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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 66 호
이 석빙고는 경주시 인왕동에 있으며, 크기는 길이 18.8m, 홍예의 높이 4.97m, 너비는 5.9m의 규모이다. 남북으로 길게 조성하였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는데 너비 2.01m, 높이 1.78m의 크기이다. 여기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빙실(氷室)의 밑면도 외부의 형태와 같은지ㅣㄱ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밑바닥은 경사가 져있으며, 바닥 중앙에 배수구가 있어 내부의 물이 이 경사를 따라 외부로 배출되는 구조이다.
축조연대 築造年代
석빙고 옆에 석비(石碑)가 있어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데, ' 숭정기원후재무오 (崇禎紀元後再戊午) '라고 적혀 있어 1738년(영조 14)에 해당하고, 다시 입구의 미석(楣石)에는 ' 숭정기원후재신유이기개축 (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 '이라 새겨져있어, 축조한 지 4년만에 현재의 위치에 옮겨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로 전하는 자리가 있다. 조선 후기에 몇몇 석빙고를 축조하였으나, 그 규모나 기법에서 이 석빙고가 가장 정연한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인류가 인공적으로 얼음을 만들게 된것은 1876년 독일의 '칼 린데'가 암모니아를 냉각제로 사용하는 압축냉장장치를 발명한 이후이다. 그리고 1913년 최초의 가정용 냉장고가 미국에서 출시된 이후부터 냉장고는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얼음은 천연 얼음뿐이었다.
더운여름에 얼음을 사용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높은산에서 가져온 눈을 뭉쳐 벽 사이에 넣은 다음, 짚이나 흙, 퇴비 등으로 열을 차단한 저장소를 만들어 포도주를 차게 보관하는 일에 사용한 적이 있다. 알렉산더대왕, 네로황제 등은 발이 빠른 사람들을 동원하여 높은산의 눈을 날라오게 하여, 전투나 격투에서의 승리자에게 찬 음식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얼음을 인공적인 창고에 넣어 보관해 사용하기 시작한것은 B.C 1700년 경, 시리아 남동부에 위치했던 마리의 군주 '짐리림'이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얼음집을 빗고 여기에 얼음을 넣은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삼국시대의 얼음창고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겨울철에는 얼음이 얼고 여름에는 몹시 덥다. 따라서 겨울에 얼음을 채취해, 잘 보관해 여름에 사용하려는 노력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삼국지' 부여편의 기록에 따르면, '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를 지낸다 (其寺 夏月皆用氷) '고 하였다.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하여 얼음을 사용하는 일이 부여(扶餘)의 전체 백성이 아닌 왕과 귀족들에 한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위해서는 얼음이 대량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겨울에 채취한얼음을 대량으로 여름까지 보관, 관리하는 시설이 부여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유리왕(24~57년)때 이미 얼음창고(氷庫)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505년 지증왕 6년 겨울에 해당관서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토록 했다고 하고, 얼음창고를 관리하는빙고전(氷庫典)이라는 관청을 두고 대사 1명, 사 1명의 관원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신라시대에 얼음창고를 만들어 얼음을 이용하였음은 분명하다.
고려시대에는 얼음을 나누어주는 반빙(頒氷) 제도가 정해져, 해마다 6월부터 8월초(입추)까지 벼슬에서 물러난 공신들에게는 3일에 한 번씩 그리고 복야, 상서, 경, 감, 대장군 이상에게는 7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누어주도록 제도화하였다. 얼음창고는 왕실과 정부에서만 만든 것은아니었다. 1244년 당시 최고 권력자 최이(崔怡)는 사사로이 얼음을 캐어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저장하려고 백성들을 풀어서 얼음을 실어나르도록 했다. 얼음에 대한 수요가 커지자 고려정부는 1298년 6월 누구나 얼음을 저장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얼음창고
1396년 조선의 수도 한양에 '서빙고'와 '동빙고'가 건설되었다. 동빙고(東氷庫)에는 얼음 1만244정(丁), 서빙고(西氷庫)에 13만4,974정(丁)을 보관하였으므로 서빙고가 동빙고마다 13배 이상의 얼음을 저장하였다. 동빙고의 창고는 1棟이었던 것에 비하여, 서빙고는 8棟이었다. 동빙고는 음력 3월1일부터가을 상강(霜降)까지 왕실의 제사에 필요한 얼음을 공급했으며,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과 고급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창덕궁 안에는 별도로 내빙고(內氷庫)를 두어 궁궐의 얼음 수요를 맡았다. 얼음 창고는 예조의 속아문에서 관장하였다. 관원은 제조(提調) 1명과 종5품 별좌(別坐), 정6품 별제(別提), 종6품 별제, 정8품 별검(別檢), 종8품 별검, 서리를 4명씩 빙고에 나누어 배치하여, 빙고에서 얼음의 보관과 반출을 관장하였다. 또 동빙고에 얼음을 저장할 때는 제향에 올리는 얼음을 담당하는 봉상시의 관원도 감독하였다.
얼음의 채취
당시 깨끗한 얼음을 얻기위해 지금의 뚝섬까지 가서 한강의 얼음을 채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얼음 채취는 매년 1월 소한과 대한 사이에 주로 이루어졌고, 얼음이 12cm 이상 얼었을 때 잘라내었다. 이 일은 군인들과 강촌 주민들이 국가의 부역으로 담당하였다.
