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설날은 오늘 이래요” 유년 시절 설날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동요다. 언제 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섣달그믐을 까치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까치설은 어디에서 온 말일까? 사전에는 “어린아이의 말로 설날의 전날 곧 섣달 그믐날을 이르는 말”이라고 까치설을 설명한다. 까치설은 ‘아찬설’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그럴듯하다. 아찬설은 순수 우리말로 작은설이다. 이후 아찬이 ‘아치’로 변했고, 소리가 비슷한 ‘까치’로 잘못 전해졌을 것이라 한다. 옛 사람들은 까치가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며 좋아했다. 연유야 어찌 되었건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과 까치가 전해주는 소식은 뭔가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지금도 까치설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고향의 섣달 그믐밤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 파랑새가 되어 날던 섣달그믐 그리운 밤은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의 먼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 없다. 하얀 눈이 내리는 고향의 들과 산에 설을 알리는 까치소리, 초가집 추녀 끝 고드름은 집채 같은 황소의 하품소리에 놀라 여물통에 제 긴 몸을 떨군다. 지금은 떠나고 없는 부모님들, 콩 한쪽도 나누던 정답던 이웃들이 새삼 보고 싶다. 떡메소리, 돼지 오줌보 차는 소리 등 지금은 되돌릴 수 없는 까치설의 수많은 추억의 편린들이 유년시절의 섣달그믐 속으로 달려가게 한다. 설을 설레게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설빔이다.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은 중고등학교 교복 같이 생겨 둥근 쳇바퀴 모양 깃이 달린 검정색 교복을 얻어 입는 일 이었다. 거기에다 나이론 양말 한 켤레와 아주 절묘하게 신발이 닳아져 있으면 검정 고무신 하나를 덤으로 얻어 신을 수 있다. 흉년이 들어 설빔이 없거나 형이 입던 옷을 내려 입을 때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설빔은 소매 끝을 한두 번 접어서 입도록 한두 치수 크게 옷을 샀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키 크기도 문제지만 대부분은 옷감이 좋지 않아 빨래를 하면 쪼그라들거나, 단벌로 모든 생활을 하던 시절 쇠가죽 옷이라도 닳아 없앨 듯 왕성한 활동에 한해 더 입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섣달 그믐날밤에는 잠을 자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하여 잠을 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기억이 있다. 설빔을 머리맡에 두고 쉽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고향집은 마을 어귀에 위치하여 떨어져 있어서 친구들과 모여 놀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잠은 오지 않고 형이 들려주는 귀신 이여기에 앞마당을 지나 뒷마당 한켠에 있는 화장실은 갈 엄두도 못 내고 마루 끝에서 마당으로 향해 오줌발을 세차게 뻗어야 했다. 그러다가 실수라도 하는 때에는 봉당에 벗어둔 신발에 소변을 들어가 신발이 꽁꽁 얼어 있을 때도 있었다. 귀신 가운데는 빗자루 몽당 귀신, 변소귀신, 달걀귀신 등 무섭지 않은 귀신은 없었으나 섣달그믐날 밤 제일 무서운 귀신은 ‘야광귀'라 불리는 신발귀신 이다. 어머니는 섣달그믐날 밤 대문 밖을 나가면 걸리는 것이 귀신이라고 했다. 집에 있지 않고 싸돌아다니다가 고뿔이라도 들어 설을 쇠지 못할까봐서 집 밖을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겁을 준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야광귀는 신발을 훔치러 오는 귀신이다. 야광귀는 맨발 귀신으로 섣달그믐밤에 나타나 신발을 신어보고 제 발에 맞는 신발은 신고 달아난다. 그래서 신발을 엎어 놓는 풍습이 생겨났다, 귀신은 엎어 놓은 신발을 신고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오줌 벼락을 피하거나, 삭풍에 눈이라도 날려 신발에 쌓이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잠못 이루는 우리들에게 야식을 가져다주었다. 곳간마다 곡식이며 윗목에는 고구마 가마니가 놓여 있었다. 부엌 구석 쌓아둔 검불 사이로 무와 배추뿌리가 뒹구는 모습도 흔하다. 그 모든 것이 야식이었다. 먹거리에 배가 부른 우리들은 하품을 경쟁적으로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둘씩 골아 떨어졌다. 꿈인지 생시인지 어머니가 당겨 덮어 준 이불속에서 부지깽이로 문살 두들기는 소리에 한 해 동안 운수 대통할 꿈도 꿔 보지 못한 채 잠을 깼다. 섣달 그믐날은 겨울 들어 처음으로 소죽 끊이는 가마솥에 데운 물로 목욕을 했기에 설날에는 고양이 세수만 하고 소 문중( 小 門中) 큰댁으로 세배와 차례를 지내기 위해, 설빔을 차려 입고 날듯이 집을 나선다. 여러 집을 다니다가보니 보통 해가 서산으로 넘어 갈 때쯤이면 차례가 끝이 났다.
소 문중 큰댁 아저씨는 고조할아버지 증손자 가운데 맏이였다. 흰 수염에 긴 연죽을 물고 다니다가 인사를 하지 않거나 버릇이 없는 아이들을 혼내 주는 무서운 사람으로 통했다. 그 할아버지 모습의 아저씨는 시렁 위 고리짝에서 손 때 묻은 낡은 고서를 한해도 거르는 일이 없이 꺼내서 펼쳤다. 자기 성씨를 이야기 할 때는 낮춰서 ‘최’가라고 해야 하며, 시조는 누구며, 중시조는 당나라에서 까지 명성을 날린 치자(字) 원자(字) 이며, 입향 시조는 누구며 화숙공파 32세 손 이라는 것을 외우도록 했다. 그 때는 그 일이 너무나 귀찮아 꾀병을 부려 그 댁을 건너 뛸 때도 있었다.
올해 설날에는 동생 내외가 질녀와 같이 왔다. 다섯 명이서 예배를 드렸다. 제관이 많아 툇마루에 까지 둘러섰던 생각이 났다. 당시에는 늦게 분가하는 사람들은 팔촌이내 혈족들은 한집에서 살다시피 했었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생사조차 모르고 산다. 우리 집 아이조차 여행을 떠나고 없다. 명절이면 부모님과 형제자매들 만나고 싶음에 몇 시간을 기다려 버스표를 구매하여 평상시보다 서너 곱은 더 걸린 고향길이지만 등불 들고 앞치마에 젖은 손 닦으며 “오느라고 수고 했데이” 라며 맞이하던 어머니 목소리에 모든 피로가 봄바람에 눈 녹듯이 사라지곤 했다.
이제 까치설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정월 초 이튼 날 지인의 점심식사 초대 전화를 받고 식당을 찾았다. 예약손님으로 빈자리가 없어 오랜 기다림 끝에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우리네 동년배들의 대화가 더욱 쓸쓸하게 했다. 명절이 되면 차례나 세배는 뒷전이고 어디로 여행 갈 것인지 해외여행 떠나는 자녀들 때문에 없던 병이 생겨난다고 했다. 연일 터지는 비행기 사고가 조상의 노여움 때문이라는 말이 더욱 씁쓸하게 들려왔다.
첫댓글 복기를 하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