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몸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길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실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이상향과 사랑 찾아 떠난 고독한 유랑자
/ 곽효환(시인)
이데올로기에 휘말리지 않고 문단과도 거리 둔 삶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인 백석[白石.본명 백기행(白夔行). 1912~95)은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백석에 관한 학위 논문만도 600편이 넘고 지금도 매년 수많은 연구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의 작품은 많은 독자가 애송시로 꼽는다. 이렇게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경우는 100여 년 한국 근대문학사를 통틀어 흔치 않는 일이다. 특히 1935년부터 41년까지의 6년여 동안 집중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이 발표된 지 70여 녕이 지났음에도 시간의 풍상과 장벽을 뛰어넘어 여전히 현재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사랑받는 일은 예외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조선일보 사진반장을 지냈고, 집안이 정주에서 하숙집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일찍이 개화한 중류층 집안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오산소학교, 오산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교장은 민족운동가 고당 조만식이었다. 동향 선배 김소월을 동경했고 뛰어난 어학적 내능을 보이며 영어와 러시아어를 잘했다. 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됐고, 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시 33편을 수록한 첫 시집 『사슴』을 펴냈다. 이 시집은 겹으로 접은 한지에 인쇄해 고급스러우면서도 두툼한 느낌을 준다. 문학적 출발점이 소설인데 별도의 절차 없이 곧바로 시를 발표하고 얼마 후 전격적으로 시집을 펴낸 일은 등단절차를 중시하고 장르 간 벽이 완강한 한국 문단 풍토에 비추어 볼 때 이례적이다. 39년 만주로 떠났다가 광복 후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이때 조만식 선생을 도우며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등 러시아문학을 번역 출간했다. 분단 과정에서 그냥 북에 남았으며 러시아문학을 번역하면서 동화시집 『집게네 내 형제』발간을 비롯한 동화시 창작과 아동문학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문학의 도식화에 반대한 후유증으로 58년 당으로부터 이른바 '붉은 편지'를 받는다. 59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는 오지인 '삼수갑산(三水甲山'의 삼수(압록강 인근의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 소재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양치기 일을 했다. 이후 일부 체제에 순응하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눈에 띄는 문학활동은 하지 못했다. 95년 1월 84세의 일기로 타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대의 다른 문학인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우선 그는 일제 식민통치가 가장 극심하게 진행되던 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초반까지 작품활동을 했음에도 친일시가 없다. 동시에 항일이나 식민치하의 참상을 고발한 작품 또한 없다. 그리고 분단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격동에 휘말림이 없었고, 납월북과는 무관하게 만주에서 고향인 정주로 돌아갔다. 요절하거나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서는 일제와 해방 그리고 분단에 이르는 격변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시대상황과는 다르게 개인사적으로 흠결이 없는 셈이다. 둘째로 당대 문인들과 별다른 교류 없이 문단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홀로 문학의 길을 걸었다. 그 흔한 문학 그룹이나 동인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상공간과 사랑을 찾는 고독한 여행과 유량의 길을 택했다. 셋째로 모더니즘의 영향을 토속적 세계로 승화시켰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했고 귀국해서는 러시아 비평가의 글들을 신문에 소개했다. 또 시집『사슴』에서 유년의 화자를 통해 무수한 평북 방언을 쏟아내며 토속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모더니즘과 근대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인식을 토대로 의식적으로 평북 방언을 사용해 고향인 관서지방의 풍물과 풍속을 그렸다. 그의 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음식이다. 음식이 시 제목으로 등장('국수' "수박씨 호박씨')하고, 음식을 친구로 삼는 동료의식('선우사')이 나타나는가 하면 유년의 놀이에도 빠짐없이 먹는 것이 등장('하답' '고야' 등)한다. 또 여행지의 풍물과 특성을 음식('통영' '북관' '북신' 등)으로 나타내고 조상이나 민간신앙에 입각한 제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류의 음식('오금덩이라는 곳' '목구' 등)에 관심을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맛잇는 음식은 어렸을 때 먹은 것이라고 한다. 백석은 떡, 나물, 국수 등 가장 기본적인 욕구 대상이자 유년의 기억이 담긴 소박한 음식들을 일상에 결합시켜 시적 의미를 형성하는 주요한 고리로 삼았다. 문학 외적으로 가장 큰 백석의 매력은 정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부유하면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을 살았다는 데 있다. 백석의 시세계는 여러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져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상적 공동체 세계와 사랑의 시원을 찾는 끝없는 유랑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요정 대원각을 길상사로 내놓은 기생 자야의 연인 시 잘 쓰고 잘생긴, 게다가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하면서 말수가 적고 분위기 있는 모던보이인 백석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로맨스 또한 많았다. 하지만 백석의 살아은 대개 외롭고 쓸쓸한 결말을 맞는다. 그 가운데 백석이 '란(蘭)'이라 불렀던 동영의 여인 박경련, 그리고 요정 대원각을 길상사로 내어놓고 백석문학상을 출현한 기생 자야(김영한) 여사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박경련과의 사랑은 열렬했으나 일방적이었고, 끝내 이뤄지지 못했으므로 뜻밖의 반전까지 있다. 35년 가장 친한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백석은 통영 출신의 동료기자이자 친구인 신현중에 의해 이화고녀를 다니는 통영 출신의 18세 신여성 박경련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이후 백석은 신현중과 함께 세 번에 걸쳐 통영을 방문하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마지막 방문에서는 박경련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쳐 혼인을 승낙받지 못하고 돌아간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 크게 낙담한다. 결혼 상대가 다름 아닌 통영에 동행했던 친구이고 당시 약혼자가 있었던 신현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여행의 산물로 백석은 '통영'이라는 제목의 시 3편과 '남행시초' 연작 등을 남겼다. 이 사랑은 박경련의 의중과는 상관없는 백석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어서 더 가슴 절절하고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흰 바람벽이 있어'(1941)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않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자야 여사는 자신이 쓴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이 사귄 다섯 여자 가운데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자야였고 자신 또한 백석에 대한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다"고 말한다. 1936년 우연히 함흥 영생여고보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옆자리에 앉은 자야에게 반한 백석은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말했고 이후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38년 백석이 만주에 같이 갈 것을 제의했으나 자야 여사는 혼자 서울로 오면서 헤어졌고, 이후 백석이 조선일보 기자로 복귀하며 재회해 잠시 청진동에서 동거했다. 하지만 39년 백석이 만주로 떠나며 영영 이별을 했다고 한다.
