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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
2021년 1월 3일 / 다니엘 3:8-30
서론 / 하나님을 이용하지 마라[2006.07.12 출처: 뉴스앤조이]
가벼운 세대를 사는 크리스천 / 크리스천들은 현대 풍조로부터 자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분명 우리 시대 교회는 너무도 가볍고 현세적이며 또 감각적이다. 성경의 정신과 반(反)하는 것임에도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추구한다. 그렇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정작 그 정신에서 멀다.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본질이며 거기에 따르는 삶인지 모든 것이 뒤섞여 버렸다.
만약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을 바르게 알고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이 땅에서 누리고 얻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안다. 더 나아가 이 땅에서는 고난과 시련을 겪지만 내세에서 대망(待望)하던 하나님과 함께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됨을 믿는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요 하나님의 계시 핵심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복음을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을 ‘램프 요정의 지니’쯤으로 전락시키고 우리의 소원과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도깨비 방망이’를 가지고 세상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고지(高地)를 지향(指向)하라고,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 전도 많이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되는가? 정말 그러면 되는가?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믿는 이에게 있어서는 이 땅에서 누리는 위로와 풍요가 최고의 관심사가 된다. 멀리 보이는 하늘도성이나 이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에 대해 관심이 없다. 나의 부요와 사회적 성공, 가족의 행복과 건강이 주관심사인데도 거기에 하나님 영광을 칠해(?) 놓고는 스스로를 속이고 위로한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욥과 같이 하루아침에 그것을 다 잃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많은 재물 다 팔아 주를 따르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내가 하나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있을 것 아닌가(마 19:27-29)!
성경은 이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라고 한다(히 10:32-34). 하지만 교회는 우리의 눈을 현세 지향적으로 돌리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자비하심을 이용하여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설교를 듣고 그런 대화를 나누며 또 그런 책을 읽으며 살아간다.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가? 성공·취직·대박·위기관리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추기 위해 발버둥 치며 그분의 은혜로 자녀답게 살아가는 ‘방편’이 기도다. 신앙함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땅에서 복 받고 천국가기 위해서인가?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을 알고 죄된 본성을 아파하며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아 하나님과 베푸신 은혜를 영원토록 즐거워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죄악된 나에 대한 처절한 절망과 고통이 없는 낭만적인 크리스천을 참 기독인이라 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반쪽짜리 복음(초보자, 젖을 먹는 자의 신앙으로 방금 애굽에서 광야로 나온 신앙 또는 잘못된 신앙)에 ‘그을린’ 크리스천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성경의 정신이 아니다. 성경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다윗도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면서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고 증거하고 있다. 주 예수 때문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배척과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세상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 예수보다 부모나 친척이나 재물과 명예를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히 11:8-10). 우리는 껍질만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내 잇속을 차리고 십자가를 들먹여 나를 합리화하고, 양자됨을 이유로 이 땅의 보화에 집착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도 왜곡된 복음에 푹 절어 있다.
베스트셀러는 본성을 자극하는 책 / 각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살펴보면 그런 시대의 문제점을 볼 수 있다. 또 기독서점에 가보면 그러한 현실을 바로 인식할 수 있다. 베스트셀러 코너에 어떤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지, 사람들의 동선이 쉽게 연결되는 코너에 어떤 종류의 책들이 꽂혀있는지를 보면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베스트셀러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성공·출세·돈· 명예에 관한 주제의 책이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이는 많은 책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주제를 신앙의 이름으로 덮어놓은 것이 많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본성상 더 끌리는 책이 있다. 만약 우리 시대에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얻게 해 주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은 삽시간에 동이 나고 전무후무한 판매고를 올릴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절묘하게 자극하는 책이 있다면 그 책도 적지 않은 관심을 모을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부패한 본성을 가진 존재란 점이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본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비록 거듭난 존재라 하더라도 그런 쓴 뿌리가 남아있어서 문제가 된다. 즉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는 일, 그 분이 싫어하는 죄를 더 즐기는 본성적 요인이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기독교계와 세상을 막론하고 잘 안 팔리는 책이 좋은 책이라 판단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안 읽었으면 하는 책들은 어김없이 대박을 터뜨린다. 어릴 적에 불량식품에 더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냈던 것과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음식을 생각해 보자. 몸에 좋은 음식은 그리 맛이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약은 쓴 약이 좋은 약이라고 했다. 반대로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은 어떤가? 입에 살살 녹아 그 유혹을 끊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몸에는 좋지 않다. 거친 보리밥에 김치·풋고추·된장은 입에는 별로지만 건강에는 최고다.
운동도 그렇다. 과정은 힘들고 어렵지만 그 열매는 달다. 공부는 어떤가? 몸이 비틀리고 똬리를 틀게 만들지만 그 보람은 해본 사람만 안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그렇지 않은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유익하게 해 줄 수 없다. 오히려 힘겹고 어렵게 취한 것이 우리를 건강하고 유익하게 해준다. 하지만 부패한 본성을 가진 우리들은 보암직하고 먹음직도 한, 나를 즐겁게 해 줄 것들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몸에 좋지 않음을 알지만 그 유혹을 쉽게 이겨내지 못한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베스트셀러들을 보자. 역사를 통해 검증을 받아온 이른바 고전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고루하고 딱딱하고 재미없기 때문이다. 감각적이고 자극적이며 가볍고 얕은 책들이 호평 받는다. 거기에 부귀영화와 성공과 출세를 누리는 비결을 곁들인다면….
크리스천의 독서습관 / 우리는 절대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책들을 읽어야 한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그런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책이 아니라 어렵고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을 읽어야 한다. 죄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십자가에 대해, 신앙고백과 교리에 관한 책, 그것도 오랜 기독교 역사를 통해 검증을 받아온 그런 책을 읽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시대정신이 혼합된 복음이 아닌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 우리 속 깊이 자리잡은 부패한 본성에 충실한 본능을 제어하고 올바른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삶·습관을 맞춰나가려 노력해야 한다.
본 론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되려면
1단계 /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뜻을 정(定, 正, 淨)하라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자들을 보호하시는데, 뜻을 정하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뒤따르게 된다.
■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 군인 20명이 이집트 군대 3개 사단을 물리친 적이 있다. 이집트군이 손을 들고 항복하고 나왔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군과 싸우는데 엄청난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와 같이 싸우고 덤벼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해서 손을 들고 항복하고 나왔다. 나와서 보니까 이스라엘 병사가 20명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주어서 손들고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킬 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킬 수도 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라고 하셨다(수 23:10).
■ 마리아가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전하신 말씀을 수용(눅 1:26-38) /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셔서 다윗왕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할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도록 하셨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말하였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이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놀라고 당황한 마리아는 천사의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생각하였다. 천사가 말하였다. ‘마리아여, 두려워하지 맡아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놀라운 은혜를 내리셨다. 너는 이제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니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는 위대한 분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물었다. ‘하지만 처녀인 내가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천사가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네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네 친척 엘리사벳도 늙은 나이에 아기를 가졌다. 사람들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하였으나, 그가 임신한 지 이미 여섯 달이나 되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다 그대로 이루어진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이때부터 절대적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게 되었다.
요셉으로부터 보호하심 /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은 원칙대로만 사는 사람이라 파혼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조용히 해결하려고 하였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여자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께서 임신케 하신 아기다. 그러니 마리아가 아들을 낳거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불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실 분이다.’(마 1:19-21)
아기를 죽이려는 헤롯으로부터 보호하심 / 박사들이 돌아간 후에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왕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고 한다. 어서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해서 내가 돌아오라고 할 때까지 거기 있으라.’ 그 밤으로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다(마 2:13-14).
아켈라오로부터 보호하심 / 헤롯이 죽자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아기를 죽이려고 하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아기 예수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곧 이스라엘을 향해 떠났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아켈라오가 아버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가 두려워졌다. 그러나 꿈에 다시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피하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가서 살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라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마 2:19-23).
그러므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말자.
1. 뜻을 정(定-정할)한다는 것은 목적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 세 사람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왕이 주는 음식을 거절했다. 이것은 그들이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들의 삶을 지키고 언약 백성으로서 살겠다는 삶의 목적을 분명히 세웠다. 그리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민족을 돌아보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새 나라를 허락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르짖었다. 그것을 위하여 합당한 사람으로 쓰임받기를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졌다.
2. 뜻을 정(正-바를)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왕이 주는 음식이 바벨론의 이방신전에 올라갔던 음식임을 알고 먹기를 거절했다. 성경에 이 사건을 부각되어 기록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음식을 먹고 안 먹고 하는 것보다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신의 생사화복이 자신들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다.
▶ 마태복음 6:33에서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며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교훈하셨다. 한국어 성경에는 없지만, 영어성경에는 33절 서두에 ‘그러나(But)’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것은 33절 앞에 나오는 내용과 달리하기 위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33절 앞부분인 25절 이하를 보면 먹고, 마시고, 입는 의식주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의식주 문제를 이야기하며 두 가지 예화를 소개하고 있다. ❶ ‘공중에 나는 새’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공중에 나는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새들을 살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❷ ‘들의 핀 백합화(원문에는 잡풀)’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들에 핀 잡풀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돌보시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너희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도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방황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물질, 시간, 재능과 은사도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문제에 깊숙이 관여해주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때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책임져 주실 것이다.
