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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새부산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편집국 박혜숙
2015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15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벽과 담의 차이/봉윤숙
우리의 이야기는 지붕 속에서 산다
지붕을 가지고 있는 벽과 지붕이 없는 담 안엔
사슴벌레 달팽이 사금파리 장지뱀 등 여러 종류가 산다
벽은 못, 시렁 아버지의 맥고모자
달력의 날짜로 불리기도 한다
드나들거나 넘을 수 있는 높이의 담은
그림자와 낙서의 한 영역이다
벽은 문 없는 간극과 문의 사고가 가끔 어긋나기도 하지만
옷들은 그 사이에서 잘 기대어 무늬를 새긴다
담을 넘어간 소리는 키 큰 소문이 되고
담 밖에 있던 사람이 훗날
벽의 못에 걸리기도 한다
담은 올록볼록한 퍼즐 같다 퍼즐을 맞추려 틈새의 흐름을 허용한다 그 사이로 번식하고 바람이 드나들며 물길도 흐른다 구멍이 없어 마음, 다만 낙서로 대신하는 일들이 있고 수직의 소문들이 넓다
커다란 순록을 보면 따뜻한 벽이 생각난다
그들은 스스로 진화된 지붕을 가지고 있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뿔로 계절은 완성되고 빨강은 절판된다
숲은 담이다
나무들은 지붕이 없으므로 흔들린다
이야기가 없을 때는
흔들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봉윤숙 경기 부천 출생, 숭의여대 문창과 졸업, 중앙대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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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물수리 그림자, 지나간다/김진백
나를 흠뻑 적시고 흘러간 붉은 저 강물 폐륜(廢倫)이라 해도
나는 연어의 힘센 자식 아니기에 돌이킬 수 없다
목마른 내 우물 모래바닥에 거친 예감 물살 치는 날
청춘이 할퀴어 쓰린 상처 위로 물수리 그림자 휙 지나간다
하늬바람 시작되는 곳, 너는 눈먼 꽃으로 돌아온다
얼음 부딪히는 북해에서 내 이물까지 오만 리 길
그곳에서 다시 고물까지 십만 팔천 리 길
너는 함포처럼 요란하게 쏟아진다, 날아와 펑펑펑 터진다
강물은 이른 새벽부터 몸 비틀어 나를 껴 앉는데
너를 따라온 달이 눈동자에 월식으로 지워진다
내 가난한 땅에 새겨진 풍성한 강물의 위로는
돌아오고 떠나는 사이 제 몸 넉넉히 내어주는 일뿐
험한 물길 찾아오다 세찬 숨결 아찔한 순간, 그 순간
너는 가끔 튀어 오르며 돌아온다 가슴 부푼 비린 꽃으로.
▲김진백 1993년 마산 출생, 경남대 가정교육과 군휴학(창원중부 방범순찰대 본부소대 상경), 청년작가아카데미 2기 수료, 2013년 경남 고성 디카시 공모전 우수상, 2014년 제28회 10·18문학상 시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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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걸어가는 나무/정지윤
그들의 발소리는 너무 조용하여
먼 훗날 겨우 발견될 뿐,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태양을 찾아가는 나무의 뿌리는
아마존의 고대 지도를 기억한다
끝과 시작이 맞닿은 유랑
기억을 더듬는 긴 촉수의 뿌리들은
수십 개월 느리게 이동한다
걷는 나무에게 숲은 한낮 궤도일 뿐
달과 달 사이로 시간이 흐른 뒤
숲은 파헤쳐졌다
나무들은 뿌리 앞에서 뒤틀림을 멈춘다
태양을 훔치는 뿌리들은
제 뿌리를 등 뒤에 남기며 다시 앞을 향해 걷는다
숲을 향해 숲이 되기 위해 걷는 일
아마존을 느린 걸음으로 가는 아마존의 나무들
언젠가 숲이 초원에 이르는 날
절룩거리며 걸어 나와
제 그림자와 뒤꿈치에 박힌 상처들을 전할 것이다
나는 잠시 멈춰선 채
먼지 같은 시간을 바라다본다
고통은 크기만큼 가벼워지는 것이어서 깔깔거리며
저마다 제 이름을 깊은 곳으로 불러들인다
아르볼 께 까미나(arbol que camina)
