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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군은 조나라 무령왕의 아들이고, 혜문왕의 이복 동생이고 효성왕의 숙부입니다. 이름은 조승이고, 혜문왕과 효성왕 때 재상을 세 번 하였고, 재상이 아니였을 때도 그 영향력이 막강했던 인물입니다. 맹상군 못지않게 식객들을 모으고 그들을 진심으로 접대했습니다.
평원군은 조나라 공자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아량이 있고 행동이 대범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평원군은 전국 사공자 중에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인물로 생각됩니다. 전체적인 판세를 바라보는 눈이 없고,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남이 깨우쳐 주면 금새 알아듣고 바로잡지만, 자신이 홀로 한 판단은 대개 어긋나고 맙니다.
평원군 열전은 평원군이 다른 사람의 간언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평원군의 집 누각에서 그의 첩이 평원군의 집 앞을 지나가는 절름발이를 보고 크게 웃었다고 합니다. 절름발이는 평원군을 찾아와서 "첩의 머리를 내어달라."고 요구합니다. 평원군은 "한 번 웃었다고 첩을 죽이겠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하고 절름발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 1년이 지나자 그의 빈객과 집안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서 그 수가 반이 넘었다고 합니다. 평원군이 이상해서 식객들에게 물으니 "귀하가 절름발이를 비웃던 첩을 죽이지 않아서, 귀하가 여색은 좋아하면서 선비는 천시한다고 생각해서 빈객들이 떠난 것입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첩을 죽여 그 목을 절름발이에게 주고 사과하니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옛날 역사를 읽다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읽으면 기분이 좋지 않게됩니다. 인권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특히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 함부로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평원군의 애첩이 절름발이를 비웃은 것은 정말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렇다고 첩의 목을 달라는 절름발이의 요구도 지나치다는 평원군의 처음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평원군의 남동생이나 아들이 절름발이를 비웃었다면 평원군은 과연 아들이나 남동생을 죽였을까? 아니 절름발이가 평원군에게 감히 남동생이나 아들의 목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손자 오기 열전에서도 손무가 오왕 합려의 후궁들과 시녀들을 가지고 제식 훈련을 하다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합려의 두 후궁의 목을 벤 것도 항상 찜찜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자들로서는 군사훈련이 아닌 장난인줄 알고 웃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걸 명령 불복종으로 몰아 죽여버리니 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진나라와 조나라의 장평대전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진나라 재상이었던 범저의 원교근공책에 따라 한나라 땅을 남북으로 갈라 놓은 다음에 북쪽 땅인 상당군을 접수하려는 진나라에 대항해서 상당군 태수 풍정이 상당군을 진나라에 뺏기느니 차라리 조나라에 바치자는 계책때문이었습니다. 상당군이 조나라에 항복 의사를 전하자 조효성왕은 공짜로 땅을 얻게되었다고 기뻐하며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평양군 조표는 진의 공격이 뒤따를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평원군 조승은 왕의 뜻에 따라 찬성해서 상당군의 항복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때문에 분노한 진나라 소왕과 범저는 대군을 일으켜 상당군을 공격하게 되고 장평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평원군의 이 잘못된 판단때문에 조나라는 장평대전에서 참패했고 45만명의 조나라 군사가 땅에 파묻혀 죽었습니다.
또 조효성왕이 염파를 대신하여 조괄을 장군으로 임명하려 할 때도 인상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조괄은 경솔한 인물이라 장군감이 아니라고 반대했지만, 효성왕은 끝끝내 조괄을 장군으로 삼아 장평에 보냈다가 결국 조나라가 패배하게 됩니다. 이때 평원군이 조괄의 임명을 반대했다는 서술이 열전에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왕의 뜻에 영합하여 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번의 잘못된 판단이 조나라를 거의 멸망시킬 뻔 했습니다.
