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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원 교무님 설법
오늘은 대종사님께서 밝히신 삼학의 수행중에서 정신수양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저를 보세요. 여러분 정신 있으시죠? 정신이 어딨습니까? 마음 있으시죠? 마음이 어딨습니까? 마음 쓰고 사시죠? 원불교는 마음공부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운동을 배워도 큰 스승한테 배워야 효과적으로 큰 성취를 얻을 수 있습니다.
대개는 남다른 역량을 보면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이 밥을 몇끼 안먹었다더라 내지는 공중부양을 하거나 신통이 있는 사람이 수양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면벽을 몇 년 했다더라, 산속에서 수행을 몇 년 했다더라 , 몇 년간 잠을 안자고 수행했다더라 하면 그런 것을 보면 대중들은 뻑가기도 하고 따라합니다. 얼마동안 기도를 했고 염불을 몇 시간씩 하고... 그러나 그런 것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원리를 알지 못하고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에 병이 오고, 하다가 말거나 여러 가지 독설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늘 설명할 것은 원불교의 마음이 아니라 여기 있는 우리들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원불교 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쓰고 있는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맨 위의 일원상을 봅시다. 이것은 원불교에서 말하는 신앙의 대상 수행의 표본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참 모습이 일원상입니다. 좌측에 보면 성품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성품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많은 의두요목들이 나와 있습니다.
1. 마음의 원리 - 성품자리, 정신, 마음, 뜻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이 무엇인가.
- 한 생각이 아직 나오기 전 자리 , 이 자리를 성품자리라고 이야기 한다. 한 생각이 나온 것은 정신이고 이것이 분별을 하면 마음이 된다. 저를 바라보고 “김제원 교무님이구나 ” 하고 아는 것은 정신이다.
여기에 한 생각이 더 들어가서“제원교무님은 잘생겼다” 하는 분별심이 나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 => 분별성分別性
주착심主着心
정신은 마음에 분별성과 주착성이 없는 경지를 이야기한다. “오늘 원불교 가야겠다”라고 하는 생각을 가진 것은 우리가 뜻을 세우고 뇌가 “그래 가거라” 하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보통사람은 안이비설신의가 왔다라고 생각한다. 안이비설신의를 주관하는 것은 뇌이고 뇌를 움직이는 것이 뜻, 즉, 마음이더라.
정신은 어디서 나오느냐? 성품자리에서 나온다. 반야심경에 공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성품자리를 말한다. 정신은 곧 공이다. 공은 공이되 공이 아니다. 이것을 진공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내 마음의 원리가 뭐고 내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 가를 알고, 또 그것을 알려주는 곳은 정말 드물다. 어떻게 하면 안의비설신의를 고칠 수 있을까를 알려주는 곳은 많지만 마음의 원리를 설명하는 곳은 없다.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 종교이다. 기독교는 희망을 가지라 하고 사랑의 정신으로 그것을 제도하고자 하고 원불교는 서원과 신심의 뜻을 가져라 한다.
보통 사람은 그 뜻을 욕심으로 여기고 온갖 분별성과 주착심으로 살아간다. 나는 소심한 사람이다. 나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사회에서는 ego라 한다. 사람들은 잠재의식 속에 나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하면서 스스로가 자신의 다양성을 차단한다. 여러분은 본인을 어떠한 사람으로 생각하는가? 멍청한? 똑똑한? 악한? 착한? 부드러운? 강직한? 온순한 사람인가?
그런데 주착심의 근본으로 들어가면 분별심이 반복되어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분별성이 반복이 되면 그것이 주착심이 된다. 반복되다 보면 판단력을 잃어버리기 쉽지만, 주착심도 본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분명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것은 반복되어서 생기는 마음이다.
마음공부는 이런 전체적인 원리 속에서 무엇이 들어서 그러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좋고 싫고의 마음이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있었는가? 지난주에 말씀드리기를 마음은 ‘공부한다, 대조한다, 작용한다’라고 이야기한다. 마음을 공부하지 않으면 찰나찰나 별의별 마음이 무진무궁하게 든다.
