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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바이블 14 청동기 시대 인류 최초의 아담
옮긴이 : 천리아허상탁
제4장 / 허구의 구약사
성경속의 이야기들은 모두 역사적 사실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바빌론 유수 이후에나 등장한 것이다.
그 이전의 이야기들은 신화이자 바빌론의 영향을 받은 이야기들이다.
고고학에 의해서 드러나는 역사는 성경의 역사성에 대해서 외면한다. 엑소더스의 이야기는 이집트나 주변지역의
어느 문헌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대민족이 이집트로 이주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그들은 다양한 씨족출신의 아피루라고 불리는 집단 이었다.
아피루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었다. 신학교에서도 역사적 비평법에 의거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허구의 인물임을 가르켜주고 있다.
그러나 목사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성경속의 사건들을 마치 역사적인 사실인양, 입에 침을 발라가며
교인들에게 세뇌시킨다. 그리고 그 신화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단군은 허구...."운운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 청동기 시대에 태어난 #최초의 인류 아담
필자는 뒤에 이어지는 5장에서 #창세기의 신화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를 모방한 것과,
6장에서 창세기의 비과학적인 점을 언급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대홍수나 성경속의 천지창조를 믿겠다고 우기는 자들이 정말 많다.
#성경속의 연대기를 가지고 추리를 해 보아도 창세기의 기록들은 신화일 수 밖에 없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에 노고에 의해 드러난 수많은 고대문명의 유적을 가지고 판단해 보아도
창세기의 연대기는 황당스럽기 그지없다.
#창세기에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으로부터 이삭까지의 연대기가 언급되어 있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고, 노아의 경우 950세까지 살았다고 하지만,
창세기의 연대기를 계산하기 위해서 그들이 생존해 있었던 모든 년수는 필요가 없다.
그들이 생존해 있었다는 대부분의 기간이 자손들이 살아있었던 기간과 겹치기 때문에,
그들이 몇 세에 자식을 낳았느냐를 따져 연대기를 계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참으로 친절(?) 하게도 창세기에는 그들이 몇 세에 자식을 낳았는지도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아담(130세에 셋을 낳음)-셋(105세에 에노스를 낳음)-에노스(90세에 게난을 낳음)-
게난(70세에 마하랄렐을 낳음)-마하랄렐(65세에 야렛을 낳음)-야렛(162세에 에녹을 낳음)-
에녹(65세에 무드셀라를 낳음)-무드셀라(187세에 라멕을 낳음)-라멕(182세에 노아를 낳음)-
노아(500세에 셈을 낳음)
최초의 인류인 아담으로부터 #노아의 아들인 셈이 태어나기까지의 기간은1556년이 걸렸다.
이어서, 창세기 11장에는 셈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계보가 언급되었다.
셈(100세에 아르박삿 낳음)-아르박삿(35세에 셀라를 낳음)-셀라(30세에 에벨을 낳음)-
에벨(34세에 벨렉을 낳음)-벨렉(30세에 르우를 낳음)-르우(32세에 스룩을 낳음)-
스룩(30세에 나홀을 낳음)-나홀(29세에 데라를 낳음)-데라(70세에 아브라함을 낳음)
셈으로부터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까지는 390년의 세월이었다.
이어서 창세기21장에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다고 했고,
25장에는 이삭이 60세에 야곱을 낳았다고 한다.
창세기 30장에는 야곱이 요셉을 낳았다고 언급되어있는데,
안타깝게도 몇 세에 요셉을 낳았는지는 언급 되어있지 않다.
문제는 아브라함이 잠시 기근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이주해서 파라오에게 아내를 맡긴다는 대목이
창세기에 있다. 그의 증손자 요셉은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신임을 받고 그의 일가가 이집트로 이주해서
정착 한다고 한다.
우리는 위의 자료로 성경의 연대기를 추리할 수가 있다.
대략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인류의 시조인 아담으로부터 1550년쯤 후에 대홍수가 발생하고
대홍수 이후 대략 400년 정도 후에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가서 파라오와 만나게 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연대기가 아닌가? 초등학교에서 배운 세계사만 가지고도 성경의 연대기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 느껴질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다량의 유물이 발견된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긴 시기인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 :Paleolithic Age)는 BC 3만∼1만년경 정도에 유지되었다.