▲정지윤 1964년 경기도 용인 출생, 제1회 민중문학상 신인상 시 부문 수상, 제22회 전태일문학상 시 부문 수상, 제6회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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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자이크/이인서
쨍하는 소리와 함께 앞집 유리창이 깨졌다 얼음판을 돌로 친 것처럼 어느 일성이 내놓은 모자이크, 여전히 붙어있는 파편들은 찡그린 얼굴 같다
작은 구멍이 난 곳을 정점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간 사나운 선들, 그 앞을 누군가 서성거리고 창밖의 나무 한 그루가 모자이크 처리된 채 서 있다
살얼음이 낀 12월의 안쪽은 왠지 범죄 냄새가 난다 조각 난 얼굴 위로 가끔 변검을 한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모자이크 속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깨어진 균열의 힘으로 버티고 서 있는 집, 깊숙한 구석까지는 채 다다르지 못한 금
깨진 햇빛 조각 하나가 섞여 있는 창문
문을 꽝, 닫으며 뛰쳐나가는 여자 뒤로 은행나무 마른 가지들이 뿌연 하늘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있다
▲이인서 안양시 만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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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복숭아/임주아
당신이 내 처음이야 말하던 젊은 아빠 입가엔 수염이 복숭아솜털처럼 엷게 돋아나 있었겠지 엄마는 겁도 없이 복숭아를 앙 물었겠지 언제부터 뱃속에 단물이 똑똑 차오르고 있었는지 모르지 이상하다 이상하다 당신이 매일 쓰다듬은 곡선이 나였는지
그해 여름 홍수 난 집 마당에 떨어진 복숭아 두 알 막 태어난 아기 얼굴 같은, 산모가 위험하니 그냥 낳으세요, 그냥 나온 나는 태어나 백도복숭아처럼 물컹한 젖을 물고 눈을 끔뻑거렸겠지 눕혀두면 하루종일 잠만 자니 얼마나 좋은지 엄마는 말했지
깨어나면 조금은 소란스러운 십 층집 어느 날 무선전화기가 날아다니는 종종 창문 밖으로 식탁 의자가 떨어지는 떨어진 의자가 일층 정원을 박살내는 동네방네 돌아다닌 소문이 햇볕을 꺾는 대낮 바람결에 모빌은 돌아가지 아이 좋아, 동해안 한 바퀴 시원하게 돌고 온 아빠 곰 같은 등 뒤에 서너 해 살다간 여자 풋복숭아 자국 돋아나는 눈두덩이 엄마 어디 가
짓이겨진 과육을 뚝뚝 흘리면서 나는 천천히 무릎을 쓰다듬지 뭉게뭉게 피어나는 욕탕에서 오랜만에 만난 당신의 살을 만지지 복숭아껍질 따가운 살갗, 엉덩이가 반으로 쪼개지는 기분이야 붉은 속살,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온탕과 냉탕 사이에서 애인과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놀지 더 이상 처음이 아닌 우리에게 또 한 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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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선수들/김관용
전성기를 지난 저녁이 엘피판처럼 튄다
도착해보면 인저리타임
목공소를 지나 동사무소, 골목은 늘 복사된다
어둑해지는 판화 속에서 옆집이라는 이름을 골라낸다
옆집하고 발음하면 창문을 연기하는 배우 같다
보험하는 옛애인이 전화한 날의 저녁은
폭설과 허공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외하는 친구의 문자를 받은 날 아침은
접시 위의 두부처럼 무심해진다
만약이라는 말에 집중한다
만약은 수비수 두세 명은 쉽게 제쳤으며
늘 성적증명서보다 힘이 셌다
얇은 사전을 골라 가장 극적인 단어를 찾는다
아름다운 지진이란
지구의 맨 끝으로 달려가 구두를 잃어버리는 것
멀리 있는 산이 침을 삼킨다
하늘에선 땅을 잃은 문장들이 장작 대신 타고
원을 그리며 날던 새들의 깃털이 영하로 떨어진다
원점은 어딘가 빙점과 닮았다
양철 테두리를 한 깡통처럼
전력을 다해 서 있는 트랙처럼
잠시라도 폼을 잃어선 안 된다
전광판이 꺼지더라도
경기가 끝나면 유니폼을 바꿔 입어야 한다
