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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사(원광대 최용현씨가 2003년 졸업논문으로 쓴 것) 역시 무단링크를...| 자유 게시판
정현일 | 조회 30 |추천 0 | 2004.03.14. 00:50
// 一. 머리말

 

1894년 갑오농민혁명은 그 진전과정을 4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 1단계는 고부민란의 단계로 전라도 고부에서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못견딘 농민 약 4천명이 전봉준을 대표로 추대하여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탐관오리를 징계하였는데 이는 농민전쟁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소민란 또는 소폭동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제 2단계는 갑오농민전쟁의 제 1차 농민혁명의 단계이다. 1894년 음력 3월 20일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의 지도하에 茂長(무장)에 남접도소를 설치하고 봉기를 준비하여 약 4천명의 동학농민군을 편성하였고 전주에 입성한 단계로 5월 8일에 전주화약이 체결되었다. 이 제 1차 농민전쟁 단계로부터 본격적 농민혁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제 3단계는 갑오농민전쟁의 농민집강소의 단계로 청군과 일본군이 갑오농민전쟁에 개입하자 이 두 나라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하여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되고 집강소를 전라도 53개 군현에 설치하여 농민통치를 실시했던 단계이다. 제 4단계는 갑오농민전쟁의 제 2차 농민혁명의 단계이다. 동학농민군이 해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철수하기는 커녕 청일전쟁을 일으키고자 궁궐에 침범하여 정권을 농단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였다. 이에 전봉준을 지도자로한 동학농민군이 1894년 음력 9월 13일경 항일민족혁명전쟁의 성격을 가진 제 2차 봉기를 말한다.

 

 

一. 동학사상의 성립배경

 

동학은 경주의 몰락양반인 최제우(1824 - 64)에의하여 1860년 4월에 창시되었다.  1860년은 국내외에 걸친 강한 외세의 도전속에서 민족적 위기가 고조되어 있던 시기로 동학은 국내의 봉건적인 위기상황 뿐 아니라 외세 침략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고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 대처하는 과정에서 반성하였다.  그 배경을 다시 대내외적인 요인으로 나눠 살펴보자.

 

① 대내적 요인(기타 -> 질병, 흉년, 임.호란의 파격으로 인한 농민 생활피폐)

먼저 정치적 측면을 보면 近親 . 貴族을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행해져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고 이로 인해 정치기강이 혼란해지게 되었다.  또 매관매직이 성행 이는 농민들에 대한 과중한 세금부담으로 나타났다.  경제적 측면을 보면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나타난 삼정의 문란은 국가재정을 궁핍하게 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해 작은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사회적 측면을 보면 산업의 발달이 이루어져 생산력이 증대되고 부의 축적이 이루어져 신분상승을 꾀하게 되었다.  이는 곧 신분체제의 붕괴화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사상적 측면을 보면 위와 같은 사회변동기에 관료제와 신분제를 매개로 하여 봉건체제를 유지해왔던 성리학은 더 이상 설자리를 잃게 되고 실학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실학은 성리학내에서의 실학으로 조선사회의 체제 운영상의 문제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그 추진세력 또한 미약해 역시 현실을 타개할 논리나 사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또 위정척사론이 대두되고 정감록적 도참사상, 미륵신앙등의 민중신앙등이 퍼졌으나 민중의 고달픈 심정을 어루만져주고 있었을 뿐 구체적 대안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이러한 민중사상의 전파와 병행하여 천주교가 수용되게 된다.  그러나 다음에 이야기할 서양열강의 위기의식이 고조됨에 따라 점차 탄압받게 된다.  이때 이러한 사상적 공백을 비집고 나온 것이 바로 동학이다.  

 

② 대외적 요인

조선사회는 대내적 위기상황에 처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강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黃_ 永 사건과 잦은 이양서의 출몰, 통상교섭의 강요 등의 서양열강의 조선의 침주가 있었다.  여기에 1840년 아편전쟁발발과 청의 패배소식, 1850년 태평천국운동, 1860년 영.불 연합군의 북경침략에 대한 청의 굴복 등은 당시 사대부의 사상에 젖어 있었던 조선 사회에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와 더불어 서양열강의 상징물로 인식된 천주교(서학)의 국내침투는 배척되어야 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곧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고 이를 대신할만한 새로운 사상의 대두가 요구되었다.

 

 

二. 동학의 성격

 

동학이 급변하는 위기상황에 대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창립된 이상 종교로서 내적인 구원영역과 함께 외적으로 그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정치적.사회적 지향을 내포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동학경전을 통해 정치적.사회적 지향점을 중심으로 동학의 성격을 파악해보자.

먼저 반봉건의식과 관련하여 최제우는 無爲而化적 종교적 입장과 守必正氣의 도덕적 입장에 안주하여 봉건적 조선 사회를 극복할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용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따라서 동학이 당시 조선사회를 혼란으로 보고 부정.지향하고자 한 점은 어느정도 반봉건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이를 실현할 구체적 방안이 미흡했다는 점과 그가 제시한 새로운 사회상이 관념적 이상향에 지나지 않았으며, 유학적 도덕질서의 회복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 점에서는 반봉건성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곧 동학이 역사의식을 내포한 사회사상이면서 개인의 구원을 지향하는 관념적.보수적 종교라는 것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반외세의식과 관련하여 최제우는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하고 서양세력을 洋夷로 말하고 있다.  이는 그가 전통적 유생의 화이적 세계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그는 서양의 문화적.군사적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응방법으로 동학교서를 외우거나 검가를 부르는 것을 제시했다.  이런의식과 대응은 조선에 대한 서양의 침략이 현실화되지 않았던 당시 이는 외세에 대한 절대적인 배격이 아니라 화이론에 입각한 중화주의적인 침략한데 대한 반외세의식이었다.  수준을 반영한다하더라도 곧 있을 洋擾와 개항에 대한 충분한 대비책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셋째, 보국안민이라는 의식과 관계지어 볼 때 이는 주극대도와 같은 사상적 관념성을 말하며 이는 곧 적극적인 국가.정치체제의 空洞性을 나타낸다.  이런 체제구상의 공동성은 2대 교주 최시형의 단계에서도 극복되지 못한다.

