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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무소유
승려이자 수필가인 법정이 1976년에 발표한 수필집이다. 그는 1954년에 출가한 후 불교 경전의 번역 작업에 참여하고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했다. 1976년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수필집 무소유를 출간했다. 독서와 체험, 즉 간디 어록을 읽은 뒤의 소감과 ‘난(蘭)’에 얽힌 자신의 사연을 토대로 진정한 행복은 ‘버림’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게 해 준다. 이 책은 힘겨운 삶에 허덕이는 현대인에게 진정한 사유의 기쁨과 마음의 안식을 제공해 주었다. 이후로도 법정은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잇달아 내면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법정은 입적하면서 "내 이름으로 출판된 책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에 따라 그의 책들은 전부 절판되었으며, 무소유의 가격은 10만 원 이상까지 치솟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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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법정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낸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애들 뿐이었다. 그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애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 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僧家의 유행기遊行期)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러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법정 스님의 설해목(雪害木)
해가 저문 어느 날,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 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습니다.아버지가 써 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습니다.
사연인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습니다.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왔습니다.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 물을 떠다 주었고.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 했지만,스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 들어 주는 데에 크게 감동한 것입니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고.그에게는 백 천 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이제는 가 버리고 안 계신 한 노사(老師)로부터 들은 이야기 입니다.내게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노사의 상(像)입니다.산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입니다.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됩니다.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입니다.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 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 앞에서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요.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 합니다.사밧티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 앙굴리말라를 귀의시킨 것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아니었습니다.위엄도 권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였습니다.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도 차별 없는 훈훈한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
빈뜰 / 법정
다래헌에서 살 때이다. 뜰에는 몇 그루의 장미꽃이 피어, 담담하던 내 일상에 빛과 향기를 드리워주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갓 피어난 한 송이 꽃을 대했을 때, 말문이 막히고 귀가 멀려고 했다. 지극한 아름다움 앞에서 전율을 느끼던 그런 시절이었다.
장미 가시에 찔린 데가 덧나 사못 불안해하면서 병원을 찾아다니던 때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아름다움 속에서도 가시가 있었던 것이다. 어디 가시 뿐이랴, 풍뎅이와 진딧물이 항상 아름다움을 괴롭힌다.
하루는 절에서 일하는 일꾼이 분무기를 메고 채소밭 쪽에서 오는 걸 보고 장미에도 진딧물 약을 좀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잎들이 시들시들 처져있었다. 약을 너무 진하게 타서 그러려니 했는데, 다음 날은 까맣게 타들어 가면서 잎이 떨어졌다. 마음씨는 착하지만 머리를 몹시 아끼는 우리 조서방께서 제초제를 잔딧물로 잘못 알고 뿌린 탓이었다. 월남전에서 그토록 무성한 정글도 말라버리게 한 고엽제를 전쟁터가 아닌 화단에 썼던 것이다. 아름다움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지켜보면서 안타까워 했다. 길들인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내출혈 같은 아픔.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내 뜰에서 꽃을 가꾸지 않기로 했다. 장미 곁에 소담스레 피어있던 패랭이까지도 포기채 떠다가 큰 절로 옮겨 심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빈 뜰을 지니게 되었다. 빈 뜰을 바라볼 때면 내 속뜰에서는 마른 바람이 일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빈 항아리를 때할 때처럼 서운하면서도 넉넉한 그런 느낌이었다.
산으로 돌아온 후에도 나는 꽃 같은 걸 심지 않기로 했다. 창밖에 파초나 심어 여름의 햇볕을 가리리라 마음 먹었다. 그런데 집터를 고를 때부터 둘레에 달맞이 꽃이 듬성듬성 자생해 있었다. 굴러던 것이 이제는 여름철만 되면 온 뜰에 무더기로 피어나 한꺼번에 수만 송이의 꽃을 보게 되었다. 6월 어느 날 아침 뜰에 나가니 안개가 자욱히 서려 있었다. 언뜻 보니 안개 속에 노랑나비 몇 마리가 달맞이 잎새에 붙어 있었다. 웬 노랑나빈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간밤에 처음으로 피어난 꽃이었다.
달맞이 꽃은 해질 녘에 핀다.저녁 예불을 마치고 뜰에 나가면 수런수런 여기저기서 꽃들이 문을 연다. 투명한 빛깔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얼까지도 환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박곷처럼 저녁에 피는 꽃이라 그런지 애처러운 생각이 든다. 혼자서 피게 할 수 없어 여름내 나는 어둠이 내리는 뜰에서 한참씩을 서성거렸다. 그 애들이 없었더라면 여름의 내 뜰은 자못 삭막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여름 바람이 불어오자 꽃들은 앙상한 줄기와 씨를 남긴 채 자취를 감추어 갔다. 오늘 아침 마지막 꽃대를 거두어 주었다.
이제는 텅 빈 뜰, 어디서 퉁소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머지 않아 이 빈 뜰에 가랑잎이 내릴 것이다. 여름철 무수히 피어난 그 꽃들의 넋은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숲을 지나 밤바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면 그 애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이런 일로 해서 가을은 한 걸음 한 걸음씩 내 속뜰에까지 다가서고 있다.
마음의 메아리 / 법정
봄의 꽃자리에 연두빛 신록이 싱그럽게 펼쳐지고 있는 요즘, 남도 (南道)의 절들에서는 차 따기가 한창이다. 옛 문헌에는 곡우 (穀雨)를 전후하여 따는 차가 가장 상품이라고 헸는데, 우리 조계산에서는 그 무렵이면 좀 빠르고 입하 (立夏) 무렵에 첫 차를 따는 것이 가장 알맞다.
이곳 선원에서도 엊그제 한 차례 따다가 볶았고, 오늘 대중들이 나가 또 한 차례 따 왔다. 예년 같으면 나도 아랫마을 사람들을 몇 데리고 따로 차를 땄을텐데, 올 봄에는 하는 일이 많아 짬이 없을 뿐더러 이제는 대중 속에 섞여 살게 되었으니 나누어 주는 한 몫으로 족할 수 밖에 없다.
차잎이 펼쳐지는 걸 보면 하루가 다르다. 그래서 바쁜 일에 좇기다 보면 하루 이틀 사이에 적기 (適期)를 놓치고 딸 때가 더러 있다. 몇해 전 까지만 해도 우리 고유의 녹차 (綠茶) 에는 별로 관심들이 없어 절에서도 극히 소수의 스님들만 즐겨마셨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차에 대한 인식이 새로와 안 마시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특히 선원에서는 졸음을 쫓고 맑은 정신으로 정진하기 위해서라도 많이 마시고 있다. 물론 기호식품이란 굳이 약리적인 효과를 노리고 즐기는 것은 아니다. 차의 향기와 맛과 빛깔을 음미하고 그릇을 만지는 그 일 자체가 삶의 여백처럼 은은해서 즐거운 것이다.
요즘 우리 고유의 전통차에 대한 관심의 바람을 타고, 경향 각지에서 차의 붐이 일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일없는 사람들이 너무 극성을 떠는 바람에 담박하고 순수한 차맛에 어떤 흠이 가지 않을까 싶다.
차 좀 마시는데 뭐 그리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한지, 차와 그릇은 진즉 구해 놓고도 마실 엄두를 못내고 있다는 말을 더러 듣는다. 누구나 마시다 보면 자기나름의 요령이 생기게 마련이다. 밥 먹는법 따로 배우지 않더라도 밥 먹을 줄 알고, 술 마시는 법에 대해서 강의같은 것 듣지 않더라도 술만 잘들 마시던데 뭐.
그러니 먼저 마셔보았다고 해서 제발 극성을 떨지 말아 달라는 소리다. 큰 길에는 문이 없듯이 다도 (茶道) 에도 또 한 문이 있을 수 없다. 배고픈 사람 법을 먹듯이, 차를 마시고 싶으면 조용히 마실 뿐이다. 차를 따거나 그걸 볶을 때면, 자칫 차도둑이 될 뻔했던 기억이 문득 되살아난다.
몇해 전 차 딸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해마다 송광사에서는, 한국 불교를 중흥시키고 이 도량을 새롭게 일으킨 보조국사 지눌 (知訥, 1158-1210) 스님의 추모재 (齋)를 지낸다. 스님의 재일인 음력 3월 26일 기해 사흘 동안 큰 법회가 열리기 때문에 전국에서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모여든다. 따라서 산중은 전에 없이 붐비고, 이 절에서 사는 스님들은 일년 중에서도 가장 바쁘고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그런 북새통에 무엇을 가지러 불일암에 올라갔더니 굴뚝에서 때아닌 연기가 피어 올랐다. 웬일인가 싶어 부엌에 들어가 보았었다. 낯이 익은 노 (老) 여승이 할머니 한 분을 데리고 차를 따다가 볶고 있는 참이었다. 일손이 바빠 큰절이고 암자고 우리는 아직 차를 따지 않고 있는데, 아무 말도 없이 객 (客)이 와서 먼저 차를 따가는 걸 보니 속으로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개 하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주책이 없는 사람을 보고 탓할 수도 없어, 다 볶으면 차 좀 주고 가라고 했더니 한마디로 못 주겠다고 거절이었다.