▲ 김관용 1970년 서울 출생, 1997년 2월 울산대 철학과 졸업, 2014년 8월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현재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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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령 또는 우리의 王/김분홍
이것은 두 짝, 권력에 관한 보고서이다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는 당신은 스킨십을 좋아해
자르려는 자와 붙어 있으려는 자의 대립으로 각을 세우고
같은 말을 쫑알대는 손가락에 권력이 붙는다
살을 섞으며, 당신을 사랑했다
뼈를 추리며, 당신을 증오했다
같은 동작을 세뇌시키는 당신은
뼈대만 남은 마지막 자존심
당신의 부름에 암묵적으로 동조한다
12월의 볼륨까지는 고백이 필요하다
온몸을 좌우로, 상하로 굴곡 있는 성격을 만든다
당신의 몸에서 땀방울이 떠나고 있다
권력의 잔고가 쌓인다
가슴에 왕을 만들 때까지 밥그릇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아령을 찌그러뜨리며 근로자들이 첨탑 농성을 하고 있다
아령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
사랑하는 우리의 왕
당신의 권력에 군살 한 근 붙지 않는다
▲김분홍(본명 김미자) 1963년 충남 천안 출생.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2015 남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레몬/김완수
레몬은 나무 위에서 해탈한 부처야
그러잖고서야 혼자 세상 쓴맛 다 삼켜 내다가
정신 못 차리는 세상에 맛 좀 봐라 하고
복장(腹臟)을 상큼한 신트림으로 불쑥 터뜨릴 리 없지
어쩌면 레몬은 말야
대승(大乘)의 목탁을 두드리며 히말라야를 넘던 고승이
중생의 편식을 제도(濟度)하다가
단것 단것 하는 투정에 질려
세상으로 향한 목탁의 문고리는 감추고
노란 고치 속에 안거한 건지 몰라
들어 봐,
레몬 향기가 득도의 목탁 소리 같잖아
레몬은 반골을 꿈꿔 온 게 분명해
너도 나도 단맛에 절여지는 세상인데
저만 혼자 시어 보겠다고
삐딱하게 들어앉아 좌선할 리 없지
가만 보면 레몬은 말야
황달 든 부처가 톡 쏘는 것 같아도
내가 단것을 상큼하다고 우길 땐
바로 문 열고 나와 눈 질끈 감기는 감화를 주거든
파계처럼 단맛과 몸 섞은 레몬수를 보더라도
그 둔갑을 변절이라 부르면 안돼
레몬의 마음은 말야
저를 쥐어짜면서 단맛을 교화하는 것이거든
레몬은 독하게 적멸하는 부처야
푸르데데한 색에서 단맛을 쫙 빼면
모두 레몬이 될 수 있어
구연산도 제 가슴에 맺힌 눈물의 사리(舍利)일지 몰라
레몬이 지금 내게 신맛의 포교를 해
내 거짓 눈물이 쏙 빠지도록
▲김완수 1970년 광주광역시 출생, 1998년 전북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 졸업, 2009년 제1회 '강원문학' 신인상 수필 부문 당선, 2013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2013년 암사동 유적 세계유산 등재 기원 문학 작품 공모전 동화 우수상, 2014년 계간 '시조시학' 여름호 신인 작품상, 2014년 제10회 5ㆍ18문학상 시 부문 당선, 2014년 제1회 농어촌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 2014년 제2회 평택 생태시 문학상 우수상, 현 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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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분홍잠/김겨리
고수레로 남겨 둔 홍시의 밀린 잠이 붉은 저녁이다
마당을 쓸던 노인이 허리를 굽히자 짧은 옷단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등골,
그 깊은 계곡까지 노을이 들었다
무너지는 한쪽 벽에 봉창 달빛을 빚어 얽는 거미가
바람이 들지 않도록 거미줄을 암팡지게 엮는다
명아주 이파리 스적거림으로 창문을 단 집
구절초 꽃대로 세운 배흘림기둥에선 풍경(風磬) 소리가 향긋하다
노인이 굽혔던 허리를 펴면 가을볕이 어리광처럼 달려든다
