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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의 뿌리는 동양이라고 말하는 서양의 학자들
서구 유럽의 역사왜곡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블랙아테나』이다.
유럽에서는 원래 유럽문명의 기원은 이집트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학자들이 19세기 후반 같은 아리안인종의 고대 그리스를 적극 발굴하여 유럽과의 연계성은 강화하고 이집트와의 연계성을 축소하였다.
그리고 이집트문명과는 별도로 성장해온 독창적인 문명으로 그리스를 부각시켜 그 때부터 서양문명의 기원이 되었다.
많은 서구학자들은 『블랙 아테나』를 읽고서 그리스의 역사와 서양사, 그리고 세계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반성을 했다.
그리스문명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2000~2500년 늦게 시작돤 문명이었으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나 페니키아 문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발전시켜왔으리라는 것이 순리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약소국인 아테나의 왕자 테세우스가 제물이 될 사람들과 함께 크레타로 간다. 이미 많은 연구들이 축적되어 그리스신화는 이집트신화와 터키지역의 히타이트신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또한 탈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솔론, 유클리드, 플라톤 등 그리스의 유명학자들이 이집트를 갔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피타고라스보다 1500년전의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서 찾아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의 기원은 이집트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수학의 기원도 이집트라고 했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많은 그리스신들이 이집트에서 왔다고 말했다.<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볼프강 작스가 『반자본 발전사전』12쪽에서 이야기한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도 세계사, 사상, 학문은 서구중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학자들이 수많은 역사왜곡으로 서구에 편향된 세계관을 만들어왔고 우리는 지금도 따르고 있다. “서구중심의 탈식민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오리엔트』는 일찍부터 서구가 앞섰다는 주장을 모두 부정한다.
영국이 벵골을 식민지화하면서 인도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중국과의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팔고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유럽은 중남미의 은을 착취하여 부를 이루고 인구와 자원이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투자가 증가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다음에야 겨우 아시아을 앞섰다는 것이다. 아시아를 추월한 것이 150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이 동양을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곳으로 낙인을 찍고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문명적인 곳으로 서양은 긍정적인 것으로 동양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 자신들이 만든 동양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근거로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자신들이 야만적인 세계를 문명화시키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프랑크는 동양과 서양의 경제적 현실 자체를 유럽학자들이 왜곡하여 거짓말을 했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이루어진 1820년대까지 유럽이 아시아에 뒤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서구가 세계사를 가장 발전시켜왔다고 배워왔고 따라서 근대를 서구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중세는 동양의 중세보다 뒤쳐진 암흑중세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런데 칼 맑스나 막스 베버 같은 학자들은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들은 서양이 우월하다는 관점에서 자료들을 해석하고 이론화 했기 때문이다. <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서양사는 아시아 문명이 모태
20세기 초중반 미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 철학자였던 윌 듀런트(1885∼1981)는 1930∼50년대 지식인들에게는 중요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지식인들은 그를 통해 철학과 역사의 교류에 눈을 떴다고 평자들은 풀이한다. 그는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문명의 응석받이이자 손자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조상인 동양의 풍요로운 유산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꼬집는다.
종래 서양사 중심의 서술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듀런트는 “서양의 이야기는 동양에서 시작된다. 아시아가 가장 유서 깊은 문명의 장으로 유명해서가 아니다. 동양의 문명들이 서양의 시작인 그리스 로마문화의 배경과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그리스와 로마가 현대 지성의 모든 원천은 아니다”면서 “서양 문명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발명품들, 예컨대 서양의 정치 기구 및 경제 과학 문학 철학 종교의 뿌리가 이집트와 동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출처: 세계일보 2011년7월15일
서양 중심의 세계사는 가짜다.
리 오리엔트 = 다시 동방으로 !!
저자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의 잘못된 시각을 수정하고 세계사에 관한 사고의 틀을 완전히 재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2000년 미국 사회학회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 된 바 있는 이 책은 서구의 발전과 세계체제의 기원에 관하여 근본적인 재인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혁신적이고 흥미진진한 프랑크의 역작이다.
" 오리엔트" "빛은 동양에서".
세계 문명의 근원은 동양이었고 동양 역사의 시작이 곧 세계 역사의 시작이었다.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는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강조하며 유럽 중심주의에 빠져있는 역사관과 세계사를 수정 하기를 요구한다. 우선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 거세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년 남짓이다. 그 이전, 그러니까 1800년 이전까지는 아시아가 세계를 주도 하고 있었다.