구석기 시대에는 석기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동굴벽화, 암벽부조, 조각상들도 발견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회화로는 알타미라 라스코 퐁드곰 뒤끄도 두베르 등의 동굴벽화가 대표적이며 조각으로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로셀의 비너스 등 풍만한 여체를 강조한 조각도 발견된다
#프랑스 로셀에서는 BC 2만5천경의 뿔잔을 든 여인상이, 프랑스 축크드두베에르 동굴에서는 점토로 빚은 들소가
발견되기도 했다. 또, BC 3만 년과 BC 2만 5000년 사이, 즉 오리냐크문화와 그라베트 문화 전기 동안에
석회석 판석 위에 여성의 성기와 남근(男根)을 나타낸 #구석기시대의 미술 이도르도 뉴페라시의 오리냐크 문화
지층에서 출토되는 등 수많은 유적이 발굴 되었다.
그리고 BC 1만년이 지나면서 신석기 시대가 도래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유적은 더욱 많이 발견된다.
소아시아 남부의 차탈휘위크에서는 BC 6500년경~BC 5000년경에 이르는 신석기 시대의 취락지(聚落址)가
발견되기도 했다. 제사를 지내던 장소라고 생각되는 방을 비롯하여 많은 방을 가진 가옥집단(家屋集團)이
발견되었고, 거기에는 독수리, 춤추는 인물들, 소나 사슴 등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여신(女神)이라고 생각되는 동물을 좌우에 거느린 여성상(女性像)이나, 그 남편이라고 생각되는 남성상(男性像)도
출토 되었다. 공예품으로서는 정교한 돌로 만든단도(短刀)나 구슬을 연결한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또, #사해死海의 북쪽에 있는 여리고에서는 BC 5000년대에 속하는 도시가 발굴되었다.
1953년에는 석고(石膏)로 살을 붙이고 채색한 두개골(頭蓋骨) 몇 개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가장 사실적인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72년 발굴이 시작된 #바르나Varna유적지에서는 BC 4000년 경의 도시가 발견 되었다.
이곳에서는 BC 4000년경의 황금제품을 비롯하여 동기(銅器), 석기, 토기 등 약 2만 5000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 되었다. (#BC3000경년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나일, 인더스, 황하黃河 등의 강(江)의 유역에서
발생된 문명보다도 앞서는 것이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토기의 발달은 BC 4000년경부터 뚜렷해진다. 소아시아, 그리스 본토, 루마니아 등지에서 각각 특색 있는
가지 무늬토기가 출토 되었다. 토기에는 기하학적 모티프로부터 양식화된 동물, 식물의 문양이 새겨졌으며,
이런 #유물들은 대부분 방사성 탄소放射性炭素radiocarbon의 함유량에 따른 연대측정을 거쳐 검증된 것이다.
이것은 필자가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을 대충 조사해 본 것이다.
찾아보면 끝도 없을 것이고 쓸데없는 지면낭비이니 이쯤 해두겠다.
유대인들의 이집트 이주는 힉소스(Hyksos)인들이 이집트를 점령했던 BC 18세기 말에서 BC16세기 초까지인
이집트 제15~16왕조시대 라는 것이 정설이다.
창세기의 최초의 인류인 아담이 등장해서 1946년후에는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최초의 인류가 등장한 후, 2000년만에 이집트에 왕조가 들어설 수 있었겠는가?
국가가 생기기 위해서는 최소한 청동기 시대는 되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나마, 아담이 등장한 후, 1500년쯤에 대홍수가 일어나 모두 휩쓸어 버렸다고 한다.
그 후 400년쯤에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잠시 이주해서 파라오에게 아내를 맡긴 적이 있다고 창세기에는
언급해 놓았다. 그렇다면 대홍수이후 400년만에 이집트에 왕조가 들어선 셈이다! 이 얼마나 황당한 궤변인가?
BC 3만년경에 구석기 시대가 시작된 이후, BC 3100년 경에야 이집트에 제1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잠시 이주한 시기가 이집트 제1왕조라고 억지주장을 해보고
계산을 해보자.(이건 진짜 억지주장이다!) 그렇게 억지로 계산을 해보아도 노아가 방주를 만들기도 전에
BC 5000~4000년경의 바르나와, 여리고 등지에서는 도시가 들어서고 있었으며, #최초의 인류인 아담이 탄생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신석기시대가 시작된지 오래라는 이상한 연대기가 계산되어 버린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흙으로 빗살무늬토기를 만들고 있을 때 여호와는 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이주시기를 이집트 1왕조 시대로 한것도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주시기를 이집트 1왕조 시대로 계산하면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비교해서
엄청난 역사적 공백기간이 벌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증손자 요셉일가가 이집트로 이주한 BC 18세기 말~ BC 16세기로 계산을 하면,
#신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시대가 시작될 무렵에 최초의 인류인 아담이 등장 했다.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점령한 가장 빠른 시기를 기준으로 계산해도 아담은 청동기 시대(靑銅器時代)의
처음단계에 해당되는 순동기 시대(純銅器時代)에 등장했다. 이집트 이주시기를 BC16세기로 잡아도
아담은 청동기 시대 태어났다.