도돌이표만 있는 가을볕은 노인의 18번이다
음정은 새털구름이고 박자는 떨어지는 은행잎,
아무나 풍월로 읊어도 진양조 장단*
지붕엔 말표고무신 한 짝이 노을로 배꼽만 덮고 누워 있다
갈기털 다 빠진 목덜미에 솟대 그림자를 괴고 잠든 말굽은
아직도 따스한 발걸음을 기억하며
지붕에 올라가 누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긴 한숨을 쉬는 노인의 호흡이 가늘게 떨린다
허공에 써 놓은 점자로 되짚어 가는 길에도
과속방지턱이 있는지 바람도 잠시 주춤하는 법인데
어느새 성성해진 백발과 그믐달만 뜨는 눈썹
슬하에 노을 닮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달랑 둔 노인의 가계(家系)
입술에 허옇게 일어나는 각질을 옷소매로 쓱 훔치니
노을이 찍 묻어난다
노인의 등뒤로 달이 뜬다 어쩌면, 오늘밤
은행잎 한꺼번에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뜻
노을의 끄나풀이 길다
*진양조 장단:판소리에서 가장 느린 박자
?
▲김겨리(본명 학중) 1962년 경기 안성 출생, 홍익대학교 졸업, 현대로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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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쌈/조창규
나는 쌈을 즐깁니다
재료에 대한 나만의 식견도 있죠
동굴 속의 어둠은 눅눅한 김 같아서 등불에 살짝 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장으로 싸먹는 것들은 싱겁죠
강된장, 과카몰리* 등 다양한 <쌈장 개발의 기원>
봄철, 입맛이 풀릴 때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배춧잎을 새로운 쌈장에 찍어먹습니다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
어떤 배설물은 때로 훌륭한 식재료가 되죠
두꺼운 것들은 싸먹기 곤란합니다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에도 누명과 모함은 숨겨있죠
적에게 붙잡히면 품속의 기밀을 구겨 한입에 삼켜요
무덤까지 싸들고 가는 비밀도 있습니다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은 경계가 소홀합니다
누군가 달의 뒷장에 몰래 싸놓은 알들
나는 긴 혀로 나방을 돌돌 말아먹는 두꺼비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각사각, 저 달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
수줍은 달을 보쌈해간 개기월식
삼킬 수 없는 과욕은 역류되기도 하죠
보름달을 훔쳤다는 나의 누명이 시간의 부분식으로 벗겨지고 있습니다
* 아보카도를 으깬 것에 양파, 토마토, 고추 등을 섞어 만든 멕시코 식 쌈장
▲조창규 1980년 전남 여수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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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每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새벽낚시/박예신
물상들이 번져가는 어슬한 하늘 움켜쥔 새벽. 틈으로 푸른빛 스치더니 이내 어둠은
바다를 기억으로 길게 풀어놓는다. 꽤 괜찮은 미끼를 산 낚시꾼이라면 으레 찾는 그 곳.
긴 장대 쥔 어둑한 손들이 끊임없이 베어대는 채찍소리.
벌어진 암흑 사이로는 가늠키 어려운 뭔가가 일렁이는 듯.
침묵은 침묵을 질러대고 산전수전이 무언으로 공간에 쟁쟁한 순간.
뇌리에 깊이 묻어둔 별 몇 개는 음파에 부딪혀
검푸른 바다로 떨어지고 은빛으로 부서진다.
하얀 포말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은빛 조각들이
꾼들의 주린 눈동자 위에 가득 들어찰 때까지.
한 살배기의 미소가 언뜻 지평선에 걸쳐있다. 하지만,
아이가 휩쓸린 별과 아버지가 뿌려진 달은 슬프다.
혹은 애상을, 혹은 사라진 순간을 건진다고 하는
이른 새벽이 연주하는 푸른빛 안개.
감정이 씨줄과 날줄로 낚싯줄에 엉키거나
그물로 한 움큼 건져지는 민생의 곳.
