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멸의 리더십 이명박
김대우 지음
미소 / 2005년 3월 / 268쪽 /10,000원
이명박의 리더십에 대해 새롭게 조명하는 책. 다음 대선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이명박의 대선후보론을 강력히 지지하는 저자가 이명박의 삶과 일 속에서 발견한 리더십의 덕목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다.
▣ 지은이 김대우
대학에서 법학, 대학원에서 정치교육전공. 1990년 초부터 각종 언론매체에 본격적인 시사관련 글을 기고. 유명정치인의 대필 에세이와 전기 등 10여 권의 단행본 저술. Daum 카페에서 라이언킹과 그림자라는 필명으로 다양한 에세이, 풍자 글 기고. 법무부 출입기자, 거문그룹(한․일 합자) 기획총괄이사, 상무이사. 박찬종 의원 정무특보. 문정수 민자당사무총장, 부산광역시장 특보. 이상희 의원 수석보좌관. 정치풍자집 『의원과 건달』『대권이 뭐길래?』『노무현도 못 말려』, 대필 자서전 및 에세이 『여자 말을 잘 들어주는 남자 - 박찬종 의원』『아빠, 집에 안 가? - 문정수 사무총장』『명란젓과 컨테이너 - 문정수 부산시장』『끝없는 도전... 광업 40년 - 김상봉 광업협회 회장』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이보다 이명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이 있을까?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와 통찰력", "변화를 추진하는 강력한 리더십", "인재 육성과 현장 경영", "국제적인 감각"….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직 이명박을 모른다. 어느 나라건 누굴 대통령으로 뽑아야 잘 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다른 후보보다 상대적으로 그런 능력이 더 있을 것이라는 후보에게 지지와 표심이 쏠리게 된다. 초강대국인 미국조차도 최고경영자로서의 국가경영능력을 대통령후보의 제1자격으로 보고 있다. 하물며 1만 불 언저리에서 10년째 허덕이는 한국경제의 돌파구를 위해서 이명박보다 기대할 수 있는 인물이 또 있던가?
두 사람이 똑같으면 함께 일을 못해
현대그룹 전성기에 많은 사람들이 정주영과 이명박의 사이를 ‘부자지간’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우리는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었다.”며, 상호보완적이지 않으면 각자의 역할도 없었다고 분명한 선을 긋는다. 그는 우리 사회가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전문경영인이 자라지 못하고 혈연과 정에 지나치게 얽매인 한국적 정서로 지배되는 기업 풍토를 지적했다. “기업의 일이나 국가의 일이나 동양적인 온정주의에 치우쳐 판단하면 세상이 발전하지를 못한다. 무조건 추종하는 가신들만 있고 견제나 조언을 하는 파트너가 없는 조직은 건강한 조직이 아니다.”
정 회장 사후에 현대건설이 최대의 위기에 몰렸을 때 이명박에게 현대건설을 다시 맡아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그때만큼 최선을 다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할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한테 맡기라.”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명박은 기업 하나를 경영하는 데도 최선이 아니면 아예 발을 붙이지 않는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정회장을 말린 이회장
정주영 회장이 정치를 하려고 한 동기는, 정치인들에게 명분 없는 정치 자금을 수시로 갈취당하고 수천억의 부당한 세금을 추징당하면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결심을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은 이명박이었다. 문제는 그룹의 전문경영인까지 정치에 참여시키려고 시도했다는 데 있었다. 정회장은 반대 이유를 물어보게 된다. 이명박은 “회장님께서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다소 매정하게 잘라 말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다른 재벌들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 경제가 엉망이 되어 나라 발전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왕 정치를 하려면 긴 안목으로 참신한 인물들을 공천해야 살아남게 된다.”는 이명박의 마지막 진언(?)은 빛을 보지 못한 채, 두 사람은 27년간의 긴 여행을 청산하고 각자의 길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증오가 밥 먹여 주나
비교적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을 하지 않는 편인 이명박이, 강남 문제를 두고 2005년 초에 들어서자 작심한 듯 독한(?) 표현을 한 적이 있다. “난 그렇다고 누구같이 강남을 경계하고 그러지는 않는다. 강남과 강북이 균형 있게 발전한다고 해서 강남을 뜯어낼 필요는 없다. 강남은 강남대로 발전하게 두고, 강북을 새롭게 발전시키면 되는 거다. 그렇지 않고 강남 것을 옮겨가면 제로섬 게임이다. 부가 창출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명박의 복안은 ‘윈-윈 전략’이다.
