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퇴계와 율곡은 달랐다
유석재 기자
퇴계 "왜 큰 진리 보지 못하고 막히나" 율곡 "현실 외면하고 멀리 떠나서야"
편지 주고받으며 성리학 사상 겨뤘지만, 글 곳곳엔 서로에 대한 존중도 담겨 있어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이광호 편역|홍익출판사|1만5800원|344쪽
"세상에서 깊이 꿰뚫어 보지 못하면서 남을 공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은 본디 괴상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만, 숙헌(叔獻)의 고명하고 초탈한 견해로도 이 그림을 보는 데 이렇게 구애되고 막힐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570년(선조 3년), 70세의 노인은 35세의 후학(後學)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답답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어떻게 그렇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느냐'며 꾸짖는 듯하다. 편지를 쓴 사람은 퇴계 이황(1501~1570), 수신자인 '숙헌'이란 율곡 이이(1536~1584)의 자(字)다. 당시 서울에서 관직에 있던 율곡은 안동으로 귀향한 퇴계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때의 편지는 12년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퇴계의 분노는 원나라 학자 정복심(程復心)이 그린 '심학도(心學圖)'를 율곡이 비판한 것에서 비롯됐다. 주자학 중 심학(心學)의 기본 설계도를 축약해서 그린 이 도상은 한마디로 '마음의 지도'였다. 퇴계는 자신의 저서 '성학십도'에 이것을 채택했고, 그걸 본 젊은 율곡이 이의를 제기했다. 율곡의 긴 생각을 풀이하면 이렇다. 〈자, 보시라! '대인심(大人心)'이란 인간 마음의 최고 경지인데, 어떻게 이것이 마음의 기본 조건인 '본심'이나 '양심' 같은 것들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가? 아래쪽에 있는 '구방심(求放心)'이란 것은 또 무엇인가. '집 나간 마음을 찾아온다'는 것이니 배우려는 자들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것인데, 고작 '극복'보다 서열이 낮다니? 이건 공자가 안회에게 말한 '극기복례(克己復禮·자신을 극복해 예로 돌아감)'의 준말인데 솔직히 말해 좀 시시한 개념이 아닌가?〉 요즘 말하는 '극기훈련'의 '극기'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율곡에게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것이다. 도대체 이 그림은 체계가 없어요, 체계가…. 율곡은 이미 성현으로 추앙받던 만년의 퇴계에게 마침내 이런 돌직구를 날린다. "별로 의미가 없으니 아마도 반드시 취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 책에서 빼라'는 얘기다. 당시의 35년이라면 조손(祖孫)의 격차인 집안도 많았다. 퇴계가 다시 붓을 든다. 이것은 마음의 개념을 모두 힘써야 한다는 뜻에서 바둑판처럼 배열한 것이지, 선후의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지금 그대가 보내온 편지에서 운운한 것이 어찌 정씨(정복심)의 실소를 받지 않겠습니까?" 혀를 끌끌 차는 퇴계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
-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퇴계와 율곡이라는 조선 중기 성리학의 양대 철학자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퇴계전서'와 '율곡전서'에 실린 이들의 편지는 모두 14통(퇴계 9통, 율곡 5통)으로, 무척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다. 이광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는 이 편지들과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詩)를 처음으로 모두 번역했다. 각주와 해설이 많지만, 오히려 책 분량을 늘이더라도 좀 더 일반 독자 눈높이에서 친절한 설명을 했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두 사람의 성리학 사상에서 드러나는 이질성은 라파엘로의 벽화 '아테네 학당'을 연상케 한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이 퇴계라면, 손을 앞으로 뻗어 지상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율곡이 아닐까. 퇴계의 삶은 '궁극적 진리'인 하늘을 향해 있었던 반면, 율곡은 땅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퇴계에겐 율곡이 도덕의 본원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율곡은 퇴계가 세상에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물러나기만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당시 젊은 학자로서 명성을 세상이 널리 떨치고 있던 율곡이 선생의 학문과 덕망이 높음을 우러러 보고
처가(성주)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길에 천리길을 멀다 않고
예안의 계상서당(溪上書堂)에 퇴계 선생을 찾아 내려온 것은 그의 나이가 23세요, 선생의 나이가 58세때의 일이었다.
율곡은 선생에게 초면 인사를 올리고 나서 그의 학덕(學德)을 찬탄하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어 바쳤다.
