되어 갈 적에 스스로 사업을 크게 이루었다고 생각하여, 내심 선생이 반드시 나와서 자기를 만나 볼 것으로 알았으나 선생이 결국 보이지 않자, 이때부터 유감을 더 크게 품어 없는 죄를 날조하는 작태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
○ 2월에 선조가 승하하여 즉시 대궐로 달려가 곡림(哭臨)하였다.
○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였다.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龍驤衛副護軍兼五衛都摠府副摠官)에 붙여지자 정사(呈辭)하였다.
○ 3월에 사헌부대사헌 겸 세자보양관(司憲府大司憲兼世子輔養官)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 선생이 부총관의 신분으로 정사한 문건을 정원(政院)이 미처 입계(入啓)하기 전에 광해군이 선생의 성명을 익히 들어온 터라 전교하기를, “정구는 산림의 어진 선비로서 선왕(先王)께서 일찍이 예우하셨던 인물이다. 지금 마땅히 상규(常規)를 따지지 말고 우선 발탁해 써서 덕이 없고 식견이 어두운 나의 자문에 대비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원자(元子)를 보좌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담당하게 하라.” 하였다. -
○ 해유(解由)를 거치기 전에는 다른 관직을 함부로 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상소하여 체직해 줄 것을 청하니, - 이때 조정에서는 한창 유영경(柳永慶)의 죄를 다스리던 중이었는데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잇달아 일어났다. 선생은 상소하여 사직하고 아울러 옥사에 관해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체로 관원을 제수할 때는 반드시 해유를 마쳤는지 알아보아야 한다고 국법에 명시되어 있고, 그것을 역대로 지켜 내려와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평범한 관료의 경우라 하더라도 이를 어길 수 없는데 더구나 법을 맡은 관료의 장관으로서 국법에 따라 백관의 잘잘못을 규찰하고 온 사방의 본보기가 되는 입장이니, 그 책임이 과연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그 책임자가 먼저 스스로 법을 무너뜨려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성상께서 새로 즉위하시고 선왕의 재궁(梓宮)이 빈소에 계시는 이때 역변(逆變)이 혈족 사이에서 일어났으니 사실을 조사하여 처결하는 과정에 반드시 은정과 의리를 다 보전해야 할 것이며, 원흉(元兇)이 선대(先代) 임금의 신하 속에서 나왔으니 국법을 적용하는 과정에 마땅히 처지를 감안하여 너무 각박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강직하고 공명정대하여 미묘한 곡절을 살피고 사리에 밝은 인물로서 당시의 공론을 이끌어 가는 자를 얻어, 우리 성상의 거룩하신 덕과 효성이 유감 없이 다 반영되어 역사책에 빛남으로써 백대를 두고 우러러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사리에 어둡고 무능하며 식견이 부족한 신과 같은 자가 감히 나라의 금기를 깨고 자리를 함부로 차지함으로써 한때의 중대한 일을 그르치게 하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 답하기를, “경의 이름을 들어온 지 오래인데, 지금 경의 상소를 보니 지당한 논의가 매우 가상하다. 내가 덕이 없고 우매하여 이런 망극한 아픔을 겪고 또 일찍이 전대에 없던 변을 만나 제현(諸賢)과 함께 국사(國事)를 이루어나갈 생각으로 있다. 경은 이와 같은 때에 어찌 상규와 소소한 절차를 문제 삼아 물러갈 생각을 하는가. 경은 비록 질병이 있기는 하나 조리하면서 공무를 행할 수 있으니, 사양하지 말고 당당하게 조정에 서서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 9일부터 13일까지 세 번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 16일에 또 상차(上箚)하여 굳이 사양하니, 답하기를, “현자를 등용하는 데에 어찌 상규에 얽매일 것이 있겠는가. 당초에 이미 해조(該曹)에 말해 두었으니,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 것이며 병을 조리한 뒤에 출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 차자는 문집에 나와 있다. -
○ 19일에 마침내 출사하였다. 또 해유를 거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간곡히 사양하니, 답하기를, “경이 출사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 내가 매우 섭섭하던 차에 이제 나와서 사은숙배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실로 내 마음이 풀린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무엇보다 기강을 바로잡는 일이 시급한데, 이는 실로 헌부의 책임이다. 경은 사양하지 말고 힘써 맡은 직무를 다하여 부족한 나를 보좌하도록 하라.” 하였다. - 계사(啓辭)는 문집에 나와 있다. -
○ 22일에 동료와 회합하기로 약속하였으나 병이 나서 가지 못하였다. 또 이사호(李士浩)가 상소하여 대간(臺諫)을 배척한 일로 다시 네 차례나 인피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계사는 문집에 나와 있다. -
○ 26일에 다시 상차하여 사직을 청하고 아울러 임해군(臨海君)을 사형에서 용서해 줄 것을 청하니, - 이때 조정에서는 한창 임해군의 옥사를 다스려 기어코 죽이고 말 작정으로 있었다. 선생은 다시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지금 상중에 계시어 심기가 편하지 않으신 가운데 또 이전에 보기 드문 이런 변고를 당하셨습니다. 이는 비록 종묘사직의 안위와 관계된 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점이 있기는 하나, 신이 삼가 생각건대, 전하의 개인적인 마음은 선왕께서 임종하실 때 남기신 간곡한 명이 항상 귓전에 쟁쟁히 남아 있어 근심스럽고 불안하여 밤낮으로 편치 못하실 것입니다. 신이 날마다 죄인을 추국(推鞫)하는 말석(末席)에 참여하여 옥사의 실정을 살펴보았는데, 연루된 자가 많아 시일이 지연되고 있으니, 어떻게 자세히 실상을 조사하고 올바로 처리하여 성조(聖朝)의 공명정대한 다스림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체포하여 구금한 사람 중에는 종실 친척이 많은데, 미처 조사를 마치기도 전에 곤장을 맞아 죽은 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만일 모의에 참여한 사실이 있어 죄가 공공연히 죽일 만하다면, 그런 자를 붙잡아 처벌하지 않는 것은 진정 형벌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사실이 미처 밝혀지기 전에 간혹 원통함을 안고 죽어 간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촌수야 비록 가깝고 먼 차이가 있기는 하나 사실 그도 조상의 혈기 중에 한 줄기를 나누어 받은 자입니다. 그 이름이 역적의 입이 아닌 떠도는 소문에서 흘러나온 것이고 역적과 비밀히 유대 관계를 맺은 흔적도 다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했으니, 이 또한 어찌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과거 중묘조(中廟朝) 때 왕자의 변으로 인해 옥사가 크게 일어날 상황이었는데, 인종대왕(仁宗大王)이 그 당시 동궁에 계시면서 상소하여 그 죄를 용서해 주길 빌었습니다. 그 상소에서 말씀하기를, ‘천륜의 친족은 한 기운에서 갈려 나온 것으로 숨길이 서로 통하니 절로 우애의 정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비록 비상한 변고가 뜻밖에 일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옛사람들은 오히려 은정으로 덮어 버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고, 또 ‘형제간에는 노여움을 품어서도 안 되고 원망을 지녀서도 안 되니, 형이 천자가 되었는데 아우가 필부로 있으면 되겠느냐.’