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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중요한 것을
2024년 9월 29일 / 마 23:23-26
마 23:23-26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라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믿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무시하고 있다. 물론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24) 눈먼 지도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통째로 삼키는구나. 25)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은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26)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속을 깨끗이 닦으라. 그래야 잔 안팎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
■ 1853-1856년까지 러시아와 프랑스 : 영국 등의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있었다. 흔히 ‘크림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인데, 그 전쟁이 일어난 원인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베들레헴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놓은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지하 바닥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줬다는 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 별의 위치를 어디로 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대립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성지 예루살렘에 대한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 하는 것이 있었지만, 별을 어디에 새기느냐 하는 것 때문에 시작된 싸움은 그리스 정교회의 중심에 서 있는 러시아와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프랑스 사이에 전쟁을 하게 만들었고,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영국과 오스만 제국 등이 가세하여 약 2년 반 동안 유럽 전역을 무서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의 지하 바닥에 별을 어디에 새기면 어떤가? 그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을 해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인가? 사소한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
때로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사소한 문제에 얽매여서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본질을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나 살펴야 한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호된 책망의 말씀이다. 마태복음 23장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책망하신 예수님의 책망이 7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네 번째 책망이다.
왜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그렇게 호되게 책망을 하셨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3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무슨 말씀인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나름대로 잘 한다. 그런데 문제는 말로는 잘 하면서 실제로 자기들의 신앙적인 삶의 모습에서는 자기들이 가르친 대로 살지 못하고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여러 번에 걸쳐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 호되게 책망을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신앙생활이 엉망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신앙생활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저주까지 하시면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인가 말이다.
아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일반 시민들은 감히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의 이야기가 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2)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다. 우리 가운데 중에 두 번씩 금식하는 분이 계신지? 이건 그들의 신앙생활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들은 아주 철저하게 신앙생활 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다. 기도할 시간이 되면 하던 일을 모두 멈춰놓고 기도했다. 우리 중에 하루에 3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지? 하루에 한 번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도 때론 힘들고,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저도 하루에 최소한 세 번씩은 기도하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하루 밥 세끼 먹으면서 식사 기도하니까 말이다. 1분도 안 걸리는 식사기도 말고, 정말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에 몇 번이나, 몇 분 동안이나 기도하시는지? 그런 우리에 비하면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신앙생활을 잘 했다.
또 그들은 구제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열심히 구제했다. 구제해 놓고서 ‘구제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그들은 참으로 열심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구제했다.
▶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참 열심히 잘 드리는구나!’ 박하(薄荷)는 유월절 쓴 나물의 양념으로 많이 쓰이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를 말한다. 회향과 근채는 미나리과에 속한 식물로 미나리 비슷하게 생긴 채소이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이스라엘 농작물 중 아주 사소한 수확물이다. 그들은 채소와 같이 사소한 것이 생기면 어김없이 십일조를 드렸다.
우리는 십일조를 어떻게 드리는가? 소득의 정확한 십일조를 하시는지?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옆집에서 채소 한 묶음만 가져다주어도 그것에서 십일조를 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작은 소득 하나 - 채소 한 묶음까지도 그들은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했다. 뭔가 작은 것 하나 생기면 어김없이 십일조를 드렸다.
그렇게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하고, 구제하고, 십일조 철저하게 하고, 말씀 배우는 것을 열심했던 그들을 향해서 왜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책망을 하셨을까? 그에 대한 해답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지극히 작은 것까지 십일조를 드리면서 참으로 열심히 신앙 생활한다고 하는데, 왜 십일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은 참으로 열심히 했다. 남들이 보기에도 존경스러울 만큼 열심히 했다.
그들의 그런 열심 있는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인의 중요한 기본 요소가 빠져 있었다. 그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다.
1. ‘의’를 버렸다고 지적하셨다.
‘의’라는 말의 성서언어(헬라어)는 ‘크리시스’인데, 이 말은 ‘정당하고 공정한 삶’의 모습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모습,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정말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인간관계를 말한다.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나 다른 사람 앞에서 공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잣대를 들이댈 때에는 관용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때에 엄격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둘 다에게 공정해야 한다.
특별히 권력자들에게는 공정성이 더욱 요구됩니다.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스가랴 7:9-10을 보자.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려 하거나 그들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의를 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십일조를 드리고 매일같이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물과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 권력자들이 그랬다.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父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그들은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조차 빼앗는다고 말할 정도로 권력을 이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압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일 아침 희생 제사를 드렸고, 3일에 한 번씩 십일조를 드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참으로 경건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남들보다 조금 더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권력이 주어졌다면 그 권력이 공정하게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 내게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재산이 있다면 그것도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공정하다고 판단되게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맡은 직분으로 일할 때에도 공정하게 일해야 한다. 내 욕심과 명예욕 때문에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공정하게 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직장에서 일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하는 일이 공정한 것인가를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왜곡되고 편향된 마음이 아닌 공정성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공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 감정에 따라 판단하고, 내 욕심에 찌든 기준을 따라 행동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면 절대로 공정한 생각이나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나는 공정하게 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공정한 것이 아니라 잘못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나의 결정이나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거기에 공정성을 얻을 수 있다. 공정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말씀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독교 황금률이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내가 한 이 행동을 다른 사람이 했을 때 나는 어떠하겠는가? 내가 하려고 한 행동을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했을 때 나는 기쁘게 그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2. ‘인’을 버렸다고 말씀하셨다.
