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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곡물저장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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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저장고는 요셉의 보증서이다.
요셉은 이집트의 주요 도시들에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저장고들을 지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집트에서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요셉의 유산을 찾으려한다면, 그것은 곡물저장고(grain silos)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만약 누군가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었다는 유산을 찾으려한다면, 그들이 만들었던 수많은 진흙벽돌(mudbricks)들이 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어서, 고대 이집트에서 요셉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었다는 성경의 기록을 확인해줄 수 있는 독특한 것들이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곡물저장고를 건설했을 최초의 사람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집트에서 건설된 가장 오래된 곡물저장고를 찾으려할 것이다.
요셉(임호텝)이 건설한 최초의 곡물저장고. 계단식 피라미드 아래에 숨겨져 있다!
곡물저장고에 네체리케트를 묻고, 그 위에 마스타바를 쌓아 올려, 바로를 위한 거대한 무덤과 기념비의 선례를 세운 사람은 요셉이었다.
요셉은 그의 바로(네제리케트, 조세르)를 곡물저장고에 묻었고, 마스타바(Mastabas,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됐던 왕과 귀족의 직사각형 형태의 분묘)를 피라미드 크기로 확장했다. 그는 뒤를 이은 바로들에게 선례를 남겼다. 요셉(임호텝)이 세운 단단한 석회암 피라미드를 능가하는 피라미드를 세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미래의 왕조에서 바로의 매장을 위한 표본과 선례가 되었다.
.왼쪽 입구로 드나들기 위해서는 사다리나 밧줄이 필요했을 것이나, 반면에 오른쪽 입구에는 계단이 있었다.
주 입구(main entrance)는 조세르의 석관이 있던 중앙 수직통로로 곧장 연결된다. 오른쪽 터널(right tunnel)은 또 다른 터널로 이어지며, 이 터널은 점차 내려가 수직통로의 바닥에 연결된 갤러리로 연결된다. 왼쪽 입구 터널(left entrance tunnel)은 약간 미로와 같은 다른 세트의 갤러리에 연결되는 수직통로로 이어진다. 유일한 탈출구는 중앙 수직통로를 통해 계단과 연결된 갤러리로 이동하거나 수직통로로 올라가는 것이다. 수직통로가 곡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왼편 입구 터널의 수직통로로 떨어진 사람들은 (사다리나 밧줄이 없는 한) 추락해서 살아남았다면 갇혔을 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일일 것이다! 조세르의 석관은 수직통로의 바닥에 연결된 갤러리와 터널의 높이보다 높은 플랫폼에 배치되었다. 따라서 수직통로가 무덤으로 사용되었을 때, 조세르의 석관 아래에 있는 중앙 수직통로를 통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건너가는 것이 가능했다.
네체리케트(바로 조세르)은 기근 5년째에 죽었고, 임호텝(요셉)에 의해서 묻혔다.
네체리케트는 원래 곡물을 저장하는 데 사용되었던 수직통로에 묻혔다. 터널은 환기가 잘 안 되어 작업자들은 질식했을 수 있다.
조세르는 29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 세헬 섬(Island of Sehel)에 있는 '기근 비석(Famine Stele)'의 기록에 따르면, 임호텝은 조세르 즉위 18년에 왔다. 기근이 시작되기 전에 7년의 풍년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조세르는 흉년 4년 또는 5년째에 죽었을 것으로 계산될 수 있다.
기근 비석은 또한 조세르(Djoser)와 네체리케트(Netjerikhet)가 동일 인물임을 나타낸다. 조세르라는 명칭은 네체리케트의 사망한 후에야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고고학자들은 기근 비석이 발견되기 전까지, 네체리케트와 조세르가 동일 인물임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네체리케트가 조세르일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네체리케트를 기념하는 제18왕조의 훼손된 유적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근 비석은 7년 풍년과 7년 흉년에 대한 네체리케트(조세르)의 꿈을 임호텝이 해석하여 어떻게 이집트를 구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기근 비석은 조세르가 그 땅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었고, 제사장들에게 땅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임호텝이 요셉과 동일 인물이었다는 것을 더욱 뒷받침해준다.