라고 한 맹자(孟子)의 설을 인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민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 말씀이 미담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상께서 처하신 상황이 은연중에 그와 서로 부합하니, 그 어찌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의 법도가 다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이 반역을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면하고 촉(蜀)으로 유배되자, 원앙(袁盎)이 간하기를, ‘갑자기 열악한 기후로 인해 병이 나서 죽는다면 폐하께서는 아우를 죽였다는 이름을 얻을 것입니다.’ 하니, 문제가 말하기를, ‘나는 그저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유장이 결국 죽자, 문제는 통곡하며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신은 항상 문제가 당초에 원앙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성상의 형제들 가운데 같은 어머니에게서 소생한 형제는 임해군 한 분일 뿐입니다. 선빈(先嬪 공빈(恭嬪) 김씨)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형제 두 분이 외로이 함께 자라 잠자리에 들거나 밥상을 대할 적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셨으니, 신은 전하의 지극한 정으로 볼 때 더한층 차마 못하는 점이 있으실 줄 압니다. 그런데 임해군이 스스로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를 지어 성상께 크나큰 근심과 슬픔을 끼쳤으니, 신은 이 때문에 심장이 썩고 창자가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은정과 도리를 참작하여 임시변통으로 잘 처리할 그만한 길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 길은 오직 전하께서 공도(公道)에 따라 법을 적용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리를 깊이 생각하시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의견을 두루 청취함으로써 중도(中道)에 맞고 올바른 덕을 더욱 닦으시어 죄인을 추국하는 대신에게 한층 더 신중히 처리할 것을 명하소서. 옥사를 끝까지 조사할 필요가 없고 혐의자를 끝까지 물을 필요가 없으며, 죄상을 끝까지 밝힐 필요가 없고 법을 완전히 시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정도를 따르지 않은 잘못이 그중에 있게 된다 하더라도 임해군이 사형을 면하고 임금의 하해 같은 은혜 속에 여생을 마친다면, 왕랑(王郞)과 반역을 공모한 자들을 안심하도록 했던 한나라 광무제(光武帝)와 같은 조치가 되어, 한 자의 베와 한 말의 곡식도 동기간에 주기를 아까워했다는 문제(文帝)에 대한 그와 같은 야유가 오늘날 다시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 온 나라 신민들이 모두 대성인이 변고에 유감 없이 대처하신 것을 흠모하여 생각하기를, ‘성상의 우애가 이와 같고, 성상의 지극한 사랑이 이와 같고, 성상의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심이 이와 같고,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이처럼 훌륭하시구나.’ 하여, 인심이 만족스러워하고 사방이 모두 즐거워하며, 역사에 기록되고 후세에서 그것을 법으로 삼을 것이니, 그 어찌 처음 즉위하여 인심을 수습하는 중요한 방안이 될 뿐이겠습니까. 나아가 위로는 하늘에 계시는 선왕(先王)의 혼령을 위안해 드릴 수 있고, 또 요즈음 사랑하는 뜻으로 경고를 내리고 있는 천심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니 실로 가상하다. 나는 박덕한 사람으로 이와 같은 천륜의 변을 당하고 보니, 밤이나 낮이나 괴로워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으나 적절히 논의하여 처리하겠다.” 하고, 또 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 비망기에 이르기를, “나는 박덕한 사람으로 이와 같은 천륜의 변을 당하고 보니, 슬프고 가슴 아픈 나의 심정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이 일은 종묘사직의 안위와 관계되어 섣불리 처리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역모가 이미 여러 역적의 공초에 드러나 그 단서가 분명해졌다. 그에 연루된 사람과 비밀히 역모를 모의한 적을 종실이라는 이유로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심정이 상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 일이 어찌 나 한 사람만의 불행이겠는가. 실로 종사(宗社)와 국가의 불행이다. 다만 사체를 가지고 말한다면 법을 맡은 유사(有司)는 법을 집행하자는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법을 굽혀 은혜를 베푸는 문제는 그 일을 논할 사람이 따로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논의는 뒤죽박죽 질서가 없는 것 같아 후일의 폐단이 있을까 두렵다. 이 뜻을 정원은 알고 있으라.” 하였다. -
○ 28일에 마침내 피혐하고 파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 아뢰기를, “신은 본디 허술하고 우매하여 사체를 모릅니다. 오직 임금을 사랑하는 한 마음이 본성에서 우러나와 우리 임금이 허물을 짓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깊은 생각에서 감히 가슴에 품은 충정을 기탄 없이 개진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삼가 비망기에 전교하신 말씀을 보고 나니, 법을 집행하는 자리에 눌러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의 관직을 파척할 것을 명하소서.” 하였다. - 답하기를, “나의 소견을 우연히 언급했을 뿐이다.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 또 상소하여 자신의 허물을 열거하니, 답하기를, “재차 차자의 내용을 보고 경의 충정을 잘 알았다. 나의 뜻은 전에 이미 다 말하였다. 경은 부디 계속 사직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나의 미진한 점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 차자는 문집에 나와 있다. -
○ 4월에 2일부터 4일까지 세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그때마다 말미만 더 늘려 줬다.
○ 8일에 다시 정사(呈辭)하니, 답하기를, “경이 고사해 마지않는 것은 필시 나와 함께 국사를 다스리기에 불만스러워 그러할 것이니, 내 마음이 매우 부끄럽다. 경은 부디 마음을 가라앉히고 병을 조리하여 출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 10일에 부득이 또 출사하여 다시 상차하여 자신의 허물을 열거하니, 답하기를, “경이 출사했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마음이 놓인다. 경이 비록 병을 앓고 있다고는 하나 조리하여 공무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나의 잘못된 일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주도록 하라.” 하였다. - 차자는 문집에 나와 있다. - 이날 다시 정사하였다.
○ 13일에 또다시 정사하자 말미를 줬다.
○ 17일에 재차 정사하니 말미를 더 늘려 줬다.
○ 19일에 국상(國喪)의 복제(服制)에 관해 질문해 온 예조 판서의 편지에 답하였다. 또 절목(節目) 18조항과 예조의 계목(啓目)을 강정(講定)하였다. - 이때 박홍로(朴弘老)가 종백(宗伯)으로 있으면서 국상의 복제를 물어왔는데, 선생이 예경(禮經)에 근거하여 그에 답하였다. 편지, 절목, 계목은 모두 문집에 나와 있다. -
○ 20일에 세 번째 정사하였다. 21일에 윤허를 받고 즉시 도성을 나왔다. 목천(木川)에 도착하여 머물면서 국장(國葬) 날짜를 기다렸다.
