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
연재 <고성한벌> 9회 / 갯바람(3회 조영남/둔전리)
고려 문치와 18대 의종
1. 고려왕 계보와 치적
고려왕 계보(系譜) | ||||
(1)태조(918-943) |
(2)혜종(-945) |
(3)정종(-949) |
(4)광종(-975) |
(5)경종(-981) |
(6)성종(-997) |
(7)목종(-1009) |
(8)현종(-1031) |
(9)덕종(-1034) |
(10)정종(-1046) |
(11)문종(-1083) |
(12)순종(1083) |
(13)선종(-1094) |
(14)헌종(-1095) |
(15)숙종(-1105) |
(16)예종(-1122) |
(17)인종(-1146) |
(18)의종(-1170) |
(19)명종(-1197) |
(20)신종(-1204) |
(21)희종(-1211) |
(22)강종(-1213) |
(23)고종(-1259) |
(24)원종(-1274) |
(25)충렬왕(-1308) |
(26)충선왕(-1313) |
(27)충숙왕(-1330) |
(28)충혜왕(-1332) |
(29)충목왕(-1348) |
(30)충정왕(-1351) |
(31)공민왕(-1374) |
(32)우왕(-1388) |
(33)창왕(-1389) |
(34)공양왕(-1392) |
왕조 |
시대상황과 치적 |
태조(918~943) |
후삼국의 혼란(900~936), 고려의 건국(918), 통일의 완수(936). |
혜종(943~945) 정종(945~949) |
왕권미약, 혜종의 이복동생 왕요(정종)의 정권찬탈, 서경천도추진 -민심악화. |
광종(949~975) |
과거제, 노비안검법실시, 국가의 기틀확립. 공포정치(인명손실극심). |
경종(975~981) |
광종사후 왕권약화. 광종의 개혁이전으로 복귀. |
성종(981~997) |
국가의 기틀확립. 거란의 1차침입(991)-서희의 외교,강동6주획득. |
목종(997~1109) |
목종의 정치무관심. 천추태후(목종母)와 권신 김치양의 국정농단. 강조의 정변. |
현종(1109~1031) |
거란의 2차침입(1110), 3차침입(1118)-강감찬의 귀주대첩. 초조대장경 조판. |
덕종(1031~1034) 정종(1034~1046) |
왕권의 안정. 별다른 외침 없음. |
문종(1046~1083) |
고려의 태평성대. 해동공자 최충. |
순종(1083)/선종(~1094) |
왕권의 약화. 귀족의 강세, 대각국사의천 |
헌종(~1095)/숙종(~1105) |
헌종의 숙부 왕희의 정권찬탈. 왕권강화. |
예종(1105~1122) |
윤관의 여진정벌과 동북9성개척. 왕권안정. |
인종(1122~1146) |
이자겸의 난(1126), 묘청의 난(1135), 삼국사기. 왕권미약, 국정혼란. |
의종(1146~1170) |
환관(정함)위주의 측근정치. 향락과 사치만연. 무신정변(1170) |
명종(1170~1197) |
무신정권(정중부,경대승,이의민)의 전횡. 왕권미약. |
신종(1197~1204)/ 희종(~1211)/강종(~1213) |
최씨무신정권(최충헌)의 국정독점-왕권능가. 왕권의 허수아비화. |
고종(1213~1259) |
최씨무신정권(최이,최항,최의), 몽고와의 30년전쟁(1231~1259). 팔만대장경. |
원종(1259~1274) |
무신정권(김준,임연)의 몰락. 원(몽고)과의 제휴. 삼별초의 난(1272) |
충렬왕(1274~1308) |
원의 부마국화. 삼국유사. 원의 내정간섭. |
충선왕(~1313)/충숙왕(~1339)/ 충혜왕(~1344)/충목왕(~1348)/ 충정왕(~1351) |
원의 부마국(=사실상 속국)의 심화. 고려왕의 몽고인화. 원의 내정간섭. |
공민왕(1351~1374) |
반원정책,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립양상. 홍건적의 난 |
우왕(~1388)/창왕(~1389)/ 공양왕(~1392) |
요동정벌추진과 위화도회군, 고려왕조의 멸망.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하여 조선왕조가 시작됨 |
2. 18대 의종에 대한 공식 기록
의종 [毅宗, 1127~1173] / 네이버 백과사전
휘 현(晛). 자 일승(日升). 시호 장효(莊孝). 초명 철(徹). 인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 비는 강릉공(江陵公) 온(溫)의 딸 장경왕후(莊敬王后). 계비는 참정(參政) 최단(崔端)의 딸 장선왕후(莊宣王后). l146년 인종의 뒤를 이어서 20세에 즉위하였다. 인종 때 일어난 묘청의 난으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치 실권을 가지고 있는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환관과 측근 세력을 키웠으며 무신세력들에게도 가까이하였다. 하지만 실세 권력을 가진 귀족 세력들의 견제로 의종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의종은 실세 문신들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결국 무신들은 천대되었고 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의종이 총애했던 환관들과 무신사이에 갈등이 증폭되고 문벌귀족과 타협했던 정책은 내란의 불씨를 싹트게 했다. 또한 의종은 술과 여색을 탐하여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국 1170년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이 난을 일으켜 폐위되었으며, 거제도(巨濟島)로 쫓겨났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의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계림(鷄林:慶州)에 유폐되었다가 허리가 꺾여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의종 [毅宗, 1127~1173]/ 위키백과
