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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녀, 바빌론-로마
계 17장 1-6
2022년 12월 11일 주일낮 11시
인도, 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 교회 진천
음녀는 세상의 나라, 사람들, 세력,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음녀를 바빌론-로마로 본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십계명을 고의적으로 지속적으로 혹은 무지해서 어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1-4계명은 하나님만 섬기라,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마라,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라, 주일(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다.
5-10계명은
5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고 사람 간에 인격을 존중하라
6 사람의 생명과 인격을 귀하게 여기라
7 육체와 마음을 성결하고 신실하게 살아라
8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마라
9 거짓 증거, 거짓말 하지 말라
10 이웃의 아내와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십게명을 어기는 것이다.
음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국가, 권력, 정치 세력과 세상 모든 풍조의 상징이다. 포도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 문화, 세력, 사상, 사조 등의 상징이다.
계시록 17:1-18은 바빌론/로마(17:1-19:10)의 멸망을 말한다. 고대 동전 중에 베스파시안 황제 통치 중 주조된 동전에 데아 로마(Dea Roma), goddess Rome, 로마 여신이 ‘로마의 일곱 산들’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강의 신(남신) 테베르(Teber)에게 로마 여신이 오른 쪽 발을 딛고 기대어 있다. 왼 쪽은 암 늑대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여신의 왼쪽 아래가 닿아 있다.
여신, 데아 로마는 주전 2세기 중엽 이후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인기가 있었다. 요한이 말하는 일곱 도시는 로마 도시인데 이 도시를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제사를 지냈다. 요한은 로마의 영광이 로마의 심판과 멸망으로 바뀌고, 새예루살렘이 도래하는 것을 대조하여 묘사한다.
17:1 그리고 그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길, 오라, 내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는 그 큰 음녀의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계 17:1-18은 세 개의 주요 단락을 포함한다.
(1) 그 환상(17:3-19:10)에 대한 도입(1-2절)이다.
(2) 주홍색 짐승 위에 앉아 있는 그 여인의 환상이다(3-6절).
(3) 그 환상의 해석이다(7-18절).
17:2 그 음녀는 그 땅의 왕들과 음행하였고, 그녀의 음행의 포도주로 그 땅에 거하는 자들을 취하게 하였다.
계 17:1-2는 도입 요약이다.
(1) 대접을 가진 천사가 많은 물가에 앉은 그 큰 음녀의 심판을 보도록 초청한다(17:3-18과 18:1-24의 환상의 요약이다).
(2) 그 음녀에 대한 이중 기소이다. 첫째는 그 땅의 왕들이 그녀와 음행했다. 둘째는 그 땅의 거민들이 그녀의 음행의 포도주에 중독되었다.
반면에 1-2절을 3-18절 만의 도입으로 간주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17:1-19:10과 21:9-22:9간의 구조 평행이니, 17:1-2를17:3-19:10 전체의 도입으로 간주해야 한다.
계 17:3-6은 주홍색 짐승 위에 앉은 그 여인의 환상이다. 이 단락은 세 단위로 이루어진다.
(1) 도입: “영 안에서” 즉 영적 환각 상태에서 광야로 이동한다(17:3a).
(2) 그 환상(17:3b-6a)은 주홍색 짐승 위에 앉은 한 여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 주홍색 짐승은 참람한 이름들로 덮여 있고 일곱 머리와 열뿔을 가졌다.
(3) 결론: 관찰자의 반응(17:6b)이다. 3b-6a의 환상은 7-18절에서 풍유적으로 해석된다.
계 17:7-18은 그 환상의 해석이다. 이 해석은 7절에서 환상을 요약 기술하여 시작하는데, 그 환상이 네 가지 특징을 담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내가 네게 그 여인과 그녀를 싣는 그 짐승의 비밀을 말하리라. 그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노라.(7b)”
17:1a 이제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왔다
21:9a는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17;1a와 21;9a는 거의 비슷하다.
16장 1절은 일곱 천사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한다.
17:1b 오라, 내가 네게 그 큰 음녀의 심판을 보이리라
“그 큰 음녀”에 대하여 살펴보자. 구약에 창기의 이미지가 자주 발견된다. 음녀는 구약에서 하나님 없는 도시(불경건한 도시: 이사야 1:21, 예루살렘; 이사야 23:16-17, 두로; 나훔 3:4, 니느웨)를 말한다. 우상을 섬기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 음녀에 비교된다(렘 3:6-10; 겔 16:15-22; 23:1-49; 호 4:12-13; 5:3).