1800년 이전 변변한 자원도, 풍부한 자본도 없었던 유럽은... 자원과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 역시 1800년 이전 유럽은 아시아의 기술에 미치지 못했다.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계기는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 때문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2003년 3월 07일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존 M. 홉슨 저 / 정경옥 역 / 에코리브르 / 2005년 1월/ 18,000원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라 동도동기(東道東器)
동양과 서양의 문명적 특징을 축약해 흔히 동도서기(東道西器)란 말을 쓴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나면 이 말은 동도동기(東道東器)로 바꾸어야만 할 것 같다. 정신문명은 물론이고 기계문명마저도 그 발원지는 동양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동양이 서양과의 문명발달 경쟁에서 근소한 시간적 우위를 점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을 통틀어 ‘숙련된’ 동양에서 ‘미숙한’ 서양으로 ‘모든’ 인문적 지식이 ‘전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이 전수목록에는 원천기술뿐만 아니라 거의 완제품 수준까지 아우르고 있다. 저자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사료와 자료들은 충분히 치밀하고 방대하다. 따라서 구태여 저자가 존 M.홉슨이라는 전형적인 서양인 혈통이란 걸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문명발달의 원조 논쟁에 있지 않고, 인류문명에 있어서 동양의 명백하고 압도적이었던 문명사적 역할이 얼마나 축소되고 은폐되어 왔는지를 밝히려는데 있다. 그 과정에서 서양이 자기기만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부터임도 알게 된다.
동양은 ‘창조’ 서양은 ‘모방’
“서양 사람들은 독일의 발명가 구텐베르크가 문명에 혁신을 가져온 인쇄기를 최초로 세상에 소개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그림자 뒤에 숨은 진실은 이동형 인쇄기에 사용하는 최초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적어도 50년은 먼저 한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서문 중)
흔히 인류의 3대 발명을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라고 한다. 이 발명품들은 모조리 동양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서양으로 전수되었다. 앞서 저자의 서문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구텐베르크는 인쇄기술을 독자적으로 연구해낸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입수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고정관념의 먼지를 털어 내어야 한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은 훨씬 오래 전부터, 아니 역사의 전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교류를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교류는 일방통행이었다는 점이다. 즉 서양은 늘 문명의 수혜자였다.
동양은 ‘창조’하고 서양은 ‘모방’했다. 사실상 근대까지도 유럽인들의 기술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동양에 비해 아주 조악했다.
한 유럽 지식인은 그의 저서 『위대한 우(禹)임금과 공자(Yu le Grand et Confucius)』에서 ‘유럽이 17세기에 이르러 마치 ‘유전자 대혁명’을 겪는 것처럼 일대 변신을 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뉴턴 등을 비롯한 대과학자들의 세기가 열린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양은 더 이상의 ‘창조적 지식’의 출현이 없는 까닭 모를 정체기로 빠져들게 된다
서양인들의 모방과 착취
문제는 서양인들이 주도권을 쥐자마자 그것을 남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약적인 발흥은 단순히 동양에 대한 지적인 부채에만 기인했던 것이 아니다. 서양은 식민지화를 통해서 무상의 노동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독점에 가까운 시장확보라는 이중 삼중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저자는 영국의 산업혁명 또한 동양으로부터 이러한 경제적인 이득뿐 아니라 기술적인 모방까지 동원되었다고 말한다.
현대문명을 말함에 있어서 수학(數學)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오늘날의 십진법 수 체계 그 외에도 항해술, 조선술, 천문학, 도로망 등 세계를 이미 하나로 만들었던 교통수단은 그 어느 것도 동양인들의 지적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이라고 착각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작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양을 비롯한 소위 제3세계인들은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다.(이하 생략)
대만출신으로 일본 도카이대학 교수로 있는 사세이키가 쓴 『유럽 중심사관에 도전한다』에 따르면 “유럽중심 사관이 대두된 것은 17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서구가 직선적으로 발전한다는 진보사관을 확실하게 확립시켰고 이러한 발전의 최첨단에 서구가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게 정립되던 시기이다.
계몽주의 이후 유럽중심사관이 유럽을 우월한 모습으로 역사를 과장하고 왜곡하였다. 유럽에서 만든 세계사는 서구편향적으로 쓰여졌다며 비판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 시대가 지속되면서 유럽학자들이 주도하여 세계사를 유럽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왜곡하여 썼고 이러한 해석과 왜곡에 의존한 세계사가 현재도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전 미국 부통령 엘고어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말했지만 서양의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뒤 얻어 온 기술"이라며 "이런 면에서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혁명은 역사적으로 보면 두번째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기술 발전 기여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5년 5월 19일 서울디지털포럼 개막식 연설에서 -
크래머Kramer 박사는 현 서양문화의 뿌리요, 기독교 문명의 모체인 수메르 문명(BCE 3500~BCE 1950)을 건설한 사람들은 '동방에서 왔다' 고 주장하였다.
일본 학자 우에노上野景福는 수메르에서 사용한 설형楔形 문자가 태호 복희의 팔괘 부호와 흡사하다고 지적하였다. [대영大英 백과사전]에는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같은 교착어로서 그 어근語根을 같이한다고 하였다. 고든 Gordon 박사는 수메르인이 중근동中近東에 들어서기 전에 고대의 문자 기호를 가지고 온 듯하다고 하였다.
그러면 수메르 문명과 기독교의 관계는 무엇일까?
