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8.주일오후찬양예배 설교
*본문; 삼하 16:1~4
*제목; 사무엘하서강해(16) 광야학교에서의 세 가지 사건
1. 첫 번째, 므비모셋의 종 시바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자녀가 깨닫지 못하거나,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있을 때에 “광야학교”를 준비하셔서, 이를 통해 깨닫게 하시고 바른 길로 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바로 “광야학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고백이 있다면,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는 그 고난보다 우리 주님이 더 크신 분이시고, 둘째로는 이 고난은 나를 깨닫게 하시고 바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자녀들은 환란 중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은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 일을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광야학교로 가는 다윗에게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는 ‘므비보셋의 종 시바’ 이야기입니다. ‘1~4절’입니다.
“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2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3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4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 16:1~4)
피난 가는 다윗에게 나귀와 먹을 것들을 들고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달려옵니다. 당연히 다윗왕이 선대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도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시바’만 온 것을 다윗은 궁금하여 여기며 질문합니다.
이 때, 시바는 므비보셋이 배신했다고 거짓으로 전합니다. 다윗의 환대는 오직 자신의 의사임을 말하며 다윗의 신임을 얻게 되고,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다 허락받습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시바에게 속아서 다윗을 따라 나서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나중에 밝혀집니다. ‘삼하 19:24~27’입니다.
“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25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26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삼하 19:24~27)
광야학교에서의 첫 번째 사건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악한 종의 술수는 곧 성공하는 것 같지만, 결국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듯이 말입니다.
혹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영이신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부터 살피시는 분이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하나님도 결국 다 속일 수 없습니다. 이를 기억해야 하는 사건이 바로 ‘시바’의 사건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시므이’ 사건입니다. ‘5~8절’입니다.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삼하 16:5~8)
사울의 집안에 ‘시므이’라는 자가 피난하는 다윗과 무리들을 저주하고 능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를 그냥 두라고 말합니다.
아마 “바후림”에서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후림은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미갈이 다윗을 피신시켜준 것을 안 사울은 이미 다윗과 결혼한 딸 미갈을 다른 이에게 아내로 줘버립니다. 그래서 미갈을 다윗이 피신다니는 동안 다른 가정에 재혼하여 다른 이의 아내가 됩니다.
이후 그가 왕이 된 후, 다윗은 아내 미갈을 일부러 돌아오게 합니다. 아내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미갈이 그리워서도 아닙니다. 사울이 미워서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미갈을 새로운 남편은 낙심하며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옵니다.
다윗은 ‘바후림에서의 시므이의 저주’ 속에서 이 일이 기억난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이가 하는 저주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니 그를 그냥 두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광야학교는 이처럼 자신의 죄를 기억하게 하고 철저히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와 길을 깨달아 다시 회복되는 곳이 바로 광야학교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아히도벨의 전략에 맞서는 후새의 전략입니다.
다윗의 유능한 모사였던 아히도벨은 대세가 압살롬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역시 뛰어난 모사답게(?)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에 섭니다.
그리고 그가 건의한 첫 번째 내용이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20~22절’입니다.
“20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2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삼하 16:20~22)
다윗의 후궁과 동침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제는 다윗의 시대가 완전히 저물었고, 위대한 압살롬의 시대가 되었음을 공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연 효과가 있어서, 머뭇거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계기가 됩니다.
이를 통해서 다윗은 자신의 죄과를 다시 한번 더 새기게 됩니다.(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아 살인) 자신은 어두운 곳에서 그러한 죄를 저질렀는데, 그의 아들은 백주에 그런 천인공로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광야학교에서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얼마나 후회하고 회개했을지 상상이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 압살롬을 버리실 작정을 하십니다. 그리고 ‘후새’을 일으키십니다. ‘16~19절’입니다.
“16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7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8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9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삼하 16:16~19)
압살롬의 편인 척하고, 후새가 압살롬의 측근에 숨어든 것입니다. 나중에 후새가 어떻게 압살롬을 무너뜨리는 지,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다루시는 지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다윗이 광야학교를 출발하여 그의 시선과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 가지 사건을 겪게 됩니다. ‘시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비밀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 ‘시므이’ 사건과 세 번째 ‘압살롬의 후궁 동침’ 사건을 통해서 다윗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다시금 깨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학교’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첫댓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광야학교에 보내시는 이유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바라보는 시선(이것이 믿음입니다.)을 회복케 하시고,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광야가 학교가 되고, 고난이 은혜가 되고,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더 더 좋은 것은, 광야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고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