브룬스(Bruns)는 ‘그 큰 음녀’를 ‘로마’로 제안했다: 이는 부차적으로 로마 클라우디오(Claudio) 황제의 아내, 황비 메살리나를 지칭한다. 메살리나는 다양한 성적 모험에 탐닉했다. 술과 환각 성분에 취하여 성적 비밀 파티를 열었다. 그러나 소문에 의한 것이고 확실한 근거가 부족하다. 그러나 개연성은 있는 것 같다. 권력과 부와 시간과 건강이 있으면 쾌락과 죄악에 빠지기 쉽다.
17:1c “많은 물가에 앉았다.”
“많은 물”은 15절에 “민족들, 군중들, 나라들과 언어들로 해석한다. 구약 은유에서 민족들 혹은 군대들이 “(많은)물”로 상징되었다(시 144:7; 이사야 8:6-7; 17:12-14). 특히 사 17:12-14는 많은 민족들 혹은 나라들의 포효함을 “많은 물들”이 포효하는 것과 비교한다.
“많은 물들”은 구약에서 야웨와 갈등을 이루는 상태의 혼돈과 무질서를 의미한다. 시 18:16; 29:3에서 “많은 물들”은 홍해이다. 시편 93:4; 144:7; 겔 32:13에서 “많은 물들”은 나일강이다. 베스파시안 황제의 고대 로마 화폐, 세스테르티우스에 새겨진 여신 로마는 일곱 언덕(일곱 산) 위에 앉아 있다. 오른 발은 티베르 강에 딛고 있다. 티베르 강이 수염이 있는 남자 인물로 의인화되어 있다.
이것은 물로 채워진 해자(moat)로 역사적 바벨론의 특징이다. 유프라테스 강이 그 도시 가운데로 흘렀다. 주위 지역은 운하와 관개수로가 사방으로 연결되었다. 칠십인경(LXX)역 예레미야 28:13(MT 마소라 테스트 51:13)은 바빌론을 “많은 물 가까이 거하는 너는 많은 보물 속에 있다.”고 했다. 예레미야가 언급한 바빌론의 부는 계 17:4로 확장될 수 있다.
17;2a “그녀와 그 땅의 왕들이 음행하였다.”
이사야 23:17에 “그리고 그녀(두로)가 그 땅의 모든 나라들과 행음했다.”
칠십인경(LXX)은 아주 다른 번역을 했다: “그리고 그 땅의 모든 나라를 위하여 시장(market, 장터)이 되리라.”
구약 히브리어 “자나, zana”는 “음행하다, 창기가 되다”로 쓰인다. 야웨를 향한 믿음없는 이스라엘의 행위, 즉 우상숭배를 가리킨다.
이는 야웨와 이스라엘 간의 언약과 결혼 계약의 유비에 근거한다(레 17:7; 20:5-6; 민 14:33; 15:39; 신 31:16). 이는 선지자 호세아(1:2; 2:4; 4:15), 예레미야(2:20; 3:2), 에스겔(6:9; 43:7) 등에서 발견된다.
구약의 배경을 고려하면, 성적 부도덕성의 은유는 처음 보면, 바빌론-로마의 정죄와 거의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구약의 몇 곳에서 도시의 상업적 거래는 음행의 은유로 기술된다. 경제적 관계는 종교 행위의 교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미가 1:7; 나훔 3:4; 왕하 9:22).
이사야 23:17절에 두로(Tyre, 히, 쪼르)의 상업적 계약은 “음행(prostitution)”으로 불렸다. 그런 무역의 이득은 “음행의 값”이라 불렀다(나훔 3:4에 유사 언어가 니느웨에 쓰였다). 그러나 이사야 23:17과 나훔 3:4의 역사적 맥락은 두 선지자 모두 두로나 니느웨 그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 선지자들은 그 근동, 특히 이스라엘에 미친 그 도시들의 부정적 영향력을 책망했다.
근주자적,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다. 붉은색을 가까이하면 붉은색 물이 들고, 검은색을 가까이하면 검은색 물이 든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면 나쁜 사람이 된다. 믿음의 사람을 가까이하면 믿음의 사람이 되고 불신자를 가까이하면 불신자처럼 되기 쉽다.
문제는 요즘은 신자와 불신자가 섞여서 사는 사회라는 것이다. 사회적 교류, 경제적 거래, 무역 거래 등을 아니할 수 없는 시대이다. 신자 각자가 말씀, 기도, 삶을 통해 경건한 사람으로 자신을 날마다 깨우고 세워가야 한다.