'남의 차밭에서 주인이 손도 안 댄 차를 따다가, 남의 솥에 나무까지 들여 볶으면서도 못 주겠다고 심히 괘씸한지고. 어디 못 주고 가는가 한번 보자.' 고 나는 속으로 별렀다. 차를 다 볶고 나자 그는 신문지에 싸서 가져 가려고 했다. 차의 섬세한 성품을 아는 처지에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사람보다도 차를 위해서였다. 차통을 몇개 꺼내 주면서 거기에 담아 가라고 했다. 마루에 볶은 차를 식히느라 널어 놓은 채 우물가로 손을 씻으러 간 것을 보고, 기회는 이때다 싶어 나는 서둘러 반통쯤 차를 담아 슬쩍했다.
그래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이 차를 마실 때마다 갈데없는 '차도둑'이 될 판 이었다. 왠지 개운치가 않았다. 이슬방울처럼 맺힌 다이아 목걸이도 아닌 맑은 차를 가지고 좀도둑이 될 수야 없지 않은가. 슬쩍 챙겼던 차를 슬쩍 비워버렸다. 개운한 마음이었다.
노 비구니는 우물에서 올라오자 무슨 생각에서였든지 차통을 하나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아까는 못 주겠다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더니 차를 주겠다고 차통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내놓은 차통에 그는 하나 가득 담아 내몫으로 내놓고 큰절로 내려갔다.
나는 그때 이심전심 (以心傳心)의 오묘한 이치를 전존재로써 느낄 수가 있었다. 만약 반통쯤 담은 그 차를 슬쩍하고 말았더라면 그의 닫힌 마음을 끝내 열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비워버린 바람에 그의 마음이 열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듯 메아리와 같은 것.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마음과 마음끼리는 서로 보내고 받아들여 메아리치는 것이다.
반쯤 담았던 것을 비우고 나니 가득 채워서 주는 이 응답. 두고두고 차도둑이 될 뻔하다가 한 생각 돌이키니 이처럼 떳떳하게 선물로써 받게 된 것이다.
어디 이런 차 뿐이겠는가. 세상 일이란 모두가 마음과 마음끼리 주고받는 메아리다. 미운 마음으로 보내면 미운 마음으로써 응답이 오고, 어진 마음으로 치면 어진 마음으로 울려온다. 마지 못해 건성으로 건네주면 또한 저쪽에서도 건성으로 되돌아온다. 크게 소리치면 크게 울려오고, 작게 소리치면 작게 울려 오는 것이 또한 메아리의 성질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은 지극히 작은 한 모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의 세계야말로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는 질서다. 눈은 가릴 수도 속일 수도 있다. 저마다 다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 그러나 마음은 절대로 가릴 수도 속일 수도 없다.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다.
그 스님이 주고 간 차를 마실 때마다 혀끝에 닿는 맛은 별로 없었지만, 마음의 실상을 음미하는 그런 계기가 되었다. 사람끼리 주고 받는 일의 뒤뜰을 넘어다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재윤이네와 옥이네한테 햇차가 나오면 보내주기로 했는데, 올해는 일이 바빠 하는 수 없이 말빚을 지게 되었다. 차를 만질 여가가 없어 거짓말장이가 되고 말았다. 미안하다.
새벽에 내리는 비/법정
새벽에 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맡에 소근소근 다가서는 저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 개울물 소리에 실려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살아 있는 우주의 맥박을 느낄 수 있다.
새벽에 내리는 빗소리에서 나는 우주의 호흡이 내 자신의 숨결과 서로 이어지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자연의 소리는, 늘 들어도 시끄럽거나 무료하지 않고 우리 마음을 그윽하게 한다.
사람이 흙을 일구며 농사를 짓고 살던 시절에는 이와 같은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 질서 안에서 넘치지 않고 순박하게 살 수 있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적은 것에도 고마워했다. 남이 가진 것을 시샘하거나 넘보지도 않았다. 자기 분수에 자족하면서 논밭을 가꾸듯 자신의 삶을 묵묵히 가꾸어 나갔다.
그러나 물질과 경제를 '사람'보다도 중요시하고 우선시하는 요즘 세상에서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까지도 대부분 예전 같은 감성과 덕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농사도 이제는 기업으로 여겨 먼저 수지타산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논밭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성한 생명의 터전으로 여기기보다는 생산과 효용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좁은 땅덩이에 인구는 불어나 어쩔 수 없이 양계장처럼 켜켜이 올려놓은 아파트라는 주거형태는, 우선은 편리하겠지만 인간의 본질과 장래를 생각할 때 결코 이상적인 주거공간은 못 된다. 그 같은 주거공간에는 생명의 근원인 흙이 없다. 허공에 매달려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살아가는 생태이므로 인간생활이 건강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은 흙에서 멀어질수록 병원과 가까워진다.
우리에게는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상황이 있다. 좋건 싫건 그 상황 아래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뜻은 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은데, 주변의 상황은 그렇게 살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면서 사는 일이 허다하다.
물론 그와 같은 자기 자신이 순간순간의 삶을 통해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고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가 또한 그런 흐름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이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들의 삶은 '업業의 놀음'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상황을 별업別業이라 하고, 사회적인 상황을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우리 둘레가 온통 부정 부패와 검은 돈의 거래로 들끓고 있는 요즘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우리 시대가 저지른 업의 놀음을 실감하게 된다. 탐욕이 생사 윤회의 근본이라는 말도 있지만, 모두 분수 밖의 욕심 때문에 나라꼴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처지라면 이해도 가지만, 다들 번쩍거리면서 살만큼 사는 사람들이 검은 돈에 놀아나고 있으니, '사과상자'의 위력이 무엇이기에 이 모양 이 꼴인가. 자기 분수와 명예를 목숨처럼 지키면서 꿋꿋하게 살았던 우리 선인들의 선비 정신을 생각하면, 돈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그 후손인 우리의 설 자리는 과연 어디일 까 싶다.
알퐁스 도데를 기억하는가. 남프랑스의 한 양치기의 아름다운 이야기, <별>을 쓴 작가를. 아를르 역전에서 버스를 타고 한 10여분 달리면 퐁비에이라는 시골 마을이다. 버스에서 내려 다박솔이 듬성듬성한 메마른 언덕을 올라가면 정상에 작은 풍차집이 하나 있다. 알퐁스 도데가 1866년경 <풍차 방앗간 소식>의 연작을 썼던 곳이 바로 여기다. 지금은 '도데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론 강 언저리에서 불어오는 서북풍(미스트랄)으로 풍차를 돌려 밀을 빻던 방앗간이다.
오늘 소개하려는 이야기, '황금의 뇌를 가진 사나이'도 도데가 이곳에서 쓴 것이다. 이야기는 이와 같이 이어진다.
......옛날에 머릿속이 온통 황금으로 된 사나이가 있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의사들은 그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머리가 이상하리만큼 크고 무거웠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대리석 층계에 이마를 세게 부딪친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쇠붙이가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부모가 놀라서 뛰어와 아이를 일으켜보니 큰 상처는 없었지만 머리카락 사이에 삐죽이 황금 부스러기가 나와 있는 걸 보고, 그 아이가 황금으로 된 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날부터 부모는 아이를 누가 유괴해 갈까봐 밖에 나다니지 못하게 한다. 아이가 자라서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에야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비밀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너를 키우느라 애간장을 태웠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머릿속의 황금을 조금만 나누어줄 수 없겠느냐고 한다. 아이는 선뜻 호두알 크기만한 황금덩어리를 자신의 두개골에서 떼어내어 어머니에게 드린다.
그는 이때부터 머릿속에 들어 있는 값비싼 황금에 정신이 팔려 이 황금이면 세상에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하게 된다. 그는 황금을 마구 낭비하면서 왕족처럼 사치스럽게 살아간다. 뇌 속의 황금은 방탕한 생활로 인해 자꾸 줄어들고, 못된 친구에게 도둑 맞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골 속이 다 비어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채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세상에는 하찮은 것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황금을 마구 낭비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그 하찮은 것들로 인해 그들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살다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의 좋은 특성과 잠재력으로 상징되는, 당신이 지닌 그 황금은 무엇인가? 소중한 그 황금을 혹시나 하찮은 일에 탕진하고 있지는 않는가?
가을 들녘에서/법정
내 오두막에 가을걷이도 이미 끝났다. 가을걷이래야 고추 따고 그 잎을 훑어내고 감자와 고구마를 캐고 호박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옥수수는 다람쥐들이 벌써 추수를 해버렸고 해바라기도 나는 꽃만 보고 씨는 다람쥐들의 차지가 되었다.
개울가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면서 곱게 물들었던 나뭇잎도 서릿바람에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빈 가지가 늘어나면 겨울철 땔감을 마련해야 한다.
지난 여름에 실어다놓은 통장작을 패는 일에 요즘 나는 재미를 붙이고 있다. 나무의 결을 찾아 도끼를 한두번 내려치면 쩍쩍 갈라진다. 질긴 소나무와는 달리 참나무는 그 성질이 곧아서 정통으로 맞으면 시원스럽게 빠개진다. 일에 재미가 붙으면 쉴 줄도 모르고 지칠 때까지 매달리는 성미라, 일손을 멈추고 며칠동안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
이삭 줍는 부푼 農心
들녘에서는 요즘 벼베기가 한창이다. 제천 백운면 평동마을 박달재 아래 장환이네도 내가 가던 날 벼를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논에 엎드려 낫으로 한 포기씩 베느라고 허리가 휘고 눈알이 빠지려고 했는데, 요즘에는 콤바인이 탈곡해서 부대에 담아주기까지 한다. 1천3백평 논에서 거두어들이는 데 한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화가인 장환이네 아버지와 논두렁에서 이삭을 주우면서 그 집 농사짓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는 전혀 쓰지 않고 퇴비만을 주는데 처음 몇해는 소출이 시원치 않았지만 지력이 점점 회복되면서 나아져 갔단다. 금년에는 시험삼아 무논에 우렁이를 길렀더니 우렁이가 잡초를 제거해주어 김맬 일이 없었다고 한다. 올 농사가 가장 실하게 됐다면서 더 겪어보고 이웃에도 널리 권할 생각이라고 했다. 화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살기 편해졌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우며,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한 인물들도 많은데 어째서 날이 갈수록 세상은 나빠져가는지 알 수가 없군요』
그 날 논두렁에서 나눈 이 말이 생각의 실마리를 풀리게 했다. 세상은 우리들 마음이 밖으로 나타난 모습이다. 기(氣)는 우주에 가득찬 에너지인데, 그것은 우리가 믿는 마음에서 나온다. 신념에서 나온 그 기운이 우리 몸과 세상에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진동수를 지닌 파동이며 에너지가 있는 물질입자라고 현대물리학에서는 말한다.
