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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5년 신축(1781) 9월 29일(무진)
05-09-29[04] 선조 조여의 증시(贈諡)를 청하는 봉조하 조중회의 상소문
봉조하(奉朝賀) 조중회(趙重晦)가 상소하기를,
“신의 10대조(十代祖) 증(贈) 참판(參判) 신(臣) 조여(趙旅)는 곧 단종조(端宗朝)에 절의를 지킨 신하로서 을해년 이후 문을 닫고 자취를 끊은 채 도(道)를 지니고서 일생을 마쳤으니, 그 정충(貞忠)ㆍ고절(苦節)은 실로 김시습(金時習)ㆍ원호(元昊)ㆍ남효온(南孝溫)ㆍ성담수(成聃壽)ㆍ이맹전(李孟專) 등 여러 사람들과 일체(一體)로 뜻을 함께 하였던 것은 물론, 세상에서 일컬은 바 생육신(生六臣)입니다. 고(故) 참찬(參贊) 이미(李薇)가 묘표(墓表)에 쓰기를, ‘선생(先生)의 마음은 뒷사람이 선을 그어 헤아려 알 수 있는 바의 것이 아니다. 만일 서산(西山)의 두 아들이 당시에 태어났다면 반드시 서로 심곡(心曲)을 털어놓고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했을 것이다.’ 하였고, 고(故) 판서(判書) 성문준(成文濬)은 전(傳)을 찬(撰)하기를, ‘노산(魯山)이 내선(內禪)한 뒤로 공(公)이 다시는 과거(科擧)에 응시하지 않고 절의를 지켜 길이 은둔(隱遁)하였다.’ 하였고, 선정신(先正臣) 이재(李縡)가 신도비(神道碑)를 찬(撰)하기를, ‘공(公)은 경태(景泰) 계유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는데, 사망(士望)이 매우 중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제생(諸生)들에게 인사하고 돌아간 다음, 일생 동안 다시 나오지 않은 채 낚시로 물고기나 잡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이렇게 스스로 자취를 숨겼으므로, 칭도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배(先輩)의 입론(立論)과 백세(百世)의 공의(公議)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지난번 역명(易名)의 은전(恩典)이 유독 이맹전(李孟專)에게만 미쳤고 신의 선조(先祖)에게는 미치지 않았으니, 성조(聖朝)에서 숭장(崇奬)ㆍ격려(激勵)하는 정사에 있어 어찌 흠결스러운 탄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선조의 우뚝한 절의를 굽어살피시어 한결같이 고(故) 정언(正言) 이맹전의 전례에 의거 특별히 증시(贈諡)하는 은전을 내리소서.”
하니, 바답하기를,
“특별히 청한 바를 허락한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살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주-D001] 을해년 : 1455 단종 3년.[주-D002] 노산(魯山) : 단종(端宗).[주-D003] 경태(景泰) : 명(明)나라 경제(景帝)의 연호.[주-D004]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정기태 (역) | 1993
○奉朝賀 趙重晦上疏曰:
臣十代祖贈參判臣旅, 卽端廟朝守義之臣。 乙亥以後, 杜門歛跡, 抱道終身。 貞忠、苦節, 實與金時習、元昊、南孝溫、成聃壽、李孟專諸人, 同志一體, 而世所稱生六臣者也。 故參贊李薇, 題于墓曰: ‘先生之心, 非後人所可涯涘。 若使西山二子, 生於當日, 必相與開心曲, 仰天長吁。’ 故判書成文濬撰傳曰: ‘魯山內禪, 公不復應擧, 抗節長逝。’ 先正臣李縡, 撰神道碑曰: ‘公景泰癸酉進士, 士望甚重, 一日揖諸生歸, 終身不復出, 漁釣以自樂。 其跡隱晦, 人無以稱焉。 先輩之立論、百世之公議, 不誣’, 而廼者, 易名之恩, 獨及於孟專, 不及於臣祖。 在聖朝崇奬、激勵之政, 豈無欠缺之歎乎? 伏願俯諒臣祖卓然之節, 一依故正言李孟專例, 特賜贈諡之典。
批曰: "特許所請, 令該曹, 照例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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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역 정조실록 > 정조 6년 임인 > 10월 5일 > 최종정보
정조 6년 임인(1782) 10월 5일(무진) 양력 1782-11-09
06-10-05[03] 김종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김운택 등에게 시호를 내리다
김종수(金鍾秀)를 한성부 판윤으로, 구선복(具善復)을 형조 판서로, 서유방(徐有防)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증(贈) 판서 김운택(金雲澤)에게는 충정(忠貞), 증 판서 이맹전(李孟專)에게는 정간(靖簡)이라는 시호를 추증(追贈)하였다.