○ 22일에 용양위부호군 겸 세자보양관에 붙여졌다.
○ 24일에 정원이 선생을 불러 돌아오게 할 것을 계청하였다. - 정원이 아뢰기를, “전 대사헌 정구는 체직한다는 명이 내린 뒤에 즉시 출발하여 목천으로 갔다고 합니다. 저번에 ‘이와 같은 사람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들어와 참여하게 하여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고 세자를 인도하는 임무를 맡기도록 하라.’라는 것으로 전교를 받들었습니다. 상께서 그를 중용(重用)하시려는 뜻이 간절한데도 갑자기 내려갔습니다. 그의 거취가 여느 관원의 진퇴와는 비견될 수 없으므로 그 소식을 듣고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원에서 말을 잘 만들어 타일러서 그가 빨리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라.” 하였다. -
○ 27일에 유서(諭書)로 불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 유서는 부록에 나와 있고, 상소는 문집에 나와 있다. -
○ 5월 30일에 또 유서로 불렀다. - 유서는 부록에 나와 있다. -
○ 6월에 형조참판 겸 세자보양관에 제수되자 즉시 명을 받고 목릉(穆陵 선조의 능호)의 인산(因山)에 회장(會葬)하였다. 다시 도헌(都憲 대사헌) 재임 시에 골육 간의 은정을 보전하라는 차자를 올린 일로 상차하여 자신의 과오를 개진하자, 다시 관대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 이때 대간이 바야흐로 합계(合啓)하여 죄인을 법대로 처벌하자는 일을 함께 요청함으로써 잘못된 논의가 나날이 기세를 더하여 전일에 은정을 보전하자고 청했던 신하들은 모두 그 벼슬자리에 눌러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편치 않았다. 선생은 마침내 떠날 생각을 굳히고 상차하여 물러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지난번 사헌부 관원으로 있을 적에 성상의 각별하신 예우에 깊이 감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가누지 못한 나머지, 성상께서 인효(仁孝)의 순수한 덕을 갖추고 천륜의 지극한 사랑을 보전하시길 기대하여, 감히 충정을 토로하는 차자를 올리고 아울러 사형을 면해 주시라는 청을 진달하였습니다. 지금 옥사를 국문하던 일이 이미 끝나고 논의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서 법대로 처벌하자는 주장이 서릿발처럼 등등합니다. 그리하여 너나없이 다 은정을 보전하자는 의견을 잘못으로 여깁니다. 신은 한층 더 부끄럽고 두려워 그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벌을 청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산릉(山陵)의 일이 막 끝난 뒤에 또 중국 관리가 내려와 온 나라가 경황이 없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신의 요청을 가지고 상중에 계신 전하의 심경을 혼란스럽게 해 드릴 수 없었습니다. 여러 날을 서성거리며 답답한 심정으로 죄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론(時論)이 더욱 준엄하고 물의(物議)가 비등하고 있습니다. 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스레 영광과 총애를 탐함으로써 신하로서 지켜야 할 거취의 도리를 크게 잃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즉시 배척해 내칠 것을 명하소서.” 하였다. -
○ 8월에 말미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 9월에 상소하여 체직해 줄 것을 청하였다. - 상소는 문집에 나와 있다. -
○ 충좌위 부호군에 붙여졌다.
37년 광해(光海) 1년 기유(1609) 선생 67세
○ 봄에 선영 밑에 모암(慕庵)을 지었다.
○ 8월에 부인 이씨(李氏)가 죽었다. 12월에 창평(蒼坪) 선영의 동쪽 간좌(艮坐 남서향) 언덕에 장사 지냈다.
○ 부인의 묘지(墓誌)를 지었다.
38년 광해 2년 경술(1610) 선생 68세
○ 여름에 본 고을 사람 박이립(朴而立)의 무함을 받아 고을 관아에 나아가 상소하고 대죄하니, - 박이립은 흉악하고 괴이한 자로 제 스스로 선생에게 버림을 받았다. 정인홍(鄭仁弘)의 친족 형제 아들인 정옹(鄭滃)은 곧 그의 외생질(外甥姪)인데, 그가 정옹의 사주를 받고 선생을 부도한 말로 무함하였다. 선생은 관아의 문밖에서 거적자리를 깔고 앉아 소장을 올려 자신의 입장을 진술하였다. - 답하기를, “저것이 저 혼자 괴이한 짓을 한 것이다. 경에게야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도내(道內)의 유생들이 대궐로 나아가 사실무근임을 밝히자, 이에 대해서도 관대한 말로 답하였다. -
39년 광해 3년 신해(1611) 선생 69세
○ 《역(易)》ㆍ《시(詩)》ㆍ《서(書)》 경문(經文)의 구결(口訣)을 바로잡았다.