3. 정결한 것으로 자기 욕심을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❶ 중심에서 우러나는 결심이다. /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하는 말은 머리로 결심했다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나 기분에 의해서 결심한 것도 아니다. 반석과 같이 마음을 다짐하고 또 다짐한 결과 중심에서 내린 결단이다. 다니엘은 ‘자기에게 유익한가? 해로운가?’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냐? 아니냐?’는 것만 따졌다.
❷ 정결을 위한 결심이다. / 그 음식물로 자기의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결심을 했다. 한 걸음 나아가 심령 깊숙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까지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결심을 했다.
마음의 정결은 인격의 큰 보석이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정결한 사람을 찾으신다. 그렇다고 이미 죄를 범했다고 고민하지 말라.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완전히 회개하고 돌이키고 예수님의 피로 씻음을 받고 정결한 생활을 하면 하나님은 과거를 깨끗이 삭제하여 주신다.
❸ 평생을 지킬 결심이다. / 1-2년 지키다가 그만 둘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지킬 결심을 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결심 여하에 따라서 그들의 생애가 좌우하는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결심은 하나님께 진실하게 평생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리도 이런 결심을 해보자. 결심없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는 없다. 결심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작심삼일이라고 하지만 작심삼일을 백번하면 10개월이 되고 조금만 더 하면 꿈에도 그리던 1년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에녹처럼 거룩하게 살아가자(창 5:23-24 / 에녹은 이렇게 365년을 살았는데 일생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과 함께 살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
❹ 의(義)를 위한 것이다. / 이(利)를 위해 산 것이 아니다. 의(義)와 이(利)는 다르다. 다니엘은 믿음으로 살고, 깨끗함으로 살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 정직하게 살았다. 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항상 도와주심으로 길은 늘 열려 있다. 옳은 일을 위해서 고난당하고, 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미래는 요행으로 또는 저절로 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좋은 미래를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성결키 위해 힘써야 한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다짐하였다. 이렇게 뜻을 정한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다. 다니엘은 두려워하는 환관장을 설득하여 열흘 동안 채소만 주고 시험해 보자고 했다(단 1:12-16). 그 결과 열흘 동안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은 다니엘이 다른 소년들보다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였다. 그러므로 환관장도 이를 인정하고 진미와 포도주를 제하고 다니엘에게 채식만 주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셨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자. 뜻을 정하고 다니엘처럼 살면 손해볼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고 풍성케 해 주신다. 나중에는 뜨거운 풀무불 앞에서(단 3장), 사자의 입 앞에서도(단 6장) 보호해 주셨다. 이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생명을 걸고 지켰기 때문이다.
4. 뜻을 정(定, 正, 淨)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들
신 28:13-14 / 그러므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지켜 행하면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세계 만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계 만민 가운데에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모든 말씀에서 좌로나 우로 벗어나지 말고 다른 신들을 따라다니며 섬기지 마십시오.
어떠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어디에 있을지라도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신명기 28장에 약속하신 복들을 이때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국인 이스라엘에서 뿐 아니라 포로로 잡혀온 바벨론에서도 함께 하시며 그의 백성을 돌보시되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하신다.
❶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잡은 두 마리 토끼 : 신앙과 성공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다니엘은 그 가운데 신앙을 지키고 큰 성공을 거둔다. 말하자면 신앙과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것이다.
을 정(定, 正, 淨)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주어진 승리를 보면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게 있다. 그것은 위기에 대해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위기를 무조건 어려운 상황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위기(危機)는 한자 그대로 ‘위험한 기회’이다. 위험하지만, 분명히 하나의 ‘기회’라는 것이다. 잘못하면 정말 큰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잘하면 오히려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믿는 성도들에게 위기는 신앙의 진가를 나타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된다. 참 신앙이 있으면 어려운 상황을 넉넉히 극복할 수 있다. 사실은 어려운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상태가 문제이다. 신앙이 엉터리니까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이 흔들리니까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핍박에 굴복하기도 한다.
다니엘 1:14에서 감독관은 이 네 젊은이의 말대로 열흘 동안 두고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불안하다. 혹시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열흘 후에는 꼼짝없이 왕의 진미를 먹어야 한다. 그 열흘 동안 다니엘과 세 친구가 어떻게 했을까 상상을 해보시라. 아마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신앙의 결단은 어렵지만 순간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단을 계속 지키는 것은 더 어렵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하지 않으면 흔들린다. 마귀가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음에 이상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을 시켜 충동한다. 그래서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니엘의 신앙 결단은 무모해 보인다. 사실 포로 주제에 음식 투정을 부리는 건데, 그 말을 들어주겠는가? 잘못하면 큰일이 생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환관장의 마음을 붙잡아 주셨다(9절 /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신기하게 환관장의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오히려 사정을 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음식을 거부하다 초췌해지면 왕에게 자신이 문책 당할 수 있으니 오히려 봐 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열흘 말미를 얻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단 1:15-16 / 열흘이 지났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열흘 동안 채식만 하였는데 계속해서 왕실 음식을 먹었던 다른 젊은이들보다도 더 얼굴에 윤기가 흘렀다. 더 건강하게 보인 것이다. 16) 그래서 그때부터 그들을 맡아 보살피던 감독관은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왕실 음식 대신 채식만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결국 채식만 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놀라운 승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공식을 배운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속 도와주실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 공식을 따라 실천함으로 계속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❷ 자신의 안위와 목숨을 구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오직 말씀대로 순종하여 구별된 삶을 살았던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 남다른 지혜와 지식을 주셨다. 그들은 모든 학문 분야를 습득해 나가는 과정에서 특출한 재주를 보여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대 바벨론에서 살아나가기에 매우 필요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한 원인이 백성들이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다니엘과 3친구는 뜻을 정(淨↔定)하고, 그것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얻었다(9절). 그 결과 이들은 채소를 먹고서도 더 건강해졌으며, 자기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고, 또한 남들보다 10배나 뛰어난 지혜, 재주, 특별한 능력까지 주셨다.
단 1:17-21 / 하나님께서는 이 네 젊은이들에게 남다른 지혜와 지식을 주셨다. 그들은 모든 학문 분야를 습득해 나가는 과정에서 특출한 재주를 보여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뿐만 아니라 특히 다니엘은 환상이나 꿈을 해석해 내는 능력도 지니게 되었다. 18) 왕이 교육시키라고 한 3년이 지나자 시종장은 젊은이들을 느부갓네살왕 앞으로 데리고 갔다. 19) 왕은 이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우수한 젊은이들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왕은 이들이 다른 젊은이들보다 더 슬기롭고 학문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들에게 왕실에서 일을 보게 하였다. 20) 느부갓네살왕이 이 네 젊은이에게 이런저런 분야를 물어 보아도 그들은 나라 안에 있는 그 어떤 점쟁이나 마술사보다도 열 배나 더 지혜롭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왕실에서 일을 보게 한 것이다. 21) 다니엘은 바사 왕인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할 때까지 바벨론 왕실에서 일을 하였다.
이러한 지혜의 은사는 다니엘이나 세 친구들만이 아닌 2,500여 년이 지난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우리도 이러한 거룩한 삶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이것은 공식이요 약속이다.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신앙하면 절대 승리할 것이다! 담대한 신앙만 지키면 된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동행하며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이다. 자식은 그저 하라는 공부만 하면 된다. 학비는 부모가 다 책임져주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앙만 지키면 단다. 만일 하나님이 책임져 주지 못한다면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북 이스라엘이 망한 원인이라든가 남쪽 유대가 망한 원인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끊임없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신앙을 떠났기 때문이다.
❸ 하나님께서 주신 해몽의 은사를 마음껏 발휘한 다니엘 / 다니엘 2:16-23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특별한 꿈을 꾸었다. 사실 꿈이나 환상, 이상 또는 묵상 등은 해몽의 은사를 받기 전에는 바로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하여 해몽케 하려고 작정하셔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보이신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왕은 보통 꿈이 아니기에 박사와 술객을 불러서 그 꿈을 알아맞히고 또 해몽까지 하라고 윽박지른다. 박사들은 기가 막혔다. 꿈을 말해 주어도 해몽하기가 쉬운 것이 아닌데, 남이 꾼 꿈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꿈을 먼저 말해달라고 한다. 그러자 왕은 분노해서 바벨론의 모든 박사와 술객을 다 죽이라고 하였다.
다니엘과 세 친구를 비롯한 박사도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다니엘은 시위대장 아리옥을 통해 왕 앞에 나아가 시간을 주면 알아내겠다고 했다. 다니엘이 믿은 게 무엇일까? 세상 지혜일까? 어느 책에 기록되어 있기에 찾아보겠다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다니엘이기에 친구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그 꿈을 알아내고 해몽도 해 주었다(단 2:31-43).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이라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근간으로 해서 기도했다. 믿음의 기도는 큰 능력을 발휘하였다. 밤새워 3친구와 더불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왕에게 주신 꿈과 해몽을 가르쳐주셨다.