북에서 버림받고 남에서 잊혀졌다 재조명 '늦복' 해방 후 처음으로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한 필자는 많은 북쪽 문인에게 백석을 물었다. 대부분 모른다고 했고 몇몇 원로 문인들로부터 간신히 "동시 쓰고 러시아문학 번역했던 백석을 묻느냐"는 대답을 들었다. 고향인 북에 남았으나 시인으로 기억되지 않는 백석이 안타까웠다. 남쪽에서도 백석은 분단이라는 특수상황 때문에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하다가 88년 납월북 문인 해금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논의의 대상이 됐다. 어느새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 되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어지는 학술회의와 전집 발간, 그리고 내노라하는 화가들이 참여하는 시그림전과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든 콘서트 등의 벼락 같은 축복을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은 천상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바다 / 백석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여승 /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덩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노루 / 백석
산골에서는 집터를 츠고 달궤를 닦고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헌 삿을 깐, 한 밤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을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가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평북 정주하면 소월이 있고 백석(白石·1912~1995)이 있다. 1988년의 월북시인 해금 조치 이후 '백석 붐'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백석 시인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현대시에서 드물었던 북방 정서와 언어의 한 정점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그의 절친한 친구가 소장하고 있다가 1948년에 발표했다. 해방 공간에 발표된 백석의 마지막 작품이다.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 집에서'라는 제목의 뜻에 주목해볼 때 친구에게 편지 형식으로 보낸 고백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래서일까. 소리 내어 읽노라면 그가 나직이 말을 건네는 듯 '가슴이 꽉 메여 오'고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이곤 한다. '나'라는 맨 얼굴의 시어나 '-이며' '-해서' '-인데'와 같은 나열 혹은 연결어미나 '것이었다'라는 종결어미 등의 반복이 내뿜고 있는 독특한 산문적 리듬이야말로 이 시의 백미다.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한다는 직유며,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직설이며,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역설 등 사무치지 않는 구절이 없다.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기까지의 의연한 회복 과정이 유장한 리듬과 어우러져 한 편의 인생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1942년 일본 시인 노리다케 가즈오는 기자와 교사생활을 작파하고 만주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히 살고 있던 그를 찾아간다. 그는 가즈오에게 '나 취했노라'라는 시를 헌정했다. 20년 후 가즈오는 "파를 드리운 백석./ 백이라는 성에, 석이라고 불리는 이름의 시인./ 나도 쉰세살이 되어서 파를 드리워 보았네."('파')라는 시를 그에게 헌정했다. 파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을 그를 생각한다. 쌀랑쌀랑 소리를 내며 싸락눈을 맞는다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뻐근한 갈매나무를 생각한다. 정끝별(시인)
목구木具 / 백석
오대(五代)나 나린다는 크나큰 집 다 찌그러진 들지고방 어득시근한 구석에서 쌀독과 말쿠지와 숫돌과 신뚝과 그리고 녯적과 또 열두데석님과 친하니 살으면서
한 해에 몇번 매연지난 먼 조상들의 최방등 제사에는 컴컴한 고방 구석을 나와서 대멀머리에 지르터 맨 늙은 제관의 손에 정갈히 몸을 씻고 교의 우에 모신 신주 앞에 환한 촛불 밑에 피나무 소담한 제상 위에 떡보탕 식혜 산적 나물 지짐 반봉 과일들을 공손하니 받들고 먼 후손들의 공경스러운 절과 잔을 굽어보고 또 애끓는 통곡과 축을 귀애하고 그리고 합문 뒤에는 흠향 오는 구신들과 호호히 접하는 것