강남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었다. “왜 나눠서 분배하느냐. 강북은 새로 개발할 것이고 다 다르게 할 것이다. 오페라 하우스, 스케이트장도 처음에 광장을 계획할 때부터 다 생각하고 있었다. CEO가 사업 구상을 할 때는 지금 잘 되는 것만 보고 하는 게 아니다.” 즉 CEO가 어떤 사업을 벌일 때는 미래를 보고 다각적으로 검토한 후에 밀고 나가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공약하는 인기영합적인 정치인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문화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상류사회의 입장에 섰다. “우리는 중국을 제조업으로는 못 이긴다. 문화도 산업이다. 나는 각 구마다 콘서트홀을 만들어서 문화 기반을 만들 것이다. 내 귀에는 안 차지만 나는 런던으로 출장을 가도 파리에 가서 공연을 보고, 파리로 가도 런던의 ‘로얄 발레’에서 좋은 공연을 하면 일부러 보러 갔다.” 이 정도 수준의 직설적인 표현은, 문화를 기득권자들의 사치나 부의 과시 같은 소비행태로 생각하는 노무현식 사고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 태풍 ‘매미’가 상륙하는데도 오페라를 구경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노무현의 처지에서 보면, 이명박의 코드가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문화를 국가경쟁력의 중요한 기반산업으로 생각하는 뚜렷한 관점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노무현 정권이 가진 자들에 대한 편견을 풀고 그를 넘어선 정치를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개혁이나 혁명이라는 말 대신 변화나 늦은 변화라는 말을 사용해야 된다. 시장경제를 하려는 사람들은 언어를 순화해야 한다.”고 완곡하게 지적하고 있다. 젊은 시절 가난을 탈출하려고 비참할 정도로 몸부림쳤던 이명박이기에, 있는 자를 대하는 상대적인 감정을 초월하여 증오하지 말고 끌어안으라고 준엄하게 충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가난하게 살아 야간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교육평준화는 반대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분법을 뛰어넘어야 한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보수를 끌어안아야지 증오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치를 한다는 노무현보다 한 발 더 나간 이명박이 구상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는 그 의지를 “새롭게 안하려면 정치할 필요가 없다.”는 한 마디로 압축하고 있다. 물론 자신이 2007년 대선 후보로 나설 경우를 가상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YS와 맞선 이명박의 배짱
1995년 6월, 처음 실시된 민선 1기 자치단체장 선거에서 국민적 관심은 단연 서울특별시장 선거였다. 이 선거는 이명박이 공개 경선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큰 정치적 파문이 일었다. 여당 집도부는 초선에 불과한 이명박 의원에게 후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거부 반응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이명박이 당 지도부에 요구하는 경선 주장이 명분도 있고 강경하였기에 YS가 직접 나서지 않고서는 마땅히 그를 달랠 묘수가 없었다.
청와대 정무수석이 나서서 대통령을 만나 볼 것을 제의했지만, 이명박은 후보 사퇴 문제라면 만날 필요가 없다고 두 차례나 거절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YS와의 조찬회동은 팽팽하게 주장이 맞섰다. 얘기 끝에 YS는 “이 의원은 앞으로도 다른 일을 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까?”라는 말로 후보 사퇴를 은근히 권했다. 이명박은 경선 후보로 등록하겠다는 결심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고, 이때의 일로 다음 해 총선에서 가장 힘든 선거구인 종로구로 징발되게 되었다. 1995년 5월 12일, 이 날의 서울특별시장 경선은 한국정치사의 큰 흐름을 바꾼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오늘 날 크고 작은 선거가 대부분 경선을 거쳐 후보를 확정하도록 관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이명박의 확고한 소신과 담판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정면으로 돌파하는 원초적인 승부사
2004년 여름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였다. “시장이 입에 발린 얘기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하철 노사문제에 지배 개입을 하고 있다. 개발독재식 마인드로 지하철 노조를 탄압하려고 한다. 세상이 바뀐 만큼 이명박도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경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지하철 노조의 파업은 법의 원칙을 무시한 불법파업’이라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더구나 한해 지하철 적자가 6천 2백억 원에 이르는 등 경영상태가 악화되어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재정이 크게 압박받고 있는 상황을 서민들에게 알렸다. 결국 서민들의 정서를 외면한 채 파업을 강행하려던 지하철 노조는 곧 깃대를 내리고 말았다. 전임 시장들에게 연례행사처럼 해왔던 엄포가 이 시장에게도 통할 것이란 기대는, 애초 상대를 제대로 모르고 던진 도전장이었음이 증명되었다.