수메르 문명은 서양 문명의 시원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대다수 학자의 공통된 의견이다.
단적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저 유명한 바벨탑(수메르의 지구랏) 이야기를 통해서 성서에 끼친 수메르 문명의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에덴동산과 노아의 홍수 신화도 수메르 신화에서 기원한다. 뿐만 아니라, 신교神敎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나오는 삼신일체三神一體 신관과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은 혼동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사하다. 수메르 문명이 기독교 문화에 끼친 영향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기독교(유대교) 문화의 뿌리가 되는 유대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본래 수메르의 갈데아 우르Ur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는 수메르 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12환국桓國의 열두 나라 가운데 우르(虞婁, Ur)국과 수밀이(須密爾, Sumer)국이 있다. 이 두 나라가 환국 말기에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지금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세운 문명이 수메르 문명이다. 수메르인은 스스로 ‘검은머리' 사람이라 했다.
특히 수메르의 종교 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산' 혹은 '하늘 언덕' 이라 불린 지구랏Ziggurat은 제천단 유적으로서, 신교神敎의 삼신신앙과 제천 문화가 여전히 환국의 후예인 수메르인의 삶과 신앙 의식 속에서 제1의 중핵 자리를 점하고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신성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우수한 분이 마테오리치 신부님이었다. 중국사람들이 그를 신神이라고 했다. 중국에 와서 중국말을 배우고 유가의 경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아~ 천주님이 상제님이다.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을 천주(天主)라고 번역하고 그걸 지금도 카톨릭에서 쓰고 있다. 천주교라고. 천주교 어원을, 천주天主란 언어가 상제님을 알고 나온 언어다. 사실이. 이걸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본래 호칭이 상제님이다. 구한말 애국가에도 ‘상제는 우리 황상을 보호하사,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경書經』은 유교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 즉 4천여 년 전 이후의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 등의 성인 제왕들이 어떻게 통치했는지, 그 통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 책의 서두에는 “제왕으로 등극을 하면 먼저 태산泰山에 올라 천상에 계신 상제님께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제왕은 천상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해서 ‘천자天子’라 불러 왔다.
동양에서 말한 ‘천자(天子, 하나님에 아들)’와 서양 기독교 문화에서 말하는 ‘신의 아들’이 통하는 것이다. 예수 성자가 한평생 “내가 하나님의 아들(天子)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기독교 성서(聖書)에는 하나님이 엘로힘과 여호와(야훼)와 백보좌 하나님 세 분이 등장한다.
「구약 성서」에는 야훼(여호와) 하나님만 등장하고, 「신약 성서」에는 백보좌의 아버지 하나님만 등장한다. 예수 성자 이전의 유대인이 믿은 하나님은 야훼(여호와) 하나님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초월적인 천지 창조주로서의 엘로힘은 「구약 성서」의 야훼(여호와)와 「신약 성서」의 백보좌 아버지 하나님으로 혼용되어 쓰인다.
엘로힘은 '우리의 형상'으로 '하나님들'이란 말이지만, 기독교의 계파와 학자들 사이에서도 '복수형이다.' 또는 '단수형이다.'라고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다.
엘로힘을 제외하고 기독교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구약」과 「신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두 하나님의 호칭은 야훼(여호와)와 백보좌 아버지 하나님이다.
천지창조에서 타락, 그리고 구원으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구원관의 근원은 삼위일체(三位一體), 성부와 성자와 성령론이다. '본질적으로 한 분이지만, 작용은 셋으로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역할과 인격체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론 역시 하나님의 호칭과 함께 기독교 신학자 사이에서 갑론을박이다.
삼위일체론의 진실
2세기 중엽, 당시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 신앙이 쇠퇴하고 기독교가 로마의 상류층까지 전파되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313년에는 국교로 인정된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삼위일체론은 확고하게 정립된 교리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삼위일체의 인정 여부를 놓고,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258-336)파와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297-373)파가 대립하게 된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릴 것이라 판단하여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지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성자가 하나님 아버지다’라고 공인되면서 이후로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곧 하나님 아버지라고 믿게 되었다. 말하자면 인간의 지배 논리에 의해 예수님이 순식간에 하나님 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수 성자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야훼(여호와)가 하나님이란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내려보낸 백보좌 아버지 하나님의 인간 강세를 말하였다.
기독교 구원관이 가장 잘 기록되어 있는 요한계시록은 구역 성서에서 말한 초월적 창조주로서의 엘로힘이나 야훼(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 백보좌에 앉아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등장한다.
기독교 구원관의 총결론인 요한계시록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로서 새 하늘 새 땅을 여실 백보좌 아버지 하나님은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엘로힘이나 야훼(여호와)가 아니다.
또 불교는 어떠한가?