[주-D001] 증(贈) 판서 김운택(金雲澤) : 저본에는 ‘判書金雲澤’으로 되어 있는데, 《승정원일기》 같은 날 기사에 근거하여 ‘判書’ 앞에 ‘贈’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6年 10月 5日》[주-D002] 증(贈) …… 추증(追贈)하였다 : 김운택은 경종 대 신임옥사(辛壬獄事) 때에 희생되었다가 영조 17년(1741)에 판서에 증직되었다. 《英祖實錄 17年 10月 30日》
이맹전은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생육신(生六臣) 중 한 사람인데, 정조 5년(1781)에 증직하라는 명이 있었다. 《正祖實錄 5年 9月 29日》
ⓒ 한국고전번역원 | 최성환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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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 정조 11년 정미 > 8월 17일 > 최종정보
정조 11년 정미(1787) 8월 17일(임자)
11-08-17[04] 예조에서 고 교리 성희를 충현 서원에 추배하는 것 등을 건의하다
또 아뢰기를,
“장성(長城)에 사는 유학(幼學) 김경철(金敬徹) 등이 상언하기를 ‘고(故) 판부사(判府事) 정무공(貞武公) 기건(奇虔)의 영(靈)을 안치한 사당에 사액하소서.’ 하였습니다. 정무공 기건은 장릉(莊陵) 때 생육신(生六臣)의 하나인데 청맹(靑盲)이라 핑계하고 끝내 절개를 바꾸지 않아서 세조(世祖) 때에 특별히 사시(賜諡)의 은전을 입었고 또 그 평소의 학문이 정독(精篤)하였습니다. 그 증손ㆍ현손(玄孫)에 문민공(文愍公) 기준(奇遵)ㆍ문헌공(文獻公) 기대승(奇大升) 같은 이가 있어 잇달아 명유(名儒)가 되었으니, 그 연원(淵源)의 순정(純正)이 선유(先儒)에게 추대받았습니다. 제사를 지낸 지는 이미 세월이 오래 되었으니 사호(祠號)를 청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겠으나, 은액은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가벼이 허가하기 어려우니, 우선 그대로 두고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처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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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역 정조실록 > 정조 11년 정미 > 8월 17일 > 최종정보
정조 11년 정미(1787) 8월 17일(임자) 양력 1787-09-28
11-08-17[04] 예조가 고 교리 성희를 충현서원에 추가로 배향할 것 등을 건의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충청도에 사는 진사(進士) 김세기(金世基) 등이 상언하여 고(故) 교리(校理) 성희(成熺)를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추가로 배향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성희는 예전 단종(端宗) 때에 집현전(集賢殿)의 여러 신하와 한마음으로 왕을 보좌하다가 마침내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국정(鞫庭)에 끌려 들어갔으니, 살고 죽은 것은 다를지라도 기절(氣節)은 같습니다. 아들, 조카와 손자는 모두 제향을 받는 은전(恩典)을 누리는데 성희만 빠졌으니, 참으로 사림(士林)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대신(大臣)에게 문의한 다음 상에게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도(三道)의 유생(儒生) 이형복(李亨復) 등이 상언하여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이 봉안된 단성(丹城)에 있는 도천서원(道川書院)에 해당 조로 하여금 다시 사액(賜額)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강성군은 일찍이 고려 때에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로 세간의 존중을 받았고 우리나라의 유현(儒賢)들이 모두 칭송하고 있습니다. 목면(木綿)을 가져온 일로 말하면 참으로 우리나라의 의복 생활에 큰 공(功)을 세웠으므로 본 고향에서 사당을 세워 기리자 사액하는 은전을 내렸습니다. 