의종(毅宗, 1127년 ~ 1173년)은 고려 제18대 국왕(재위: 1146년~1170년)이다.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 시호는 의종강과장효대왕(毅宗剛果莊孝大王).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맏아들이다. 1134년에 왕태자(王太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에 그는 이미 인종 때에 일어난 이자겸의 전횡과 반란, 묘청의 난 등으로 크게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여 쇠약해진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무신(武臣)들을 총애하여 친위군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이 발탁되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문신(文臣)들 및 환관(宦官)들과 어울려 유흥과 오락에 깊이 빠지고, 지나치게 불교·음양설(陰陽說)·선풍(仙風)을 중요시하고 유교를 멀리하는 등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신들을 소외시켜 천대받게 만들어 무신정변(武臣政變)의 계기를 낳았다. 1170년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남으로써 무신 정권에 의해 폐위되어 3년간 거제도의 폐왕성(廢王城)에 유폐되었다. 그 뒤 1173년에 김보당(金甫當)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 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셔와 받들고 경주로 가서 웅거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패하였다. 1173년[1] 의종은 총애하던 장수 이의민에 의해 곤원사(坤元寺) 연못가에서 술을 두어 잔 마신 뒤에 등뼈가 꺾여 지고 시체는 그대로 연못에 수장당하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이후 동생인 명종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희릉(禧陵)이다. 현재 희릉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 의종에 대한 평가분석 / 필자
위에 제시한 것이 의종에 대한 공식평가이다. 이같이 부정적 일변도이다. 승자 중심의 역사 시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 정작 의종이 왜 그런 상황에 처했던 것인가에 대한 분석적 시각이 네이버백과가 단연코 앞서고 설득력을 지닌다. 역사적 사건들만 많이 나열한다고 해서 시대상황과 역사진실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종의 그러한 실정들과 더불어 정작 의종이 정치권력 실세인 귀족들 중심의 문치를 통해 추구했던 남다른 정신과 진실 그리고 그 결과들에 대해선 왜 말하지 아니하는가? 이는 무신정변을 정당화 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 무신정변을 정당화 하지는 않더라도 이러한 역사기술은 당시 시대상황의 모든 죄를 의종에게만 덮어씌우는 것밖엔 되지 않는다. 시대적 대 정변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벌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왜 우리겨레는 문치를 중시하고,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가? 더불어 고려 중기 100년의 무신정권이 나라와 백성을 망쳤다고 말하는가? 그 역사실제를 우리는 1961년부터 1990년대까지 지속된 장기군사독재정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겨레에게 칼은 기본적으로 붓 위에 서고 붓 아래 섰다. 곧 칼에 이르기까진 먼저 붓을 닦고 쌓아야만 하고 그렇게 붓의 기본에 이르면 비로소 손에 칼을 들 수 있으나, 그 칼은 다시 붓 아래 섰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칼은 스스로 방향과 쓰임조차 모르고 제멋대로 춤추는 무지폭력의 서구역사와 일본의 것이 되고 만다는 인간천리(人間天理)를 우리겨레 조상들이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엔 감히 상상조차 못하는 일, 도도한 겨레 선비 명신 붓대들이 백성과 나라의 길을 그르치는 불의들을 가로막고 그 어떤 칼날 앞에도 자신은 물론 3족 9족의 목숨들까지 거침없이 들이밀며 “어서 그 칼로 이 목을 치라.” 호통 호령 치며 형장의 이슬과 영원한 절해고도들이 된 자리이다. 그로써 붓, 붓대들이야말로 진정한 겨레정신과 역사중추인 것이다.