내일도 이곳을 지배할 만감의 울림은
태양의 저쪽 편으로부터 타오르다가
서서히 붉게 사그라든다.
▲박예신 1990년 부산 출생, 대구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 재학, 매일신문 재난안전 수기공모전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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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신춘 무등문예 시 당선작
잉카 염전*/나루
바람이 누웠던 빈 둑마다
산이 뱉어놓은 통증이 하얗게 널려있다
내 어미가 바다가 아닌 산 이라니
소금은, 몰래 다듬어온 은빛 칼날로
자신을 가두었던 산의 자궁을 찌르고 싶었다
적막이 달빛처럼 침식해 들어와
점점 빙하를 닮아가고 있었다
산을 벗어나는 법을 모르기에
정해진 몫만큼 매일 하늘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새들이 물고 온 파도냄새가 두려울 때마다
몸을 낮춰 바람과 관계를 맺었다
소금을 잉태하던 순간부터, 산은
빗물을 붙잡아두기 위해
다랑이 밭에 둑을 만들었다
의붓자식 같은 저것들,
그 안에서 구름 족속들과 뒹굴면
바다 따위는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쓰라려도 품지 않을 수 없는
단단한 고요를 깨뜨리기 위해
저희들끼리 엉기며 서로 핥아주어야 했다
바다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짜디짠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바람이 누웠던 잉카의 골짜기마다
억겁의 생채기가 눈보다 눈부시다
*잉카문명이 남긴 유물로 해발 3천 미터 산 속에 계단밭으로 형성된 염전.
▲나루(본명 나미화) 전북 김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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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어머니의 계절/최영랑
빈집엔 봄이 오지 않고 여름도 오지 않고 빈집의 계절만이 서성거린다
빈집은 쉽게 들어갈 수 없고 대문 안에 들어서도 속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시끄럽고 어스름한 저녁 누구라도 거부하는 빈집만의 습관이 있다
?
그림자 없는 대문에서 빈집의 툇마루를 바라보면 그곳은 포근했던 무릎, 포근한 미소가 떠올라 헐렁한 하루가 부풀었다 사라진다 눈을 감고 나는 경직된 다리를 뻗는다
가끔 무릎을 내어주는 거기, 정류장처럼 너그럽다 잡초들이 슬그머니 들어와 영역 다툼에 휘말려도 장독대의 도깨비풀이 항아리 속을 욕심내어도 그냥 말줄임표만 사용할 뿐이다
빈집은 기다린다 밤나무가 뒷마당에 밤톨을 툭 툭 던지고 바람이 기왓장을 와장창 깨뜨릴 때도 빈집은 그냥 “좋은 날이야”라고 말한다 빈집은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는 집이 자꾸만 멀어져 간다 그 집에 가까이 가야 한다 들어가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 가서 닳은 무릎을 위로해주어야 한다 어머니의 계절
▲최영랑 1958년 전북 정읍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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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탕제원/박은석
탕제원 앞을 지나칠 때마다 무릎의 냄새가 난다
용수철 같은 고양이의 무릎이 풀어지고 있던 탕제원 약탕기 속 할머니는 자주 가르릉 가르릉 소리를 냈었다 할머니의 무릎에는 몇 십 마리의 고양이가 들어 있었다. 가늘고 예민한 수염을 달인 마지막 약, 잘못 쓰면 고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난다.
밤이면 살금살금, 앙갚음이 무서웠다. 고양이를 쓰다듬듯 할머니의 무릎을 만졌다 몇 마리의 고양이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던 할머니들이 절룩거리며 나타났다 빗줄기가 들어간 무릎의 통증 등에 업힌 밭고랑 한가득 들어 있는 무릎
탕제원 오후는 화투패가 섞인다. 화투 패는 오래 달일 수가 없다 약탕기 안에 판 판의 끗발들이 성급하게 달여지고 있지만 가끔은 불법의 처방이 멱살을 잡기도 한다.
약탕기 속엔 팔짝팔짝 뛰던 용수철 몇 개 푹 고아지고 있는 탕제원, 가을 햇살은 탕제원 주인의 머리에서 반짝 빛난다. 무릎들이 무릎을 맞대고 팔월 지나 단풍을 뒤집고 있다.