지난 임진년(1592, 선조25)의 전화(戰禍)로 사당이 불타 버렸는데 그 뒤에 중건(重建)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다시 사액의 은전은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추숭(追崇)하여 보답하는 도리로 보아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장성(長城)에 사는 유학(幼學) 김경철(金敬徹) 등이 상언하여 ‘고(故) 판중추부사 정무공(貞武公) 기건(奇虔)의 위패를 안치한 사당에 사액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정무공 기건은 장릉(莊陵 단종) 때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명인데 청맹과니 행세를 하면서 끝내 절개를 바꾸지 않아서 세조(世祖) 때에 특별히 시호(諡號)를 내려 주는 은전을 입었습니다. 게다가 그 평소의 학문이 정밀하고도 독실하였으며, 그 증손과 현손(玄孫)에 이르러 문민공(文愍公) 기준(奇遵)과 문헌공(文獻公) 기대승(奇大升) 같은 이가 있어 잇달아 명유(名儒)가 되었으니, 그 연원(淵源)의 순정(純正)함으로 선유(先儒)들에게 추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린 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니 사당의 액호(額號)를 청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액하는 은전은 일의 체모가 중대하여 가벼이 허락하기 어려우니, 우선 그대로 두소서.”
하니, 대신에게 문의한 다음 상에게 여쭈어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면천(沔川)에 사는 유학 성진곤(成鎭坤)이 상언하여 ‘방조(傍祖)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에 대해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받들고 겸하여 정문(旌門)을 세우는 은전을 베풀어 주며, 성삼빙(成三聘), 성삼고(成三顧), 성삼성(成三省) 등 세 사람에 대해서는 신원(伸冤)하고 관작을 회복해 주는 은전을 시행할 것을 해당 조로 하여금 상에게 여쭈어 처리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충문공은 절의(節義)가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위패(位牌) 한 조각이 100년 뒤에 뒤늦게 드러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제 그 방손(傍孫)이 사우 하나를 따로 세우고 규례대로 정문을 세우는 은전을 베풀어 줄 것을 청한 것은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기왕 가묘(家廟)를 세운다면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후손이 이미 끊어져 어디에도 붙일 만한 곳이 없습니다. 전지(田地)를 주어 제사를 받들게 하는 일에는 구애되는 점이 많아서 가벼이 의논할 수 없겠습니다.
성삼빙, 성삼고, 성삼성 등으로 말하면 모두 충신의 아우로서 다 같이 연좌율(連坐律)로 처벌받았습니다. 충문공이 이미 조정의 포증(褒贈)을 받았으니 성삼빙 등도 아울러 신원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은전에 관계되니 모두 대신에게 문의한 다음 상에게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주-D001] 고(故) 교리(校理) 성희(成熺) :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의 종숙(從叔)이자 정숙공(靖肅公) 성담수(成聃壽)의 부친으로, 세조 2년(1456)에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이 죽을 때 함께 국정(鞫庭)에 잡혀 들어가 10차례나 형을 받고 영남의 해변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처자식은 노비가 되고 가산(家産)은 몰수되었다.[주-D002] 도천서원(道川書院) : 목화를 처음 들여온 삼우당(三憂堂) 문익점의 공적을 후세에 알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세조 7년(1461)에 건립하였다. 명종 9년(1554)에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했으며, 정조 11년(1787)에 다시 사액을 받았다. 경상남도 산청(山淸)에 위치한다.[주-D003] 정무공 …… 입었습니다 : 기건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고, 세조가 다섯 번이나 그를 찾았지만 청맹(靑盲)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아, 생육신(生六臣)의 한 명으로 꼽기도 한다. 시호(諡號)는 정무(貞武)이다. 《世祖實錄 6年 12月 29日》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검색일: 2020.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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