성경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풍년에 저장해둔 곡식을 흉년에 팔아 제사장들의 땅 외에 애굽의 온 땅을 사들여 바로에게 바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세르는 제사장들에게 곡식을 주어 그들의 땅을 팔지 않게 해주었다.
계단통로를 사용하여 곡물을 회수하는 것을 보여주는 이집트의 상형문자.
계단식 피라미드 아래에 있는 터널은 강도를 속이는 데 사용되었을까? 아니면 곡식을 꺼내오는 데 사용되었을까?
위의 그림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입구 터널은 조세르의 석관이 배치된 중앙 방으로 직접 연결되는 4개의 다른 터널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터널은 실제로 석관이 배치된 플랫폼 바로 아래에 있다.
.열린 계단통로를 사용하여 곡물을 회수하는 것을 보여주는 이집트의 상형문자(hieroglyph). 이것은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작업자가 질식할 수 있었던 첫 번째 곡물저장고의 통로를 크게 개선한 것이다.
이 터널에는 끝이 막힌 지로(branches)들이 있어서, 누군가가 길을 잃고 중앙 방을 찾지 못할 것 같지는 않다. 이 터널은 도굴꾼들에게 무덤으로 바로 인도했을 것이다. 이 일은 정확하게 일어났다. 실제로 네체리케트(조세르)의 미라는 도굴꾼들에 의해서 도난당했으며, 남은 것은 네체리케트의 발 하나뿐이었다.
중앙 수직통로는 원래 곡물저장고(grain silo)로 사용되었고, 곡물은 이 지하 터널로 어느 정도 유입되어, 저장고의 용량을 늘리고, 곡물에 파묻히지 않고 안전하게 회수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환기 문제가 있어서, 계단식 피라미드에 매우 가깝게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또 다른 일련의 상호 연결된 수직통로를 건설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입구 터널을 통해서 계단식 피라미드 단지(Step Pyramid Complex)의 벽 내의 구덩이 바닥에 접근할 수 있었다.
계단식 피라미드 단지는 원래 곡물저장고 및 배급 센터로 설계되었다. 입구는 옥수수 모양의 높은 기둥이 있는 건물을 통해 나있었다. 이 건물은 옥수수가 거래되는 곳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곡물저장고에 연결된 지하터널에서 곡물을 회수한 구덩이까지 도보로 짧은 거리에 있었다.
요셉(임호텝)은 조세르(네케체리케트)를 매장하게 되자, 첫 번째 곡물저장고 바닥에 플랫폼을 건축하고 수직통로에 화려한 석회암을 깔았다. 조세르의 석관은 위에서 수직통로를 통해 내려졌을 것이다. 그런 다음 수직통로의 상단을 거대한 화강암 석판으로 밀봉하고, 그 위에 마스타바를 건설했다. 조세르의 다른 가족 구성원이 죽었을 때, 매장을 위해 연속적으로 마스타바가 추가되었다. 결국 쌓여진 마스타바 더미는 계단식 피라미드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계단식 피라미드는 조금씩 떨어져 내렸고, 결국 매끄러운 석회암들이 노출되었고, 현재 상태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남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사카라(Saqqara)의 계단식 피라미드 단지는 원래 곡물저장고 및 배급 센터(grain storage and distribution center)로 의도되었다. 요셉(임호텝)의 바로인 네체리케트(조세르)가 죽었을 때, 원래의 수직통로는 매장실로 사용되었고, 그 위에 마스타바가 세워졌다. 연속적으로 마스타바가 추가되었고, 계단식 피라미드를 형성하게 되었고, 인접해서 건축한 단지는 수세기 동안 곡물저장고 및 배급 센터로 사용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요셉(임호텝)의 업적을 그들의 신이었던 라(Ra)에게 돌렸지만, 사실 모든 것 뒤에는 여호와가 있었다!