▲박은석1971년 광주 출생, 웅진홈스쿨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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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키워드/최은묵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
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두레박으로 소문을 나눠마신 자들이 전염병에 걸린
거목의 마을
레드우드 꼭대기로 안개가 핀다, 안개는 흰개미가 밤새 그린 지하의 지도
아이를 안은 채 굳은 여자의 왼발이 길의 끝이었다
끊긴 길마다 우물이 피어났다, 여자의 눈물을 성수라 믿는 사람들이 물통을 든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잎 떨어진 계절마다 배설을 끝낸 평면들이 지하를 채워 나갔다
부풀지 못한 뼈들을 눕혀 물길을 만들면 사람들의 발목에도 실뿌리가 자랄까
안개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우물 입구를 닫을 시간이다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다
▲최은묵 47세, 대전 동구 성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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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로로/김성호
나는 너에 대해 쓴다.
솟구침, 태양의 계단, 조약돌이 되는 섬; 깊은 수심에 가라앉은 이야기를 떠올리다가 나는 너를 잊곤 한다.
로로, 네 빛깔과 온도를 나는 안다. 네 얼굴이 오래도록 어둠을 우려내고 있는 것을 안다. 더 이상 깊지도 낮지도 않은 맨살 같은 나날을 로로, 나는 안다.
네가 생각에 잠길 때 조금씩 당겨지는 빛과 무관한 조도를 안다. 마음에 마음이 부딪혔다. 소리가 났다. 그쯤은 네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어서 내 망각은 너의 미래에서 쑥쑥 자란다.
마을은 물에 잠기고 고통은 가장 가볍다. 로로, 내 한 살 된 부엉이를 로로라 부를 때 날개에 대해 적고 싶은
두려움도 모른 채 쿵쾅이는 마음을 너는 알까? 여긴 쓸려갈 거야,
온 마을의 고양이가 낮 동안 밋밋하게 비상하는 것을, 환호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너는 알까? 로로, 우리 모두는 네 내면과 살았다. 나는 그곳에서 눈에 띄지 않는 한 형상이었다. 우린 오래도록 있어도 고요한 줄 몰랐지. 나는 오늘 온통
상처투성이여서 내일도 빛을 삼키고 반짝일까 무섭다. 사지를 갖추고 내일이 지상에 엎드릴까 무섭다. 로로, 나는 널 부르면서 여전히 네가 고스란히 피어오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동안만은 날 잊곤 하는 걸까. 로로, 네가 들린다. 언제일까?
로로, 나는 너에 대해 쓴다.
내면에 내면이 쏟아졌다. 카스트라토
구름, 비틀림, 작은 의식, 이런 것들을 떠올리곤 하다가 나는 다시 너를 잊어버린다
▲김성호 1987년 충북 청주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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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신발/박진이
발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난전의 신발들
맨발보다 더 시려 보이는 저 표준의 사이즈들은
몇 번을 신어보고 몇 번을 돌아서 보고
몇 번을 벗어두고 나서야
발의 온도를 이해할까
오늘도 얇은 먼지와 흰 눈에게 제 크기를 내어준다
겨울, 한기를 견디던 힘으로 발을 기다리는 일
진열이 아닌 나열의 추운 발
그러나 아무도 저 시린 발은 사지 않겠다는 듯
지나가는 걸음들은 빠르다
맞춤이 아니어서 주인이 없는 발
몇 켤레의 신발을 신어 본 후에야
제 발의 온도를 고를 수 있나
나열의 난전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내내
신발이 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발이 신발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몇 켤레의 신발이 들렸다 놓였다 신겨졌다 벗겨졌다
뒤꿈치 똑똑 딛고 싶은 저녁 무렵
누가 나열의 난전에 놓인 신발을 사고 싶을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유리 너머 진열의 신발들에 눈이 흘리는 날
퉁퉁 부은 저녁의 발에 난전의 신발 한 켤레를 신겨 보는데
그새, 벗어놓은 헌 신발도 좋다는 듯
흰 눈발 내려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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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박복영
아찔한 둥지난간에 올라 선 아직 어린 갈매새는 주저하지않았다.