마음은 어디서 나오느냐? 정신에서 나온다.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것이 있다. 신령스럽게 아는 그것을 정신이라고 하고 참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면 저 정신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 보통 사람들은 뇌에 있다고 생각을 한다.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그것을 마음, 정신, 영지라고 한다.
마음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을 한번 찾아가보자.
1. 어제와 오늘 사이로 가자 . 잠들기 전에 마음이 있다. 영지도 있다. 그런데 꿈꿀 때는 영지가 있을까 없을까? 있다고 하자. 꿈도 없이 잠들고 있다면, 그때에는 영지가 어디에 있을까? 네 번째 자명종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깰 때에, 세 번째 자명종 소리가 날 때 까지는 영지가 어디 있을까? 이것을 알면 견성을 할 수 있다. 오늘 한번 이것을 뚫어버리자.
2. 일념미생전 으로 예를 듭시다. 지금 저를 보세요. 지금 저를 보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 생각이 나오기 전, 그 생각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3.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아는 영지가 있을까요? 영식이 들어가기 전,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이 때의 영지는 어디에 가 있을까요?
4. 생을 다 마감하고 난 후 이때에는 영지가 어디 있을까?
공원정의 공부표준에 대해서 읽어보자. 유무초월한 자리를 말하는 것.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 자리를 말하는 것. 원정무별한 진경. 이 자리가 그 자리인가? 변산구곡로에 석립청수성이요. 돌이 서서 물 소리를 듣는다. 물 소리를 듣고 있을까? 돌이 듣고 있는 것과 제 말소리를 듣고 있는 여러분 정신을 비교해보자. 똑같다. 그 둘은 하나도 안 틀리고 똑같다.
질문: 돌이 듣고 있는지 안 듣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 대종사님이 미리 답을 주셨다. 무무역무무요 비비역비비. 없는 것도 없고 아닌것도 아니다.
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영지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천년학이란 영화를 보았더니 ‘꿈이요, 꿈이요, 꿈이로다. 꿈을 깨어서 다시 보니 거기도 꿈이로다. 그러니 무슨 꿈을 깨어서 다시 보는가?’ 오정혜씨가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보통 사람은 이 목소리를 듣고 아는 이것이 ‘나다’라고 생각하면서 산다. 더 하급은 이 몸이 자기라고 알고 산다. 그래서 나의 몸, 나의 손, 나의 무엇이라고 하고 산다. 한수 더 위인 사람은 영혼이 나겠지 하고 생각한다. 이렇게 알고 사는 사람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바로 저 말이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만약에 영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생긴 것이요, 생긴 것은 반드시 멸한다. 우리의 정신은 분명히 유는 유인데 실체가 없는 유이다.
眞空 │ 妙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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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寂 │ 靈知
2. 원불교의 수행 - 진공묘유
원불교에서는 수행은 보통의 수행과 다르다. 마음이 편안하고 깨끗하면 그것을 수행이라고 하지만 원불교의 수행은 진공묘유의 수행을 해야 한다. 마음을 잘 쓰자고 할 때는 묘하게 있어지는 마음, 그 마음을 이야기 한다. 마음을 잘 쓰려면 그 마음의 실체를 알아야만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
지금 제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김제원이라는 영지라고 하는 뭔가 자그만 한 무엇이 들어서 그것이 설교를 하고 있지요? 그런데 정말 그 실체가 있다면 꿈도 없이 잠잘 때는 그러면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죄선 , 염불, 기도 하는 것이 수양이 아니고 그것이 마음공부가 아니라 마음의 원리와 실체를 알아서 그곳에 합일하는 것, 그것이 수행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실체도 모르고서 내가 수행을 한다고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말 “ 너 자신을 알라” 는 말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가 너라고 알고 있는, 영지라고 알고 있는 그것도 너가 아니다. 너 자신이라는 것은 텅 비어서 경계 따라 튀어나는 것이다.
보통사람은 왜 마음병에 걸리는가? 나라는 것이 있어서 너를 바라보고 나라는 것이 있어서 너를 해결하려고 한다. 나라는 것이 없이 활동하는 것이 그것이 원불교 공부이다. 그래서 무시선법에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라고 한 것이다.