4. 의종의 치적과 겨레 붓의 표상 벽파정(碧波亭)
의종은 즉위함과 동시에 먼저 이자겸의 전횡과 반란(권력 쪽), 묘청의 난(백성 쪽 민란) 등 역사현실 앞에서 왕권강화(국정의 바른 길)를 위해 즉 뿌리 깊은 고려귀족 거짓 붓대들의 전횡을 바로잡기 위해 무신들을 중용하고 총애했다. 그러자 곧바로 정치권력 실세인 귀족들의 반발 앞에 부닥치고 말았다. 국가와 겨레 앞에 칼은 붓을 잊고 붓은 칼을 믿지 못한 채 오직 자신들의 권력욕망에만 집착하여 치열한 대립만을 벌였다. 나라의 군주로서 어찌 피토하지 않을 수 있을 일이랴. 양쪽을 당장 목 치고 싶었으리라. 그런 붓과 칼의 치열한 대립의 틈새에서 그래도 의종은 붓 쪽을 택했다. 그러자 군사권력 사령부인 중방을 거머쥔 붓들은 당시 최고 무신들이요 군사권력 실세인 정중부 등을 철저히 견제하며 좌시 홀대했다. 의종이 가장 총애하고 세운 그들마저 그토록 홀대받는, 과거로부터 고질적인 고려귀족의 여전히 지속되는 횡포에 의종은 자신이 과연 군주 왕인가? 하고 회의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홍길동이 아비를 아비라,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는 사회에서 의적으로 설수밖에 없었거늘 하물며 왕으로서 얼마나 고독했으랴. 때문에 말년엔 그래도 죽든 살든 왕에게만 오직 충성하는 환관들 밖에 없었으리라. 왕으로서 이미 정치에 지칠 대로 지치고 염증을 느낄 대로 느낀 의종은 그 고독과 좌절 앞에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주색밖에 더 있었을까? 그의 치세 무려 47년을 생각해 볼 때.
그런 자리에서도 의종은 왕으로서 분명한 의지를 세우고 꿈을 실현해 나갔다. 중앙정부건 지방행정기관이건 문신들이 온통 지배하는 자리에서 가렴주구 하는 지방관리들과 그와 꼬리를 문 중앙관리들을 색출하고 백성들의 민성고(民聲苦)를 알기 위해 전국의 모든 정자들에 있는 정시들을 조사시켰다.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지방 유생들, 권력에 염증을 느껴 스스로 그 옷을 벗고 고향강호로 귀거래 하여 백성들 속에 있는 강호제현 더러는 여전히 홀로 꿋꿋하게 붓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지방관리들이 있고, 정자에는 분명코 그들의 시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지혜롭고 정확한 민정시찰인가. 중앙권력 붓들에겐 우리겨레국가의 영원한 자존을 위해 중국의 시경(詩經)을 능가하는 독자적인 대시전(大詩典)을 편찬하겠다고 선언하고 조사를 명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그 시들을 모두 낱낱이 살피고 가려 뽑아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로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 당시 요(遼)와 국경지역인 요동 땅에서 태어나 그곳 지방관으로 있던 김신윤의 시들이 그 변방지역 정자들에 가장 많았다. 조사관들이 볼 때 그 시들을 왕과 중앙관리들이 보았을 때 당장 중벌이 내려질 것이 불을 보듯 했다. 민성고를 대표하며 국정을 비난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중앙조사관들의 그 말이 주변에 나돌아 그를 아끼고 존경하는 지방 선비들과 관리며 벗들이 크게 걱정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김신윤은 그러나 태연했다. 정시조사가 다 끝나고 말 그대로 김신윤은 개경으로 불려갔다. 만조백관이 도열하고 있는 가운데 의종 앞에 나아가서 서자, 의종은 그대가 국경지역 지방관으로 있는 김신윤인가 묻고 확인한 후 “그대야말로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는 충신이로다.” 하고 크게 칭찬하고 더 크게 신임하고 중용하자 만조백관이 깜짝 놀랐으나 모두가 일제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신윤은 진정한 충신이옵니다.”라고 왕의 비위만을 맞추었다.
사실 조정 실권파들은 김신윤이 하급 지방관리인지라 별로 관심조차 없었지만 미워하고 있었다. 걸핏하면 국경의 안전을 위해선 무신들을 홀대해서는 아니 되며 그들의 처우부터 개선해야 된다고 상소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가 국경지역의 관리로서 문무를 함께 관리하는 책임자로 재직하면서 더욱 분명하고 크게 느낀 사실이었다. 그로 김신윤은 문신들 중 어느 누구보다 당시에 무신들을 가장 존중하고 그들과 교우하며 친분이 도타웠었다. 의종은 그런 왕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겨레 독자적인 백성의 노래 <정시대전(亭詩大典)>을 펴내지 못하고 무신정변에 의해 자신을 마치고 말았다.
