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반전에 교통사고로 지금도 병상에서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하는 둘째처남의 맏아들을 위한 백일기도
회향하는 날이라고 태워다 달라고 아내가 말하기에
둘째올케와 시누이를 태우고 20일 밤10시에 홍련암으로 출발하였다.
목을 다쳐 의식은 말짱한데 머리 이하는 움직일수 없는 상태로
삼년여를 지났건만 겨우 목만 움직일 정도로 회복이 안되니
부모 심정이야 오죽 하겠는가? 실오라기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일 것이리라. 올케가 어디서 들었는지 홍련암이
기도발이 잘 듣는다고 아가씨 같이 가자고 하여
삼개월 전에 함께 가서 올린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이 되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걱정 되어 고속도로를 택하여 가기로 했다.
영동고속도로 소사 구간을 지날때부터 눈이 쌓인 것이
보였고 둔내터널을 지날때는 길 옆에 방치된 사고차량이 보였다.
그러나 노면은 군데군데 얼음이 보였으나 양호한 상태였고
장평을 지나면서 눈이 적은 것 같더니 진부터널을
빠지면서 눈은 약간 흩날린 자국만 보이고 우려했던
대관령 구간도 아무 문제 없고 영동엔 날씨가 개어 열엿세 달빛이
한낮 같이 밝았다. 현남 분기점에서 국도를 타고 한걸음에
낙산사 후문 주차장에 도착하여 공양물을 챙겨들고 대낮같은
달밤에 파도소리 들으며 홍련암에 도착하니 이미 새벽예불
준비가 시작되어 있었다. 나는 이때부터 대자유인이 되었다.
처사님들 숙소에서 쉬라고 하는 것을 마다하고 달빛 교교히 흐르는
의상대에서 바위에 부딛치는 파도를 보며 저멀리 수평선 위에
보이는 고기잡이 배의 집어등 불빛과 조화를 이룬 달빛에
오랫만에 한껏 낭만에 젖어 싸늘한 밤바람의 한기도 잊었다.
잠시 추위를 피하고자 차에서 쉬고 있는데 예불을 마친
아내에게서 아침공양 하러 오란다. 공양을 마치고
잔뜩 기대하고 있던 일출을 보기위해 의상대사의 좌선처로
알려져 있는 의상대를 다시 찾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해는 떠오르지 않고 구름위로 붉은 기운만 몇줄기 보일뿐
기다리던 했님은 어디로 숨었는지 영~ 보이지 않는다.
실망에 찬 아내와 처남댁은 다시 홍련암으로 내려가고
다른 관광객들과 기다렸드니 점점 오색구름으로 뒤덮이고
이윽고 용광로에서 쏟아내는 불덩어리 하나가
불쑥 솟아오르는 것이었읍니다. 날씨는 좋았지만 해무로
기대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볼때마다 새롭습니다.
조카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빌며 108배를 올리고 숙소에서
잠을 청했지만 어느듯 아홉시 삼십분 사시예불 시간이 되어
나 혼자 낙산사 경내를 돌아보기로 했읍니다.
새로 지어진 보타암 해수관음상을 거쳐 오솔길을 따라
낙산사 본전 원통보전을 둘러보고 정문 홍예문까지 갔다가
다시 보타암을 경유 홍련암으로 돌아왔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의상대사가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는 관음굴 위에 세워진 암자가 홍련암이다.
지금도 마루바닥에 구멍을 뚫어 놓고 관광객에게 관음굴을
보여주고 있다. 낭떨어지 아래로 싯퍼런 바닷물이 들락거린다.
우리나라 제일의 관음도량 답게 낙산사 본전에도 협시보살 없이
관음보살상만 모셨고 온통 관음보살뿐이다.
원효와의 일화도 한토막 전해지고 있다.
원효가 낙산사를 찾아 들었는데 논에서 벼이삭을 뽑고 있는
아낙이 있어 하나 달라고 하니 익지 않은 것이라 하고
좀더 오더니 속옷빨래를 하고 있는 여인이 있기에 물 좀 달라고
하였더니 바가지에 빨래 하던 물을 주기에 더러워 버렸다.
그러자 머리 위로 파랑새 한마리가 날아가며 그대는
가지마세요 라고 하여 뒤돌아 보니 여인은 간곳이 없고
여인이 신고 있던 짚신 한짝만 남아 있었다.그리고
관음전 관음상 앞에 가서 보니 짚신 한짝이 또 있었다.
그제서야 원효는 그 여인이 관음의 진신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의상과 얽힌 일화가 많고 의상이 창건 하였다는 낙산사
출입문인 홍예문은 세조때 세워졌는데 그때 강원도는
26개 고을로 되어 있었고 각 고을에서 하나씩 보내준
돌 26개로 쌓아 올린 아취형 문이다.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암키와와 흙으로 쌓은 담장이 아름다운 절이며
관동팔경중에서 일출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의상대사 기념관을 둘러보고
아무것도 할수 없는 조카에게 기적이 일어나기 바라며 상경하였다.
(2002.11.22.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