○ 3월에 성주 고을 남쪽의 수륜동(脩倫洞)에서 외선조 박공(朴公) 판윤(判尹) 휘 가권(可權)과 목사(牧使) 휘 유성(柳星) 두 대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40년 광해 4년 임자(1612) 선생 70세
○ 1월에 팔거현(八莒縣) 노곡(蘆谷)으로 거처할 곳을 옮겨 잡았다. - 선생이 평소에 선영 밑에서 떠나지 않다가 선영이 정인홍이 사는 곳과 가깝다는 이유로 마침내 단안을 내려 팔거현으로 옮겨 잡았다. -
41년 광해 5년 계축(1613) 선생 71세
○ 여름에 역적 박응서(朴應犀)가 옥에 갇혀 있으면서 상변(上變)하여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기로 모의했다고 고하고 또 위로 자전(慈殿)까지 연계시킴으로써 사태가 장차 어찌될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은 궐문 밖에서 소리쳐 그 선처를 호소할 생각으로 즉시 조정으로 달려가다가 영동(永同)에 이르러 병이 나 더 가지 못하고 차자를 봉해 올리니, - 차자의 대략에, “반란과 역모의 변고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뜻밖에도 아름답고 밝은 세상에 흉악한 무리가 해마다 끊임없이 화란(禍亂)을 일으켰습니다. 죄인을 대략 다 체포하고 신문과 추국(推鞫)이 끝나 가던 차에, 일이 다시 내전(內殿)과 연관되어 성상께서 가슴 아파하시니,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근심하고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신이 나라로부터 받은 후한 은혜는 장차 죽어서 결초보은을 한다 해도 갚기 어렵습니다. 나라가 이러한 때 한 가닥 숨길이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궐로 기어가 전하의 아픈 가슴을 한번 위안해 드리는 정성을 펴지 못한다면, 평소에 나라를 위하던 정성을 장차 무엇으로 드러내 보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밤낮으로 마음을 썩이고 있다가 죽음을 각오하고 기운을 내 길을 떠나 조금씩 전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동(永同) 지방에 이르러 더위와 갈증에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져 있는데, 앞으로 병세가 호전될 가망이 없습니다. 이미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고 보니 오직 물러가 죽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이에 충정을 토로하여 죄인을 선처해 주실 것을 호소하고 신에게 엄중한 벌을 내리시길 기다립니다. 밝으신 성상께서는 가련한 마음으로 헤아려 주소서. 전하께서는 옛날에도 일찍이 없었던 이러한 변고를 당하여 깊은 밤에 근심과 슬픔으로 괴로워하고 계실 것인데, 이 일을 장차 어떻게 대처하시렵니까? 대의(大義)를 가지고 보면 진정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으니, 마땅히 지금 크게 일어나고 있는 여론처럼 쉽게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입장에서는 이에 대처할 때 혹시라도 미진한 점이 있다면, 천하와 후세의 의심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고 결국 성상의 몸에 누가 된다는 것을 또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참으로 신중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옛날 제왕들의 이미 지난 행적을 두루 상고하고 옛 성인이 변고에 대처한 도를 깊이 생각하시어, 정도(正道)와 권도(權道)의 경중을 따져 헤아리고 상례와 변칙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게 할 것을 생각하며, 이치상 당연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 성상의 마음에 반드시 편안한 것을 찾아냄으로써 자신이 행할 도리로 보아 조금도 미심쩍은 점이 없이 진선진미하도록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온 사방이 다 기뻐하고 후세에서 법으로 취할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변고에 대처하는 큰 법은 이것이 지극하다고 생각되며, 자손만대에 성상의 빛나는 성덕(盛德)을 더 보태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으로 봅니다.” 하였다. -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경의 뜻을 잘 알았다. 경은 병을 잘 조리하고 올라오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 1개월이 지난 뒤에 조정이 이미 김제남을 죽이고 대군(大君)을 여염집으로 내보내 안치하고서는 사형에 처하자고 청함과 동시에 또 자전을 별궁에 따로 거처하게 할 것을 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차자를 봉해 올리고 돌아왔다. - 차자의 대략에, “옛날 노(魯)나라 양공(襄公) 30년에 주(周)나라 경왕(景王)의 조정에 적신(賊臣) 담괄(儋括)이 반란을 일으켜 왕자 영부(侫夫)를 천자로 옹립하려 하였는데, 영부는 곧 경왕의 아우로서 사실 담괄이 자기를 옹립하려 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탄로 나자 담괄은 도망가고, 윤언다(尹言多)와 유의(劉毅) 등 다섯 사람이 함께 영부를 죽였으니, 그 죽음은 왕명이 아니었습니다. 공자가 《춘추》에서 그 사실에 관해 쓰기를 ‘천왕이 그의 아우 영부를 죽였다.〔天王殺其弟侫夫〕’ 하였는데, 선유(先儒)는 논하기를 ‘대체로 왕이 사람을 죽일 때는 그 사실을 쓰지 않고 반드시 죄가 없는 자를 죽일 때에만 쓴다.’ 하였습니다. 천자는 독단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므로 영부의 죽음은 마땅히 쓰지 않아야 하는데도 그 필법이 이와 같았으니, 영부가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성인이 그를 무죄로 처리하였던 것입니다. 사실을 따져 법을 적용한 그 뜻이 어찌 깊고 절실하며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영부의 죽음은 애당초 경왕의 뜻이 아니었고 다만 그것을 막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춘추》의 뜻을 풀이할 때, 좌씨(左氏)는 ‘죄는 왕에게 있다.’ 하였고, 곡량씨(穀梁氏)는 ‘왕이 지나쳤다.’ 하였으며, 두예(杜預)는 ‘골육을 해쳤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경왕이 지은 허물이 과연 어떠합니까. 그러고 보면 경왕의 허물은 저 다섯 대부가 만들어 낸 것이었는데, 오늘의 일이 우연히도 그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영창대군의 억울한 사정은 또 사실의 내용을 미리 몰랐던 저 영부의 경우보다 심하고, 조정의 논란이 그치지 않아 기어코 벌을 주라는 왕명(王命)을 받아 내려고 하는 점은 또한 경왕이 윤언다 등의 요구를 막지 못했던 일보다 심하지 않습니까. 그러고서 우리 성상께서 장차 어떻게 《춘추》의 의리를 따지는 천하와 후세 사람들에게 변명할 말이 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이 신이 매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이 전후에 걸쳐 아뢴 뜻을 깊이 헤아려 뭇사람의 논의에 흔들리지 마시고 대의(大義)를 정밀하게 구분하며 대륜(大倫)을 온전히 보전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성상의 마음이 편안하여 유감이 없을 것이고 성상의 행위도 그지없이 아름답고 거룩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후세에서 오늘의 전하를 보기를 마치 오늘날 옛 성인을 보듯이 하여 모두 와서 법으로 삼을 것이니, 그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또 한편 신은 사적인 걱정과 지나친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법을 적용하라는 계청이 한창 빗발치는데도 성상께서는 민가로 내보내는 정도로만 허락하셨으니, 그처럼 높고 두터운 은혜와 사랑은 일찍이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누가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어린아이는 연약하여 기혈(氣血)이 안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깊은 궁궐 넓은 집에서 편안히 지내다가 갑자기 습기 차고 비좁은 곳에 있게 되면, 추위와 더위에 노출되고 밥도 제때에 먹지 못할 것이며, 어머니가 그립고 옛 보금자리 생각이 난 나머지 슬퍼서 울어 댈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궐에서는 그런 소식을 듣거나 보지도 못하고 안부를 알아보거나 구해 주지도 못할 것이니, 그 스산한 안개와 이슬 속에 갑자기 죽지 않으리라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송나라 때 신하 주희(朱熹)가 일찍이 그의 임금 광종(光宗)에게 아뢰기를, ‘한나라 문제(文帝)는 생각을 약간 잘못하여 형제간에 베 한 자와 쌀 한 말을 주는 것도 아까워했다는 항간의 소문으로 일생 동안 괴로워하였으니, 비록 어진 군주라 하더라도 감히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깊이 우려되는 점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원컨대 조금 더 생각하시어 그 목숨을 살려 주심으로써 후회가 없도록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자전에 대해 정성과 공경을 다 바치신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고 흠앙하는 일인데 불행히도 흉변(凶變)이 일어나 바르지 못한 논의가 쏟아짐으로써 성상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니, 신은 매우 가슴이 아픕니다. 