우리들이 바른 생각과 바른 마음을 지니면 그 파동이 이웃에 밝은 진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나쁜 생각을 하면 어두운 진동을 일으키며 둘레를 나쁘게 만든다. 불교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업(業)의 메아리와 같은 것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우주의 한 생명의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다. 그런데 이기적인 생각에 갇혀 생명의 신비인 그 「마음」을 나누지 않기 때문에, 우주에 가득찬 그 에너지가 흐르지 않고 막혀 있어 세상은 병들어가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세상은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과다. 우리가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을 돌이키려 하지 않고 밖으로만 찾아 헤매기 때문에 세상은 점점 나빠져 갈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들은 절제하고 자제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불행하다.
절의 객실에 묵으면서 지난 주말 TV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보았다. 역시 좋은 영화다. 교육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통감하게 한다. 미국에서 최고 가는 대학진학예비학교의 교훈은 전통 명예 규율 최고이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자세히 음미해보면 그 네가지 교훈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두려움을 지니게 하는지 소름이 끼친다. 개인의 취향과 창의력을 무시한 획일적인 숨막히는 분위기에서 어떻게 지혜와 사랑과 덕성이 길러질 것인가.
세상은 왜 나빠져 가는지
교육이 할 일은 배우는 사람들이 온갖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개인이 지닌 특성이 마음껏 꽃을 피워 세상에 향기로운 파동을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진짜 시를 가르쳐 보인 「존 키팅」같은 교사가 우리에게는 아쉽다.
이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교육은 서로 도와가면서 함께 배우기보다는, 남을 짓밟고라도 앞서도록 하는 경쟁심만을 잔뜩 부추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교육이다. 요즘 정치꾼들의 비열하고 추악한 행태도 이런 그릇된 사고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묵묵한 대지에, 말없는 민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막혀 있는 기운이 흐르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꾼들의 「말잔치」에 귀가 아프고 멀미가 날 지경이다.
가을 들녘에 서면, 이 땅의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열린 귀로 그 한숨소리를 들어보라.
부엌 훈/법정스님
가을이 저물어 가니 초암에도 일손이 바쁘다. 산중의 외떨어진 암자에서 모든 일을 혼자서 해치우 려면 두 다리와 양손으로는 늘 달린다. 겨울철에 땔나무를 미리 마련하고, 도량을 손질하고, 또 추워 지기 전에 김장도 해야 할 것이다. 이래서 두 발로 사방을 뛰어도 모자라 발이 더 필요하다는 뜻에서 추승구족 秋僧九足이란 말이 나온 듯싶다. 몸은 고단하지만 내 식대로 살 수 있으므로 그런대로 살아갈 만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어울리고 싶지 않다. 어울려 보아도 별 소득이 없었으니까.
출가 이래 나는 줄곧 대중이 많은 큰절에서만 살아왔는데, 그러다 보니 근년에 이르러서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많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잔소리꾼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물론 한곳에 모여 사는 것은 서로 의지하며 화합해서 살자는 데 그 뜻이 있겠지만, 잔소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싫다. 그리고 요즘 승단의 분위기는 전통적인 승가 정신이 계승되어 가고 있지 않다. 어차피 홀로 뛰쳐 나왔으니, 또한 홀로 가는 길이므로. 먹고사는 것이 정말 작은 일이 아니다. 자취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먹는 일이 즐겁기보다는 귀찮게 여겨질 때가 많다. 먹지 않으면 병들어 쓰러질 테니 우선 그것을 면하기 위해 담아 두는 것이다. 그리고 남기면 변하므로 먹어 치우는 것이지, 누가 혼자 먹기 위해 부지런을 떨고 솜씨를 발휘하겠는가. 잘 얻어먹으려면 흥청거리는 도시의 절간에 주저앉으면 된다.
산에 들어와 나는 식탁을 맨 먼저 만들었다. 방 안에서 발우를 펴고 공양을 하려니까 몇 번씩 드나 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다. 부엌에서 먹으려면 식탁이 필요했다. 헌 판자 쪽을 모아 조리대로도 쓸 수 있게 식탁을 만들고, 의자는 참나무 장작으로 맞춰 놓았다. 이런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려니 문득 '빠삐용'의 처지가 떠올라 '빠삐용 식탁'이라고 이름 붙였다. 끝없이 탈출하려는 사나이, 불의와 억압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는 무한한 시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었다. 내 빠삐용 식탁 앞에는 이런 글씨가 쓰여 있었다. '먹이는 간단명료하게'. 말하자면 내 암자의 부엌 훈인 셈이다. 산승의 생활에 간단명료한 것이 어디 부엌일 뿐 이랴만, 적어도 먹는 일에만은 번거롭고 싶지 않아 낙서해 놓은 것이다. 어쩌다 가짓수가 많은 식탁을 대하면 생각이 흐트러져 맛을 잃게 되는 게 우리네 식성이다.
친구들은 내 간단명료한 '먹이'를 보고 건강을 염려하지만, 건강이란 반드시 먹는 것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지리산에서 한 해 겨울을 아무런 부식도 없이 순전히 소금과 간장만으로, 그것도 하루 한 끼만을 먹으면서 지낸 건강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명색이 수도승이란 주제에 먹을 것 다 먹고, 자고 싶은 잠 다 자면서 어떻게 수도를 한단 말인가. 우리 같은 부류들에게는 현재의 식사만으로도 고맙고 과분할 뿐이다. 날씨가 추우면 부엌에들어가기가 머리 무겁다. 이런 내 처지를 염려하여 해인사에 있는 한 도반이 밥 지어 줄 공양주를 한 사람 보내주겠다 했지만, 먹이뿐 아니라 사는 것도 간단명료히 홀가분하게 살고 싶어 모처럼의 호의를 사양하고 말았다.
인형과 인간/법정스님
내 생각의 실마리는 흔히 버스 안에서 이루어진다. 출퇴근 시간의 붐비는시내버스 안에서 나는 삶의 밀도 같은 것을 실감한다. 선실禪室이나 나무 그늘에서 하는 사색은 한적하긴 하지만 어떤 고정관념에 갇혀 공허하거나 무기력해지기 쉬운데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종점을 향해 계속해서 달리고 있는 버스는 그 안에 실려 가는 우리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적잖게 부여하고 있다. 산다는 일이 일종의 연소요, 자기 소모라는 표현에 공감이 간다. 그리고 함께 타고 가는 사람들의 그 선량한 눈매들이, 저마다 무슨 생각에 잠겨 무심히 창 밖을 내다보는, 그래서 조금은 외롭게 보이는 그 눈매들이 나 자신을 맑게 비추고 있다. 그 눈매들은 연대감을 갖게 한다. 이 시대와 사회에서 기쁨과 아픔을 함께 하고 있다는 그러한 연대감을 갖게 한다. 나는 얼마 전부터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택시를 타지 않는다. 탈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타고 싶지 않아서다. 주머니 실력도 실력이지만, 제멋대로 우쭐대는 물가의 그 콧대에 내 나름으로 저항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이유는 택시 안에서는 연대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돈을 더 내면 편하고 신속하게 나를 운반해 주겠지만, 그때마다 이웃과의 단절을 번번이 느끼게 된다. 붐비는 차 속에서 더러는 구둣발에 밟히기도 하고 옷고름이 타지는 수도 있지만 그런 데서 도리어 생명의 활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 견딜 만하다. 그리고 버스를 타면 운전사와 승객 사이에 관계를 통해 새삼스레 공동 운명체 같은 것을 헤아리게 된다. 그가 딴전을 부린다거나 운전을 위태롭게 한다면 그로 인해 피해는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기술과 노고를 인정하면서도 차를 제대로 몰고 가는지, 당초의 약속대로 노선을 지키면서 가는지에도 무관심할 수 없다. 머리 위에서 고래고래 뿜어대는 유행가와 우습지 않은 만담이 우리를 몹시 피곤하게 하지만 운전사가 좋아하는 것일 테니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끝없는 인내는 다스림을 받는 우리 소시민들의 차지니까.