그의 단호한 리더십은 2004년도 서울지하철 공사의 재무구조를 10년 만에 자본잠식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605억원의 경비를 절감시킨 경영개선으로 흑자경영(2006년도 목표)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난관이라고 판단되면 지체 없이 정면으로 돌파하는 승부사 기질이, 서울시장이 되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힘
이명박에게 큰 힘이 된 것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기도였다. ‘너에게는 희망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시험이 너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항상 용기를 주려 했다. 그는 가난과 어머니야말로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참다운 스승이었다고 말한다.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데모의 주동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실형을 살고 있을 때였다. 아들을 면회한 어머니의 말은 너무나 간단했다고 한다. “명박아, 나는 네가 별 볼일 없는 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더구나. 나는 네 소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네 소신대로 행동하거라. 어미는 항상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 짧은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어머니의 믿음과 사랑을 다시금 가슴깊이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석방되는 것을 보고 한 달 후에 눈을 감았다.
“오빠 열흘 먹고 스무날은 굶자”
야간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어머니는 둘째형의 뒷바라지를 위해 그에게 여동생을 부탁하고, 단칸방 하나를 구해주면서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된다. 어머니가 매달 쌀값을 보내주시긴 했으나 그 돈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모자랐다. 굶주린 여동생은 “차라리 열흘이라도 실컷 먹고 나머지 스무 날은 굶자.”고 애원하여 오빠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1959년 겨울,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동생과 함께 서울행 기차를 탄다. 서울에 가서 본 어머니의 모습은 이태원 판자촌 단칸방에 기거하면서, 시장바닥에서 노점을 하고 살아가는 고달픈 삶이었다. 마땅히 일거리도 없고 밑천이 없었던 그는 할 일을 찾아서, 눈만 뜨면 서울거리를 쏘다니며 눈에 담았다. 그 순간에도 동숭동이나 안암동, 신촌 대학가와 청계천 헌책방 가게로 자주 발길이 가며, 교복을 입은 대학생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리어카에 가득찬 리더십
대학 신입생이 된 청년 이명박에게 시장 사람들이 주선해 준 일자리는 리어카로 시장의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일이었다. 이 모진 경력이, 훗날 CEO가 되는 과정에서 이명박에게 끼친 영향은 참으로 크고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대표적인 것으로 다섯 가지만 들어보겠다. 첫째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이다. 둘째는 아무도 자신을 위해 일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셋째는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지만 남을 위한 봉사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넷째는 자신감을 길렀던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철학을 갖게 되었다. 리어카를 끄는 일은 늘 정직해야 했다. 정확하게 물량을 실어야 했고, 매일 똑같은 코스를 반드시 가야 했다. 누가 감독을 하는 일도 아니다. 중간 중간에 쌓아 둔 쓰레기를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며 싣는 첫 단계와, 최종적으로 시장 전체의 쓰레기가 일소되었는지 마무리하는 것까지 현장 점검을 혼자서 모두 책임지는 것이 일상화된 작업이다.
따라서 최고경영자가 되고 나서 간부들이 문서로 자신 없는 보고를 하면, “당신 거기 가봤어?”라는 한 마디로 제압하게 되었다. 철저한 현장중심 경영이다. 현장을 다녀오지 않았으면 보고도 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물론 그는 누구보다 앞서 현장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 현장에 나가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현장에 나가지 않고는 보고할 수 없도록 이명박 스스로 업무를 장악하는 것이다. 현장을 중시하니 자연히 관료주의와 탁상공론이 없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은 2005년 3월 초에 인사 개혁의 방향을 밝혔다. 그가 구상하는 공무원 인사 시스템 개혁이란, 한마디로 ‘승진하려면 민원부서로 가서 일하라’는 것이다. 승진 시기를 2~3년 앞두고 반짝 잘하면 승진할 수 있는 현행 인사 시스템은 모순이 있으므로 임용 이후 근무 태도와 성과를 종합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별도의 인사 기준을 마련하겠다는 의지였다. 이 시장은 “기획업무 위주인 중앙정부와 대 시민 업무가 많은 지방자치단체는 평가 기준도 달라야 한다. 승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선 부서에 나가야만 하는 시스템을 정착시키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이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고 확신했던 이명박의 신념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다.