순동기 시대(純銅器時代)에는 구리, 금,은과 같은 금속을 사용했고, 청동기 시대(靑銅器時代)에 이르러
구리와 주석을 혼합해서 만든 단단한 합금인 청동을 쓰게 된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구리로 청동검을 만들고 있을 때, 여호와는 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있었다!
성경으로 파악할수 있는 알수 있는 인류의 역사는 6000년정도이다.
그럼, 또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창세기의 인물들이 살았다는 1년은 오늘날의 1년과는
다를수도 있다고. 제발 정신을 차리기를 부탁한다.
창세기의 인물들이 900세까지 살았고 100세에 자식을 낳았다는 것도 인정하지 못할일인데,
필자는 그걸 모두 인정하고 연대기를 계산해보았지만 역시 모순이 드러날뿐이다.
그래도 할말이 없으니까, 그 당시의 1년은 오늘날의 1년과 다르다고 말을 하는가?
차라리 여러분이 창세기를 새로 쓰길 바란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후손들의 숫자를 늘이거나,
그들의 수명과 자식을 낳은 시기를 늘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 유대민족의 기원
기독교인들은 늘상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가 유대민족의 시조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아브라함은 신화적 인물이다. 그것은 성경속의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유대 민족의 이집트로의 이주는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증손자 요셉의 부족이 이집트로 이주한 것이 아니다.
이집트 왕조를 구분할 때, 고대왕조와 중간왕조, 신왕조로 구분하는데, 중간왕조와 신왕조 사이, 즉 대략
BC 18세기 즈음에 이집트를 비롯한 시리아,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통치했던 힉소스족 이라는 민족이 있었다.
당시에 호전적인 힉소스(Hyksos)인들을 포함한 유목민족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물결처럼
밀려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힉소스인들은 서쪽의 다양한 셈어를 사용하는 종족들로 대부분 셈족이었으며
일부가 인도, 유럽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이집트에는 도입되지 않았던 말과 전차를 타고
질풍 같이 이집트에 침입해서 삼각주 동쪽을 200년 동안 점령했다. 그러나 힉소스인들은 이집트 전 국토를
점령하지 못하고 이집트 남쪽만 직접 통치하고 북쪽은 방임했다.
이 시기에 히브리 민족의 시조인 셈족계열의 아피루(Apiru)들이 이집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아피루라는 단어는 이집트뿐만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도 등장하는데,
그뜻은 '먼지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유목민족에 대한 묘사이다.
우리나라의 신학교에서는 아피루의 뜻을 '배고픈, 목마른, 맨발의, 먼지의, 말고삐를 잡은 하인' 등의 의미에서
추출한 헐벗고 굶주린 노예계층으로 해석 하는데 서구의 신학계는 다르게 본다.
BC 18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기간 동안의 아마르나 서신들(Amarna letters : 시리아-팔레스틴의 군소국왕들이
이집트왕궁에 보낸 외교 서신)에서 하비루(Habiru)의 분란을 일으키는 행동에 대처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 편지에서는 하비루를, 부족적, 가족적 유대가 없고, 국가 조직에
군인으로 고용되어 얽매이거나 제 스스로 행동하는, 다양한 기원을 가진 비정착인들로 묘사하고 있다.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하비루라고 기록되었다. 한편 우가릿 문서의 발견으로 인해, 하비루가 이집트 기록에 나오는
아피루에 대한 언급과 동일한 단어임을 분명하게 했다.)
아피루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잦은 가뭄 등으로 식량을 제때에 구할 수 없게 되자 비옥한 이집트 땅을
항상 동경했을 것이다.
또, 유목민들이 이집트의 델타지역에 이주한 것을 그림으로 설명한 BC 19세기 초의 이집트 12왕조의 고급 관료의
무덤인 베니하산(Beni Hasan)의 벽화에는 왕의 대로를 거쳐 이집트에 도착한 일련의 무리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 벽화에는 37명의 아시아인들이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그들의 지도자 이름은 셈어인
이브샤(Ibsha :타지역의 지배자)라고 한다.