넷째, 윤리적 측면과 정치.사회운동의식과 관계지어 볼 때 2대 교주인 최시형단계로 오면 수양과 윤리도덕을 앞세우는 성향이 두드러진다.  이는 동학이 점차 종교적 틀을 갖추게 되는 변화라고 하겠다.  이러한 수양위주의 동학교단이 정치.사회운동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은 1892년 7월부터이다.  시민주가 최시형에게 찾아가 최제우의 문제를 상외한 후 공주집회와 삼례집회를 개최하고 1893년 단양에서 복합상소와 척왜양의 괘서운동을 벌이면서 정치.사회적운동은 점차 고조되어 갔다.  그러나 최시형쪽의 비협조로 더이상 정치.사회운동으로 발전되지 못했다.  이로써 동학운동은 동학교단이 중심이 되지 않고 사회변혁세력과 농민이 주도가 되었다.

 

 

三.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의 관련성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의 상호관련성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동학교단 및 동학사상이 자발적으로 동학혁명을 주도하고 그 사상적 추진력으로 작용했다기 보다는 전봉준 등의 사회변혁세력이 동학교단과 동학사상을 정치.사회운동에 활용하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다만 최제우가 당시 사회위기를 감지하고 기층 대중적 입장을 반영하는 나름대로의 체계적인 사회사상을 구축하고 종교적으로 기층대중과 만나, 그들을 구원하려 한 개인의 의지만은 무조건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四. 동학농민이 일어나게 된 배경

 

조선조의 사회경제사적 모순이 완전히 표출된 것은 1894년의 갑오농민혁명이었다.  사회경제사적 여건을 보면 조선통치기구의 기반이었으며 농촌사회의 근간이 된 토지제도의 모순으로 조선후기 관제가 극도로 해이, 제반 모순이 농촌경제와 봉건 통치기능에 가중되었다.

19세기말 조선왕조의 부패한 사회경제사적인 상황은 농민전쟁을 재촉하였다.  일부의 경제적 침탈이 가해짐으로써 농민전쟁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갑오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되는 內因적문제와 특질을 규명하여보겠다. 갑오농민전쟁의 제일 요인으로는 조선봉건사회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토지소유를 둘러싼 문제이다.  토지는 조선의 통치기구를 유지하는 기반이며, 조선 농민의 기본적 생산수단이었다.  한편 직접적 이해관계야말로 농민으로 하여금 반봉건 투쟁에로 일어서게 하는 요인으로는 국가부세의 대상이 되는 토지가 감소되어 갈 수밖에 없었던 문제, 양전사업과 전산법의 모순에서 야기되는 문제, 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의 1/3을 차지하던 지방관리의 탐오문제, 농업기술의 발달과 기업적 지주의 등장과 함께 나타나는 농촌사회의 변동과 계급분화문제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조 말기의 국가재정이 안고 잇던 문제점과 농민이 처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임진왜란 이후 황폐한 토지가 정부의 적극적인 개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마지막까지 원약을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은 은결, 여결, 누결 등 아예 원장부에서 빠진 부결(浮結)이 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둔전, 궁방전, 각 능원위전, 유래 등 각양 면세결이 늘었다.  원총, 식, 실결이 줄어드는 삼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면세지가 국결 전체의 절반이상에 이르고, 면제된 몫이 다른 농민의 부담으로 전가되었고, 일반농촌의 생활을 어렵고 파산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둘째, 양전사업을 들 수 있다.  양전사업은 규정대로 20년마다 개량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이었다.  양전을 행하면 농민의 과세지가 늘고, 구가에로의 상업은 줄어들고 차액분은 지방관리가 횡령을 하였다.

셋째, 관리의 부정이다.  관리제 유지의 기본적 요인은 과거제의 공정한 시행인데도 매관이 공개적으로 행해지고 중앙에서의 매관행위로 지방수령의 임기인 '과만 5년'의 원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령들은 평균재임기간이 짧아져 착취할 궁리만 세웠다.  수령보다는 아전이하, 소위 수령을 보좌하는 자들의 착취가 더했다.  아전적인 세습직에다 생활보장이 전무하여 농민수탈하였고, 이것으로 국가재정궁핍에 박차를 가했다.

넷째, 계급분화가 이루어졌다.  기업적 지주가 등장하여 상업자본을 기반으로한 고래대 방식, 경영적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지주로써 기업적 지주의 성장과 더불어 조선의 전통적 신분제가 파괴되었다.

다섯째, 어촌의 수세문제이다.  상품화폐경제에 대응하기위해 농어의 분리가 이루어져 소상품생산적 어업이 보급되었다.  바다에 과세, 해산물에 과세하는 등 이중삼중이 손해를 당하는 입장이었다.  균역법 실시이후 국가에게 이중수탈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삼남지방, 한국의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에서 결렬한 작용을 하였다.

여섯째, 개항이후 일본의 대한 통어상황과 일본어민의 조선 해안 침투가 있었다.  일본과 근대적 통어가 시작된 것은 1883년의 '통상장정'이 체결된후 본격적인 진출은 1889년 '통상장정'이 체결된 후에 조선의 영해 3해리 이내에서도 이로 어물의 판매행위을 허가되었다.  어민의 반일감정 증폭, 제주도 전도민이 봉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일곱째, 일본의 대한 상업 및 일본인이 조선내지에서 행상하였다.  수입액이 수출액의 배가 되었다.  조선이 1차 생산품 수출에 의존, 수입품은 거의 전부가 의류를 비롯한 가공품 내지 소비품, 중간무역에서 점차 서양제품을 모방하여 만든 자국상품으로 대처하였다.  일본상인이 조선 내지행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해안 지대에서는 밀무역이 성행하여 반일의식이 고조되었다.

 

1871년 3월 10일에 일어난 영해민란은 이필제의 주도하에서 발생된 난으로 결과는 실패했지만, 동학교단조직을 이용하여 지역적 연대성을 확보한 조직적 민란으로서 뒤에 聞_ 민란으로 이어졌고, 1894년에는 갑오농민전쟁에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시간적 지속성을 지녔던 것이다.  고부민란이 갑오농민전쟁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다면, 반봉건적 전란의 형태로 시작한 영해민란은 교조신원운동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 동학포교활동의 일환인 동시에 갑오농민전쟁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五. 교조신원운동

 

