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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면 알아!”
술 한 잔을 해도 꼭 자기 편한 시간에 자기 집 근처 치킨가게로 불러선 자기가 좋아하는 뿌링클치킨을 시켜놓고, 내가 좋아하는 후라이드가 아니라서 깨작거리고 있으면, 곧바로 아들 녀석을 불러다놓고는 “그러다 체해!” 등까지 쳐주며 마무리를 시키던 사람이, 하필이면 폭설예보까지 내린 오늘 왜 내 집 앞까지 와서는 부천까지 친히 모시고 가겠다는 건지 도대체가 모를 일이었다.
“미장원까지 들른 거야? 오~ 아이돌인데?”
“아이 둘이겠지!”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농담을 웃음기 없이 해내는 이 야릇한 분위기는 뭐지?
“납치가 아니고는 상황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인천 앞바다 불법 중국 고기잡이배에 인신매매라도 할까봐?”
“팔수만 있으면 팔아주라, 제발! 전셋값 올려줘야 하니까 몸으로라도 때우게!”
그러나 내 농담은 동화나라같이 눈부신 바깥 풍경과는 언밸런스한 그의 얼굴에 부딪혀 차창에 미끄러졌다.
“이혼 하려고...”
“아이고! 이재용이 대출받는 소리를 또 돌림노래하고 있네?”
한두 번 들은 얘기가 아니었다. 내가 쉽게 결혼을 못하는 것처럼 김에게도 또한 이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블랙홀 같아...”
“와이프가 뭘 집어 삼키고 있구나?”
“엄마 수술비 드려야 한다고 돈 달라니까 미적미적 하길래 통장 가져오라니까 곧바로 무릎을 꿇더라.”
“없대? 어디다 다 쓰고? 너희 둘이 연구원 부부면 준 재벌 아니니?”
“자존심 지켜주려고 그간 애써 눈 감아 준 건데 그걸 또 그렇게 이용을 하네?”
“남자 생겼대?”
“그럴 위인이라도 되면... 처갓집 참 징글징글하다. 내가 그래도 배운 사람인데, 차별을 안 드러내려고 애써왔는데... 수준 맞는 집안끼리 결혼하는 게 다 이유가 있어!”
“기울어진 거야 이미 알고 결혼한 건데 무슨 새삼스럽게...”
때마침 차내 블루투스로 걸려온 전화벨 소리 때문에 심각한 공기는 금세 깨졌다.
“어디쯤 오세요?”
휴대폰 액정에 드러난 이름이 왠지 낯익었다.
“웬 존댓말? 가고 있어. 차샘이랑! 한 30분 걸릴 거야!”
“누구? 나도 아는 사람?”
“알걸? 소정이 엄마. 그 애 작년에 입시상담 해주었잖아!”
입금 받을 때 송금인의 이름이 기억났다. 이름과 함께 정말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날의 기억이 자연스레 소환되었다.
김의 소개로 송금까지 받고는 사흘 밤낮을 높지도 않은 딸 내신 성적에 맞춰 대학을 찾느라 고생한 것만 가지고 내가 지금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드는 게 아니다. 그렇게 데이터를 내고 차트까지 정성스럽게 만든 보고서를 소정이네 가족 세 사람 앞에 내놓았을 때의 분위기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 좀 봅시다!”
“이분은 전에 입학사정관 하셨던 분...”
“쓰읍...알아! 내가 지금 자료 보고 있는 거 안 보여? 여자가 어딜!”
커피숍의 손님들이 우리 자리를 돌아볼 만큼 굵은 베이스 톤의 남편의 고함에 나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무슨 쌍팔 년도 드라마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건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그것도 자녀의 앞날을 쥐고 있는 내 앞에서 이런 무례라니! 집에서는 이보다 더 할 거 아닌가? 아무 대거리도 못한 채 거의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미현씨가 갑자기 가엾어 보였다.
“너, 소정이! 아빠가 고작 이런 대학 보내려고 그간 덤프트럭으로 돈 들이부은 거 아니다, 알지? 수시는 무슨... 수능 두 달 남았으니까, 할 수 있지?”
“모의성적이 내신보다 낮아서...”
“무슨 소리? 너 중학교 때 반장도 하고 공부도 잘 했...”“애 학교가 중학교 때 반장한 애가 반에 2/3...”
“어허! 쓰읍! 내가 지금 말하잖아! 어디 여자가 깜빡이도 없이 끼어들어? 내가 도로에 나가면 꼭 너 같은 것들이...”
“사람들이 봐요. 소리 좀 낮춰요!”