불가능에 도전한 청계천 프로젝트
이명박은 리더의 덕목으로 ‘비전과 일관성, 봉사정신과 글로벌마인드’를 강조하였다. 이 네 가지는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그대로 적용되어 빛을 발하게 된다. 착수 전 단계에서 공표한 청계천 프로젝트는,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자리가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최고관리자가 아니라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 실행하는 최고경영자가 되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최고경영자로서 입성하겠다는 선언적 의미에는, 자신과 함께 4년간 일하게 될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어 기존의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공직 풍토를 완전히 바꿔놓겠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청계천 복원 계획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 도시환경 전문가들의 치밀한 자문을 받았고, 철거와 건설의 기술적 부분에 대한 조사용역보고서를 검토 분석하여 예상되는 시행착오에도 사전대비를 하였다. 초반 승부수로 기를 제압해 나가는 리더십은 철저한 사전 조사와 준비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 통하는 것이다. 더구나 4년에 불과한 시장의 임기 중에 어설픈 수읽기로 비전만 제시하다가 실패한다면 상처를 회복할 시간도 없이 불명예 퇴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명박은 스스로 이런 위험부담을 안은 비장의 카드를 들고 서울시청에 입성했던 것이다.
청계천 복원 역사는 국제적으로 일찍부터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선진국의 대도시들이 서울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현장 방문을 하고 자료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난 2004년 9월에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개막한 ‘국제 건축비엔날레’에 서울시가 출품한 ‘청계천 복원’이 대상작으로 전시되었고, 청계천에 많은 외국인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서울시는 2005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유네스코와 함께 청계천 복원 전시회를 별도로 열고, 완공이 되면 2006년 비엔날레에도 다시 경쟁작으로 출품할 구상을 갖고 있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고 문화공사다.”라는 이명박의 선언처럼, 국제사회에 최고경영자 이명박의 ‘글로벌리더십’을 다시 한 번 극명하게 각인시킬 걸작으로 남게 될 것이다.
끝까지 봉투를 뜯어보지 않았다
2005년 1월 초,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 지하의 한 식당. 이명박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숨겨진 일화’ 하나가 언론에 공개되었다. 기자 한 명이 “사람을 뽑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왔다. “내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을 때 한 간부가 봉투를 2개 들고 왔다. 하나는 청계천 고가 철거와 복원공사가 안된다고 반대한 공무원 명단이고, 또 하나는 여당에 협조한 공무원 명단이었다. 난 그걸 지금까지도 뜯어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공무원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 이후 청계천은 1년 만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최고 기업의 수준이다. 공무원들이 정말 열심히 잘 해주었다. 만약 그때 내가 그 두 개의 봉투를 열어보고 쳐냈으면 서울시 공무원들은 두 편으로 분열되고, 그렇게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어진 질문은 “조직 운영에서 인사가 제일 중요하다고 보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인사야말로 조직의 성패가 걸린 문제라며 즉답을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인사다. 국가도 경영이다. 국가 경영에 정치 논리는 필요 없다. 경제 논리가 필요하다.” 그는 지난 대선을 예로 들며, 시대의 변화에 맞는 공직자의 자질 검증을 강조했다. “우리는 대통령을 뽑을 때도 민주화 운동을 했느냐를 가지고 뽑았다. 이승만이 그랬고, 이후 박정희, 전두환,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주화 운동 인사들을 선택했다. 한번도 이 시대의 대통령이 어때야 되는지를 생각해 본적이 없다. 국민들은 정치 논리로 선택하였다. …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그렇게 뽑은 대통령의 퀄리피케이션이 안 맞는다. 정치 논리로는 맞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국민들이 국가 경영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시대적 대세이다.”
서울특별시장에게 건네진 두 개의 봉투는 ‘서울시 공무원 살생부’였다. 이명박은 그 봉투를 열어보고 용서하는 대신, 뜯어보지 않고 편견을 갖지 않는 게 훨씬 더 서울시 공무원들의 단합을 유도해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참 후에도 인사에 아무런 불이익과 문책이 없는 가운데, 이명박의 리더십에 의해 청계천 상판이 잘려 나가는 것을 보고 서울시 공무원들은 대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대선에 승리하면 어떻게든 정적들을 매장시키려고 했던 구태의연한 우리의 정치 풍토를 감안할 때, 비록 대선은 아니지만 이명박이 보여준 대범함이야말로 새로운 정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첫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보고는 필요 없다
이명박은 취임 초기에 업무보고를 전혀 받지 않았다. 업무 보고를 생략한 대신,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경영 마인드를 공직자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각 조직별로, 각 국별로, 팀장, 과장, 국장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을 선발하여 세계 모든 선진도시로 내보냈다. 공직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와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 옆에 앉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고, 퇴근 후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배워 오도록 보냈으니 서울시 공무원들이 다들 술렁거렸다고 한다.