부자간의 큰 은혜는 하늘처럼 한량이 없는 것으로 그 사이에 일어난 변고에 대처하는 데에는 다 적합한 도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상도와 변칙은 일정하지 않고 순리와 역리는 상황이 다르므로 나 자신이 그에 대처하는 점에 있어서도 그에 따라 어렵거나 쉬운 차이가 있습니다. 한번 중요한 기회를 놓치면 곧 틈새가 벌어지게 마련이니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옛날 신하들은 ‘부모가 계시는 궁궐을 지날 때는 땅바닥에 엎드리며, 정성을 쌓아 마음을 올바른 쪽으로 인도하라.’라는 말로 임금을 권면하였는데, 오늘날 말하는 자들은 별궁에 따로 거처하게 하자는 것으로 청하고 있으니, 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옛 성인이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던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오늘의 변고에 대처하신다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두려워하고 삼가되, 반드시 순(舜) 임금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 이 세상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난날 섬기시던 그 자세를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다면, 순 임금 같은 성군이 되시는 길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오로지 한층 더 힘쓰시길 바랄 뿐입니다. 대체로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은 종묘사직의 대계(大計)이고 정성을 다 바쳐야 할 것은 모자간의 지극한 정입니다. 정성을 바치는 길은 여러 말 할 것이 없고 오직 잘못을 이해하고 불만을 참는 것으로 마음을 굳게 가지실 것이며, 설사 감히 언급할 수 없는 떠도는 말이 있더라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뜻을 따르며 사랑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다하면서 간곡하고 지극한 정성을 오랫동안 쌓는다면 그 어찌 감동하여 마음이 풀리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대처하는 방법이 완전하기로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온 천하 부자간의 윤리가 올바로 자리 잡는 거기에 순 임금이 기여했다.’라는 맹자의 말처럼 되는 그 갈림길이 오로지 전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수많은 사람이 방해하고 떠드는 소리들이 구름이 사라지고 안개가 흩어지듯 깨끗이 걷히고 서로 간에 화목하고 기뻐하여 화기가 넘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굳이 별궁에 따로 거처하시게 하여 서로 간에 간격이 없지 않은 것처럼 함으로써 바깥사람들에게 허점을 엿보는 빌미를 제공하여 이러니저러니 하는 논의를 빚어내게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무고(巫蠱) 사건이 뜻밖에 또 성명(聖明)한 세상에서 일어나 항간에 떠도는 말들이 이러쿵저러쿵 분분합니다. 신은 사실 그 전말을 잘 모르지만 한편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들리는 대로 그것이 사실로 밝혀져 죄를 지은 정범(正犯)이 이미 극형을 받았다면,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추종자들에 대해서는 큰 아량으로 포용해 주고 그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성상의 흔들리지 않고 의연한 뜻을 보여 주는 길이 될 것입니다. 밝은 태양 밑에는 바른 기운이 충만한 법이니 저 음산하고 요망한 재앙이 어찌 범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올린 말씀들은 성상의 뛰어나신 견해에 이미 다 정해진 것일 터인데 감히 다시 번거로움을 끼쳐 드렸으니, 그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 이때 아들 장(樟)이 도성에 있다가 차자의 내용을 보고는 화를 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그만 올리지 않았다. 선생은 그 소식을 듣고 더욱 분개하여 이전의 소장을 다시 베껴 쓰는 한편 별도로 간단한 차자를 갖추어 거기에 그 까닭을 진술하여 올리니, - 차자의 대략에, “신은 전일 호서(湖西)까지 올라왔다가 병이 들어 장차 물러가려 하면서 간단한 차자를 갖추어 북쪽 대궐을 바라보며 절하고 보냈습니다. 그때 신의 못난 자식이 서울에 있었는데 신의 차자를 보고는 시론(時論)에 위축된 나머지 신이 반드시 죽음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울면서 망설이다가 끝내 감히 올리지 못했습니다. 이는 신이 자식을 올바로 가르치지 못해서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신이 임금을 잘못 섬긴 것입니다. 성의가 모자라 어쩌다 생각난 소견을 올리지 못했으니, 이리저리 생각해 보면 죄가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이에 감히 이전의 초안을 수습하여 재차 한 부를 베껴 써서 반드시 임금께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신의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이미 완전하고 훌륭하게 조처하신 일에 대하여 다시 더 진선진미할 것을 도모하신다면, 신이 말한 ‘후세에서 오늘을 보는 것이 오늘날 옛 성인을 보는 것과 다름없어 모든 사람이 법으로 삼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 실로 당연한 이치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 답하기를, “경이 올린 두 건의 차자를 보니, 요순의 도가 아니면 임금에게 진달하지 않는 경의 뜻이 대견하다. 천하의 일이란 평범한 일을 대처하기는 쉽고 변란에 대처하기는 어려운 법인데 무능한 내가 불행히도 옛날에 없던 이런 변을 당하고 보니,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밤낮으로 걱정하느라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하였다.
○ 서천군(西川君)의 행장을 지었다. - 행장은 문집에 나와 있다. -
42년 광해 6년 갑인(1614) 선생 72세
○ 1월에 노곡(蘆谷)의 정사(精舍)가 화재를 당했다. - 선생이 저술한 많은 서적이 전부 잿더미가 되었고 몇몇 책만 다행히 화를 면했을 뿐이다. -
○ 사수(泗水) 가로 터를 옮겨 정했다. - 노곡 동쪽 수십 리 지점에 있다. -
○ 여름에 불에 타다 남은 것들을 수습하고 《오선생예설》을 다시 편찬하였다.
○ 10월에 아들 장(樟)을 잃었다. 12월에 창평(蒼坪) 선영의 서쪽에 장사 지냈다.
43년 광해 7년 을묘(1615) 선생 73세
○ 5월에 풍병에 걸려 오른쪽이 마비되었다. - 선생은 병에 걸린 뒤에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예전처럼 책을 보았으며 평소처럼 사람들을 맞이하였다. -
○ 《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를 편집하였다.
○ 가을에 박이립(朴而立)이 또 흉악한 소를 올려 선생에 대해 중벌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광해군도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불문에 부쳤다. - 이때 성주 사람 이창록(李昌祿)이 조정을 비방하는 말을 한 일이 있어 광해군이 대역죄로 다스렸는데, 정인홍(鄭仁弘)이 이이첨(李爾瞻)과 공모하여 그 화를 선생에게 전가시키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박이립이 그들의 사주를 받고 지난날 갚지 못한 원한을 풀려고 한 것이다. -
44년 광해 8년 병진(1616) 선생 74세
○ 7월에 영천(榮川) 초정(椒井)에 가서 목욕하고 8월에 돌아왔다.