동학운동은 교세확장과 교단조직의 인과관계속에서 꾸준히 지속되었으나 1892년 1월에 충청감사 조병식이 금령을 발표함에 따라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을 모색해야할 처지가 되어 농민과의 유대와 연대성 확보를 토대로한 民訴형태의 교조신원운동이 필요했다.  1892년 11월 삼례취회로 교조신원운동이 시작하여 소장을 제출하였다.  천인합일의 돌 황제_ 생을 하려던 교조최제우의 정당성과 동학타압의 부당성을 주장한 것으로 유.불.선의 도를 통합한 동학교지를 주지시키는 한편 교조신원의 동학측 요청을 국왕에게 전해줄것을 청원하여 2월 11일 손병희의 지휘하에 박광호를 소두(疏頭)로 하여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결행하였다.  상소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근래에 세상에는 도덕을 닦는 일에 힘쓰는 선비가 드물었는데 다행히 최제우가 천명을 받들어 동학이라는 새종교를 창도하여 민중교회와 표교활동을 위하여 노력했으나 정부는 그에게 혹세무민의 누명을 씌우고 처형했다는 것을 항의, 또 동학교리는 유교사상과 대_ 소이 하여 불교.도교를 통합하는 원리가 있다고 하여 동학의 고등종교적 통일성을 강조, 한편 최제우의 도는 당시 사회로부터 서학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었으므로 동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을 뿐 자체는 天道라는 것을 강조하여 동학이 보편적 종교라는 것을 주지시켰다.  1893년 3월 10일 보은취회에서는 교조신원의 종교적 주장을 철회하고 민중과 연대하여 현실적 정치욕구를 충족시킬 수 이는 '生等數萬 同力 死 倭洋 欲 大報之義의 구호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그러나 동학교도와 일반민중을 정치적 대결의 방향으로 유도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호남접의 과격한 태도와는 달리 최시형을 중심으로한 북접 상부지도층은 비폭력적 교조신원운동으로 시종일관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나 몇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동학에 대한 정부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둘째, 집단 시위로 동학의 조직능력을 사회에 과시함으로써 민족 종교의 긍지를 느끼게 되었다.  셋째, 막강한 조직력이 있어도 평화적 소청운동이나 비폭력시위만으로 그들의 주장을 관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신미교조 신원운동(1871)때와 마찬가지로 민중적 차원에서 물리적 현실참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남접의 하부지도층을 이때의 군중시위 경험을 살려 1894년 갑오동학운동을 농민전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肉. 제 1차 동학농민운동

 

1894년 4월 전봉준, 김기범, 최경선 등이 무장현에 집결한 것을 시작으로 4월말에는 고부 백산에 집결하여 [4대강령]을 발표하는 등 봉기의 규모가 지역이 아닌 점차 전국적인 양상을 띄게 되었다.  5월에 이르러서는 동학군이 부안관아를 점거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영장 이광양과 초군 이재섭 등에게 명하였다.  그러나 [황토현 싸움]에서 동학군이 대승리를 거두게 되고, 동학군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5월 11일 경군이 전주성에 입성을 하였으나 도망자가 속출하는 등의 사기저하로 홍계훈은 중병을 요청한다.  5월 19일에 장위영병 300명, 강화병 500명을 증파하였으며 5월 27일에야 합류하였다.  그동안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은 동학군을 쫓아 계속 남하했으며 [황룡촌]에서 접전을 벌였지만 역시 동학군의 승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5월 31일 전라도 최대의 집결지인 전주성이 동학군에 함락되었다.  한편 최시형이 이끄는 충청일대의 북접은 순수 종교운동을 고수하고자 하였으나 주위의 설득으로 5월 6일 충청도 청산현 소산리에 집결하여 성전평을 점거하고, 회덕현을 습격하는 등의 일을 하였으나 최시형이 무력싸움을 꺼리는 이유로 갑자기 해산을 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을 위시한 남접은 6월 1일 전주성 밖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패하여 급격히 사기가 꺾였다.  이 틈을 타 홍계훈은 선무공작을 펴고 이에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요구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동학군은 자진해산했으며, [전주화약]이 성립된 것이다. 이내용 가운데 집강소의 설치가 이루어졌는데 집강소는 전라도 53개주 관아에 있는 민정기관으로 동학교도가 최고위인 [집강]을 차지하고, 실질적인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집강소에서는 [폐정개혁]도 추진을 하였는데, 폐정개혁은 탐관오리의 숙청, 동학농민군의 참정권요구, 양반토호들의 탐학배격, 토지재분배, 노비해방 등 반봉건적 성격의 것과 일제세력의 배격 등을 골자로 한 개혁으로 여러 차례 수정되었다.

 

 

七. 제 2차 농민전쟁의 배경

 

제 2차 농민전쟁 재봉기의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면 우선 들어야 할 것이 전주화약이 성립되었을 때 공동철병안을 제의했을 때 일본측에서는 군사적 위협을 가해 내정에 간섭하되 개혁을 구실로 하며 청에 대해서는 전쟁을 불사하고 조선에서 청국세력을 구축할 것을 결정하여 조선에서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았다. 내정개혁을 침략과 간섭의 구실로 활용하였고 조선정부에게 권고할 떼에는 일본이 필요로 하는 이권을 동시에 요구하였으며 그 개혁 담당기관으로 교정청을 설치하였다. 이 기간에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하면서 집강소 농민통치를 시작하고 있었다. 둘째로 일본군의 불법적인 궁궐 침입 및 내정간섭과 청.일전쟁의 도발이었다. 이에 전라관찰사 김학진은 이소식을 듣고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을 전주에 초청하여 일본군의 간섭에 대응하자고 제의했고 이에 응하여 전주에 들어가 상호 협조하여 관민상화에 의한 집강소의 농민통치가 진전되었다. 그러나 아직 청.일전쟁의 판세는 결정되지 않고 재봉기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으므로 재봉기를 단행할 단계는 아니었다. 세번째로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가 예견되고 조선정부의 일본에 대한 야합과 종속이 심화된 상황조건의 변화이다. 음력 8월 17일 평양회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하고 패전한 청군은 후퇴하여 전선이 압록강 건너에 형성되자 한반도는 완전히 일본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하자 일본측에서는 내정간섭을 난폭하게 강화하면서 조선정부에게 일본군에게의 협력 조치를 적극화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기 전에 일본군을 공격하여 패전시켜야 했다. 네번째로 일본군의 조선 관군과의 결합에 의한 동학당 토벌 준비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전망되자 일본군은 약간의 여유를 갖고 조선 관군과 연합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었다. 다섯째로 동학농민군 내부에서 나오는 항일 봉기의 요청이다. 즉 동학농민군은 일본이 한반도에 대병을 파견하여 결국 조선을 병탄하려는 것이 라보고 구국의식으로 재봉기의 조짐이 보였다는 것이다. 여섯째로 온건개화파 중앙정부 내의 친일적 개화파의 입지의 강화와 이에 따른 중앙 조정 정권 교체의 필요성의 대두이다.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가 전망되자 일본측의 온건개화파 정부에 대한 간섭이 갑자기 강화되었고 개화파 정부 내의 친일적 개화파들이 발호하였다. 중앙정부 내의 이러한 친일적 경향의 강화는 종래 군국기무처의 개혁에 암묵적 기대를 걸고 있던 동학농민들과 전봉준 등에게 중앙정부가 친일적 경향으로 기울어졌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중앙정부를 교체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제 2차 농민전쟁은 필연적이었으며 일차적인 동기는 일본침략군을 몰아내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한 항일 민족혁명전쟁으로 출발한 것이다.