청동시대 말기 즉, BC 2천년 초기(고대이집트 12왕조 치하)에 이집트 문서들은 그들을 아피루라고 지칭한다.
흔히 알려진 대로 베두인이 아니다. 베두인들의 이주는 규칙적이 었던데 반면,
아피루인들은 이주는 그렇지 않았다.
아피루인들은 2천명 정도의 무리로 조직되었으며, 각 전쟁 지도자가 무리를 이끌었다.
아브라함이 만약에 실존인물 이라고 가정 한다면, 그런 지도자 가운데 한명 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씨족들로 나뉘어 있었으며, 그중에는 #신의 이름의 약자인 WH라는 이름의 씨족도 있었는데
라틴어로 YHWH 야훼와 발음상 비슷하다.
요셉이 실존했다면 가정한다면, 그 시대의 파라오들은 필시 제12왕조와 제 13,15왕조에 각각 속하였을 것이다.
(중간 왕조와 그후시대) 그때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이집트의 노예로부터 대신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에
진출해 있었다.(창세기 39장의 보디발 수하에 있던 요셉처럼)
그리고 창 41장의 요셉과 같이 당시의 많은 외국인들이 이집트식 이름을 받고 출세 하기도 했다.
그 시기부터 이집트 왕권이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힉소스인들이 이집트의 왕위를 찬탈하여
2대 왕조를(15대와 16대 왕조.BC 1790~1580년)를 지배하고 있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아피루인들은 이집트로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하였다.
당연히 이집트 정부의 입장에서 아피루들은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페피 2세 때에는 아피루들이 배를 건설하는 노동자들을 학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BC 2000년경의 첫 번째 중간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야만인이란 약한 아시아인을 말하는데, 그들은 집이 없고 갈증으로 고통을 받고 나무가 없으며 산을 고통스럽게
걸어다녀야 한다....(중략)....그들은 도둑놈들처럼 침입하여 분쟁을 벌인다. 나는 하 이집트에서 그들을 격퇴하고
목을 베었다. 그들을 걱정하지 말아라. 아시아인들은 강가에 있는 악어와 같다. 그들은 낙오된 먹이를 잡지만
사람들이 많은 마을은 공격하지 않는다."
다른 자료에서는 가축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이집트로 들어오는 아시아인들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아야 한다고
하였고 수많은 베두인 포로가 국경에서 석방되었다고 한다. BC 1429년에 아멘호테프 2세는 3600명의 셈계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힉소스인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힉소스인들은 도시이름에 셈어를 사용했고
셈족을 하급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다. 즉, 아피루들에게 고센땅(Goshen)인 델타에 정착하게 허락한 파라오는
힉소스 사람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피루들은 그들 왕조와 동맹관계를 취했다.
성경에도 타지역 출신인 요셉이 총리의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한 일화는 아피루들이 힉소스왕들 치하에서
큰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의 암시일 것이다. 그리고, BC 15세기 투트모시스 3세 치하에서 아피루들은
이집트 지배하의 영토들(팔레스타인 포함)에 파라오 왕권에 대한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정치에 간섭한다.
그들 세력을 포용하기 위해서 위해 파라오는 그들을 용병으로, 혹은 신전업무를 돕도록 고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라오 아모시스(BC 1552년~1526년 통치)가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이집트 민족이 다시 제자리를 찾자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그들 치하에서 권력을 잡았던 아피루들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2류 일꾼집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아피루들은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로 쳐들어올때 그들과 함께 유입되었거나 또는 이전부터 정착하고 있던
아피루들이 힉소스인들에게 협조해서 이집트인들을 학대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이 힉소스인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해방 운동을 할 때에도 아피루들은 소극적으로 행동하거나 방임했다.
결국 왕권을 되찾은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인들을 마을과 신전을 태운 야만인들로 기록했고 문둥병자로 명명했는데,
힉소스인들과 같은 셈족인 아피루들도 경멸해야 할 민족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라는 것은 이집트 신왕조를 뜻하는 것이며, 이때부터 아피루들은 비롬, 람셋 성을 건축하는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특히 제국 시대라고 불리던 BC 13∼14세기는 이집트에서 엄청나게 많은 기념물들이 건립되던 시기였고
이 당시 삼각주 지역의 아바리스에서 피-람세스 왕궁이 건설 되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이 이집트 안에 있었다면 이집트 각지에서 건설되던 신전 등의 작업에 동원되었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더욱이 이집트에서는 아피루인들이 적국에 동조하고 협조했던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으므로 아피루들에 대한 대우가 좋았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멤피스의 아나스타시라는 파피루스에는 노동자의 벽돌 만드는 할당량이 적혀 있는 데
노동자 40인의 대장은 80,000개의 벽돌을 하루에 바쳐야 했다. 그것은 노동자 한 명당 하루에 2,000개씩을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의 노동자들이
중노동에 시달렸음을 알려주는 증거는 될 수 있다.
