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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9:8-21(p.988) 항복(降服)하는 것 만이 사는 길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 만큼은 미국이 세계에서 최대 강대국이라는 것을 부인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군사(軍事) 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의 중심도 미국입니다. UN본부가 미국에 있음이 미국이 세계정치의 중심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잠비아’나 ‘앙골라’나 ‘가나’나 ‘모잠비크’같은 나라의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모를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은 누구인지 우리들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 정치의 중심이 미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국은 세계경제(經濟)의 중심입니다. 세계무역센터도, 세계 은행본부도 모두 미국에 있습니다. 군사력도 미국이 세계 최강국입니다. 핵을 비롯하여 잠수함, 항공모함, 전투기 등등에 있어 아직은 미국을 따라갈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국을 겁내지 않는 나라가 있습니다. 중국..., 아닙니다. 러시아도 아닙니다. 북한의 김정은입니다. 미국을 향하여 온갖 막말을 하기도 합니다. 미국 대통령을 늙다리라 하기도 하고, 수전노(守錢奴)라하기도 하고, 종이 호랑이라 하기도 합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는 아무리 관계가 비틀어져도 이런 말로 상대국의 대통령에게 퍼붓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최고의 막말을 서슴없이 퍼붓는 것을 보면, 정치 술수(術數)가 뛰어나서 그런 것인지, 하룻 강아지라서 그런 것인지 헷갈립니다.
지혜로운 자는 강한 자 앞에서는 비둘기처럼 순결하면서도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합니다.
강한 자 앞에서 더 강한 척 허세(虛勢)부리면서 거짓과 술수로 속이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뱀은 아주 지혜롭습니다. 뱀은 적을 발견하면 싸우려하지 않고 몸을 돌려 피하려는 것을 먼저 시도(試圖)합니다. 그럼에도 뱀은 갑자기 적의 발이나 적의 손이 자기 앞에 얼쩡거리면, 뱀은 빨리 적의 발목이나 손목을 물어 독을 주입해 버립니다. 뱀에게 물린 적은 날카로운 이빨에 물려서 놀라고 온몸에 퍼져나가는 독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뱀은 소리 없이, 지체하지 않고, 숲속으로 자기 몸을 숨깁니다. 뱀은 적이 밉다고 두 번 세 번 물려고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적을 놀라게 만들어 버린 뒤에 적이 쫓아오기 전에 뱀은 자기 몸을 숨겨버립니다. 뱀은 괜히 강한 자 앞에서 소리 지르고 근육을 보여주면서 으름장을 부리지 않습니다. 걷지도 달리지도 날지도 못하는 비천한 뱀이 살아남는 지혜가 바로 이런 것에 있습니다. 뱀은 강한 자에게 덤벼들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심은 우리가 사회생활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처럼, 원망들을 만한 일을 했거나, 고발 당할 만한 잘못이 있을때는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고, 화해하는 것 밖에는 더 선한 방책이 없음을 보여주십니다.
죄인된 우리 인생들이 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설 날이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모른척 무시하고 하루 하루 살다가는 급기야 심판날에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우리 인생들은 하루라도 급히 회개하고 사죄함을 받는 것만이 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말씀은 하나님 앞에 완악하게 회개하여 돌아서지 아니하고 뻣대다가 더 매를 맞게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우리가 속히 항복하는 것만이 지헤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복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50대에 항복하고 돌아오기 보다는 40대에 돌아서는 것이 복입니다. 8-90대에 숨이 차서 헉헉하면서 돌아서기 보다는 힘있을때 주님 앞에 두손 들고 내 고집 다 버리고 항복하고 돌아서면 건강할 때 주님 기뻐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닙니까?
이런 점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 먼저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8.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하신 말씀에서, 야곱은 이스라엘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 나라에 말씀을 보냈습니다. 이 말씀은 반듯이 성취되고야 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호세아6:5절 말씀에 “내가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를 산산조각나게 하였으며, 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너희를 죽였고, 나의 심판이 너희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라는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빛이 있게 하였으며 빛과 어둠을 나누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말씀이 나오자마자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기도 하였습니다.