溪分洙泗派 시냇물은 수사에서 한갈래 나뉘고
峯秀武夷山 드높은 봉우리는 무이처럼 빼어났소
恬計經千卷 천권 경서속에 보람있게 살아가니
行藏屋數閒 고요한 뒷방이 한가하기만 하도다
襟懷開霽月 회포를 푸니 맑은 하늘에 달이 떠오르는 듯
談笑止狂簡 웃으며 나누는 얘기에 거친 물결 잠자오
小子求聞道 소자가 뵈온 것은 도를 듣고자 함이니
非偸半日閑 반나절 헛되이 보냈다 생각지 마옵소서.
이상과 같은 율곡의 헌시(獻時)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화답 하였다.
病我로關不見春 내 병들어 문닫고 봄빛을 못보더니
公來披豁醒心神 그대 만나 얘기를 나누니 심신이 상쾌하다
已知名下無虛士 선비의 높은 이름 헛되지 않음을 알았으니
堪愧年前闕敬身 지난 날 사귀지 못했음이 적이 부끄럽소
嘉穀莫容梯熟美 깨끗한 곡식에 가라지 자라지 말 게 하오
纖塵猶害鏡磨新 새로 닦는 거울에는 티끌도 해가 되오
過情時語須刪去 부질없는 이야기는 모두 제쳐 놓고
努力工夫各日親 힘써 공부하여 우리 서로 친해보세.
자세히 읽어보면, 주고 받는 시에 사제지간의 무한한 존경과 애정이 넘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율곡은 예를 갖추어 사제의 의를 맺은 뒤에 계상서당에서 학문을 닦다가 예안을 떠났다.
율곡은 떠남에 즈음하여 선생에게 이런 부탁을 올렸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곳을 떠나기는 하오나, 소자의 마음은 항상 선생님 그늘에 있사옵니다. 선생님께서는 소자가 한평생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을 잠언(箴言)을 한 말씀만 내려 주시옵서."
선생은 제자들에게 조차 항상 겸허한 어른인지라, 그는 율곡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가 워낙 총명한 사람이니 내가 그대에게 무슨 잠언을 들려줄 수 있으리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간절히 부탁하오니 잠언을 꼭 내려 주시옵소서."
"그대가 그토록 소망이라면 내가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만 하겠네."
선생은 그렇게 말하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잠언을 율곡에게 주었다.
持心貴在不欺 마음 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立朝當戒喜事 벼슬자리에 올라서는 일을 좋아하기를 경계하라.
얼른 보기에는 대단치 않은 말씀 같지만, 율곡을 위해서는 가장 적절한 잠언이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선생은 유학(儒學)의 본도를 '입언수후(立言垂後)'에 두고 있었는데, 율곡은 유학의 본령을 '출세행도(出世行道)'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소신(所信)대로 정치(政治)를 펴지 못할 바에는 학문을 정성스럽게 닦아서 세인들에게 정도(正道)를 널리 알려주려고 했던 반면에, 율곡은 자신의 포부를 펴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이 선생과 율곡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기도 했는데, 선생은 젊은 율곡에게 그와 같은 농후함을 이미 꿰뚫어 보고 "벼슬자리에 오르더라도 부질없이 일을 일으키려고 하지 말라."는 지상의 훈계를 해두었던 것이다.
이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선생이 사람을 꿰뚫어 보는 선견지명이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잠언에 대해서는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 속에서 제자 구봉령(具鳳齡)은
"선생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뜻이 그처럼 깊고 간절하신데, 그와 같은 잠언은 어찌 율곡만이 받들어 행할 것인가. 나도 또한 마땅히 그 잠언대로 살아가도록 힘써야 하겠기에 그 잠언을 나 자신도 바람벽에 써붙이고 그대로 실천하기를 노력하겠노라."하였다.
선생이 율곡에게 남겨준 그 잠언은 어찌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일일 수 있으랴. 그 잠언이야말로 천고에 빛나는 영원불변의 대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율곡은 먼 훗날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곡퇴계선생(哭退溪先生)의 만사(輓飼)를 지었으며 흰 띠를 메고 심상(心喪)을 하였다.
그의 제문[만사]은 아래와 같다.
"아아 슬프도다! 나라의 원로를 잃으니 부모가 돌아가신 것 같고, 용과 범이 망했으며 경성(景星)이 빛을 거두었도다. 소자, 일찍이 배움을 잃고서 할 일없이 방황할 때, 마치 저 사나운 말이 가로뛰며 가시밭 길이 무성할 때 나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 주신 것은 실로 선생께서 열어 주심이었습니다."
율곡은 경연(經筵)에서 퇴계의 문묘종사를 극력 주장하여 실현시켰고 시호를 내릴 때도 적극 힘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