45년 광해 9년 정사(1617) 선생 75세
○ 7월에 동래(東萊) 온천에 가서 목욕하고 8월에 돌아왔다.
○ 10월에 김학봉(金鶴峯)의 행장을 지었다.
○ 11월에 조정 대신이 또, 자전(慈殿)이 안에서는 저주를 주도하고 밖으로는 역모에 호응하였다는 설을 꺼내 서로 번갈아 가며 상소하여 폐위할 것을 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상소문을 올리기 위해 초안을 얽다가 그만두었다. - 상소의 대략에, “삼가 듣건대, 조정에 크나큰 논란이 일어나 성상께서 근심 걱정으로 난처한 가운데 계신다 하니, 국가의 불행이 과연 어떻습니까. 그 놀랍고 절박한 심정을 과연 무슨 말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비망기(備忘記)에 ‘안으로는 저주를 주도하고 밖으로는 역모에 호응하였으니 모자간의 은정은 이미 끊어졌다.’ 하셨으니, 종묘사직을 위해 통탄스러움이 그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의 행동들이 다른 문제는 전혀 돌아보지 않고 앞다투어 논박하길 마지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하늘과 함께 끝이 없는 인륜은 만고를 통틀어 불변의 원칙이 되어 있습니다. 예로부터 성현들 또한 어찌 이와 같은 변고를 당한 일이 전혀 없었겠습니까만 그런 사례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하루아침의 고통을 못 이기고 끝내 만고의 수치를 남겨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날마다 순(舜)을 죽이는 것을 일삼은 부모였지만, 순 임금이 거기에 대처한 것은 하늘을 원망하고 부모를 사모한 것일 뿐이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을 뿐으로, 자식으로서의 직분은 공손히 수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 임금의 조정에 벼슬한 뭇 신하들이 임금을 위해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야 어찌 한량이 있었겠습니까만, 그들 역시 변고에 대처하는 문제에 관하여 한마디도 언급한 일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천만년을 두고 자식 된 자와 신하 된 자가 마땅히 기준으로 삼아 따라야 할 법이 아니겠습니까. 종묘사직에 큰 반역을 저지르고 천하에 큰 죄를 진 자를 따지면 당나라의 무조(武曌) 같은 사람이 누가 또 있겠습니까. 송나라 때 신하 장식(張栻)의 경우는 그 당시 그를 폐하지 않은 것을 매우 잘못된 일로 여겼으나, 주희(朱熹)의 주장은 그의 아들인 중종(中宗)의 처지로서는 결코 어머니를 내쫓는 일을 감히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저 무조처럼 어머니답지 못한 자에 대해서도 주희의 주장이 이와 같았으니, 이는 참으로 의리가 정밀하고 오묘한 부분으로서 만년을 두고 마땅히 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사례를 옛날의 기준에 맞추어 보면 모자간의 은정은 진정 이미 끊겼고 종묘사직의 치욕도 진정 이미 그 정도가 심합니다만, ‘폐(廢)’라는 한 자에 있어서는 털끝만큼이라도 마음속에 싹틔워 주자의 가르침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자식의 직분을 한층 더 공순히 닦아 지극한 인륜을 보전하고 순 임금의 효성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어찌 온 천하에 내세울 말이 있게 되고, 장차 백대를 두고 성인의 평가를 기다리더라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이러쿵저러쿵하는 논란이 비록 없을 수 없더라도 정밀하게 살펴 올바르게 가려내는 일은 마땅히 성상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정론을 바로 세우고 임금의 효성을 크게 드러내어 우뚝하게 자손만대의 사표(師表)가 되는 그 기회가 어찌 오늘에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에 큰 은정이 이미 끊어지고 중대한 원수를 그냥 놓아둘 수 없으므로 오늘 거론되는 주장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대의(大義)가 당연히 먼저 깨지고 대원칙도 먼저 무너지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후일 지하에서 장차 무슨 말로 선왕(先王)께 해명하실 것이며 종묘에 드나드실 적에도 또 무슨 면목으로 제향을 올리시겠습니까. 지난 역사에서도 없었던 일이고 앞으로 만대에 법으로 삼을 수 있는 일도 못 되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대비께서 저주를 주도한 일을 굳이 따질 것이 없고 역모에 가담한 일도 굳이 추궁할 것이 없다고 봅니다. 오직 성상께서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잠자리와 수라를 살펴보는 자식으로서의 예에 더한층 정성과 효성을 다하시어 대비의 마음이 감화되도록 하소서. 앞으로 그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조정에서 나름대로 그때마다 조짐을 살핌으로써 행여 제어하기 어려운 일이 있도록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송나라 때 신하 주희가 그의 임금에게 고한 말에 ‘청컨대 날마다 문밖에 엎드려 계시면서 그 정성을 다하소서.’라고 한 것을 성상께서는 부디 깊이 유념하소서.” 하였다. 상소문을 다 작성하고 봉해 올리려던 차에 마침 광해군이 유약(柳瀹)의 소에 비답하기를, “지난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정구가 골육 간의 은정을 보전하라는 주장을 먼저 꺼내 미명(美名)을 가로챔으로써 임금이 더 이상 은전을 베풀 명분이 없게 만들고, 국시(國是)를 어지럽혀 국론이 지금까지도 안정되지 못하여 인심이 흔들리고 나라의 형편이 어려워졌다. 잘못된 주장이 국가에 해를 끼치는 정도가 이렇게까지 심하단 말인가. 앞으로는 그대도 말을 삼가서 불충하고 불의로운 처지에 스스로 빠지지 말도록 하라.”라고 하였다는 소식에 선생은 더 이상 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본 상소문을 태워 버렸다. -
○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짓고 자호(自號)를 사양병수(泗陽病叟)라 하였다. - 세 칸의 집을 세웠다. 서쪽 두 칸은 서재로 하여 그 이름을 지경재(持敬齋)와 명의재(明義齋)라 하고, 동쪽 한 칸은 대청으로 하여 이름을 경회당(景晦堂)이라 하였으며, 남쪽 행랑채는 누각으로 하여 이름을 망로헌(忘老軒)이라 하였다. 이것을 모두 합쳐 사양정사라 이름하였다. -
○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가 완성되었다.
○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 선생(鄭先生)의 실기(實記)를 지었다.
46년 광해 10년 무오(1618) 선생 76세
○ 3월에 창평 선영을 둘러본 뒤에 판서공(判書公) 묘갈을 세우고 돌아왔다. - 묘갈문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하락도(河洛圖)와 태극도(太極圖)를 그린 두 병풍을 만들었다.