단 2:27-30 / “임금님, 임금님께서 알고 싶어하시는 것은 그 누구도 임금님께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마술사나 점쟁이나 요술쟁이나 점성가라도 말씀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도 비밀스런 일이기 때문이지요. 28) 이렇게 비밀스런 일을 알려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느부갓네살 임금님께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 임금님께서 자리에 누워 이 나라가 어떻게 되어 갈까를 걱정하고 계실 때 아무리 비밀스런 일이라 할지라도 드러내 보이시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임금님께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임금님이 꾸신 그 꿈과 신비한 환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소인에게 알려 주신 것은 소인이 다른 사람보다 더 특출한 재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임금님께 그 꿈의 뜻을 알려서 임금님께서 계속 고민하고 계시던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뒤이어 해몽을 해주자 왕인 느부갓네살은 ❶ 땅바닥에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을 하고 ❷ (하나님께)제사를 올릴 제물과 분향제물을 다니엘에게 갖다 주라고 신하들에게 명한 후에 다니엘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신들 가운데서도 뛰어나신 신이요 또한 모든 왕들을 당신 뜻대로 다스리시는 분이구나. 그러하시기에 그 비밀스런 일을 밝히 드러내시지 않는가! 그대가 이 비밀스런 일을 밝히 드러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대가 섬기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겠는가!” ❸ 이어서 왕은 다니엘을 높은 벼슬자리에 앉히고 여러 가지 선물을 주었다. 다니엘을 바벨론의 각 지방 책임자로 책봉하여 바벨론의 현인들을 관할하는 자리에 앉혔다. 다니엘은 왕에게 요청하여 그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 관리로 일하게 하였고 자신은 왕실에 남아 일을 보았다(단 2:46-49).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지혜와 하늘의 비밀을 아는 은사를 받자.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의로운 삶과 믿음의 기도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지만 믿음 속에 철저한 경건한 삶과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통해 필요한 은사를 주시고 우리 또한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다니엘은 바사 왕인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할 때까지 바벨론 왕실에서 일했다(단 1:21) 이슬람의 전승에 의하면 다니엘이 고레스 왕의 외삼촌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니엘의 영향력이 고레스 왕에게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좋은 대목이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다른 유대 소년들이 있었다. 그들도 명목상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는지 그들의 대한 기사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짐작하건대 그들은 왕의 진미를 그대로 먹었을 것이다. 갈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신앙을 저버리고 적당히 타협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양다리를 걸쳤는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다니엘과 세 친구의 모습을 보고 돌이켰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럴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머리가 아니라 꼬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하면 된다. ‘하나님이 없는 성공은 아무 것도 아니다’(Without God, success is nothing.)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과 더불어 거두는 성공만이 진짜 성공이다. 차라리 신앙을 지키고 세상 성공을 포기하면, 하늘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 그 또한 성공이다. 모세를 보시라.
히 11:24-26 / 모세가 어른이 되었을 때 애굽 왕의 손자로 불리는 것을 거절한 것도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5) 모세는 잠시 동안의 쾌락을 위해 죄에 빠지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26) 애굽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장차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큰 상을 더 바란 것입니다.
그는 신앙과 사명을 위해서 애굽 궁궐의 호화로운 생활을 포기했다. 세상적으로 보면 오히려 비참해 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모세를 가리켜 실패자라고 말하는가? 모세는 위대한 이스라엘의 전무후무한 지도자가 되었다.
세상을 살면서 신앙을 지키는 것은 참 어렵지만 기억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세상이 아니다. 절대주권자 하나님만이 두려운 분이시다. 험한 세상이지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신앙을 굳게 지킴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꼭 성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한다.
2단계 / 검증을 통과하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머리가 되게 하신다.
1. 검증의 문제란?
출 20:2-6 /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었다. 노예였던 너를 내가 해방시켰다. 3) 너는 나 이외에(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모시지 마라. 4) 너는 신상을 새기지 마라.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이나 어떤 것이든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말아라. 5) 그 앞에 절하지도 말며 섬기지도 말아라. 네 하나님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그 죄를 갚되 삼사 대 후까지 갚으리라. 6) 하지만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내린 명령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 후손에게 자비를 베풀리라.
십계명은 거듭난 성도에게 주신 계명이다. 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후손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주어진 문제 / 이 문제에 대하여 ‘왜 그런 시험을 하느냐?’는 댓글을 달 여지가 없다. 답은 ‘yes, no’ 둘 중에 하나이다. 육신의 생명을 부지하려면 ‘yes’, ‘no’하면 육신의 생명은 끝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60큐빗(약 27m), 넓이가 6큐빗(약 2.7m)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다. 느부갓네살이 왜 느닷없이 그런 신상을 만들었을까? 어디서 힌트를 얻었을까? 그가 꾸었던 꿈으로 다니엘이 해몽해준 꿈에서 힌트를 얻어 이 신상을 만든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그 꿈을 꾸게 하신 것이 이 따위 금신상이나 만들라고 보여주신 것이었을까? 아니다. 그 꿈을 통해 장래에 될 일을 보여주셨다고 다니엘이 의미를 부여하고 해몽해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고 승리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마땅히 그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결론 – 꿈을 주신 목적까지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 본질적인 교훈은 한 귀에 들어왔다가 다른 귀로 나가버리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 거대한 신상의 모습이었다. 그가 만든 신상은 금으로 된 것인데 꿈에서 본 것을 변형시켰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통해 자기는 금 머리에 해당된다는 해석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건설한 자신의 왕국이 금보다 못한 은에 의해 망한다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대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놋이니 철이니 흙이니 하면서 나라의 주인과 특징이 바뀐다는 것도 권력자인 자신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의 통치가 영원할 것을 원하여 그 신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금으로 만들어버렸다. 얼마나 많은 금이 들어갔을까?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의 나라가 망하고 다른 나라가 뒤를 이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왕국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권력자의 특징이다. 한번 잡으면 절대로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 두 가지는 마이크와 권력이라고 했다.
느부갓네살의 욕망은 중국 진시황의 욕망과 정확히 일치한다.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 진시황은 자기가 누리는 절대 권력이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아무리 권력이 있으면 뭐하는지? 머지않아 늙어 죽게 될 텐데. 만약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나 이 권력을 누릴 텐데 … . 그래서 동남동녀 3,000명을 뽑아 늙지 않게 하는 약 불로초를 구하러 동방으로 보냈다. 그런데 그토록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진시황이 겨우 나이 50에 죽었다. 마찬가지로 느부갓네살의 이 뚱딴지같은 발상과 행위도 속절없는 헛수고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헛수고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생시켰는지? 자신의 권력과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엄청난 금을 모아 거대한 신상을 만들게 하였고, 신상을 만든 후에 나라 안의 모든 기관장들을 소집했다. 전국의 주요 당직자들이 몇 년 만에 모두 모이는 거대한 모임이기는 하지만 전당대회처럼 모여서 국가의 여러 가지 이슈들을 의논하고 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왕이 만든 금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거기에 절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무의미하고 소비적인 모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에서 보면 이것은 권력의 강화라는 면에서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 고대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복종과 충성을 강요 내지 유도했다. 근대에 와서도 전체주의 국가의 강력한 권력자들은 자신의 거대한 동상 만들기를 좋아했다. 소련의 레닌이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 이런 사람들은 무식할 정도로 큰 자신의 동상을 만들어 세웠다. 사람들이 그렇게 큰 동상을 바라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크기에 압도되어 어떤 경외감 같은 것이 생긴다.
느부갓네살은 금신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절하라고까지 하였다. 느부갓네살은 이 금신상과 자신을 어느 정도 동일화시키고 있다. 즉 자신을 신격화하고 있다. 부패한 권력의 정점이 바로 신격화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인들을 그토록 박해했던 이유가 바로 황제의 신격화와 기독교가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독재 권력자들이 거대한 동상을 세우는 행위도 일종의 신격화인 것으로 느부갓네살이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이다. 유다 왕국을 손아귀에 넣고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성전 기물들을 약탈하던 그 승리의 기분으로 전지전능하신 여호와와 맞장을 떠보겠다는 것이다. 특히 다니엘 2장에서 누구보다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경험을 한 그가 이렇게 변질된 것은 과거의 경험을 무시하며 ‘이렇게 해도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선뜻 이러한 느부갓네살 왕의 행위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 2장에서 다니엘에게 절까지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앞에 굴복했던 그가 권력에 도취하여 하나님께 도전적인 행위까지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그토록 얻어맞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덤벼들었던 바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이런 습성은 느부갓네살이나 멀리 바로에게까지 갈 것도 없다.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 속에서 늘 발견되는 것이다. 입술만의 회개를 넘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지만 자꾸 범죄를 반복하는 것은 … 이 못된 습성과 버릇은 죽는 날에야 고쳐질는지 ㅠㅠ…. 그러니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시며 ‘성령을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위세를 떨치기 위해 금신상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거기 절하라고 하면서,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만약 절을 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불 속에 던져 죽이겠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하고 야만적인 발상인가? 결국 그의 권력이라는 것도 그런 야만적이고 추악한 욕망 위에 세워진 부도덕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 같다. 하나님께서 비밀의 창을 살짝 열고 보여주신 계시의 교훈을 왜 역으로 하여 불행을 자초하는 것인지?