굉음처럼 절벽에 부딪쳐 일어서는 파도의 울부짖음을
두어번의 날갯짓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어미가 날아간 허공을 응시하며 뛰어내린 순간,
쏴아, 날갯짓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하강하던 몸이 떠올랐다.
한 번도 바람의 땅을 걸어본 적 없으므로 가는 발가락은 오므린 채 가려웠다.
하강은 추락을 꿈꾸지 않는 법.
가슴 깃털을 헤집고 파고드는 처녀비행의 속도는 두려움이 되지 않았다.
끊임없이 밀려와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꽉, 물고
허공에 길을 찾는 갈매새가 잠시 수평선을 읽었다.
굽은 부리에서 거친 파도의 현이 흘러나오자
휜 바람줄을 따라 기우는 날개가 다시 팽팽해졌다.
태어나서 처음 바람을 거스르는 동안 갈매새는 바람의 부피를 다 가늠할 수 있을까.
포물선의 꼭지점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슬아슬한 궤적이 허공에서 지워지고 바람줄을 따라가며
바람이 풀어놓는 행의 단서를 찾는 동안 가슴 가득 차오르는 생의 씨앗들.
의문들이 빠져나올 때마다 날개가 책장처럼 펄럭였다.
갈매새가 날개를 당기며 내려다 본 벼랑 끝엔
벗어둔 신발 같은 텅 빈 둥지 옆으로
누군가 방생한 키 작은 해국들이
코카콜라 병뚜껑 같은 머리에 노랗게 흰 뼈를 우려내고 있었다.
▲박복영 53세, 전북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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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면(面)/정현우
면과 면이 뒤집어질 때, 우리에게 보이는 면들은 적다
금 간 천장에는 면들이 쉼표로 떨어지고
세숫대야는 면을 받아내고 위층에서 다시
아래층 사람이 면을 받아내는 층층의 면
면을 뒤집으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복도에서, 우리의 면들이 뒤집어진다
발바닥을 옮기지 않는 담쟁이들의 면.
가끔 층층마다 떨어지는
발바닥의 면들을 면하고,
임대 희망아파트 창과 창 사이에
새 한 마리가 끼어든다.
부리가 서서히 거뭇해지는 앞면,
발버둥치는 뒷면이 엉겨 붙는다
앞면과 뒷면이 없는 죽음이
가끔씩 날선 바람으로 층계를 도려내고
접근금지 테이프가 각질처럼 붙어있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할 때 내 면을 볼 수 없고 네 면을 볼 수 있다 반복과 소음이
삐뚤하게 담쟁이 꽃으로 피어나고 균형을 유지하는 면, 과 면이 맞닿아 있다
어제는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것 같다고
사다리차가 담쟁이들을 베어버렸다
삐져나온 철근 줄이 담쟁이와 이어져 있고
밤마다 우리는 벽으로 발바닥을 악착같이 붙인다
맞닿은 곳으로 담쟁이의 발과 발
한 면으로 모여들고 있다
▲정현우 1986년 평택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현 KBS1라디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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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중앙신인문학상 시 당선작(2014년 8월 공모)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유이우
자유에게 자세를 가르쳐주자
바다를 본 적이 없는데도 자유가 첨벙거린다
발라드의 속도로
가짜처럼
맑게
넘어지는 자유
바람이 자유를 밀어내고
곧게 서려고 하지만
느낌표를 그리기 전에 느껴지는 것들과
내가 가기 전에
새가 먼저 와주었던 일들
수많은 순간 순간
자유가 몸을 일으켜
바다 쪽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저기 먼 돛단배에게 주었다
돛단배는 가로를 알고 있다는 듯이
언제나 수평선 쪽으로 더 가버리는 것
마음과 몸이 멀어서 하늘이 높다
▲유이우 1988년 송탄 출생. 평택시립도서관 기간제 근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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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커의 샤머니즘/김민율
굴러다니는 돌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고 숭배한다
소원을 돌에게 말하고 우물에 던진다
대낮의 우물은 하늘을 번제하는 제단
저녁의 우물은 마력이 기거하는 당집
아이를 바쳤다는 소문에 이끼가 끼어 있다
물의 나이테를 열고 바깥을 엿듣는 누가 있다
두레박을 내려 몇 번이나 얼굴을 퍼올려도
제단에 바쳐진 아이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커는 어린 시절의 설화
눈금에 다다를 수 없는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수년 동안 던진 크고 작은 돌들이
내 뒤통수와 등짝을 닮은 기억을 보글거리며……
눈금 바깥을 초월하고 있다
물이 기포로 기포가 증기로 변하는 것은
아이의 주먹을 펼치는 주술일까
모든 손마디를 다 펼치면 ‘아무것’이란 게 우글거리는
이미 기억을 개종한 내가
한 손에 다른 비커를 움켜쥐고 있다
▲김민율 1978년 강원 강릉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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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방의 전개/윤종욱
밤새 발밑에는 좁은 사막이 쌓였어요
새벽은 불투명하게 돌아왔고
매일매일 더 늙은 모습으로
우리는 입이 말라 버린 나무
조금씩 빠르게 허물어지는 어둠처럼
우리는 잎이 진 사람
침묵을 정확하게 발음해 보세요
?