“너, 집에 가서 보자!”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얼굴로 낼 수 있는 온갖 인상을 다 동원해서 찌푸려선 일부러 험상궂게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는 저 못난 어른이라니! 난 돈도, 애 장래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당장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선생님! 소정이가 해보겠답니다. 그러니 이건 없던 걸로 하고요....아니 너는 애를 겨우 인천 바닥에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든? 어째 생각하는 거 하고는... 쯧쯧.”
“아버님 의향은 충분히 알겠고요. 그래도 아셔야 하는 건, 정시 세 개 써놓고 두려워하기보다는 혹시 모르니 다들 수시 여섯 개를 먼저 쓰거든요. 소정이는 최저도 충분히 맞출 성적이니...”
덧붙이면 안 되는 거였다. 결국 화살이 내게로 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주워 담기엔 이미 때는 늦었다.
“선생님! 제가 인생을 더 살아본 사람으로서 한 마디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요행으로 지금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저는 애, 그렇게 안 키웠습니다. 해서 안 될 게 어딨습니까? 그런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제가 현재 레미콘 회사 여섯 개를 운영하는 사람이 된 겁니다. 레미콘 아시죠? 모래랑 자갈이랑 석회가 적절한 비율로 배합을 해야 튼튼한 건물이 만들어진다는 거. 근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 아십니까? 재료 다 필요 없습니다.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면 제멋대로란 겁니다. 리더십, 그게 건물을 바로 세우는 제 철학이라는 거 아시겠습니까? 남들처럼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는 걸 보통의 사람들이 알 리가 있겠습니까? 얘기 끝났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보통사람이 된 난 저절로 다리가 공손히 모아졌다. 정말 내가 싫어하는 질문형으로 대화로 이끌어가는 이 사람은 세상을 단순한 파놉티콘으로 보고 있었다. 그냥 블랙홀 그 자체였다. 내가 그려온 모든 계획이 덩치 큰 그의 어딘가로 모두 빨려 들어가 사라졌고 모든 상황이 그렇게 누구도 찍소리 한 번 못하고 종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난 사람의 무식한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일장연설을 듣고야 깨달았다.
그때 김의 인스타그램 알림음때문에 그때의 기억을 잊으려 머리를 휘이휘이 젓던 난 현실로 간신히 돌아왔다.
“여자 생겼어?”
꼭 변검술을 부리듯 아까와는 사뭇 다른 은근한 미소가 만연한 김의 옆얼굴이 보였다.
“이쁘네. 자, 어디보자... 프로필...어? 이 여자, 입체미술 해? 조심해라! 예술 하는 애들 AB형 많다. 알지? 거의가 또라이라는 거?”
“당신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어조에서 옹호의 냄새가 묻어났다.
“뭐야? 근데 김박사, 이런 적 없었잖아! 진짜 누군데? 동료는 아닐 테고...”
“있어...”
“로맨스 스캠 아니지?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낼 정도로 가까워질 때까지 나한테 말 안 한 거야? 배시시 웃음에서 배신감마저 느껴지네!”
특별한 사이는 아닐 것이다. 정부 공기관인 법제연구원에서 부부가 쌍으로 근무하는 바른생활 모범 가장이 그럴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집착으로 보일 정도로 김은 아내와 가족에게 무척 각별했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같은 직장에서 똑같이 일하고 그러면 가사일도 똑같이 하면 되지, 왜 자네가 집안일을 다하는데?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하고 반찬 만들고... 너무 불균형이라고 생각 안 해? 빨래 개는 건 하니? 대체 퇴근해서 와이프는 뭐하는데?”
“소파에 앉아서 자기 좋아하는 프로야구 돌려보면서 얼굴 마사지하지! 그래도 항상 안 빠뜨리는 건 애랑 함께 한다는 거야. 이야기하고 숙제 도와주고 놀아주고, 그거면 됐어. 애한텐 엄마가 있어야 한다는 거, 코로나 때 어디 시설엔가 와이프 일주일 들어가 있을 때 정말 많이 깨달았다니까. 외이프 허락 받고 내가 늦게 퇴근하고 돌아와서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자는 모자를 보면 얼마나 흐뭇한지 샘은 모르지? 녀석이 엄마 얼굴에다가 자기 얼굴을 부비다 말고 잠든 듯한 평안한 모습...”
“그건 세상 모든 엄마들이 다 하는 거고. 자네는 세상 모든 아빠들이 다 못하는 일을 하는 거고. 하여간 처음부터 버릇 잘못 들였어. 고마움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아, 내 보기엔.”
빵빵빵!
“아이고, 놀래라! 하여간 저것들은 깜빡이도 없이! 길도 미끄러운데!”
“괜찮아. 근데 지금 내가 무슨 생각 좀 하고 있었는데...자네가 와이프한테 뭐 죄 지은 거 있어? 왜 저자세야, 항상?”
“그래서 이제부터 죄 좀 지어보려고!”