장평대전이 끝난 후 이듬해 진나라 장군 왕흘이 조나라 수도인 한단을 아홉달 동안이나 포위하고 공격하니 조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처럼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한단의 포위를 벗어날 방법은 다른 나라와 합종해서 구원군을 얻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위나라 신릉군의 누나가 평원군의 부인이었으므로 평원군은 위나라왕과 신릉군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신릉군은 위나라 왕 안희왕에게 여러차례 구원군을 보내자고 진언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나라를 두려워 하던 안희왕은 진비라는 장군에게 10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로 가게 하지만 국경 근처에서 사태추이를 관망하게 합니다. 그리고 초나라는 조나라와의 합종을 결정하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나중에 위나라 신릉군이 위왕의 병부를 훔쳐서 장군 진비를 죽이고 진비의 군대 8만명을 거느리고 조나라를 구원하게 됩니다.
초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기 위한 사신으로 평원군은 자기가 직접 가기로 합니다. 나라가 멸망할 지도 모르는 위기에서 평원군은 이런 노고를 사양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보좌하여 사신단으로 갈 사람 20명을 자신의 식객중에서 선발해서 가기로 하고 19명은 뽑았는데 1명을 아직 뽑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객 중에 모수라는 사람이 자신을 데리고 가 달라고 청합니다. 평원군은 모수에게 "식객으로 들어온 지 몇년이나 되었습니까?"라고 물으니 모수는 "3년이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평원군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주머니속에 들어간 송곳과 같아서 그 끝이 즉시 드러나기 마련인데, 3년이 되도록 주변 사람 중에 선생을 칭송하는 사람도 없고, 누가 선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듣지 못했으니, 이는 선생이 무능하다는 뜻이니 선생을 데려갈 수 없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모수는 "저는 오늘에야 주머니 속에 넣어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주머니에 들어갔다면 송곳 끝이 아니라 자루까지 나왔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를 낭중지추(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 뛰어난 인재는 저절로 드러난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평원군은 어차피 한명을 뽑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모수를 데리고 가기로 합니다. 평원군 일행이 초나라로 가는 동안 모수는 자신을 깔보던 19명의 식객들과 토론을 해서 모두 승복하게 합니다. 초나라에 도착해서 평원군과 초나라 왕과 회담을 하는데, 해뜰 때 부터 이야기해서 해가 중천에 왔는데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수가 회담장으로 올라가서 평원군과 초나라 왕에게 "합종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는 단 두마디면 되는데 이렇게 시간을 끄는 이유가 뭡니까?"라고 하니, 초나라왕이 평원군에게 "뭐하는 손님이요?"라고 묻고 평원군이 "저의 사인(舍人: 집안을 돌보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초나라왕은 화가 나서 모수에게 "너의 주인하고 이야기 중인데 이게 무슨 짓이냐? 내려가라!"라고 힐난합니다. 그러자 모수는 칼자루를 움켜쥐고 "대왕께서 저를 질타하시는 것은 초나라의 병사들이 많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열 발자국 이내에는 초나라 병사는 없으며 대왕의 목숨은 저에게 달려있습니다.저의 주인 앞에서 그처럼 저를 꾸짖을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초왕을 협박합니다. 그러면서 초나라가 진나라 백기의 공격으로 수도를 빼앗기고 왕릉이 불탄 것을 예로 들면서 이번 합종은 조나라가 아닌 초나라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설득당한 초나라 고열왕은 조나라에 구원병을 보내기로 합니다. 그러자 모수는 닭, 개, 말의 피를 쟁반에 담아오게 하여 평원군과 초나라왕과 자신이 피를 마셔 합종을 맹약합니다.