턱 끝까지 숨이 막힐 만큼
우리가 창문이 없는 방이었을 때
내일을 열어 볼 수는 없었어요
우리가 방에서 갈라져 나온 뒤에
우리는 식탁의 높이에 맞춰 앉았어요
모래를 모두 쓸어 낸 몸으로
표백된 셔츠를 입고
찻잔의 깊이와 끓는 물의 부피를 재며
우리는 눈대중으로도 알고 있었어요
어둠이 얕은 곳에서는
언제 눈을 떠야 하는지를
어디에 눈을 둬야 하는지 말이에요
시계는 벽을 등지고 있었는데
시계는 무엇이든 가리키려 하고
우리는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해요
사막의 발단을 출발하여
가느다란 아가미가 발생하기까지
우리는 진화하는 걸까요
밖은 왜 여전히 어두운 거예요
우리의 아침을 활기차게 열어 보세요
분주한 아침이 지나고 나면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문을 닫고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어요
▲윤종욱 33세 경기 수원시 장안구 장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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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백지의 척후병/김복희
연속사방무늬 물이 부서져 날리고
구름은 재난을 다시 배운다
가스검침원이 밸브에 비누거품을 묻힌다
바닥을 밟는 게 너무 싫습니다
구름이 토한 것 같습니다
낮이
맨발로 흰색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고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
구름은 발가락을 다 잘라냈을 겁니다
전쟁은 전쟁인거죠
그는 무너진 방설림 근처에 하숙하고
우리 집의 겨울을 측량하고 다른 집으로 간다
우리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나누었던가
폭발음이 들렸던가
팔꿈치로 배로 기어가 빙하를 밀고 가는 정수리
허물이 차갑게 빛난다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이 문을 찧는다
인질들이 일어선다
▲김복희 29세 서울 성북구 삼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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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래된 신발/고창남
인도에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면
떠올랐다 가라앉은 먼지들과
가볍게 부풀어 올랐을 세상의 호들갑이
풀어진 끈을 갈고리처럼 엮어 꽉 조여 맨다.
만년설처럼 쌓여만 가는 아득한 먼지 속에서
태양은 너무 용의주도하고
그림자는 자주 길 밖으로 흘러내린다.
인도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다.
바람만 불어도 가시가 돋쳐 구멍 숭숭 뚫리고
나는 다만 그날의 일기를 기록한다.
지구의 표면을 닦는 순례자의 발걸음
덜거덕거리는 신발이 몸 안의 길을 따라 걷는다.
때론, 갠지스 강이든가 어디든가 가닿지 못한 그리움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를 때
우리라는 존재는 우리가 소망하던 우리가 아니다.
오래된 신발에서 오래된 잉크냄새가 난다.
평생 써 내려가야 할 미완의 경전
어제 걷던 길을 오늘도 걷는다.
인도에는 부처가 있다.
신발장 문을 열 때마다 온 생이 몸을 뒤척인다.
▲고창남 1965년 제주출생, 제주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방송정보학과 졸업, 1999년 제주신인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