꼭 다문 입술이 무슨 전장에 나가는 용사처럼 굳건해 보였다.
“어디쯤이야? 미끄러워. 조심해서 와!”
“가고 있어. 15분 정도?”
전화 온 게 잘 됐다 싶어 화제를 부단히도 바꾸어보려고 난 노력했다.
“근데 시간이 칼인 사람이 오늘 왜 늦었어?”
“와이프가 차 세차해 달라고 해서 오늘 차 바꿔 타고 출근했었잖아. 근데 와이프가 퇴근이 늦어져서 내 차 건네받아서 오느라고!”
“이젠 하다하다 세차까지? 와이프는 손을 뭐하는데 써? 그리고 눈이 온다는데 무슨 세차를? 차창이 얼어버릴 텐데?”
“와이프가 자기 눈앞에 보이는 건 못 참는 성격이잖아! 근데 세차하면서 느낀 건데... 하얀 차보다 검은 차가 더 빨리 더러워지는 것 같아. 보통은 하얀 차가 더 빨리 더러워질 것 같은 생각을 하잖아?”
“코페르니쿠스 이래로 참 위대한 발견을 하셨네! 어쨌든 와이프는 진짜 딱 자기가 팔을 벌려서 손을 뻗친 데까지만 신경 쓰는 사람인 것 같다.”
“정신 승리지! 차도 깔끔해, 외모도 깔끔해, 그럼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겠어? 자기관리 잘하는 사람일 거라고 느낄 거 아냐? 그걸 즐기는 사람 정도?”
자기 와이프 험담하는 데 계속 맞장구를 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옆에서 거들어준다 해도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가족이기 때문에 기분이 좋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등 동창이라고 그랬지? 엄마들끼리도 아빠들끼리도 다 아시는 사이라고? 남자랑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나? 그것도 유부녀, 유부남이? 그런데 잠깐만! 혹시 오늘 미현씨랑 술 한 잔 하는 거였어?”
“응!”
“난 어색한데... 둘이 만나지, 왜?”
“그래도 끝까지 샘이 몰래 지도해 준 덕분에 소정이가 대학도 무사히 들어갔고 해서 함께 밥 한 번 사고 싶다고 언제부터 그랬거든!”
“고마우면 그냥 돈으로 달라고 그래! 흐흐흐”
“그놈의 돈, 돈, 돈... 징그럽다!”
“그래서 그 돈 때문에 이혼한다는 거야? 그간 잘 참아왔잖아. 둘 다 정년을 채우면 연금도 두둑한데 왜? 애도 아직 어리고.”
“샘 그거 아냐. 나, 진짜 그런 계산된 안정된 현실을 넘어설 만큼 회의를 느껴. 진짜 결혼 후 이렇게까지 우울한 적이 없어! 이제 더 이상 못해 먹겠어!”
“그래서 밥도 안 해놓고 이렇게 부천으로 줄행랑을 친다? 멋진 반란이네!”
분위기를 전환해보려고 가볍게 농담을 쳐도 평소답지 않게 눅눅한 김의 기분을 녹여내기엔 역부족인 듯 했다.
“나 병원에 난생 처음 입원했던 날 알지?”
“알지. 내가 와이프를 자네 입원한 병원에다 태워다줬잖아....뭐야? 그때 그 일로 빈정 상해서 지금 이혼까지 한다는 소리인거야?”
“선거로 대통령 뽑은 것도 아니고 무를 수 있으면 물러야지. 우리나라같이 재선이 안 되는 나라에서 대통령은 5년 지나면 다시 뽑기라도 하지... 이건 평생이잖아?”
워낙 건강 체질 타고나서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준 자기 엄마를 치켜세우는 걸 좋아하던 김이었다. 모기도 아니고 작은 깔따구 한 마리가 스쳐만 가도 퉁퉁 붓는 나에 비하면 김은 호랑이가 물어도 찬물에 쓱쓱 씻어내면 금방 나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던 그가 요로결석으로 소변에 피가 묻어 나오는 걸 보고서야, 결국 김의 말로는 이건 병원이 아니라 숫제 무슨 대장간의 달궈진 쇳물처럼 누워서는 망치로 세 시간 동안 복부를 두들겨 맞는 고통을 감내하는 시술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입원을 했으면 버선발로 뛰어와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던 내 기대는 금세 무참히 무너졌다. 없는 김 대신에 집안 청소를 하느라 몸살이 났다면서, 그럼 택시라도 타고 부리나케 가야할 게 당연한 일인데도 갑자기 나에게 전화를 해서는 방문 갈 거면 자기를 태우러 안양에서 화성까지 오라는, 실로 놀라운 자기위주의 발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김과 나 사이를 생각해서 참고 그러마고 데려갔으면 뭐 의사나 간호사도 만나면서 신경 쓰고 위로하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김은 살펴보지도 않고 병상에서 멀리 떨어져 앉아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모양이라니!
