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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제공(蔡濟恭) 은 누구인가
【성 명】 채제공(蔡濟恭)
【생몰년】 1720(숙종 46)~1799(정조 23)
【본 관】 평강(平康) 채(蔡)
【자】 백규(伯規),
【호】 번암(樊巖), 번옹(樊翁)
【시 호】 문숙(文肅)
【저서․작품】 《열성지장(列聖誌狀)》, 《국조보감(國朝寶鑑)》, 《번암집(樊巖集)》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가족사항
부(父) 채응일(蔡膺一)
조부(祖父) 채성윤(蔡成胤)
증조부(曾祖父) 채시상(蔡時祥)
외조부(外祖父) 이만성(李萬成)
처부(妻父) 오필운, 권상원(吳弼運, 權尙元)
이력 및 기타사항
전력(前歷) 통덕랑(通德郞)
관직(官職) 옥당(玉堂) 영의정(領議政)
채제공 (蔡濟恭 1720∼1799)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또는 번옹(樊翁)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지금의 종로구 돈의동에 살았으며 영조 19년(1743)년 문과 정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폐위를 거론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후일 영조는 정조에게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요, 너의 충신이다."
라고 하였다. 1771년 호조 판서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그 후 평안도 관찰사·예조 판서를 지내고, 정조의 특별한 신임을 얻어 1793년 영의정에 오르는 등 10여 년간 재상으로서 왕을 보필하였다. 당파에 온건히 대처하여 천주교 박해가 확대되지 못하도록 한 공이 후세에 전해지며, 문숙(文肅)의 시호가 내려지기도 했다.
채제공은 숙종 46년에 태어나 영조 11년인 1735년에 16세로 향시에 급제하고 영조 19년인 1743년에 24세의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 무렵 영조의 탕평책이 어느 정도 시행되던 때였기에 남인계열이던 채제공은 그런 분위기에서 한림학사가 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영조의 특명에 의해서 29세에 한림벼슬을 거쳐 34세에는 충청도 암행어사가 돼 균역법의 폐단을 알아냈고 변방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국왕에게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벼슬은 1798년 79세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날 때까지 55년의 세월 동안 계속됐고, 영의정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라 영조·사도세자·정조의 3대에 걸친 명재상으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던 문신이 채제공이었다.
나라가 어지럽고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때는 언제나 어진 재상이 생각나게 마련. 오늘 우리의 현실도 그렇게 순탄하지 않은 세상이어서 어진 재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번암 채제공의 삶과 높은 경륜의 지혜를 살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번암은 애초에 충청도 홍주, 지금의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후손들이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살아가는 이유로, 고향인 청양읍에는 ‘상의사(尙義祠)’라는 조그만 사당이 있을 뿐 번암의 생가나 유적지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그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5번지가 대표적인 유적지다. 또 근래에는 후손들이 경기도 수원시에 번암의 유품이나 유물의 대부분을 기증해 수원시의 ‘화성역사박물관’에 보존되고 전시될 예정이니 바로 그곳이 번암의 삶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이다.
1776년 3월, 52년 동안 왕위에 있던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57세의 호조판서 채제공은 국장도감 제조에 임명돼 총책임을 지고 영조의 장례를 치렀고, 정조의 치세를 맞아 본격적으로 국왕을 보필하는 희대의 재상으로 온갖 역량을 발휘해 격화된 시·벽의 당쟁 속에서도 국정을 제대로 바로잡는 중신의 임무를 다해냈다. 정조 재위 24년 중 23년을 보좌하고 정조보다 1년을 앞서 영면한 번암은 인신(人臣)으로서는 최대의 예우와 최상의 대접 속에서 장례를 치르게 된다. 평생 동안 번암의 친구로 형조판서에, 홍문제학의 지위에,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세상에 큰 이름을 얻었던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 : 1723~1801)는 번암의 일대기로 정리한 ‘신도비(神道碑)’라는 장문의 글에서 그가 타계한 뒤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열거하고 있다.
1799년 1월18일 부음을 들은 정조는 식사를 폐하며 슬퍼했고, 바로 하교(下敎)해 자신과 채제공의 깊은 인연에 대한 말을 전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고 성복일(成服日)에는 승지를 보내 치제하고 시장(諡狀)도 없이 시호를 올리게 해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그해 3월28일 장례일에는 임금이 직접 뇌문(文:祭文)을 지어 각신(閣臣)으로 해 읽도록 했다. 신하에 대한 최대의 찬사이자 높은 칭송으로 세상에 없는 예우가 아닐 수 없었다. 파란만장한 번암의 일생은 500여 글자에 가까운 정조의 제문에 모두 열거됐으니, 다른 어떤 역사가의 평도 필요 없이 당대의 제왕이 내린 평가에 온전하게 그의 일생이 정리돼 있다.
3대를 섬긴 재상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선생집’. |
1720(숙종 46)~1799(정조 23).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또는 번옹(樊翁)
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종로구 돈의동에 살았으며 영조 19년(1743)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권
지 부정자(權知副正字)를 거쳐 수찬(修撰) ․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특히 그는 영조(英祖)의 총애를 받
았는데 1748년 한림회 권지(翰林會圈紙)에 그의 이름이 없자 영조가 직접 어점(御點) 2점(點)을 주어
소시(召試)에 응하도록 하여 뽑히도록 하는 등 특은(特恩)을 입었으며 일찍이 문재(文才)에 뛰어났음
을 알 수 있다.