땅에 자라는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들은 사람들이 식목하여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있으라 말씀하시자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무수한 별들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백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서 선택을 주저하거나 갈등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편에 서면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살아가는 것에 주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 9절과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9.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10.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그들은 경험적으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음이 교만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교만(驕慢)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할까요?
일반적으로 교만하다는 말은 ‘잘난체 하며 방자하게 뽑내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적인 의미의 교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교만은 하나님과 동등해지려고 했던 타락한 천사, 사탄으로부터 왔습니다.(사14:12-15).
교만은 우상숭배의 죄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옵니다.(사2:11, 17).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추실 것이라고 했습니다.(사13:11) 잠언 기자도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고 했습니다.(잠16:18).
성경에 교만한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이 애굽나라의 ‘바로’(Pharaoh)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으로부터 10가지의 재앙을 겪었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항했습니다. 전혀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홍해 바닷물에 수장(水葬)될때까지 바로는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완악하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말합니까?
완악(頑惡, Callouse)하다는 이 말은 ‘두껍다’ ‘무감각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완악한 심령은 무감각하여 깨닫지를 못합니다. 완악한 자들의 특징은, 자기 생각만을 강하게 고집하며 타인의 의견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완악한 심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말씀을 들어도 무감각합니다. 완악한 심령은,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에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노동을 많이 하신 어른들의 손은 아주 뚜껍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국그릇도 아무렇지 않게 맨손으로 듭니다. 그걸보고 보통 사람들이 따라했다가는 손에 화상을 입습니다.
완악한 심령은 뚜꺼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감각이 없습니다. 책망을 하여도 가슴에 찔림도 없고 아픔도 없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교만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으로 살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도리여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벽돌을 무너지게하였으니 그래 좋다 이 기회에 벽돌보다 더 단단한 돌을 다듬어 성을 쌓고 벽을 쌓자...,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이 기회에 뽕나무 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백향목으로 뽕나무를 대신하여 우리가 집을 새로 지으리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벽돌이나 뽕나무는 둘다 값싼 재료들입니다. 그러나 돌을 다듬은 것과 백향목은 아주 값이 비싼 건축 재료입니다. 하나님이 치셨을 때 교만하고 완악한 자들은 하나님에 대항하여 이런식으로 살았습니다.
제가 어릴적에 동네 청년 중에 아버지가 꾸중한다고 뭐라고 ‘씨부렁 씨부렁’ 하면서 슬금 슬금 달아나자, 아버지가 ‘저 놈이 뭐라하노’ ’하고 따라가자 달아나면서 “집에 돌아오는가 보소. 이 참에 서울로 갈끼니까 날 찾지 마이소”하고는 달아났는데 그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벽돌이 무너졌을 때, 뽕나무 집이 허물어졌을 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유대 나라는 벽돌이 무너지자 돌로 성을 쌓았으나, 로마 군대가 쳐들어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뽕나무로 지은 집이 무너지자 백향목으로 집을 지었으나 백향목으로 지은 왕궁이 불탔습니다. 하나님께 고집을 부리면 결코 복되지를 못합니다.
→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의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몽둥이로 쓰시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르신이었습니다. ‘르신’은 ‘앗수르인’들을 말합니다. 앗수르라는 대적을 일으켜 치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깡패같은 나라가 지금도 있고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북한은 깡패같은 나라입니다.
이런 깡패 같은 나라도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두십니다. 지난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깡패같은 나라를 일으켰어 정신 차리라고 치실때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깡패같은 나라는 쓰여질 것이 다 쓰여지고 나면 버리십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시켜버립니다.
→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2.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모두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앞에도 뒤에도>라는 말씀은...,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피 할길이 없어지는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뒤에도 앞에도 도움의 손길이 없습니다. 그렇게도 잘 도와 주던 사람도 하나님 막아 버리면 이상하게도 나에게 냉정해집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 어디에도 도움을 받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3.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문제를 풀기 어려우면, 누가 그 문제를 가장 잘 풀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문제를 낸 사람일 것입니다.
