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8. 웨스트팔리아 조약
유럽 근대국가 체계의 시작. 근대 주권적 군주의 종교결정권을 인정, 로마법왕 권한의 제한. 프
로테스탄트 세력의 등장, 주로 프랑스의 리슐리에(Rechelieu)의 업적.
비엔나 회의
1814. 5. 30. 제1차 파리평화조약
프랑스 패배 이후 처리를 위한 비엔나 회의 개최를 규정. 프랑스 국경은 1792년 당시로 결정,
스위스의 중립화, 루이 18세를 프랑스왕으로 내정, 나폴레옹을 엘바섬으로 추방. 프랑스를 분할,
파괴하지 않은점이 특기할만 하다.
1814. 3. 쇼몽(Chaumont) 조약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4국의 對佛防衛同盟條約
1814. 6. 4. 프랑스 헌법전 제정
1813. 2. 칼리쉬(Kalisch) 조약
작소니는 프로이센이 폴란드의 대부분은 러시아가 차지하기로 하고 비엔나 회의 전에 약속, 리
트조약과 함께 비엔나 회의 진행에 커다란 장애를 초래
1813. 10. 리트(Ried) 조약 (오스트리아 vs Bavaria)
1814 9. ∼ 1815. 6. 9. 비엔나 회의
러시아가 폴란드 대부분, 프로이센은 작소니의 5분의 2를 차지. 독일연방을 39개의 단위체(34주
권국 + 4자유국 + 오스트리아)로 구성하여 결성. 영국왕이 하노버의 왕을 겸임토록 결정. 영국
이 몰타와 이오니아 군도를 획득. 네들란드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벨기에를 획득.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를 획득. 사르디니아는 제노아를 합병. 스위스를 8개국의 보장하에 영세
중립국화.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넘겨주고 대신 스웨덴으로부터 재정지원 형식으로 보
상받고 더불어 포메라니아(Pomerania)도 획득. 이 포메라니아를 덴마크는 라우엔부르크 공국을
받고 프로이센에 양도. 특기할 사항은 비유럽지역은 취급하지 않았음.
1815. 6.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의 100일천하 종식
1815. 11. 20. 제2차 파리조약
프랑스 국경을 1790년 당시로 후퇴시키기로 결정. 프랑스에 배상금 부과. 나폴레옹을 세인트헤
레나로 귀양보냄
1815. 1. 3. 英·墺·佛 동맹
칼리쉬 조약문제를 둘러싸고 普·露와의 대립에서 일시적으로 생성됐던 것. 전쟁 발발시 각각
15만씩 동원키로 결정
1815. 11. 신성동맹 (Holy Alliance)
러시아의 유럽지배수단. 영국, 터키, 로마법왕은 불참
유럽협조체제
1815. 4국동맹
對佛 견제적 성격. 프랑스가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면 英·墺·普·露가 각각 6만씩 동원하고
이것으로 부족하면 병력을 더욱 증강하기로 결정. 나폴레옹 퇴위확인, 세계평화를 위해 장차 사
태가 발생하면 회의를 갖기로 결정 -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의 계기
1818. 10. 9. 엑스라샤펠(Aix-la-Chapelle)조약
유럽협조체제의 첫 작동. 궁극적인 나폴레옹전쟁의 종결. 프랑스의 동등권 인정. 외교제도에 큰
공헌
1818. 11. 1. 4국동맹 갱신
엑스라샤펠 조약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대한 두려움이 상존함을 보여주는 例
1819. 3. 23. 칼스반트(Carlsband) 칙령
독일연방에서의 질서유지를 위해 정치적 자유를 제한
1820. 비엔나 결의
독일연방이 일정한 경우에 회원국의 내정에 간섭가능
1820. 7. Naples(나폴리왕국)의 헌법 수여
당시 자유주의 요구가 강하여 페르디난드왕이 마지못해 한 것임
1820. 10∼11. 트로파우(Troppau) 회의
1820. 12. 라이바하(Laibach) 회의
이 두 회의를 통하여 오스트리아가 나폴리의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위임받음
1821. 2. 오스트리아가 나폴리에 진주
헌법을 정지시키고 나폴리왕의 권한을 회복시킴
1821. 3. 투린(Turin) 반란
투린은 당시 사르디니아의 한 도시
1821. 4.
오스트리아가 사르디니아를 지원하여 반란을 진압. 이를 전후하여 빅토르 엠마누엘 1세가 물러
나고 카를로스 알베르토가 섭정으로 등장. 협조체제 붕괴와 먼로 독트린
1820. 1 스페인반란
당시 스페인 왕인 페르디난드 7세에 헌법을 부여하라고 요구
1822. 7.
스페인 우파가 쿠데타에 실패한 후 북부에 세력권 형성
1821. 10.
프랑스에 빌레르(Villele)가 등장. 리슈리에의 후임으로 매우 반동적인 인물
1822. 10. 베로나(Verona)회의
스페인왕의 전권을 회복시키는 작업을 행할 국가를 선정키 위한 모임. 결국은 프랑스가 간섭키
로 결정. 영국은 이에 적극 반대. 그 결과로 Concert of Europe이 처음으로 붕괴
1823.
프랑스가 스페인에 진주하여 목적을 쉽게 달성하고 곧 철수
1819.
미국,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 구매
1816.
러시아, 보데가灣(당시 스페인령)에 상업기지 구축
1821. 9.
짜르 러시아황제, 알래스카 연안지역으로부터 100마일 이내의 지역에서의 외국인의 무역, 어업
을 금지하는 칙령. 러시아가 美洲에서의 남하의욕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볼수 있었음
1822. 4.
미국, 중남미 지역 독립승인
1823.
미국은 중남미 諸國에 대해 공화국형태를 고수할 것을 촉구
1823. 12. 2. 먼로선언
露·佛을 견제하려는 영국의 정책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부합되었기 때문에 미국이 단독으로 선
언할수 있었던 것
1830년 혁명
1825. 12. 러시아의 알렉산드 1세 사망
니콜라이 1세가 등장하여 전제정치 시작
1829. 구교도해방(영국)
1763년의 심사령(Test Act)의 시정, 로마법왕의 간섭을 회피하겠다는 선서를 하면 구교도에게
도 신교도와 같은 정치상 권리부여
1824. 프랑스 샤를 10세 등장
보수정치. 언론·정치적 자유 제한
1830. 7. 프랑스, 알제리 합병
프랑스 제국주의 정책의 시작. 7월 혁명 1주일 전에 완결. 어느 면에서 보면 국내문제를 국외로
돌리려는 전형적인 정치 스타일로 볼수 있음
1830. 7. 프랑스 혁명
루이 필립이 등장. 민주적인 브루조아 혁명에 의해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1833. 영국 선거법 개정
유권자수가 43만에서 60만으로. 7월 혁명의 영향으로 나타난 현상
벨기에 독립
1830. 8. 28. 브뤼셀 폭동
초기에는 자치, 불평등해소 등만을 요구하는 비교적 온건한 성격
1830. 8. 루이 필립의 벨기에 사태에 대한 성명
프랑스는 벨기에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간섭하지 않겠으나 타국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간섭하
는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
1830. 10. 임시정부가 독립선언
1830. 11. 제헌의회가 입헌군주주의를 선포
1831. 1. 런던 의정서
벨기에의 영세중립보장. 새로운 벨기에 왕은 유럽 강대국 왕실 출신이 아니어야 한다.
1831. 1. 런던회의에서 국경을 결정
림부르크, 룩셈부르크를 제외. 그러나 후에 벨기에인들의 반대로 인해 각각 2분의1, 5분의3을
포함하게 됨
1831. 2. 벨기에 의회는 루이 필립의 아들인 duc de Nomows를 왕에 추대하기로 결의. 그러나 영
국의 파머스턴의 압력으로 프랑스가 이를 거부. 1830. 11. 웰링턴 내각이 붕괴하고 그레이 내각
이 등장하여 파머스턴이 외무장관직을 맡게되었던 것인데 프랑스에 전쟁위협까지 하여 이 제의
를 거부하도록 한것임
1831. 8. 네들란드가 런던 결정을 반대하여 무력에 호소. 그러나 결국은 영국, 프랑스의 압력에 의
해 네들란드가 포기
1831. 11. 열강조약 체결
Saxe-Coburg의 레오폴트를 왕으로 인정. 네들란드가 룩셈부르크 동부 쉘트 좌안을 차지하고
벨기에는 안트워프를 차지
1839. 네들란드가 정식으로 벨기에의 독립을 인정
벨기에 독립의 국제정치사적 의의 : 열강이 합의해서 세운 규칙을 열강이 합의해서 개정한 것.
즉 베로나 회의에서 깨진 협조체제가 다시 부활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동서간의
대립이 노정되었다.
폴란드 반란
1830. 11. 폴란드 반란
러시아 총독 철수. 임시정부 수립. 1792년 국경과 1815년 헌법의 회복을 요구
1831. 1. 폴란드 의회가 독립을 선언
1831. 8. 프랑스 의회 동정 결의
프랑스 외교의 어설픈 면이라고 볼수 있음. 즉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공연히 러
시아의 반감만 사게되는 결과
1831. 9. 러시아군 폴란드에 진주
지중해 문제
1699. 카를로비츠(Carlowitz) 조약
오토만(Ottoman)이 최초로 패전한 조약
1774. 쿠쥬크 카이나르디(Kutchuk Kainardji) 조약
러시아가 크림반도 획득. 상선의 흑해통항권. 콘스탄티노플에 교회설립보호권. 몰다비아. 왈라키
아 지사 임명시 동의권
1535. 프랑스·터키 동맹조약(Francis vs Soleiman)
치외법권, 근대외교의 실효적 효시 - 이교도인 터키와 동맹하여 합스부르크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16C 시대상황으로 보아 프랑스가 근대국가로의 체계를 갖추지 못했더라면 불가능했던
일
1581. 영국의 레바논 컴퍼니(Levant Company)설립
1817. 세르비아는 자치공국이 됨
그리스 독립
1814. Hetairia Philike(비밀결사) 형성
카포이스트리아가 알렉산드 1세의 지원을 받고 오뎃사에서 결성.
1821. 알렉산드 입실란트가 몰다비아와 모레아에서 혁명, 모레아에서만 성공
1821. 7. 알렉산드 1세(러시아)가 터키에 최후통첩에 준하는 압력. 터키가 거부했으나 영국, 오스
트리아의 태도로 러시아가 수그러드렀음
1822. 1. 13. 모레아에서 독립선언
1823. 3, 25. 케닝은 그리스를 승인하고 지지
1824. 1. 알렉산드 1세가 터키 주권하에 3개의 희랍공국을 건설할 것을 제의. 그러나 모든 관계국
이 반대.