참다못한 내가 가습기 물이라도 떠오라고 했지만, 그건 간호사들이 하는 것 아니냐며 제안을 무시하더니 수술 후 통증에 시달리는 김샘을 쳐다보다가 어처구니없는 말까지 쏟아냈었다.
“언제 퇴원해요?”
“방금 입원했잖아! 궁금하면 의사한테 물어봐요.”
“그럼 밥은, 청소는, 빨래는 어떻게 해요?”
“내가 가사도우미는 아니잖아요?”
“배달음식 시켜주세요, 그럼. 애한테 안 좋긴 한데 어쩔 수 없지, 뭐.”
보호자가 아니라 방문객 같은 이 거리감은 또 뭘까? 부려먹기 좋은 착한 남자 하나 문 불독으로 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내가 영국 왕실 공주님 기사도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자기를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한 걸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김 대신 복수해준 소심한 제스처였지만!
“그때 진짜 아스퍼거증후군 환잔가 싶었네...공감능력이 전혀 없는...그게 이혼의 결정적 사유는 아닐 테고...”
“그게 불씨가 된 건 맞지. 갑자기 그때부터 현타가 오더라고. 나는 와이프에게 무언가? 이렇게 살려고 내가 결혼이란 걸 했나. 혼자 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더라고! 그래서 아이도 집도 돈도 다 가져가고 대신 나만 풀어달라고 했어!”
“진짠가 보네...? 인생을 새로 리셋하게?”
“애처가네, 이런 사위가 없네, 모범가장이네, 이런 소리에 갇혀서 서서히 나를 그런 사람으로 몰아세우느라 이젠 인내가 바닥까지 고갈된 느낌이야!”
인스타의 알림음이 다시 공기를 바꾸었다.
“대신 읽어줄래? 운전 때문에...”
“일부일처제를 떠받드는 나라에 태어났으니까 로마법에 따르는 거지, 제가 이슬람 나라로 이민이라도 가면 그 믿어왔던 진리도 바뀌는 것 아닌가요? 그게 무슨 진리야? 진리는 불변성이 생명이지 않나요? 폴리아모리라고 들어보셨죠? 한 사람한테만 죽을 때까지 올인 하는 건 좀 불쌍하지 않나요?”
“설득력 있네...”
“가스라이팅이야? 무슨 개떡 같은 논리야? 결혼할 때 서약을 왜 해, 그럼?”
그러고 보니 이 질문형 어투,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이 싸하게 밀려오는 건 뭘까 싶었다.
“여자 맞지?”
“보면 알잖아! 싱글 우먼! 다음 주 플레시몹 스타일로 폴리아모리를 주제로 입체미술을 한다던데...장소는 아직인가 보고...”
“통화는 해봤어?”
“요즘 누가 통화를 해? 이렇게 쉽고 빠른 세상에 굳이...”
“이 사람, 의외네...나보고는 신분 확실한 사람하고만 만나라고 그렇게 신신당부 해놓고선!”
“내가 이 여자랑 뭘 하겠단 게 아냐. 그냥 스트레스 때문에 시작한 거야. 나도 숨 좀 쉬자!”
“법제연구원이니까 정신적인 외도도 이혼 귀책사유가 되는 거 알지? 그리고 프로필을 좀 실루엣으로 좀 가리지. 요즘 세상에 누가 이렇게 나 이런 사람이오 떡하니 대놓고 프로필을 올려?”
“뭐가 무서워서? 그리고 잘 못되면 뭐, 나만 죽나?”
“그건 그렇고, 그러니까 와이프랑은 집안 수준 차이 어쩌고는 그냥 한 말이고 성격 차이인거네?”
“솔직히 한 번 싫어지니까 다 눈에 거슬려! 자기가 우리 엄마, 아빠한테 용돈을 줘봤어, 생일 날 선물은커녕 안부 전화 한 통을 해봤어? 나는 전남 신안까지 기사로 데리고 가서는 집을 개조해야 하네, 김치냉장고를 바꿔야하네, 처남 결혼하는데 전셋집이라도 하나 있어야하네 하면서 꼭 나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대화하고...내가 무슨 재벌 집 막내아들인 줄 안다니까!”
“미리 선을 그었어야지, 그러니까!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겠느냐만서도...자네 이제 보니까 ‘굿 보이 신드롬’ 같은 거네...착하다는 평판에 부응하려고 자신을 소모시키는!”
“... ...”
“그래서 무릎 꿇고 뭐래?”