그 후, 주로 이집트 18왕조시대, 특히 BC 1450∼1150년 사이 300년 간의 기록에 '아피루'란 말이 아주
활발히 언급되는데, 이 시기에는 이 아피루들은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붙잡혀 온 전쟁 포로,
혹은 건축 사업 채석장 같은 곳에 동원된 강제 노동자들 또는 노예의 의미로 변했다.
18왕조의 한 리스트에는 위대한 주인 세네브티시의 95명의 하인중 48명이 아시아계 이민자들이라고 한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이란 베두인을 포함하여 주로 아피루인을 뜻한다. 이들 아피루인들은 이집트에 이주해온
다양한 씨족의 셈족 유목민 이었고, 여호와를 숭배하는 부족도그 씨족중에 끼어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람세스와 세티 파라오의 조각상 뒤에 아피루인들의 신을 놓는 것도 허락했다고 한다.
심지어 누비아에 있는 신전에는 야훼라는 베두인들이 믿는 신의 이름도 적혀 있을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출애굽한 사람들이 주로 람세스 2세 통치하에 건축공사장에서 노예로서 노역을 당했던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이 출애굽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하비루또는
아피루라 불리우는 일단의 노예집단이 출애굽을 했던 것이다.
아피루는 하나의 종족이나 민족적 개념이 아니다. 그들에게 민족이라는 개념은 없었으며,
이집트에서 같은 셈족혈통의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주민이라는 공감대만이 형성되어있을 뿐이었다.
출신 성분과 이주시기가 제각각인 아피루들은 부족마다 각각의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유대민족의 12지파는 후대에 점성술적 의미로 덧붙여진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종교관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고(할례등은 이집트의 풍습임), 또 이집트에 그들의 종교성을 반영하면서
뒤섞여 버렸다. 즉, 유대 민족이 형성된 것은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부터이지, 그 이전에
그들은 이집트로 이주해온 다양한 출신의 셈족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계에선 유대교가 형성된 것은 모세로부터 약 1600년 후인 에스라, 느헤미야 때로 보고 있다.
▶ 엑소더스는 허구였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유대인들의 이집트 탈출 사건은 오랜 세월을 통해서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이집트 탈출을 포함해서 모세에 관한 이집트 측의 사료는 전혀 없다.
구약성경등의 문헌 이외에는 이 사건을 입증한 사료가 아직 발견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연대에 관해서도
결정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대인들의 이집트 탈출의 연대에 관해서는
크게 BC 15세기설과 BC 13세기설 두가지가 있다.
첫째 설은 후대의 연대 계산에 의한 열왕기상 6장 1절에 근거한 아멘호테프 2세 치하설이다.
그 근거는 솔로몬 왕(실제로 존재했다면 BC 961년경~922년경으로 추정됨)이 그의 치세 4년,
이집트 탈출후 제480년에 성전을 짓기 시작 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르호보암(유다왕국)과 여로보암(이스라엘왕국)에 의한 왕국의 분열은 아마도 BC 922년 또는
그보다 조금후의 일이며, 열왕기상 11장 43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40년간 통치한 것으로 돼어 있으므로
솔로몬은 BC 961년경에 즉위한것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솔로몬왕의 치세 제4년은 BC 958년경이 되며, 만약 그것이 이집트 탈출 후 480년에 해당한다면
출애굽은 BC 1483년경의 일이 된다. 특히 제18왕조의 투트메스 3세와 그의 아들인 아멘호테프 2세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 했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무시할수 없다.
둘째설은 출애굽기 1장 11절에 유대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비돔과 람셋을
세웠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람세스 2세 치하였다는 설이다.
1920년대 이후 열왕기상 6장 1절이나, 이집트의 카이로 남쪽 약 300킬로미터에 있는 '텔 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BC 14세기)가 언급하고 있는 하비루의 활동이나, 영국의 J.가스댕에 의한 여리고의
발굴 조사 등에 의하여 BC 15세기설이 유력해 졌으나, 최근의 학자들은 BC 13세기을 많이 따르고 있다.