요한은 왜 바빌론과 그 땅의 왕들 간의 관계를 성적 부도덕성의 은유를 통해 묘사했는가? 바빌론과 그 주변 나라들의 정치적 동맹을 비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전 63년부터 주후 66-73년까지 로마인들이 유대 땅을 조종했다. 팔레스틴의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그들의 조종을 받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적대감을 가졌다.
2b “그 땅의 거주민들이 그 음녀의 부도덕함인 그 포도주에 취하였다.”
성적 부도덕성(재난적인 정치적 동맹, 2a절 참고)을 중독 은유와 결부시킨다. 이는 로마제국에 의한 백성의 희생을 ‘중독’으로 표현하는데, 식민지 왕들이 백성을 중독시키는 매개자(중간) 역할을 했다.
“진노의 잔”을 말하는 구약의 단락들에서 야웨는 그의 원수들에게 잔을 마시고 취하라고 강제하는 모습이다. 즉 마시고 취하는 그 자체가 심판으로 간주되는 것이다(사 51:17-23; 렘 13:13-14; 25:15-29, 28-29절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것을 형벌이라고 한다.; 48:26; 51:39, 57; 애가 4:21).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바빌론-로마의 두 번째 주된 허물이다(첫 번째 허물은 2a절 참조). 바빌론-로마의 이 허물은 17:1-19:10에서 여러 가지 연관된 방식으로 표현된다.
계 14:8 그녀의 부도덕한 열정인 그 포도주를 모든 나라들에게 주어서 마시게 했다.
계 17:26 그리고 그 땅의 거민들이 그녀의 부도덕성인 그 포도주로 취하였다.
계 18:3a 그녀의 부도덕성의 열정인 그 포도주로 열국이 붕괴헀다.
계 19:2 그녀의 부도덕성으로 그 땅을 더럽혔다.
계 17:2b는 칠십인역(LXX) 렘 28:7(마소라 텍스트 MT 51:7) “그녀의 포도주로 그 나라들이 취했다.”를 암시한다(또한 계 14:8에 암시했다; 참조 사 51:7-23). 반면에 이런 중독의 결과가 칠십인경(LXX) 렘 28:7b에 언급된다(그러나 계 17:2에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그들이 불안정하다.”
17:3a “그리고 그가 나를 영 안에서 광야로 데려갔더라.”
“영 안에서(헬, 엔 프뉴마티, in the spirit)”를 데이비드 온(David E. Aune)은 “선지적 황홀경(trance)”으로 옮긴다. 계시록에 4회 나온다(1:10; 4:2; 17:3; 21:10). 17:3에 가장 근접한 병행구는 21:10이다. “그리고 그가 나를 크고 높은 산으로 선지적 황홀경 속에(엔 프뉴마티, in the spirit, 성령 안에서) 이끌었다.
“광야, 헬, 에레모스”는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인데 여기서는 경멸적 어조로 쓰였다. 반면에 12:6,14는 피난과 보호의 긍정적 의미로 쓰였다. 21:10에서는 “크고 높은 산”으로 긍정적 의미로 쓰였다.
“성령”이 물리적 힘으로 여겨지는 것은, 에스겔서에 5회 쓰인 용례와 비슷하다(겔 3:12; 8:3; 11:1, 24; 43:5): “히, 바티사에니 루아흐; 헬(LXX, 칠십인경), 카이 아네라벤 메 프뉴마”, 즉 “그리고 한 성령이 나를 올려갔다.” 또한 “히, 베루아흐 네사터니 바티카헤니, 헬(LXX, 칠십인경), 카이 토 프뉴마 엑세렌 메 카이 아네라벤 메” 즉, “그리고 그 성령이 나를 올려갔다 그리고 나를 데려갔다(겔 3:14; 참조 2:2).
”성령 안에서“라는 개념은 요한이 에스겔의 영향을 받았고 에스겔은 엘리야의 영향을 받았다. 사도행전 8:39절에 빌립 집사가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물에서 올라오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갔다. 인간이 알 수 없는 어떤 힘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필요한 곳에 이동시키는 일을 성령이 감당하셨다.
17:3b “그리고 나는 주홍색 짐승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인이 앉은 위치는 권세의 자리이다. 그러나 그 여인은 보좌 대신에 그 짐승 위에 앉아 있다. “헬, 쎄리온, 짐승”은 17장에 9회 나온다.
그 여인에 대한 해석은 17:18에 나온다.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도시)이라.” 그 여인은 그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그 큰 도시를 상징한다. 다수의 주석가들은 그 여인이 ‘로마’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일부 주석가들은 그 여인을 예루살렘의 상징으로 본다.