이집트 역사에서 실존했던 요셉
요셉이 이집트의 2인자인 총리가 되었다면, 이집트 역사에 이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요셉이 7년의 기근에서 이집트와 주변 민족을 구해냈고, 애굽 온 땅을 바로에게 바쳤다면, 그는 이집트 역사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요셉은 여러 이집트 도시들에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거대한 곡물저장고들을 건설해야 했으며, 실제로 오늘날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많은 이집트 도시(예로 사카라)에서 대규모 곡물저장고를 찾을 수 있다.
요셉은 이집트의 대제사장 중 한 사람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이집트를 7년의 흉년에서 구하고, 바로가 양식을 공급해준 제사장들의 땅을 제외하고 이집트의 온 땅을 사들였다. 백성들은 요셉이 한 일 때문에 바로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바로를 부요하고 강력하게 만들었던 일등 공신이었다.
요셉은 30살부터 바로를 섬겼고, 11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집트 왕실 묘역에 매장되었다. 그의 가족인 야곱(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진흙벽돌을 생산하며 번성했다. 제12왕조의 피라미드들은 수백만 개의 진흙벽돌로 만들어졌는데, 200년에 걸쳐 그러한 피라미드 7개가 지어졌으며, 아메넴헤트 3세(Amenemhet III)의 피라미드가 끝이었다. 그는 미궁(Labyrinth)이라 불리는 거대한 진흙벽돌 구조물을 건축했다. 제12왕조의 피라미드들이 건설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노동력과 노예들이 필요했다. 제12왕조 피라미드에 사용됐던 진흙벽돌들은 히브리 노예들이 생산했을 가능성이 크다. 제13왕조에 있었던 출애굽 사건 이후 거대한 피라미드는 더 이상 건설되지 않았다.
이집트에 커다란 재앙들이 닥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모세에 의해 인도된 사람들은 성인 남자만(여자와 어린이는 제외) 60만 명이 넘었다.
요셉(임호텝)은 이집트 왕실 묘역에 매장되었고, 이집트 문화에서 거의 신격화되었으며, 7년의 기근에서 이집트를 구했고, 바로를 위해 이집트 전역의 땅을 사들였으며, 기둥이 있는 건물을 최초로 건축했으며, 첫 번째 피라미드를 설계했으며,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곡물저장고들을 건설했고, 미라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으며, 첫 번째 곡물 저장고에 네체리케트를 묻었고, 그 위에 피라미드를 건설하여, 바로의 매장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이집트 역사에서 요셉은 어디에 해당되는가?
연대 평가는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이 고대 역사의 조각들을 하나로 묶을 때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양한 고고학자 팀들이 특정 유물의 나이를 추정하기 위해 다양한 연대측정 방법들을 사용해왔다. 예를 들어, 한 층에서 우세한 도자기 유형을 사용하여, 해당 층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이 지적했듯이 연대측정 방법은 매우 비현실적이며, 권위 있는 것으로 신뢰받을 수 없으며, 성경과 모순되는 곳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다양한 연대측정 방법의 기초에 있는 가정(assumptions)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이들 가정으로 인해 유물의 연대가 1000년에서 2000년까지 부정확하게 평가될 수 있다. 특정 왕조의 추정된 연대만을 기준으로 조각들을 짜맞춘다면 결과는 상당히 틀려질 수 있다. 평가 연대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집트 역사와 히브리 역사가 서로 맞지 않으며, 전통적 이집트 역사에서 요셉에 해당하는 인물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역사가들이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스위니(Sweeney)[15, 19, 21, 48], 벨리코프스키(Velikovski)[49, 50, 51], 프라이(Fry)[12, 16, 20, 52-59], 라일리(Reilly)[13, 17, 22, 60], 다운(Down)[18]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표준 이집트 연대기를 축소하고, 이집트 왕조들을 끌어내리는 수정된 이집트 연대기를 제안했다. 수정된 이집트 연대기를 성경적 연대기와 정렬시킬 때,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확인되는 성경적 인물에 대한 새로운 후보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수정된 이집트 연대기를 사용하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역사적 기록은 서로 잘 들어맞고, 중요한 성경적 인물과 동시대 인물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식별 가능하게 해준다.
