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아래서
임영조
어제 피운 바람꽃 진다
팔월염천 사르는 농염한 꽃불
밤 사이 시들시들 검붉게 져도
또다른 망울에 불을 지핀다
언제쯤 철이 들까? 내내
자잘한 웃음소리 간드러지는
늙은 배롱나무의 선홍빛 음순
날아든 꿀벌을 깊이 품고 뜨겁다
조금 사리 지나고 막달이 차도
좀처럼 下血이 멎지 않는 꽃이다
호시절을 배롱배롱 보낸 멀미로
팔다리 휘도록 늦바람난 꽃이여
매미도 목이 쉬어 타는 말복에
생피같이 더운 네 웃음 보시한들
보릿고개 맨발로 넘다가 지친
내 몸이 받는 한끼 이밥만 하랴
해도, 오랜 기갈을 견뎌온 나는
석달 열흘 피고 지는 현란한 수사(修辭)
네 새빨간 거짓말도 다 믿고 싶다
그 쓰린 기억 뒤로 가을이 오고
퍼렇게 침묵하던 벼이삭은 패리라
처서 지나 한로쯤 찬이슬 맞고
햇곡도 다 익어 제 무게로 숙일 때
나는 또 한 소식을 기다려보리라
보름 넘어 굶다가 밥상을 받듯
받기 전에 배부른 배롱나무 아래서
자비
복효근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뼛속까지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 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떠받쳐 주네
낙화, 꽃피는
박동진
그리 뜨겁게 타오르던 사랑도 지쳤는가
누렁개 혀 빼물고
맥없이 늘어진 여름 한낮
명옥헌 연못가 불타던 배롱나무 꽃잎
우르르 물속으로 뛰어드는데
피어서만 아름다운 꽃이라면
저건 한갓 쓰레기, 허나
세상천지 어느 것 하나 녹녹한 영혼 있으랴
꽃 진 자리 살펴보면
처절한 사랑의 흔적 보이나니
그리고 그대여
무서리 비바람 다 견뎌내고
불타듯 피어오른 저 꽃들
떨어지면서 또다시 피워내는
물 위의 꽃을 보라
옛 편지를 읽는 저녁
황영선
비 내리는 분황사 뜰에
막 핀 배롱나무 꽃송이들이
제 몸의 꽃빛을 풀어
시를 쓰고 있었지
받아 적기도 전에 지워지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본 일 말고는
이 저녁 한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가슴에 물기처럼 번지는 그것이 시가 아니었을까?
귀 열고 문 열어 두어도
나는 아직 캄캄한데
한 몸인 듯 편안해진 모습으로
어둠과 빛의 경계를 허물고 있던 풍경소리
백 년도 못 견딜 생애
쓸쓸한 저녁이 찾아오면
흐린 불빛에 기대어 시를 읽다 잠이 들겠네
못다 읽은 시편들은 가슴으로 읽으리
꽃담
김승해
오랜만에 만난 너와 옛 궁터 걷는데
어찌 사냔 물음에
세상, 담쌓고 산다했지
담쌓고 산다고?
흙 속에 단단히 박힌
기와조각 같은 네가 쌓은 것이
한 채에 두른 담이라면
덧나기 쉬운 것들은 빗장 지르고
흐르기 쉬운 것들은 흙으로 개어
꼭꼭 눌러 박은 이파리 붉음 한
자경전, 저 꽃담 같은 거겠지
배롱나무 꽃 지고 여름 다 가는 날,
너는 깊이 담쌓아 감춘 것을
내게 들켰으니
저 담 끝에 문 하나 두어도 좋겠다
문 끝에 이파리 하나 돋을 새겨도 좋겠다
담이 높아도 꽃은 넘는다
나의 연못, 나의 요양원
황지우
목욕탕에서 옷 벗을 때
더 벗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다
나는 나에게서 느낀다
이것 아닌 다른 생으로 몸 바꾸는
환생을 꿈꾸는 오래된 배롱나무
탕으로 들어가는 굽은 몸들처럼
연못 둘레에
樹齡(수령) 三百年 百日紅 나무들
구부정하게 서 있다
만개한 8월 紫薇(자미)꽃
부채 바람 받는 쪽의 숯불처럼
나를 향해 점점 밝아지는데
저 화엄탕에 발가벗고 들어가
생을 바꿔가지고 나오고 싶다
불티같은 꽃잎들 머리에 흠뻑 쓰고
나는 웃으리라, 서울서 벗들 오면
상처받은 사람이 세상을 단장한다
말하고, 그들이 돌아갈 땐
한번 더 뒤돌아보게 하여
저 바짝 藥오른 꽃들,
눈에 넣어주리라
당진형수사망급래
이종성
내 눈물은 배롱나무꽃이다.
누군가에게 영혼을 바쳐본 이는 안다.
마음이 마음을 지나면 그 색으로 물이 든다는 것을,
내게도 안팎으로 곱게 물들던 시절이 있었다.
유년의 바깥마당 환하게 핀 나무 아래로
꽃이 되어 걸어 들어온 사람 있었다.
그날부터 뭉실뭉실 하늘에는 꽃구름이 일었고
산 너머 종달새는 보리밭을 푸르게 일으켰다.
밤에는 별을 따라 반딧불이 어둠을 날았다.
마음이란 그렇게 하나의 삼투현상이어서
색깔이 바뀌고 날개를 달아주는 신비한 현상
처음으로 그때 한 사람의 색으로 치환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세상의 어느 색으로도 물들지 못했다.
지금, 형수님 산소엔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간밤 비에 젖은 봉오리 뚝뚝 지고 있다.
아직도 떨리는 손에 든 한 통의 비보
글씨 위로 꽃잎이 붉다.
첫댓글 때 늦게 땡볕이 폭포처럼 쏟아져서 자미가 많이 웃게 생겼습니다. 저하고는 각별한 황영선 시인의 시도 올려 주셨네요. 미소님과 회원 여러분 얼마 남지 않은 여름 시원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수고로운 손길에 머물렀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