 

 

八. 제 2차 농민전쟁의 봉기

 

제 2차 농민전쟁의 봉기는 1894년 음력 9월 초에 결정되었다. 전봉준은 8월 하순까지도 사태를 관망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김개남은 전봉준의 권고를 듣지 않고 1894년 음력 8월 25일경 남원에서 전라좌도의 동학농민군 7만여 명을 집합시켜 재봉기를 준비하였고 이는 총대장 전봉준에 재봉기 결정에 결정적 압력을 가하였다. 9월초부터 지역별로 산발적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전라도 뿐만 아니라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등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동학농민군의 간혈적 재봉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 고을에서 농민군부대를 편성하여 대접주.집강의 지휘를 받으며 소수만이 직접 삼례로 달려와서 전봉준부대에 편입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지휘 체제는 전봉준이 대장이 되고 대수령인 손화중과 김덕명의 총지휘로 이루어졌다. 남원에서 봉기한 대수령 김개남은 상당한 독립성을 가지면서 자기가 직접 지휘하는 김개남부대를 편성하여 독자적 행동을 하였다. 전봉준의 삼례역에서의 제 2차 농민전쟁 재봉기는 보은에 있는 북접대도주 최시향의 사전 허락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결정하여 남접만 재봉기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남접과 북접사이에 갈등이 생겼었으나 오지영의 협의의 성공으로 보국안민의 기치하에 북접도 봉기하여 남북접이 연합해서 진퇴를 같이하기로 하였다. 이에 북접도 9월 18일자로 청산에서 봉기하게 된 것이었다. 북접의 봉기 지역은 충청도.경기도.강원도의 일부 지역과 경상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에 걸친 지역이었다. 따라서 북접이 봉기했다는 것은 제 1차 농민전쟁때와는 달리, 제 2차 농민전쟁 때에는 전국의 동학농민이 봉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九. 남.북접 동학농민군의 논산대회

 

전봉준은 삼례에서 제 2차 농민전쟁 재봉기의 격문을 각처에 돌린 후 약 1개월 가까이 이곳에 주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각지에서 동학농민들의 봉기와 무장의 강화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만연되어감에 따라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자기 고을의 무기고를 습격해서 무기를 빼앗아 무장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그 다음의 이유로 전봉준은 농사의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느라고 삼례에 머물러야 했다. 추수를 끝내고나서 봉기하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막대한 군수미와 군수전이 필요한 것인데 이것은 당시 농촌의 형편으로서는 추수가 끝나야 제대로 조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들어야 할 이유는 전봉준이 북접과의 연합 타결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북접에서도 최시형의 서한을 갖고 전봉준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며 이 과정에서 전봉준이 북상하면서 논산에서 남.북접이 만나 논산대회를 갖기로 합의한 것이다. 한편 북접군은 음력 9월 18일의 청산취회에서 각 접의 두령들이 북접대도주 최시형으로부터 봉기 명령을 받은 후 동학농민군을 편성하여 봉기한 후 보은의 장내로 집합하였다. 각지의 동학농민군이 보은에 모이자 손병희를 통령으로 하여 각 포를 총지휘하게 하고 북접군을 편성하여 논산으로 향하였다. 논산대회에 참가한 남.북접군은 그후의 부대 배치 상황에서 추정할 때 약 5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동학농민군의 제 2차 농민전쟁이 항일의병의 성격을 가져 극소수지만 유생 등 과거에 동학농민군에 적대적이었던 사람들도 함께 논산대회에 참가하였고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나섰다가 참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논산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김개남은 논산대회에 가지 않고 전주에 주둔한 채 독자적으로 북상을 준비하였다. 동학농민군의 논산대회에 의해 전봉준의 지휘 아래서 동학농민군의 부대편성과 배치가 조정되었다. 전봉준부대와 손병희부대는 1894년 10월 21일경 공주를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논산을 출발하였다.

 

 

十. 전국 각지방에서의 동학농민군의 봉기

 

전봉준이 1894년 음력 9월 13일 제 2차 농민전쟁 봉기의 격문을 전국에 돌리고, 제 2세 교주 최시형도 봉기를 명령하여, 10월 12일-20일 논산대회가 열리는 기간에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만 봉기한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봉기하였다. 황해도에서는 장연에서부터 봉기하기 시작하여 황해도 수도인 해주를 점령하였고 해주에서 일단 철수했다가 13개의 군현을 점령하고 금천까지 진출하였다. 일본군의 현대적 화력을 당하지 못하여 제 2차 해주 점령에 실패한 후 구월산에 주둔하여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경기도에서는 안성에서 양지, 이천, 양근, 지평에서 먼저 동학농민군을 일으켰다. 뒤이어 경기도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이 연달아 봉기하였다. 경상도에서는 일찌기 9월 초에 화개, 남해, 하동, 사천, 진주, 곤양, 성주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한편 강원도에서도 원주, 영월, 평창, 정선, 횡성, 홍천, 강릉, 양양 등지에서 큰 규모로 봉기하였으며 평안도에서는 황해도와 접경인 상원에서 약 6백명의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관아를 습격했다. 함경도에서는 원산부근에서 수백명의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제 2차 농민전쟁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전국의 규모는 당시 전국의 동학교도 중에서 약 60만명이었다.