1825. 이집트의 아브라힘(모하메트 알리의 아들)이 그리스에 원정
1826. 3. 니콜라이 1세가 터키에 최후 통첩
몰다비아, 왈라키아에 대한 간섭권 회복을 요구
1826. 4. 영·러 의정서
터키 종주권하의 그리스의 자치로 양국이 문제해결을 중재하자는 것
1826. 10. 7. 악케르만(Akkerman)조약 (러·터)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서 몰다비아, 왈라키아 양 공국의 통치자를 임명
1827. 7. 6. 런던 조약
프랑스가 영·러 의정서에 가담. 봉쇄로 조정을 단행키로 결정. 그러나 터키가 계속 거부
1827. 10. 20. 나바리노만 사건 (英·佛·오스만투르크)
1828. 4. 26. 러시아, 터키에 선전포고
1829. 3. 22. 런던의정서(불·영·러)
러시아가 아르메니아 일부, 카스피해에 해군기지·상업권 획득, 그리스 국경 확정. 그러나 영국
이 3자 최후통첩 발송에 주저하여 전쟁 계속
1829. 8. 20. 러시아가 아드리아노플 점령
1829. 9. 14. 아드리아노플 조약
러시아가 몰다비아·왈라키아를 잠정점령. 상선의 해협통항권 획득. 그리스는 런던의정서에 의
해서 해결되도록 규정
1830. 2. 3. 런던의정서
그리스 완전독립을 승인
1831. 3. 바바리아의 오토(Otto)가 왕에 즉위
이집트 문제
1832. 12. 이집트군 코니아 점령
모하메트 알리가 터키를 도와서 그리스 독립운동 진압에 참전할 때 모리아와 크레타의 획득을
약속받았으나 그리스 독립후 모리아 획득이 어려워지자 대신 알리가 시리아를 요구하고 나오게
되어 이집트·터키 양국간에 문제가 발생케 됨. 코니아는 콘스탄티노플 진출을 위한 전략적 요
충지
1833. 2. 러시아 함대 보스포러스 해협에 출현
러시아는 터키가 더 이상 약해지는 것을 원하지 ?았기 때문에 술탄의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오
토만 터키를 지지하고 나섬
1833. 4. 8. 쿠타비아(Kutahia)협정 (이집트·터키)
시리아, 아다나를 이집트에 양도. 이 협정과 동부지중해에서의 함대시위로 러시아 함대는 철수
1833. 7. 8. 웅키아로 스켈레시(Unkiar-Skelessi) 조약
터키에 대한 제3자의 공격이 있을 때 러시아가 무상원조. 대신 터키는 러시아가 전쟁중일 때에
는 해협을 봉쇄. 이 조약이 상정하고 있는 바는 러시아가 해협에 대해 추구하는 최상의 상태라
고 볼수 있음
1833. 9. 13. 뮌헨그레츠 협정
墺·露간의 상호협조(Quid pro quo)
러시아는 中歐에서 오스트리아의 정책 지지. 墺는 오토만에서 러시아 정책 지지
1835. 9. 테프리츠(Teplitz) 회의
이 회의 이후 메테르니히는 상기 협정에 의한 러시아 지지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
1838. 8. 영·터 통상조약
영국의 지연작전이 주효하여 웅키아르 스켈레시 조약에서의 러시아의 특권을 잠식. 관세 3%로
결정
1839. 영국이 터키 군사훈련을 위임받음
cf)상륙군 훈련은 프로이센이 담당
1839. 4. 오토만의 마흐무트 2세가 쿠타비아 조약을 거부하고 다시 전쟁에 호소. 그러나 다시 터
키가 연전연패. 마흐무트 2세 사망. 터키 해군제독 이집트에 투항
1839. 7. 27. 열강의 터키에 대한 공동 각서
열강들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
1840. 2. 프랑스에 티에르 등장
초강경파인 티에르가 등장함으로서 1832년 당시의 프랑스 정책과는 달리 프랑스가 매우 강력하
게 터키 문제에 대처하려는 자세를 보이게 됨. 따라서 영·프는 위와 같이 공동각서에 합의했
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처리문제에 관해 의견이 상이하여 서로 대립하게되자 러시아는 지나치
게 밀접한 영·프 관계를 이 기회에 붕괴시킬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여 뒤로 물러나서 영국이 이
사태에 주도권을 잡아서 프랑스에 반대하도록 방치
1840. 7. 15. 런던의정서
이집트는 남시리아와 자국에서 지배상속권을 갖는다. 그러나 크레타, 아라바아 획득지는 포기한
다. 10일 내에 이에 대한 회답이 없으면 남시리아 제의를 철회, 또 10일 후까지 회답이 없으면
사후문제는 전적으로 술탄의 처리에 맡기겠다는 최후통첩. 이는 프랑스를 제외하고 영·러가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집트는 프랑스가 강력하게 나와줄 것을 기대하고 이를 거부
1840. 9. 영국이 베이루트 포격
프랑스는 런던결정에 강력히 반발하는 태도를 보이고 이집트도 이를 거부하자 영국이 실력을
보인 것
1840. 10. 20. 루이 필립 티에르를 해임
프랑스의 반대는 말로만 그치는 정도였고 아브라힘도 시리아에서 후퇴. 이것은 파머스턴의 완
전한 승리를 의미
1841. 7. 13. 런던해협협정
이집트 사태를 둘러싸고는 영·불이 대립하였으나 웅키아르 스켈레시아에서의 러시아의 특권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영국은 다시 프랑스를 유럽협조체제에
끌어들여 이 협정을 체결한 것. 평화시에는 모든 국가의 군함 해협통과 불가. 터키가 전시인 경
우에는 터키의 사정에 따라 결정. (즉 터키의 동맹국 군함이 통항이 가능할수도 있다는 것). 파
머스턴 외교의 완전 승리
英·佛과 이베리아반도
1833. 9.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사망
왕후 크리스티나가 무남독녀인 이사벨라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전통적 왕위계승법인 Salic
Law를 폐지하여 페르디난드의 동생인 돈 카를로스와 독립하게 됨
1833. 크리스티나가 진보주의자들을 규합하고 섭정으로 등장
1834∼37. 카를리스트 전쟁(Carlist war)
돈 카를로스와 크리스티나간의 전쟁
1826. 포르투칼의 후완왕 사망
법정 계승자인 브라질의 돈 페드로(나폴레옹 전쟁시 포르투갈 왕가는 브라질에 피신했다가
1820년 후안 대공은 귀국하고 돈 페드로는 그 곳에 잔류했었음)가 동생 미구엘을 섭정으로 하
여 딸 마리아를 왕으로 봉하고 영국식 입헌군주제헌법을 부여. 그러나 미구엘은 직접통치를 노
리고 전쟁을 일으킴
1833. 마리아가 왕권을 회복
1834. 4. 24. 4국 상호렵력조약
영·불은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 입헌군주주의 두 여왕 정부, 즉 자유주의적 성격의 당파를 일
관성있게 지지. 이러한 관계를 배경으로 英·佛·스페인·포르투갈의 4국 협정이 성립. 이 조약
은 뮌헨그레츠협정과 대립되는 성격, 즉 자유주의적인 서부유럽과 보수주의적인 동부의 분열현
상이 드러난 것이라고 볼수 있음.
1840. 프랑스에 기조 등장
1840.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1901)
1841. 영국 제2차 필 내각
에버딘 외무장관, 기조와 에버딘간에 이사벨라와 그녀의 동생 Infanta Luisa의 결혼문제를 둘러
싸고 협상대립
1846. 6. 파머스턴 재등장
프랑스가 스페인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혼문제를 더욱 강력히 들고 나옴. 영국
이 유트레히트 조약을 들어 프랑스에 위협했으나 결국 프랑스가 승리
cf) 유트레히트 조약 : 프랑스 왕실과 스페인 왕실을 합칠수 없다는 내용으로 프랑스의 유럽지
배 후퇴의 계기가 된 조약
1848년 혁명 : 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1847. 스위스 사태
자유주의 세력이 성공하여 보수주의 가톨릭의 7개 캔톤으로 구성된 존더분트가 해체됨
1848. 스위스 신헌법
1848. 2. 22. 파리 데모
프랑스 대중의 자유주의적 경향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루이 필립 정부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
1848. 2. 24. 루이 필립은 왕위를 손자에게 양도한다고 선언하고 런던으로 망명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필립의 성명을 무시하고 공화국을 선포
1848. 3. 5. 라마르틴 서큘라
1848년 혁명은 1789년과 같은 대외침략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타국도 프랑스 내정에 간섭
하지 말라. 1815년 제조약을 폐기한다. 그러나 비엔나에서 결정된 국경은 인정하겠다.
1848. 4. 프랑스 의회선거
최초의 보통선거. 공화파가 승리하고 좌파 및 혁명주도파는 세력상실
1848. 6. 파리 노동자 봉기
선거결과에 불만을 품고 일어났으나 곧 진압됨
1848. 11. 프랑스 헌법 완성
1848. 12. 프랑스 대통령 선거
보수 가톨릭 연합의 지지를 업고 루이 나폴레옹 집권. 제 2공화국
1848. 3. 12. 비엔나 혁명
오스트리아는 헌법을 부여하고 헝가리는 독립시켰으나 그 왕을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임하도록
하여 Personal union을 구성. 당시 황제는 인스부르크로 메테르니히는 런던으로 망명했을 정도
로 혁명이 극성기에 있었음.
1848. 6. 크로아티아 민족위원회 결성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자 슬라브족들도 헝가리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
것임. 그러나 헝가리는 이들의 노력을 탄압. 자기 이외의 타민족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민
족주의의의 본질인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
1849. 1. 빈디쉬그래츠(Windischjgratz)가 부다페스트로 진군
1848년 6월 이후 사태가 역전되어 오스트리아 지배체제가 회복되기 시작하여 프란시스 요제프
와 슈바르ㅉ베르크가 새로이 등장하면서 적극 진압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임
1849. 4. 헝가리 공화국을 선포
슈바르?베르크의 헌법에 자극받아 Louis Kossuth를 長으로 하여 공화국 선포
1849. 6. 러시아군이 트란실바니아 진주
당시 몰다비아, 왈라키아를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는 헝가리의 자유주의가 이 지역에 영향을 미
칠 것을 우려하여 니콜라이 1세가 프란시스 요제프에 제의하여 헝가리 사태의 진압을 도왔던
것임. 이렇게 하여 헝가리 사태는 일단락 됨.
1848. 2∼3. 이탈리아 반도의 나폴리, 로마, 플로렌스, 투린에 헌법 부여
1848. 3. 롬바르디아의 수도인 밀라노에서 반란
라데츠키가 4각요새(만투아, 레그나노, 베로나, 페쉬레라로 구성)로 후퇴
1848. 3. 마닌(Manin)의 주도하에 베네치아 공화국을 선포
1848. 3. 22. 사르디니아의 카를로스 알베르토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당시 사르디니아는 이탈리아반도에 전폭적인 지지를 획득
1848. 7. 24. 쿠스토쨔 전투에서 사르디니아 패배
1848. 8. 9. 사르디니아-오스트리아 휴전협정
1848. 9. 2. 프랑스 의회, 사르디니아 지지 결의안 통과
그러나 사르디니아는 프랑스의 세력에 휩쓸리거나 프랑스의 과격한 혁명이 수입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 결의안은 양국간의 협상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음.
1848. 11. 로마 폭동
로마법왕은 가에타로 피신
1849. 2. 로마공화국 선포
1849. 3. 알베르토, 對 오스틀아 전쟁 재개
그러나 노바라 전투에서 다시 패배. 노바라 이후에 알베르토가 물러나고 빅토르 엠마누엘레 2
세가 등장
1849. 8. 오스트리아·사르디니아 강화회의
英·佛의 영향력 덕분으로 사르디니아는 영토는 뺏기지 않고 배상금만 지불. 빅토르 엠마누엘
레 2세는 오스트리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1848년 3월의 헌법을 그대로 유지
1849. 6. 프랑스, 로마에 군대파견
이렇게 하여 로마에는 질서가 회복, 프랑스 군대의 주둔으로 법왕이 유지되는 상태
1850. 4. 법왕이 로마에 복귀
1848년 혁명 : 독일
프랑크푸르트 회의
1848. 3. 베를린 폭동
1848. 3. 11. 프랑크푸르트 예비회의
53명의 예비의원들이 모여 보통선거 방식으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
1848. 3. 21. 프로이센의 빌헬름왕 성명
프로이센이 독일민족의 리더쉽을 잡겠다고 선언
1848. 5. 18.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개최
830명의 대표가 모여 이 회의는 독일 연방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선언. 또 이와 거의 같은 시일
에 프로이센은 제헌의회 소집. 소독일주의와 대독일주의의 대립. 의회의 구성형식은 혁명적이나
그를 구성하는 인사들의 다수가 성향이 보수적이라서 의회의 작동이 원활하지 못했음.
1848. 1. 덴마크에 프레드릭 8세가 등장.
1848. 8. 말뫼강화조약
프레드릭 8세가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을 합병하려는 조치를 취하자 두 공국이 이에 반발하여 임
시정부수립을 선포. 이에 덴마크가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자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프로이센으
로 하여금 덴마크의 침입을 저지하도록 결의. 이렇게 하여 프로이센·덴마크간에 전쟁이 발발
되어 체결된 조약. 내용: 양국이 두 공국을 공동 관리하고 궁극적인 처리문제는 추후에 결정하
도록 함
墺·普의 대립
1849. 3. 27. 프랑크푸르트 의회
독일연방제국의 왕으로 프로이센의 빌핼름을 추대키로 결정. 또 동시에 새로운 독일제국은 독
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지역만 포함하기로 결정함으로서 사실상 오스트리아를 축출하기로
결정.
1849. 4. 프로이센의 빌핼름왕, 의회의 제의를 거절
"왕은 왕권신수설에 입각하여 결정되어야지 의회에서 수여한 왕위는 왕위가 아니다" 이로써 프
랑크푸르트 의회는 사실상 해체된것이고 자유주의하에 독일이 통일될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짐.
1849. 5. 삼제동맹(프로이센, 작소니, 하노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의회의 제의를 거절했으나 다른 방
법으로 독일연방에서 리더쉽을 장악하려고 의도한 것임. 오스트리아의 작소니, 하노버, 프로이
센의 3국 및 중부독일의 소제국을 각각 하나의 세력으로 하여 중부유럽을 새로이 형성하려는
의도.