대적을 일으켜 치신 분이 누구십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면초가 되도록 만드신 분이 누구십니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만군의 여호와를 찾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치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돌아오다](슈브)는 말은 완전한 전환(轉換)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찾다](다라쉬)는 말은 '문제를 풀기 위해 물어 옴, 혹은 전심으로 구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풀기 위해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육신의 부모가 꾸지람을 해도 달게받겠거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았다할지라도 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문제를 풀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14절 말씀에는 종려가지와 갈대가 등장합니다. 이 두가지는 아주 대조적인 식물입니다.
'종려가지'는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그래서 종려나무는 대단히 고귀한 식물로 여겨집니다. 훗날 로마 동전에 유대의 상징으로 새겨지기도 하였습니다.
갈대는 '습지', '늪', 혹은 '시궁창에서 자라는 식물로, 대단히 천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종려가지와 갈대는 존귀한자와 천한 자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만과 완악함으로 불순종의 길로 가게되면 귀한 자도 천한 자도 하나님이 끊으십니다. 귀한 자라고해서 예외가 없습니다. 천한 신분이라 하여 예외가 없습니다.
죄의 심판은 천한자나 귀한 자나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사함받는 것 외에는, 죄문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의 짐을 지고 수고할 것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 이 죄의 짐을 네려놓기를 바랍니다.
→ 15절과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5. 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16.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를 꼬리로 표현하였습니다.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를 꼬리라고 부른 것은 가증스럽고 사악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꼬리(자나브)라는 말이 본래 사악하고 가증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개가 꼬리를 흔들 듯이 거짓선지자들은 사람들을 기쁘게하려고 개처럼 권세있는 자들에게 빌붙어 부끄러운 말과 비열한 짓을 서슴없이 했던 것입니다.
이런 거짓된 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의 인도를 아무 생각없이 따라가다가는 멸망을 당합니다.
우리는 북한에 대한 방송을 보노라면 꽃을 손에 들고 그들의 지도자를 열열히 환영하거나 어떤때는 지도자에게 감격한 듯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왜 저렇게 속고 있을까 하는 것 때문입니다. 속이는 자도 심판을 받지만 속는자도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사기꾼도 악하지만 그 사기꾼에게 속는자도 손해를 봅니다. 이단(異端)이나 사이비종교를 만들어 미혹하는 자들이 악한 것은 두말 할 것 없습니다. 그런 이단과 사이비종교에 속아서 영육간에 피해를 입는 것은 속는자(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 문제이든, 돈 문제이든, 무슨 자리 문제이든 속이려는 자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알고 항상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탐욕으로 인하여 속을때가 많습니다. 명예든, 재물이든 탐욕을 버리도록 합시다.
→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7.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라는 말은 하나님이 매우 진노하고 계심으로 그 진노하심을 바꾸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토록 진노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처럼 그들을 버릴 수밖에 없도록 진노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까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의 죄를 한마디로 말하면, 저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심은 전혀 없으며, 그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을 비웃고 모독하는 불경건만이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즉 하셨으면, 평소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대상이었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하신 것을 보면 망령되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가 큰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평상시 베푸시던 긍휼이 거절하실 정도로 주의 진노하심과 크기가 어느 정도이며 또한 백성들의 죄악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의 허물과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외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살과 피를 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사하여 주십니다. 그 아들의 속죄의 공로로 사함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8. 대저 악행은 불 타오르는 것 같으니 곧 찔레와 가시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사야 선지자는 죄악의 무서움을 ‘불 타오는 것’으로 비유하여 말합니다.
찔레와 가시가 생명력이 강할지라도 산불이 나면 산을 덮고 있던 찔레도 가시도 태워버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은 빽빽한 수풀을 불살라 버립니다. 수풀을 태울 때 타오르는 연기는 하늘을 덮어버립니다.