○ 김동강(金東岡 김우옹(金宇顒))의 행장을 지었다. - 미처 마무리를 짓지 못하였다. -
47년 광해 11년 기미(1619) 선생 77세
○ 6월에 약수와 온천수에 목욕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 도동서원(道東書院)과 신산서원(新山書院)의 사당에 들러 참배하였다. - 신산서원은 김해(金海)에 있는데 남명 조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다. -
○ 7월에 울산(蔚山) 초정(椒井)과 동래 온천에서 목욕한 뒤에 창원(昌原) 관해정(觀海亭)에서 머물러 몸조리하다가 10월에 돌아왔다.
목종 순황제(穆宗純皇帝) 48년, 광종 정황제(光宗貞皇帝) 원년 광해 12년 경신(1620) 선생 78세
○ 1월 1일에 병세가 위급해졌다.
○ 5일 갑신일 아침에 《가례회통(家禮會通)》을 펼쳐 읽었다. 그리고 《예설(禮說)》을 교정할 당시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벽에 붙여 둔 종이가 똑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정돈하여 다시 붙이게 하였다. 유시(酉時)에 이르러 돗자리가 바르지 않다는 말을 세 번 연이어 말하였으나 기운이 약하고 말이 유창하지 않았다. 손으로 돗자리를 가리킨 뒤에야 곁에 있는 사람이 비로소 그 뜻을 알고 선생을 부축해 안고서 바르게 하였다. 조금 뒤에 지경재(持敬齋)에서 운명하였다. - 이전 해인 기미년(1619)에 가야산의 북쪽 모서리가 무너졌고 5일인 이날 아침에는 사수(泗水) 가의 나뭇가지에 상고대가 끼는 이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선생이 운명할 조짐이라고 말하였다. -
○ 문인들이 초상을 치렀는데 한결같이 《의례》를 따랐다. 명의재(明義齋)에 초빈하여 두었다. - 부음을 접한 사람마다 깜짝 놀라고 애통해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
○ 2월 30일 무인일에 사손(嗣孫) 유희(惟熙)가 널을 받들고 나가 이튿날 창평산(蒼坪山) 밑에 이르러 임시 모암(慕庵)에 초빈하여 두었다.
○ 4월 2일 기유일에 부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 도내와 경기(京畿), 관동(關東), 호서(湖西)로부터 와서 회장(會葬)한 사류가 460여 인이었다. -
○ 8월에 광해군이 관원 - 예조 좌랑 이유일(李惟一) - 을 보내 사제(賜祭)하였다. - 제문은 부록에 나와 있다. ○ 이때 정조(鄭造)가 감사로 있으면서 제때에 즉시 계달(啓達)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문에 ‘게다가 부음 늦어 무덤 이미 지었으니.〔晩聞凶耗 若堂已封〕’라는 말이 있다. -
○ 치부(致賻)를 예법대로 하였다.
희종 철황제(熹宗哲皇帝) 천계(天啓) 2년 광해 14년 임술(1622)
○ 3월에 대구(大丘) 사류들이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 연경은 퇴계 이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다. -
○ 겨울에 성주 고을 사류들이 회연(檜淵)에 서원을 세웠다. - 회연은 선생이 도를 강명하던 곳이므로 특별히 이곳에 사당을 세웠다. -
3년 우리나라 인조 헌문대왕(仁祖憲文大王) 원년 계해(1623)
○ 6월에 임금이 관원 - 예조 정랑 전식(全湜) - 을 보내 사제(賜祭)하였다. - 제문은 부록에 나와 있다. -
○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 10월에 감사가 고을 사류의 요청에 따라 조정에 계문하고 천곡서원(川谷書院)의 정자(程子)ㆍ주자(朱子) 두 선생 사당에 종사(從祀)하였다. - 제문은 부록에 나와 있다. -
5년 우리나라 인조 3년 을축(1625)
○ 9월에 임금이 관원 - 이조 정랑 김시양(金時讓) - 을 보내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한 것〔勤學好問〕’을 문(文)이라 하고, ‘덕을 지니고 의리를 지킨 것〔抱德執義〕’을 목(穆)이라 한다.” 하였다. -
7년 우리나라 인조 5년 정묘(1627)
○ 9월에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완성되어 위판을 봉안하였다. - 제문은 부록에 나와 있다. -
숭정(崇禎) 3년 우리나라 인조 8년 경오(1630)
○ 9월에 묘갈(墓碣)을 세웠다.
6년 우리나라 인조 11년 계유(1633)
○ 4월에 신도비(神道碑)를 창평산 밑에 세웠다. - 비문은 부록에 나와 있다. -
7년 우리나라 인조 12년 갑술(1634)
○ 9월에 창원(昌原) 사류들이 회원서원(檜原書院)을 세워 위판을 봉안하였다.
8년 우리나라 인조 13년 을해(1635)
○ 4월에 성천(成川) 사류들이 용천서원(龍泉書院)을 세워 위판을 봉안하였다.
무인(1638) 우리나라 인조 16년
○ 2월에 창녕(昌寧) 사류들이 관산서원(冠山書院)을 세워 위판을 봉안하였다.
기축(1649) 우리나라 인조 27년
○ 2월에 목천(木川) 사류들이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세워 주자를 봉안하고 선생을 종사하였다.
신묘(1651) 우리나라 효종 현인대왕(孝宗顯仁大王) 2년
○ 11월에 사양서원(泗陽書院)이 완성되어 위판을 봉안하였다. - 사양은 선생이 운명한 지방이기 때문에 특별히 사당을 세운 것이다. -
정유(1657) 우리나라 효종 8년
○ 10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에 증직되었다.
경자(1660) 우리나라 현종 순문대왕(顯宗純文大王) 1년
○ 2월에 묘갈을 고쳐 새겼다. - 증직을 썼다. -
신축(1661) 우리나라 현종 2년
○ 4월에 충주(忠州) 사류들이 운곡서원(雲谷書院)을 세워 주자(朱子)를 봉안하고 선생을 종사하였다.
계묘(1663) 우리나라 현종 4년
○ 3월에 묘소를 인현산(印懸山) 임좌병향(壬坐丙向 남남동향) 언덕으로 받들어 옮겼다. - 고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
무신(1668) 우리나라 현종 9년
○ 2월에 신도비를 회연서원 곁으로 옮겨 세웠다. - 발문 내용을 덧붙여 새겼다. -
정사(1677) 우리나라 숙종 원효대왕(肅宗元孝大王) 3년
○ 10월에 옥천(沃川) 사류들이 삼양서원(三陽書院)을 세워 위판을 봉안하였다.