1850. 3. 에르푸르트 회의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소국가들의 군주회의. 이에 대항하여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오스트리아
를 중심으로 회의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1850. 11. 29. 올뮈츠의 굴욕
普·墺의 위와 같은 대립상태에서 헷세캇셀에서 의회와 군주간에 분쟁이 생긴 것이 계기가 되
어 양국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되었으나 슈바르ㅉ베르크의 최후통첩에 프로이센이 굴복, 이렇
게 하여 오스트리아의 우위가 다시 한 번 확인됨
1850. 7. 2. 프로이센·덴마크 협정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에서 프로이센군 철수. 계승문제는 미결. 일종의 휴전협정
1853. 5. 8. 런던의정서
두 공국을 원상회복시킴 : 그뤽스부르크가 통치. 아우구스텐부르크公은 돈으로 보상받음
나폴레옹의 등장
1851. 12. 루이 나폴레옹 쿠데타
1852. 12. 2. 루이 나폴레옹이 나폴레옹 3세가 되고 프랑스는 공화국에서 군주국으로 다시 변신.
이렇게 볼 때 1848년 혁명은 2년만에 혁명의 원산지인 프랑스에 제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종식.
1848년 혁명의 특기점: 열강간의 평화가 파괴되지 않았다는 점. 유럽전체혁명의 실패원인: 대
중의 지지기반 결여. 프랑스의 혁명 실패
크리미아 전쟁
크리미아 전쟁의 배경
예루살렘 성지보호권을 둘러싼 가톨릭(프)과 그리스 정교(러)간의 대립에서 발단
1852. 에버딘과 크래랜던 등장
1853. 1. 러시아가 터키문제에 대해 영국에 의견 개진
그러나 영국은 이에 대한 분명한 태도표명 회피
1853. 2. 러시아의 멘쉬코프, 터키 방문
터키에 압력 가함
1853. 5. 4. 술탄 칙령
성지보호권을 가톨릭과 정교에게 분배조치
1853. 6. 러시아가 몰다비아, 왈라키아를 불법점령
이에 영·불 함대는 베시카灣에 진주
1853. 7. 28. 비엔나 각서
오스트리아가 중개역할을 하여 작성, 내용: 술탄이 자발적으로 기독교 보호, 그러나 러시아가
이를 거부
크리미아 전쟁외교
1853. 10. 4. 터키 러시아에 宣戰
1854. 1. 영·불함대 흑해 진입
1854. 2. 27. 영·불, 러의 몰다비아, 왈라키아서의 철수 요구
1854. 3. 영·불, 러에 선전
1854. 4.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동맹
露·制에 상호협조. 영토상호보장→유사시 프로이센을 잡아두려는 오스트리아의 의도
1854. 6. 오스트리아·터키 조약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압력을 가하여 두 공국 몰다비아, 왈라키아에서 철수토록 한 후 터키의
동의하에 이 지역을 잠정적으로 점령하게 됨
1854. 8. 8. 비엔나 4조 (英·佛·墺)
장차 러시아와의 협상의 기초.
내용: 양 공국을 유럽 열강의 공동 관리. 다뉴브강 자유항행. 1841년의 해협협정 개정. 유럽 열
강이 터키 내의 기독교도를 공동보호
1854. 9. 영·불의 크리미아 상륙
선전포고 후 수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戰場을 결정하여 전쟁을 개시하는 구식전쟁의 마지막 예
1855. 2. 독일연방의회 동원을 거부
프로이센이 주로 작용한 결과, 普·墺동맹을 사실상 무효화시킴
1854. 12. 2. 墺·英·佛 동맹
오스트리아의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지배를 인정해주고 영·불이 오스트리아를 자기 진영에 끌
어들인 것임.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동원령 발동 이상의 행동은 결코 취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볼 때 러시아는 물론 영·불에게도 반감을 사게됨
1855. 1. 26. 사르디니아 참전
1855. 1. 러시아의 짜르, 비엔나 4개조를 수락할 의사표명
1855. 3. 니콜라이 1세 사망
1855. 9. 세비스토플 함락
1855. 12.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수락
파리회의
1856. 2. 25∼3. 30. 파리회의
비엔나 4개조가 결정의 기초가 됨. 내용: 戰前상태의 회복(단, 러시아의 베사라비아는 몰다비아
에 포합되도록 변경) 터키가 유럽협조체제에 가입. 다뉴브의 국제하천화. 흑해의 비무장화. 터키
내의 기독교도의 보호권을 열강이 공동행사. 몰다비아, 왈라키아, 세르비아의 특권과 터키의 주
권하의 자치인정
1856. 4. 15. 英·佛·墺조약
터키에 대한 침략을 Casus belli(전쟁개시원인)로 간주하거나 3국이 이에 대해 협의.
1856. 4. 16. 파리선언
해상법 要義를 확정하는 선언
이탈리아 통일
프랑스·사르디니아 관계
1852. 카부르 사르디니아 수상에 취임
19C영국식 자유주의 추종. 근대정책화 추진. 초기 카부르는 이탈리아 반도 통일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다만 사르디니아의 확장·발전이 제1 관심사였으나 국제정치의
와중에서 통일가능성이 보이자 이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 통일 완성한 것임
1858. 1. 오르시니 사건
이탈리아인의 나폴레옹 3세 부부 저격미수 사건.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 민족주의가 더
욱 프랑스의 관심을 끌게 됨
1858. 7. 20. 플롤비에르 밀약(카부르와 나폴레옹 3세)
이탈리아 반도를 4개의 단위체로 구성키로 합의: 사르디니아, 피에트몬테와 베네치아, 롬바
르디아를 합쳐서 북부 이탈리아 왕국 건설 법왕국 나폴리 왕국 중부 이탈리아 왕국
신설. 프랑스는 니스, 사보이 획득. 단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먼저 도발해야하고 전쟁의 성격은
비자유주의적, 비혁명적이어야 함.
1859. 1.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신년 리셉션
이탈리아 대표에게 선전포고와 같은 暴言
1859. 1. 26. 프랑스·사르디니아 동맹조약 이탈리아 통일전쟁
1859. 4. 23. 오스트리아가 사르디니아에 최후통첩
1859. 5∼6. 파르마, 모데나, 투스카나, 법왕국 등에서 반란 발생
1859. 7. 11. 빌라프랑카 단독강화
나폴레옹 3세와 프란츠 요제프간에 체결. 페쉬에라, 만투아를 제외한 롬바르디아만 사르디니아
에게 넘겨주고 현상유지키로 결정.
1859. 11. 10. 쮜리히 조약
빌라프랑카 결정에 따라서 3국이 강화조약 체결
1859. 8. 투스카나, 로마의회, 피에트몬트와의 합병요구
1860. 1. 카부르 복귀
빌라프랑카 당시 사임했다가 이탈리아 반도 정세가 급변하자 다시 복귀
1860. 3. 24. 투린 조약
일종의 상호교환. 프랑스는 니스와 사보이를 획득하고 대신 사르디니아는 모데나, 파르마, 투스
카나, 로마를 합병.
1860. 4. 시칠리 반란
1860. 5. 5. 가리발디 시칠리 원정
암암리에 카부르로부터 지원받음
1860. 9. 가리발디 나폴리까지 진격
가리발디가 시칠리를 휩쓸고 당시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던 로마까지 공격하려는 태도를 보이
자 카부르는 국제정치에 무감각하고 겁없는 가리발디의 이러한 행동으로 기존에 획득한 지역까
지 잃게될 것을 염려하여 군대를 나폴리에 파병하여 그의 의도를 좌절시킴.
이탈리아 왕국 탄생
1859. 6. 파아머스턴
강력한 사르디니아는 프랑스를 견제하는데 오히려 더 도움이 될것으로 판단하여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 침입할 경우 영국이 이탈리아를 돕겠다고 할 정도로 영국정책변화. 사르디니아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은 국제정치적인 면에서 볼때는 이러한 영국의 정책변화에 힘입은 바가 크
다고 할수 있음.
1861. 5. 17.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
사르디니아의 빅토르 엠마누엘레 2세가 伊왕국 왕이 됨. 프랑스식의 중앙집권제 채택. 1858년
사르디니아헌법을 새로운 伊왕국 헌법으로 채택. 즉 이탈리아의 통일은 사르디니아의 확대형.
1861. 6. 6. 카부르 사망
1864. 9. 佛·伊 협정
1867년 2월까지 프랑스 군대는 로마에서 철수. 대신 이탈리아는 로마의 독립존중→佛·伊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임시 방편
1860년대 非歐洲지역
루마니아 탄생
1857. 3. 墺, 몰다비아·왈라키아에서 철수
철수 후 주민투표에 의해 이 지역의 귀속문제를 결정토록 함
1858. 8. 英·佛 협상
墺 철수 후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합병반대안이 승리하자 佛이 무효를 주장하여 영국과 합의한
것임. 내용: 양 공국은 공동제도는 가지되 분리되어야 함. 이리하여 몰다비아-왈라키아 연합공
국이 건설됨.
1859. 1. 몰다비아, 알렉산드로 쿠짜를 왕으로 추대
1859. 2. 왈라키아, 알렉산드로 쿠짜를 왕으로 추대
1862. 술탄, 양 공국 합병을 승인
루마니아가 건설된 것임.
수에즈 운하
1854. 수에즈 운하 공사시작
1860. 11. 수에즈운하 개통
폴란드 반란
1862. 러시아의 알렉산드 2세, 폴란드에 헌법 재부여
1863. 1. 바르샤바 혁명
1863. 2. 알벤스레벤 협정
비스마르크의 친러 외교정책의 출발점: 普가 반란진압을 도울 의사가 있음을 표명
1863. 나폴레옹 3세 폴란드 동정 결의
만사에 간섭하려하는 나폴레옹 3세의 외교스타일을 보여주는 예
1863년 폴란드 사태는 佛·露 관계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됨
1864. 폴란드 반란 진압
아시아
1858. 영국정부, 인도 정식통합
1855. 페르시아 아프카니스탄의 헤랏 점령
1857. 3. 4. 파리조약
장차 아프칸 분쟁발생 시 영국이 조정자 역할
1853. 7. 페리함대, 일본출현
1854. 3. 31. 가나가와 조약
일본 개국, 시모다 개항, 최혜국대우
1857. 미·일 통상조약
외교관계 수립. 치외법권
1864. 일본왕 조약비준
1868. 명치유신
1851. 태평천국난 시작
1854. 상해세관 외국이 장악
1858. 6. 천진조약
11개 항구 추가개항, 양자강 상류 출입허가, 외국인 墺地진입허용, 치외법권, 공관개설(외교관계
수립)
1860. 북경조약
멕시코 문제
1860. 멕시코에 베니토 후아레스 등장
1861. 10. 英·佛 및 스페인이 멕시코 무력간섭
1862. 영국·스페인은 철수
1863. 6. 프랑스, 멕시토시티를 점령하고 멕시밀리안을 세움
1867. 6. 멕시밀리안 정부 붕괴
이는 미국의 佛軍 철수주장에 프랑스가 굴복한 결과로 먼로선언이 처음으로 실천된 것임.
독일 통일
비스마르크 등장
1852. 관세동맹(Zollverein)완성
1862. 佛·普통상조약
1858. 빌헬름 1세가 섭정으로 등장
보수주의 정치 실시(1861년에는 왕이 됨)
1862. 9. 비스마르크 등장
프로이센 융커(대지주)출신의 극단적 보수주의자, 당시 독일통일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
었기 때문에 수상이 되기 전까지는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고유성을 잃을까봐 통일에 반대해
왔음. 그러나 駐佛·駐露 공사시절에 견해를 바꾸어 墺를 연방에서 몰아내고 南獨에서 프랑스
세력을 말소시킨 후 궁극적으로는 독일통일까지 완성하려고 생각하게 됨.