 

 

十一. 일본군의 무력 배치와 작전

 

1894년 음력 9월부터 제2차 농민전쟁에 봉기하기 시작하자 청.일전쟁을 한반도에서 도발하여 전쟁중인 일제의 일본군과 조선정부의 관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한 출동을 시작하였다. 주도적으로 활동한 것은 일본군이었다. 大鳥圭介의 후임으로 井上擊은 동학군만을 전담하여 토벌할 1개 대대의 병력을 특파해 줄 것을 일본군의 대본영에 전보로 요청하고 이른바 후비보병독립제19대대가 특파되었다. 일본군은 병참로를 경부로와 인천-대동강로의 2개선으로 하여 요지마다 병참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 병참부의 수비대 병력을 모두 동학농민군 진압에 투입하였다. 경기도.황해도.강원도.경상도 지방의 동학농민군 진압에는 전적으로 일본군 제 18대대와 이 일본군 병참부 수비대가,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제19대대의 보조 병력이 투입되었으며 후비 보병독립 제19대대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동학농민군을 찾아나서서 수색토벌을 할 목적으로 투입되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는 3로(西路.中路.東路)로 나누어 동학농민군을 동북쪽으로부터 몰아 내려와서 전라도의 남해안지방에 몰아주쳐 여기서 모두 초멸시키기로 하였다. 한편 조선정부의 관군의 경병은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재를 당했었고 그 후에 왕궁 호위대로 남은 병력을 모두 합해야 2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동학농민군의 봉기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지방유생들이 민보군, 의병...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동학농민군에 대항하는 군대를 편성하여 경병과 영병을 지원하였다.

 

 

十二.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의 북상과 주요 전투

 

(1) 한밭(大田坪) 전투

전봉준부대가 삼례로부터 논산으로 행군하여 논산북방의 한밭에서 영장 용도회가 인솔하는 충청도 감영군과의 전투이다. 대회개최지를 엄호하기 위해 직전에 전봉대를 파견해서 논산 북방을 경계하였는데 충청도 병영에서 논산대회의 정보를 입수하고 사전에 그 개최지 일대를 순찰하다 전봉준부대의 선봉대가 청천도 영병을 쳐부순 전투이다.

 

(2) 목천 세성산 전투

전봉준부대가 논산을 출발하여 공주로 향해 충청도 목천의 세성산에서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관군사이에 큰 전투이다. 이 전투는 세성산의 독특한 지형을 이용하였는데 일본군의 기습으로 참패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세성산전투에서의 참패는 서울을 향한 농민군의 북상호가 차단.저지당한 것으로서 동학농민군의 작전과 사기에 큰 타격을 주었다.

 

(3) 공주 이인전투

전봉준부대와 손병희부대는 3로로 나누어 공주를 향했는데 전봉준부대의 1대는 이인역으로 진출하여 점령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여 이인역을 탈환하였는데 이인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이인전투이다. 동학농민군이 이인역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관군을 패전시켰다. 이인전투는 공주전역의 첫번째전투로 승리한 것이다.

 

(4) 효포 전투

이인전주에서 승리한 후 바로 새벽에 공주감영의 뒷산인 봉황산을 포위하였고 다른 1대는 무너디를 넘어 효포를 공격해서 점령하였다. 효포를 지키던 관군과 일본군은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이인전투와 효포전투에서 연달아 승전하고 공주를 3면에서 포위하였다.

 

(5) 웅치 전투

동학농민군은 부대를 3로로 나누어 3천명의 주력부대는 웅치에 있는 관군을 공격하였다. 냉천 뒷산을 점령하여 웅치와 월성산의 관군과 격렬한 교전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은 공주로 철수하였고 이날의 웅치전투는 승부없이 서로비등하였으나 전봉준부대로서는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전투였다.

 

(6) 홍주 전투

전봉준은 敬用店에 주둔하여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홍주.예산.덕산 지방의 동학농민군이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홍주는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에게 포위당하여 홍주성으로 도망해들어와 관군과 민보군이 수비하고 있었는데 동학농민군이 홍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자 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대병력으로 일본군과 관군을 공격한 대전투였다.

 

(7) 공주 우금치 전투

전봉준은 경천점으로 철수하여 주둔하였다가 공주를 공격하여 결전을 감행할 준비를 하였다. 일본군과 관군도 전투준비를 강화하였다. 동학농민군은 판치공격과 이인공격에서 원승을 거두고 일본군과 관군이 공주성에 들어가 서로 대치하다 다음날 제 2차 대공격을 감행하였다. 동학농민군은 효포로부터 웅치와 우금치에 이르러 대공격을 감행했는데 주공격 지점은 공주여에 바로 들어가는 길목인 우금치였다. 동학농민군은 교묘하게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우금치 정상에서 산허리를 진격하였으나 일본군과의 무기의 격차를 극복할 수 없었다. 전봉준부대의 동학농민군의 퇴각을 명령하여 이인 방면으로 철수하였고 관군은 이들을 추격하였고 일본군은 이인 부근 일대의 산허리를 불을 지르고 공주로 철수하였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화약과 탄환이 고갈된 상태로 오실 뒷산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일본군과 관군이 공주에서 나와 동학농민군을 본격적으로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8) 청주 전투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한 날로부터 4일 후 김개남의 동학농민군도 청주성을 공격했다가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전하였다. 김개남은 전주에 주둔하고 있다가 경천점에 주둔한 전봉준으로부터 북상하여 합류하자는 통문을 받고 전주를 출발하여 금산을 점령하고 다시 북상하였으나 경천점으로 가지 않고 전봉준의 제 2차 공주 공격을 지켜보다가 청주로 향했다. 일본군 1개소대는 청주성 안에서 방어함이 불리할 것이라 생각하고 청주 남문에서 잠복하였다가 동학농민군을 내려다 보는 유리한 지형으로 일제사격을 가하였다. 김개남부대는 패전하여 신탄진 방향으로 퇴각하였고 일본군과 관군을 이를 추격하였다. 김개남부대는 청주전투에서의 패전 후 더 북상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十三.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의 후퇴와 해체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한 후 노성에 주둔하고 있다가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고 11월 14일 전면적인 후퇴를 하게 되었다. 김개남부대도 청주전투에서 패전한 후 일본군과 관군에게 추격당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전봉준부대는 논산 남쪽의 소토산 고지에서 대오를 경비하여 반격을 시도 하다 다시 후퇴하여 논산 서남쪽에 황화대에 주둔하여 전투를 준비하다 다시 강경으로 후퇴하고 강경에서 김개남부대를 만났다가 각각 별도로 후퇴하였다. 전봉준부대는 전주로 후퇴하고 금구의 원평으로 철수하였고 여기에서 접주들과 함께 동학 농민군들을 초모하여 병력을 보충해서 약 6천명의 동학농민군부대를 편성하여 혈전을 감행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막강한 화력으로 탄환이 고갈되어 태인으로 후퇴하였으나 성황산에서 패전하였다. 1894년 음력 11월 27일의 태인 성황산전투가 전봉준부대의 마지막 전투였다. 전봉준은 태인 성황산으로부터 철수하여 다시 금구에 주둔해서 전봉준부대의 동학농민군을 해산하기로 결심하였다. 해산한 날 정읍에서 후일의 재기를 의론하기 위해 김개남등 동학군 지도자들과 상회하려 하다가 배신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그후 서울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밖에 손병희, 최시형, 손화중, 최경선 등도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잠적하였다. 일본군부대는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무차별 학살하였고 최후까지 완강하게 항진하는 남해안의 동학농민군들도 1894년 음력 12월 말경에는 거의 잠잠해졌다. 갑오농민전쟁의 제 2차 농민전쟁에서 동학농민군이 최후의 항전을 전개한 것을 1895년 음력 1월 24일의 대둔산전투에서이다. 대둔산은 전라북도와 충정남도에 걸친 산으로써 천연의 요새가 될 수 있는 큰산이었는데 불의에 배후에서 돌격해 들어오는 일본군의 기습으로 패전하게되었다.