“업무 보고는 전혀 안 받고 사람을 뽑아서 해외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몇 달씩 해외에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시점에 삼성 연수원을 빌렸습니다. 거기에서 부시장부터 모든 공직자가 2박3일 동안 있었습니다. 10개월에 걸쳐 마지막 9급 공직자까지 교육이 끝났습니다.” 4년의 임기 중에 모든 공직자들이 네 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명박은 그러한 재교육 과정의 의미를 이렇게 술회했다.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용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전했습니다. 그 분들이 하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저는 행정을 이해하고 그 분들은 경영을 이해하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임기의 절반이 2년이 지나자 마침내 이명박 스타일의 서울 경영이 자리를 잡아갔다.
두고 봐라, 강북이 강남보다 더 좋아져
“목표 연도(2012년)가 되면 강북이 강남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다.” 이명박이 서울 개조를 하는 기본 철학은 세 가지이다. ‘편리한 서울, 활기찬 서울’ 두 가지는 앞을 내다보고 추진하는 것이며, ‘따뜻한 서울’은 당장 시행해야 하는 긴급한 문제로 보고 있다. “지금 강북은 강남보다 모든 면에서 떨어진다. 하지만 뉴 타운 개발로 강북이 개발되면 주거환경이나 삶의 질이 강남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뉴 타운은 재개발을 하듯 도시개발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서울시가 개발을 한다고 하면 무조건 들고 일어나 반대했는데, 이번에는 데모는커녕 환영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으니 도시개발 역사상 이변이 아닐 수 없다.
월급 없는 서울시장의 파워
청계천 복원사업은 무엇보다 사회적 갈등 해소가 문제였는데, 이명박은 갈등하고 흥분한 노점상 대표들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말했다고 한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손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다. 손해를 끼치면서 이 프로젝트를 할 마음은 없다. 여러분들에게 손해를 안 끼칠 자신이 있다.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여러분 같은 소상인을 나만큼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내 스스로 알고 있다. 내 말을 믿으면 따라오고, 여러분이 반대하면 안 하겠다.” 이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야심 찬 설득인가!
하루 평균 12시간 내외를 일하는 서울특별시장. 평생을 일에 파묻혀 살아 온 대한민국 최고의 일꾼. 일송(一松) 이명박이 작심하고 마련한 자리에서 한 최후통첩이었다. 연간 받아야 할 월급 7,900만원을 전액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고 취임 후 판공비도 시정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있으니, 그런 ‘무급 서울시장’의 도덕적인 힘도 뒷받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얻은 교훈을 ‘신뢰를 얻은 정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위기도 신뢰를 잃으면 극복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처음에 이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우리가 공무원들을 믿어요? 하면서... 서울시도 중앙정부와 똑같이 보고 믿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분들은 나를 믿어주었다.”
“청계천 복원은 사실 정치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 이건 토목공사가 아니다. 한 전직 신문사 사장이 그 위태위태한 공약을 왜 했느냐, 일단 당선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실제 복원 공사는 시민들 반대 때문에 안 될 테니 앞으로 공약대로 계속 검토한다면서 그냥 4년 잘 보내라는 충고도 해주었다.” 그러나 이명박은 그 충고를 한쪽 귀로 흘리면서, 오히려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월급 없는 서울시장의 도덕적 리더십으로 공약을 실천해 나간 것이다. CEO 출신의 명예를 걸고.
공무원 1만2천명 내려 보내 뭐하나
행정수도 건설 문제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보인 이명박은 위헌 여론을 주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05년 1월 초 행정특별시, 중심도시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이명박은 수도 이전은 경쟁력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 적이 있다. “국가 경쟁력이라는 것은 기업경쟁력, 노동자경쟁력, 공무원경쟁력, 행정경쟁력 등이 모여서 되는 것이다. 정부의 경쟁력은 대통령이 가지고 있을 때 온다.”고 단언했다. 특히 위헌결정 이후에도 노무현 정권이 미련을 버리지 않는데 대해서는 “자기 혼자 앉아있고 다 내려 보내면 어떻게 경쟁력을 가질 것이냐?”고 반문했다. 이어서 “정치적으로야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스피드 경영이다. 그래서 당사도 국회와 같이 있어야 한다는 거 아니냐?”면서 ‘스피드 경영’ 시대에 맞지 않는 시대역행적인 발상임을 지적했다. 즉 행정수도 발상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경영의 효율성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표를 의식하면서 그러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수권정당이 될 수 없다. 충청권도 제대로 파악하는 날이 온다. 공무원 1만2천명을 내려 보내면 머 하나? 서울에서 출퇴근만 할 거다. 도시에는 직장, 주거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가 있어야 된다. 충청권을 속이는 일이고 언젠가 알 날이 온다.”면서 거침없이 질타했다. 정말 주목되는 발언은 대통령과 시장의 의무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함으로써 그동안 노코멘트로 일관하던 대권도전 의사를 노골적으로 내보인 점이다. “대통령과 시장의 의무는 국민과 시민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대통령에겐 국민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일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다. 이념과 갈등을 뛰어넘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은 사람이어야 한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진보적이지만 생각은 온건할 수 있다.” 그는 행정수도 이전 계획에 대해 발상 자체가 틀렸고, 그 발상의 진원지인 노무현의 어설픈 지도력과 함께 한나라당의 소신 없는 정치를 함께 지적하고 있다.