덴마크 문제
1862. 9. 영국의 럿셀이 덴마크 문제 조정제의
그러나 덴마크가 반대
1862. 7. 3. 파머스턴, 덴마크 중요성 강조
덴마크가 이를 과잉해석
1863. 3. 프리드리히 7세, 슐레스비히 합병조치
1863. 7. 독일연방의회, 3월 칙령취소요구
1863. 11. 프리드리히 사망
그뤽스부르크(크리스티안 9세)가 즉위
1863. 12. 연방의 작소니, 하노버에서 덴마크에 대해 宣戰토록 명령
1864. 1. 普·墺공동개입
비스마르크가 후에 일을 만들기 위해 墺를 끌러들인 것임
1864. 10. 비엔나 조약
비스마르크는 조약문구를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라우엔부르크는 墺·普가 공동지배한다'라고만
하여 지역분할을 둘러싸고 후에 문제를 발생시키려고 의도
1865. 8. 14. 가쉬타인 협정
홀스타인은 墺, 슐레스비히, 라우엔부르크는 普가 지배토록 결정. 이렇게 하여 墺는 普를 지나
서 홀스타인을 지배해야하는 상황이 됨
普·墺전쟁
1865. 10. 비아리츠 밀담
비스마르크, 普·墺 戰時 나폴레옹 3세의 중립을 보장받음
1866. 4. 6. 普·伊동맹
나폴레옹 3세가 중재, 베네치아를 伊에 약속, 대신 伊는 對墺戰에 참전
1866. 4. 9. 프로이센이 연방개조 제안
전쟁을 발발키 위한 구실
1866. 6. 홀스타인 의회 소집
普는 이것이 가쉬타인 협정위반이라 하여 홀스타인에 파병
1866. 6. 14. Bund(독일연방의회), 프로이센 비난
1866. 6. 17. 오스트리아 宣戰
1866. 6. 18. 프로이센 宣戰
1866. 7. 3. 쾨니히그래쯔 전투
普의 승리를 결정지은 전투
1866. 7. 26. 니콜스부르크 예비조약
1866. 8. 23. 프라하 조약
墺는 독일연방의 해체를 승인. 伊는 베네치아 획득, 배상금·영토상실 無. 비스마르크는 對墺戰
의 목적을 정치적인 면에만 제한하였던 것임.
普·佛의 대립
1866. 7. 5. 佛閣議 불간섭 결정
당시 프랑스의 외교는 뇌물정치라 지칭될 정도로 비효율적인 것이었음. 벨기에를 佛에 준다면
普가 南獨을 합병해도 좋다는 내용에 베네데테 문서도 이 당시에 만들어진 것임.
1867. 3. 和王, 룩셈부르크 매각계획 발표
그러나 普가 반대하여 나폴레옹 3세의 계획실패. 대신 普는 룩셈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
대를 철수시킴.
1867. 5. 런던회의
룩셈부르크 영세중립화: 이러한 상황에서 普·佛충돌가능성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임
1868. 3. 普·露협정
露가 普·佛 戰時 墺를 견제해 주겠다고 약속
1867. 4. 佛, 墺에 공격동맹제의
그러나 반응이 신통치 않음
1867. 8. 프란츠 요제프, 나폴레옹 3세와 짤스부르크 회담
오히려 멕시코 문제가 거론됨
1867. 가리발디의 로마공격
1869. 9. 墺·佛 동맹협상 결렬
1869. 1. 벨기에 철도사건
佛이 매입하려 했으나 英의 반대로 실패
1868. 관세의회 형성
남독일 지역도 고나세 동맹에 가입한 결과임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
1868. 스페인 혁명
이사벨라 여왕 피신. 입헌군주제 실시를 선포하고 호엔촐레른 왕가의 레오폴드를 왕으로 지명
1870. 5. 레오폴드 수락
1870. 7. 12. 레오폴드 취서선언
1870. 7. 13. 앰스 전보
장차 상기와 같은 사태가 없을 것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베네데티와 앰스에서 휴양하고 있던
빌헬름왕과 나폴레옹 3세 사이의 대화보고서를 양국간의 국민감정을 고조하게끔 각색하여 비스
마르크가 발표.
普·佛전쟁과 독일제국 탄생
1870. 7. 19. 佛이 宣戰
1870. 7. 25. 비스마르크, 런던타임즈에 베네데티 조약안 발표
벨기에에 대한 프랑스의 야심을 염려하는 영국을 잡아두는 효과
1870. 8. 글래드스톤(英), 벨기에의 중립보장을 재확인
1870. 9. 2. 세당 전투
나폴레옹 3세까지 포로가 됨.
1870. 10. 20. 露, 파리조약의 흑해 비무장화조항 폐기
1871. 1. 런던해협 회의
러시아의 단독선언 인정
1871. 8. 이탈리아 로마점령
1871. 10. 2. 로마 주민투표실시
이탈리아의 로마합병을 찬성
1871. 1. 28. 베르사이유 휴전
1871. 5. 10.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
全 알사스·로렌 일부를 독일이 차지. 배상금 50억 프랑 지불. 이 조약에 규정된 영토문제 때문
에 향후 獨·佛간 관계정상화는 불가능해짐
1871. 1. 18. 독일제국 선포
프랑스의 베르사이유궁에서 선포식 거행
cf)베르사이유궁은 1919. 6. 28의 독일제국 해체식 장소이기도 함
비스마르크 시대
제1차 삼제동맹
1871. 오스트리아에 안드라시 등장
오스트리아는 1867년 이후 墺·헝가리의 이중 군주제로서 존속하여 왔으나 안드라시의 등장으
로 독일과 연결될 가능성 고조.
1872. 빌헬름 1세가 프란츠 요제프 방문
1872. 9. 베를린 3자회담
러시아의 알렉산드 2세가 베를린으로 墺·獨황제들을 방문.
1873. 5. 獨·露 군사협정
내용: 공격당하면 20만을 동원하여 상호원조
1873. 6. 墺·露 정치협정
발칸반도에 문제발생시 상호협조
1873. 10. 제1차 삼제동맹
독일이 墺·露간 정치협정에 가입함으로써 제1차 삼제동맹 성립
의의: 墺 ·露간에 발칸을 둘러싼 분쟁을 피하기 위한 사전협의. 일반적인 의미의 동맹은 아님
1873. 프랑스 外相으로 데카제 등장
50억 프랑의 배상금 완불
러시아·터키 전쟁과 베를린 회의
1875. 7. 보스니아에서 反土叛亂 발발
이를 터키가 강력히 진압하자 墺가 이에 대해 중재자로 나섬
1875. 12. 30. 안드라시 각서(Andrassy Note)
반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개혁안. 동시에 술탄이 이를 수락토록 하기 위해 열강이 터키에 압력
을 가하자고 제의. 그러나 영국은 문제의 지역이 문명권 밖이라 하여 반대. 이렇게 되자 터키는
민족주의를 내걸고 열강의 압력을 거부.
1876. 5. 압둘 아지즈 암살
어린나이의 무라드 5세가 승계
1876. 6. 세르비아, 몬테니그로 폭동
이런 와중에서도 영국이 계속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자 터키는 더욱 강력히 나오게 되고 墺·
露는 단독행동을 시작하는 등 사태 악화
1876. 7. 8. 라이히슈타트(Reichstadt)협정(墺·露)
터키가 승리할 경우는 현상유지를 위해 터키에 압력을 가하고 세르비아가 승리하면 발칸에 큰
변화를 초래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결정
1876. 12. 콘스탄티노플 회의
戰時 터키의 야만적 행동에 유럽의 여론이 비등하게 되자 영국이 제의하여 개최하였으나 터키
가 회피적인 태도를 보여 별 성과 없이 끝남.
1877. 1. 15. 부다페스트 협정(墺·露)
露·土 전쟁시 墺는 중립을 유지하거나 열강들의 공동조정을 반대하고 대신 보스니아·헤르체
고비나를 획득하도록 결정
1877. 4. 터키, 런던 공동의정서 거부
이로써 전쟁을 피할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잠
1877. 4. 24. 러시아, 터키에 宣戰
1878. 2. 영국함대 콘스탄티노플 출현
프레브나가 깨지고 터키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뒤늦게 영국이 강력하게 대처
1878. 3. 3. 산 스테파노 조약(露·土)
러시아가 도브르자와 흑해 동부지역을 획득. 배상금은 3억 루블. 흑해로부터 마케도니아, 살로
니카를 포함하는 확대된 불가리아 건설. 세르비아, 몬테니그로는 확대시켜 완전독립.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露·墺의 공동감시하에 자치.
특기점: 터키의 궁극적 운명에 대한 언급이 없음. 墺·露간 부다페스트 협정의 내용과 상치.
1878. 6. 13.∼7. 13. 베를린 회의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 결덩됐던 불가리아의 영토를 불가리아, 東루멜리아, 마케도니아로 삼분하
도록 결정.
불가리아는 기독교도가 통치하는 자치국으로서 술탄(터키제국의 왕)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결정
(1908년에 독립). 東루멜리아도 터키 주권하에 기독교도 총독이 통치하는 자치국. 마케도니아는
터키의 절대적인 주권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주권은 술탄에 있으나 잠정적으로 墺가 점
령, 행정지도. 노브비바사르에도 墺군대 주둔. 露는 루마니아에 도브루자를 주고 대신 베사라비
아를 획득. 루마니아는 완전독립.
의의: 이 회의의 결정으로 유럽 내의 영토문제는 모두 해결되어 열강의 관심이 해외식민지로
집중되기 시작.
영향 및 결과: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사이에 적대감 조성. 露의 독일에 대한 불만으로 1차 삼제
동맹 붕괴.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아무것도 획득치 못함.
1878. 6. 8. 영·터키 방위동맹
영국이 키프로스를 잠정적으로 점령
1879. 4. 墺·터키 협정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잠정적인 점령행정을 정식으로 인정. 그러나 그
기간은 명시치 않음(1908년 墺의 합병시까지 이러한 상태 지속)
비스마르크 동맹체제(1879∼1882)
獨·墺동맹
(1) 배경: 비스마르크는 獨·墺·露 3국의 연결을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하였으나 베를린 회의를
계기로 1차 삼제동맹이 와해되다 다시 露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는 露 자신이 스스로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여 墺와 먼저 손을 잡게 된
것임. 외에 지리적인 면과 인종적인 면도 墺·獨연결에 작용.
(2) 내용(1879. 10. 7. 체결): 露가 체결국중 어느 일방을 공격할 때 타방은 전력원조 獨이
佛의 공격을 받았을 때 墺는 우호적인 중립. 그러나 佛이 露의 지원을 받는 경우라면 墺도 참
전(Casus foederis). 강화조약 체결은 상호협의하에 한다. 유효기간은 5년, 비밀조약. 기한 만
료 1개월 전까지 폐기통고 없으면 3년 더 연장. (동 조약은 양 제국 멸망시까지 존속)
(3) 의의 및 평가: 동 조약은 독일외교정책의 움직일수 없는 주춧돌. 조약 체결시의 비스마르크
의 의도는 구조상 문제점이 많은 墺를 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 보장하여 유럽의 안정을 기하려
는 것이었음. 따라서 동 조약은 墺가 露를 공격할 경우는 배제하고 있는 방어적 성격. 이 조약
으로 비스마르크는 墺와 露 사이에서 조정자로서의 위치 ?보. 그러나 동 조약은 독일 입장에
서 볼 때 자신이 조성하지 않는 제어를 할수 없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음. 즉, 정책도구로서의
선택은 독일이 했으나 비스마르크 후임자들의 운영실수 및 독일 민족주의의 대의명분 때문에
독일이 오히려 墺의 결정에 끌려다니는 결과를 후에 낳게 됨.
제2차 삼제동맹
1774. 7. 10. 쿠츄크 카이나르디 조약
터키, 흑해의 內海國 자격 상실.
露, 크리미아 반도 획득. 러시아 상선은 흑해 자유통항 가능
1833. 웅키아르 스켈레시 조약
러시아의 상선 및 군함 상시 흑해통항 가능. 러시아가 전쟁중일때는 타국에는 해협봉쇄. 동 조
약의 내용이 露가 해협에 대해 추구하는 이상형임.
1841. 런던조약
터키의 해협에 대한 주권 확인. 전함은 평시에는 해협통과 불가. 전시에 해협통항여부는 술탄의
자유재량에 맡김.
1856. 파리조약
흑해 비무장화
1871. 런던조약
흑해 비무장화 폐기. 술탄에 해협개방권 인정
1878. 6. 12. 베를린 선언
평시에는 터키 이외의 전함도 통과가능하나 터키에 불편하다고 인정되면 폐쇄가능. 戰時 전함
통과 여부는 "independent decision of Sultan"에 맡김. 본 선언의 규정이 애매하여 언제라도 영
국이 해협에 간섭할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당시 해협제도에 대해 매우 불만이 많
았음.
1881. 6. 18. 제2차 삼제동맹
해협에서의 불안 때문에 露가 다시 墺·獨에 연결된 것임.
내용: 체약당사국 일방이 제4국과 전쟁시 타당사국들은 우호중립을 유지하고 분쟁의 국지화
를 위해 노력. 체약당사국 1국과 터키와의 전쟁일 경우에도 적용. 단, 이 경우는 전쟁결과에 대해
사전협의 要.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의 墺특권 존중. 터키와 발칸은 현상유지. 터키
해협 폐쇄원칙 확인. 터키는 타국에 해협에서의 특수이익부여 불가. 상기 사항이 준수되지 않으
면 터키가 체약3국에 대해 전쟁을 도발한 것으로 간주. 유효기간은 3년. 체약사실 및 내용
비밀(1918년까지)유지. 동 조약으로 1차 삼제동맹을 대치.