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 것과 없는 것과 한줌 흙과 한점 살과 먼 녯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룩한 아득한 슬픔을 담는 것
내 손자의 손자와 손자와 나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수원백씨(水原白氏) 정주백촌(定州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 목구는 큰 집 고방에 처박혀 있을 때는 제석신과 살고, 제사 때에는 신주 앞에서 음식을 올린 채 후손들의 절을 받거나 흠향하러 온 조상들과 만난다. 귀신과 사람이, 조상과 후손이 목구를 통해서 만난다. 1~2연의 병렬을 통해 목구와 함께 놓인 구체적인 사물들이 목록에 오르고, 3~4연의 병렬을 통해 목구를 매개로 모이는 일가와 귀신들이 무대에 등장한다. 다시 말해 1~2연이 제유가 가진 구체화의 특질(부분으로 전체를 형상화하는 방식, 곧 목구와 관련된 각각의 사물들이 모여 집안의 전체 모습을 일러준다)을 보여준다면, 3~4연은 제유가 가진 일반화의 특질(전체로 부분을 형상화하는 방식, 곧 모든 존재들이 모여 이 목구에 담긴다)을 보여준다. 이로써 목구는 한 집안의 내력과 삶, 죽음을 끌어안는 제유적 상징이 된다. 종합은 총체성의 사고와 맞닿아 있다. 제유가 전체성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귀결점이다. 백석은 흔히 이와 같은 제유적 종합을 통해 고향의 세부를 탐색하면서도 공동체의 특질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총체성의 사고는 백석의 시에서 환청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권혁웅(시인)
모닥불 / 백석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세 개의 원이 있다. 맨 안쪽의 조그만 원에서는 이제 목숨 다한, 온갖 값없는 것들이 조용히 타고 있다. 부스럭거리는 불의 소리들이 할딱이는 듯하다. 활활 탈 수 없는 사연을 가진 땔감들이다. 가난한 냄새도 조용히 올라온다. 개터럭에 기왓장까지도 함께 들어 있으니 차별하고 구별하지 않은 무기물의 세계다. 그 둘레에 또 하나의 원이 있다. 여기는 목숨들의 원이다. 큰 개도 강아지도, 땜장이도 당숙도 더부살이도 주인도 두 손 모으고 서 있다. 역시 아무런 차별이 없는, 오직 따뜻함만을 고루 나누자는 목숨들의 원이다. 그 바깥에 또 하나의 원이 있으니 이 모닥불을 길러온 시간의 원이다.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동상에 걸린, 모닥불 하나 쬘 수 없어 몽당발이 된 콧등 시린 내력이 조용히 둘러서 있다. 선거 지난 지금, 너나없이 누구나 다가가 쬘 수 있는 화평한 모닥불이 하나 있어야겠다. 장석남 (시인, 한양여대 교수)
북방에서 —정현웅(鄭玄雄)에게
백석
아득한 녯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勃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 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녯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녯 한울로 땅으로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우리는 여기까지 어떻게 왔나? 흥안령과 아무우르를 건너 숭어와 메기를 속이고, 자작나무와 이깔나무를 뿌리치고, 흘러 흘러 어떻게 살아왔나. 높은 사람에게 절을 하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대포소리에 놀라고, 그러다 문득 보니 아무것도 없다, 사랑도 힘도 자랑도 다 사라졌다. 없다고, 지나갔다고, 말할 수 있는 나라는 강력한 나라, 다시 일어서는 나라, 백석 시인의 나라. 최정례 (시인)
.................... 이 시의 "나"는 개인 화자가 아니다. "나"는 "아득한 녯날"에 오래된 나라와 장소와 짐승들을 떠나왔다(1연). 떠난 행동을 "배반하고" "속이고" 같은 부정어로 거듭 지칭하는 것은 이 떠남이 "북방"을 저버리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자연물과 퉁구스족이 슬퍼하며 나를 전송했다(2연). 나는 북방을 저버리고, 떠나와서는 편안히, 게으르게 살면서 부끄러움을 몰랐고(3연), 결국 영락했다(4~6연). 나는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겨우 반도의 좁은 땅덩어리를 차고앉아 따스한 햇살과 흰옷과 단밥과 샘물에 만족하며 살았을 뿐이다. 내게는 이제 이전의 기상과 포부가 없어진 지 오래고, 그 작은 땅덩어리마저 잃은 지 오래다. 이제 겨우 북방, "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모든 것을 잃었다. 옛 조상의 기개와 강역을 모두 잃었으므로 이제 나는 그곳을 떠돌며 탄식할 뿐이다. 이 시가 보여주는 역사와 장소는 한 개인이 겪은 시간과 거쳐간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지내온 역사적 과정과 지리적 이동을 압축한다. 다시 말해 "나"는 우리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다. 개인에게 전체성을 부여하는 이런 제유적 종합에서 특정한 인물이 겪는 특별한 사건이 보편적 인물이 겪는 일반적인 사건으로 확장된다. 권혁웅(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