인(仁)이라는 말은 성서언어(헬라어)로 ‘엘레오스’라는 말인데,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자비’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특히 연약하고 병들고 궁핍한 사람에게 더욱 친절하고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으로 사람들 사이에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사랑에 힘입어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도 그것이었다.
요 13:24-25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떤 신앙적인 행위보다도 우리의 삶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이 되기를 바라신다.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는가? 자기 자신은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하면서 자기들보다 신앙생활 조금 못한다고 생각하면 업신여기고 멸시했다. 자기들이 만든 규례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어버리고 미워했다. 이방인, 세리, 죄인, 창녀 등을 멸시하고 미워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면서도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멸시했다. 그러니 그런 마음으로 구제한들 어찌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제가 되겠는가? 사람들을 무시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는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복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한가? 이웃이나 형제와 화해하고 화목하는 것이 먼저인가? 그렇다고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처럼 호와로운 제사를 드린다 하더라도 내 마음 속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기 질투하고 자기 잘났다고 자칭하는 마음으로 드린다면, 미운 사람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더라도 교회 안에서 얼굴조차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헌금을 많이 드린다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향기롭게 받으시는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먼저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 원망 들을 만한 일이나 불편한 관계, 미운 사람이 우리에게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고 관계가 불편하면 모든 삶이 불편하다. 정상적일 수가 없다. 부부싸움하고 나서 예배드리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부부싸움하고 난 후에 기도하면 기도가 제대로 되는지? 교회에 오면 눈에 미운 사람이 보이면 속이 뒤집어지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예배조차도 드리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하라는 말이다.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미운 사람이 없어야 한다. 사람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없어야 한다. 내 생각과는 서로 다르고 내 마음과는 다른 모습의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납할 때에 가족공동체나 교회공동체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향내 나는 산제사가 될 수 있다.
사랑은 모자란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모자람을 용납하여 내가 대신 채워주는 것이다. 사랑은 잘못했다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것을 함께 가슴아파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로 인해서 내 마음이 아플지라도 화를 내지 않고 그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해 주고 상대가 잘 되도록 다방면으로 돕는 것이다.
우리 교회와 가정이 이런 교회 - 이런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 인생이 행복해지고, 가정이 행복해지고, 교회가 행복해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소원한다.
세 번째로 ‘신’을 버렸다.
‘신(信)’이란 말은 ‘믿음’이라는 말이다. 믿음이라는 말의 헬라어 ‘피스티스’에는 ‘충성’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이다. 군인들에게 충성은 생명을 다 바쳐 싸우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자신이 섬기는 왕이나 장군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 싸우는 것을 충성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여야할 믿음의 모습도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의 생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군인이 자신을 위해서 싸우는 군인은 없다. 우리 십자가의 군병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오직 하나님께만 생명을 걸고 충성하는 것,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 그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을까?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을 하였지만 솔직히 말하면 성도의 의무적인 것으로 그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 잘 드린다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했고, 금식한다는 것을 일부터 드러내서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할 때에도 큰길가에 나와서 큰 소리로 기도도 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구제하고서는 ‘내가 아무개를 도와주었다’고 떠벌리며 다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들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구제할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식했을 때에는 얼굴에 기름을 발라 금식한 표시를 내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하면 하늘에서도 상이 없다고 하셨다.
교회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는 생각은 아예 버리자. 그래야 하늘에서 주어지는 상급이 우리에게 있다. 아무리 큰일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게 믿음이고 그게 충성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칭찬을 받고 내가 영광을 얻고, 내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사람아!’ 우리 믿음의 식구들 가운데는 이렇게 책망 듣는 분이 하나도 없기를 바란다.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하고 섬김으로 하나님께 칭찬받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소원한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정작 중요한 공정함과 사랑과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을 예수님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우리는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였는지? 하루살이와 같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는 신경을 쓰면서도 약대와 같이 크고 정작 중요한 일에는 실패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물론 사소한 것에 관심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신앙과 삶에서 크고 작은 모든 삶에서 - 사소하거나 중요하거나 간에 모든 삶에서 하나님 마음에 기쁨이 되는 모습이기를 원하신다.
♬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 1.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2.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우리의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늘 이렇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할 때에도 가정이나 직장에서 일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서는 늘 이렇게 물어야 한다.
- 내가 하는 이 일은 공정한 것인가?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이 앞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는 일인가?
- 내가 하는 이 일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인가?
- 내가 하는 이 일이 믿음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이런 물음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시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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