이것은 하와라(Hawara)에 있는 아메넴헤트 3세(Amenemhet III, 이집트 제12왕조의 6번째 바로)의 피라미드이다. 수백만 개의 커다란 진흙벽돌들이 아메넴헤트 3세의 두 번째 피라미드를 건축하는 데에 들어갔다. 원래는 돌로 덮여 있었지만, 지금은 진흙벽돌 더미로 남아있다. 성경(출 5:6-21)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였을 때, 바로가 그들에게 짚으로 보강된 진흙벽돌을 만들도록 강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집트에는 진흙벽돌로 된 다른 많은 건축물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하와라에 있는 아메넴헤트 3세의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는 진흙벽돌들이다. 수세기에 걸친 침식, 지진, 인위적 훼손 등으로 바깥쪽 석회암은 떨어져 나갔고, 내부의 진흙벽돌이 노출되어 있다. 이 지역은 강수량이 매우 적어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진흙벽돌의 상태는 비교적 좋다. 이것은 건설된 마지막 거대한 피라미드였다. 이집트에는 많은 진흙벽돌 구조물들이 있지만, 제12왕조의 피라미드에는 수백만 개의 진흙벽돌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들의 생산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매우 많은 노예들과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피라미드를 만드는 임무가 주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풀려진 표준 이집트 연대기를 믿어온 전통적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 살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요셉의 가능한 후보 인물을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 기초하여, BC 1700년경으로 추정되는 힉소스 왕조에서 요셉에 대한 증거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집트에 병거(chariots)가 처음 도입된 시기와 관련된 논쟁으로 인해, 출애굽의 시기를 제18왕조 때로 해석해 왔다. 이 한 가지에 중점을 두다보니, 많은 고고학자들은 제18왕조에서 노예들의 대대적 탈출의 증거를 찾기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여왔다(물론 출애굽은 제13왕조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 증거들을 찾을 수 없었다).
4개, 6개, 8개 바퀴살을 가진 수백 개의 병거바퀴들이 홍해의 누웨이바(Nuweiba) 앞바다에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되었지만, 이 병거바퀴들은 제15왕조 또는 그 이후 시기의 것으로 연대를 결정함으로써 제12왕조는 간과되었다. 제12왕조에서 병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출애굽 당시 이집트의 모든 군대와 병거가 홍해에서 수장되었다고 성경은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병거 바퀴(Chariot Wheels)'를 찾기보다 '진흙벽돌'을 더 많이 찾아야 하고, 그것은 제12왕조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진흙벽돌은 제12왕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는데, 미궁(Labyrinth)과 같은 건물뿐만 아니라, 제12왕조의 피라미드들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수정된 이집트 연대기는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와 이집트 역사가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 매우 잘 일치한다는 다른 그림을 낳고 있으며, 물론 이 점은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 경우에 아브라함은 메네스(Menes, 이집트 제1왕조를 창건한 이집트의 바로)와 동시대 사람으로 간주되고, 임호텝(Imhotep)은 성경의 요셉으로 간주되고, 조세르(Djoser)는 요셉이 섬기던 바로로 간주될 수 있다.[13, 15, 17, 21, 52, 54].