람세스 2세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람세스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모세가 이스라엘인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시기는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그의 아들 람세스 2세 시대임이 틀림 없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이 강제로 동원 되었다는 람세스 성은 당시 이집트를 다스리던 파라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므로
출애굽은 제18왕조가 아니라 제19왕조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사막에서 40년 동안 유랑생활을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BC 1290년 전후에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했고 이때는 람세스 2세 시대이다. 또한, 당시 이집트를 둘러싸고 있었던 국제관계의 정황상
람세스 2세가 자발적으로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떠나도록 허락했다는 설도 유력시 되고 있다.
그러나 BC 13세기의 어느 무렵을 이집트 탈출의 연대로 잡느냐 하는 것은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가령 W.F.올브라이트는 BC 13세기초로 추정하고 있으나 T.J.미크는 BC 13세기말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모세가 과연 실존 인물이냐는 원천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는 모세가 유대인들을 데리고 탈출했다는 나라,
즉 모세의 탈출로 가장 큰 피해를 보았을 이집트에서 모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뒤에 이어지는 5장에서 언급했듯이 모세와 너무도 똑같은 출생설화를 가지고 있는 #바빌론의
사르곤 왕의 탄생 신화와 호루스의 탄생 신화가 모세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점에서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역사상 이집트인들 만큼 역사를 철저하게 사실 그대로 기록한 민족은 없다.
이집트인들이 모세의 탈출과 같은 대사건이 있었다면 고의적으로 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집트라는 말이 680번이나 나오는데 반해 이집트인들의 자료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BC 1220년경 람세스 2세의 후계자인 미네타프왕 5년에 단 한 번 나온다 "이스라엘은 황폐화 되었고
그들은 남아있지 않다"라고 승전비에 적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대규모적인 이동대신 수시로 소규모적인 이동이
지속되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피루들은 어째서 이집트를 떠나야 했는가?
사실 성경에서 여호와가 파라오에게 내린 10가지 재앙은 당시 이집트에서 매년 발생하던 자연 재해의 일종이다.
나일강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수위가 높아지며 물빛은 붉고 역겨운 악취를 풍긴다. 이것은 이 시기의 이집트는
우기이기 때문에 물이 불어나 강바닥에 퇴적되었던 동물들의 시체가 떠내려오기 때문이다. 홍수의 시기에
파리와 개구리가 불어나는 현상은 당연한 것이며, 전염병이 번지는 것은 오늘날에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사막으로부터 바람을 타고 오는 메뚜기 떼의 폐해는 고질적인 이집트의 재난 중에 하나였다.
암흑에 대한 설명도 매년 춘분을 전후하여 25일 가량 열풍이 불어오는데 열풍은 모래를 말아 올려 하늘을 덮으며
이로 인하여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재난은 그렇다 치고, 람세스 2세는 어떤 이유로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떠나도록 명령했을까?
이집트 역사상 가장 걸출한 영웅 중 한 명인 람세스 2세는 나일강 유역을 벗어나 히타이트,
즉 지금의 터키 지역까지 정복 전쟁을 시도했다. 자연히 많은 병력이 필요했고, 젊은 장정들이 군인으로 징발되어
나가자 이집트 국내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노동력이 부족해지게 되었다.
이 노동력을 대신한 것이 바로 아피루들이었다.
BC 1290년경에 이르자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의 아무르 왕을 상대로 세계 전사(戰史)상 가장 유명한 전투 중에
하나인 카데시(Kadesh)전투를 벌인다. 양측이 서로 이겼다고 주장했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 볼 때 실제로는
무승부였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양측은 쌍방 간에 극심한 피해만을 초래하는
전쟁을 종식시키기로 합의했다. 람세스 2세는 군대를 철수시켜 이집트로 돌아왔고, 그 후 히타이트가
람세스 2세에게 공주를 보냄으로써 양국 사이의 평화는 더욱 공고해진다.
그러자 갑자기 국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징병되었던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때까지 이집트인들
대신 농사를 지었던 아피루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아피루인들은 분쟁을 일삼는 데다가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점령하던 기간 동안 이집트인들을 배반한 경력도 있으므로 이집트 측에서 아피루들에 대한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즉 평화시에도 분쟁을 잘 일으키는 아피루인들은 더 이상 이집트에서 필요치 않으므로 모두 추방시킨 것이
아닌가 하고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피루들은 대규모적인 이동대신 수시로 소규모적인
이동으로 빠져 나갔을 가능성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출처] 안티바이블 그 -14, 청동기 시대 인류 최초?의 아담|작성자 천리아허상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