혹은 세상의 혼합 종교들의 불경건함을 추상적으로 사징하는 것으로 보는 주석가들도 있다.
그 짐승의 주황색은 그 창기(whore)의 의복과 일치한다(참조 4절; 참조 12:3; 18:16).
네로(Nero)는 “자주색 용”으로 언급된다. 그 짐승은 로마 왕권을 상징한다.
12:3b “그리고 보라, 크고 붉은 용이라.”
“용, 헬, 드라콘”은 계시록에 13회 나타난다(12:3,4,7[2회],9,13,16,17; 13:2,4,11; 16:13; 20:2). 용은 유대교에서 여러 가지 상징 중 하나다(12:9 참조). “헬, 드라콘, 용”은 히브리어 “리비야탄”인데 칠십인경(LXX)에 “드라콘”이 4회 쓰인다(욥 40:25; 시 73:14[MT 74:14]; 103:26[MT 104:26]; 사 27:1). “히, 탄” 혹은 “히, 탄닌”은 “뱀, 바다 괴물”인데 15회 쓰인다(예: 출 7:9-12; 욥 7:12; 시 73:13[MT 74:14]; 사 27:1).
계 12:4b-6의 단락에서
(1) 그 용은 한 아기를 분만하려는(4b) 그 여인에게 적대적이다.
(2) 그 사내아이의 탄생(메시아, 시편 2:9)과 함께 그 아이는 하늘로 즉 하나님 보좌로 올려진다(5절).
(3) 그 여인은 하나님이 위하여 준비한 광야의 장소로 도피하여 보호와 공급을 받고 1260일(즉 3년 6개월) 지낸다.
그 용은 하늘에서 땅으로 추방당한다(7-9절). 그 용은 그 여인과 그녀의 자식을 추격한다(12:13-17). 하나님은 한 독수리 날개를 준비하시고 그 여인을 구하여 광야의 특별한 장소로 데려가고, 그 뱀으로부터 그 여인이 보호된다(14절).
구약과 신약에서 광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갔다. 광야는 피난과 구원의 장소이다(사 40:3; 렘 31:2; 48:6; 겔 34:25; 시 55:7-8).
하갈은 사라의 노여움을 피해 광야로 갔다(창 16:6-14). 이스라엘 족속은 애굽의 굴레에서 벗어나 광야로 갔고, 거기서 하나님의 인도(신 1:31; 시 78:52; 렘 2:2, 6; 호 2:16-17; 아모스 2:10)와, 공급하심을 받았다(출 16:32).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해 광야에서 지내며 연단을 받았다. 엘리야도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갔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역을 준비하셨다.
17:3c “일곱 머리와 열뿔을 가졌고 참람한 이름들로 덮였더라.”
다니엘 환상(단 7:7)의 네 번째 짐승이 열 뿔을 가졌다. 이는 열 명의 왕들을 상징한다(단 7:24). 이레니우스(Irenaeus)는 다니엘 7장의 열 뿔을 롬 제국을 나누는 열 명의 왕들로 이해했다.
12:1d “참람한 이름들”은 로마 황제들이 썼던 호칭과 별명이다. “헬, 큐리오스, 주(lord)”, “헬, 소테르, 구세주”, “라틴, 디비 필리우스, 신의 아들” 등이다. 오직 하나님께 쓰여야 할 이름이 사람에게 쓰였다.
17:4a “그리고 그 여인은 자주색과 주홍색 옷을 입었고 금 장식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했더라.”
이 묘사는 계 18:16과 유사하다. 그 여인은 우아한 옷을 입고 보석으로 치장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 우아한 도시는 그 여인으로 상징화 된다. 창기의 모습은 구약과 유대 문헌에 쓰인다. 창기는 그 공동체의 원수의 상징이다. 실상은 창기인 그 여인은 겉모습은 우아하고 화려하다. 사람들은 겉모습에 속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 세상의 도시와 문화를 창기로 비유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도시의 화려함에 속고 산다.
174b “그녀는 손에 금잔을 가졌으니, 혐오스러운 것들과 그녀의 음행의 더러움으로 채워졌더라.”
이것은 칠십인경(LXX) 렘 28:7(MT 51:7)의 암시인데, 그 금잔은 ‘바빌론’ 그 자체의 은유이다: “바빌론은 주의 손 안의 금잔이었으니, 온 땅을 취하게 했고, 열국을 그녀의 포도주로 취하게 했고, 그러므로 열국이 미쳤더라(mad).”