수정된 이집트 연대기에 의하면, 아메넴헤트 3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여 진흙벽돌을 만들게 했던, 모세 시대의 바로였을 것이다[18]. 또한 아메넴헤트 3세의 피라미드는 짚이 들어 있는 진흙벽돌로 만들어졌다.[18] 아메넴헤트 3세는 제12왕조의 6대 바로로, 제3왕조의 조세르 이후 450~500년 후의 사람이다.[18] 그에게는 딸만 있었다. 그의 딸 중 하나인 소벡네페루(Sobekneferu)에게는 왕이 되기 전에 사라진 입양아(아메넴헤트 4세, Amenemhet IV)가 있었는데, 그는 모세(Moses)로 추정되고 있다.[18]
그렇다면 출애굽은 기원전 1445년경 제13왕조 네페르호텝 1세 통치 기간에 일어났다.[18] 이 사건 직후에 힉소스(Hyksos)는 거의 저항 없이(홍해에서 이집트의 군대가 수장되었음으로) 하이집트(Lower Egypt)를 점령했다. 힉소스는 약 400년 동안 하이집트를 통치했다. 이 시기는 약속의 땅에서 지낸 사사시대와 일치한다. 힉소스는 마침내 이집트 신왕국(New Kingdom of Egypt)의 시작인 제18왕조를 세운 아흐모세 1세(Ahmoses I)에게 패배한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동시대에 있었던 힉소스(제15왕조, 제16왕조)는 제18왕조(이집트 신왕조)를 세운 아흐모세 1세에 의해서 이집트에서 쫓겨났고[61], 사울 왕이 아말렉(힉소스)을 멸망시켰을 때, 끝이 났을 것이다.[18] 이것은 제17왕조를 제16왕조와 동시대로 위치시키는 것이다.[18] 마찬가지로 제18왕조는 사울, 다윗, 솔로몬이 왕위에 있을 때인 통일 이스라엘 왕국과 동시대에 있었다. 이것은 또한 제18왕조의 아멘호텝 1세(Amenhotep I)와 투트모세 1세(Thutmosis I)가 다윗과 동시대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18] 하트셉수트(Hatshepsut, 제18왕조의 5번째 바로)는 솔로몬을 방문했던 시바의 여왕(Queen of Sheba)이었다.[62, 63] 투트모세 3세는 여로보암의 통치 기간에 집권하여 이집트의 가장 위대한 바로가 되었다.[18]
출애굽 이전의 성경적 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장기간 체류했는지 또는 단기간 체류했는지, 어떻게 가정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성경적 연대를 200년이나 잘라버리고, 결과적으로 출애굽 이전의 사건들을 잘못 정렬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또 다른 혼란스러운 요소이다.
요셉이 이집트 제3왕조의 임호텝이고, 모세가 제12왕조의 아메넴헤트 4세라면, 다윗과 솔로몬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성경은 요셉이 바로의 총리(vicroy)였으며, 이집트 제3왕조의 총리였던 임호텝은 요셉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모세는 바로의 딸에게 입양되어, 그녀의 자식처럼 길러졌다. 40세에 시작한 40년 동안의 미디안 망명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모세는 바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를 위해 진흙벽돌을 만들면서 밭을 일구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살았던 기간 중 적어도 1/2의 기간은 노예로 있었고, 인구수는 200만 명에 이르렀다. 한 사람이 하루에 단지 1개의 커다란 진흙벽돌을 만들었다고 해도, 엄청나게 많은 진흙벽돌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제12왕조 피라미드의 중심부는 진흙벽돌들로 만들어졌다. 아메넴헤트 3세(Amenemhet III)는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제12왕조의 마지막 바로였다. 사실, 그는 내부가 진흙벽돌들로 된 두 개의 피라미드를 건축했고, 미궁(Labyrinth)도 건축했다. 그는 46년 동안 통치했으며, 소벡네페루(Sobekneferu)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아메넴헤트 4세(Amenemhet IV)라는 또 다른 인물은 족보가 없는데, 아메넴헤트 3세와 9년간 공동 통치하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모세는 아마도 아메넴헤트 4세였을 것이다. 이것은 의미가 있는데, 모세가 바로의 궁전에서 양육되었고, 다음 바로로 키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피해야 했다. 소벡네페루는 아메넴헤트 3세가 사망한 후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4~8년 동안 통치한 후 그녀가 사망하고, 제12왕조가 끝났다. 제13왕조와 제2중간기로 바로의 급속한 승계가 있었다. 80세 나이의 모세는 네페르호텝 1세(Neferhotep I) 통치기간 중에 이집트에 들어왔고, 이스라엘 백성을 430년 만에 이집트에서 인도해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고, 여호수아에 의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었다. 사사시대가 약 4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런 다음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고, 다윗과 솔로몬으로 왕위가 승계되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날짜는 대략 BC 960년경으로 세속 고고학자들에게도 상당히 확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성경은 출애굽이 이보다 480년 전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집트 왕국들과 왕조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생활과 광야생활, 사사시대, 통일왕국, 분열왕국의 관계를 보여주는 개략도. 이스라엘 민족은 솔로몬 이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었다. 1차 중간기는 없었다.