수도 이전 문제는 탄핵보다 더 중요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뜻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당연한 말은 이명박 서울시장이 헌재의 위헌결정을 앞두고 비장하게 한 말이다. 그는 국민 투표 실시를 제안하고, 또 “수도 이전 문제는 국가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5년 임기 정권이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라고 직접 청와대를 겨냥했다. 그는 수도 이전 문제는 탄핵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수도권 이전에 동의한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충청권 표를 의식하다 크게 실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2005년 3월 15일 서울시청 앞에서 수도 이전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날 이명박 시장은 시의회 연설에서 ‘행정수도 이전이 되기 전에 통일이 먼저 될 것’이라는 표현으로, 국민분열과 국론분열에 대한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이명박 뜨는 드라마는 무조건 안돼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영웅시대’는, 중반 이후부터 청년 이명박이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점을 전후하여 작가와 제작진에게 직․간접적인 압력이 가해졌고 결국은 예정 기간을 석 달이나 앞당겨 흐지부지 서둘러 종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스스로는 그런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었으나, 정치적 압력 소문을 전해 듣고 솔직하게 불편한 속내를 보인 적이 있다. “그거 왜 MBC 드라마는 조기 종영한답니까? 시청률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인터넷 뉴스를 보니 이명박 비중을 좀 줄이라고 했다더니, 늘 나는 드라마한다고 했을 때부터 아슬아슬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게 언제 어떻게 될까? 내 역할은 왜곡되게 나오지 않을까? 실은 그보다 더 열심히 살았고, 더 열심히 투쟁했다. 드라마에 그런 게 다 나올 수 있나?”라고.
재미있는 것은 영웅시대를 쓴 작가 이환경(56)이 한 때 중동에서 현대건설 노무자로 일한 적이 있고 그때 사장이 이명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작가는 식사 시간에 저질 고기에 대한 항의를 한 탓에 해고된 아픔이 있어 이명박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고졸 학력으로 성공한 작가 자신이 어렵게 살아온 삶을 통해서, 샐러리맨들의 우상이 되어버린 이명박의 캐릭터에 나쁜 감정을 넘어서 애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여튼 각색한 드라마까지 색안경을 쓰고 압력을 받는다는 현실에 작가뿐만 아니라 출연진들도 반발하는 게 당연했다. 특히 이명박 배역을 한 유동근은, 이명박 역할이 정치적으로 부담이라면 자기만 빠지면 되지 않느냐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조기종영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이명박 시장이 대권에 뜻이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올해는 대선이나 중요한 선거가 있는 해가 아닌데도, 정치적 해석 때문에 드라마를 도중 하차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영웅시대’가 70회로 종영되는 시점에서, 집필했던 작가 이환경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외압설 제기의 배경을 밝혔다. 그는 “‘영웅시대’ 1부 시작 전 MBC가 아닌 외부의 인사로부터 ‘앞으로 무엇 무엇을 조심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성 전화를 직접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MBC도 외부로부터 모종의 압력을 받고 조기 종영하는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1990년 초 KBS의 ‘야망의 세월’과 ‘영웅시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사라진 이 비운의 TV 드라마를 통해 공중파 방송의 위력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치의 유치한 현주소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삼성의 리더십과 서울시의 리더십
삼성전자라는 거대 조직의 주력이 이공계 출신으로 재편되는 과정에는 이공계의 대부 격인 윤종용 부회장의 리더십이 컸다. 그는 21세기의 CEO가 꼭 갖추어야 할 리더의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덕목을 들고 있다.
