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를 나서면 얼마 되지 않아 운현궁이 있습니다.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고, 한국 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입니다.
운현궁은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종 즉위 후 10년 동안 대원군의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운현궁은 그 위용이 자못 왕궁보다 못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운현궁 영역에 남아 있는 주요 건물들은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이 있으며, 지금은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분리된 김승헌가(家) 역시 과거에는 ‘영로당’으로 운현궁의 일부였습니다. 별첨 ‘운현궁의 단계별 변화’ 참조 바랍니다.
고종은 1863년 12살의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한 철종의 뒤를 이어 왕에 등극합니다. 원래 고종은 할아버지 남연군이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순번에서 제외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1815년(순조 15)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가계를 이은 다음 바로 안동별궁에 들어가 살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손자인 고종이 왕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별첨 ‘흥선대원군 가계도’ 참조 바랍니다.
조선말의 대학자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흥선군이 장안의 용하다는 지관의 말을 듣고 충남 덕산의 대덕사 절터를 매입하여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지관은 그곳이 2대에 걸친 천자가 나올 명당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결과로만 놓고 본다면 지관의 말대로 되었으니 풍수란 것이 마냥 허무맹랑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어떻든 남연군의 아들 4형제는 그동안 살고 있던 안동별궁을 안동 김씨에게 2만 냥을 받고 팔아 이장 비용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남은 돈으로 종손가(家)는 계동(나중의 계동궁)으로, 넷째 흥선군은 운현 아래(나중의 운현궁)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묘 이장 후 7년이 지난 다음 운현궁 잠저에서 고종이 태어났습니다.
고종이 할아버지 남원군의 묘 이장으로 운현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명당 덕을 보아 왕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면 지금의 운현궁 또한 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운현궁은 옛날 위세가 등등할 때 보다는 그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그 옛날의 영화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니 기회가 되시면 한 번 쯤 들러보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