새 문명을 여시는 구원의 부처, 미륵불은 석가모니의 제자가 아니다. 많은 불교인들은 미륵은 석가모니의 제자로서 56억 7천만년 뒤에 인간세상에 오신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 최고(最古)의 경전인 『숫타니파타』 마지막 장인「피안도품(彼岸道品)」에도 바바리의 16제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수행승 미륵이 미래불이 된다는 내용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팔리어 연구의 권위자인 리스 데이비스(Rys Davis)는 미래불인 미륵불은 수행승 미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미륵사상연구의 대가인 일본의 와타나베 쇼코(渡邊照宏)도『미륵하생경,『미륵대성불경』등 미륵불과 관련된 주요 경전에, 수행승 미륵이 미래불이 된다는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음을 지적한 바 있다.
미륵은 도솔천의 천주님이시며 하나님으로서 석가를 내려보낸 분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고 미래불인 미륵불의 사상이 전래되자 미륵불에 귀의하여 용화낙원 세계에 나고자 하는 미래적인 신앙이 보편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 미륵신앙을 대중화시킨 분은 통일신라시대의 진표율사이다. 진표율사는 미륵신앙의 중심도장으로 모악산 금산사, 금강산 발연사, 속리산 법주사를 확장 창건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곳곳에 미륵불 신앙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미륵(彌勒)의 어원은 범어로‘마이트레야’(Maitreya, 자비로운 어머니)이며,마이트레야는 미트라(Mitra)에서 유래되었다. 미트라는 인도, 페르시아 등지에서 섬기던 고대의 태양신이다. 또 기독교의 메시아(Messiah)도 미트라에서 유래되었다. 즉 ,불교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분으로 수천년 동안 고대해왔던 "미륵부처님’과 기독교에서 수천년 동안 외쳐왔던 구원의‘메시아’는 모두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을 가리키는 같은 의미의 단어인 것이다.
선교사들은 각 나라에 들어갈 때마다, 그 지역의 신관으로 옷을 갈아입고 들어갔다.
야훼가 영어권으로 들어갔을 때는 God로, 중국에서는 천주, 상제, 神으로, 일본에서는 가미로, 조선에 와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일본이나 중국은 하느님에 관한 신관이 인식되지 않아 야훼를 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에 오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관이 아주 발달되어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기독교가 쉽게 전파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야훼를 야훼라 소개하지 않고, 야훼를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포교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 전략은 적중하여 손쉽게 한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다. 서양종교가 도입된지 400년이 넘는 일본, 중국, 인도에서는 기독교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100년만에 전인구의 40%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게일의 Korea in Transition 책(1909년 刊)에서
선교사 게일은 기독교 신도가 아닌 청소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비가 올거예요.”라고 하자
할머니는 대뜸 “비요? 비가 오는지 어떻게 알죠?”
게일은 “아침 신문 일기예보에 비가 많이 온다고 되어 있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원 세상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아침신문이 어떻게 알아요?”
나는 늙은 할머니가 전지전능한 신을 알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랐다... 소나 말의 먹이통 같은 데서 밥먹고, 고통받고, 죽고, 추방당하고, 이 가난한 조선땅에 어떻게 하나님 신앙같은 것이 있겠는가?
그것은 정말 비합리적이고 불가능한 이야기일 뿐이다.(게일은 더럽고, 고통받는 이들로 가득찬 가난한 조선땅에 전지전능한 신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존재할리 없다고 부정하고 있다)
로스의 The God of Korea(1888년 저술) 책에서
조선인들은 하늘의 주, 하나님을 상제라는 용어로 바꿔쓴다. 중국에서는 야훼 용어 번역과 관련해 슬프고 꼴 사납고, 큰 어려움이 있었는데, 조선에서 <하나님>에 대해 들은 것을 종합해볼 때 한국인이 이 단어를 가지고 있는 것에 고마움이 느껴졌다.
19세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놀랐다. 왜냐하면 동방의 이름 없는 나라에서 깜짝 놀랄만큼 발달된 하느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체험과 연구에 의하면 미개한 나라일수록 원시적이고 조잡한 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도 당연히 원시적이고 저급한 신관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조선은 전연 달랐다. 조선에는 야훼 못지않게 크나크신 하느님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게일같은 선교사는 미개한 조선이 전지전능한 하느님관을 가진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며, 부정하기까지 했다. 우리민족보다 뛰어난 하느님관을 가진 나라는 없었다.
여호와는 어떤 신인가?
구약을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구절이 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출애굽기 3:6) 이 내용은 상식으로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또 에스겔에는“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라.”(에스겔 34:30)는 구절이 나온다.
이 두 구절만 봐도 여호와는 이스라엘 족속을 약속의 백성으로 삼아 통치를 하는 유대족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와는 본래 아라비아 반도에 뿌리를 둔 유대족의 부족신이자 조상신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원래 전쟁 전문가인 군신軍神이다.
중동 지방의 족속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전쟁 신이다. 시편을 보면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편 24:8) 라고 찬양하는 구절이 나온다.
