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선’이라는 소제목을 보면서, 작가는 왜 이런 제목을 정했을까를 생각해봤다. 무수한 나가 만들어 가는 세상이 시간의 터널을 지나고 나면 역사가 될 터이니 개인과 그가 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이라고 짐작하면서 시를 읽었다.
아르킬로코스와 사포의 그리스 서정시(그런 애국심 말고 다른 것, 방패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것)는 속박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이며, 그 의미는 남과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임을 되새기게 하는 시로 읽혔다. 윤동주의 사랑스런 추억(윤동주는 ‘최후의 나’를 향해 갔다)은 이 시보다 이전에 쓰여진 ‘자화상’과 ‘서시’를 떠올리게 한다. 어찌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내면을 성찰하는 시인은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저자는 시화를 통해서 ‘최후의 나’를 향해 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우리에게 각인시키는 듯하다. 황지우의 나는 너다 44(그러나 문학은 기적적이다)에서는 과연 세상이 병들었다고 생각될 때 시인처럼 나도 분노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밥 딜런의 시대는 변하고 있다(광화문에서 밥 딜런이 부릅니다)는 예전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신동엽의 산문시 1(아름다운 석양의 대통령을 위하여)는 아름다운 석양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에 대하여 시인은 말하고 있는데, ‘석양 대통령’과 ‘직업을 가진 아저씨’라니, 그 공감 가는 언어의 선택이 새롭고 놀랍다.
처음에는 전혀 이해가 안 가던 시를 조금씩 알아갈 때 뭔가 기분 좋음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저자가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라고 밝혔던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는 말과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경이로운 세상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보는 마음뿐일 것이다. 모든 질문은 그런 마음으로부터 시작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