초나라와 합종의 맹약을 맺고 조나라에 돌아온 평원군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두 번 다시 관상을 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선비의 관상을 본 것이 수백번이지만 오판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모수 선생의 경우에는 오판이었소. 모수 선생이 한 번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를 중하게 만들었고, 선생의 세 치 혀는 백만 군사보다 더 강했소. 다시는 선비들의 관상을 보지 않겠소." 이렇게 평원군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고 고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재를 뽑는데 관상을 이용했으니 제대로 된 인재를 뽑지 못한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원군이 이런 식으로 인물을 평가하니 결정적일 때 잘못된 판단을 해서 나라를 망칠뻔 한 것입니다. 관상으로 놓칠뻔한 인재인 모수가 스스로 추천하지 않았다면(毛遂自薦), 초나라와의 합종이 어렵게 되어 조나라가 멸망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평원군이 초나라와 합종맹약을 맺고 조나라로 돌아온 후에 위나라의 신릉군과 초나라의 춘신군이 이끄는 구원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진나라가 한단의 포위를 더욱 조이니 한단은 위급해져서 바야흐로 항복을 목전에 두었습니다. 평원군은 이를 몹시 걱정하고 있었는데 객사의 관리를 맡고 있는 사람의 아들인 이담이 평원군에게 "한단의 백성들은 거친 삼베옷도 못입고 있고, 지게미나 겨도 못먹어 아이를 서로 바꾸어 먹고있는 실정입니다. 무기는 바닥이 나서 나무를 깍아서 창이나 화살을 만들고 있는 실정인데 귀하의 후궁들은 백여 명이나 되며 비단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있습니다. 귀하의 기물이나 종(鐘)이나 경(磬)등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대로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부인들과 아랫사람들을 병사들 사이에 넣어 일을 나누게 하고, 집에 있는 것들을 모두 풀어 병사들에게 먹이십시오. 병사들이 바야흐로 위험하고 고통스런 처지에 놓여있을 때이므로 크게 덕을 베푸는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평원군이 이담의 말대로 하니 죽음을 불사하는 병사 삼천명을 얻을 수 있었고, 이들이 이담의 지휘아래 진나라 군대로 진격하니 진나라 군대는 삼십리나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담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또 때맞추어 위나라와 초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하니 진나라 군대는 물러가고 한단은 보존되었습니다.
조나라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 보존하게 한 일등공신은 평원군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온 힘을 바쳐 수행한 끝에 결국 진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조나라에서는 평원군에게 봉지를 내려 그 공을 표창하려고 했지만, 명가의 학자인 공손룡이 받지말라고 간언하자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평원군답게 봉지를 사양합니다. 평원군 조승은 조나라 효성왕 15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평원군은 의리가 있고 마음이 넓어 다른 사람을 잘 포용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의 옳은 말을 잘 받아들여 즉시 자신의 행동을 고칩니다. 몇 번의 잘못된 판단이 있었지만 혼탁한 난세에 아름다운 공자(佳公子)임이 틀림없습니다.
우경은 유세하는 선비였습니다. 짚신을 신고 우산을 둘러멘 체 조나라 효성왕에게 유세하였는데, 처음 유세 후에 효성왕이 우경에게 황금과 백벽(白璧 :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는 원형의 옥)을 하사하였고, 두 번째 유세 후에 조나라 상경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경(虞卿)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우대감'의 뜻을 가진 별명 또는 호칭인 우경만 남은 것입니다.
원교근공책을 제안한 범저는 원래 위나라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위나라 재상이었던 위제가 범저가 국가기밀을 제나라에 누설시켰다고 의심하여 사람을 시켜 범저를 매질해 갈비뼈와 이를 부러뜨렀습니다. 위제는 범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범저의 몸에 자신들의 빈객들에게 오줌을 누게합니다. 그러나 범저는 간신히 살아나서 진나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범저가 우여곡절 끝에 진나라 소왕에게 유세하여 진나라의 재상이 되자 범저는 자기의 원수인 위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위나라 왕에게 협박합니다. "당장 위제의 목을 가지고 오라. 그렇지 않으면 장차 대량(위나라의 수도)이 도륙될 것이다."