또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라는 구절이 있고,
사무엘상에는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사무엘상 6:19)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을 보면 여호와는 때에 따라 생명을 무수히 죽이는 전쟁신이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자기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데 길을 막는 자는 뱃속에 있는 애까지 다 도륙하라, 멸망을 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사무엘상 15:3)고.
얼마 전 가톨릭의 차동엽 신부는 <맥으로 읽는 성경>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구약을 읽어보면‘아니, 이게 무슨 하나님이냐. 제 백성을 위해서 남의 백성을 씨도 안 남기고 뱃속의 애까지 다 쳐 죽이라 하는분이 무슨 하나님이냐.’라고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신화의 아버지 조셉 캠벨은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프로에서 “십계명은‘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章에 가면 ‘가나안 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가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 한솥밥을 먹을 수 없는 것이지요.” 라고 했다.
그 내용을 정리한 책이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었다. 오직 내 백성만 위하고 타민족은 적대시하는 살육적인 신관으로 인해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싸우는 것이다. 중동 전역에서 서로를 죽이는 참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외쳤는데 그분이 여호와인가? 여호와는 전쟁신이다. “씨도 남기지 말고 전멸시켜라”라고 하는. 전 인류 조상신 버리게 하고. 그 죄악을 한번 생각해 본다.
기독교의 결론이 “새 하늘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 한 마디다. 예수의 제자 사도 요한은 ‘새 하늘 새 땅이 새로이 열리는 바로 그 때, 아버지 하나님이 오신다.
그래서 아버지가 직접 아버지의 나라, 천국을 건설하신다.’고 전했다. “예수가 직접 온다는 게 아니다. 내가 아닌 다른 분이, I am come in my father's name, and ye receive me not, if another shall come in his own name, him ye will receive.)」(요한복음 5:43)
사도 요한은 ‘백보좌 하나님’이 오신다고 했다. 장차 올자라고...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All-Sovereign).
여호와 신이 유일신으로 바뀐 역사 과정
지금부터 약 4천 년 전(BCE 2000년경) 아브라함의 족속은 수메르제국 내에 있던 갈데아 우르(Ur:도시국가)지역에 살다가,
강대국들의 잦은 침입과 기근 등으로 우르가 쇠잔해지자 유프라테스 강을 강을 건너 가나안(현재, 팔레스타인 일대)땅으로 이동한다.
이때부터 아브라함 족속을 헤브루(Hebrew : ‘강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라고 부르게 된다.
약 3,500(BCE 1,500)년경 전후에 기근이 들자 헤브루족의 일부는 나일강 유역으로 이동을 하여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간다.
강제노역을 하며 고통과 절망의 삶을 살던 히브리족은 BCE 1,300년 경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다. 이 때 모세는 민족정신을 하나로 강력하게 묶기 위해, 그들 민족의 하나님인 만군萬軍의 신 여호와와의 계약을 통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10계의 첫 번째 계율)는 유일신 신앙을 선포하게 된다.
그 후 헤브루족은 모세를 이은 여호수와의 인도로 팔레스티나 지역에 정착해 살았는데, BCE 1,000경에는 다윗왕이 흩어지고 분열된 족속을 통일하여 히브리왕국을 건설함으로써 약 400여 년 간 번영을 누린다. 그러나 다윗왕에서 솔로몬왕으로 이어지던 통일왕국은 다시 이스라엘왕국과 유대왕국으로 분열이 된다.
이스라엘은 209년간(BCE 931~BCE 722년) 존속하다가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망하고, 유대왕국은 345년간(BCE 931~BCE 586년) 존속하다가 신흥강국인 바빌로니아에게 멸망을 당한다.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바빌로니아왕은 솔로몬궁전과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유대의 지도층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끌고 간다.
바빌론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유대족은 자괴감에 빠지고 민족정신이 분열되게 된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유대족의 선지자들은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아 여자가 원죄를 지어서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는
원죄론과 유대족 선민의식과 그들 외의 타종교를 우상숭배로 매도하는 극도의 배타적인 사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당시는 유대백성들의 고통과 절망과 분노를 해소시킬 무언가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후 2,500여년(BCE 538년)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강자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바빌로니아는 멸망당한다.
유대족이 바빌로니아로부터 풀려날 때까지의 약 50년간(BCE 586~538)을 역사에서는 유대족의 바빌론 유수기라고 한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킨다.
그리고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신전을 재건축하도록 재정지원까지 해주고 종교적 자유인으로 만들어준다. 바로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왕을 메시아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유대인이 메시아로 인식한 페르시아 왕이 신봉하던 종교가 바로 ‘조로아스터교’였고,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조로아스터교의 메시아사상을 유대교 교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페르시아 왕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은 거룩하신 주님의 은총이시다.
유대민족을 선택하신 여호와만이 전지전능하신 유일신이시다!”하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유대교를 정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첫째, 신은 여호와 한 분뿐이다.
둘째, 유대민족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
셋째, 인류의 종말이 오고 신이 메시아를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신다 하는 유대교의 메시아사상, 유일신 신관이 정립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중동지역 유대족의 여호와가 인격신에서 초월신으로, 대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으로 신격이 변색되어 버린다.
