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계랑(贈癸娘) : 계량에게 보낸다.
曾聞南國癸娘名 詩韻歌詞動洛城
증문남국계랑명 시운가사동락성
今日相看眞面目 却疑神女下三淸
금일상간진면목 각의신녀하삼청
일찍이 남국 계랑의 이름 들었고
시와 노래 솜씨 서울까지 떨쳤지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신녀가 삼청에 내려온 듯하여라.
-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
☆☆☆
'증계랑(贈癸娘)' 이란 이 시는
부안(扶安) 명기 이매창(李梅窓)을 찾아온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
첫 만남의 감회를 지어 바친 칠언절구(七言絶句)로서
이로부터 벌어지는 로맨틱 드라마의 서막을 여는 러브콜이다.
매창은 열 살에 이미 시를 쓰기 시작하여
시, 가무, 가야금에 두루 능통한 예인(藝人)으로 주옥같은 한시(漢詩)
수백 수를 남겼으며,
그중 시조 한 수와 '매창집(梅窓集)'에 수록된 한시 58수가 지금까지 전해와
황진이,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여류시인으로 불린다.
본명이 향금(香今)으로 매창(梅窓)은 그의 호이며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다 하여 계생(癸生), 계랑(癸娘)으로도 불렸다.
촌은은 사대부 문인들과 교류하며
'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을 펴내는 등 걸출한 문인이었으나
중인 신분으로 국상이나 사대부집 상례(喪禮)나 집행하고 다니며
실의에 빠져 지내다 울분을 삭힐 겸 천 리 길을 마다치 않고
소문난 기방(妓房)을 찾아온 것이었는데 매창을 만나는 순간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이때 촌은의 나이 마흔여덟,
꽃다운 갓 스물 매창과 28세의 나이 차이도 아랑곳없이
매료된 그는
그녀를 초회왕이
낮잠을 잘 때 꿈속에 나타나 교합했다는 신녀(神女),
시집도 못가 보고 죽은 한을 풀기 위해
아침엔 구름이 되고 저녁엔 비가 되어 신선이 사는
삼청(三淸 ; 玉淸, 上淸, 太淸)에 운우(雲雨)로 내려온다는 전설 속
무산(巫山)의 신녀에 비유하며,
그해 봄 둘은
로맨스와 불륜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랑의 무아지경에 빠진다.
☞ 희증계랑(戱贈癸娘) : 계랑을 놀리며 주다.
桃花紅艶暫時春 撻髓難醫玉頰嚬
도화홍염잠시춘 달수난의옥협빈
神女下堪孤枕冷 巫山雲雨下來頻
신여하감고침냉 무산운우하래빈
복사꽃 붉고 고운 짧은 봄이라
고운 얼굴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네.
신녀라도 독수공방 견디기 어려우니
무산의 운우지정 자주 내리네.
☆☆☆
그러나 달콤한 사랑도 잠시,
이 만남이 기나긴 비련의 시작이었다.
유희경은 서울로 올라가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던 터라 매창을 만날 겨를이 없고,
매창은 임 그린 정을
시조와 수십 편의 시를 통해 토해낸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는구나.
☞ 자한(自恨) : 스스로 한탄하다.
春冷補寒衣 紗窓日照時 低頭信手處 珠淚滴針絲
춘냉보한의 사창일조시 저두신수처 주루적침사
봄추위에 겨울옷 꿰매고자
사창에 밝은 햇살 비칠 때
머리 숙여 놀리는 손길에
눈물방울 바늘 실을 적시네.
☞ 춘원( 春怨) : 봄날의 원망
竹院春深鳥語多 殘粧含淚倦窓紗
죽원춘심조어다 잔장함루권창사
瑤琴彈罷相思曲 花落東風燕子斜
요금탄파상사곡 화락동풍연자사
대밭에 봄은 깊어 새소리 요란해도
얼룩진 화장으로 주렴도 안 걷은 채
거문고에 실어 상사곡 뜯고 나니
꽃 지는 봄바람에 제비들 비켜나네.
