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문학소녀!
윤광진 시인을 보면 우선 이 생각이 먼저 든다.
고희의 나이에도 아랑곳없이 순수한 감수성, 천진한 웃음과 상냥한 마음씨, 창작에 대한 열의…. 이러한 것들을 볼 때마다 윤 시인이야 말로 타고난 문학인이요, 영원한 동심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윤 시인과의 인연은 순천팔마문학회를 통해서이다. 벌써 7년 전의 일이 되었는데, 1999년 2월 어느 날 나이 지긋한 여자분이 문학회 모임에 나오셨다.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그분은 젊은 사람들의 모임에 나이 많은 당신이 나와서 혹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몹시 조심스러워하셨다.
우리 회원들은 문학을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면서, 오히려 연세가 있으신 분이 인생경험이 많으니 젊은 사람들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가 있을 것이라며 안심을 시켜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임 때마다 젊은 회원들에게 늘 미안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저렇게 여린 마음을 가지고 얼마 동안 문학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하고 내심 염려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윤 시인은 그러한 의구심을 깨부수기라도 하듯 월례회에 거의 빠짐없이 출석하셨고, 그것도 제일 먼저 모임 장소에 나와 다른 회원들을 기다리는 성실함을 보여 주셨다. 창작품도 자주 가지고 오셔서 여러 회원들의 평을 듣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윤 시인은 사회활동도 활발하여 노인대학이며 노인회의 책임을 맡아 분주한 가운데서도 대학의 평생교육원 문예창작과에 적을 두고 문학수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2001년 10월 <한맥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을 하고 순천문협에도 가입, 차츰 문학활동의 범위를 넓혀왔다.
그리고 그동안 써온 시와 산문을 모아 이번에 책을 묶게 되었으니, 이 책에는 윤 시인의 성실한 창작활동의 결실이 오롯이 담긴 셈이다.
윤 시인의 작품을 보면 시 속에 역시 오랜 삶의 연륜이 쌓인 분답게 세월의 흔적이 듬뿍 묻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늙어버린 자신에 대한 자각, 속절없는 세월에 대한 아쉬움, 과거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따위를 노래한 작품이 많다. 문학은 자아의 투영이라고 볼 때 윤 시인이 나이든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드러내고 이에 대한 감회를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세월은 물같이 흐르지만
물밑의 돌은 그대로 있네
비록 몸은 세월 따라 늙었지만
이 마음 언제나 푸르기만 한데
몸 속에 백발은 언제 왔는지
아름다운 추억은 푸른 이끼처럼
겹겹이 쌓이기만 하네
- <내 마음> 전문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시인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변함없는 자신의 마음을 흐르는 물 속에 잠겨 있는 푸른 이끼의 돌에 빗대어 노래하고 있다.
윤 시인은 계절에 대해서도 여러 편의 작품을 내놓고 있다. 이것은 시인이 계절의 바뀜을 통해서 세월의 흐름과 인생의 변화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특히 계절 가운데서도 봄에 대한 작품이 많은데,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력의 계절을 맞아 시인은 새삼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이를 잊은 희수(喜壽)의 여인
살포시 웃으며 맞이하는 봄
미풍에 실려온 매화 향기
애틋한 젊은 날의 꿈
미소로 돌아보니 긴 그림자
- <입춘대길>에서
시인은 봄을 맞아 바람결에 실려오는 매화향기를 통해 자신의 애틋한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며 한 줄기 회한에 빠지고 있다. <저물어 가는 또 한 해>에서도 “벽에 걸린 달력 숫자 12를 가리킨다 / 달력은 가볍게 걸려 있지만 / 내 어깨는 무겁기만 하고” 노래하며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자신의 감회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윤 시인은 그리움에 대해서 많이 쓰고 있다.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 고인이 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등을 주로 토로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리움은 곧 기다림으로 전환된다.
