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일 며칠 전부터 별렀던 함안 강주마을 해바라기 축제를 보기위해 새벽 6시 50분 출발했다. 오늘 오후부터 다음 주 내내 비가 온다는 소식이어서 비오기전에 빨리 갔다 오자는 속셈이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서 파란 하늘과 노오란 해바라기의 그림은 기대할 수 없지만 여행의 즐거움이 마음을 부풀게 했다. 단지 승용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보다 많이 걷지 못하는 것이 흠이다. 날씨가 시원해지면 번거로워도 운동을 위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것 같다. 8시 30분 강주마을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중간에 10km 정도 차가 밀려서 좀 늦게 도착했다. 먼저온 사람들로 주차장이 거의 찼지만 다행히 입구 맞은편 제1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작년까지는 한여름에 축제를 했기 때문에 구경하기가 매우 힘들었는데 올해는 시기등 여러 가지 변화를 주어서 한층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었다. 입장료는 경로 할인 없이 2,000원 이고 해바라기도 키 작은 풒종을 심었다. 1시간 20분에 걸쳐 구경하고 사진 찍고 9시 50분 두 번째 목적지인 무진정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들어오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조금씨 밀리고 있었다. 30여분을 달려 무진정에 도착 구경후 인근에 있는 함안 한우국밥촌으로 아침식사를 하러갔다. 한우국밥촌은 네티즌들 사이에 소문이 나서 주차장은 거의 만원이었고 특히 맛집으로 소문난 대구식당 앞에는 손님들이 많았다. 다행이 자리가 있어 식사를 할 수 있었는데 나올 때 보니까 식사 하려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대구식당 양쪽에 다른 국밥집도 있었는데 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비가 그 친후 해바라기축제 구경을 가려면 평일에 가든가 휴일에는 아침 일찍 서두는게 편안한 구경이 될 것 같다. 대중교통으로 해바라기축제를 보러가려면 힘이 든다.
다행히 이 기간에 함안여행 버스투어가 있어서 이를 이용하면 편하게 갔다 올 수 일을것 같다.
예약은 아라가야협동조합: 함안여행 버스투어 참가자 모집 - https://www.haman.go.kr/04203/04887/04562.web?idx=17133095&amode=view 에서 하면 된다.
부산에서 가려면 서부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7시 30분 버스를 타고 8시 30분 함안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시간은 넉넉하다. 또는 동래시외버스터미널에서 7시 50분(또는 7시 20분) 버스를 타고 8시 40분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8시 50분 함안 가는 버스로 환승하여 9시 20분에 함안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도 된다.
2019 강주마을 해바라기 축제 동영상 홍시 나훈아 노래
심금을 울리는 가슴아픈 사연 소록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K목사 앞에 일흔이 넘어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습니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K목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제발" 그저 해본 소리는아닌 듯 사뭇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K목사는 무언가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저에게는 모두 열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자리를 권하여 앉자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아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전,그 아이가 열 한 살 때였지요"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다 어느 산 속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내 심경을 이야기했지요. 고맙게도 아이가 이해를 하더군요.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녀석이 소리를 지르지 않겠어요? 내게는 가슴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밑까지 차올라 한걸음만 삐끗하면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그 후 소록도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올라와 살자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펴 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입을 엽디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죠. 그런데 사정은 그후로도 마찬가지였어요. 둘째, 세째, 네째--….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열한 살에 문둥이가 되어 소록도라는 섬에 내다버린 아이, 내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아홉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아이... 다시 또 먼길을 떠나 그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고 내다 버린 채 한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겠노라고 난 다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여기 음성 나환자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애는 내가 여기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바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명의 아이들에게선 한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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