범저의 협박에 두려워진 위제는 위나라 재상직을 내려놓고 조나라로 달아나 친분이 있던 평원군의 집에 숨게됩니다. 범저의 복수를 꼭 해주고 싶었던 진소왕은 평원군과 포의로써 사귀고 싶다는 우호적인 편지를 써서 평원군을 진나라로 초대합니다. 평원군이 진나라에 오자 술을 나누는 자리에서 소왕은 "범저는 나의 숙부나 마찬가지요. 범저의 원수가 군의 집에 있다하니, 원컨대 사람을 보내 위제의 목을 가져오시지요. 그리 안하시면 군은 진나라를 떠나지 못할 것이오."라고 말했지만 평원군은 "제 친구를 내어줄 수 없습니다."라고 강하게 거절합니다. 그러자 진소왕은 조 효성왕에게 "위제를 내어주지 않으면 저는 군대를 일으켜 조나라를 칠 것이고, 왕의 숙부도 진나라를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협박합니다. 이에 효성왕은 군사를 내어 평원군의 집을 에워싸게 됩니다.
다급해진 위제는 밤중에 도망쳐 우경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우경은 재상벼슬을 버리고 위제와 함께 다시 위나라로 가서 신릉군의 힘으로 초나라로 망명하려고 했습니다. 신릉군도 진이 두려워 아직 그들을 만나길 허락하지 않고 좌우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우경은 어떤 사람입니까?"하니 후영이 "우경은 한 번 유세에 황금과 백벽을 받았고, 두 번 유세에 상경이 되었으며 세 번째 유세에 결국 재상이 되고 만호후에 봉해졌습니다. 이런 사람이 위제가 궁지에 빠지자 높은 작록을 버리고 함께 달아났습니다. 곤궁한 선비가 군을 찾아왔는데, 군은 우경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시니 <사람은 실로 알기 어려운 존재이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것 역시 어렵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진 신릉군이 수레를 몰고 나가 위제와 우경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위제는 신릉군이 처음에 자기를 만나기 꺼려했다는 말을 듣고 노해서 자살하고 맙니다.
조효성왕은 위제의 목을 얻어 진나라에 보내니, 진소왕은 평원군을 조나라에 돌려보내게 됩니다. 조나라에 돌아온 평원군은 진나라에 대해 신의없고 포악한 나라라고 이를 갈게됩니다.
열전에 의하면, 이후 우경은 위나라에 정착해서 곤궁하게 지내게 됩니다. 위나라에서 뜻대로 되는 일이 없게되자 우경은 8편의 책을 저술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국가가 잘한 일과 못한 일을 풍자한 것으로서, 책의 이름을 '우씨춘추'라 했습니다.
그런데 '평원군 우경 열전'에는 장평대전 전후로 우경이 조나라 효성왕 앞에서 다른 신하들과 간쟁하는 모습을 서술했습니다. 장평대전은 위제의 사건 이후에 벌어진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니 우경이 위나라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다시 조나라에 돌아와 벼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사마천이 약간 혼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장평대전이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조나라 군대가 패하고 도위 한 명을 잃었을 때, 친진파(親秦派)인 누창은 진나라와 화친하자고 주장합니다. 이에 맞서 우경은 "지금 이 시기에 진나라에 화친의 사신을 보내면 여러 제후들은 조나라를 구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조나라만 고립되고 진나라는 이를 이용하여 우리와의 화친을 거부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조효성왕은 우경의 충언을 듣지 않고 화친 사신을 보냈지만 우경의 말대로 화친하지 못하고 조나라 군대는 장평대전에서 패하게 됩니다. 장평대전 후 진나라의 한단 포위를 위나라와 초나라의 구원군 덕분에 벗어날 때, 친진파들이 또 진나라에 6개의 성을 내주고 진나라와 화친하자고 주장합니다. 우경은 진나라에 줄 6개의 성을 차라리 제나라에 주어 제나라와 합종하는 것이 진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방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번에는 효성왕이 우경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진나라 재상인 범저의 원교근공책과 교묘한 외교책략의 무서움을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6국에도 있었습니다. 우경은 반진합종을 꾸준히 설파한 뛰어난 책략가이었고, 친구 위제를 구하기 위해 재상벼슬을 내려 놓고 위제와 함께 조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도망갔던 가슴뜨거운 의기의 인물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