신관 자체가 중동의 지역신에서 우주의 절대자 신격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여호와신은 본래 중동의 지방신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신앙관을 그대로 계승하여 기독교인들은 여호와신을 우주의 조물주로 신앙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여호와신이 원 조물주이고, 창조주이고, 우주의 주관자로서 인간으로 올 수가 없는 초월신이다.
그 여호와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독생자인 예수를 내보냈으며, 예수는 육화한 하나님으로서 심판의 때가 되면 믿는 사람을 건져 올리기 위해 다시 이 세상에 재림한다는 것이다.
황필호교수_종교철학개론 [존 H 힉著, 황필호 譯編<종교철학개론> p26]
히브리인의 하느님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라는 부족신(부족신)이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족의 ‘다곤’이나 모하브 민족의 ‘체모스’와 같은 부족신과 싸우는 하느님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6~8세기에 나타난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1세, 예레미아, 이사야 2세와 같은 예언자들은 야훼는 히브리인의 하느님일 뿐만 아니라 천지의 창조주이며 모든 역사와 인류의 심판자라고 끈질기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신앙의 가족’에 속하는 동족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이나 집단을 돌봐주는 하느님이 되었다. [존 H 힉著, 황필호 譯編<종교철학개론> p26]
도올 김용옥의 <절차탁마 대기만성> p102~104
야훼는 어디까지나 유대민족의 신이다.
내가 한국기독교인들이 막연하게 구약에 대해 갖고 있는 경학관經學觀에 대해 살펴볼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유대인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느낀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기독교 경학관은 전통적 유교 경학관의 오류의 답습이라는 연속성속에서 정확히 이해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한국의 기독교신학이 하여야 할 첫 사명은 기독교의 이해 자체에서 야훼 존재성의 문화적 성격을 탈색해 내버리는 것이다. 설교에서나 생활규범 속에서 구약의 명제들을 무비판적으로 절대적 진리로서 강요하거나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암암리 자신을 유대인, 그것도 맹목적 유대인으로 동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조선왕조실록>의 종교적 명제들을 이스라엘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자기 역사책인 <조선왕조실록>은 한 장도 거들떠 보지 않은 사람들이 남의 민족의 역사책은 왜 무오류적으로 맹신해야 하는가? 그러면서 자신을 한국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구약성서는 기본적으로 유대민족의 역사기록이다. 단지 그 역사의 성격이 야훼의 구속사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나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의 구약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정찬일: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기자, 광고 카피라이터, 홍보 등 줄곧 글 쓰는 업무에 종사했다. 정찬일 선생님 글 요약
중세 마녀사냥
초창기 기독교에서 악마는 착한 신에 대적할 힘을 가진 존재였으나, 마녀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하자 마녀가 등장했다.
유럽의 13~14세기는 혼돈의 시기였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가 추락했고 세속 왕들의 권력이 강해졌다. 1347년에 창궐한 흑사병은 전체 유럽 인구 3분의 1의 생명을 앗아갔다. 비슷한 시기에 발발한 백년전쟁과 종교전쟁, 독일 농민전쟁,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 등이 유럽을 휩쓸었다.
흑사병 이전에는 작은 빙하기로 불릴 만큼 자연재해가 잇따라 일어나는 바람에 흉년도 계속됐다. 이렇게 불안과 공포가 거듭될수록 사람들은 신에게 의지했다. 그러나 기도는 소용없었고, 기댈 데 없는 이들은 점점 이 모든 일이 악마의 소행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단에 대한 종교재판이 열리면서 자연스럽게 이단과 악마를 결합시켰다.
교황 요한 22세는 이단 심문관들에게 마녀를 처벌할 수 있다고 명시한 교서를 내렸다. 뒤이어 즉위한 베네딕투스 12세는 악마가 자신의 목숨을 노릴 것이라고 굳게 믿고 ‘악마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마녀사냥’이 정식으로 개장한 것이다.
이단 심문관들은 의욕이 넘쳤다. 그들은 고발당한 마녀를 재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 속에 나가 마녀들을 색출했다. 이단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남프랑스에서 그 효과가 즉각 나타났다.
교황의 발표 이후 1320년부터 1350년까지 이 지역에서 마녀로 기소된 자는 600명이었으며 그중 400명이 처벌을 받았고 200명이 불태워졌다. 각 지역마다 마녀재판이 수없이 열리자 1484년 교황 이노센트 8세는 마녀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공식 칙령을 내렸다. 이제 ‘분명한 이단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마녀들을 종교재판에서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마녀사냥의 교과서 《마녀의 망치》
마녀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성직자와 신학자 사이에서 ‘마녀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마녀의 정체와 그 구별법, 마녀재판 등 이 연구 결과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빠른 속도로 유럽에 퍼져나갔다.