죄가 바로 타오르는 불과 같습니다. 타오르는 불을 끄기가 어렵습니다. 산불이 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헬리콥터가 동원되어도 불을 끄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람의 심령에서 일어나는 죄의 불은 끄기가 어렵습니다.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의 불은 무섭습니다. 다윗도 이 죄의 불을 끄지 못하여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이는 죄를 짓기 까지 죄의 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삼손 같이 힘있는 용사일지라도 자기 안에 일어나는 죄의 불은 끄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끝없이 타오르는 이 불은 하나님께서 꺼주셔야 꺼지게 됩니다. 물을 부어 꺼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아무도 이 불을 끄지 못합니다.
끝없이 타오르는 이 죄악의 불을 끄지 못하고 그냥 두게되면 영원히 이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야 할 불이 죄악의 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가 끌 수 없는 죄악의 불을 우리 심령안에서 완전히 성령의 능력으로 꺼주옵소서’라고 우리는 기도 할 것입니다.
→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9.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18절에서 <악행은 불 타오르는 것> 같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의 불이 있는가 하면, 19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의 불>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진노의 불이 무섭습니다. 이 땅을 불태우고, 백성들을 태워버리는데 우거진 숲을 태우듯이 태워버린다 하였습니다.
핵무기를 터뜨려 버리면 사람들은 그 불길에 전부 타버립니다. 그 흔적은 처참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주 보기 흉하게 되어 죽어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큰 불로 사람들이 죽게 될 때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인지 나무둥치가 불에 그을린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 불은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불을 진노의 불로 덮어 버립니다.
→ 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0. 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19절 마지막 부분 말씀은 20절 말씀에 부쳐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하여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사랑이 식어지게 됩니다. 자기 형제도 아끼지 않고 죽일 것입니다. 짐승들도 그렇게는 잘 하지 않는데 사람은 동족간에 아끼지 않고 죽입니다.
오른쪽으로 뜯어먹어도 배가 고플 것이며 왼쪽을 뜯어 먹어도 배부르지 못할 것이라 한 것은 무자비한 살육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무자비한 살육은 결국은 자기 자신의 살을 뜯어 먹는 것과도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상태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 ‘우리 시대에 비극적인 살인이나 무자비한 폭동이나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불법한 세상이 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 마지막으로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1.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형제입니다. 서로 보호해 주고 붙들어 주어야 할 골육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먹을 것이라 하였으니 거기가 바로 지옥입니다.
서로 물고 뜯는 곳에는 결국 파멸로 치닫게 될뿐입니다.
갈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하였습니다.
서로 물고 뜯게되면 승자(勝者)가 없습니다. 둘다 멸망하게됩니다. 그래서 조심하라 하였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간 길이 바로 물고 뜯는 길이었습니다.
북왕국 안에서 두 형제 지파,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서로를 질시하고 다툼으로 일관(一貫)하더니(삼상10:27;삼하20:1),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남(南)유다를 공격하여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빚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이런 악행자들 위에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나라들과, 사람들 한 사람을 한 사람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절대로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시편139편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믿음으로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이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며, 멀리서도 사람들의 생각을 밝히 아시고, 우리가 눕는 것을 살펴 보시며 행위를 모두 잘 알고 계시며, 혀로하는 말을 알지 못하신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에 무관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는 타오르는 불입니다. 죄의 불길은 사람이 끄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망할때까지 갑니다. 자기 자신의 죄악된 삶을 후회하면서도 망할 때 까지 갑니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덩어리와 같아서 알면서도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잡아 주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죄의 불을 꺼주시면됩니다.
☞. 그것이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진노의 불로 태우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께 두손 들고 항복합시다.
☞. 이것만이 살길입니다.
☞. 병든 몸을 이끌고 의사 앞에 내어 맡기듯이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 주여 이 죄인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우리 강팍한 마음이 항복할 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손길이 우리 위에 임할 것입니다.
☞. 하나님께는 항복하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