식당 앞 주차장에서 친절하게 손짓으로 김의 차를 유도하고 있는 사람은 관리인이 아니었다. 드나드는 차들로 반들반들 빛나는 보도에서 하마터면 미끄러질 뻔한 몸을 간신히 추스르던 여자는 미현씨였다. 신호를 따라 주차를 하면서 대답 대신 김은 가로수에 치렁 늘어진 플래카드를 턱으로 가리켰다.
‘민생을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ooo당 부천지구당 손민구’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김은 시동을 끄고 벨트를 풀면서,
“공수표라고! 훤히 보이는 거짓말! 상황 모면용! 바로 다음날부터 똑같아!”
“뭐가 똑같아요?”
남편의 횡포에 길들여져서 항상 귀를 열어놓은 탓일까, 작은 소리마저도 이렇게 금방 캐치하다니!
고깃집에선 그럭저럭 선을 지키는가 싶던 둘의 모양새는 2차로 호프집에 왔을 땐 될 대로 되란 식의 흐트러짐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화장실까지 굳이 따라가선 휘청휘청 문 앞에 서있는 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기까지 졸래졸래 따라온 나마저도 후줄근해지는 느낌이 들어 싫었다. 게다가 대리기사를 불러놓고 기다리는 동안 똑같이 술도 약한 둘이 껴안고 미끌미끌한 차도에 계속 내려갔다 올라오는 유유상종의 유치하고 위험한 장난을 치는 것마저도 꼴 보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이젠 선생님 아닌 거다~ 오빠다, 오빠!”
“나한테는 오빠라고 안 해? 질투 나게? 내가 생일이 빠르잖아!”
“너는 오빠 아니지! 달.링. 근데 폭설예보는 다 거짓말인가봥.”
“기상청 체육대회 때도 비 온다잖아!”
“어머, 넘 웃긴다, 자기야!”
원래 김이 이렇게나 말랑했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이 광경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내 심정은 눈 때문에 한참이나 늦은 대리기사에게 애꿎게 화살이 나가고 말았다. 게다가 남편한테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이마의 푸른 멍을 끝까지 문에 부딪혔다고 변명하는 여자한테 분명히 돼지 같은 남편 놈이 그랬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자기가 꼭 죽이고 말 거라면서 그녀 이마에 대고 호호 입김까지 불어주는 꼴이라니! 질척거리기는 둘 다 마찬가지여서 강제로 내가 김을 차에 태우지 않았으면 저 눈 바닥 위에서 뒹굴 대며 영화 러브스토리의 명장면을 연출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가 똑같은뎅? 끝까지 말 안 해줄 꼬야? 미워할 꼬야!”
저 나이에 뽀로통 귀여움 시전이라니! 와이프에겐 없는 애교가 막 내리기 시작한 진눈깨비가 되어 여기저기 흩날렸다. 혀 꼬부라진 말에 이어 미리 불러놓은 택시를 타는 여자의 모습을 사이드미러로 보자마자 대리기사에게 얼른 출발신호를 주었다. 김은 뒷자리 소파에 물에 적신 티슈마냥 파묻혀 내게 나직이 부탁을 해왔다.
“샘...오늘 본 거, 들은 거, 모두 저 눈 속에 파묻어줘...꼬리도 안 남게...”
“눈이 녹으면 어쩌게?”
불현듯 ‘꼬리’라는 말이 거슬렸다.
“내가 말린다고 안 만날 애들도 아니고...어쨌든 오늘 보니까 자네 둘이 인스타에서 미술 하는 여자랑 하는 정신적 외도 수준을 이미 넘어선 듯하던데...스킨십도 자연스럽고. 계속 갈 거야?”
“미현이는 나한테 산소 같은 여자야! 와이프랑 달라도 너~무 달라. 그냥 목석이야. 감정절제술 같은 걸 받은 여자처럼...”
“연민이야, 사랑이야?”
“내가 연민에 이미 세게 데인 사람 아냐! 이건 사랑이지!”
“솔직히 와이프는 미모에 넘어간 거지, 연민이냐?”
“미현이는 뭐 외모가 빠져? 단, 둘이 차이점은...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고거지!”
내가 보기엔 김의 와이프에 대한 감정은 처음엔 연민과 사랑, 그리고 미모에 홀림의 종합선물세트였다. 연수원에서 처음 본 와이프는 김에게 눈길 한 번 안 주던 도도녀였고, 그녀 주위로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수컷들이 득실대면서 팀플 같은 걸 서로 와이프랑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김은 먼 발치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연수원 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였던 그녀가 애정을 담은 포스트잇을 김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때 김을 애타게 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수작임을 눈치 챈 건 결혼 후 아주 사소한 다툼에서 드러나고 말았다고.
“자기는 왜 나랑 결혼했는데? 그때 자기 좋다는 남자 애들 중에 손만 뻗으면 되는 거 아녔어?”