겨울에 얼음을 캐는 일은 매우 어려워, 동상에 걸리거나 빙판에 미끄러져 찰과상, 골절상을 입는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겨물만 되면 빙고 부역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1423년 세종대왕은 얼음을 캐고 저장하는 사람들(藏氷庫 役軍)에게 술 830병, 어물 1,650마리를 하사하여 이들을 배려하기도 했다. 또 의원을 보내 얼음을 캐는 군인들의 동상을 치료한 기록도 있다. 캐낸 얼음은 가로 70~80cm, 세로 1m 이상이 되도록 일정한 규격으로 맞추어 톱으로 썬 후에 우마차를 이용하여 석빙고로 옮겼다. 석빙고에 도착한 얼음은 볏짚과 쌀겨 등으로 포장하여 층층이 쌓았다. 대개 1만 개 이상에서 19만 개까지 쌓았다고 한다.
얼음의 사용
석빙고에 넣어둔 얼음은 양력 3월 말인 춘분(春分)일에 개빙제(開氷祭)를 열어 출하하여 10월 상강(霜降)에 그 해의 공급을 막았다. '경국대전'의 '반빙(半氷) 제도'조에는 얼음의 공급 및 사용처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해마다 여름철 끝달(음력 6월)에 여러 관사와 종친 및 문무관 중의 당상관(정3품 이상 관리), 내시부의 당상관, 70세 이상의 퇴직 당상관에게 얼음을 나누어 준다. 또한 활인서(活人署)의 병자들과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지급하도록 한다.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리들이 얼음을 받을 자격이 있었고, 환자들과 죄수들의 건강을 위해 얼음이 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채수(1449~1515)'는 한여름에 갈증이 심해 찬ㅅ ㅗ주를 많이 마시고 기절을 하였다. 집안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통곡하자, 순식간에 그가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얼음을 깨어서 입에 넣자 날이 저문 후 '채수'가 깨어났다는 일화가 있다.
조선에는 종친들과 대신들, 각 관아에 나무로 만든 빙표(氷標)를 하사하였다. 빙표를 장빙고에 가져가면 해당하는 만큼의 얼음을 내주었다. '채수'의 부인은 남편이 쓰러지자, 사람을 시켜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가져오게 하였을 것이다. 얼음을 내려주는 사빙(賜氷)은 고급 관직자에게 내려주는 특별한 혜택으로,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얼음은 탐나는 물건이었다. 때문에 장빙고의 얼음은 도적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선조 18년(1585년) 8월에는 사헌부 정언 '류덕수'가 ' 서빙고의 얼음이 도둑까지 맞아 여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거의 다 써버렸다... '고 하며 이조(吏曺)에게 특별히 조사하도록 아뢴 바도 있다. 얼음의 저장과 반출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만약 얼음의 보관을 소홀히 하여 저장한 얼음이 녹아 없어지면 파면시키는 등 빙고의 얼음은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단종 2년(1454), 사헌부에서는 ' 국가의 氷庫에서 저장하는 얼음에 한도가 있어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줄 수 없으므로 정1품에서 종4품의 대부(大父) 이상과 각사(各司)에서 얼음을 보관할 수 있도록 하자 '는 상소를 올렸다. 얼음을 받은 개인도 단기간에 얼음을 보관할 창고를 두고 제사 등에서 사용하였다. 18세기 영,정조 시대 이후에는 물동량의 왕래가 많았던 한강변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생선보관용 얼음을 공급하던 개인 빙고(氷庫)가 있었다.
환기구 換氣口
환기(換氣) 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시설하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 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더 깊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주고 있다.
석빙고의 내부는 연석(練石)으로 5개의 홍예(虹霓)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으로 삼았다. 벽은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렸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지대석(地臺石)을 삼아 견실하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 주목을 끌고 있다. 환기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시설하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 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 더 깊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다.
석빙고의 과학적 원리
현재의 조선시대 석빙고 가운데 청도 석빙고 (1713년 축조), 현풍 석빙고 (1730년 축조), 안동 석빙고 (1737년 축조), 경주 석빙고 (1738년 축조), 창녕 석빙고 (1742년 축조) 등이 남아 있다. 대개의 석빙고는 내부 길이 12m, 폭 5m, 높이 5m 내외의 빙실(氷室) 공간의 절반은 지하에, 절반은지상에 있는 구조가 대부분으로, 외형은 무덤처럼 보이나 내부는 돌로 만들어져 계단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큰 것은 30평이 넘는다. 석빙고는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천장을 아치형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 움푹 들어간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더운공기를 밖으로 빼어 낼 수 있다. 차가운 공기는 내려가고, 더운공기는 위로 뜨기 때문에, 0도C 안팎의 온도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빗물을 막기 위하여 석회암과 진흙으로 방수층을 만들었고, 얼음과 벽 및 천장 틈 사이에는 왕겨, 밀짚, 톱밥 등의 단열재를 채워 외부 공기를 차단하였다.
빙실(氷室)의 바닥은 흙으로 다지고 그 위에 넓은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서 생긴물이 자연적으로 배수되도록 하였다. 또 외부는 무덤처럼 만들어 잔디 같은 풀을 심어 햇빛을 반사하고, 풀에서 나온 습기로 석빙고의 온도를 낮추어 주었다. 또 2~3곳의 환기구멍을 만들어 외부 공기와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같이 석빙고는 과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공으로 얼음을 만드는시설이 아니라, 온도를 낮게 해서 자연의 얼음을 녹지 않게 보관해 주는 창고이었을 뿐이다. 조선시대 얼음의 주된 사용목적은 제사를 지낼 때에 신선한 음식을 올리기 위함과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음을 통해 절제한다는 철학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석빙고를 관리하였다. 1898년에 폐지될 때까지 오랜 세월 조선에 얼음을 제공하는 창고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