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CBS 아나운서로 입사한 그는 줄곧 음악 관련 프로그램을 맡아왔다. 국내 유일의 영화음악 방송 프로그램인 <신영음>은 1998년 2월 첫 방송을 탄 때부터 그가 기획, 연출, 진행까지 모두 담당하는 1인 제작 시스템을 유지해 왔다 (최근에서야 작가를 따로 두었다). 독특한 선곡, 영화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따뜻한 시선으로 열렬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프로그램. 2004년에는 이 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듣는 청취자들이 주축이 되어 ‘신영음 영화제’까지 만들어졌다. 영화음악 진행자로서 독보적인 자리를 구축하고 있는 그가 올해 한국방송대상 아나운서 상을 받았다. 올해의 방송인으로 선정된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담담해요. 10년이라는 세월만큼에 대한 무게감이랄까. 방송국 입사 12년, 신영음 진행 9년차예요. 수상 소식을 들을 때 파란만장이라는 표현이 떠올랐어요.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하는 감회 말이에요. 처음 신영음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한국은 정말 영화음악의 불모지였거든요.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이동준, 원일, 조성우 등 재능 있는 음악 감독들이 차례로 떠올랐습니다. 한국 영화음악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저도 나이를 먹고 우리 청취자들도 중학생에서 고등학생, 고등학생들은 대학생 그리고 성인들은 저처럼 세월이 켜켜이 쌓였죠.”
영화음악 자료가 전무하던 시절, 신영음은 영화음악 애호가들에게 ‘보물창고’같은 곳이었다. 1998년 일본의 영화음악 특집을 준비하던 그는 이와이 슈운지 감독 작품의 음악을 계속 맡아온 작곡가 레메디오스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 있는 선배에게까지 부탁했지만, 아무리 뒤져도 어느 그룹인지 알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그 작곡가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음악으로 명성을 떨친 히사이시 조. 그는 2004년 이와이 슈운지 감독 영화 <하나와 앨리스> 개봉 때에야 “레메디오스가 바로 나”라고 밝혔다.
좋은 영화음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물 건너 사람을 동원하는 건 기본이고 영화 비디오를 틀어놓고 음악만 따로 녹음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신영음’에 가면 평소 자주 듣지 못했던 영화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초창기 청취자들에 의해 결성된 팬 카페 회원들은 그를 초청해 행사를 열고, 함께 국제영화제를 보러 다니기도 한다.
열혈 청취자들이 주축이 돼 영화제 만들어
제천영화제 사회를 맡은 신지혜 아나운서(왼쪽). |
“신영음 영화제 때도 청취자들이 직접 스태프로 참여했어요. 영화제 포스터 주인공도 청취자예요. 2회를 진행했는데 첫 회에는 신영음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중심이 됐죠(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애니메이션 마니아다). 2회는 조성우, 이병우 씨 등 한국의 영화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영화음악에 대한 사랑을 그는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올해 처음 시작한‘제천 국제영화음악제’는 음악을 중심으로 영화를 조명하는 축제로, 조성우 씨가 집행위원장, 그가 집행위원을 맡았다.
“이런 축제는 전 세계적으로도 몇 군데 없지요. 처음이지만 이 정도 콘텐츠라면 내용상 성공했다고 봅니다.”
영화제 기간 동안 그는 스페셜 이벤트인‘영화음악 오픈 토크’를 제천 문화의 거리에서 진행했다. 영화음악 사연과 신청곡을 들려주고 김준석, 한재권 영화음악 감독을 초청해 영화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와 진솔한 뒷이야기를 나누는 행사였다.
“신영음 청취자들이 제천까지 내려와 준 것도 고맙지만 환갑이 지난 마을 할아버지들이 맨 앞에 앉아서 진지하게 들으시는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어요.
축제는 지역 주민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몇 시간씩 멍하니 앉아 영화음악을 듣곤 했다. 영화음악을 통해 꿈과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던 그 순수한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게 그의 기대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꿈과 판타지예요. 꿈과 판타지가 어린이들의 세계에 속한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죠. 단순한 판타지는 공상에 불과하지만 신념과 세계관이 깃든 작품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목동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스튜디오에서 그는 매일 우리를 꿈과 환상의 통로로 안내한다. 그가 방송으로 진로를 정한 것은 대학교 때부터. 화학을 전공했지만, 교내 방송 기자로 활동하는 것에 더 애정을 쏟았다. 앞날을 생각할 때 방송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마음을 정한 후 안정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제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선곡한 후 멘트와 함께 녹음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게 취미였어요. 그때부터 작은 음악 방송을 한 셈이죠. 초등학교 때도 연극을 만들었고요. 조용조용히 끼를 발산하는 아이였지요.”
2000년 10월에서 2001년 6월까지 CBS가 9개월 동안 파업을 할 때 그는 부스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시 부스에 돌아온 날을 그는 첫 방송을 했던 날보다 더 또렷이 기억한다.
“그때 내가 얼마나 이 일을 미친 듯이 하고 싶은지 새삼 깨달았지요.”
그 열정이 이어지도록 그는 스스로를 담금질한다. 영화제를 만들고,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 목소리 출연을 했는가 하면, 영화제에서 사회를 보고, 잡지에 칼럼을 쓰는 등 영화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의 활동 반경은 넓어지고 있다.
그를 깊이 아는 사람들은 그가 영화 <레드>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출연한 이렌느 야곱과 닮았다는 말을 한다.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 듯하지만, 개성이 뚜렷하고 강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렌느 야곱에 대해 “물 같은 여자”라고 표현했다. 매일 아침 11시, 〈시네마 천국〉의 영화음악과 함께 어김없이 들려오는 멘트.
“안녕하세요, 신지혜의 영화음악입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파도처럼 우리를 덮치며 꿈과 환상이 있는 영화의 세계로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