“서울 남자잖아! 내가 서울 남자랑 결혼해야 그 징글징글한 섬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니까!”
“신분세탁 같은 거? 그런다고 자기가 섬 출신인 게 사라져?”
“그래서 섬에 가도 애들 안 만나잖아. 촌스러워!”
“그럼 친구들도 안 만날 거면서 왜 갈 때마다 백화점에 들러서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를 하는 건데?”
“혹시 알아? 그리고 중요한 건 당신이랑 결혼을 해야 남편의 바운더리에 일순위로 추천을 받는 제도도 활용도 할 수 있었고!”
내가 그녀의 허영보다 더 무섭다고 느낀 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당사자를 앞에 두고서 당신은 이용가치가 충분했다고 직설적으로 내뱉는 용기였다.
“아이, 저 새끼가! 길이 미끄러워 긴장해서 손이 다 젖었고만. 깜빡이도 없이!”
대리기사의 욕을 듣는 순간 아까 부천 올 때 새치기 하던 그놈이 또 나타난 건가 싶었다.
“이봐! 김박사! 눈 떠봐! 생각해보니까 정말 기분 나쁘네? 오늘 그러니까 나를 초대한 건 고마움의 만찬이 아니라 이 불륜을 알고도 침묵할 수밖에 없도록, 공동정범 아니면 방조자 같은 걸 만들 속셈이었던 거야? 깜빡이 신호는 줬어야지.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무슨 소리! 와이프가 샘이랑 있다고 하면 뭐든 오케이잖아... 그게 다야!”
증거를 없애야했다. 당사자가 태평할수록 괜히 나만 더 마음이 부산해졌다.
“혹시 미현씨, 여기 안에 태웠었어?”
“그럼 지붕에 매달고 밀월여행을 갔을까봐? 샘...나, 넘 취해...집에 도착하면 깨워줘...”
원래 머리만 대면 잔다더니 용케 여태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신기하긴 했다. 앞쪽에 사고가 났는지 차량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눈썰매장 같은 도로에 앰뷸런스와 경찰차까지 와 있는지 저 멀리 빨간 등 여러 개가 숨 가쁘게 돌아가는 게 보였다. 난 그것들을 보자마자 비상상황이 도로에만 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아까 김이 말한 ‘꼬리’가 내내 걸리던 참이었다.
“아저씨, 지금 정체니까...잠시 부탁 좀요. 저기 그 블랙박스 있잖아요. 네, 거기 룸미러 앞에 있는 그거. 방금 전까지의 모든 데이터를 삭제해 주실 수 있으세요?”
“네...아, 그런데 여기 화면을 좀 보실래요, 손님? 오늘 것만 있는데요?”
“그게 무슨...”
“어제 것까지는 모두 삭제가 된 상태라고요.”
순간 워낙 술이 강한 나도 아까의 술자리 분위기 때문에 잠시 몽롱할 수밖에 없었던 정신이 눈 속에 다이빙이라도 한 듯이 차갑게 돌아왔다. 동시에 김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송신자는 와이프였다. 그것도 하트 뿅뿅 이모티콘까지 정신없이 날리는 가운데 드러난 ‘사랑하는 내편’이라니! 쇼윈도 부부 행세는 와이프만 하고 있는 건 아니었던 거다. 옆구릴 흔들어 봐도 이미 잠에 취한 듯 손사래를 치고는 차창 쪽으로 고개까지 돌려버린 김 대신 어쩔 수 없이 내가 받을 수밖에 없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카톡과 인스타그램 메시지가 동시에 울려댔다.
“부천까지 갔다 오신다고요? 애 아빠는 자나요?”
이 습기 하나 없는 사무적인 말투라니! 정이 떨어질 만도 하겠다 싶었다. 몇 년 만에 나랑 연결이 되었으면 근황을 묻는다든가, 본령 전에 예비령이라는 게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훅 들어와 자기가 알고 싶은 정보만 묻는 예절이라니! 하기야 이번 만 이런 건 아니니까!
자기 피부숍에 가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친히 운전사로 김을 앞세워서는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이 여자도 이 여자지만, 난 그걸 ‘애처가’라는 포장지 안에 자신을 감싸고 멍청하게 그 짓거리에 동조하는 김도 못나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그가 첫 번 째 부부갈등이 있었을 때 친구 아빠 장례식에 간다고 거짓말을 던져놓고 남해로 나와 여행을 간 사건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내겐 지금 이 상황이 그리 낯설진 않았던 거다.
“숨이 막혀서 그래!”
“그냥 나랑 간다고 해도 되잖아?”
“who가 아니라 그 사람에겐 why가 더 중요해!”
“그래서 그 이유를 찾아낸 게 고작 그 뻔한 장례식?”