인류 문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연구의 가장 큰 성과물은 하인리히 크레이머가 써서 1486년에 발행한 《마녀의 망치》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의 목적은 마녀재판의 형식과 방법을 정립하는 데 있다. 지역마다 마녀재판의 절차와 처벌이 달라 이를 통일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 책은 ‘마녀사냥의 교과서’로 여겨질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총 3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마녀가 이단임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2부는 하늘을 나는 방법, 악마와 짝짓는 방법, 인간을 짐승으로 바꾸는 방법 등 마녀의 행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3부는 체포부터 판결까지, 재판 절차와 심문에 필요한 조언과 심문관의 태도를 실었다.
《마녀의 망치》는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마녀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이므로 반드시 죽이라고 권고했다.
마녀는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마귀와 교접한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도 죽여야 한다. 제사는 반드시 야훼에게만 드려야 한다.마틴 루터(1483~1546, 독일의 신학자)
마녀들은 원래 사악하기 때문에 눈물이 없다. 《마녀의 망치》는 “지금 모든 눈물을 닦아주었던 하느님 앞에 결백하고 순결하다면 너는 네 눈에서 눈물을 쏟아야 한다. 만약에 죄가 있다면 결코 눈물을 흘리지 못할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예문을 읽는 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마녀로 단정해도 좋다고 했다. 악마가 억지로 흘리게 하는 경우도 있으니 신중하라는 충고도 덧붙였다.
교황 이노센트 8세는 이 책을 크게 칭찬하며 추천사를 썼다. 《마녀의 망치》는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29판 이상 인쇄되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책의 인기가 높아져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등으로 번역되어 전 유럽으로 퍼졌다. 게다가 이 시대에는 드물었던 18절지의 포켓판이 만들어져 재판관이나 심문관의 주머니에 들어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재판을 진행하다 곤란을 겪을 때 책상 아래에서 이 책의 책장을 넘겼다.
교회법에 따르면, 이단과 마녀는 고발은 물론 소문으로도 체포할 수 있었는데, 밀고보다 소문에 의한 체포가 많았다. 물론 그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입증이 곤란한 ‘특별한 범죄’여서 일단 체포부터 하고 재판하라고 《마녀의 망치》는 알려주었다. 용의자들은 체포와 동시에 감옥에 갇혔다. 《마녀의 망치》는 미결수라도 ‘되도록 좁고 어두운 옥방’에 수감할 것을 장려했다.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중세에 이르러 이단과 마녀 혐의자에게는 고문이 무차별적으로 실시되었다.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신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잔인한 고문을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고문실에는 예외 없이 십자가와 함께 “신에게 영광을”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고문은 되도록 죽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고통스런 방법을 썼다. 악마가 몰래 마녀의 힘을 북돋워주고, 마녀는 고통을 즐기는 변태이며, 살아서라도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고문을 합리화했다. 마녀사냥 이후 일반 범죄 심문에서도 고문은 크게 확산되었다.
마녀들에게는 고문보다 더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화형이다. 마녀사냥의 출발점이 되었던 이단죄에 대한 벌은 참회의 고행, 채찍질, 십자군 종군, 큰 배에서 노 젓기, 벌금, 사형 등이었다.
그러나 이단자 심판이 엄격해지면서 대부분을 사형에 처했고, 마녀들도 같은 길을 걸었다. 악마와 맺은 계약은 아무리 뉘우쳐도 용서받을 수 없었다.
처형 방식은 교수형, 수장형, 참수형, 그리고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이 있었다. 원칙은 화형이었는데, 14세 이하의 어린이는 고통이 가장 덜한 참형이나 교수형에 처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0세 이하의 어린이는 목욕탕에서 동맥을 끊어 과다 출혈로 죽게 함으로써 고통을 줄였다.
산 채로 불에 타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공포였다. 그래서 재판관들은 자백하면 교수형으로 죽여주겠다고 약속했다. 초기에는 산 채로 화형하는 것이 너무 잔인해 집행을 주저했다. 그러나 《마녀의 망치》 이후로는 망설임이 없었다. 책에서는 마녀의 시신이 온전하면 악마의 힘으로 되살아나 재판관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불로 태운 다음 재까지 완전히 없애야 했다.
화형식이 열리는 날은 축제였다. 곳곳에 화려한 깃발이 꽂히고 집집의 베란다는 꽃다발로 장식되었다.
보통 화형을 집행하기 한 달 전에 예고하는데, 참관하면 40일 동안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며 참석을 독려했다. 성직자들은 전날 마을을 돌아다니며 화형식을 상기시킨다.
화형장은 죄를 선고하는 식장과는 떨어진 곳에 설치하는 게 원칙이다. 처형당할 마녀의 수만큼 쇠기둥을 세우고 그 주위에 마른 장작을 쌓는다. 장작에는 불이 잘 타오르도록 미리 기름을 바른다. 화형식이 거행되는 날, 여명과 함께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감옥에 있는 마녀의 머리를 빡빡 깎고, 깨끗한 흰옷으로 갈아입힌다. 풍성한 아침 식사에 포도주까지 준다. 밧줄로 꽁꽁 묶인 마녀가 광장에 등장하면 군중은 환호하면서 조롱과 비난, 욕설을 퍼붓는다.