공이 불공 공은 공이되 공이 아니다. 적적성성 고요하고 두렷하다. 이것들은 다 같은 말이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고, 이것을 실체로 생각하고 마음에 들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학문도 아니고 교리도 아니다.
공부표준을 보면 주 일념미생전처 ; 한 생각이 나오기 전 자리, 그 자리에 머물러라. 그 자리가 관 유무초월이다. 유와 무를 초월해야 한다. 유와 무를 초월하는 것을 관하는 것, 그 자리가 진공묘유, 공적영지, 성품자리이다. 분별망상이 끊어진 곳.
우리가 좌선을 하는 것은 원정무별한 그 자리에 가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한다는 것은 마음을 공부해서 정신을 수양하고 성품을 오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교무님의 설명을 듣고 아는 것은 그저 건지이다. 절대의 경지는 설명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설명을 듣고 알았다면 그것은 본인이 의두를 가지고 있다가 연마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스승들은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 깨칠 때까지 알려주지 않는 것이 큰 은혜가 된다.
우리가 외부의 큰 경계가 오면 그럴 때 가장 근원적 해결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보통 사람은 육신이 괴로우면 이런다. “교무님, 저 여행을 다녀오겠습니다.” 한다. 이것은 경계를 피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것은 대치라고 한다. 대신 두는 법, 그저 피경법일 뿐이다. 술을 먹는 것도 일종의 대치법이다. 술을 먹고 단지 잊어버릴 뿐이다. 조금 더 생각이 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계속 생각한다. 그렇다고 마음으로 계속 생각하면 더 엉기고 꼬일 뿐이다. 이것을 마음공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분별심을 분별심이 대치하는 것은 마음공부가 아니다. 경계를 볼 때마다 머리가 뜨거운 것은 그것은 마음공부가 아니다. 마음을 챙겨서 공부하고 성품자리에 대조하여야 한다.
성품의 큰 바다에 풍덩 빠졌다 오면 끝난 버린다. 그 자리에 무슨 비교가 있고 억울함이 있을 것인가? 그 자리는 억울함도 없고 분별도 없고 심지어 선악도 없다. 없다는 것도 없다. 이렇게 마음공부하는 것을 회광반조廻光反照 자성반조自性返照라고 한다.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바로 이런 것이다. 자성반조, 자신의 성품자리를 반조하는 이 마음공부가 바로 원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마음공부이다.
어떤 사람은 신심반조, 교법반조를 하기도 한다. 그것에 대조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서원을 반조하기도 한다. 제생의세나 서원반조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인과를 반조하기도 하고 사은의 은혜에 반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공부를 넘어서서 가장 대표적인 공부는 자성반조하는 공부이다. 이 공부는 어떠한 억울함도 다 녹여버릴 수 있다. 이 자리는 백척간두 진일보 할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진 자리이다. 생사의 경계와 같은 한계상황이 왔을 때, 포기하고 놓는 것이 아니라 웃어버리면서 놓는 그 경지가 백척간두진일보이다. 이 상황에서 진일보한다는 것은 나라는 것을 놓는 것이다. 내가 없는 그 자리에 들어가면 나라는 것을 놓을 수 있다. 자포자기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이 자리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 자리에 드는 것이다.
원불교의 정신수양은 이 성품을 깨치고 합일하고, 이 자리에서 나오는 정신을 수양하고 정신에서 나오는 마음이 서원의 뜻에서 나오도록 하고, 내 육근을 통해 바르게 쓰고자 하는 그것이 원불교의 마음공부이다. 설명은 길지만 이런 단계가 길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순간, 찰나에 일어난다.
3. 마음공부는 왜 하는가?