부속문서: 墺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권리 보유. 墺軍이 노브비바사르에 주둔. 발
칸 형상유지. 불가리아의 東루멜리아 합병이 베를린회의 결정 범위내에서 이루어진다면 인
정. 이해관계 충돌시 상호협의. 부속조항도 본조항과 동일한 효력 발휘
1881. 6. 28.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동맹
墺가 세르비아를 지배하는 형태. 세르비아 국민의 대중적 지지보다는 지배자인 밀란公의 개인
적 의견으로 이루어짐.
1883. 10. 30. 오스트리아-루마니아 동맹
루마니아의 露에 대한 반감과 호엔촐레른 출신인 카를公의 개인적 의견이 작용
삼제동맹(Triple Alliance)
1877. 伊 크리스피, 비스마르크에 접근
對佛·制동맹을 제의했으나 비스마르크가 이에 앞서 伊·墺간의 화해를 요구하여 결렬됨.
1881. 5. 프랑스, 튜니지아를 보호국화
이에 대해 영국·독일이 크게 반대치 않고 오히려 지지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伊는 자신의 고립
을 깨닫게 되어 墺·獨에의 연결을 재차 시도.
1882. 5. 20. 삼국동맹 체결
내용: 평화와 우호를 상호 약속. 상대방을 적으로 가상하는 행위 금지. 伊가 佛의 선제공격
을 받으면 墺·獨이 전력원조. 獨이 佛의 공격을 받는 경우에도 적용. 체약국 중 1국 혹은 2
국이 2개국 이상의 비체약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모든 당사국에 전쟁(casus forderis)이 성
립. 체약 1당사국이 비체약 1국과 전쟁시 타당사국들은 상호중립 유지(墺가 露와의 전쟁시
伊의 중립을 확보키 위한 조항) 국제평화가 위협받는 경우 필요한 군사적 조치를 위해 논의.
조약 내용은 물론 체결 사실도 비밀. 유효기간은 5년. 3주 이내에 비엔나에서 비준서 교환.
특기점: Ministerial Declaration
동 조약은 反英的인 성격이 아니다. 伊의 통일은 영국이 지중해 전략으로서 프랑스를 견제할
수단으로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伊는 어떤 경우에도 反英的일수 없는 상황(伊외교의 기본원
칙). 동 협정은 1887년 개정시 삭제됨.
열강의 식민지 경쟁
북아프리카 지역
1881. 5. 바르도(Bardo) 조약
프랑스가 튀니지를 보호국화.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해외팽창을 적극 추진
1876. 국채은행 설치
이집트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 英·佛·伊·墺가 공동 설치. 이로 인해
사실상 이집트에는 이중정부가 성립됨.
1880. 글래드스톤 등장
디즈레일리의 후임. 강제조치 사용을 매우 싫어하는 성격
1882. 1. 프레이시네(佛) 등장
공화주의적인 강베타의 후임
1882. 9. 영국, 이집트 점령
이집트에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자 영·불이 공동개입하려 하였으나 佛의회의 공동개입안 거
부로 영국이 단독으로 에디오피아에 간섭하여 점령
기타 아시아·아프리카 지역
영국 : 정부에 의한 계획된 팽창이라기 보다는 상인 및 선교사가 먼저 진출하여 발생된 이익 및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가 진출하는 형. 이집트(1881), 英領 소말리아(1884), 나이지리아
(1886), 英領 동아프리카(1889), 아프카니스탄(1885), 뉴기니아(1883), 피지(1874), 북보르네오
(1888).
프랑스 : 정부가 군사력을 앞세워 식민지 개발을 적극 추진. 알제리(1890), 아이보리코스트(1883),
다호메이(1890), 콩고(1875∼92), 마다카스카르(1895∼6), 안남(1874).
러시아 :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토팽창 의욕이 강렬, 부동항 추구. 투르키
스탄(1879, 淸과 리다비아 조약), 1881년 伊·梨조약
墺-헝가리 제국 : 발칸에만 집착
독일 : 통일 직후에는 식민지 활동이 독일국력만 분산시키고 필요없는 전쟁의 원인이 될것이라
생각했으나 독일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그리고 식민지가 열강과의 외교에 도움이 될것이라는
관념의 변화에 따라 해외팽창 시작. 동아프리카(1886), 서남아프리카(1884), 카메룬(1884), 토고
랜드(1884), 산동반도(1898).
이탈리아 : 伊의 식민지 정책은 찌꺼기 수거작업이다(뭇솔리니). 에리트리아 지역(1882∼1885), 소
말리아(1889).
베를린 식민회의와 콩고
1884. 11∼1885. 2. 베를린 식민회의
식민지 경쟁과정에서 생기는 불화를 조정하기 위한 회의. 점령의 효과 및 통고의무, 연안지역
점령으로 인한 배후지 문제 등을 결정.
1885. 콩고 건설
베를린 의정서에서 열강은 콩고 건설을 승인하고 벨기에 왕인 레오폴드를 개인자격으로서 콩고
왕으로 인정. 동 의정서에서에서 콩고의 개방정책을 선언.
1908. 벨기에 콩고 인수
콩고 재정이 궁핍해지자 개인으로서의 레오폴드가 벨기에로부터 2,500만 프랑을 빌어쓰고 대신
벨기에가 콩고를 상속하기로 결정한 것임.
비스마르크 체제의 붕괴
블랑제 선풍
1885. 5. 페리 실각
1885. 10. 프랑스 선거
민족주의 열기 노출
1886. 5. 블랑제, 프랑스 국방장관으로 등장
對獨 복수전을 주장하는 우파의 상징적 지도자
1887. 5. 블랑제 해임됨
불가리아 사태
1885. 7. 18. 東루멜리아에 반란
1885. 9. 19. 불가리아, 동루멜리아에 宣戰
1885. 11. 세르비아, 불가리아에 宣戰
세르비아가 불가리아의 확대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것.
불가리아가 승리.
당시 墺가 세르비아를 지원.(동맹관계)
동 사건의 결과 : 제2차 삼제국동맹 붕괴
1886. 4. 열강 공동간섭
양국을 人的同君 연합의 형태로 결정(불가리아 황태자가 동루멜리아 총독을 겸임토록 결정)
1886. 8. 불가리아, 알렉산드 피납
親露군부의 소행
1886. 11. 불가리아, 露관계 단절
1887. 3. 獨, 군비법안 통과
삼국동맹과 지중해 협정
1887. 2. 20. 삼국동맹 개정
3개 문서로 구성: 1882년 조약, 伊·獨조약, 伊·墺조약
獨·伊조약: 트리폴리, 모로코 등지에서 프랑스 행동에 기인하여 伊·佛간 전쟁이 발발하면 獨
이 伊지원. 전시 伊의 佛본토에 대한 영토요구도 인정→獨이 伊의 공격적 태도를 지지.
伊·墺조약: 발칸의 현상유지 및 상호보상원칙 인정→墺가 伊의 진출을 묵인.
의의: 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유지키 위해 墺·獨이 양보.
특기사항: 동 개정조약에는 1882년 당시의 만치니 선언과 같은 성격의 규정 無(당시 영국과 삼
국동맹은 우호적 관계)
1887. 1. 26. 로빌란 각서
지중해 협정의 기초
내용: 지중해·아드리아해·에게해 및 흑해에서 현상유지. 이집트에서 영국의 지위와 리비아에
서의 프랑스 지위의 상호 지지. 프랑스와의 상호원조.
1887. 2. 12. 1차 지중해 협정
지중해 현상유지에 공동 보조. 이탈리아가 제의한 對佛戰時 상호지원은 영국이 거부. 동 협정이
있었기 때문에 삼국동맹 개정조약에는 1882년 조약에 있었던 성격의 선언이 불필요했던 것임.
1887. 3. 24. 墺·英협정
伊·英협정과 유사한 내용.
흑해와 에게해를 특히 취급.
1887. 5. 4. 伊·스페인 협정
이로써 伊·英·墺·스페인 4국간의 지중해 협정 성립
영국이 지중해협정에 응한 이유: 이집트에서 佛의 英에 대한 諸 전쟁 방지 및 러시아의 남하정
책 저지.
특기점: 비스마르크는 직접적으로는 동 협정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이는 그의 작품.
재보장 조약과 제2차 지중해 협정
1887. 6. 18. 재보장 조약
1885년 이후 삼제동맹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비스마르크가 러시아와의 단독조약을 시도한 것임.
내용: 一方이 제3국의 공격을 받으면 他方은 우호중립을 지키고 분쟁의 국지화를 위해 노력. 그
러나 체결 당사국 일방이 제3국에 선제공격을 가한 경우(露가 墺를, 獨이 佛을 공격한 경우)
에는 비적용. 露의 불가리아 및 동루멜리아에서의 탁월한 지위 인정. 발칸 현상유지 확인.
터키해협에서의 러시아 권리 지지(해협폐쇄의 원칙 지지). 유효기간은 3년.
의의: 동 조약은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화·안전을 위한 것. 동 조약은 지중해 협정과 모
순됨. 비스마르크 외교의 절정.
1887. 7. 불가리아 의회, 작스-코부르크의 페르디난드를 왕으로 추대.
이로 인해 러시아가 일시적으로 獨·墺를 의심.
1887. 8. 이탈리아의 크리스피 등장
수상, 외무장관. 가리발디적 전통. 권위주의 정치, 프랑스를 매우 의심.
1887. 10. 비스마르크, 크리스피 회담
墺지지는 獨외교정책의 변할수 없는 기본이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재보장조약으로서 러시아
에게 해협에서의 지위를 인정했었으나 墺·露의 충돌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露행동의 제어장
치 형성을 원했었고 이 수단으로서 伊가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
1887. 12. 12. 제2차 지중해 협정
비스마르크의 조정이 주효해서 英·墺간의 각서교환형식으로 체결하고 후에 이탈리아가 추가
서명.
내용: 평화유지 발칸 현상유지 발칸지역의 지방자치 협정(동 지역간섭 금지) 터키 독
립, 해협 자유 불가리아에 대한 터키 주권 인정 사태발생시 터키가 대처하지 못하면 상
호협의 터키가 불법행위를 응락한 경우는 터키 영토일부 점령 가능 동 협정 내용은 비밀.
의의: 비스마르크 외교기술의 극치. 즉 재보장조약에서는 露지지를 약속하고 한편으로는 타국으
로 하여금 露의 야망을 저지하도록 조작. 영국과 독일은 방법상 차이는 있었지만 양국 특히
발칸에서의 현상유지와 평화를 원했던 것임.
1888. 2. 3. 墺·獨조약 공표
비스마르크 퇴진
1888. 1. 獨·伊군사협정
獨佛戰爭時 알프스에서는 주로 이탈리아가 전투수행하고 라인에까지 伊병력 일부 파병토록 결
정
1888. 伊·佛 관세경쟁
이 결과 프랑스 자본의 이탈리아 유입이 중단됨. 후에 佛·露관계호전에 따라 프랑스 자본이
러시아에 유입되게 되는 동기.
1888. 3. 9. 빌헬름 1세 서거
프레드릭이 승계했으나 3개월 후 사망.
1888. 7. 빌헬름 2세 등장
행동 패턴이 불규칙적인 인물. 신흥국가로서의 獨의 팽창을 억제해 왔던 비스마르크 정책이 무
너지기 시작.
1889. 8. 墺의 프란츠 요제프, 베를린 방문
빌헬름 2세 反露발언: 墺가 군대를 동원하면 독일도 어떠한 경우라도 즉각 동원하여 지원하겠
음.
1889. 11. 빌헬름 2세 터키 방문
독일의 오토만 지역에서의 관심이 점점 증대하고 있고 직접적임을 보여줌. 이는 露에 대해서는
큰 자극.
1889. 10. 러시아의 알렉산드 3세, 베를린 방문
墺·獨관계와는 달리 성과 없이 끝남. 이러한 상황을 거치면서 露·獨관계는 공연히 냉각되기
시작.
1889. 1. 비스마르크, 영국의 솔즈베리에 동맹 제의.
영국, 이를 거부. 오히려 제2차 지중해협정과 같이 타국에 의존하는 태도 반성.
1889. 3. 영국 해군증강 법안 통과
영국 국방법 채택: 英 군사력은 英 이외의 가장 강한 2개국의 해군력을 합친 것 보다도 강해야
한다(1921년 워싱턴회의시 포기)
의의: 동 조약으로 제2차 지중해협정이 무의미하게 됨.
