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부활 대축일 후 팔일 동안 경축의 시기를 지내는 그 마지막 날인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인 오늘 미사 가운데 우리가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보고 들어도 믿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의 우리들을 질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으로서 이번 주간 부활 팔일 축제 내내 들었던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모습을 총 정리하여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들었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일과 수요일 엠마오로 향해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 그리고 목요일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모두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는 말씀이 오늘 복음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전하는 마르코 복음의 말씀이 이전 들었던 부활에 관한 복음의 말씀과 다른 상이점을 보이는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의 모습을 꾸짖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 예수님 자신임을 드러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꾸짖으십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 16,1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 부활한 자신을 드러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실제 보지 못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소식을 전하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다른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 오늘 복음을 전하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부활을 소식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늘 독서의 사도행전이 전하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은 복음에서 예수님께 질타와 꾸짖음을 받는 제자들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담대하게, 말 그대로 담대하게 한 치의 주저함이나 머뭇거림도 없이 제자들은 최고 의회에서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사제들과 사두가이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면 그들이 그 분과 함께 하며 깨달은 모든 것들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오늘 독서의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
도대체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토록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아니 믿으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기조차 거부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들에게 그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이들의 행동이 이토록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일까?
오늘 복음과 독서가 전하는 제자들의 이 같은 모습의 극단적 간극 사이에는 예수님의 명령의 말씀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약하고 불신하며 완고한 마음을 갖고 있던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바로 이어 그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내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ㄴ)
방금 전까지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꾸짖음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선교의 사명의 말씀을 듣고 온 세상으로 나아가 오늘 독서가 전하는 대로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담대하게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도대체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한테 한 번 호되게 혼쭐이 났다고 겁쟁이 제자들이 한 순간에 용감무쌍한 사도로 변화할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오늘 영성체송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갈라티아서의 말씀을 인용한 오늘 영성체송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너희는 다 그리스도를 입었다. 알렐루야!”(갈라 3,27)
갈라티아서의 이 말씀 안에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 중에 하나인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내지는 ‘그리스도 안으로’라는 뜻으로 직역되며 다른 표현으로 ‘죽음과 하나가 되는’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표현 안에서 드러나듯 제자들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됨으로서 그간 그들을 괴롭혔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두 눈으로 뵙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죽음을 겪으신 그리스도와 같이 죽음을 겪고 그 분과 함께 함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으로부터 질책 받는 불신하고 완고하는 마음이 아닌 오늘 영성체송의 표현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입고 그 분과 하나 되어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19-20)
자신들을 불러 세워 예수에 관한 일들을 떠들고 다니지 말라며 협박하는 대사제에게 하는 베드로의 이 말 속에 더 이상 겁에 질려 골방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아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입음으로서 예수님과 하나가 된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의 이 말처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복음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맡긴 선교의 사명,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기쁨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슬픔과 절망의 나락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의 말씀처럼 더 이상 힘이 없어 쓰러져 있는 우리들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슬퍼하는 우리의 마음의 구원의 빛을 밝혀주시는 분이 바로 자애로우신 주님, 바로 그 분이십니다. 그 분을 믿으며 그 분을 향한 올곧은 마음, 그리고 완고함이 아닌 신실함과 굳은 신뢰로 우리의 힘이며 노래이며 구원이신 그 분을 향한 믿음으로 여러분 모두가 지금 이 시대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삶으로 전하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 되어 주셨네.”(시편 118(117),1.14-15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