2장에서 박사들을 불러놓고 다짜고짜로 잊어버린 자기 꿈을 알아내라고 하면서 못 알아내면 가족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미쳐 날뛰던 그 버릇이 여기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자기 맘에 안 들면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느부갓네살의 버릇이란 사실이 판명되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있다(벧후 2:22). 베드로 사도가 왜 이러한 말을 했는가를 우리도 겸허히 받아들여 느부갓네살의 행위를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느부갓네살의 못된 행위는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을 속이고 위협한 결과 모두가 그 금신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하게 되었다. 다니엘이 왕의 꿈을 알아내고 해석했을 때, 왕이 다니엘의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했을 때 바벨론 궁중의 많은 사람들과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그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금신상에게 절하도록 함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핍박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느부갓네살의 도전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게 될 것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믿음을 지키고 죽느냐? 아니면 믿음을 포기하고 목숨을 부지하느냐?’의 기로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최소한 느부갓네살은 크리스천들처럼 고민을 하지는 못할망정 크리스천들을 고민하게 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다.
공중의 권세잡은 마귀는 세상나라를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대항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이처럼 고난을 당하고 고통과 슬픔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느부갓네살 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매일 삶에서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나와 나를 떠나 매순간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많이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고 위기를 모면하든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순결함을 지키며 세상에 대항하든가?’ 결정을 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 단락에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또 어떻게 될 것인지 살펴본다.
2.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란?
마태복음 13:3-8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두 번째 단계인 흙이 깊지 않은 돌밭에 떨어진 씨처럼 시련과정을 통해 뿌리를 깊이 박아야 한다. 뿌리가 깊이 박힌 나무에서 많은 열매를 맺힐 수 있듯이 온 땅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여야 한다. 이런 사람은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 같아서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나날이 푸르리니 하는 일마다 끊임없이 번창하게 될 것이다(시 1:3).
마 10:32-33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롬 10:8-10 / 사실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은 먼데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입에 있습니다. 9) 만일 여러분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속에 굳게 믿으면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10) 사람은 마음으로 믿을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고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입으로 고백함으로써 확실하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결심한 다니엘과 세 친구가 출세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 생각하지도 못한 시련의 차가운 바람이 몰려왔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나 모래 위에 집은 지은 사람 모두에게 차가운 시련의 바람은 불어오고 비가 쏟아져서 홍수가 나고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반석위에 세운 집 즉 하나님께 뿌리를 깊이 박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단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뿌리가 약한 나무는 바람에 쉽게 쓰러지듯이 정함이 없는 신앙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게 된다. 특히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 예수를 기쁘게 해드리기로 결단한 사람들은 반대자들의 손에 고난을 받는 것이 성경적(딤후 3:12)으로 오직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처럼 추수 때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라고 한다. 욥도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았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으로 믿는 자의 인내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배의 복을 받게 되었다.
약 5:10-11 /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로 이겨 낸 주님의 예언자들을 본받으십시오. 11) 그들은 심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내 주께 진실했으므로 지금 하늘나라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욥은 슬픔을 이기며 끝까지 주님을 믿은 사람의 모범입니다. 욥이 겪어 낸 일을 보고 우리는 주님의 계획이 축복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는 한없는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1. 다니엘 3장 다니엘의 세 친구의 행적
단 3:8-18 / 바벨론 사람 몇몇이 바로 이때에 유다인들을 고발할 기회를 포착하였다. 9) 그들은 느부갓네살왕을 찾아가 이렇게 고발하였다. `임금님! 만수무강하소서. 10) 임금님께서는 신상 제막식 때 풍악이 울리자마자 모두 엎드려 신상 앞에 절하라는 명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11) 또한 그 명을 거역하는 자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 집어 던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런데 바벨론 지방관리들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임금님의 명을 어겼습니다. 이들은 모두 유다인들인데 임금님이 섬기는 신에게 예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금님께서 세우신 신상에 엎드려 절하지도 않았습니다.' 13) 그 말을 듣고 느부갓네살왕은 화를 내면서 당장 그 세 사람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 14) 그들이 왕 앞에 나아오자 왕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너희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란 말이냐? 너희가 네가 섬기는 신께 예배드리지 않고 내가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사실이냐? 15) 지금이라도 나팔과 피리와 수금, 삼현금 또 양금과 생황 등 갖가지 악기들이 풍악을 울리거든 꿇어 엎드려 금신상 앞에 절을 하여라. 만약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당장 너희를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 집어 던질 것이다. 어쩔 테냐? 그래, 너희는 너희를 구해 줄 다른 신이라도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냐?' 16) 그러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저희들에게 내리신 그 조건에 아무런 대답도 할 마음이 없습니다. 17) 임금님께서 우리를 불가마에 내던지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금신상에게 절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실 마음만 있다면 임금님께서 우리를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 집어 던진다 하실지라도 우리를 거기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18) 설령 그분이 우리를 건져 주시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임금님이 섬기는 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또한 임금님이 세우신 금신상에 꿇어 엎드려 절하지도 않겠습니다.'
단 3:19-23 / [불가마에 던져진 세 친구] 이 말을 듣고 느부갓네살은 안색이 변하더니 매우 화가 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느부갓네살은 곧 명을 내려 불가마에 불을 더 지펴 평상시보다 일곱 갑절이나 더 뜨겁게 하라고 하였다. 20) 그러고는 자기 군대 가운데에서 힘이 가장 센 군인들에게 명을 내려 그 세 사람을 꽁꽁 묶어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 집어 던지라고 하였다. 21) 그래서 그 군인들은 세 사람을 꽁꽁 묶었다. 물론 속옷과 바지와 도포를 입은 채로 묶었다. 그런 다음 그들을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집어 던졌다. 22) 그런데 왕의 명령이 너무 엄하였고 불가마가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집어 던졌던 군인들마저 그 불에 타죽을 수밖에 없었다. 불이 그렇게 뜨거웠어도 감히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23) 이렇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꽁꽁 묶인 채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집어 던져졌다.
단 3:24-25 / [불가마에 던져진 세 친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그때 갑자기 느부갓네살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신하들에게 소리 질렀다. `아니, 그래 우리가 세 녀석을 꽁꽁 묶어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집어 던지지 않았더냐?' `예, 임금님, 하라는 대로 하였습니다.' 하고 신하들이 대답하자 25) 느부갓네살이 또 말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저 불속에 네 사람이 묶이지도 않은 채로 왔다갔다 한단 말이냐? 아무 데도 상한 데가 없어 보이는구나.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저 네번째 사람은 꼭 천사같이 보이는구나.'
단 3:26-30 / [세 친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과 이에 대한 댓가] 느부갓네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아, 이리로 나오너라.' 그러자 그 세 사람이 불 가운데서 곧 걸어 나왔다. 27) 지방장관과 대신과 총독과 다른 관료들이 불가마에서 나온 그 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불에 상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도 그을리지 않았고 옷도 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기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28) 그러자 왕이 입을 떼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섬기는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바로 그분이 천사를 보내셔서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이 사람들을 건져 주셨구나! 이 사람들은 내 명을 거역하고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내가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세운 신상에 절하지도 않았다. 29) 그러니 이제 내가 명을 내리노라. 그 어떤 사람이든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인종이 다르든 쓰는 말이 다르든간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불경스런 말을 입에 담기라도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또한 그가 살던 집은 아예 부숴 버려 쓰레기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래, 세상에 이와 같이 사람을 구해 줄 신이 어디 있느냐!' 30) 그러고 나서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바벨론 지방에서 지금까지 맡고 있던 벼슬보다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
2. 신앙을 지키기
신앙생활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다니엘 2장에서 다니엘을 통해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알아낼 뿐 아니라 해몽까지 해주었는데 느부갓네살 왕은 오히려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다. 우상에 금을 입히고 두라 평지에 세웠는데, 높이가 60큐빗이니 약 30m(일반 상가의 경우 3층 높이는 10m정도, 순수 아파트 층만 따지면 8.4m)가 되는 엄청난 우상이다. 이 우상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는 신앙의 도전이 되었다. 왕은 그 우상을 만들어 놓고 국가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을 집성예식에 참석하게 했다. 집성예식에서는 음악 소리와 함께 우상에게 절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인 세 친구는 절을 할 수 없었다. 그 일로 그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으로 인하여 풀무불 속에 들어가야 했다.
▶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는?
1. 신앙을 방해하는 적은 사단이었다.