종법사님께서 인사이동을 할 때 내려주신 법문이 공거래 공거래 空去來 公去來 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거래 할 때 빈 마음으로 거래를 하지 않는다. 성품자리에 바탕한 거래를 하면 빈 마음으로 거래를 하고 국한이 없는 빈 마음으로 거래를 할 수 있다. 空卽公,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온 우주를 감싸 안을 수 있다. 양성의 원자리란 바로 이 자리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걸림이 없다. 만약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칭찬하던 비난하던 무시하던 상관이 없어한다. 본래 마음자리는 사심, 선악, 염정이 없다 . 사사는 ‘이것이 나다’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 사사이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훤히 다 안다. 두렷하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 사람이다.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았다. 과연 내가 들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 없이 내가 어떠한 나라를 위한 공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가? 이 자리를 아는 사람은 프랑스 대통령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살아도 꿈속에 꿈이다. 꿈 깨보았자 꿈이다. 나라는 일체가 ‘있고’ 그것이 나인줄 알고 산다. 무엇이 나인지도 모르는 삶은 이리도 허망하다. 대종사님은 이것을 말씀하고 싶은 것이다.
경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대상이다. 이것은 외부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좋아졌다 슬퍼졌다 하는 마음들은 경계를 따라 생기는 마음들이다. 이런 마음들은 육신의 소속이다. 좋아졌다 싫어졌다 하는 마음은 육신이 사라지면 다 사라지는 것이다. 보통사람은 이 육신하나 돌보며 마음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죽는다.
우리 원불교 마음공부는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는 정신의 세계를 연마하는 공부이다. 수행의 힘, 인연, 서원, 이런 것들은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지속적인 공부를 통해서 닦은 습관된 힘, 이런 것들은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이다. 8식에 저장된 것들은 내생에도 가져갈 수 있다. 보통사람들은 육신을 보위하다가 죽어가지만 영생을 보는 사람은 내가 가져갈 것에다 공을 들인다.
한번 듣고 아는 것은 기억에서 끝난다. 기억은 육신에 속한 것이다. 법문도 계속 듣고 반복해서 제 8식에 저장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내생에도 비슷한 경험을 하면 남들보다 빨리 알고 수행의 힘으로 금방 깨칠 수 있다. 석가모니 이후에 가장 많이 깨친 분이 육조스님이다. 그 분은 길을 가다가 한 소리 듣고도 아시었다. 이 분은 전생에서부터 계속 수행을 해서 8식 9식에 저장을 한 것이다.
9식 성품자리는 선악, 남녀, 지식 유무의 구분이 없는 평등한 자리다. 평등한 가운데 불평등하고 불평등한 가운데 평등한 자리가 일원상의 진리이다. 이 9식 속에서 8식에 뭘 저장할 지에 따라 내생이 달라진다. 이것을 알면 좌선을 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경전을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알아야한다. 이것을 알아야 철저히 공부하고 수행한다.
성품은 깨쳐 얻는 것 회복하는 것 단련하는 것이고, 정신은 수양하는 것이다. 마음은 공부하고 대조하고 적공하고 자공하고, 뜻은 서원과 신심이다.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다. 있다고 하자니 형체가 없고 없다고 하자니 다 듣고 알고,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다. 원래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는다. 이 자리를 일러서 성품, 태극, 하느님, 진리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성품자리를 깨쳐서 온전한 정신으로 마음을 잘 대조하는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마음은 생주이멸하는 것이 특징이다. 마음은 금방 바뀐다. 사람은 근원적인 뜻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서원이다. 원불교를 만나서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써서 그 뜻을 제생의세 성불제중에 일치시키면 그 사람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살면서 생각하고 쌓아두고 간 모든 것 반복이 되어 내생에 가지고 갈 것이다. 원불교를 신앙하여 모든 것이 제 8식까지 가주어야만 내생을 보장 받을 수 있다.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묘한 것인지는 다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 단상에서도 강연을 하면서 수많은 각오들을 하지만 금방 그 마음들이 떠나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정신수양의 요지>
정신이라는 것은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이다. 보통사람들은 분별성과 주착심의 노예로 7정에 얽매여서 산다. 그런 마음들이 없는 그 경지가 바로 참 정신이다. 정신을 수양하면 자신의 본래의 마음자리에 합일하기 때문에 행복하고 편안하다. 성성하다는 것은 밝게 영지가 비추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을 수양해야 한다.