무슨 급한 미션이라도 수행하려는 사람처럼 그 많은 휴게소를 다 건너뛰고 네 시간을 꼬박 달려 남해 유배문학관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렇게 김이 소변을 참는 바람에 결국 훗날 병원 신세를 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난 이젠 감각까지 없어진 아랫도리를 부여잡고 화장실로 뛰어가면서 김이 뒤따라오나 살짝 돌아보았을 때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안절부절 통화를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부리나케 달려와 간신히 숨을 한 번 길 게 쉬려는 내 손을 낚아채고선 휴대폰을 쥐어주던 김의 얼굴은 이미 유배라도 온 듯 새까맸다.
“샘! 남해문학관 맞나요? 지금 계신 데가?”
“맞는데요!”
“둘만 계신 거 맞나요? 여자는 없죠? ”
“네!”
“샘 말씀만 믿습니다. 애 아빠에게 전화기 주실래요?”
여기 배경은 한 없이 드넓은데도 난 마치 사면이 가로막힌 사각 룸 취조실에서 거짓말탐지기 반응검사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통화를 마친 김이 서둘러 날 태우고서 다시 휴게소도 안 들르고 복귀하기까지 꼬박 네 시간. 정말 남해에 점만 찍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어떻게 알았대?”
“와이프한텐 how가 아니라 이번엔 who가 중요했나보지. 종잡을 수가 없어.”
“나랑 있는 거 확인했으면 됐잖아.”
“빈정 상했다 이거지. 거짓말을 했다는 것만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피곤해서 그냥 간다고 했어. 혹시 자네가 오피스와이프 같은 존재, 그런 거 아니냐고 까지 하는데 계속되는 오해의 상상력을 어떻게 막아? 가야지!”
“의부증까지 있으면 끝난 건데?”
“내가 단초를 제공했잖아!”
“여보세요? 듣고 계세요?”
“네.”
“꼭 부천까지 갈 이유가 있었을까요? 집 앞 치킨집 있잖아요?”
자기 감시망에서 벗어난 것을 괘씸하게 여기는 것일 터.
“다른 공기 좀 마시고 싶었던가 보죠.”
“그래서 거기에 샘도 동조하신 거고요?”
또 취조가 시작되는 기분 나쁜 느낌 때문에 휴대폰에서 귀를 떼고 대신 계속 울리는 카톡 메시지를 열었다.
‘나도 이혼할게. 각자 이혼하고 우리 함께 살자. 나 남편이랑 더 이상 못살겠어. 이러다간 정말 나, 뉴스에 나올 일을 저지를지도 몰라. 나 좀 살려주라. 하나님이 나 살리려고 자기를 보낸 것 같아!’
‘자기야, 자는 거야? 난 오늘도 자기 생각에 한숨도 못 잘 것 같은데?’
‘나, 사랑하는 거 맞지?’
‘와이프는 그런 거 못하지? 자기 요로결석 부서진 거 하나씩 입으로 빼내는 그런 거? 그건 사랑이 아니지.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 그런 노래도 있잖아! 이제야 말하는데, 나 그때 자기 요도에서 나온 거, 그 날카로운 돌 부스러기에 혓바닥이 찔려서 한 달 동안 치료도 받았어.’
‘몰랐지?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떡볶이를 마다했을 때도 눈치도 못 채고...미워!’
더 이상 이 징징대는 글자들이 요도에서 나온 날카로운 돌가루가 되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듣고 계신가요?”
“네.”
“한 분이라도 정신을 차리셔야죠! 집으로 못 돌아오는 일이 생기기 전에.”
“그게 무슨 말이죠? 못 돌아오다니요?”
“블랙박스 SD카드...”
순간 얼음물을 온 몸에 끼얹은 듯 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오전에 차를 교환한 건 세차가 목적이 아니었던 거다. 의심이 의심을 불러와 결국 와이프는 손에 불륜의 증거를 쥐고야 만 것이다.
“너무 많이 먹으면 체한다는 건 진리인 건 아시죠?”
세상 일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 이런 거 하나 단속 못했나 싶어 슬슬 김에게 짜증이 밀려왔다.
“아이씨! 오늘 같은 날은 콜도 많이 뜨는데..여기서 시간을 다 허비하네!”
계속 혓바닥과 치아를 부딪쳐 내는 대리기사의 불만 가득한 쯧쯧 소리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가 무얼 보았게요? 두 분의 우정이 참으로 눈물이 납니다. 그걸 아시면서도...”
“여보세요! 난 아까 가면서 들은...‘
“어쨌든 샘도 이 가정파탄의 제공자로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예요.”
차분함이 오히려 소름을 돋게 했다. 무심코 나도 모르게 김의 상황에 이입되어 침착함을 잃고 그만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저한테 왜...그리고 지옥까지 함께 갈 작정이세요? 이건 사는 게 아니죠. 행복을 위해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현명한 걸로 보는데요?”