사단은 느브갓네살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우상을 만들게 하고 다시 그의 마음을 격동시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에게 절을 하도록 명령하게 했다. 이러한 현상은 사단의 본성으로 공생애의 걷기 위해 40일을 금식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하였다. 사단의 제안은 에서처럼 넘어가기 쉬운 것들이었다.
마 4:3 / 그때 마귀가 와서 돌을 떡이 되게 해보라고 유혹하며 ‘그렇게 하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증명될 게 아니오?’ 하고 말하였다.
마 4:5-6 / 그러자 마귀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지붕 위에 세워 놓고 6) 말하였다. `뛰어내리시오.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주께서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천사를 보내 보호하게 하시니 그들이 두 손으로 너를 꽉 붙잡으리라. 혹시나 돌부리에라도 채이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리라'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소?"
마 4:8-9 / 마귀는 다시 예수를 이끌고 아주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9) `만일 내게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신명기 28:1-2에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주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보다 높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다음과 같은 복들이 모두 여러분에게 이르러 여러분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주시겠다는 복은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상 앞에 절을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또 조상을 섬기는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다.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무서운 죄로 생각지 않는 것은 그 배후에 역사하는 귀신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은 우상 앞에 절을 한다거나 아니면 조상을 섬기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배후에서 일하는 귀신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귀신을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이 영적인 중요한 원리이다. 우상을 가까이 하면 그만큼 귀신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이런 귀신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
2. 사람들의 방해 때문이다.
사단은 가능하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이용하여 신자의 신앙을 방해한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어려운 결단을 하고 왕이 세운 우상 앞에 절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 믿음으로 신앙을 지킨 것이다. 그런데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세 친구를 향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세 친구의 정적들이 이 사실을 왕 앞에 고자질한다. 그 사람들 때문에 세 친구는 왕 앞에 서게 되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고난을 당하게 된다. 성도가 신앙을 지키려고 힘을 쓰면 주변 사람들이 협력하고 힘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오히려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우리도 세상 친구들 틈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고 해보면 반드시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3. 세상의 유혹이다.
금신상에 금을 입혀 보기에 좋게 만들었다. 거대한 금신상 앞에서면 그 웅장함에 감탄하고 머리를 숙이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화려하고 아름다움으로 지혜롭고 탐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런 유혹을 이기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든가, 에서를 넘어지게 한 맛있는 죽이라든가,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가지고 미끼를 만들어 던진다.
4. 우리 육신의 체질(본성) 때문이다.
육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보다 세상의 것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과 구별되어 신령한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도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더 쉬운 것이 육체의 체질(본성)이다. 본문의 세 친구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풀부불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주어진 고위관직자의 자리를 지키며 편하게 사는 것이 쉬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사회적인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믿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자 / 마태복음 15:1-20, 16:21-27을 깊은 교훈으로 삼자.
❶ 누구나 벗어버려야 할 이런 위선은 아담의 후손인 내 자신부터가 먼저 벗어야 할 허물이었다. 나름대로 위선은 그래도 벗어버리기가 쉽다.
마 15:7-20 /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한 예언이 너희를 두고 한 것이 아니겠느냐? 8) 이 백성이 나를 섬긴다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은 말로만 나를 섬기고 높이며 마음은 내게서 아주 멀리 떠나 있다. 9) 그들이 나를 경외하며 제물을 바친다고 해도 아무 쓸모없는 일이다. 그들은 나를 세계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편리한 대로 생각해 내어 만든 규정에 따라서만 나를 높이고 섬기기 때문이다.’ 10) 예수께서는 군중을 불러 말씀하셨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잘 깨달아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더럽힌다.’ 12) 그때 제자들이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지금 하신 말씀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나 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나무는 모두 뽑힐 것이다. 14)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맹인이면서 맹인을 인도하는 자들이다. 맹인이 맹인의 손을 붙들고 가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뿐이다.’ 15) 베드로가 ‘그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십시오.’ 하고 예수께 청하였다. 1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도 아직 깨닫지 못하였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나 뱃속을 거쳐 다시 뒤로 나가 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8)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것이 그 말하는 사람을 더럽힌다. 19)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말, 중상 같은 악한 생각들은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❷ 자기 부인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될 수 있는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빌 2:13).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님께 칭찬과 더불어 천국열쇠까지 받은 베드로가 넘어서야 할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
마 16:21-27 /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만 생각하는구나.)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자기를 부인하라(버리라)’는 말씀은 자신(인간의 본성)과의 싸움에서 이기자는 것이다.
잠 16:32 / 노하기를 더디하는(쉽사리 화내지 않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악질적인 싸움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아주 못된 싸움이다. 다 이긴듯한데 욕심, 시기, 질투가 또 올라온다. 가장 처참하고, 비참하고, 창피하고, 부끄러운 싸움이다. 부자(父子)간의 싸움도 동네에 소문나면 낯을 들고 못 다닌다. 그런데 그보다 더 치사하고 악질적인 싸움이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기면 선한 싸움이지만 싸우다가 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 속에서 순간적으로 두더지 게임처럼 벌떡 벌떡 일어나는 그 마음들을 절제해야 한다. 영국 속담에는 자기보다 더 큰 적은 없다고 했다. 산적과 강도보다 더 무서운 적이 마음속의 적이다. 평안했다가도 어떤 말 듣는 순간, 보는 순간 또 올라온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갈 5:24)라고까지 하였다.
성질(혈기, 인간의 본성)이 순간적으로 올라오면 은혜도 진리도 말씀도 사라진다. 그게 문제이다. 하늘나라 갈 때까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100전 100승해야 한다. 싸움은 피할 수 없지만 결코 패하는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성령 충만해 죽은 사람도 살리고, 지나갈 때 그림자만 닿아도 병이 낫는 기적을 베풀었다. 그런 바울조차도 세상 생각이 들어오면 성령이 빠져 나가고, 그것을 깨달으면 또 자기 자신을 죽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바울이 오죽했으면 자기 가슴을 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랴” 하면서 7번이나 탄식했을까?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까지 예수님 믿으면서 일곱 번은 고사하고 한 번도 탄식하지 않고 뻔뻔하게 살고 있지 않았는지? 사도 바울은 ‘내 마음 속에 원수가 있다’고 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사탄이 기회를 타서 다른 사람을 욕하게 하고 애써서 겨우 받은 은혜를 모두 팽개치게 한다는 것이다. 그때 사탄은 박수를 치고 우리는 뒤늦게야 깨닫고 후회한다(롬 7:7-25). 위에서 보았듯이 입에서 세상의 것이 나올 때는 이미 생각 속에 악한 것이 있다는 증거이다(마 15:17).
육신에 속한 현저한 것들이 거듭난 나의 생각으로, 감정으로 또는 의지로 나타난다면 곧 부인해야한다. 남을 미워하는 생각,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생각, 자기에게 명예를 가져다 줄 어떤 꿈 또는 미운 감정, 분노, 욕심, 정욕이 끓어오를 때 단호하게 부인하라. ‘가만 두지 않겠다’는 의지, ‘한 마디 하고 싶어 하는 의지’, ‘바보같이 참고만 있지 않겠다’는 의지,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의지 등 육신에 속한 현저한 것들이 자신의 혼적 삶에 나타날 때, ‘예수님 때문에 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이제 내 것이 아니다’라고 강력하고 단호하게 부인해야 한다.
믿음과 행함을 강조했던 야고보 사도의 권면을 보자.
약 4:6-10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악한 욕망에 대항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성경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힘을 주시지만 교만한 자는 물리치십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을 떠나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씻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이 주시는 순결로 채우고 하나님께 진실하십시오. 9) 여러분이 악한 일을 저질렀거든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며 마음으로 참회하십시오. 웃음보다는 슬픔을 배우고 기쁨보다는 괴로움을 배우십시오. 10) 그래서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주께서 여러분을 일으켜 세우고 힘을 주시며 높여 주실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마다 그것들은 고통을 느끼며 사라져 갈 것이다. 이길 때마다 자신은 전보다 더 거룩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육신의 현저한 것들이 다시 고개를 쳐들 때는 보다 쉽고 신속하게 부인하며 거룩한 삶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놓지는 말아야 한다. 주님 오실 때까지 그같이 부인하는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 매일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하나님의 지켜주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다윗처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되 영원하신 목자로 모시고 그분만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리고 일상의 작은 것들을 부인하며 이겨갈 때마다 부인해야 할 더 크고 강한 것들이 자기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 곧 생명까지 부인하는 순간까지 쉽지 않는 과정의 연속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실 것이다.