마녀에 대한 미사 후 재판관이 선고한다. 화형이 선고되면 재판관은 마녀를 위해 기도하고 화형 집행관에게 마녀들을 인계한다. 재판관들이 형장에 가지 않는 이유는 신성한 교회는 처벌에 손대지 않기 때문이었다. 군중은 화형장으로 끌려가는 마녀들에게 돌을 던졌다. 집행관들은 마녀들을 쇠사슬로 기둥에 묶은 후 즉각 불을 지핀다.
종종 재판 기록도 같이 불태웠다. 마녀의 기운이 붙은 것들을 완전히 없애고, 조작된 기록물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쇠기둥에 묶였던 마녀는 얼마 후 뼈와 재만 남게 되는데, 집행관들이 이를 빻아 강물에 흘려버림으로써 마녀재판은 마침표를 찍는다. 돈이 많이 들어서 화형은 집단적으로 실시했으며, 고문 중에 죽은 마녀들의 시신도 같이 불태웠다.
화형이 끝나면 재판과 화형에 들어갔던 경비를 정산해야 한다. 이 비용은 누가 댈 것인가? 국왕인가 교황인가? 사실 마녀재판이 급증한 원인 중 하나가 재산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산의 원칙은 죽은 마녀의 돈으로 충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마녀재판 시작과 동시에 마녀 혐의자의 재산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절차였다.
마녀 소유의 부동산과 동산 및 채무 관계까지 꼼꼼히 파악했다. 자기 돈으로 자신의 죽음까지 처리해야 하는 것이 마녀의 운명이었다.
마녀재판은 재판관이나 성직자가 부를 쌓는 수단이기도 했다. 부자였던 유대인이 자주 표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재판관들은 마녀가 생전에 남들에게 준 돈이나 금도 같이 몰수하는 한편, 경매에 나온 마녀의 부동산을 입찰자들과 짜고 가장 낮은 가격으로 샀다. 혐의자에게 빚이 있는 자를 증언대로 불러 거짓 증언을 하는 대신 그 빚을 탕감해주는 짓도 했다. 그래서 마녀재판은 ‘사람들의 피에서 돈을 만드는 연금술’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누가 얼마나 희생당했을까?
어떤 사람들이 주로 마녀로 처형당했을까? 우선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기독교에서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이브의 후예인 여성은 신앙적으로 약한 존재였으며, 금욕 생활을 하는 성직자들에게는 멀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마녀의 망치》는 여성을 지독하게 경멸했다.
“여성은 돼지 코에 걸려 있는 금테다. 그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부도덕하고 방탕하다. 그래서 여성은 육체적으로 더 외설스럽고 음란한 것이 분명하다. 여성은 마녀이고 창녀다.” 직업으로 보면 요리사, 산파, 점쟁이, 민간요법 치료사가 많았다. 요리사와 민간요법 치료사는 특히 전염병이 돌 때 의심받기 제격이었다. 산파는 출산한 아기가 죽거나 기형의 아이가 나왔을 때 신고당하는 일이 많았다. 점쟁이나 무당은 그들이 가진 예언 능력을 악마에게서 받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참고문헌
・ 『마녀사냥』, 모리시마 쓰네오 지음, 조성숙 옮김, 현민시스템, 1997
・ 『마녀사냥의 역사』, 오성근 지음, 미크로, 2000
・ 『사탄과 약혼한 마녀』, 장 미셸 살망 지음, 은위영 옮김, 시공사, 1995
・ 『세일럼의 마녀들 : 1692년 마녀 사냥의 비밀』, 로절린 섄저 지음, 김영진 옮김, 서해문집, 2013
・ 『유럽의 마녀사냥』, 브라이언 P. 르박 지음, 김동순 옮김, 소나무, 2003
・ 「마녀사냥에 대한 민중문화사적 접근」, 김란숙 지음, 서강대학교, 1997
・ 「중세 말 근대 초기 유럽의 마녀사냥에 대한 연구」, 엄재호 지음, 협성대학교, 2012
케냐의 국부(國父) 조모 케냐타 曰, "선교사들이 처음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에게는 땅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눈을 감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때 땅은 그들의 것이 되어 있었고 성경은 우리 손에 들려 있었다.
19세기 북아메리카나 호주, 뉴질랜드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백인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우고 원주민들을 교육했는데, 오히려 원주민의 문화를 탄압하고 백인들의 문화를 강제주입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동아시아에서 선교사들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와 함께 아시아인들의 고유 문화와 종교, 신앙 체계를 미신이라 하여 갈아 엎으려 들었고, 이걸 막으려고 관과 법에 호소하면 오히려 열강 공사관의 권력을 앞세워 폭거를 일삼는 존재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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