고려 의종 때 비로소 당시 겨레문학은 마치 당나라 시문학이 전성기를 맞아 시선 이백, 시성 두보, 악성 백낙천 등을 낳은 것처럼 고려도 전성기를 맞았다. 이규보, 김극기, 김신윤, 채보문, 고조기 등 헤아릴 수 없는 겨레시인과 문인들을 배출하고 그 자리가 의종 사후 명종시대로 이어졌다.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는 언제나 이규보를 먼저 들지만 이규보 자신은 정작 평생 동안 벼슬길에 나아오지 아니하고 들녘사람들 속에 살면서 우리겨레 최초의 민중시, 농민시, 참여시라고 할 수 있는 시만을 쓴 노봉 김극기를 가장 맑고 고귀한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또한 김신윤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백성과 나라의 입장에서 평생 동안 하급지방관으로 전국 각지를 스스로 누비며 가는 곳마다 가장 많은 정시를 남기고 지방마다 다른 특색의 자연풍광과 자리, 문화정리 풍습들을 낱낱이 조사하고 정리하여 남긴 탁월한 시인이다. 채보문 또한 당대에서 가장 빼어난 시인이었고, 고조기는 제주출신으로 지금까지 제주출신 중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뛰어난 시인이다. 이들 중 이규보를 제외하고 모두가 직접 진도 벽파정을 찾아와 <벽파정>을 읊고 그 시를 정자에 새겨 남기고 돌아갔다.
왜 고려에서 가장 맑고 고귀하며 뛰어난 시인들이 그토록 남도 끝자리 물목 건너 섬 나루터 벽파정을 찾았을까? 다름 아닌 의종의 꿈 자리였기 때문이다. 벽파 나루터는 뭍과의 나루터일 뿐만 아니라 백제시대부터 이미 화려한 국제무역항이요, 고려건국과 함께 세계로 뻗어 나가는 겨레국가 천년대계의 바닷길 전진기지 십자로였다. 그로 보배섬나라 방주 진도는 고려번영을 상징 대표하는 극치요, 그 돛폭 정시산실의 요람이었기 때문이다. 중국대륙에서 숱하게 일고 스러지는 국가와 일본열도 간의 국제사절들이 벽파를 지나는 자리 그리고 진도의 군수 현감들이 오가며 벽파정에서 읊어 새긴 무수한 정시들이 모두 진도와 벽파를 눈앞에 바라보듯이 시들로 전국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겨레 붓들에게 겨레 꿈 이상향의 섬나라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벽파정이야말로 그 모두의 진정한 근거요 겨레정신과 역사의 뿌리인 붓 정신 곧 무수한 유배인물들의 유배나루터이자 그들의 집중 정시산실이었기 때문이다. 왜 오늘 우리가 백두산과 금강산을 찾아 나서는가? 그 자연명승을 보고자 하는가? 그것은 우리들 가슴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누구의 주제련가 맑고 고운 산, 발아래 산해말리 일만이천봉~” 저마다 가슴에 파도치는 그 뜨거운 가슴 때문이다. 시를 아직 모르는 모두가 그렇거늘 하물며 순수 겨레정신과 역사중추로 선 붓들의 가슴에서야.
벽파정이 의종 때 최초로 세워졌다는 말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이미 백제시대 창군과 함께 있었을 게 분명하거니와, 의종이 특명을 내려 국가를 대표하는 정시산실의 크고 좋은 정자로 다시 중건했을 것이다. 또 그토록 겨레국가와 그 붓 정신을 대표하는 정자가 되었으니 송도 개경 뿐 만이 아니라 전국각지의 유림 붓들이 어찌 찾아오지 않았으랴. 또한 부임하고 떠나는 관리며 국제사신들, 교역자들 중 붓을 든 사람들이 저마다 정시 한 수씩 읊지 않았으랴. 조선말까지 전라도관찰사치고 이래저래 진도 벽파정을 직접 찾지 않은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고려-조선 천년 세월에 이래저래 모두 사라지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정시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나 그나마 우리겨레 유배붓대들의 정시로는 유일하고 가장 많은 수십 수이다. 어디엔가 묻혀 있을 그 모두를 찾아낸다면 그로써 가장 분명하고 활기찬 하나의 도도한 겨레역사가 되리라.
<다음 10회 연속>
|
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