❸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되려면 원수가 심어놓은 가라지들을 내 안에서 제거하라
① 나 자신의 젓 번째 가라지는 욕심이다/ 우리 인생은 나그네같이 우거하는 자요, 이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다고 다윗이 말했다(대상 29:15). 야고보는 인생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다(약 4:14).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한다. 나그네 인생인데 나그네인줄 모르기 때문에 욕심이 생긴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류는 날 때부터 무덤을 가지고 이 땅에 오게 되었다. 예수님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다.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마라. 남녀 관계 문제도 욕심이요, 남을 미워하는 것도 욕심이며 샘내는 것도 욕심이다. 돈을 좋아하는 것, 정욕도 욕심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욕심을 내지 않으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 내 마음속에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성령을 거둬가지 마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한다. 다윗왕은 성령이 빠져나가니 자신을 망치고 망신을 당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졌다고 고백했다. 조심해야 한다. 사람은 많은 유혹을 받는다(약 1:15, 엡 4:22-24, 롬 7:11, 히 3:13). 욕심 때문에 유혹을 받고 교만 때문에 유혹을 받는다(잠 16:18).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벧전 5:5, 약 4:6). 교만한 자는 자기 인격을 소멸시킨다. ‘내가 잘 났다, 돈이 많다, 권세가 있다, 내가 너보다는 낫다,’하는 생각이 다 교만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내가 은혜가 충만하지 않구나’는 것을 깨닫고 ‘내가 아직 죽지 못했습니다. 또 죽이겠습니다. 날마다 내가 죽습니다.’하고 기도하는 생활을 살아야한다. 하나님을 알되 감사가 있어야 한다(롬 2:21).
② 나 자신의 두 번째 가라지는 혈기(血氣)이다/ 피는 90%가 물로 이뤄져 물이 피의 성분들을 운반한다. 그런데 혈기가 솟으면 그 움직임이 정지된다고 한다. 청신호가 적신호가 된다. 핏대가 오르면 혈압이 오르고 나중에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혈기는 목숨을 부지하는 피의 기운인데, 이것이 격동되면 확 부풀어 오른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에게는 혈기가 없었다. 그런데 죄 때문에 짐승처럼 감정의 동물이 되어서 남을 잡아먹기 위해 으르렁대는 것이다. 우리는 늘 감사가 충만해야 한다. 빨간불이 들어오면 멈춰서고, 자기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아아, 내 감독자이신 성령님께서 나를 지키시도록 하지 못했구나’ 깨닫고 ‘성령님이여, 나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감정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다스리면 유익을 주고 온화하게 한다. 그러나 다스리지 못하면 심통이 사나워지고 힘줄이 솟고 피가 터진다.
③ 나의 세 번째 가라지는 시기(猜忌)이다/ 시기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 누가 은혜 받았다고 하면 시기가 나서 ‘며칠이나 가겠냐? 그 버릇 금방 돌아온다.’면서 하나님 자리에 앉아 단칼로 심판한다. 나도 그렇게 돼야겠다는 마음으로 부러워하고 칭찬하고 치켜 줘야 할 텐데 오히려 깎아내리는 것이다. 시기는 샘내고 미워하는 것이다. 미움은 살인죄이다(요일 3:15). 칼과 총 그리고 몽둥이로, 때로는 글로, 말로 남을 죽이는 것이 살인이다. 마귀는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속성이 있다. 대신 남이 망하는 것은 기뻐한다. 남이 잘 됐다는 소식에는 심드렁하고, 남이 망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언제 그랬냐며 궁금해 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 사람이 나보다 잘 됐다고? 아, 그랬구나. 나보다 낫네.’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이 어려움을 당하면 울며 기도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걸머지러 오셨는데 마귀가 당시의 대제사장, 제사장, 장로, 집사, 유대인들에게 시기의 악신(惡神)을 부어주었다. 그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마 27:18, 막 15:10). 이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시기, 질투여! 영원히 물러갈지어다.’라고 간구하자(롬 13:13, 고전 3:3, 고후 12:20, 행 5:17, 13:45, 약 4:5-7, 벧전 5:1-2).
④ 네 번째 가라지는 게으름이다/ ‘한잠 자고 해야지, 피곤한데 다음에 하자.’하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나이 70세가 넘어서도 교인들에게 폐 끼치지 않기 위해서 밤낮 애를 썼다. 게으른 사람은 그릇에서 숟갈로 음식을 퍼서 입에 넣는 것도 귀찮아한다. 이런 현상은 육신의 실례보다 영적인 면의 게으름은 더 무섭다. 게으름은 말세의 징조이기도 하다. 특별히 잠언에는 게으름을 꾸짖고 경고하는 구절이 20절이 있다.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자.
잠 6:6-11 / 일하기 싫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자들아, 너희는 개미를 찾아가서 그것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얼마나 슬기로운지 배워라. 7) 개미에게 우두머리가 있더냐? 일을 하는데 감독관을 본 적 있느냐? 개미 떼에게 통치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았느냐? 8) 그런데도 여름내 땀 흘리며 먹을 양식을 장만하지 않더냐? 가을걷이 때에도 먹을거리를 모아들이지 않더냐? 9) 빈둥빈둥 먹고 놀기만 하는 자들아, 어느 때까지 그렇게 잠만 자려고 하느냐? 언제나 잠에서 깨어나려느냐? 10)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누워 있어야지, 건강을 유지하려면 좀 더 자야지'. 언제까지 이런 소리를 되뇌며 잠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느냐? 11) 누더기를 걸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날이 득달같이 찾아오리라. 어느 날 갑자기 쪽박을 차고 말리라. 엄청난 군대가 몰려와 모든 것을 빼앗아간 것처럼 가난뱅이가 되리라.
달란트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한 달란트를 묻어 두었던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시며 바깥 어두운 곳에 내 쫓았다는 말씀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라’(롬 12:11)는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기억하고 싶다.
안일함에 빠져 주를 앙모하는 자처럼 올라가야 할 때에 올라가지 않는 것, 자기의 안일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그것 또한 게으름일 것이다. 에스더를 향한 모르드개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 영적 게으름에서 벗어나라 / 예수님이 마태복음 5:13-16에서 ‘너희 세상의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만일 너희가 그 맛을 잃어버린다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는 아무데도 쓸모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뿐이다. 너희 빛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비추어라.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행동하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하셨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성도의 의무로 성도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도전하지 않으면 누가 도전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람만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다. 도전은 세속 가치의 대명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골리앗과 같은 세상을 향해 다윗과 같이 도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이다. 신앙은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도전하는 사람이다.
『Do Not』이 기독교가 아니다. 『DO!』가 기독교이다. 누가 이름하여 ‘Do Not’를 기독교라 했는가? 그런 생각은 단호히 거부하시라! 십계명을 잘못 생각하고 ‘Do not’만 생각한다. 성도는 그저 지뢰밭을 지나는 사람쯤으로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넓은 길로 가지 말라고 하시며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는데, 찬송가 191장을 자세히 보면 신앙의 길에는 세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외로운 길이요, 고난의 길이지만 신앙적인 안목에서 본다면 생명의 길로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소망을 얻게 되는 길이다.
1절 /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후렴 :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2절 / 전에 죄에 빠져서 평안함이 없을 때 예수 십자가의 공로 힘입어 그 발 아래 엎드려 참된 평화 얻음은 주 의 영이 함께 함이라
3절 /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 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내가 기쁜 맘으로 주의 뜻을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4절 / 세상 모든 욕망과 나의 모든 정욕은 십자가에 이미 못을 박았네 어둔 밤이 지나고 무거운 짐 벗으니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요즈음 기독교인은 너무 소극적이고 너무 부정적이다. 어둠의 길을 가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빛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안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빛과 소금의 순백의 영혼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연한 의무이다.
마 13:31-32 / 예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32)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생각처럼 가만히 있어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지 않는다. 빛과 소금은 도전하는 것이 생명이다. 빛은 어둠에 도전하고 소금은 부패에 도전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이다. 누가 기독교를 지뢰밭 밟기라고 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본뜻이 아니다.
달란트 비유의 본질은 도전이다. 남긴 자와 못 남긴 자의 차이가 아니 도전하는 자와 도전하지 못한 자의 차이이다. 요즈음 교인들은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아주 작은 것을 가진 자들이 주로 이런 부정의식! 묻어두는 의식! 소극적인 의식! 패배의식에 많이 사로 잡혀 허송세월을 보낸다.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의식이 문제이다. 키가 작은 게 문제가 아니라 키 작은 의식이 문제이다. 패배가 문제가 아니라 패배의식이 문제이다. 못 배운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에디슨도 포드, 링컨, 정주영씨도 못 배웠다. 문제는 못 배운 의식이 문제이다. 한 달란트는 절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달란트 받은 그가 열심히 했다면 똑같이 좋은 결실과 더불어 칭찬이 주어졌을 것이다.
위대한 사람만 도전하는 게 아니다. 역사적인 사람만 도전하는 것도 아니다. 스타만 도전하는 것도 아니다. 걸출한 사람만 도전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내가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인 내가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그 목표에 내가 도전하는 것이다.
보석은 나름의 빛을 낸다. 들꽃은 나름의 자태를 뽐낸다. 하나도 같은 것은 없다. 성질도 다르고 물질구조 배열순위도 다르다. 모양도 다르고 성질도 다르다. 다 나름대로의 빛깔과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끌어 올렸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비교’라는 말 자체가 없다. ‘나름대로’라는 말만 있다. 달란트 비유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달란트 비유에 보니 비교해서 책망이나 칭찬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도전하고, 자신의 것을 활용하고 자신의 것에 최선을 다한 것을 두고 칭찬하신다. 반대로 자신의 것에 도전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가꾸지 않고, 자신의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를 책망하신다.