무오(1678) 우리나라 숙종 4년
○ 3월에 임금이 관원 - 예조 정랑 이상제(李尙悌) - 을 보내 시호를 바꾸고 사제(賜祭)하였다. -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한 것〔勤學好問〕’의 문(文)을 ‘도덕이 높고 견문이 넓은 것〔道德博聞〕’의 문(文)으로 바꿨다. 제문은 부록에 나와 있다. -
○ 같은 달에 현풍(玄風) 사류들이 조정에 청하여 위판을 도동서원에 봉안하였다. - 도동은 한훤당 김 선생을 향사하는 곳이다. -
경오(1690) 우리나라 숙종 16년
○ 12월에 임금이 관원 - 예조 정랑 권만제(權萬濟) - 을 보내 치제하고 회연서원의 편액을 사액하였다.
[주-D001] 윤화정(尹和靖)의 고사(故事) : 화정은 북송(北宋) 윤돈(尹焞)의 별호로, 정이(程頤)의 문인이다. 젊었을 적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였다가, 시제(試題)가 사마광(司馬光)을 중심으로 한 여문저(呂文著), 문언박(文彦博), 소식(蘇軾), 정이(程頤), 황정견(黃庭堅) 등 원우(元祐) 연간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했던 선류(善類)를 주벌하는 일에 대해 논하라는 내용이었으므로 답을 쓰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진씨(陳氏)에게 이런 조정에서는 벼슬하지 않겠다고 고하자,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는 네가 선(善)으로써 나를 봉양하면 되지, 녹으로 봉양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였다. 이리하여 종신토록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428 尹焞列傳》[주-D002] 왕마힐(王摩詰)의 망천도(輞川圖) : 왕마힐은 당(唐)나라 시인 왕유(王維)를 가리키고, 망천도는 왕유의 별장인 망천(輞川)의 스무 가지 승경(勝景)을 그린 산수도이다. 송(宋)나라 진관(秦觀)이 병으로 몸져누워 있을 때 그의 벗 고부중(高符仲)이 망천도를 빌려 주면서 이것을 보면 병이 금방 나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감상한 지 며칠 만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淮海集 卷34 書輞川圖後》[주-D003] 와룡(臥龍)의 고사(故事) : 주희(朱熹)가 55세 때인 1184년에 여산(廬山)의 오란봉(五亂峯) 밑에 그곳의 본디 지명인 와룡(臥龍)을 취해 와룡암(臥龍菴)과 무후사(武侯祠)를 지어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향사한 일을 말한다. 《朱子大全 卷79 臥龍菴記》[주-D004] 폐사(陛辭) : 신하가 외지(外地)에 부임하기 위해 서울을 나갈 때 임금에게 작별하는 것을 말한다.[주-D005] 정순(呈旬) : 관원이 사임을 원할 때 열흘에 한 번씩 세 차례 잇달아 원서(願書)를 제출하는 것을 말한다.[주-D006] 나는야 …… 되려는가 : 채서산(蔡西山)은 남송(南宋) 때의 채원정(蔡元定)을 가리키는데, 학문이 높고 박식하여 그의 스승 주희가 오히려 스승이자 벗으로 깍듯이 대하였다. 주희의 학문이 당시의 권력자인 한탁주(韓侂胄)에 의해 위학(僞學)으로 몰려 주희와 관계된 인물들이 화를 당할 때 호남(湖南) 도주(道州)로 귀양 가 용릉(舂陵)에서 죽었다. 《宋史 卷434 蔡元定列傳》 여기서는 제자들에게 채원정이 서산(西山) 정상에 정사를 지어 놓고 그곳에서 한평생 학문에만 종사했던 것처럼 할 생각이 있냐고 물은 것이다.[주-D007] 여섯 …… 하소 : 주희가 운곡(雲谷)에서 정사를 짓고 살면서 채원정(蔡元定)에게 〈운곡합기사목(雲谷合記事目)〉이란 제목으로 오언율시 3수를 지어 보냈는데, 그중 두 번째 시에, “당이 이루어진 지 6년째인데 바람이 몰아치고 비가 샌다오.〔堂成今六載 上雨復傍風〕”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주-D008] 외로운 …… 옛사람 : 옛사람은 진(晉)나라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배는 이리저리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에 팔랑팔랑 옷자락이 나부끼네.〔舟搖搖以輕颺 風飄飄而吹衣〕”라고 하였다. 정구가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도연명의 고고한 행위와 비슷하므로 한 말이다.[주-D009] 왕랑(王郞)과 …… 조치 : 왕랑은 신망(新莽) 말기 한단(邯鄲) 사람으로, 서한(西漢) 종실 유림(劉林)과 호족(豪族) 이육(李育) 등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어 한단에 도읍을 정했다가 광무제 유수(劉秀)에게 토벌되었다. 유수는 그를 토벌한 뒤에 그동안 관리와 백성들이 왕랑과 어울려 자신을 비방한 문서 수천 편을 입수하였으나 거들떠보지 않고 제장(諸將)들을 모아 놓고 불태우면서 말하기를, “반복 무상하여 불안해하는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편안하게 하려 한다.” 하였다. 《後漢書 卷1 光武帝紀》[주-D010] 한 자의 …… 야유 : 문제가 반역을 꾀한 그의 아우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을 촉(蜀)으로 귀양 보내자, 유장은 울분을 품고 식음을 전폐한 끝에 죽었다. 이에 백성들은 “한 자의 삼베도 꿰매어 서로 옷을 만들어 입고, 한 말의 곡식도 방아 찧어 나누어 먹어야 하는데 형제간이 서로 용납하지 못한다.”라는 노래를 지어 문제를 비난하였다. 《漢書 卷44 淮南王傳》[주-D011] 무고(巫蠱) 사건 : 선조(宣祖)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가 궁녀들을 사주하여 의인왕후(懿仁王后)를 저주하는 굿을 했다고 하는 사건이다. 유교칠신(遺敎七臣) 중 한 사람인 박동량(朴東亮)이 김제남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다가 무고 사건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시인함으로써 인목대비가 서궁(西宮)에 유폐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光海君日記 5年 5月》[주-D012] 국가의 …… 있겠습니까 : 연보를 편집한 사람이 작자가 쓴 원문을 간추리는 과정에서 약간의 잘못을 하여 이를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원문에 ‘國家之不幸 何如乎哉’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乎哉’를 빠뜨렸으며, 원문에 ‘其爲驚駭痛迫之至 將何以仰喩乎哉’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其爲驚駭痛迫之’를 빠뜨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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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선생연보(寒岡先生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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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판종· 발행사항· 형태사항· 주기사항· 현소장처· 청구기호
고서-기타 | 개인-전기 | 사부-전기류 |
목판본(후쇄본) |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발행년불명] |
4卷2冊 : 揷圖 , 四周雙邊 半郭 20.5 x 15.6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 28.2 X 19.4 cm |
被傳者: 鄭逑(1543-1620) 印: 溪齋書藏 |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2294.8230 |
제목題目저자著者판版형태形態주기註記
고서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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