사울과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다윗과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 이집트에는 어떤 바로가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제2중간기의 마지막 바로인 아포피 2세(Apopi II, 힉소스)는 세케넨레(Sekenenre)의 아들이자 아흐모세 1세(Ahmose I)의 형제인 카모세(Kahmose)의 반란에 의해 이집트에서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아포피 2세(Apopi II)와 힉소스는 애굽을 떠나 북쪽으로 향하다가, 당시 사울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와 마주쳤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지시했다. 사울은 지시에 따라 힉소스를 거의 전멸시켰지만, 아각(아포피 2세)을 살려주어 사무엘에게 불순종했다. 사무엘은 그를 직접 죽였다. 사울이 이스라엘에서 계속 통치하는 동안, 아흐모스 1세는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의 첫 번째 바로가 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의 왕위는 사울에게서 다윗과 솔로몬에게 승계되었고, 이집트는 아흐모세 1세의 뒤를 이어 아멘호텝 1세(Amenhotep I), 그 다음 투트모세 1세(Thutmoses I), 그 다음 투트모세 2세(Thutmoses II), 그 다음 하트셉수트(Hatshepsut, 솔로몬을 방문했던 시바의 여왕)가 그 뒤를 이었다. 하트셉수트의 뒤를 이어 바로가 된 투트모세 3세(Thutmoses III)는 분단된 이스라엘 왕국 기간 동안 이스라엘을 약탈한 이집트의 가장 강력한 바로가 되었다. 그는 성경의 시삭(Shishak)이었다. 다윗은 BC 1000년경, 사울은 BC 1040년경에 있었다. 전통적인 표준 이집트 연대기가 성경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표준 이집트 연대기는 수정되어야 한다.
출처 한국창조과학회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8104674&bmode=view
1. 곡식 저장법
옛날 팔레스틴에서는 곡물을 저장하는 단지나 저장통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팔레스틴의 곡식저장 풍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팔레스틴의 곡식 재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므로 이에 대해 간단히 먼저 언급하기로 하자. 팔레스틴에서는 모든 곡물이 겨울에 자라 며 우기가 시작된 직후인 10월경에 파종한다. 그리고 3-4월의 우기가 지나가면 제일먼저 보리가 익기 시작하여 그 다음으로 지역의 고지에 따라서 일주일 내지 한달 정도 뒤따라 밀이 익기 시작한다. 그리고 6월 첫 주간에 추수가 시작된다. 이 때 팔레스틴의 농부들은 가족이 먹을 수 있을 만큼의 곡식만 남겨두고 나머지 곡식은 팔기 위하여 저장해 두었다. 그리고 가족이 먹기 위해 남겨둔 곡식도 다음 추수 때까지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저장하여 보관해 두어야 했다. 그래서 이 때 사용된 것이 여러 가지 크기의 진흙 항아리였다. 이 항아리들은 태양열로 구워진 진흙과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만들었는데, 이렇게 할 때 벌레를 방지해 주는 효과가 있어 적은 양의 곡식을 저장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또한 좀더 많은 양의 곡식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토굴을 파서 만든 창고나 곡간이 활용되었다. 이 창고는 개인용 또는 공동용으로 지어졌고 곡식을 건조하게 하고 쥐와 개미의 해를 방지하기 위해 입구를 석회로 밀폐했기 때문에 안전하게 곡식을 저장할 수 있었다. 실재로 서늘하고 건조한 토지에서는 수년간 곡식을 저장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곡식을 저장하기 위하여 거대한 규모의 지하 저장고도 활용되었다. 이것은 물이 마른 저수지를 저장고로 이용한 것에 불과하나 때때로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애굽 사람들처럼 인공적으로 곡식을 저장해 둘 수 있는 국고성(國庫城)을 만들기도 했다. (창 41:35, 왕상 9:19). 이러한 곡식 저장의 방법들은 오늘날까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출처
http://m.lightlove.or.kr/core/mobile/board/board.html?num=1899&Mode=view&boardID=www70&page=211&keyfield=&key=&bCate=
요셉관련
https://m.cafe.daum.net/Fullgospelgk/EMwg/374?searchView=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