■ 미국의 화가 해리 리버만(Harry Lieberman)은‘미국의 샤갈’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화가이다. 그런데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70세가 넘어서부터이다. 내 나이가 되어서 화가가 되었다. 그는 다른 일을 하다가 은퇴하여 마을 노인정에서 체스를 하며 그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체스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루는 그가 멍하니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청년이 무심코 “할아버지 왜 앉아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까? 시간도 보내고 재미도 있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세요. 그림을...” 그리고 청년이 지나가 버렸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놀라운 재간이 나타났다. 그 후 30년간 101세까지 살면서 무려 22회의 전시회를 열어서 화가로써 미국에 명성을 날렸다. 70에 그것도 우연히 지나가는 청년이 할아버지 그림 한번 그려보라고... 그림을 그리니 거기에 취미가 있고 거기에 소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계속 그림을 그려서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대부분 하나님께서 주신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지금보다 30배, 60배, 100배로 위대한 사람들이 될 수 있다. 나이가 많다고, 늙었다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우리 인생은 끝까지 무엇이 될지 모른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나이나 환경 팔자 등을 탓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우리 각자가 가진 소질을 개발하며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를 어떻게 쓰실 지 아무도 모른다.
■ 오래 전 영국에서는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설교하는 자는 무조건 벌을 받는다.”는 법조항이 있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이 법을 어겨 12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되는데 그가 감옥살이 하는 동안 그 부인은 죽고 애들은 고아가 되었다. 그는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저는 지금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 제가 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감옥에 갇혀서 아무것도 못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글을 써라. 나는 너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달란트를 주었으니 글을 써라.’ 그래서 그가 엎드려서 기도하는 중에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천국 가는 역정을 기록했다. 그것이 천로역정이다.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기록하고 난 다음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자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오늘날까지도 천로역정은 굉장히 유명한 책이다. 그러므로 감옥에 갇혀 있어서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했으나 존 번연은 감옥에 갇혀 있어도 하나님께 의지해서 자기가 준 달란트를 개발하니까 역사적인 문학자가 되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잠재력을 개발하고 알아내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도 무려 1천 93개의 특허를 가진 천재인데,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1학년 밖에 못 다녔다. 호기심이 많은 에디슨은 학교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다가 말썽을 일으키고, 엉뚱한 질문을 하여 선생님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선생님이 ‘하나 보태기 하나는 둘이다’라고 하니까 손을 들고 ‘선생님 아닙니다. 하나 보태기 하나는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고양이+쥐는 한 마리밖에 안됩니다.’ 에디슨 말도 맞다. 자꾸 그런 질문을 하니까 선생님이 ‘이 놈은 바보라. 교육 못시키겠다’고 어머니를 불러서 내보냈다. 그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 아이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먼저 보셨군요. 우리 아이는 바보가 아니고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아이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그를 가르쳐서 1년 내 6학년을 마치게 하고 그가 소질이 있는 과학책을 어머니가 계속 읽도록 해주어서 발명가의 길로 인도했다. 에디슨이 발명1호를 들고 어머니에게 갔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남다른 애라는 것을 잘 안다. 정말 잘 커줘서 고맙구나.’ 에디슨은 그 어머니가 단점보다도 장점을 보고 격려를 해준 것입니다. 어머니의 이러한 격려로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들을 발명한 발명왕이 될 수가 있었다.
■ 영국의 심리학자 하드필드(J. A. Hardfield) 박사는 「힘의 심리」라는 책에서 ‘난 할 수 있어! 난 뭐든지 해 낼 거야!’라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자기 능력의 500%를 발휘하지만 ‘난 할 수 없어, 난 별 볼일 없는 불량품이야!’라고 생각하며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자기 능력의 30%도 발휘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500%를 발취하겠느냐? 30%도 발휘하지 못하느냐?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꿈과 말과 믿음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신경의학자 에코노모(Constantin von Economo)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의 뇌 세포는 136억 5천 3백만 개나 된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은 이처럼 엄청난 창조력을 가진 뇌세포를 거의 못 쓰고 죽는다는 것이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뇌의 약 0.4%를 사용하였고, 천재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 0.6% 밖에 사용 못했다. 에코노모 박사는 만약 우리가 뇌의 10%만 사용할 수 있다면, 역사를 바꾸어 놓는 엄청난 일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격려를 받고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 된다. 사도 바울은 문제들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가난을 이겨낼 줄도 알고 부유를 누릴 줄도 알며, 배가 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는 법을 몸에 익혔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게 힘을 주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할 수 있습니다(빌 4:3).’라는 고백까지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간을 주셨으면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된다. 노력하고 애쓰지 않고 일을 이루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나아가 목숨까지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최용덕의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을 안겨주었다.
1.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해져 가고 온 거리마다 넘쳐나는 죄악의 물결
<후렴> 오라(가자)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 오라(가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2. 사람들은 참 자유자가 뭔지도 모르고 어둠의 길을 방황하며 소리지르네
3. 어느 누가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으랴 하나님 없는 저들에겐 오직 죽음 뿐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누가 도전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이 용감하지 않으면 누가 용감한가? 도전은 세속 가치의 대명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오히려 더 도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이다. 신앙은 도전하는 것이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사람은 도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Do Not』이 아니다.『DO!』가 이들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공연히 십계명의 정신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Do Not』만 말한다. 기독교인은 그저 지뢰밭을 지나는 사람처럼 너무 소극적이고 너무 부정적이다. 어둠의 길을 안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빛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안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을 빛과 소금의 순백의 세상으로 바꾸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장되는 것이매 가만히 있어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지 않는다. 빛과 소금은 희생하며 도전하는 것이 생명이다. 빛은 어둠에 도전하고 소금은 부패에 도전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이다.
게으름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무시되는 죄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죄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게으름을 칭송한다. 자기만족 속에서 안일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인 것처럼 가르친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게으름 곧 나태(acedia)는 교만(superbia), 인색(avaritia), 시기(invidia), 분노(ira), 음욕(luxuries), 탐욕(혹은 탐식, gula)와 함께 죽음에 이르는 일곱 죄(Septem peccata mortalia)로 불려왔다. 잠언의 교훈은 처세술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제2의 삶과 사회의 질서다. 게으름의 정체와 발전과정,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 등을 분석하여 보람 얻고 의미 얻는 삶을 살도록 촉진한다.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인을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믿음을 지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호해 주신다. 세 친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이 충만해서 왕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대로 역사하셨다. 화가 난 왕이 신하들에게 명령해서 풀무불을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했다. 그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세 친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풀무불에 타서 죽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왕이 세 친구를 불 속에 던져 넣고 보니 불 속에 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아들 같은 이가 함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 속에서 나타나시고 그들을 보호하셨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얼마나 철저했던지 왕 앞에 선 그들을 보니 불이 그 몸을 해하지 못했고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고 입고 있던 옷의 빛깔도 변하지 않았다.
이들의 친구인 다니엘 같은 경우는 신에게 기도를 하지 말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믿음과 양심을 따라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했다. 그도 결국 사람들의 고발로 사자굴에 들어가는 어려움을 당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시고 다니엘을 지켜주셨다.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사울 왕의 공격을 계속해서 받았다. 사울 왕은 왕권을 이용해서 다윗 공격했다. 다윗은 사울 외에도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며 살았다. 그는 그 때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했다. 그런 경험은 그에게 큰 믿음을 만들어 줬고 큰 믿음을 가진 다윗은 확신에 찬 고백을 한다.
시 / 3:6 제 아무리 수많은 원수들이 이 몸을 내리치려 사방으로 둘러싼다고 해도 무서워할 것 없어라.
다윗의 확신은 우리의 확신이 되어야 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호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여전히 자기 백성들은 보호하신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겼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
세 친구가 가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은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고백이다. 왕 앞에 자신들이 가진 확신을 말한 후에 이렇게 덧붙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절).
사실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지키시지는 않다. 때로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면 고난당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분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만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꼭 보호만을 하시는 분은 아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닭이 알을 품었다가 달이 차면 알속의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깨려고 여리디 여린 부리로 힘을 다해 쪼아댄다. 병아리가 안에서 쪼아댄다는 줄(啐)이라 하고 이때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부리로 알 껍질을 쪼아줌으로써 병아리의 부화를 돕는다. 이렇게 어미 닭이 껍질을 깨뜨려 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이런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야만 한다. 그리하여 온전한 병아리가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안팎의 두 존재의 힘이 함께 작용할 때에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윗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버려두는 것과 같은 아픈 경험도 많이 했다. 아마 다윗도 고난 중에는 그 고난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앞에 섭섭한 마음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고난의 과정을 거치고 나니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 유익된 사건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고 고백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좋은 일을 허락하시면 ‘할렐루야’를 외치며 좋아하지만 작은 고난만 허락하셔서 원망하고 불평한다. 오늘날 이 시대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필요한 때이다. 성경 시대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을 지켰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경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고난을 이렇게 말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으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평했다.