수기망념修其忘念 -잡초
양기진성養其眞性 -곡식
참 성품을 기르는 것을 양이라고 한다. 망념이 많으면 진성이 숨는다. 망념은 닦는 것이 아니라 망념은 쉬는 것이다. 망념을 쉬고 진성을 들어나게 하기 위한 공부법이다. 망념이 망념을 없애려 들면 망념이 더 심하다.
망념을 놓으면 진성은 알아서 나온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진흙탕에 빠뜨렸을 때 휘저으면 더 찾지 못한다. 가만히 놓아두면 보이듯이, 망념을 놓으면 지혜광명이 솟아오른다. 보통 사람은 영업을 하면 돈을 찾아가지만 정신 기운이 맑은 똑똑한 사람은 돈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고 사람을 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농사를 지을 때에는 곡물을 키우자는 것이지 잡초를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곡식을 기르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지 수행이 마치 금욕적 생활만 죽어라 하는 것이 아니다. 신분의성을 기르면 불신탐욕나우와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 불신탐욕나우를 잡으면 신분의성이 나오는 원리도 있지만, 잡초제거하는 일이 농사의 목적은 아니다.
<정신수양의 목적>
유정물有情物 = 사생四生 = 육도六道
몸을 받았든 못받았던 여섯가지 길로 윤회를 하는 것이 사생이다. 유정물은 배우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그중에 최령한 사람은 보고 듣고 배우고하여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동물의 몇 배 이상이다. 동물은 배부르고 춥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고 싶고 원하는 것이 엄청나다.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하려고 하면 예의염치와 공정한 염치를 생각할 여유도 없다. 정신수양의 목적을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욕심을 제거하는 수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욕심에는 5가지가 있다.
1. 재물욕 財
2. 색 色
3. 명리 名利
4. 식 食
5. 수면 睡眠
그런데 욕심은 버려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까? 손 한번 들어봅시다.
취해야 할 것이다 하는 사람도 다시 손 한번 들어봅시다.
세상은 사실 저 5가지로 굴러간다. 돈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과하기 때문이다. 재물에 빠져서는 안 된다. 색은 주로 남녀욕을 말한다. 명리는 명예, 식은 먹는 것 수면은 자는 것. 사람이 태어나서 정신수양이 없으면 이 5가지만 하다가 죽는 것이다. 온전한 정신으로 서원을 세워서 남을 위해 사는 삶을 살지 않고, 저 5가지에 매여 사는 사람은 동물과 같은 사람이다. 사실 짐승도 베풀 것은 베풀고 살지 않는가.
이번에 미국에서는 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 미국은 돈이 있으면 대우를 해준다. 배금주의가 만연하다. 우리나라도 사실 이것이 많아졌다. 특히 서울이 심하다. 그런데 주천이라는 곳이 전북에 있다. 주천이 댐을 위해 수몰지역이 되었다. 그러면서 보상금을 받게 되었는데 인심 좋은 시골도 보상금을 위해 형제지간까지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재물은 한 생을 살면서 가져가지 못한다. 예전에 이집트 미라를 보면 정말 이것들을 가져가고자 하는 어리석음이 보인다. 중국의 왕들도 자신의 부장품을 엄청나게 묻어서 숨겨놓은 무덤들이 많이 있다. 다 유물밖에 안되었다.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어느 순간 모두 가고 모든 것을 두고 간다. 돈은 절대 가져가지 못한다. 돈과 행복이 비례하지는 않다. 너무 없으면 힘들겠지만 과할 필요가 없다.
[천지만엽으로 늘어가는 욕심을 제거하고...]
돈이 많으면 삭신이 고생이다. 지켜야할 것 아닌가. 벌다가 죽든가, 지켜려다 죽든가. 제생의세의 서원이 있는 사람은 돈을 벌고 명예도 벌어도 제생의세를 위해서 쓴다. 내 머릿속이 복잡하고 어려워도 제생의세를 위해서만 산다. 원불교는 원불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도 원불교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대종사님도 원불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중생들을 위할 것인가를 위해서 집도 짓고 책을 내고 봉사도 하고 하는 것이다. 서로서로 돕고 서로 행복해지게 살자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목적이고 대종사님의 목적이다. 꿈을 깨도 꿈속에서 사는 중생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할까가 대종사님의 본의이다.