이제까지 살아온 긴 세월
그래도 못 다한 아쉬움은
심혼에 불붙은 촛불이어라
마음에 그리는 님 행여 오시려나
여윈 불빛 창호지 적시며
혼자 벌렁벌렁 춤도 추어보고
그대 그리는 마음 검은 심지
옥 같은 내 살 태워서
투병한 눈물 줄줄 흘러내려
새벽이 다 되고
긴긴 밤 지새워 기다리며
불붙던 내 마음 하얗게 하얗게
그 자리에 굳었는데
님은 영영 아니 오시네
- <촛불> 전문
그러나 윤 시인의 작품은 결코 어둡지 않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주로 인생의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바라본다. 어두운 쪽을 바라보다가도 끝에 가서는 한 가닥의 희망을 심어놓는다. 이는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와 낙관적인 여유가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아직도 남은 말이 많다고 하지만
흔적 없이 가는 나날
뉘라서 잡을소냐
세월이 간다 한들
마음까지 따라가랴
동천에 해는 또다시 떠오르리
-<일력을 떼어내면서>에서
저 유명한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전쟁의 폐허와 실연의 좌절 속에서도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고 말했듯이, 윤 시인은 덧없는 세월의 흐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아를 잃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이밖에도 <차 한 잔>에서는 “회색구름 낮게 깔려무거운 냉기 돌아 스산한” 12월에 녹차를 마시며 “오늘은 가도 내일은 또 이어진다”고 자위하고 있고, <나목>에서도 “햇님만 님되어 보신다면야 / 평생 이대로 평생 이대로 / 이 자리 지키오리”라고 당찬 결의를 보여준다. 시인의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믿음직스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윤광진 시인은 동심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당수의 작품들이 천진한 어린이의 눈높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매화꽃처럼 피어나는
막내손녀 마냥 즐거워
해맑은 웃음 하하 호호
아빠 으흥 엄마 으흥
새 구두 새 가방 어설픈 멋쟁이
솜털 뿌연 풋풋한 내음
하늘색 청바지 분홍 스웨터
새 가방 짊어지고 기인 머리 날리며
발걸음도 가벼워라
매화가지 꽃망울 터질 듯
- <새 학기> 전문
검은색 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검게 보이고 파랑색 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파랗게 보이듯이, 똑같은 사물이나 현상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어둡게도 보이고 밝게도 보인다. 윤 시인이 이렇게 티없이 맑은 동심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윤 시인의 마음이 천성적으로 맑고 깨끗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윤 시인은 모임에서 어찌된 일인지 자꾸 동시가 씌어진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게 왜 걱정스러운 일인가. 동심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천진한 상태로서 시인이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심성이 아닌가. 동심을 노래할 수 있는 윤 시인이야말로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을 타고 태어났고, 천부적으로 시인의 자질과 소양을 지닌 분이 아닌가 생각해보곤 한다.
윤 시인은 시 창작에도 열심이지만 한편으로 산문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틈틈이 산문으로 써두었던 신변의 생활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을 모아 이 시집의 뒷부분에 실었다.
시가 되었든 산문이 되었든 윤 시인의 이러한 창작행위는 모두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세심한 관찰력과 뜨거운 창작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고희의 후반에서 팔순을 바라보는 윤 시인이 이번에 창작집을 출간했다는 것은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글쓰기에 게으른 젊은이들에게 분발과 각성을 촉구하는 채찍질인 셈이다.
윤광진 시인은 인간적으로도 참으로 훌륭하다. 소녀처럼 해맑은 얼굴과 미소, 나이든 분 특유의 완고함을 찾아볼 수 없는 상냥한 성격, 누구에게나 베풀고자 하는 넉넉한 마음씨, 전화를 받을 때면 깜짝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는 이분을 누구든지 만나서 얼마동안 이야기를 나눠보면 저절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으리라.
사람의 나이는 주름살 숫자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 어떠하느냐 달려있다.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생각이 닫혀있는 사람이라면 노인이나 다름없고, 아무리 백발노인이라 하더라도 마음이 열려 있고 유연하다면 그 사람이 바로 청년인 것이다. 세상을 보는 따뜻한 눈과 긍정적인 시심, 열렬한 창작열을 가진 윤 시인이야말로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한여름에 이슬방울을 머금은 백합처럼 생기 넘치는 문학소녀로 남아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