①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와 통찰력 ② 변화를 추진하는 강력한 리더십
③ 인재 육성과 현장 경영 ④ 계수에 능할 것 ⑤ 국제적인 감각
이명박과 윤종용 두 CEO의 연배가 세 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현대와 삼성에서 각기 최고경영자로서 재직한 전성기를 비교하면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즉 CEO 이명박이 현대를 떠난 92년도 당시 윤종용이라는 이름 앞에 CEO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이 서울시장이 된 후 발휘하고 있는 리더십을 보면, 지금 윤 부회장이 말하고 있는 위의 다섯 가지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이 시장이 서울시에서 시도한 파격적인 행보 몇 가지를 5개 항목에 순서대로 대입시켜 보면, 삼성과 서울시의 리더십이 어떤 면에서 닮은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①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와 통찰력 - 서울시의 미래가 어떻게 가야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이명박은 시장이 되기 전에 명쾌하고도 단순한 두 가지의 예측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공무원들의 머리에 자신의 구상대로 경영 마인드가 주입되기만 하면 서울시가 세계 최고의 서비스 경쟁력을 갖춘 수도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복안을 갖고 있었다. 청계천 주변 22만개의 상인들과 600여 개가 넘는 각종 단체들을 이해시키고 교통을 분산시키는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들은 스스로 과거의 타성을 벗어던졌던 것이다. 경영 마인드가 주입되지 않고서는 단기간에 그런 협상이 성립되기 어렵다.
또 하나는, 서울시의 이미지가 사람과 환경이 중시되는 문화도시로 바뀌어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전폭적인 협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예측을 했던 것이다. 교통체증 문제를 버스노선의 완전회수와 전면 개편으로 조기에 해결할 수 있었던 것과, 강북 뉴 타운 건설사업에 있어서 지역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 바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에 힘입은 사례였다. 다시 말하면 공무원들의 자발성과 시민들의 동참의식, 이 두 가지를 효과적으로 끌어내지 못하면, 서울 리모델링은 출발선상에서부터 좌절하게 된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② 변화를 추진하는 강력한 리더십 - 그는 리더십에 관한 한 자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대표 선수였고, 그래서 ‘불도저’라는 수식어를 20년 이상 달고 다녔다. 문제는 서울시장이 되고 난 후, 그 소문만 들어왔던 강력한 리더십 때문에 지레 겁을 먹어서 불안스러워 하는 공무원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혼탁하고 첨예한 선거판에 휩쓸렸던 상당수의 간부들은, 이명박의 입성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직위를 내세워서 청계천 프로젝트의 불가능을 역설했던 전과(?)가 있었다.
‘두려운 리더십’에서 ‘포용의 리더십’으로
이명박은 반대 입장에 섰던 직원들을 포용하지 않고서는 계획한대로 서울시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취임 초에 이들의 신병 처리를 요구하는 측근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반대파의 명단 자체를 없던 일로 덮어버렸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이 ‘두려운 리더십’에서 ‘포용의 리더십’으로 전환된 것이다. 특히 황금 노선과 적자 노선으로 얽혀서 수 십 년간 의혹 속에 운영되어 오던 대중버스 노선문제는,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이명박 시장의 ‘변화를 추진하는 강력한 리더십’이 없었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데 이의를 다는 공무원이 없을 정도이다. 변화라는 것은 누구나 두려워하기 마련이고, 두렵기 때문에 전격적으로 그 두려움을 돌파하여 변화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시장은 변화를 보며 두려워하는 직원들보다 변화 속에 파묻혀 변화를 즐기는 직원들을 만들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③ 인재 육성과 현장 경영 - 시장 취임 초부터 이명박은 형식적인 업무보고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전체 서울시 직원들을 교대로 삼성그룹의 용인 연수원에 입교시켰다. 기업의 경영마인드를 익히는 재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업그레이드된 공무원상을 원했던 것이다. 자신이 기관차가 되어 혼자서 힘겹게 끌고 가는 것보다 기관차의 역할을 이해시키는 것이 변화를 유도하는 데 더 효율적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만이 자신이 서울시장자리를 떠나더라도, 각자가 작은 기관차로 움직일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시스템이 살아있으면 사람이 바뀌어도 상관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재교육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각 부서에서 추천받은 인재들을 선진국의 수도로 파견시켜 직접 앞선 나라 공무원들의 하루 일과를 관찰하게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자신이 서울시에서 하던 일과 선진국의 공무원이 하는 일은 비슷했지만, 처리하는 방식은 확실히 달랐다는 걸 깨닫고 들어 온 것이다. 인재를 달리 육성하기보다 원래 인재였던 공무원들의 잠재적인 역량과 자존심을 끌어낸 결과였다. 재교육을 받고 파견을 나갔던 직원들은 그들이 느낀 대로 본 대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종전의 매너리즘을 하나 둘씩 걷어낼 수 있었다. 마침내 현장을 오가던 어떤 간부들은 “평생 일한 것보다 2년 동안 일한 게 더 많은 것 같다.”는 자조 섞인 말도 했지만, 그 말은 현장 경영을 중시해 온 시장에게는 자부심으로 들렸던 것이다.
