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인생의 의의(意義)와 정도(正道)
1. 색심불이(色心不二)와 과학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질문에 대해서,
《색(色)이란, 눈에 비치는 만물만생(萬物萬生)을 일컫는다.》
라고 대답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물만생(萬物萬生)에는,
모두 색채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적청황(赤靑黃)의 삼원색은,
색의 배합에 따라 몇만 색으로도 변한다.
대자연을 보더라도, 춘하추동에 따라서 그 색채가 변화하고 있다.
색이란,
우리의 육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물질도 또한 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무지개의 칠색(七色)의 범위뿐이다.
0.00004~0.00007㎝ 정도의 파장(波長)의 범위밖에 보지 못한다.
무지개의 양끝의 색은, 자색(紫色)과 적색(赤色)이다.
자색에서부터, 자외선(紫外線), 엑스선, 알파선, 감마선으로 연속되어 있다.
또한 적색으로부터는, 적외선, 초단파, 단파, 장파로 주파수가 달라진다.
이들 세계를 우리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존재를 부정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전파도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오관으로는 감지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색》이라는 말은, 간단한 것 같으면서 꽤 복잡한 세계이다.
전파등은 물질이 아니라, 차원을 초월한 세계의 존재라고 하겠다.
이것은 에너지이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빛에 대해서도 그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전파도, 빛도, 열도, 에너지입자이다.
눈으로 보는 색의 세계로부터 연장선상에 있는 세계이지만,
물리적 차원이,
에너지, 즉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므로 그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색심불이》라고 하는 철학적인 표현이 있다.
물질과 에너지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색(色)’이 물질,
‘심(心)’이 에너지라고 보면,
법칙에는 변함이 없다.
물질이란, 우주 공간에 체적과 질량을 가진 것이라고,
물리학에서는 정의하고 있다.
물질의 본질은,
에너지 입자가 집중고정화된 것이므로,
그것이 분산되면, 에너지 입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심(心)’은 의식(意識),
또는 혼의 중심인 우리의 마음을 가리킨다.
육체주(肉體舟)와 선장이 동거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육체주(肉體舟)만으로는 활동할 수 없다.
또한 혼(魂),
즉 의식(意識)인 육체주(肉體舟)의 선장만으로도,
이 지상계에서 행동하고, 현상화하기는 어렵다.
역시 이 지상계의 법칙에 따라 육체와 마음은,
일체가 되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다.
잠들어 버리면,
육체는 침상에 정박하고 있는 배(舟)일 뿐,
의지(意志)를 가지고 행동할 수 없다.
의지(意志)는 선장인 혼.
즉 의식인 마음의 영역의 움직임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에너지불멸의 법칙, 질량불변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E=MC² E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에너지이다.
그리고 C는 빛의 속도를 표시하고,
M은 질량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곧 질량과 빛의 속도의 적(積)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이다.
또한 열의 문제에 관해서,
프랑크는 그의 실험을 통해서,
상수(常數)를 발견하고,
진동수(振動數)와의 적(積)에 의해서 열 입자의 에너지를 설명하고 있다.
E=𝐡𝐯
𝐡는 프랑크 상수로서 6.626x10²⁷(erg*sec)인 것이다.
𝐯는 진동수를 나타내고 있다.
E는 열. 에너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심불이(色心不二)의 의미도,
현대 물리학에서 증명하고 있는 자연의 법칙이다.
다시 말해서 차원이 다른 세계와 물질은, 동거하고 있다는 뜻이다.
(주;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육신과 영혼의 관계는 자동차와 운전기사 의 관계라고 할 수 있지요.
자동차와 운전기사가 한 몸이 되어 굴러간다는 말이지요...
사족이지만,
비물질인 영혼이 물질인 육신을 움직이려면
얼마나 많은 칼로리가 필요할까요.
매일 자야하는 잠은
영혼이 쉬고 에너지를 공급받는 일이지요.
자동차에 연료가 아무리 많아도
기사는 두시간마다 쉬듯이...)
외력(外力)이라고 하는 연(緣)에 의해서,
물질은 형태가 변화하지만,
질량도 에너지도 변화하지 않는다.
‘공’(空) 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공’(空) 을 비어있는 것이라든가,
허무하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와 같은 해설은,
지(知)만으로 공부한 작은 틀 속에서,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의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를 공부하고,
마음과 행(行)을 실천하고,
집착을 버리고, 족함을 알아서,
불생불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있다고 생각하면 없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다.》
와 같은 애매모호한 풀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론으로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차원을 넘어서 실재의 세계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P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