그러나 탈굼(Tg.) 렘 51:7(Hayward 역)은 그 잔이 바빌론의 죄에 대한 은유로 변한다. 그것은 계 17:4의 잔의 상징이다. “보라, 그 금잔이 모든 그릇들 중에 보배로우니, 곧 바벨론의 죄가 높아졌도다!” 그 여인이 든 그 금잔은 두 가지 요소로 채워졌으니, “혐오스러운 것”과 “그녀의 음행의 더러움”(5절에 반복)이라.
“혐오스러운 것, 헬, 브델루그마타(4-5절)”는 이방의 종교적 행위 즉 우상숭배이다.
“그녀의 음행의 더러운 것”은 정치적 동맹(2a절 처럼)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교도의 성적 부도덕성을 언급하는 것이다. “헬, 브델루그마”는 “역겨운 것, 혐오스러운 것, 가증스러운 것”이다. 계시록에 3회 나타난다(17:4,5; 21:27).
“멸망의 가증한 것, 헬, 토 브델루그마 테스 에레모세오스”는 막 13:14, 마 24:15에 나오는데, 칠십인역(LXX) 단 12:11; 참조 9:27; 11:31의 암시이다. 그것은 신성모독적인 물건이나 의식으로 거룩한 장소를 신성모독하는 것이다.
다니엘 9:27의 “미운 물건”은 우상을 가리킨다. 반면에 칠십인경(LXX) 스가랴 9:7은 우상에 빠진 희생제물(고기)을 가리킨다.
6절에서 바빌론은 예수의 순교자의 피로 취하였다(drunken)고 묘사된다.
17:5a “그녀의 이마에 신비로운 이름, ‘그 큰 바빌론’이 기록되었더라.” ‘비밀, 그 큰 바빌론은 “음녀들의 어머니”이다.
“바빌론”은 “발람”(2:14), “이세벨”(2:20), “소돔과 애굽”(11:8)처럼 상징적 이름이다.
로마는 여성신 데아 로마(Dea Roma) 즉 “여신 로마”로 의인화 되었다.
14:8에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그 바빌론이여 !”라는 그 천사의 선언은 렘 51:7-8(LXX 28:7-8)과 LXX 이사야 21:9를 암시한다.
“헬, 펩토켄 펩토켄 바불론.”
“히, 나플라 나플라 바벨” 즉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바벨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두 번 반복 강조는 바빌론-로마의 멸망이 확실함을 강조한다.
바빌론은 로마의 상징적 이름이다. 계시록에 6회 나온다(계 16:19; 17:6; 18:2; 10, 21). 바빌론과 로마는 세계 제국의 중심이었다. 바빌론과 로마는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주후 70년 로마 제국 장군 티토(Titus)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을 파괴헀다.
17:5b “음녀들과 땅의 가증한 것들의 어머니.”
성적 혼돈과 우상 숭배는 대표적 큰 죄이다. 17:4절의 큰 잔에도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금잔에 가증한 물건과 그녀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했다.
호세아 2:2-5에 보면 이스라엘이 창기 짓을 하고 애비가 누구지 모르는 자식들을 낳은 어머니로 의인화 된다.
큰 음녀 로마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나라들의 도시들에 창기들 즉 신전을 두었다. 소아시아 도시들에 Dea Roma(여신 로마)를 섬기는 신전과 제의가 행해졌다.
17:6a “그리고 내가 보니 그 여인이 하나님의 백성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여 있었다.”
로마 제국 하에서 기독교인들이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 터키 카파도키아에 기독교인들이 오랫동안 숨어서 지낸 동굴들이 남아 있다.
로마에 지하동굴 교회 카타콤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어느 시대에나 큰 음녀와 작은 음녀들이 있었다. 음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내용은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알고도 어기는 경우와 무지해서 어기는 경우가 있다.
큰 음녀는 바빌론 혹은 로마로 상징화된다. 지금 2022년 12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큰 음녀, 작은 음녀들이 있다. 나라, 정부, 경제(돈), 무역, 문화, 사상, 사조, 세상 풍조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음녀 일 수 있다. 경제, 사회, 문화, 국방, 정치, 법조, 교육 등 모든 분야가 음녀가 될 수 있다.
반면에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일반 은총으로 우리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요한은 세상 나라, 음녀, 바빌론, 로마가 심판과 멸망을 당하고 새 예루살렘이 다가오리라고 말한다.
큰 음녀, 작은 음녀의 도전과 시험에 두려워하거나 떨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믿고 새 예루살렘의 소망을 가지고 굳건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