1888. 10. 佛, 러시아에 5억프랑 차관제공.
1889. 1. 露, 프랑스에 소총 주문.
露·佛관계는 호전되기 시작.
1890. 3. 비스마르크 사임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급기야는 재보정조약의 거부로까지 파급됨. 즉,
순수한 국내문제가 국제조약에 영향을 미친것임. 비스마르크 사임은 유럽 역사의 중요한 전환
점. 그의 후임으로 카프리비와 프리드리히 폰 홀쉬타인이 등장.
열강세력 재조정기(1890∼1904)
露·佛 동맹
양국간의 상호교환: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덴마크 연안의 헬고란트와 아프리카의 獨점령 섬 잔
지바의 교환. 동 협정은 露·佛을 크게 자극시킴.
1891. 1. 31. 伊의 루디니 등장
크리스피의 후임. 親佛인사
1891. 5. 6. 삼국동맹 개정
기존의 3조약을 큰 수정 없이 통합
추가사항: 키레나이카, 트리폴리, 튀니지에서 伊가 행동하고자 할 때 독일과 사전협의 한다면
독일이 지지.
부속의정서: 영국은 제2차 지중해협정에서 터키 국경에 관해 동의했던 바 그 동의는 동 개정조
약의 추가사항인 북아프리카까지 미치는 것으로 해석.
1890. 8. 4. 솔즈베리·크리스피 각서
동 각서에서 영국은 지중해협정의 연장을 거부했던 바 삼국동맹 개정조약의 부속의정서는 사실
상 효력이 없는 문서였음.
1891. 7. 27. 루디니 의회연설
상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삼국동맹과 협력관계에 있다고 발언.
1891. 8. 27. 露·佛각서 교환
내용: 양국간의 진정한 이해와 평화의 유지를 위해 일반적인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사태에
대해 협의 양국 중 1국이 공격 위협하에 놓이면 즉각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협의.
의의: 사태가 발생하면 협의한다는 사전합의에 지나지 않지만 양국간 일반적 관계호전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
1891. 7. 23. 佛함대, 露의 크론슈타트 방문
당시 러시아 국내에서는 금지곡이었던 프랑스 국가 연주 허용.
1892. 8. 17. 露·佛군사협정
내용: 佛이 獨 혹은 獨의 지원을 받아 伊의 공격에 처하게 되면 露는 총력을 다해 獨을 공격.
또 露가 독일 혹은 지원하의 墺의 공격을 받는 경우에는 佛이 마찬가지로 공격 삼국동맹
소속의 어느 1국이라도 군대를 동원하면 양국은 합의없이 즉각적으로 군대를 동원 사태시
佛은 130만, 露는 70∼80만 동원 삼국동맹국들의 군사상황에 대한 정보교류 戰時 단독강
화 금지 삼국동맹과 유효기간을 같이한다 모든 조항 비밀(1918년 레닌이 필요할 때까지
비밀이 유지됨)
의의: 露·佛동맹은 유럽관계에서 중요한 이정표. 삼국동맹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 露·불 특히
프랑스에게 이 조약은 고립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 타지역에서의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규정
치 않아 러시아가 프랑스에 기대할수 있는 것은 조약의 구문에 의한는 것이라기 보다는 양국
간 우호관계에 대한 佛의 일반적 태도에 달린 상황. 독일에 대한 두려움 이외에는 공동 관심
점이 없는 조약. 양국간에는 政體上의 이념적 차이, 즉 공화국과 왕국이라는 불화합 요소가
있는 상태.
1892. 11. 독일 군사력 증강법안 통과
슐리펜이 독일군 사령관으로 등장
1893. 10. 러시아 함대, 프랑스의 투롱기지 방문
1893. 12. 27. 露 외무장관, 駐露佛 大使에 각서
1892년 군사협정을 수정없이 발효시킬 것을 요망.
당시 프랑스는 의회정치체제였으므로 조약의 정식비준을 위해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였으나
군사동맹의 성격상 비밀유지가 절대 필요하여 외무장관간의 각서교환형식을 빌어 조약의 효력
을 발생케 하는 방법채택.
1894. 1. 4. 露·佛동맹 효력 발생
제국주의 경쟁 및 영국의 고립
아프리카 문제
1895. 3. 영국, 프랑스의 나일강 탐험을 비난
1895. 11. 프랑스의 하노트, 탐험 강행
영국이 이집트를 단독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이집트 문제를 국제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
1889. 10. 29. 콘스탄티노플 협정
수에즈운하 자유통항에 관한 협정. 영국이 교전국인 경우에는 영국이 관리권을 갖고 폐쇄할수
있도록 규정.
1895. 12. 제임슨 기습
트랜스발에 내란을 일으켜 이를 구실로 간섭하려던 영국의 계획. 그러나 실패.
1896. 1. 3. 크루거 전문
독일이 제임슨 기습 실패에 대해 트랜스발 대통령이 크루거에 보낸 축전문제는 국제회의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
독일 외교정책방향: 세계 곳곳에서 反英정책을 추구하여 영국이 고립감을 느낀 나머지 삼국동
맹측과 제휴하도록 의도.
지중해 문제
1895. 6. 영국의 솔즈베리, 오토만 분배 제의
방법상 문제로 실패.
1896. 5.
기독교도의 반란이었고 그리스가 동조
1897. 4. 터키·그리스 전쟁
그리스가 패배. 그러나 열강의 간섭으로 배상금 물지않음.
1898. 5. 7. 크레타 자치 획득
역강 간섭결과
1897. 5. 8. 墺, 각서 전달
내용: 현 유럽의 현상유지 인정. 墺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 인정. 알바니아 독립. 기타
발칸 지역은 양국 합의에 따라 균형유지
1897. 5. 17. 露·무라비에프의 회답각서
내용: 발칸 현상유지에는 동조. 그 외 사항은 유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露·墺 양국간에 모호성은 있었지만 잠정적인 발칸문제 동결합의 도
달
특기점: 당시 露는 극동문제로 발칸에 관심 소원
1896. 3. 1. 아도아 전쟁
伊가 이디오피아의 전쟁에서 패비. 이 결과로 크리스피 퇴진, 伊의 무력 노출.
의의: 영국, 伊 를 수단에서의 佛 견제로 이용하려 했던 계획을 수정하고 이후 직접 佛과
대립하게 됨.
1896. 3. 영국, 수단재점령 결정
이를 위해 키치너 파견
파쇼다 사건
1898. 9. 파쇼다 대결
英: 키치너를 파견하여 10년 전에 포기했던 수단 정복 재시도.
佛: 이집트문제 국제화를 위해 마르샹을 가봉에서 출발시켜 나일까지 행진토록 조치.
상기양자가 수단의 파쇼다에서 대립케 된 것임.
당시 키치너는 마르샹에서 후퇴를 요구했으나 마르썅은 이를 거절했었음.
영국의 비협조적 태도로 전쟁의 긴장감마저 돌던 상황.
1896. 6. 佛· 델카세 등장 (1905)
1898. 11. 4. 델카세, 영국에 굴복키로 결정
이유: 佛이 영국, 독일 양구을 상대로 동시에 대항할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
1899. 3. 영국 佛협정
북아프리카 및 나일강 유역에서의 양국 영향력 범위결정.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1893. 영국, 프랑스 태국에서 대립
이때도 독일은 프랑스를 지지
1894. 9. 청일전쟁
일본이 승리
1895. 4. 하관조약
청의 對韓 종주권 종식. 일본, 여순·대련 및 요동반도 획득.
1895. 4. 삼국간섭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일본에 알벽을 가하여, 대련·여순 및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토록함.
배경: 러시아로서는 일본의 중국 본토진출은 큰 위협, 프랑스는 동맹국, 독일은 러시아의 관심
을 극동에 쏟게 하여 유럽 및 발칸에서 행동자유를 얻기 위해 삼국간섭에 가담한 것.
1896. 5. 러시아, 청 우호동맹
日에 대항하는 성격
1897. 11. 독일, 익주만 조차
1898. 3. 영국, 독일, 청에 차관
1898. 3. 27 러시아, 여순 및 대련조차
이때 대항하여 영국도 러시아가 상기 2개 항구를 조차하는 기간만큼 조차한다는
조건으로 威海衛 차지, 또, 프랑스는 광주만을 차지.
영국의 고립 再考時期
영·獨관계(1898∼1901)
1897. 7. 獨, 뷜로우 외무장관 등장
빌헬름 2세와 함께 새로운 독일의 정책-새로운 진로와 세계정책을 추진. 유럽열강 제국주의의
불화를 이용하여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누리려 의도.
1898. 9. 23. 독일, 제1차 해군법안
독일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티르피크 등장-우리의 미래는 바다에 달려 있다.- 당시 독일의
군사력은 공격적인 의도라기 보다는 국력의 과시 혹은 외교정책의 수단.
1898. 3. 29. 英, 獨의 수비동맹 제의
당시 식민상이었던 체임벌린이 혈영적 유사성을 들고 獨(튜튼족)과의 연결을 주장하여 駐英獨
大使인 핫츠펠트에게 제의.
실패이유: 영국이 러시아에게도 같은 시기에 동맹제의한 사실이 탄로 보어전쟁으로 영국에
대한 세계여론 악화 영국과 러시아 및 프랑스와의 동맹은 불가능하므로 영국과의 동맹을
체결하려면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독일의 여유있는 태도 평시에
어느나라에 대해서나 단언적인 지지선언을 꺼리는 영국의 전통적 태도
1898. 8. 30. 英·獨협정
동맹체결에는 실패하고 협정체결에 그침. 장차 발생 가능성이 있는 포르투갈의 남아프리카 식
민지 분배에 대한 협정.
내용: 포르투갈링 식민지 관리를 위해 차관을 요구하면 공동으로 대부해주고 대신 남아프리카
분할에 공동 행동
1899. 10. 14. 윈슨조약
당시 진행중이던 보어전쟁에 포르투갈 식민지를 통해 보어인에 대한 전쟁물자 공급금지를 위해
영국이 포르투갈과 체결.
사전에 독일에 통고하지 않아 독일의 영국에 대한 의심이 더욱 증가되는 계기
1897. 英, 밀너를 남아프리카에 파견
크루거 대통령과 교섭 실패
1898. 크루거 대통령 재선
1899. 보어전쟁 시작
1900. 2. 英, 레이디스미스와 킬버리 점령
영국이 몰리고 있다 이를 계기로 전세역전.
1900. 10. 英, 트랜스발 합병선언
게릴라전 때문에 사실상의 합병은 1902년에야 이루어짐.
1902. 5. 베레닝 강화조약
보어전쟁의 결과: 전세계의 反英여론 팽배, 英육군의 위약상태 노출.
1899. 11. 빌헬름 2세, 뷜로우 英 방문
1899. 11. 30. 체임벌린, 레이체스터 연설
튜튼과 앵글로-색슨 민족간의 유사성을 주장하며 美英獨의 삼국동맹을 제의.
1899. 12. 11. 뷜로우, 상시제의 거부
1899. 12. 獨 제2차 해군법안
1901. 1. 1. 빌헬름 2세, 英 빅토리아 여왕 장례식 참석
英·獨동맹의 마지막 기회.
1900. 10. 英·獨 양자강 협정
중국의 독립 및 영토안전
문호개방정책 유지를 규정
동 조약에서의 영국의 의도는 1898년 의회단의 난 이래 증가되고 있는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하
기 위한 것.
1901. 3. 15. 뷜로우, 제국회의 연설
양자강 협정은 만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 즉 독일은 러시아 세력견제에는 관심이 없
다는 것을 표명한 것임.
이러한 독일의 태도에 실망하여 당시 일본까지 동맹에 추가시키려했던 체임벌린은 동맹안을 파
기하여 당시 3차에 걸쳐 시도됐던 英·獨동맹은 실패로 끝남.
1902. 1. 30. 英·日동맹
러시아 견제라는 공동 관심사에서 체결
내용: 일방 당사국이 戰爭時 타방은 중립유지(수비동맹) 일방이 두나라 이상을 상대로 전쟁
케 되면 CASUS FOEDERIS로 간주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우위 인정
의의: 영국 역사상 최초의 고립정책 포기. 그러나 이는 아시아에서만이고 유럽에서는 계속 고립
정책 유지.
열강관계 재정립시기
이탈리아
1896. 5. 삼국동맹기간 연장
1896. 佛·伊협정
기존 삼국동맹체제 내에서 伊가 변화를 시도. 즉 삼국동맹은 유지하면서 對佛관계개선 추구.
튀니지에서 상업적 권리 포함한 伊의 특권 인정. 그러나 사실상 동 협정은 伊가 튀니지에서
佛이 우선권을 가진다는데 동의한 것임.