사람을 흙으로 빚었다는 종교적인 신화는 여러 가지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도 우리들 신체의 구성 요소로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을 들고 있는데, 쇠붙이나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흙으로 만들었다는 데는 그만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대지는 영원한 모성, 흙에서 음식물을 길러내고 그 위에다 집을 짓는다. 그 위를 직립 보행하면서 살다가 마침내는 그 흙에 누워 삭아지고 마는 것이 우리들 인생의 생태다. 그리고 흙은 우리들 생명의 젖줄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씨앗을 뿌리면 움이 트고 잎과 가지가 펼쳐져 거기 꽃과 열매가 맺힌다.생명의 발아 현상을 통해 불가시적인 영역에도 눈을 뜨게 한다. 그러기 때문에 흙을 가까이하면 자연 흙의 덕을 배워 순박하고 겸허해지며, 믿고 기다릴 줄을 안다. 흙에는 거짓이 없고, 추월과 무질서도 없다. 시멘트와 철근과 아스팔트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다. 비가 내리는 자연의 소리마저 도시는 거부한다. 그러나 흙은 비를, 그 소리를 받아들인다. 흙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우리들 마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정결해지고 평온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구두와 양말을 벗어버리고 일구어 놓은 밭흙을 맨발로 감촉해 보라. 그리고 흙냄새를 맡아 보라. 그것은 약동하는 생의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잘 살겠다는 구실 아래 산업화와 도시화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문명은 자꾸만 흙을 멀리하려는 데 모순이 있다. 생명의 원천인 대지를 멀리 하면서, 곡식을 만들어 내는 어진 농사꾼을 짓밟으면서 어떻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에 의해 삶의 양상은 여러 가지로 달라질 것이다. 요즘의 식량난은 심상치 않은 일 같다. 그것이 세계적인 현상이고, 그 전망은 결코 밝을 수 없다고들 한다. 그 까닭은 늘어나는 인구에다만 돌려버릴 성질의 것은 아니다. 흙을 더럽히고 멀리한 과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에게 인간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경고하는 소식은 아닐까.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눈먼 인류에게, 흙을 저버린 우리들에게 흙의 은혜를 거듭 인식케 할 계기가 된다면.
현대인들은 이전 사람들에 비해서는 아는 것이 참 많다. 자기 전공 분야가 아니라도 신문, 잡지와 방송 등의 대량 매체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똑똑하고 영리하기만 하다.이해와 타산에 민감하고 겉과 속이 같지 않다. 매사에 약삭빠를 뿐 아니라 성급하고 참을성이 모자라는 현대인들에게서 끈기나 저력 혹은 신의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할 수 없다. 물결에 씻긴 조약돌처럼 닳아질 대로 닳아져 매끈거린다. 한 선사의 논 치던 이야기를생각해 보면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결코 무연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혜월 선사慧月 禪師는 절 곁에 논을 쳤다. 쓸모없이 버려진 땅을 보고 논을 만들었으면 싶었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동구 사람들이 살기가 어렵게 된 것을 보고 그들을 불러다 일을 시킨다. 한 달 두 달이 걸려도 논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는 사람마다 그 노임으로 더 많은 논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만류하지만 끝내 굽히지 않는다. 마침내 그를 미친 노장이라고 비웃게 된다. 선사는 못 들은 체 날이 새면 일터에 나가 일꾼들과 어울려 일을 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몇 백 평의 논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거기에 든 노임은 이루어진 논의 시세보다 몇 곱 더 들어갔다. 그러나 선사는 없던 논이 새로 생긴 것을 기뻐했다. 그는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분명히 산술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으로 해서 흉년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사연이 깃들인 논이므로 절에서는 그 논을 단순한땅마지기로서가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사풍寺風의 상징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다. 한결같이 약고 닳아빠진 세상이기 때문에 그토록 어리석고 우직스런 일이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대우大愚는 대지大智에 통한다는 말이 결코 빈말은 아닐 것이다.
어떤 종파를 가릴 것 없이, 오늘날 종교가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요인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도록 복합성을 띠고 있다. 지나간 성인들의 가르침은 하나같이 간단하고 명료했다. 들으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학자(이 안에는 물론 신학자도 포함되어야 한다.)라는 사람들이 튀어나와 불필요한 접속사와 수식어로써 말의 갈래를 쪼개고 나누어 명료한 진리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자기 자신의문제는 묻어둔 채,이미 뱉어버린 말의 찌꺼기를 가지고 시시콜콜하게 뒤적거리며 이러쿵저러쿵 따지려 든다. 생동하던 언행은 이렇게 해서 지식의 울안에 갇히고 만다. 이와 같은 학문이나 지식을 나는 신용하고 싶지 않다. 현대인들은 자기 행동은 없이 남의 흉내만을 내면서 살려는 데에 맹점이 있다. 사색이 따르지 않는 지식을, 행동이 없는 지식인을 어디에 쓸 것인가. 아무리 바닥이 드러난 세상이기로, 진리를 사랑하고 실현해야 할 지식인들까지 곡학아세曲學阿世와 비겁한 침묵으로써 처신하려 드니,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배반이다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느냐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 된다. 아는 것을 어떻게 살리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의 탈을 쓴 인형은 많아도 인간다운 인간이 적은 현실 앞에서 지식인이 할 일은 무엇일까 먼저 무기력하고 나약하기만 한 그 인형의 집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명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무학無學이란 말이 있다.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학문에 대한 무용론도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자취가 없는 것을 가리킴이다.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않고 지식 과잉에서 오는 관념성을 경계한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발랄한 삶이 소중하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 지식에서 추출된 진리에 대한 신념이 일상화되지 않고서는 지식 본래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요 위선자가 되고 만다.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 시대의 실상을 모른 체하려는 무관심은 비겁한 회피요, 일종의 범죄다.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나누어 짊어진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이웃의 기쁨과 아픔에 대해 나누어 가질 책임이 있다. 우리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다. 우리는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인간이다.
탁상시계 이야기 / 법정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눌 경우, 서투르고 서먹한 분위기와는 달리 속으로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지구상에는 36억인가 하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데, 지금 그 중의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우선 만났다는 그 인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하늘 밑, 또 같은 언어와 풍속 안에 살면서도 서로가 스쳐 지나가고 마는 인간의 생태이기 때문이다. 설사 나를 해롭게 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와 나는 그만큼의 인연이 있어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왜 하필이면 나와 마주친 것일까. 불교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시절인연이 다가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물건과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많은 것 중에 하나가 내게 온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탁상에는 내 생활을 거동케 하는 국적 불명의 시계가 하나 있다. 그놈을 보고 있으면 물건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정말 기구하구나 싶어진다. 그래서 그놈이 단순한 물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 새벽 예불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큰 법당 예불을 마치고 판전을 거쳐 내려오면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돌아와 보니 방문이 열려 있었다. 도선생이 다녀간 것이다. 평소에 잠그지 않는 버릇이라 그는 무사 통과였다. 살펴보니 평소에 필요한 것들만 골라갔다. 내게 소용된 것이 그에게도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가져간 것보다 남긴 것이 많았다. 내게 잃어버릴 물건이 있었다는 것이, 남들이 보고 탐심을 낼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끄러웠다. 물건이란 본래부터 내가 가졌던 것이 아니고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떠나가게 마련이라 생각하니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전생에 남의 것을 훔친 과보인지 모른다 생각하면, 오히려 빚이라도 갚고 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는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가 싶어 있는 것 없는 것을 샅샅이 뒤져놓았다. 잃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애석하지 않았는데 흐트러 놓고 간 옷가지를 하나하나 제자리에 챙기자니 새삼스레 인간사가 서글퍼지려고 했다. 당장에 아쉬운 것은 다른 것보다도 탁상에 있어야 할 시계였다. 도선생이 다녀간 며칠 후 시계를 사러 나갔다. 이번에는 아무도 욕심내지 않을 허름한 것으로 구해야겠다고 작정, 청계천에 있는 어떤 시계 가게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런데, 허허, 이거 어찌된 일인가. 며칠 전에 잃어버린 우리 방 시계가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웬 사내와 주인이 목하 흥정 중이었던 것이다. 나를 보자 사내는 슬쩍 외면해버렸다.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게 못지않게 나도 당황했다. 결국 그 사내에게 돈 천원을 주고 내 시계를 내가 사고 말았다. 내가 무슨 자선가라고 그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인가. 따지고 보면 어슷비슷한 허물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의 처지인데. 뜻밖에 다시 만난 시계와의 인연이 우선 고마웠고, 내 마음을 내가 돌이켰을 뿐이다.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싶다.(샘터, 1972. 4.)
새벽길에서 / 법정
불일암에서 살 때에는 따로 산책하는 시간을 갖지 않았었다. 아무때고 마음 내키면 숲으로 뚫린 길을 따라 나서면 되고, 멀리 펼쳐진 시야를 즐기고 싶으면 뒷산이나 앞산의 봉우리에 오르면 되었다. 혼자서 터덕터덕 숲길을 거닐거나 봉우리에 올라 멀리 바라보고 있으면, 마른 바람이 옆구리께를 스치고 지나가긴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어떤 충만감이 마음 한 구석에 고이는 것 같았다.
여럿 속에 섞여사는 지난 봄 부터는 일부러 산책의 시간을 정해놓고 일과삼아 거닐고 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법당 예불을 드리고 방에 돌아와 좌선, 5시에 방선(放禪)을 한다. 방선이란 좌선에서 일어난다는 뜻. 6시 아침공양시간 까지는 자칫하면 두벌 잠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털고일어나 거닐기로 한 것이다.
습관이란 제 2의 천성이란 말이 있듯이 길들이기 탓. 하루하루 잘못 익히다 보면 마침내는 자기자신으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타성의 수렁에서 허위적 거리게 된다. 혼자서 살 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여럿속에 섞이더라도 준엄한 자기질서가 있어야 한다.