눈물에 얼룩진 화장 그대로 주렴도 걷지 않은 채
상사곡을 거문고로 뜯으며 시름에 겨워 가는 봄을 원망하는 춘원(春怨)으로 이어지니,
한(恨)과 원(怨)이 겹치는 봄을 맞고 보내기 그 몇 해였던가!
한편, 촌은 역시 천 리나 떨어져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을
여러 편의 시로 써서 뒤에 촌은집(村隱集)에 남기고 있으며,
그중 오동잎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에 빗대어
읊은 회계랑(懷癸娘)이 애를 끊는다.
☞ 회계량(懷癸娘) : 계량에게 향한 마음
娘家在浪州 我家住京口 相思不相見 腸斷梧桐雨
낭가재낭주 아가주경구 상사불상견 장단오동우
계랑의 집은 낭주(부안)에 있고
이 몸이 사는 집은 서울이라네.
서로가 그리워도 만나지 못해
오동나무 빗소리에 애를 끊누나.
그러나 아무리 매창의 사랑이 일편단심 촌은에게 향한다 한들
그녀는 뭇 사내들이 한 번은 꺾어보고 싶어하는 노류장화(路柳墻花) 기녀의 몸.
더구나 명기로 널리 알려진 그녀를 만나기 위해
부안으로 찾아드는 시문깨나 한가락 한다는 한량이나 사대부 풍류객들이
그 얼마이며 유혹인들 왜 없었겠는가?
그녀의 증취객(贈醉客)이란 시에 보면,
☞ 증취객(贈醉客) : 취한 손님에게
醉客執羅衫 羅衫隨手裂 不惜一羅衫 但恐恩情絶
취객집나삼 나삼수수렬 불석일나삼 단공은정절
취하신 손님 비단 적삼 당기시니
잡혔던 비단 적삼 찢어졌다오.
비단 적삼 찢겨 짐은 아깝지 않지만
단지 맺은 정 끊어질까 두렵구나.
기나긴 가혹한 별리의 세월을 사는 동안 매창은
김제 군수로 부임한 이귀와 잠시 시문으로 교유하며 정인으로 지낸 일과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을 만나 문학적 교류를 통한
정신적인 우정을 나눈 플라토닉 러브의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오직 유희경을 향한 사랑만을 지키고 살았다.
이렇게 지내기를 15년 만에야 두 연인은 재회를 하게 되는데,
강산도 두 번쯤 변했고 이미 나이 63세의 노인이 되어 나타난 촌은은
그 옛날 헤어지면서 열흘만이라도 시를 논하며
재회할 것을 약속하던 일을 상기하며 중봉계랑(重逢癸娘)이란 시를 지었다.
☞ 중봉계량(重逢癸娘) : 계량을 어렵게 만나
從古尋芳自有時 樊川何事太遲遲
종고심방자유시 번천하사태지지
吾行不爲尋芳意 唯趂論詩十日期
오행불위심방의 유진논시십일기
예로부터 꽃향기 찾을 때 있다지만
번천은 어인 일로 이리도 늦었던고.
내가 꽃향기를 찾아감만 아니라
열흘만 시 읊자던 약속 좇을 뿐이오.
※ 樊川[번천] :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호
☆☆☆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한 연인은
이후 만나지 못한 채 3년 후 매창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다.
매창의 기녀수절(妓女守節)의 순애보는
이렇게 안타깝고 허탈하게 지고
매창의 부음을 들은 촌은은
도옥진(悼玉眞)이란 애도 시를 지었다.
☞ 도옥진(悼玉眞) : 옥진을 슬퍼하며
香魂忽駕白雲去 碧落微茫歸路賖
향혼홀가백운거 벽락미망귀로사
只有梨園餘一曲 王孫爭說玉眞歌
지유이원여일곡 왕손쟁설옥진가
향기로운 넋 홀연 흰 구름 타고 가니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배나무 정원에 노래 한 곡 남아 있어.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