 

 

十四. 제 2차 농민전쟁 패전의 원인

 

갑오농민전쟁의 제 2차 농민전쟁이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본 정규군의 계속적 증파와 그들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 공격이다. 일본군의 전투력과 근대적 화력은 민병인 동학농민군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둘째로 동학농민군의 무기의 열악성과 탄환의 결핍 및 농민군의 훈련의 부족이다. 빈약한 무기로써 연이은 전투에서 탄약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못한 것은 동학농민군의 전투력을 상실케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농민들을 모은 민병이었기 때문에 군사훈련이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어서 훈련을 잘 받은 정규군과는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 셋째로 동학농민군의 분산성과 불충분한 조직성이다. 동학농미군은 정규군처럼 하나의 통일된 지휘체계 밑에서 작전과 전투를 하지 못하고 각각 자기 지방과 부대별로 분산되어 고립적으로 작전과 전투를 감행하였다. 동학농민군 부대들 사이는 정규군처럼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통일된 능률적 협조가 아니라 타협과 협의에 시간이 소요되고 완만하게 움직이는 비능률적 협조가 아니라 타협과 협의에 시간이 소요되고 완만하게 움직이는 비능률적 협조였다. 넷째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군사적 전략.전술의 부족이다. 다섯째로 당시 갑오경장을 추진한 개화파정부의 관군이 일본군의 지휘와 자문을 받으며 그들과 협조하여 동학농민군 토벌에 가담한 것이다. 여섯째로 양반유생들이 민보군 등 각종의 이름으로 반혁명군을 조직하여 각 지방에서 동학농민군을 고립시키고 기습하였기 때문이다. 전투력이 강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十五. 제 2차 농민전쟁의 사회적 역사적 성격

 

갑오농민전쟁중의 제 2차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은 다음과 같다.

일본침략군을 자기 조국 땅 위에서 몰아내어 조국의 자주독립을 굳게 지키려고 한 반제국주의.반침략의 항일 민족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은 반제.반침략의 항일 민족항쟁을 하면서 반봉건 투쟁을 다음의 과제로 추구하였다. 봉건적 폐정을 모두 개혁하고 전제와 산림제도 개혁하려는 근본적인 사회적.경제적 개혁을 포함하고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정치제도의 개혁도 단행하되 인재로 구성된 협의기관을 만들어서 합의정치를 실행하게 하는 개혁을 추구하였다. 즉 제 2차 농민전쟁의 성격은 반제.반침략 민족전쟁과 반봉건적 농민혁명운동이 통합된 것이었으나 반제국주의.반침략의 항일 민족전쟁을 선행시킨 동학농민들의 투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제 1차 농민전쟁과 대조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十六. 제 2차 농민전쟁의 사회적 역사적 의의

 

갑오농민전쟁의 제 2차 농민전쟁은 몇가지 원인들의 복합으로 일단 실패했지만 완전 실패는 아니었고 한국근대사와 한국민족운동사에 커다란 사회적 역사적 의의를 가진 운동이었다.

첫째로, 제 2차 농민전쟁은 일본 군국주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한국침략에 대한 한국 농민들의 반제국주의.반침략 항일 무장투쟁이었다.

둘째로, 제 2차 농민전쟁은 나라의 자주근대화를 완강하게 저지해 오던 조선왕조의 구체제를 근본적으로 붕괴시겼다.

셋째로, 제 2차 농민전쟁은 각계 각층 국민들의 민족적.정치적.사회적.의식적 각성을 크게 고취하고 촉진시켰다.

넷째로, 제 2차 농민전쟁은 우리나라의 자주근대화 운동과 사회발전의 아래로부터의 커다란 추동력을 공급하였다.

다섯째로, 제 2차 농민전쟁은 반일역량을 크게 재고시키고 그후 반일 의명운동의 튼튼한 토대화 원동력을 형성하여 공급하였다.

갑오농민전쟁의 제 2차 농민전쟁은 동학농민군이 전투에서는 비록 패전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니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한국사회의 역사에서 수천년 묵어온 낡은 전근대적 구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 작용을 하여 근대사회에의 길과 근대적 사회발전에의 길을 넓게 열어주었으며, 또한 반일역량.반제국주의역량을 크게 제고시켜 후일의 항일무장투쟁의 선구가 되었다.

 

 

十七. 분석의 틀 : 한국 민족주의를 보는 시각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것은 연구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민족주의의 연구가 이토록 어려운 것은 그 의의가 학자나 국가에 따라서 다의적으로 사용되며 민족이나 구가의 역사적 . 인성적 . 사회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그 대상에 있어서 중요한 추진력 내지는 구성 인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외면한다는 것은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의 부분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게 되며 이러한 이유로 한국사의 근대사는 민족의 자존을 둘러싼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갈등, 내재적 갈등의 연속으로 되어있다. 갑오혁명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 갑오혁명의 한 변수로서의 동학사상이나 또는 갑오혁명 그 자체가 민족주의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고귀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이글은 갑오혁명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되 주로 민족주의라는 시각을 통하여 그것이 후대에 남긴 유산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을 두며 이 논문이 민족주의 의 정의를 분석함에 있어서 준거의 요소는 첫째 애국심, 둘째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적 지지 기반의 심도, 셋째 근대화의 성취도 등 세가지이다.