④ 계수에 능할 것 - 계수에 능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빈틈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아껴 쓰고 효율적으로 예산을 집행하는 데는 차라리 귀신에 가까웠다. 정주영 회장이 그를 크게 신임하게 된 계기가 바로 금고지기를 시켜본 후였기 때문이다. 정 회장의 씀씀이는 더 확실했다. 일을 위해 쓸 때는 확실하게 쓰지만, 자신을 위해 양복 한 벌을 사거나 구두 한 켤레를 사는 데는 천하의 구두쇠 중에도 그보다 더한 이를 찾기 어려웠다. 그런 정 회장의 결재권을 20년 이상 대행한 게 이명박이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처음 청계천 복원 비용으로 계산했던 예산이 3,700억 원이었는데 공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보면 거의 맞아떨어졌다. 그 예산은 완공 후 청계천 주변 활성화로 유발될 경제 효과를 감안하면 몇 십 배나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월드컵 이후 활용 대책이 없어 수십억씩 적자를 보던 상암동 월드컵 운동장을 단숨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이명박 시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는 서울시 재정
천문학적인 지하철 부채를 줄여서 서울시의 재정상태도 획기적으로 개선시켜 놓았다. 적어도 서울시의 재정 수지에 관한 한은, 이명박 시장 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 바가지를 사지 않고도 깨진 바가지를 수리하여 그보다 더한 성과를 내는 길을 찾아내도록 만드는 게 그의 경영방식이다.
⑤ 국제적인 감각 - 건설회사 CEO로 성공한 이명박이라고 국제감각이나 문화에는 까막눈이라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까막눈이다. 2004년 9월 이탈리아 베니스의 ‘국제 건축비엔날레’에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 사례를 들고 나가 대상을 받고, 국제행사에서 외국인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게 된 것도 서울이라는 브랜드 홍보를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여 성공한 사례였다.
‘Hi Seoul'에 이어, 한성(漢城)을 ‘서우얼’로 표기 변경
취임 초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영어로 표현했다고 못마땅해 하는 반대를 무릅쓰고 ‘Hi Seoul’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확정한 것도 이명박 시장이었다. 2005년 1월에는 중국만이 대한민국의 서울을 ‘한성(漢城)’으로 표기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처음으로 이를 한국식 발음에 가까운 ‘서우얼’로 고쳐 표기하도록 함으로써 중앙정부가 할 일을 서울시가 대신 해내기도 했다.
해외출장이 잦았던 이명박은, 첨단기업과 국제박람회 등을 통해 산업 전반의 흐름을 꿰는 것 외에도, 짬나는 대로 연극이나 오페라 등 예술 공연을 보며 문화예술적인 안목을 넓혀나갔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 사람은 앞만 보고 사는 사람으로 아마 취미도 없을 것이다. 일이 취미일 것이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오해다. 나는 실제 일을 즐기지만 한편으로 내 취미생활도 철저히 즐기는 스타일이다.”
그는 틈나는 대로 취미생활을 해왔다. CEO가 되기 이전부터 비즈니스를 위해 다양한 문화권의 각계각층 사람들과 만나야 했기 때문에, 대화 소재를 위해서도 국제적인 문화의 흐름을 익혀야 했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경험 때문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이미지의 사람은 일만 하는 사람이다. 일이 취미이며 일이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성공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에티켓과 같은 것이다. 다양한 문화를 경험함으로써 많은 분야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는 열쇠를 쥘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삼성과 서울시는 비록 상품과 도시로서 그 취급품목은 다르지만,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일류가 되고자 자존심을 걸고 승부한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리더십의 적용을 받고 있다.
죽은 박정희가 산 대통령보다 더 인기를 얻는 이상한 나라
이명박은 “어쩌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사라지는 그때가 비로소 우리나라가 제 위치에 서는 날이 아닐까?”라고 희망하는 사람이다. 증오든 향수든 간에 죽은 박정희가 산 대통령보다 더 큰 인기를 얻는 나라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업 경영과 국가 경영이 경영의 본질에서는 같다고 생각하여 정치를 시작했고, 나름대로 정치 신화를 꿈꾸는 이명박이다. 그의 극복 대상은 오직 과거의 발상을 뛰어넘는 미래에 있다. 그의 육성에 담긴 신념은 더 생생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저는 정치든 행정이든 과거의 발상으로는 안 합니다. 그런 정치, 그런 행정이라면 제가 아니라도 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저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세대는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말을 정치인의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명박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한번 꺼낸 약속을 목숨처럼 알고 지켜온 포항의 ‘영일만 사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