출가수행자는 여럿이서 살더라도 원천적으로 혼자일 수 밖에 없다. '사문(沙門)의 길은 홀로 가는 길' 이라고 경전에서도 지적했듯이 단독자로써 절대 고독의 한가운데 우뚝 설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지와 기상이 없으면 이내 무디어지고 만다. 무디어 진다는 것은 의식이 잠들어 있다는 말이고 심성에 녹이 슬었다는 소리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갈고 닦아 눈과 귀와 의식을 밝게 갖고 투명하게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무리속에 섞이다 보면 자칫 무디어지기 쉬운 위험이 따른다. 한 마디로 너무 편하기 때문. 먹을 걱정, 땔감 걱정을 따로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해결되고 어떤 일이든지 여럿이 나누어 하기 때문에 힘들지가 않다.
손수 끓여서 먹는 다는 것, 그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거기에 따르는 잡다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이 해주는 음식을 받을 때 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양을 마련해준 후원 대중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으로 공양을 받았다. 그런데 서너달이 지나고 난 이제, 그 고마워 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당연히 받아 먹을 것을 먹는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내 의식이 그만큼 무디어진 것인가. 부끄러운 일이다.
오늘 아침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숲길을 밀집모자를 덮어 쓰고 한 오리쯤 거닐었다. 길섶에는 짙은 보랏빛 붓꽃이 한창이었다. 수창포(水菖蒲)라고도 부르는 이 붓꽃에는 내게 사연이 있다. 불일에서 살 때 아랫절로 내려가는 길 중간 쯤에 해마다 유월 중순이면 이 붓꽃이 무더기로 피어났다. 그 길을 오가며 지켜볼 때마다 자생하여 피어나는 들꽃의 천연스런 모습에 적잖이 감동을 했었다.
화단에서 가꾸는 꽃은 아무래도 사람의 손이 자주가기 때문에 천연스런 맛이 덜하다. 그러나 풀섶에서 자생하는 들꽃은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않음으로 그 모습이나 개화가 보다 의젓하고 건강하다. 그 꽃이 지니고 있는 천성을 그대로 꽃피우고 있는 것이다.
몇해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 꽃을 보고 좋아한 몇몇 친구들은 붓꽃이 피면 알려달라고 했다. 꽃대가 부풀어 오르는걸 보고 사연을 띄운 다음날 이었다. 무슨일로 아랫절에 내려가다가 그 꽃자리에 다다랐을 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멈추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어제 낮까지도 무수히 꽃대가 부풀어 오르던 붓꽃이 자취도 없이 다 베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아랫절로 뛰어 내려가 여기저기 알아보았다. 농막에 있는 절 일꾼의 소행이었다. 얼마 전에 들어온 나이많은 일꾼이 소먹일 풀로 베었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소는 그런 풀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 설사 소가 먹는 풀이라도 갓 꽃대가 올라오는 풀을 자취도 없이 깡그리 베어버릴 수 있단말인가.
그때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느라고 속으로 끙끙 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 일로 인해 나는 꽃이 필 무렵이면 농막을 찾아가 미리 당부를 하는 새로운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비에 젖은 붓꽃을 보면서 문득 '학살의 여름'이 생각나 나는 다시 한번 인간의 어리석은 소행에 대해서 그 꽃들에게 사죄의 뜻을 전했다.
비가 갠 후면 꾀꼬리의 목청이 한결 맑게 들려온다. 같은 새지만 꾀꼬리는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고 두견새는 운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울어도 그저 울지 않고 피를 토하리만큼 애타게 애타게 운다. 초 저녁부터 새벽까지 쉬지않고 한 자리에서 우는 두견새 소리를 듣고 있으면 무슨 한이 모질게 맺혔기로 저리도 애타게 우는가 싶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듯한 꾀꼬리의 그 맑은 목청도 처음부터 그런것은 아니다. 몇해 전에 겪은 일인데 뒷숲에서 '꾀엑 꾀엑' 아주 듣기 거북한 소리로 우는 새가 있어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지금 막 이가지에서 저가지로 날아 다니는 어린 꾀꼬리였다. 며칠을 두고 거친 목소리로 발성연습을 하더니 어느날 마침내 맑은 목청이 틔여 매끄럽게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새의 목청도 처음부터 그렇게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이루어 지는구나 싶었다. 새벽 5시 무렵의 숲은 온통 새들의 노래로 찬란한 꽃밭이다. 공기 그 자체가 새소리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안개와 이슬에 젖은 나무들의 새벽잠을 깨우려는 듯 이골짝 저골짝에서 온갖 새들이 목청껏 노래를 한다. 그들은 살아 있는 기쁨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발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시각 인간의 도시도 서서히 깨어날 것이다. 시골에서 밤새껏 싣고간 꽃이나 과일이나 채소를 장바닥에 내려 놓기가 바쁘게 도시의 부지런한 사람들이 먼저 반길 것이다. 첫 버스를 타고 시장으로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이른 아침 길을 쓸고 있는 청소부들은 비록 생계는 어렵지만 모두가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게 농촌 출신이므로 일찍 일어나는 데 길이 들었다. 늦잠 자는 사람들을 위해 일찍부터 움직여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간으로써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다. 남이 잠든 시간에도 일어나 움직여야 굶지 않고 헐벗지 않는다.
그러한 이웃들에게 나는 이 새벽 길섶에 피어있는 붓꽃이나 나리꽃을 한아름씩 안겨 드리고 싶다. 어려운 생계를 위로하면서 희망의 말을 전하고 싶다. 사람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한, 바캉스가 뭔지도 모르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살아가는 한, 언젠가는 복된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침묵에 기대다 / 법정
가을 바람이 선들거리면 불쑥불쑥 길을 떠나고 싶은 충동에 산거(山居)를 지키고 있기가 어렵다. 그리고 맨날 똑같은 먹이와 틀에 박힌 생활에 더러는 염증이 생기려고 한다. 다른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다가도 해마다 10월 하순께가 되면 묵은 병이 도지듯 문득 나그네길을 떠나고 싶다.
그날도 점심 공양을 끝내고 세상 소식을 좀 듣다가 여느 때처럼 뜰에 나와 장작을 패고 있었다. 오동나무와 후박나무에서 마른 바람결에 뚝뚝 지는 낙엽을 보고 있으니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서둘러 짐을 챙겨 가지고 길을 떠나오고 말았다.
삶이 하나의 흐름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 어떤 형태의 삶이라 할지라도 틀에 갇혀 안주하다 보면 굳어져 버린다. 굳어지면 고인 물처럼 생기를 잃는다. 사람은 동물이라 움직임이 없으면 무디어지고 또한 시들고 만다.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가 움직이고 있다. 변화가 없는 삶은 이내 침체되고 무기력해진다. 그리고 진부하고 지루해지게 마련. 생활에 리듬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우리 같은 종류의 인간들은 걸리적거리는 관계의 이웃이 없기 때문에 마음 먹은대로 손쉽게 떠나올 수 있다. 물론 자기 자신의 무게 말고도 공동체의 무게에 대한 연대감이라는 짐을 지고 있긴 하지만.
혼자서 나그네가 되면 가장 투명하고 순수해진다. 낱선 환경에 놓여 있을 때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뜬다. 자기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개체(個體)가 된다는 것은 곧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은 이와 같은 휴식을 통해서 새로운 힘을 축적하게 되고, 일을 통해서만 휴식을 얻을 수가 있다. 평소에 일이 없는 사람들은 진정한 휴식도 누릴 수 없다. 휴식과 일은 그런 상관 관계를 지닌다.
이제 새삼스럽게 구경거리를 찾아 이리 기웃 할 필요는 없다. 어디를 가나 토막난 비좁은 땅덩이에서는 거기가 거기이고 비슷비슷한 모습들이니까. 그 고장의 냄새를 맡는 일로써 나그네의 시장기 같은 것을 채우면 된다.
표현은 ‘냄새’하고 했지만 또 다른 말을 쓴다면 분위기를 느끼는 일일 것이다. 낯선 고장에 가면 우선 시장에 들러 보라. 거기 가면 그 고장 특유의 말씨가 있고 생활이 있고 인정과 습속과 빛깔이 있다. 그 말씨와 생활과 인정, 습속, 빛깔이 그 고장의 분위기를 이룬다.
이런 분위기를 빈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머리로써가 아니다 텅 빈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머리는 어떤 의미에서 불순하다. 따지고 캐고 의심하고 자꾸만 묻기 때문이다. 그 같은 잿빛 이론과 논리가 우리를 지금껏 피곤하게 하면서 마음을 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해 왔다. 마음의 열리지 않으면 트인 사람이 될 수 없다.
한라산 자락마다 억새풀이 허옇게 은발을 휘날리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 목장에서 양떼들이 혹은 말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헐벗고 때묻고 초라한 존재는 갈 데 없는 우리들 인간이구나 싶었다.
모든 존재는 다 자기의 분수대로 있을 자리에 있으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사람만이 그 조화에서 이탈하려고 자꾸만 몸부림치고 있다. 같은 인간끼리 미워하고 싸우면서 그 조화와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묵묵히 우주 질서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떠들면서 살벌하다. 오늘날 지구가 곳곳에서 갖은 갖은 형태로 폭발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럴 듯한 이유를 내세우면서 분수 밖의 행동으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그 메아리가 아닌가 싶다.