첫째로 애국심이란 용어에는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국가 또는 민족에 대한 충성심은 물론이고 향토적인 애착과 동학사상을 삼원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로 여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적 지지 기반의 심도는 역사에서 그 시대를 지배하는 계층과 관련하는데 여론이 최고 가치로 바다아들여지고 있는 현대에서는 민중이 그 사회의 주인이 되고 현대를 민중의 시대라고 볼 때 민족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체계화되기 위해서는 주도 계급이 전체 민족의 성원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한다.. 여기에서 전체 민족의 구성원이라 함은 그 전체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대중 또는 민중이라고 해석하며 오늘날의 민족주의를 근대적인 소산이라고 규정짓는 가장 뚜렷한 이유도 대중의 존재와 중요성을 전제로 정립된 규범 체계라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따라서 한국 민족주의의 체질도 대중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민족 의식의 대두는 새로운 중산 계급, 즉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대중이 형성되어 있는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셋째로 민족주의가 가지는 의미로서의 근대화의 성취도로 근대화에 대한 루시안.파이(Lucian W. Pye)의 정의는 갑오혁명이라고 하는 조선조 후기의 정치 장황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근대 또는 근대화의 개념은 정치적 근대화라는 제한적인 의미로 여기에서 말하는 근대화는 현대적 의미로서의 정치 발전이라든가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의지 또는 그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민족주의의 발생과 성숙은 매몰된 개인의 해방 및 자기 발견과 그 궤적을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는 불가피하고도 고유한 관련성이 있는데 내정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민족의 자립이 불가능했던 1860-1910년대의 한국적 장황은 민족주의의 존재 의의로서의 정치적 근대화의 성취도에 대한 거론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

위의 애국심, 역사적 주체로서의 민중적 지지 기반의 심도, 그리고 근대화 주체로서의 민중적 지지 기반의 심도,그리고 근대화의 성취도에서 이 세가지 중 애국심을 필수로 하여 나머지 중의 하나만이라고 구비하고 있으면 일단 민족주의의 계보에 포함된다.

 

 

十八. 민족 운동의 기원으로서의 의미

 

우리는 우리의 민족주의의 시원을 단군개국이나 을지문덕 또는 연개소문에서도 찾을 수 있으나 이는 해석을 떠나서 보더라도 고려사에 나타나고 있는 묘청의 칭제 . 건원과 북방천도론 그리고 삼별초나 김윤후의 투쟁과 같이 대몽항쟁기에 나타나 일련의 움직임도 한국 민족 운동의 전사로서 충분하다. 조선시대에 국한하여 보면 동학의 창도 이전에 있었던 민족 운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있었던 민족 투쟁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이때의 항쟁의 주역인 민중은 주권 의식과 같은 대중적 자각 의식이 없었고 다만 생계를 유린당하는 데에 대한 반감에서 항쟁하였으므로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민족주의로 완숙된 것이라고 단언하기에는 부조하다. 그렇다면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의 민족운동의 시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있는가? 첫째 실학이 민족 의식의 기원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학의 가치는 민중의 고뇌를 함께 걱정해 줄 수 있고 또 사회적 추진력으로서의 민중의 가치를 인식하였다는데 있다. 그러나 실학은 당시로서는 일부 지식인의 이해에 그쳤을 뿐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둘째로, 척사위정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화이관을 바탕으로 한 주자학의 한국적 소생물로 민족 보전이란 지표에 치중한 나머지 근대지향이라는 지표에는 냉담하였다. 셋째로 개화사상을 고려해 볼 수도 있는데 우리는 개화파들이 사용했던 방법의 치 . 수를 떠나서 그들의 애국사상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민족 보전이라는 지표에는 등한히 했으며 특히 전기 개화파의 경우에는 외세 의존에 치우쳐 민중의 지탄을 받았다.. 네번째로 동학사상과 갑오혁명을 생각할 수 있다. 갑오혁명은 민족 보존과 근대화를 지향한 최초의 조직적인 대중 운동일 뿐만 아니라 화이관과 같은 비자주적인 사상에 오염되지 않은 행동화된 민족 운동이었다.

 한국의 민족중의에 있어서 갑오혁명을 그 기원으로 보는 논거는 어디에 있는가? 첫째로 역대의 어느 민족주의적 운동보다도 민족주의로서의 제반 요소를 커다란 결함없이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두번째로 후대의 민족 운동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 주었고 그 전사와 후대를 잇는 고리의 역할을 했다. 즉 후대의 민족 운동을 자극하였고 또 사상적으로도 그 뒷받침을 해주었다. 동학 사상이 전승되어 민족 운동으로 승화된 가장 고귀한 예로 3.1운동을 들 수 있다.

갑오혁명은 민족주의적 전개 과정 중에 그 궁극적인 목적을 성공하였다고 볼 수 없고 다만 한국 민족운동의 초기 과정에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그 기초를 닦는 데에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민족주의의 전개 과정을 3단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1단계: 봉건적 분권제를 타파하고 민족 통일을 강화하여 내정을 개혁한다. 2단계: 계급혁명사상과 결탁하게 되는데 계급을 형성하고 그 목표가 경제적 착취에 있음을 간취한다. 3단계: 해방민족주의를 주창하여 민족 통일을 완수, 자주 독립 국가로 발전한다. 갑오혁명은 2단계에까지밖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十九. 민중적 지지 기반의 심도

 

갑오혁명에 있어서 민중적 지지 기반의 심도라 함은 혁명 이념의 보편화와 혁명에 대한 참여 의지의 열도를 의미하다. 갑오혁명은 종교투쟁이 아니라 종교적 성격을 부분적으로 안고 인고 있는 확대된 민란이며 그렇기 때문에 갑오혁명의 주역으로 민중론은 종교 투쟁의 차원이 아니라 민란 또는 근대적 개념으로 시민혁명의 차원에서 설명되어야한다.

갑오혁명에 참여한 민중을 논의함에 있어서는 그 민중이 내재적으로 안고 있는 성격과 결함, 그리고 그들이 외재적으로 안고 있는 성격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 내재적인 면에서 그들의 시민적 자질과 구성 성격으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의 시민적 자질이라 함은 혁명군으로서 담임 능력을 의미하며 그들이 이념적으로 무장되지 못하여 혁명의 말기 과정에서 보여준 타락상을 지적할 수 있으며 혁명전개 과정에 있어서의 만연된 행위는 혁명 자체로서도 불행한 일이되고 교세나 교리에 대한 민중적 이해에도 불행한 결과를 남기게 된다.  둘째 민중적 차원에서 볼 때 나타나는 또 다른 불행은 그들이 종교적 편견이라고 하는 역기능으로 인하여 남 . 북접의 분열이다. 이것은 정확히는 내적인 문제는 아니다. 이문제는 동학 종단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북군과 민란 성격의 남군 사이에 벌어진 종교적 배격심과 주도권 다툼에서 였다. 이러한 지도층의 분열은 갑오혁명 실패로 이끈 커다란 원인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외재적으로 여타의 계층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지지도나 호응도의 문제인데 이 점에 있어서는 단적으로 말해 범국민적인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유생들과의 갈등이었다.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는 유생들로부터 지지를 얻는 것이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는 일차적 조건이었다. 갑오혁명의 한 추진력으로서의 동학사상이 당초 유생들의 눈에는 邪學으로 비쳤고 갑오혁명의 민란적 요소가 상층 구조에 대한 신분적 도전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유생들과의 제휴에 실패한 것이다. 또한 하나의 봉기가 혁명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요소는 혁명군의 사회적 기동성인데 이문제를 대행해 줄 수 있는 신분이 보부상이 있는데 이들은 그들의 성격이 관.민관계에 있어서 관(官)쪽에 편향할 수 밖에 없었다. 동학군은 지식이나 전략의 면에 있어서도 유대를 맺는데 실패하였다.