“이혼이요?”
“... ...”
거슬리기는 인스타 알림음도 한 패나 다름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메시지 창을 여는 순간 내 온 머리가 하늘로 솟구치고 정신은 아득해지고 말았다. 그 입체미술녀가 보내온 충격적인 사진 한 장.
<폴리아모리 입체미술 전시회> ◯ 일시: 2023년 1월 O일 ◯ 장소: 한국 법제연구원 입구 ◯ 관람 시 유의사항: 임산부와 노약자, 어린이는 관람 불가 |
문구 아래로는 미현씨와 김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들어가 있었고 사진 위에는 이런 글씨가 덧붙여 있었다.
“불륜은 공구리를 쳐야!”
이어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전시회에 초대받은 느낌, 어때요? 내일 봐요, 자기야~’
미현이 남편이 다른 사람의 아이디를 도용해서 접근한 줄도 모르고 이 바보 같으니라고! 김의 몸을 거세게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데 난 이 상황에 김이 자는 척하는 건지, 정말 자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혼이요? 으음....”
상황과 안 맞게 라디오에선 하필이면 러브스토리의 OST ‘Snow Flooric’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 ~ 우우우우~”
“아이씨! 걸어가는 게 빠르겠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아아우우우우우~ 아아아우우우우~”
“여보세요! 그럼 그냥 걸어가세요! 당장 내리세요!”
“날씨도 거지같고 돈도 안 벌려서 짜증나 죽겠는데 지금 부아를 돋우는 거요?”
“여보세요! 대리비 드렸잖아요? 받은 만큼 일을 하세요, 네? 투덜거리지 좀 말고, 네?”
“아아아우우우우우~ 아아아우우우우~”
“보자보자 하니까! 이미 받은 돈보다 더 왔거든요?”
“그러니까 내리라고욧!”
그런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말로 비상등을 켜더니 대리기사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선 씩씩거리며 운전석을 떠났다.
“이봐! 차키는 주고 가야할 것 아냐!”
“이봐? 아냐? 내가 니 시다바리로 보이냐? 이런 일 한다고 말을 함부로 해? 에라잇!”
그러더니 기사는 갑자기 눈 속에다 차키를 던져버렸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나는 도저히 이 상황이 납득이 안 되었지만 어떻게든 키는 찾아야만 했다.
“미친 새끼가!”
“뭐? 미친 새끼?”
가다말고 뛰어 돌아 온 녀석이 공중에 내 몸을 부웅 띄우더니 눈 속에다 내리 꽂았다. 온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 일시에 몰려왔다. 그러나 상황을 알 리 없는 열린 차문으로 새 나오는 러브스토리는 소리를 한껏 높여 클라이맥스를 치닫고 있었다.
“아아아우우우우우~ 아아아우우우우~”
“여보세요? 듣고 계세요?”
“너, 이리와! 이게 정말!”
키를 찾으러 기어가는 내 손을 밟는 녀석의 발을 잡아 비틀어 자빠뜨리자 그도 눈 속에 똑같이 파묻히고 말았다. 나는 저 앞에 보이는 키를 잡으러 가다말고 덩치 큰 녀석에 잡혀 넘어지길 반복하다가 그만 결국 눈 위에 두 연인이 슬로우 비디오로 뒹구는 장면을 본의 아니게 연출하고 말았다.
그런데, 잠깐만!
이 비릿한 냄새와 맛은 뭐지?
얼른 꽁꽁 언 손을 입술에 가져다 훔쳐도보고 또 눈으로 떡진 머리도 쓰다듬어보았다. 난 아니었다. 내 몸을 누르고있던 녀석을 발로 간신히 걷어찼을때야 선연히 눈에 출처가 드러났다.
뒹굴다 어디 돌부리에 머리를 다친건지 녀석의 얼굴에 흥건히 쏟아져내리고 있는, 그리고 백설 위에 천천히 스미어가는 붉은 핏물...
“이혼은요... 못합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여기서 부장 자리 올라갈 때까진 이혼은 절대 절대 어림없어요!”
“아아아우우우우우~ 아아아우우우우~”
첫댓글 눈을 반 쯤 감고 보다 보니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그보다 전에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글 어디 게시한 것 같은데...
거짓말 시리즈 하는 중입니다~^^
정신적인 외도가 이혼 귀책사유일까요!? 궁금!!
파놉티콘, 아스퍼거 증후군, 폴리아모리, 플래시몹 용어는 쉽게 풀어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요즘 소설 추세처럼 문장도 아주 짧게 끊어치면 더욱 좋은 명작이 될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공부하다보니 판례가 있다고 하네요. ㅎㅎ 어려운 용어는 잘 풀어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