날마다 좋은날 - 법정스님
산다는 것은 비슷비슷한 되풀이만 같다.하루 세끼 먹는 일과 자고 일어나는 동작,출퇴근의 규칙적인 시간 관념속에서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온다.때로는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면서,또는 후회를 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노상 그날이 그날이 그날같은 타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간다.이와같은 반복만이 인생의 전부라면 우리는 나머지 허락받은 세월을반납하고서라도 도중에서 뛰어내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안으로 유심히 살펴보면 결코 그날이 그날일 수 없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또한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사람이란 다행히도 그 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는 가구가 아니며,앉은 자리에서만 맴돌도록 만들어진 시계 바늘도 아니다.끝없이 변화하면서 생성되는 것이 생명 현상이므로, 개인의의지를 담은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운문 선사가 보름날의 법회에서 제자들에게 말했다"십오 일 이전은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다. 십오 일 이후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보라."한 번 지나가 버린 과거사는 묻지 않을 테니 그 대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말일 것이다.여럿이 얼굴을 쭉 훑어보았지만 하나같이 꿀먹은 벙어리였다이윽고 선사는 자신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날.
하루하루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시들한 날이 아니라늘 새로운 날이라는 뜻이다. 철저한 자각과 의지적인 노력으로 거듭거듭 태어나기 때문에 순간순간이 늘 새로운 것이다.타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하루24시간의 부림을 당한다.그러나 주어진 인생이 자기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매순간 자각하는 사람은 그 24시간을 부릴 줄 안다.한쪽은 비슬비슬 끌려가는 삶이고, 다른 한쪽은 당당하게 자기 몫을 이끌고 가는 인생이다천이면 천, 만이면 만이 저마다 각기 다른 얼굴과 목소리를 지니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여럿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이 세상에서 자신의 특성을 펼쳐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초대받은 나그네들이다두 사람의 예수나 똑같은 석가모니는 필요가 없다.개성과 각기 다른 사람끼리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그러므로 사람은 저마다 세상에서 새로운 존재다.이와 같은 인간의 특성과 기능을 무시하고 외곬으로만 몰고가려는 이념이나 주의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인류사를 되돌리려는반시대적인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둘레는 하루하루가 고통으로 얼룩져 있는데 어떻게 좋은날일 수 있단 말인가그렇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생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도전을 받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력에 의해 의미가 주어진다.날마다 좋은날을 맞으려면 모순과 갈등 속에서 삶의 의미를 캐내야 한다.하루하루를 남의 인생처럼 아무렇게나 살아 버릴 것이 아니라내 몫을 새롭고 소중하게 살려야 한다. 되풀이되는 범속한 일상을 새롭게 심화시키는 데서 좋은 날이 이루어진다 1977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랴 / 법정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랴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낮게 깔리는 걸 보고 점심 공양 끝에 서둘러 비설거지를 했다. 오두막 둘레에 무성한 가시덤불과 잡목을 작년 가을에 쳐놓았는데, 지난 봄에 단을 묶어 말려둔 것을 나뭇간으로 옮기는 일이다. 미적미적 미루다가 몇 차례 비를 맞힐 때마다 게으름을 뉘우치곤 했었다. 내 팔과 다리가 수고해준 덕에 말끔히 일을 마쳤다. 초겨울까지는 땔만한 분량이다. 땀에 전 옷을 개울가에 나가 빨아서 널고, 물 데워서 목욕도 했다. 내친 김에 얼기설기 대를 엮어 만든 침상을 방안에 들여 놓았다. 여름철에는 방바닥보다는 침상에서 자는 잠이 쾌적하다. 침상은 폭 70센티미터, 길이 180센티미터, 높이 30센티미터로 내 한 몸을 겨우 받아들일 만한 크기다. 뒤척일 때마다 침상 다리가 흔들거리는 것이 마치 요람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다. 일을 마쳤으니 한숨 쉬기로 했다. 내가 살만큼 살다가 숨이 멎어 굳어지면 이 침상 째로 옮겨다가 화장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아무도 없는 데서, 제발 조용히, 벗어버린 껍데기를 지체없이 없애주었으면 좋겠다. 잠결에 쏴 하고 앞산에 비 몰아오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이제는 나뭇간에다 땔나무도 들이고 빨래줄에서 옷도 거두어 들였으니,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한동안 가물어 채소밭에 물을 길어다 뿌려 주곤 했는데, 비가 내리니 채소들이 좋아하며 생기를 되찾겠다. 자연은 순리대로 움직인다. 사람들이 분수에 넘치는 짓만 하지 않으면, 그 순리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소용되는 모든 것을 대준다. 이런 자연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한 선비가 깊은 산 속 골짜기에 사는데, 임금이 불러 소원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제가 바라는 것은 무성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산중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무성한 소나무와 맑은 샘이 솟아나는 동안 그의 산중 생활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다. 전해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 선비의 삶 자체가 청청한 소나무와 맑은 샘처럼 여겨진다. 강과 산과 바람과 달은 따로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욕심을 떠난 맑고 한가로운 사람이면 누구나 그 주인이 될 수 있다.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이 열린 사람이라면 어디서나 강산과 풍월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내가 가끔 들르는 한 스님의 방에는 텅 빈 벽에 '與誰同坐(여수동좌)'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까만 바탕에 흰 글씨로 음각된 이 편액이 그 방에 들어설 때마다 말없이 반겨 주는 듯하다.'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랴.'그 방 주인의 맑은 인품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나는 나무판에 새긴 이 편액을 대할 때마다 미소를 머금게 된다. 옛 글(何氏語林)에 보면 사혜(謝 )라는 사람은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않아 잡스런 손님이 그 집을 드나들지 않았다. 그는 혼자서 차나 술잔을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내 방을 드나드는 것은 오로지 맑은 바람 뿐이요, 나와 마주 앉아 대작하는 이는 다만 밝은 달이 있을 뿐이다."청풍과 명월로써 벗을 삼았다니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그를 가까이하기보다는 그 나름의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청량감을 준다. 무례하게 끈적거리고 추근대는 요즘 같은 세태이기에 그런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웃에게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구실을 하고 있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랴'고 써 붙인 방에는 찻잔이 세 개뿐이다. 세 사람을 넘으면 차 마실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산중에서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사람은 나 하나만으로 충분하니까 사람과 자리를 같이할 일은 없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과 흰 구름, 시냇물은 산을 이루고 있는 배경이므로 자리를 같이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살갗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처마 끝 모서리에 박새가 세 군데나 집을 지었다. 두 군데서는 새끼를 쳐서 이미 떠나갔고, 한 군데서는 아직 알을 품고 있다.머지 않아 이 둥지에서도 새끼를 쳐서 날아갈 것이다. 박새는 그 성미가 까다롭지 않아 아무 데서나 알을 품는다. 겨울철에는 먹을 게 없어 모이를 뿌려주지만 여름철에는 숲에 먹이가 풍부해서 따로 먹이를 주지 않아도 된다. 박새는 가끔 오두막에 창구멍을 뚫어 놓는다. 창에 붙어 있는 벌레를 쪼느라고 그러는지 심심해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일거리를 장만해 주지 말라고 타이르지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도 부잡스런 아이들이 절에 제 엄마를 따라와 창구멍을 마구 뚫어 놓고 가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 산토끼가 뒤꼍 다래넝쿨 아래서 산다.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뜰에 나와 어정거리다가 내가 문을 열고 나가면 놀라서 저만치 달아난다. 놀라지 말라고 달래지만 길이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빵 부스러기나 과일 껍데기를 놓아두면 깨끗이 먹고 간다. 바위 곁에 싸놓은 토끼 똥을 보면 어린 새끼도 끼어 있다. 그중 다람쥐는 나하고 많이 친해졌다. 헌식돌에 먹이를 놓아주면 내가 곁에 지켜 서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와서 먹는다. 밖에 나갔다가 빈집에 돌아오면 짹짹거리면서 나를 반겨준다. 기특하다.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할 것인가. 유유상종, 살아 있는 것들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그러니 자리를 같이 하는 그 상대가 그의 한 분신임을 알아야 한다.당신은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는가.
내 그림자에게 / 법정
한평생 나를 따라다니느라고 수고가 많았다.
내 삶이 시작될 때부터 그대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햇빛 아래서건 달빛 아래서건 말 그대로 '몸에 그림자 따르듯'
그대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니 그대와 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동반자다.
오늘은 그대에게 내 속엣말을 좀 하려고 한다. 물론 전에없던 일이다.
그대도 잘 알다시피 내 육신의 나이가 어느덧 70을 넘어섰구나.
예전 표현에 의하면 사람의 나이 일흔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고 했다.
고희(古稀)라는 말을 남의 일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내가 그 앞에 마주서게 되었다.
요즘에 와서 실감하는 바인데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남은 세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허락된 남은 세월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든다.
따라서 내 삶을 추하지 않게 마감해야겠다고 다짐한다.
혼자서 살아온 사람은 평소에도 그렇지만 남은 세월이 다할 때까지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늙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면 그 인생이 초라하게 마련이다.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것은 젊은만이 아니다.
늙어서도 한결같이 자신의 삶을 가꾸고 관리한다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수 있다.
화사한 봄의 꽃도 좋지만 늦가을 서리가 내릴 무렵에 피는
국화의 향기는 그 어느 꽃보다도 귀하다.
자기 관리를 위해 내 삶이 새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된다.
누구보다도 그대가 잘 알다시피
내 삶의 자취를 돌아보니 나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대중 앞에서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너무 많이 쏟아 놓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침묵의 미덕과 그 의미를 강조해온 장본인이
침묵보다 말로 살아온 것 같은 모순을 돌이켜 본다.