 

 

二十. 근대화에의 기여도

 

조선조 후는 내재적인 모순과 지정학적인 궁벽성으로 인하여 근대화에 대해 매우 어두운 실정이었다. 개화사라고 하는 시각에 비추어 조선조 후기를 살펴본다면 개화를 위한 몇가지의 인자가 작용하는데 하나의 사상 체계를 이룩한 실학, 지리적으로 淸朝의 자강운동을 둘러싼 개명문화,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을 계기로 서구 문물의 도입, 일본의 명치유신의 영향, 그리고 마지막으로 류대치-이동원-김옥균으로 이어지는 불교사상 등이 이에 속한다. 지적한 요인들이 외래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개화는 타율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는 우리의 사회가 통과하여 온 문화적인 변천은 어디까지나 우리 사회가 독자적으로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격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중요시한다면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의 외래적 성격이 근대화의 의미마저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갑오혁명이 근대화에 기여한 바를 정치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정치사상적인 측면에서 갑오혁명이 실패하였다고는 하지만 완고수구하던 위정자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권위주의적인 정치 의식에서 반성하고 자각하게 한 데에 갑오혁명의 정치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특히 계급을 타파하려던 의식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구조란 지리적인 구조와 계층적인 구조와 제도적인 구조의 셋으로 나뉘어지는데 사회의 근대화란 지역 사회를 근대화하는 것으로 갑오혁명은 사회의 계급 차별 제도를 타파하려고 시도 하였으며 조세와 토지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재산적 의미와 민란의 요구의 신분적 해방을 가미하는 것은 종교인데 갑오혁명의 경우에 있어서는 동학사상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감당했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갑오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천도교라는 공식 종료집단으로 긍정적으로 발전한 천도교의 활약에서 찾을 수가 있다. 천도교에서는 여성의 교육에 힘을 쓰는 한편 일반 교육에 이바지하였고 인쇄소를 경영함으로써 출판 활동을 통하여 천도교 자체의 교세를 확장하였고 대중을 위한 문화 사업에도 이바지하였다. 위의 세가지 측면에 있어서의 근대화를 위한 기여도가 하나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 곧 갑오경장이었다.

갑오혁명이 한국 근대화에 끼친 역기능을 알아 보면, 서구 문물에 대한 수용 과정에서 보인 그들의 배타적 태도는 한국 근대화의 지연을 가져왔고 그 예로서 그들은 패정개혁14개종 중에서 전보 등의 통신제도가 극히 패가 많으므로 이를 철파해야 함을 극구 주장하였으며 김옥균 등의 개화 운동을 망국 행위로 비판한 점에서 알 수 있다. 위의 두 가지 사실을 볼 때 개화에의 역행은 부인할 수가 없는데 선구적인 지식인들이 이에 참여하지 않은 데에서 온 비극이며, 여기에 한국 근대화에 대한 갑오혁명의 기여도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갑오혁명의 개화사적의미를 거론함에 있어 동학운동과 갑오혁명이라고 하는 일련의 근대화 운동에 있어서 동학사상은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근대화 그 자체에 있어서 갑오혁명은 순기능과 역기능이라고 하는 양면성이 있으며 이는 종교 그 자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근대화란 종교의 세속화를 요구하며 그러한 과정에서 종교의 순수성은 감소되고 그 자체로서 그 본질에 손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며 종교적 가치나 전망은 이미 계획된 사회변화의 대상이나 목표를 조망해 주고 그 것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기 때문이다.

 

 

二十一. 맺은말

 

글을 마침에 있어 강조하고자하는 세가지점이있다.

첫째로, 우리는 한국의 사상사를 봄에 있어서 서구적인 시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동학사상과 갑오혁명이 가지는 가치는 종래 서구적 사유 방식에 따라서 비하와 냉대만을 받아온 한국의 전통 사상과 토속 신앙이 의식화하여 민족사적 차원으로 승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동학과 같은 토속 신앙이 민족 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종래의 관념을 전면적으로 반영하는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동학 사상과 갑오혁명의 발생 . 정착 . 소멸의 과정을 정대위의 분석모델로 이해하면 유익할 것이다. 그의 분석의 모델로서 첫째는 교모, 둘째로는 반죽, 셋째로는 기온을 지적하였는데 이에 동학사상과 갑오혁명을 분석한다면 홀씨와 텃밭이 있었고 견디기 어려운 시대 상황이 있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패전의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동학과 갑오혁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오랜 봉건적 사회속에서 개벽을 주장했고 보국안민을 위한 투쟁에 있다. 갑오혁명과 같은 값진 사상과 운동이 다시는 외세에 의하여 또는 봉건적 반동 세력에 의하여 궤멸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 동학의 연구를 강조한다.

 

 

 

● 참고문헌

鄭鎭珏, 1978, <<동학농민전쟁의 성격>>, 한양대 석사학위논문

박주현, 1970, <<동학혁명의 민족주의적 의의에 관한 고찰>>, 경희대석사학위논문

한우근, 1984, <<동학혁명의 성격>>, 경희대 석사학위논문

한우근, 1983, <<동학과 농민봉기>>, 일조각

신용하, 1985, <갑오농민전쟁시기의 농민집강소의 활동>, <<한국문화>>6,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신용하, 1993, <갑오농민전쟁의 제 2차 농민전쟁>, <<한국문화>>14, 서울대 한국문화연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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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일 04.03.14. 00:50
아 이게 발표하기 더 편한데요..?
 
 
김덕원 04.03.18. 00:32
이런.. 논문을 중간에 목차를 보시면 六. 제1차 동학농민운동이라고 되어있어야 되는데 보면 六이 아니라 肉자가 쓰여져 있다는.. 만약 우리학교에서면 이 논문 어떻게 되었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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