1898. 佛·伊통상조약
1888년의 관세전쟁으로 伊가 큰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佛과 어쩔수 없이 체결. 상기 두 조약은
伊·佛관계정상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침.
1900. 12. 佛·伊각서교환
당시 프랑스 대사 까미에바레르와 이탈리아 외무장관 비스콘티 베노챠간에 이루어짐.
모로코에서의 伊의 무관심 및 리비아에서의 佛의 무관심 확인
1901. 1. 4. 伊·佛 공식 각서 교환
당시 프랑스 대사 까미에바레르와 伊 외무장관 비스콘티 베노챠간에 이루어짐.
모로코에서의 伊의 무관심 및 리비아에서의 佛의 무관심 확인.
1901. 1. 4. 佛·伊 공식각서 교환
伊는 모로코에서의 佛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인정, 佛은 리비아에서의 伊의 이해관계를 소
극적으로 인정.
의의: 동 협정은 지중해 지역 세력판도에 중요한 수정을 초래함. 즉, 삼국동맹에서 규정한 북아
프리카 조항이 의미를 상실. 동 합의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伊·佛 국교정상화 까지도
가능하게 해준 양국간의 일반적인 우호관계 조성.
1902. 6. 28. 삼국 동맹기간 갱신
伊는 對佛관계개선(伊가 삼국동맹에 가입한 주된 이유는 바로 프랑스)을 추구하면서도 삼국동
맹은 계속 유지하는 상황.
1902. 6. 30. 露·伊협정
내용: 일방이 제3국에 의해 직접적으로 공격을 받을 때 타방은 엄정중립 유지. 양국 중 일
국이 제3국에 선전했을 때도 타국은 중립유지. 이 경우는 사전에 통고가 필요.
의의 및 평가: 이러한 伊의 양면정책이 열강에 의해 용납되었던 것은 伊의 기본적 입장이 수비
적(defensive)이었기 때문. 伊는 열강 중 가장 약국에 속하였기 때문에 이해관계 및 권력관계의
변화에 민첩하게 움직여야 했던것임. 어쨋든 伊가 여태까지는 삼국동맹에 기울어져 있던 상태
에서 佛에 접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변화.
佛·獨·露 관계
1899. 8. 9. 佛·露 각서교환
델카세가 러시아를 방문하여 무라비예프와 각서교환
내용: 露·佛동맹조약에 규정한 "평화유지(the maintenance of peace)"를 보다 적극적인 의미
인 "평형유지(maintenance of equilibrium)"으로 수정. 군사협정 발효기간을 무기한으로 결정.
의의: 양국동맹관계 강화, 佛은 러시아의 발칸정책 지지, 러시아는 라인에 대한 프랑스의 주장
지지.
1900. 7. 露·佛 참모총장 회의
영국과 전쟁시 군사협력에 관한 의견교환.
1901. 5. 델카세, 러시아 재방문
랍스도르프와 회담하고 상시군사협정 승인.
1898. 8. 러시아의 짜르, 군축을 위한 국제회의 개최 주장.
1899. 5∼7. 헤이그 국제평화회의
상시 짜르의 제의에 반대하는 국가가 없어서 개최했던 것임. 국제법 분야에서는 적지 않은 성
과가 있었으나 실질 문제에 있어서는 별 성과가 없었음. 동 회의 기간 중 독일이 매우 배타적
이고 공격적으로 행동하여 여러 국가들 특히 러시아의 의심을 사게 됨.
1899. 獨, 바그다드-콘스탄티노플 철도 부설권 획득
독일의 오토만에의 이해관계가 심화되기 시작. 露를 당연히 자극하게 됨.
1899. 10. 獨, 빌헬름2세, 오토만 방문
다마스커스(지금 시리아의 수도) 연설시 자신이 이슬람 세계의 보호자라고 자칭.
세르비아 문제
1903. 10. 墺·露황제, 뮈르쯔슈테크 회담
양국 합의하에 술탄에 대한 개혁 권고안 발송.
의의: 墺·露가 문제를 두고 합의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중요. 당시 러시아의 주관심사가 아시
아에 쏠려있었기 때문에 가능. 그러나 발칸에 대한 개혁권고안이 실시되기전에 下記와 같은 술
탄문제 발생으로 실현되지 못함.
1889. 밀란公 퇴위
세르비아의 새로운 왕으로 알렉산드 등장.
밀란公은 국내여론을 무시하면서 親墺정책을 고집해 왔으나 퇴위 후 1901년에 사망하자 세르비
아의 외교정책이 러시아쪽으로 편향되는 조건을 보이기 시작.
1895. 세르비아, 墺와의 동맹(1881. 6. 28. 체결) 폐기
1903. 6. 10. 세르비아 폭동
알렉산드의 폭정이 원인. 이 결과 오브레노빅 왕가가 망하고 카라게오르게빅 왕가가 등장하여
피터가 왕위에 오르고 과격파 Rosic이 정권장악.
의의: 동 사건을 분기점으로 세르비아의 대외정책은 완전히 露에 편향되게 되었고 이는 또한
열강간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침.
英·佛 협상
1901. 1. 영국, 에드워드 7세 등극
빅토리아 여왕의 계승자로 親佛的 성향
1902. 8. 델카세 對英 접촉 시작
델카세의 기본정책은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강화에 잇었고 이를 위해 그는 제국주의 팽창을 적
극추진.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그는 1902. 6. 伊·佛협약 체결후에 영국에 접근하여 모로코
문제를 제기한 것임.
1903. 英 에드워드 7세와 佛 루베르 대통령 상호방문
1904. 4. 8. 英·佛 협상 체결
내용: 프랑스의 뉴퐁드랑 어업권 양보에 대한 아프리카 대양의 보상 규정.
모로코는 원칙적으로 프랑스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 그러나 영국의 기득권리는 인정. 모로코에
서의 스페인의 이해도 고려(당시 스페인은 영국에 지브롤터 해군기지를 제공하는 등 매우 영국
에 우호적이었음)
의의 및 평가: 정식동맹이 아님. 실질적으로 중요한 내용은 규정하지 않고 식민지에 대한 이해
차이를 없애는 정도 협정으로 표현되는 동 협상이 장차 동맹의 성격을 띨수 있었던 것은 유럽
에서의 정치적 공약을 추구하지 않고 단지 제한적인 식민지 문제해결에만 만족했던 델카세 외
교의 성공으로 평가됨. 露 ·日전쟁의 확전을 불원하는 양국 이해관계의 일치가 동 협상을 촉
진시킨 일면도 있음.
1904. 10. 3. 스페인·프랑스 협정
스페인이 英·佛협상 승인. 모로코 분할의 경우, 양국의 할당부분 미리 결정. (영국이 당시 스페
인 영토이던 지브롤터의 전략적 중요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브롤터의 한쪽 연안인 모로코 영토
의 일부는 스페인에 주기 위한 영국의 조치)
독일과 영국 협상
露·日전쟁
1902. 4. 러·청 협약
의화단난 이후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의 3단계 철수를 규정
1903. 8. 러, 비테 사임
러시아의 대외정책이 정치적 협정에 의한 경제적 침투전선에서 보다 공격적 영토 침략으로 변
경하게 됨. 따라서 극동지역에서의 러·일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폭발 직전에 이르게 됨.
1904. 2. 8. 일본, 여순 공격
일본은 모든 전쟁에서 선전포고한 경험이 없음.
1905. 1. 여순 함락
1905. 3. 4. 봉천 함락
1905. 5. 압록강에서 러시아 패배
1905. 5. 발틱함대 패배
런던협정 및 베를린 조약에서 규정된 터키가 戰時가 아니면 타국은 흑해를 통과할 수 없다는
조항 및 당시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日 해군에 대항키 위해
지구 반을 돌아왔으나 대한해협에서 일본에 패배당한 것임.
1905. 9. 5. 포츠머드 강화조약
당시 美 대통령 데오도르 루즈벨트의 Good Offices 주효
내용: 日이 사할린 및 랴오뚱 반도 획득. 한국에서의 日 지위 인정. 露는 만주를 다시 청에 반
환토록 결정
1904. 10. 도거뱅크 사건
발틱함대 항해 도중 영국어선을 일본선으로 잘못 알고 공격을 가하여 동 전쟁이 영·露전쟁으
로 확대될 위기에 처했었으나 프랑스의 중개로 원만히 해결됨.
제1차 모로코 사태
1880. 마드리드 협정
모로코 內의 모든 외국인의 지위 및 기득권 보호를 규정.
당시 모로코가 프랑스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관념일 뿐 기정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프랑
스로서는 英·伊와의 합리적인 상호교환협정처럼 독일과도 같은 성질의 협정이 필요했던 것임.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의 태도에 대해 독일은 英·佛협상의 붕괴 혹은 모로코에서의 더욱 많은
이익 확보를 위해 매우 강경하게 대처.
1905. 3. 독일의 빌헬름 2세, 모로코 방문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어떠한 주장도 인정치 않음을 선언.
동시에 뷜로우는 모로코 문제를 다루기 위한 1880년 마드리드 협정의 모든 서명국 참가하의 국
제회의 개최를 주장.
1905. 5. 1. 英, 上記 독일의 태도에 대한 협상을 델카세에 제의
델카세는 이를 동맹제안으로 오인하여 對獨 강경태도 표명.
1905. 6. 6. 델카세 사임
對獨평화를 주장하는 루비에 대통령이 사임시킴.
이는 獨 외무장관이 프랑스 외상을 해임시킨 것이라 볼수 있는 독일 외교의 커다란 승리. 독일
은 더욱 강경하게 나옴. 반면 영국은 델카세의 사임에 큰 충격을 받아 더욱 親佛的으로 됨.
1905. 7. 24. 러·독 황제, 비욜케 회담
프랑스는 이미 독일의 위험에 굴복한 상태이므로 러·독이 연결되면 독일이 추구하는 대륙동맹
이 완성될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독일황제가 러시아에 동맹을 재차 제의, 이에 러시아는 사전에
프랑스와 협의해야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결렬됨.
1905. 9. 28. 루비에, 독일에 굴복
모로코왕의 명의로 마드리드 협정의 모든 서명국에 초청장을 발송하여 국제회의를 개최키로 결
정.
알헤시라스 회의 개최
1906. 1. 4. 알헤시라스 회의 개최
모로코 재정방문 및 국제경찰군 조직문제가 주된 이슈.
1906. 3. 獨, 墺의 타협안 수락
독일의 비타협적 태도로 오히려 독일이 고립됐든 것임.
1906. 4. 7. 알헤시라스 최종의정서 채택
모로코의 국제적 지위 및 개방정책 확인은 국제회의에서 모로코 문제가 논의됐다는 사실과 함
께 어느정도는 독일외교의 성공으로 볼수 있음. 프랑스는 스페인과 함꼐 모로코에서의 경찰유
지권을 획득함으로써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의 특별한 이해관계가 국제적 승인을 받게 됨.
의의: 동 회의는 모로코 문제의 종식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시작, 즉 모로코를 한낫 열강 제국주
의 정책의 하나의 대상물에 불과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로코가 주요한 유럽분쟁의 실마리가 된
다는 것임. 이러한 독일의 강경외교정책으로 말미암아 영국은 더욱 프랑스를 지지하게 됨.
1905. 11. 英, 신내각 형성
영국의 신내각은 철저한 친불정책을 추진. 모로코 문제를 계기로 고립정책을 완전포기
1906. 1. 3. 영, 그레이 외상. 獨대사 메테르니히에 경고
"영국은 프랑스가 독일과 전쟁을 하게되면 필연적으로 프랑스를 지원할 것임"→사실상 동맹과
같은 발언. 뷜로우는 협상을 시험해보려 하다가 오히려 협상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회의 당시의 비타협적 태도로 외교적 고립까지 맛보게 됨.
삼국협상
영·독 해군경쟁
1904. 영, 북해함대 재배치
1906. 독, 해군증강법안 통과
1907. 1. 1. 크로우 보고서
對獨관계 연구서. 독일 해군증강을 좌시할수 없다고 주장.
1907. 6. 15. 제2차 헤이그 회의
군비축소문제 논의. 영·독간 해군력 경쟁이 중요 논점.
이 회의를 계기로 상호군비증강의 악순환이 시작
영·러 협상
1907. 7. 30. 러·일 협정
양국간 만주 분할지배를 결정. 이로써 러시아가 관련된 극동사태는 인정됨.
1906. 4. 이즈볼스키, 외상으로 등장
람스도르프 후임. 英露협상 체결을 주장. 발칸반도에 관심을 집중.