지난 가을 지방 순회 강연 때
이번이 내 생애에서 마지막 순회 강연이 될 거라는 말을 흘렸는데
이것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생각이 있어 예고한 말이었다.
길상사에서 짝수 달마다 해오던 법회도 내년부터는 봄,
가을 두 차례만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절 소임자에게도 미리 알려두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지상에서 내 자취가 사라진다면
가까운 이웃들에게 충격과 서운함이 클 것이므로
그 충격과 서운함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서서히 물러가는 연습을 해두려고 한다.
그리고 달마다 쓰는 그런 글도
좀 달리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가를 돌아보니 내가 그동안 쓴 글들이
번역물을 포함해서 서른 권 가까이 되는구나.
말을 너무 많이 해왔듯이 글도 너무 많이 쏟아 놓은 것 같다.
세월의 체에 걸러서 남을 글들이 얼마나 될지 자못 두렵다.
말과 글도 삶의 한 표현 방법이이기때문에
새로운 삶이 전제됨이 없이는 새로운 말과 글이 나올 수 없다.
비슷비슷한 되풀이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선감이 없는 말과 글은 그의 삶에 중심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할 수만 있다면 유서를 남기는 듯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읽히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삶의 진실을 담고 싶다.
옛글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다.
'나이 칠십에도 어떤 직위에 있는 것은 통행금지 시간이 되었는데도
쉬지 않고 밤길을 다니는 것과 같아서 그 허물이 적지 않다.'
이 구절을 나는 요즘 깊이 음미하고 있다.
요즘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참으로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정년이란 있을 수 없다.
생의 마감인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그 개인에게는 현역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정년제는 합리적이다.
새로운 세대들이 진출함으로써 그 조직이 활성화 될 수 있다.
묵은 것과 새것이 교체됨으로써 새롭게 이어갈 수 잇다.
우리 나라 모든 조직에는 정년제가 행해지고 있는데
정치인과 스님들만 예외다.
정치인들은 자기네가 법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노탐(老貪)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추한 정치인들이 더러 있다.
수행의 세계에는 물론 정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직위에는 반드시 정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이 많은 늙은 줄이 어떤 직위에 있다는 것은 더 물을 것도 없이 추하다.
목사와 신부도 70이 정년이므로
때가 되면 현직에서 물러나 은퇴한다는 말을 들었다.
일을 벌이다 보니 나는 본의 아니게
'회주(會主)'라는 관사를 내 이름 위에 붙이게 되었다.
회주스님 소리를 들을 때마다
회장님 소리를 듣는 것 같아 속으로는 언짢았다.
'맑고 향기롭게' 에서 적당한 직책이 없어 상징적인 의미로
모임의 주관자란 뜻에서
회주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일찍이 없던 호칭이다.
길상사의 경우도 그렇다.
절은 주지에게 모든 책임이 주어져 있다. 회주는 불필요하다.
맑고 향기롭게가 됐건, 길상사가 됐건
내가 들어 시작한 것이므로 끝까지 뒤바라지할 책임이 내게 있다.
맑고 향기롭게는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길상사는 대중의 한 사람을로서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뒤에서 도울 것이다.
회주라는 이름은 수행자에게 욕된 호칭이므로
아무도 입에 담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남은 세월 동안에도 나를 낱낱이 지켜볼 그대에게 내 진실을 쏟아 놓았다.
내 남은 삶을 추하지 않고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
한 말이니 그대로 받아주기 바란다.
눈속의 칡꽃 쌍계사/법정스님
이번 가을에는 지리산을 오르리라 벌써부터 생각은 심어두었지만 미적미적 미루어오던 차에 갑자기 길 떠날 시절 인연이 생겼다. 서울에서 산행 차림을 하고 길벗 두 사람이 불쑥 찾아왔기 때문이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는 격으로 산행을 겸한 순례의 길을 떠나기로 했다. 잘 아시다시피 지리산은 전남 전북 경남의 3도와 5개 군을 끼고 그 둘레가 무려 8백 리에 뻗쳐있다. 주봉인 천왕봉이 해발 1,915미터, 반야봉이 1,751미터나 솟았고,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와 함께 능선이 유장하고 계곡이 깊은 남한의 명산이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30리 길이 산길치고는 너무 단조로웠던 이전의 기억이 되살아나 이번에는 천은사에서 오르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40리 길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냇물과 숲과 바위가 천연의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름이 좀 있는 산이라면 하나같이 작전 도로가 뚫려 산을 버려놓았는데, 이곳도 노고단 까지 그런 길이 있어 분단 조국의 비애를 오장육부로 느끼게 한다.
산마루에서 올라오던 길을 되돌아보노라면 새삼스레 인생이 무엇이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젖빛 운해에 덮인 저 아래 사람이 사는 동네들. 그 안에서 우리들은 희로애락을 마련하면서 살고 있다. 시시콜콜한 일상성에 집착하여 사랑하다가 미워하다가 또는 보다 많이 차지하려고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이런 것이 인간의 살림살이다.
그러나 오늘 산정은 쾌청! 수백 리 밖까지 내다보이는 아득한 맷부리들. 아 저게 바로 우리들이 지나온 허구한 세월이요, 기구한 역사가 아닐까
노고단 산장에는 산사나이 함태식 씨가 5년 전과 다름없이 정정한 모습이다. 천은사 약사암에서 싸준 도시락을 함께 먹으면서 우리는 산 냄새나는 풋풋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상의 가을은 눈이 부시다. 커피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오랜만에 살아 있는 기쁨을 누린다. 자연이 내린 고마운 은혜다.
노고단에서 반야봉에 이르는 20여 리 능선길은 몇 번을 다녀봐도 한결같이 정다운 코스이다. 울창한 굴참나무 숲을 지나면 무더기무더기 철쭉밭, 허옇게 억새꽃이 핀 갈밭길, 전나무와 헛갈리기 쉬운 구상나무 등. 좌우로 트인 산정의 시원한 조망은 걸을수록 힘이 솟는다.
임걸령에서 삼거리를 지나 연곡사까지의 계곡을 `피아골`이라 하는데, 자꾸만 발길을 멈추게 하는 단풍의 장관이 아니라면 어지간히 지루할 뻔했다.
길가에 초라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연곡사. 고려시대의 정교한 부도가 없었다면 절터마저 사라졌을 것이다. 버스로 한참 내려오면 섬진강이 흐른다. 강물을 따라 5리 지점이 화개장터. 벚꽃나무가 늘어선 10리 길을 올라가면 쌍계사 동구다.
25년 전 이 길을 오르내리며 입산 출가의 의지를 다지던 기억들. 무서움을 잘 타 밤에 변소길도 혼자서 못 가던 겁쟁이가 이 길에서 그 무서움을 떨쳐버렸었다. 최초의 탁발길에 오른 것도 바로 이 길을 지나서였다. 구례장을 보아 오느라고 한겨울 트럭위에서 섬진강의 매서운 강바람을 귓가에 쐬던 것도 바로 이 길이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아무도 없다. 적어도 쌍계사 경내에는 넋이 되어 나 혼자서 찾아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삼신산 쌍계사`라고 쓴 일주문의 낯익은 편액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나려고 했다. 삼신산은 원래 봉래(금강산) 방장(지리산) 영주(한라산)를 가리킨 것인데, 지리산에 많은 절이 있어서 쌍계사만은 달리 삼신산이라 한 것이다. 전해진 말에 의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의 괄괄한 성미와 관련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쌍계사는 723년 의상 대사의 제자 삼법과 대비 스님이 법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다가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머리)을 모셔와 지금 금당 자리에 봉안함으로써 창건된 셈이다. 9세기 신라 헌강왕이 그 덕을 우러러 받들던 진감선사때 크게 번창하고, 1641년 벽암 선사가 대대적으로 복원, 그 후 성총 스님이 중수를 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지리산 화개곡 눈 속에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대사의 정상을 모시라는 현몽을 얻어 탑을 세우고 금당을 지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육조의 정상을 모신 이래 이곳은 우리나라 조계선풍의 정신적인 근거지가 된 것이다. 조계는 육조 혜능대사가 살던 산 이름이다.
예전부터 남쪽의 선원으로는 칠불암의 아자방과 함께 이곳 탑전 좌우로 있던 동,서 방장선원을 꼽았엇다. 필자가 은사 효봉선사를 모시고 안거 정진하던 곳이 바로 이곳 서방장이었다. 그때 동방장은 빈방으로 있었다.
대웅전 앞에 ‘진감 선사 대공탑비(국보 47호)’가 있는데 왕명으로 최치원이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진감 선사의 전기 비다. 1천여년이 지났는데도 칠분 해서체로 쓴 그 자획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우리 나라 금석문 중에서도 으뜸이 될 만하다. 이 비문을 보면 쌍계사가 우리 범패는의 본고장임을 알 수 있다.
“그윽한 범패는 그 소리가 금옥 같고, 맑은 가락 또한 상쾌하고 구슬퍼서 능히 제천을 기쁘게 하고 먼 곳에까지 유전되었다....”
20여 년 전 범해스님 때까지도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지만 오늘은 희미한 그림자만 남아 있는 듯하다. 그리고 육조 정상을 당나라로부터 모시고 올 때 차의 씨도 함께 가져와 오늘날까지 지리산 작설차의 산지로 되어 있다.
5년 전 이곳을 찿아왔을 때, 금당만 덩그러니 남은채 동,서방장이 허물어진 걸 보고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든 옛집이 허물어져 없어진 걸 보니 맑게 간직한 추억의 뜰이 산산히 흩어졌다.