영조 29년(1753)에는 호서 암행어사(湖西暗行御史)가 되어 균역법(均役法) 실시 이후의 민정(民情) 소
재와 염세부과에 대한 민정(民情) 등을 살펴 그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후 수찬(修撰) ․ 헌납(獻納) ․ 교리
(校理)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치면서 특히 세자(世子)의 학문정진에 대한 많은 건의를 하였다.
영조 34년(1758)에는 도승지(都承旨)로 있으면서 《열성지장(列聖誌狀)》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
해에는 동의금(同義禁)에 이어 대사간(大司諫) ․ 도승지(都承旨) ․ 대사헌(大司憲) ․ 경기 감사(京畿監
司) ․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하고, 영조 40년(1764)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
다. 뒤에 대사헌 ․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으나 강지환(姜趾煥)의 탄핵을 받아 한때 부사직(副司
直)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곧 이어 승지(承旨)로 복귀하고 도승지로 있으면서 어제(御
製)인 《집경당편집(集慶堂編緝)》을 편차(編次)하였다. 한때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외직으로 나간
일이 있으나 돌아와 영조 46년(1770)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취임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영조 47년(1771)에는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있으면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
다. 이후 평안 감사(平安監司) ․ 예조 판서를 지냈다.
정조 즉위년(1776) 형조(刑曹)와 병조 판서(兵曹判書),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이듬해 벽파(僻派)인 홍
상범(洪相範)의 모역(謀逆)사건 때는 창경궁(昌慶宮)의 수궁대장(守宮大將)으로 여러 차례 그들의 음
모를 분쇄하고 왕권을 지켰다. 그리고 정조 원년과 정조 2년에도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정조 4년
(1780)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권이 무너진 후 정치 ․ 경제 ․ 문화 ․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정조(正祖)를
도와 충실하게 보좌했다. 이후 규장각 제학으로 서명응(徐命膺) 등과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 편
찬에 참여했고, 이어 예조 판서 ․ 평안도 병마절도사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1788년 우
의정을 거쳐 이듬해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1790년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남인 계열(南人系列)인 동시에 신서파(信西派)의 영수로서
공서파(攻西派)와 대립하여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했으며, 이듬해 육의전(六矣廛) 외에 시전(市
廛)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박탈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실시했으나 진산사건(珍山事件)이
터지자 공서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792년 좌의정으로 복직했다. 그후 여러 차례 공서파의 탄
핵으로 삭직(削職) ․ 부처(付剔8 ․ 유배 등의 처벌을 받았으나 정조의 특별한 신임으로 등용되어 천주교
에 대한 온건책을 폈으며 정조 17년(1793) 영의정에 승서되었고 그가 상직(相職)에 거의 10년 재임 중
에는 천주교 박해가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순조 1년(1801)에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관작이 추탈(追奪)되었으나 1823년에 신원(伸老)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
저서로는《번암집(樊巖集)》이 있다.
채제공의 어린 시절 이야기
채제공의 당당한 기개
조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채제공은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당론과 당정을 없애고 나라를 새롭게 하는
데 힘쓴 유명한 재상으로 소년시절부터 돋보인 당당한 기개가 일화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채제공은 과거를
보기 위해 절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는데 집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먹을 양식조차 보내 주기가 어려웠습니
다. 그래서 함께 공부하던 부자집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지만 공부외에는 일체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
았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시 한수씩을 짓기로 했습니
다.
채제공은
'가을 바람 스산한 고목에서 매가 새끼를 치고, 차가운 달 눈덮힌 산에서는 범이 정기를 기른다.'
이 시에 숨어있는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 채제공의 엉터리 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재상은 깜작 놀라면서,
"너는 글공부를 헛했구나. 모욕을 당하고도 모르니…. 가을에 친 매 새끼는 매구실을 못하니 너를 비웃는 것
이고, 눈 덮인 산에서 범이 정기를 기름은 어려움 속에서 공부에 전념하는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하면서 혀를 찼습니다.
그 뒤 어느 날 채제공은 과거 볼 때 쓸 붓과 먹을 살 돈이 없어서 친구의 아버지인 그 재상을 찾아뵈었습니다.
평소부터 그를 눈여겨보았던 재상은 붓과 먹을 선뜻 내어 주며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채제공은,
"저희 집이 가난하여 비록 도움을 받으러 왔지만 제가 직접 물건을 들고 가야 합니까?"
라고 정색을 하며 물었습니다.
당시 풍속으로는 아무리 가난하여도 양반은 손수 물건을 들고 다니지 아니하는 것이었으므로 재상은 미안하
게 생각하고 하인을 시켜 보내 주었습니다. 채제공은 고마운 인사를 하고 막 물러서려는데 추위를 막으려고
홑저고리 등에 넣었던 개가죽이 그만 빠져 떨어졌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몹시 민망해 했으나 그는 조
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주워서 다시 넣고는 의젓하게 물러갔습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는
어린 채제공의 강한 의지에 모두 놀랐음은 물론입니다.
채제공선생 뇌문비 [蔡濟恭先生─文碑]
경기 용인시 역북동 산3-12. 경기유형문화재 제76호.
영의정 채제공의 장례일에 정조가 친히 지어 보낸 제문을 새긴 뇌문비이다.
비문의 맨 끝에 [乙未三月 二十六日]이라는 명문이 있어
1799년(정조 23) 3월 26일에 지어 새긴 것임을 알수 있다.
채제공선생묘 [蔡濟恭先生墓]
경기 용인시 역북동 산5. 경기기념물 제17호. 조선 정조 때의 재상 채제공의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