[....자주력을 얻자는...]
온전한 정신을 얻어 자주력을 얻기 위해 수양하는 것이다. 자주력의 반대되는 말은 노예란 말이다. 남의 칭찬에 이끌려 사는 사람, 자기 일정에 끄달려 사는 사람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는가? 더 편하고 즐겁게 사려는 욕심 때문에 정신없이 괴롭게 사는가? 맨날 그렇게 칭찬받고 인정받을지 분별심 주착심에 시달리며 사는가? 내 스스로가 행복하게 자가발전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주력이 있는 사람이다. 내 스스로가 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원한을 가진다. 무엇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진짜 내가 나를 위해 사는지, 진짜 내가 무엇인지.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내가 주체가 되어 참 나를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정신수양의 결과>
우리가 기도를 하고 염불좌선을 하고 다양한 동시 수양을 해 나갈 때, 마음을 챙기고 마음을 흔들려 하지 않게 한다는 것은 많은 반복과 수양을 통해 가능하다. 좌선을 통해서 성품자리에 자주 가본 사람은 쉽게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다. 자성자리에 자주 가봐야 쉽게 갈 수 있다. 이렇게 수양력을 갖추고, 안이비설신의에 쏠려 있는 힘이 온전한 내 정신으로 와줘야 한다.
정신을 수양하지 않으면 병이 온다. 정신을 수양하는 것은 내 인생을 내가 주체가 되어 살아가기 위한 당연한 일이다. 이것을 돌려 말한다면 내가 정신을 수양하지 않는 것은 내가 지금 노예생활을 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을 수양하는 시간은 정말 행복을 만끽하는 시간이다. 정신을 수양해서 얻는 성품자리에 대한 오득은 내생에도 나와 함께하고 내생에도 나와 함께한다. 내 마음에 힘이 생기면 돈, 이성, 명예, 먹을 것, 잠조절 모든 것이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 이것이 주와 종을 구분해서 사는 것이다. 인간관계 감정조절도 결국 수양력을 기르면 얼마든지 해결해갈 수 있는 기초가 된다.
□ 질문과 답변
Q : 성품자리는 공자리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일 것인데 왜 맑다고 표현을 하셨는지 헷갈립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하고 말씀하셨는데 옳음이 아니라 왜 그름이 없다고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수양을 통해서 맑아질 수 있는 것이기에 ‘맑다’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심지는 그름만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도 뭐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따라서 묘하게 있어지죠. 진공자리만 성품자리로 아는 사람은 묘하게 있어지는 마음을 눌러 버립니다. 육신은 마음에 상당한 영향을 받습니다. 나오는 마음 자체를 수양을 못해서, 공부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진공묘유하듯, 공적영지하듯, 묘하게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챙기고 챙기고 또 챙겨야 합니다. 챙길 때 가장 힘을 발휘하는 것이 서원이나 목표에 중심축을 잡는 것입니다.
Q : 마음을 챙긴다고 하셨는데 평상시에 챙기는 방법과 좌선시 마음을 챙기는 것이 다른가요?
A : 다릅니다. 동시와 정시가 다릅니다.
무시선법에 나와 있기를, 동시에는 일심을 놓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달리기를 하며 주문을 외우다가 양상모 선생님한테 이것이 일심인가 물어보니, “이놈아, 달리기할 땐 달리기만 해라.”하시더군요.
정시에 마음을 챙기는 것이 잘 안되면 동시에도 마음을 챙기는 것이 힘듭니다. 분별심으로 분별심을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Q : 장례식장에 가면 조문객에게 빙의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 그런 정신이 못 들어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A : 정신력이 강한 사람에게는 들어가는 예가 없다. 들어갈 땐 정신을 쳐서 약하게 만들어서 들어간다. 대종사님은 진짜 무서운 귀신은 살아있는 놈이라 하셨다.

첫댓글 평소보다 긴 법문을 타이밍하느라 수고해주신 혜은 교우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론 농땡이 안 피울께요 ^^;
정리 감사합니다요~~~ ㅁ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