이제 우리도 고난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점검해야 한다. 작은 고난에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우리 앞에 다가오는 고난 앞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고 찬양하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신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시대나 교회사를 더듬어보면 지금처럼 신앙생활하기 편한 때가 별로 없다. 요즘도 고난받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나 한국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고난은 그리 큰 고난이 아니다. 물론 공산권과 이슬람권은 예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핑계삼아 신앙생활을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일이다.
4.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믿음으로 살면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결코 손해가 아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전체적인 상황으로 봐서 적들의 고발에 의해서 풀무불에 들어가는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 풀무불에서 구원을 받고 왕이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주었다(30절).
다니엘도 그의 세 친구처럼 역전승을 거뒀다. 정적들에 의해서 참으로 곤란한 상황에 들어가게 되고 그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 굴에 들어갔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봉하시고 다니엘을 구원하시고 그 광경을 목격한 왕은 다니엘의 정적(政敵)들을 사자굴에 던졌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는 입을 열지 못하던 사자들이 저들이 들어오자 입을 버리고 달려들어 뼈 소리가 나도록 그들을 씹어 먹어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다니엘을 더욱 높여 주셨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하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다.
이 대화를 살펴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이 땅에서 백배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 그리고 내세에서는 영생의 복이 약속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시고 하늘에 앉히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위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
성도의 승리도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의 과정동안 신앙을 지켜 믿음으로 살게 되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도를 높여주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누리게 하신다.
5. 제국의 왕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를 보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단 2:46-47 / 이 말을 다 들은 느부갓네살은 땅바닥에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을 하고 제사를 올릴 제물과 분향제물을 다니엘에게 갖다 주라고 신하들에게 명하였다. 47) 그러고는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신들 가운데서도 뛰어나신 신이요 또한 모든 왕들을 당신 뜻대로 다스리시는 분이구나. 그러하시기에 그 비밀스런 일을 밝히 드러내시지 않는가! 그대가 이 비밀스런 일을 밝히 드러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대가 섬기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겠는가!'
단 3:28-29 / 그러자 왕이 입을 떼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섬기는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바로 그분이 천사를 보내셔서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이 사람들을 건져 주셨구나! 이 사람들은 내 명을 거역하고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내가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세운 신상에 절하지도 않았다. 29) 그러니 이제 내가 명을 내리노라. 그 어떤 사람이든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인종이 다르든 쓰는 말이 다르든간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불경스런 말을 입에 담기라도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또한 그가 살던 집은 아예 부숴 버려 쓰레기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래, 세상에 이와 같이 사람을 구해 줄 신이 어디 있느냐!‘
단 4:1-3 / 느부갓네살왕은 제국의 백성들, 즉 인종과 쓰는 말이 다른 각 민족에게 다음과 같은 어명을 내렸다. 천하에 살고 있는 그대들에게 평안이 있길 비노라. 2) 한없이 높으신 참 하나님이 내게 놀라운 일과 이적을 베푸셨으니 나 이제 이 사실을 그대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알리노라. 3) 참으로 크도다. 그 놀라운 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그 일. 참으로 엄청나다. 그분이 베푸신 이적. 하나님은 영영 임금이시라. 언제나 언제까지나 다스리실지라.
단 4:37 / 그래서 나 느부갓네살은 이제 하늘에 계신 임금님께 찬양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노라. 그분을 드높이 기리노라.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다 올바르시다. 그분은 젠체하며 거만하게 목을 곧추세우며 살아가는 자들도 내리 꺾으실 수 있는 분이다.
단 6:26-27 / 나 다리오가 그대들에게 명을 내리노라. 내가 다스리는 제국안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겨라. 그분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 영원히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니 그분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 그분의 권세는 결코 꺾이지 않으리라. 27) 그분은 사람을 건지시는 분, 사람을 구해 내시는 분,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이적을 베푸시는 분, 놀라운 일을 일으키시는 분, 바로 그분께서 다니엘을 구해 내셨다. 사자굴에서 아무 흠도 없이 건져내셨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셋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체험했다. 온 천하에 조서를 내렸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보여주신 그 하나님께 대해서 설만히 말하거든 몸을 쪼개 버리고 그 집에 불을 놓아서 거름 터를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을 저런 지경에서 구원할 다른 신이 천상천하에 없다는 것 때문이다. 이런 신앙 고백적인 조서를 전국에 내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다니엘의 세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친구가 하나님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 이웃 또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하나님을 보여 주어야 하는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가차없이 버리고 만다. 이런 사람의 믿음은 어디를 가도 쓸데가 없다. 세 친구는 풀무불 속에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었고 느부갓네살 왕은 전국에 반포하는 신앙 고백적인 조서를 내렸다. 느부갓네살 왕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세 친구가 하나님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내가 살아 계시다고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이 내 삶에서 나타내야 한다.
■ 초대교회의 교부들 중에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크리소스톰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당시 로마 정부는 기독교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의 복음을 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그는 감옥에서 기도하기를 "주님!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저를 이곳으로 보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서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결국 그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기도하기를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순교라고 했는데, 저 같은 사람을 순교의 반열에 동참케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 후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사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사형중지령이 내렸다. 그때 그는 또 기도하기를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종에게 할 일이 남았으면 죽도록 충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 조건을 달고 감사한다. 내게 이런 문제가 있었는데 해결해 주셔서 감사하고, 내게 이런 소원이 있어 기도했는데 응답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한다. 혹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면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이 먼저 축복해 주시면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감사의 이면에는 한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다는 마음이다. 내가 외형적으로 잘 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내가 건강한 것은 감사할 수 있지만 병들면 감사할 수 없고,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면 감사하지만 내가 기도한대로 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다는 마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의 감사는 살아도 감사요, 죽어도 감사였다. 이러한 감사는 사도 바울에게 찾아 볼 수 있는 감사였다. 바울 역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다시 자유를 얻어 감옥을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대로 순교의 제물이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감사와 기쁨 대신 원망과 절망으로 매일매일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더구나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기를 쓰고 바울을 괴롭히려는 사람들조차 있었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바울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됨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과 교부 크리소스톰은 외부적인 환경의 변화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한 것이다.
결 론
■ 하나님을 교묘히 이용하지 마라!(갓피플 컨텐츠에서 발췌) /
◈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 자체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수단으로 이용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무한하고 하나님의 자비가 측량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의 육신적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을 이용하는 일을 용인치 않으실 것이다.
◈ 그러나 현재 대중적인 기독교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을 돕기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식으로 말해서 인기를 끌려고 애쓴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현대인의 어리석은 노력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한 코미디언이 거듭된 실패 후 그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하나님이 저를 연예인으로 성공하도록 만들어주시면 병든 아이들을 위한 후원금을 두둑이 내는 것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 얼마 안 되어 그는 나이트클럽과 텔레비전의 황금 시간대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는 아동 병원을 짓기 위해 거액을 모금하는 것으로 약속을 지켰다. 그는 이 자선활동이 자신에게 이루어진 성공에 대한 작지만 마땅한 보답이라고 여긴다.』
이 연예인의 행동이 20세기 이교도의 행동으로서는 당연한 것 아니냐고 옹호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수많은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이 연예인과 실제로 이런 거래를 하셨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저급하고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배에 기름 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토록 인기가 있는 것이다.
◈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계명에 따라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생길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심없이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무지개로 둘러싸인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보물들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수많은 보물들이 아버지의 사랑의 선물임을 알고 경외심과 감사의 마음으로 그것들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본래 이 선물들을 추구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보너스로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으로 아무 해도 입지 않고 이것들을 즐길 수 있다. 이중에는 삶의 소박한 축복들이 포함되는데, 예를 들면 건강, 가정, 거처할 집, 친한 친구, 음식,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다소 인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이나 미술 등이 포함된다.
◈ 이제껏 인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이 보물들을 찾겠다고 발버둥쳐 왔지만 이것은 인간에게 저주와 고통만 안겨주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것들을 얻을 수 없다고 깨달은 사람들 중 일부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것들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보물들이라면, 그들의 시도 역시 심판받게 될 악일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실 분이라고 믿기를 바라신다. - AW 토저, 임재체험
마 6:33 /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대하 16:9 / 여호와께서는 오직 한 마음으로 주님만 의지하는 이들을 도와주시려고 온 세상을 두루 살피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처신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이 나라에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겔 33:31 / 떼를 지어 찾아온다. 그리고는 네 앞에 앉아서 내 백성이나 된 것처럼 말을 듣고 있지만 아무도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육체의 쾌락에 관한 것뿐이다. 자기들의 사업과 이익에 유리한 것만을 들으려고 쫓아다닌다.
† 제가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과 거래하려 했던 저의 죄악을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따라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을 사심없이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받고도 아무런 영적인 해를 입지 않고 그것들을 누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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