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새는 왜 내일을 걱정하지 않나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주인공 존디는 폐렴으로 투병한다.
존디는 자신과 잎새를 동일시한다.
붉은 벽돌담의 담쟁이 넝쿨에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떨어질 거라 믿었다.
밤새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이튿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창문을 열었다. 잎새가 한장 남아 있었다.
늙은 화가 버먼이 담벼락에 그려놓은 잎새였다.
그 잎새를 보고 존디는 삶의 용기를 얻는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담벼락이 있다.
예수는 “하늘을 나는 새와 들녘의 나리꽃은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가 뭘까.
우리 안에도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 담벼락이 있기 때문이다.
갈릴리 호수(Sea of Galilee) -다음백과 제공
하늘을 나는 새는 왜 내일을 걱정하지 않나
예수의 눈에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의 존재 원리가 명쾌하게 보인다.
그의 눈에는 이 우주를 떠받치는 무한한 담벼락이 보인다.
그래서 예수는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라고 강조했다.
이 우주의 바탕에 담벼락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산에서 내려와 다시 갈릴리 호수로 갔다.
호숫가 얕은 물에 마른 나뭇가지가 꽂혀 있었다.
물새가 한 마리 날아와 앉았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예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늘의 새들을 보아라!”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저 새들, 저 꽃들.
그 속에 깃든 ‘우주의 담벼락’을 보아라.
그런 담벼락이 너희 안에도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선불교에도 우주의 담벼락에 대한 일화가 있다.
중국 서촉 땅에 덕산이란 선사가 있었다. 처음에는 강사(講師)였다.
『금강경』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할 만큼 콧대가 높았다.
그는 당시 남쪽 지방에 교학을 무시하고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 일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덕산은 걸망에 『금강경소초』를 짊어지고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일합을 겨루기 위함이었다.
남방으로 길을 가다가 하루는 떡장수 노파를 만났다.
덕산은 요기를 할 요량으로 짊어진 걸망을 내려놓았다.
노파가 물었다. “걸망에 든 것이 무엇입니까?”
덕산이 답했다. “『금강경소초』입니다.”
그 말을 듣고 노파가 내기를 제안했다.
“스님이 맞히시면 떡을 그냥 드리고, 맞히지 못하시면
돈을 준다 해도 떡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때는 다른 데 가서 사 드시지요.”
덕산이 좋다고 하자 노파가 물었다.
“『금강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드시겠습니까?”
노파의 물음은 선문(禪問)이었다.
“‘마음’이란 생겨났다가 작용하고 사라지는 존재다.
그게 마음의 정체다.
그래서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그게 마음의 실체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떡을 드시려 한다. 그건 어떤 마음인가?” 하고 물은 셈이다.
이 말을 듣고 덕산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경전에만 능통할 뿐 선(禪)을 뚫는 안목은 없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진 채 처형장을 향해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에 있는 표식.
‘점심’의 한자는 ‘點心’이다.
마음에 점을 찍을 정도로 적은 양의 식사를 말한다.
옛날에는 점심을 그만큼 적게 먹었던 모양이다.
주막의 노파는 고수였다.
마음도 하나의 ‘잎새’다.
세상의 모든 잎새는 순이 돋아 자라서 물이 들고,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
마음도 그렇게 생겨났다가 작용하고 소멸한다.
그러니 ‘과거의 잎새’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잎새’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잎새’도 얻을 수 없다.
그게 잎새의 정체다. 노파는 묻는다.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
그럼 당신이 쓰는 마음은 어디에 점(點)을 찍고 있나.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나. 그 바탕은 무엇인가.”
덕산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대신 루미의 시가 이에 답한다.
때로 죽어감이 필요하다네
그래야 예수가 다시 숨을 쉬시니
울퉁불퉁한 바위에서는 자라는 게 별로 없으니
평평해지게나 부서지게나
그러면 그대로부터 들꽃들이 피어날 테니
―루미의 시 「내면에는 가을이 필요하다네」 중에서
과거의 잎새, 현재의 잎새, 미래의 잎새.
그 모든 잎새에는 ‘죽어감’이 필요하다.
잎이 모두 떨어지면 나무가 드러난다.
내가 떨어져도 여전히 서 있는 나무.
그게 ‘우주의 담벼락’이다.
예루살렘 성의 맞은 편에 있는 올리브 산에는 유대인들의 오래된 석관이 줄지어 있다.
덕산은 왜 점을 찍지 못했을까.
그는 잎새만 보고 담벼락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담벼락을 보는 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아무 데나 점을 찍는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담벼락 위에서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그러니 아무 데나 찍어도 ‘우주의 담벼락’에 점이 찍힌다.
그걸 아는 이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두려움에 떠는 잎새들을 향해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복음 6장 31~34절)
예수가 강조한 1순위는 분명했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다.
그것부터 찾으라고 했다.
‘하느님 나라’가 뭔가.
신의 속성으로 충만한 나라다.
그럼 ‘그분의 의로움’은 뭘까.
지하철역이나 서울역 광장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목이 터지라 외치는 것일까.
갈릴리 호수에서 유대인 청년들이 멱을 감고 있다. 예수는 이 호수 일대를 다니며 설교했다.
히브리어로 ‘의로움’은 ‘체다카(Tzedakah)’이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라는 뜻이다.
그럼 무엇에 부합하는 걸까.
그렇다. ‘신의 속성’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게 ‘그분의 의로움’이다.
그렇게 나의 속성을 신의 속성으로 돌리는 일이다.
그게 ‘체다카’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
‘내면의 가을’이다.
갈릴리 호수의 수면 위로 새가 날아갔다.
자유로워 보였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새.
그런 새를 가리키며 예수가 묻는다.
“너는 한장의 잎새인가,
아니면 한 그루의 나무인가.
너는 우주의 담벼락을 아는가.
[백성호의 한줄 명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