1907. 8. 31. 英·露협상
내용: 청이 티벳에 대한 종주권 행사.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우월한 지위 인정. 페르시아
를 삼분하여 북부는 러시아, 남부는 영국의 영향권에 두고 중부는 중립화.
의의 및 평가: 양국간의 제국주의 이해관계 조정에만 그친 비정치적 협정. 독일의 이해관계가
없는 곳에서의 양국의 이해조정. 이때부터 독일은 포위감을 느끼기 시작.
보스니아 합병
배경
1906. 墺에 에렌탈 등장
고루코프스키 후임. 墺의 국제적 지위향상 추구. 에렌탈의 등장으로 마찬가지로 해외팽창을 시
도하는 러시아의 이즈볼스키와의 대립
1906. 7. 2. 이즈볼스키의 對墺제안
러시아의 터키해협에 대한 이해 인정. 墺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지지 약속.
1908. 7. 6. 마케도니아 폭동
개혁파들이 진보 동맹위원회를 조직하여 군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터키 민족주의를 주장.
1908. 7. 터키 헌법 공포
1878. 7. 24에 일시적으로 허용했던 헌법, 정교분리, 평등사상 주장
1908. 8∼9. 국회선거
그리스도교와 유태인들이 상당한 의석 차지
1908. 12. 국회 개회
터키內의 이러한 변화로 에렌탈은 합병을 서두르게 됨. 즉 그 당시까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는 명목상 터키의 소유였었고 墺의 30년간의 점령은 잠정적이라는 조건하에 승인되었고 새로
일어난 청년 투르크당이 매우 민족주의적이었기 때문임.
1908. 9. 15. 부클라우 회담
에렌탈과 이즈볼스키의 회담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이즈볼스키가 오스트리아의 에렌탈로부터 구체적인 약속도 없이 합병을
승인하는 것이 되어 장차 오해 혹은 불화가 생길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
합병과 그 결과
1908. 10. 5. 墺,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선언
오스트리아의 동 조치는 1876년 베를린 국제회의의 결정사항을 파기한 것이므로 당연히 열강국
의 관심이 동 사태에 총집중됨.
러: 국제회의 개최 주장
영, 프: 러시아에 동조, 그러나 적극적인 지지는 못함.
독: 墺에 대하여 전폭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원 약속
1901. 3. 독, 러에 최후 통첩
러, 굴복키로 결정
의의 및 평가: 독일이 위협적인 정책을 구사하여 3국동맹과 3국협상과의 대결에서 일방적인 승
리를 거두고 포위를 어느 정도는 탈피. 러시아의 對獨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는 계기. 3국동맹이
원래 의도에 비해 극단적으로 강화됨. 가장 중요한 것은 동 사건을 계기로 3국동맹 내에서의
우위가 독일에서 墺로 넘어갔다는 점. 즉 원래 비스마르크는 유럽평화를 강화하고 오스트리아
의 무모한 행동을 견제하기 위해 독·오 동맹을 체결했던 것인데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가 행
동하면 독일 따르지 않을수 없는 상태가 됨. 즉 독일이 오스트리아에게 "백지수표"를 써준 결
과가 됨.
1909. 프리트융 및 자그레브 재판 사건
南 슬라브족의 민족감정 고조. 결과적으로 합병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행동을 깨뜨리기는 커
녕 오히려 극단적으로 강화시킴.
1909. 3. 30. 세르비아 정부 성명
세르비아는 국민감정은 고조되어 있었으나 러시아의 지원 없이는 어쩔수 없는 상태.
내용: 세르비아는 백림조약 제25조에 의거 열강의 결정에 순은. 합병에 대한 저항 포기. 親墺정
책 추구.
1909. 10. 10. 라꼬니기 협정
이탈리아는 합병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러시아와 조약 체
결.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의 단독행동방지가 공동관심사. 러시아의 해협에 대한 이해 및 이
탈리아의 트리폴리에 대한 이해 상호교차 승인.
열강관계
1908. 10. 28. 데이리테레그라프 사건
영·독 관계에 악영향을 주어 양국해군경쟁을 가속시킴. 독일의 카이저가 회견 당시 독일국민
의 일반적인 반영감정 인정.
1908. 9. 카사블랑카 사건
독일인의 프랑스 외임부대 탈주사건. 양국, 헤이그 국제재판소에 제기하여 문제를 해결키로 합
의함으로써 양국간 긴장완화에 기여.
1909. 2. 佛·獨협정
모로코에서의 상호 이해관계 승인. 모로코의 경제발전을 위한 양국의 공동노력 약속.
1906. 6. 뷜로우 사임
뷜로우에 대한 평가(알베르티니; 이탈리아 학자): 墺, 伊를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하를 조
장. 독일이 1차대전에 휩쓰리게 되는 기본 여건을 모두 창조. 뷜로우 뒤를 이어 베트만홀베크와
키드렌 베흐터 등장.
1910. 9. 러시아, 사조노프 등장
우유부단한 성격. 이즈볼스키 후임
1910. 10. 짜르 및 사조노프 독일 방문
서로 이해관계가 상이함을 발견하고 성과없이 끝남.
제2차 모로코 사태
아가딜 사태
1911. 5. 모로코 반란
이에 프랑스는 페즈를 점령하고 알헤시라스 의정서에 의거하여 행동할 것을 선언.
1911. 7. 1. 독일 군함, 판터호, 아가딜 출현
키랜드의 의도: 프랑스의 지배가 기정사실화 되고 있는 모로코를 승인하는 대신 가능한한 많은
이익추구. 즉 프랑스로 하여금 사건에 휘말리게 하고 협상에서 프랑스를 위협하여 보상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임.
1911. 7. 1. 까이오가 프랑스 수상을 등장
독일과의 협상을 주장하여 외상 드셀베 몰래 독일과 교섭
1911. 7. 15. 독, 프랑스령 콩고 전체를 요구
이러한 독일의 지나친 요구에 경악하여 영국이 강경한 반응을 보임.
1911. 12. 4. 불·독 협정
내용: 독일이 모로코에서의 프랑스 보호권 건설을 인정. 프랑스령 콩고의 일부를 독일이 차지.
독일은 프랑스에 차드湖 근처지역 양도.
의의: 유럽제국주의 국가의 단순한 식민지 조정. 독일의 무력위협에 의한 보상요구방식 때문에
모로코에 두 번의 위기가 야기됐던 것임.
1912. 3. 프랑스령 모로코 건설
1912. 1. 프랑스, 포앵카레 등장
1911년 독불협정은 양국에서 모두 비난을 받음. 이 결과 까이오가 사임한 것.
포앵카레: 솔직, 결단성, 프랑스 시민계급을 표상. 對獨강경파.
트리폴리 전쟁
1911. 10. 28. 이탈리아, 터키에 선전
당시 이탈리아는 트리폴리에 대해서는 열강들의 묵시적인 승인을 얻어 놓고 있던 상태. 이탈리
아는 모로코 문제가 종결되고 지중해에서 경쟁이 증대되자 이 기회에 트리폴리를 합병하려 의
도. 즉 독일의 간섭을 배제하려고 생각한 것.
1911. 11. 5. 이탈리아, 트리폴리 및 키레나이카 합병 선언
동 사태에 대한 열강의 태도
러시아: 1909년 라꼬니기협정에 의거 동조
프랑스: 반대
영국: 적극적 반대는 유보
독일: 현재의 동맹국과 미래의 동맹국간의 전쟁으로 파악하여 반대.
오스트리아: 가장 강력한 반응
1912. 4. 이탈리아, 도네카네스 군도 점령
1912. 10. Ouchy 강화조약
터키는 트리폴리에서 군대철수. 주권은 이탈리아에 양도. 이를 위한 담보로 잠정적으로 이탈리
아가 다다넬스 군도 점령(1946년에야 반환)
해군 경쟁
1912. 1. 영국의 에른스터 카셀, 독일 방문
해군경쟁에서의 협상이 목적. 독일측의 상대역은 알베르트 발린.
1912. 2. 홀데인(영), 독일 방문.
견해차이로 실패
1912. 영·불 함대 재배치
이 조치는 영국이 타국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꺼려하는 집단이익 개념을 내포. 영국은
대서양(영국근해, 지브롤터)에서 프랑스는 지중해(투롱)에서 공동의 이익을 보호.
1912. 7. 16. 불·러 해군협정
발칸전쟁
발칸전쟁
1912. 3. 13. 세르비아·불가리아 동맹
러시아 외무성의 훈령 없이 당시 베오그라드 및 소피아에 주재하고 있던 러시아 공사들의 독자
적인 노력으로 체결됨.
내용: 마케도니아를 분할하여 북부는 세르비아, 남부는 불가리아가 지배하고 중부에는 짜르의
중재로 경쟁지역 설치.
배경: 불가리아는 트라체 획득을, 세르비아는 아드리아해 진출을 기대하고 체결. 양국은 동 조
약 체결후 곧 군사협정도 체결.
1912. 5. 그리스·불가리아 협정
이로써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를 잇는 발칸동맹이 형성되고 다시 對터키 반항운동을 펼치
기 시작.
1912. 8. 포앤카레, 러시아 방문
러시아의 공격적 태도를 격려해주기보다 오히려 사조노프에게 위험을 인식시키는 효과.
1912. 8. 오스트리아의 베르히톨트, 터키에 대한 열강의 공동행동 제의
1912. 10. 4. 프랑스의 수정 제의
오스트리아의 제안에 대해 프랑스는 터키의 유럽 영토내의 현상유지를 주장. 이는 대부분 국가
의 동조를 얻음.
1912. 10. 8. 몬테네그로, 터키에 선전
상기 열강들의 제안이 실행될 여유없이 전쟁이 발발하게 된것이고 곧 발칸동맹국들도 뒤따라
對터키 선전포고.
1912. 12. 23. 1차 발칸전쟁 휴전
그리스만 불응. 이로써 터키는 해협지역을 제외한 모든 유럽지역에서 사실상 축축되게 됨.
1912. 12. 16. 런던 강화회의
영강 대사회의 및 전쟁 당사자회의로 이원 진행. 그러나 또 하나의 전쟁으로 협정체결이 지연
됨. 청년투르크당이 아드리아노플의 할양에 반대하여 케말 파샤 정부를 전복하고 전쟁을 재개
했으나 다시 패배.
1913. 5. 30. 런던 평화조약 체결
터키, 에노스미디아線 서쪽의 유럽지역 양도. 알바니아 건설(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저지하기 위해 세르비아의 아드리아해 접근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제의, 이탈리아도 찬성)
1913. 1. 포앵카레, 대통령 취임
1913. 6. 29. 불가리아, 세르비아 및 그리스에 宣戰
당초 불가리아의 목표는 마케도니아였는데 세르비아가 墺압력에 대한 보상으로 원래 약속과는
달리 마케도니아를 장악하고 그리스도 살로니카를 점령하자 불가리아가 양국에 선전.
터키도 아드리아노플을 획득키 위해 참전. 루마니아도 불가리아에 선전. 따라서 1:4의 전쟁이
됨.
1913. 7. 휴전 성립
불가리아 패배
1913. 8. 13. 부카레스트 조약
터키는 아드리아노플 회복. 루마니아는 남부 도부르자 획득.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일부와 트
레이스 일부를 차지. 그리스는 카발라를 차지.
의의: 열강의 관여 없는 발칸 당사국들만이 영토조정
발칸戰 이후 열강관계
1913. 세르비아·알바니아 국경 확정
1913. 9. 세르비아, 알바니아 침입
1913. 10. 18. 墺,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
세르비아군 철수
1913. 영·독 협정
포르투갈 식민지 분배 가능성에 관한 협정. 당시 양국관계가 양호하여 바그다드 철도문제도 해
결가능한 것처럼 보여짐.
1913. 호엔로에 칙령
트리에스테 지역에서 이탈리아 근로자를 해고한 사건을 둘러싸고 伊·墺 대립
1913. 6. 墺·伊 해군협정
양국함대 공동행동 규정
터키 상황
1899. 11. 독, 철도부설권 획득
콘스탄티노플-페르시아灣을 잇는 철도
1900. 4. 러·터키 협정
러시아는 흑해 인근지역에서의 철도건설에 거부권을 행사할수 있음을 규정.
1914. 철도문제 해결 협정
독일이 부설하는 철도는 바그다드를 넘지 못함. 바그다드와 페르시아灣 사이의 철도는 영국의
영향력하에 놓임.
1913. 10. 오·독 황제회담
1913. 5. 터키, 독일에 군사훈련단 파견 재요청
1914. 1. 독일, 콘스탄티노플 요새 통수권은 포기
리만 폰 잔더스는 육군만 장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