사연인즉, 못된 사이비 수좌들이 드나들며 정진은 하지않고 주지에게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그때의 주지가 동방장, 서방장을 뜯어다가 주지실을 새로 지었다는 것이다. 가람을 수호하고 삼보를 보호해야 할 주지가 몇몇 떠돌이 중들 꼴을 보기 싫다고 유서 깊은 선원을 허물며 자신의 거실을 만들었다니, 그 공과는 염라대왕이 알아서 조처하겠지만 박복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흔미의 단면은 이런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 무렵 퇴락할 대로 퇴락하여 음산하기까지 하던 절간을 보고 섭섭하기 그지없었는데 오늘 와 다시 보니 쌍계사는 새 면목으로 일신되었다. 4년 전 고산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래 큰 원을 세우고 쌍계사 중창 불사에 전념한 결과다. 다 허물어져 가던 불전과 요사들이 산뜻하게 보수되었다. 적묵당 설선당이 번듯하게 고쳐지고 기울어가던 팔영루도 이제는 튼튼하게 세워졌다.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들도 말끔히 손질되어 산문에 들어서면 온 도량에 서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경내에 우람하게 서 있는 몇 그루의 은행나무를 대하니 지금은 고인이 돼버린 고승당과 국사암의 노스님들 모습이 떠오른다. 역시 인걸은 간 데 없구나. 주지 스님의 중창 불사가 원만히 이루어지는 날 동,서방장에서는 다시 입방선을 알리는 죽비 소리가 들릴 것이고. 강당에서는 이 시대가 바라는 든든한 학승들이 배출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다시 눈 속에서 칡꽃이 향기롭게 피어나리라.
쥐 이야기 / 법정
산사(山寺)의 가을은 바람결에 묻어온다. 처서를 고비로 바람결은 완연히 달라진다.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무덥고 끈적거리던 그 바람결이 오후가 되면 어느새 습기를 느낄 수 없도록 마른 바람으로 바뀐다. 문득 초가을의 입김을 느끼게 된다.
이 무렵 절에서는 여름 안거(安居)가 끝난 해제(解制)철이 되어 다들 하산을 하고 절 안이 텅 빈다. 빈 절에 곧잘 산비둘기가 내리고 다람쥐들이 툇마루에 올라 재롱을 피운다. 여름철에 못 다한 열정을 쏟음인지, 더러는 소나기가 천둥 번개를 데리고 온 골짝을 휘저어 놓기도 한다. 아침저녁으로 선득거려 군불을 지피고, 삼베옷은 까슬거리어 벗어놓아야 한다. 문득 앞산을 바라보면 그새 산색(山色)이 수척해 졌다. 허허로운 바람소리가 스쳐간다.
지리산에 있는 어느 궁벽한 암자에서 지낼 때였다. 그때도 여름철 안거가 끝난 뒤라 함께 지내던 도반(道伴)들은 다 하산해 버리고 나 혼자 남아 텅 빈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그 시절은 등산 꾼도 구경꾼도 없던 때라 암자는 그야말로 적적요요(寂寂寥寥)하여 무일사(無一事)였다. 사람이라고는 약초를 캐러 다니는 마을 사람들이 이따금 지나갈 뿐이었다. 다로(茶爐)에 물은 끓어도 더불어 마실 이가 없는 그런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을 마치고 헌식(獻食)을 하기 위해 뒤꼍 헌식돌로 나갔더니 거기 꽤 큰 쥐 한 마리가 있었다. 나를 보고도 달아나지 않고 헌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헌식이란 불가에서 공양할 때 배고픈 중생 몫으로 따로 떠놓았다가 베푸는 일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여름철 내내 헌식돌이 깨끗했던 연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헌식한 음식은 대개 새나 다람쥐가 와서 먹게 마련인데, 어떤 때는 전날 놓아둔 음식이 그대로 남아 지저분할 때가 있다. 지금까지 헌식돌이 말끔했던 것은 날마다 이 쥐가 와서 먹어치웠기 때문인 것이다. 하루 한 끼밖에 먹지 않을 때라 한낮에 공양을 끝내고 헌식을 하러 가면 으레 그 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에는 쥐꼬리만 보아도 소름이 끼치곤 했는데,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쥐를 대하니 오히려 반가웠다.
더구나 나를 의지하고 사는 중생이거니 생각하면 어떤 연민의 정마저 들었다. 헌식도 전보다 좀 많이 주었다. 쥐는 무럭무럭 자라 보통 쥐의 세 곱은 되었다. "너 오늘도 왔구나, 어서 먹어라"하고 헌식을 주면, 내 곁에 다가와 먹을 만큼 우리는 길이 들었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 날 쥐에게 한마디 일러주어야겠다고 생각이 미쳤다. 그날도 쥐는 어김없이 헌식돌에 와 있었다. 쥐가 다 먹기를 기다려 말을 걸었다. "쥐야, 네게도 영식(靈識)이 있거든 내 말을 들어라. 네가 여러 생(生)에 익힌 업보로 그같이 흉한 탈을 쓰고 있는데, 이제 청정한 수도장에서 나와 같이 지낸 인연으로 그 탈을 벗어 버리고 내생(來生)에는 좋은 몸 받아 해탈을 하거라. 언제까지 그처럼 흉한 탈을 쓰고 있어서야 되겠니? 어서어서 해탈하거라."
쥐는 그대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 다음날 헌식돌에 나가니 쥐가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가 했는데 그 쥐는 헌식돌 아래 죽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못 미더워하고 서로의 말이 통하지 않는 막힌 세상에서, 쥐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구나 싶으니 대견스러웠다.
하는 짓에 따라 그 거죽이 다를 뿐 착하게 살려는 생명의 근원은 조금도 다를 게 없음을 거듭 거듭 확신할 수 있었다. 염불을 하고 그 자리에 묻어주었다. 그해 가을 나는 그 쥐의 명복을 빌면서 줄곧 마른 바람소리를 옆구리께로 들었다.
불일암의 편지/법정스님
불일암의 편지산정山頂에 떠오른 아침 햇살이 눈부십니다. 겨울 숲처럼 까칠한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며칠 동안 찬바람이 숲을 울리더니 오늘은 잠잠합니다.이곳 조계산은 단조로운 산이면서도 바람이 많습니다. 처음 이 산에 들어왔을 때는 가랑잎을 휘몰아가는 바람소리 때문에 자다가도 몇 번씩 깨곤 했지요, 저 아래 골짜기에 자리잡은 큰절은 덜하지만, 5리 남짓 올라와 있는 우리 불일암은 시야가 트인 대신 늘 바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겨울철은 더욱 그렇습니다.그런데 이 바람소리에서 나는 문득문득 내 근본을 확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량겁을 두고 정착함 없이 흘러 다니는 바람, 늘 움직임으로써 살아가는 바람, 바람은 멈추면 죽습니다. 그것은 바람이 아니지요.구도의 길도 바람 같은 것이 아닐까요? 끝없이 찾아 나서는 데서 삶의 의미를 거듭거듭 다지는 나그네 길.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란 말도 있듯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수 있는 새날이어야지, 그날이 매양 그날이라면 늪에 갇힌 물처럼 썩게 마련입니다. 물도 바람처럼 흘러야 살 수 있습니다. 운수雲水라는 말에는 매인 데 없이 홀가분하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산다는 뜻보다도, 늘 살아서 움직이라는 데 본질적인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출가 수행자가 산으로 돌아와 기대고 있는 것도 날마다 '좋은 날'을 마련하려는 뜻에서이지, 편안함과 한가로움을 탐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닙니다. 편하고 한가함은 구도가 아닙니다.하기야 산으로 돌아올 그 무렵에는, 몇 해를 두고 모자라던 잠이나 수풀에 묻혀 실컷 자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암자를 짓고 살아 보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양심의 문제였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태평성세라면 몰라도 늘 맞서 있는 현실이 아닙니까. 불의와 의가, 악과 선이,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증오와 사랑이......외부적인 현실도 현실이지만 내 안에서 맞서 갈등하고 있는 내면의 현상도 극복하고 정리해야 할 과제입니다.산에 돌아와 살면서 나는 우선 나 자신을 시험하기로 했습니다. 얼마만한 기능과 잠재력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의 원시적인 상태 속에 나를 던져 보았습니다. 먹고 사는 게 어떤 것인가를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서툴고 어설픈 것오 세월이 흐르니 자리가 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관계를 가지치기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떠남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었습니다.그 동안 나는 어떤 악조건 아래서도 홀로 살 수 있는 힘을 길렀습니다. 산에는 맑은 이웃이 있습니다. 무심한 나무들이 있고, 다람쥐와 꿩과 토끼와 노루 같은 선한 것들이 나를 정결하게 만들어 줍니다. 암자 둘레에 자생하고 있는 대숲과 난초와 차나무들이 내 일상에 물기를 보태 줍니다.이따금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우편물을 어느 손이 검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공기를 산에서 사는 내가 혹시 잊기라고 할까봐, 나를 깨우쳐 주기 위해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떤 일도 달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네 처지 아닙니까.이제는 또 점심을 지어야 할 시간이군요. 며칠 전에 읽은 법문을 되새기면서 사연을 맺을까 합니다.한 스님이 백장百丈 선사에게 물었습니다."어떤 것이 기특한 일입니까?"선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독자대웅봉獨坐大雄峰!"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았노라. 이 사실이 그 어떤 일보다도 그특한 일이라는 뜻이지요.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들은 저마다 대웅봉에 의젓이 앉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어지러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새해는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좋은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