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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의 권력 탄생
메디치 가의 등장
메디치 가(Medici)는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의 밑에서 활약한 용맹스러운 기사 아베라르도(Abelardo)의 후손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로마(Roma)로 가는 길에 토스카나 지방(Toscana)에 들렀다가 피렌체 시(Firenze) 북쪽의 무젤로(Mugello)라는 지방에서 농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흉폭한 거인과 만난 아베라르도는 거인과 맞서 싸웠고, 마침내 그 거인을 죽였다. 격투 도중 그의 방패는 거인이 휘두른 철퇴에 맞아 여러 군데가 파였는데, 샤를마뉴는 아베라르도의 용기의 감복하여 그의 문장에 금색 바탕에 빨간 공, 즉 팔레(palle)를 그려 방패의 패인 자국을 기념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되었다. 이보다는 평범하지만 그럴 듯한 설에 의하면, 빨간 공은 약 또는 흡각을 나타내며,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메디치 가는 원래 의사나 약종상이었으며, 무젤로에서 피렌체로 이주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빨간 공은 전당포 업자의 상징인 동전을 뜻한다고도 한다.
어쨌든 메디치 가문이 근자에 피렌체에서 상당히 존경을 받으며, 도시와 더불어 발전하고 공직을 수행했다는 점만은 확실했다. 메디치 출신으로서는 아르딘고 데 메디치가 1296년에 최초로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e)가 되었다. 그의 동생인 구치오(Guccio) 역시 3년 뒤에 곤팔로니에레가 됐으며, 4세기 제작된 석관에 매장되어 세례당으로 알려진 세례자 성 요한 세례당(San Giovanni Battista)의 단색으로 된 팔각형 성당 외부에 안치됐다. 코시모의 고조 할아버지인 아베라르도 메디치가 1314년에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된 이후, 메디치 가는 쇠락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베라르도의 손자 필리노 디 콘테 데 메디치는 자손들에게 남긴 짧은 회고록에서 이러한 사태를 한탄했다. 그러나 그는 피렌체 시내에 작은 집 몇 채와 저택 두 채, 여인숙, 그리고 무젤로의 카파지올로 지역에 저택 반 채와 여러 집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메디치 가문은 꽤 유복하기는 했으나 과거처럼 부유하지는 못했으며, 사회적 위상도 마찬가지였다. "당신, 메디치 사람 같군요" 하고 말하면 모두들 두려워하던 시대는 이제 지난 셈이었다.
필리노의 사촌인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가 1370년과 1378년 2차례에 걸쳐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되면서 가문의 위상이 되살아났다. 1378년은 치옴피(Ciomp)의 봉기가 일어난 해이기도 했다. 살베스트로는 치옴피에 공감하는 편이어서 그들이 성공하던 시기엔 그의 명성도 덩달아 높아졌지만, 종당에는 치옴피가 파멸하면서 그도 같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 후 메디치 가의 이름은 불가피하게 평민들의 당과 연계됐으며, 지배층 중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이가 적지 않았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는 이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가 태어날 당시는 가문이 풍족하지 못했으며, 부친의 얼마 안 되는 유산은 미망인과 다섯 아들들에게 모두 나누어 졌다. 자수성가한 조반니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살베스트로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미누토 포폴로에 공감했으며 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매우 신중해서, 피렌체 시민들이 지나친 야심가를 불신한다는 걸 알고는 급속히 팽창하는 은행업으로 돈을 벌면서도 되도록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조반니는 친절하고 정직하며 이해심이 많고 인정이 있다는 평판을 즐겼지만, 그의 처세술에 능란한 예리한 시선이나 커다란 턱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을 간과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는 달변가는 아니었지만 재치가 엿보이는 대화를 이끌었으며, 그의 재치는 창백한 얼굴에서 풍겨나는 처량한 표정과 어우러져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었다. 아내인 피카르다 부에리(Piccarda Bueri)의 상당한 지참금 덕택으로 재산이 더욱 증대했지만 그는 아내와 두 아들들인 코시모(Cosimo)와 로렌초(Lorenzo)와 함께 비아 라르가의 수수한 집에서 살았다. 그후 두오모 광장의 저택으로 이사갔는데, 크기는 약간 더 컸지만 전혀 허식이 없었으며,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조반니는 다른 군소 상인들처럼 공적인 생활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에게는 피렌체의 저택과 시골 별장에 거주하면서 두오모 광장의 사무실과 현재의 메르카토 누오보 근방의 피아 포르타 로사에 있는 은행에서 집무를 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었다. 그러나 훗날 그의 손자가 언급하듯이, 피렌체에서 부유한 상인이라면 정부에 관여해야만 더욱 번설할 수 있었다.
조반니는 마지못해 1402년과 1408년, 1411년에 시뇨리아(signoria)의 프리오리직을 맡았으며, 1421년에는 곤팔로니에레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이외의 시간에는 정산소에서 조용히 일을 보면서 공공 재단이나 사적인 자선 단체에 폭 넓게 기부할 따름이었다. 그는 부유한 알비치 가문이 친지들이나 시뇨리아의 임명자들을 통해 정부를 통제하는 것도 묵과했다.
알비치 가문(Albizzi)이 피렌체를 통제하던 시기는 마침 도시가 상대적으로 번성하던 기간과 어우러져 그럭저럭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법령은 상당히 엄격한 편이어서 반대 의견은 모두 무시되고, 불평분자나 경쟁 세력은 체포, 추방, 재산 몰수, 심지어는 처형까지 당했다. 그 동안 피렌체의 영토는 점점 더 팽창해 나갔다. 알비치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에 피렌체는 피스토이아(Pistoia)와 볼테라 지방(Volterra)을 장악하고 1351년, 나폴리 여왕에게 구입한 프라토 지방(Prato)까지 흡수했다. 알비치 정권 이후, 피렌체 공화국은 아레초 지방(Arezzo)을 획득하고 1406년에는 피사(Pisa)를, 1421년에는 제노바(Genova)로부터 리보르노 지방을 매입하여 바다로 통하는 통로까지 확보하게 됐다.
이러한 항구 매입으로 공화국의 재산은 막대하게 증가했고, 경제적 기반인 모직과 피륙 교역에 새로운 자극이 됐다. 오랫 동안 피렌체는 토스카나의 구릉 지대와 잉글랜드 왕국(England)과 베네룩스 3국(Benelux)에서 엄청난 양의 모직을 수입해 당시 정제하고 염색해 수출해 왔다. 흑사병이 돌기 이전, 이 산업은 거의 3만 명의 수입원이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피륙과 모직 교역의 길드인 아르테 디 칼리말라와 아르테 델라 라나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길드들은 시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훌륭한 건축물도 많이 건립했다.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아르테 델라 라나가 위탁한 것으로, 그 결과 이 길드의 상징인 양 모양의 문장이 성당 벽을 장식하고 있다.
조반니 데 메디치는 피렌체에 모직 작업장 두 곳을 근거로 아르테 델라 라나의 회원이 되었으며, 주된 관심사인 은행업에 따라 아르테 델 캄비오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 길드의 권위는 1252년, 은행가들이 아름가운 금화를 발행하면서부터 점점 더 커졌다. 이 금화가 바로 그 유명한 피오리노 도로로, 국제적으로는 플로렌스 또는 플로린으로 알려지게 된다. 1430년대에 1 플로린의 구매력은 현재의 20 리라 정도였다. 연수입이 150 플로린 정도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었으묘, 시내의 아담한 집과 정원은 1년에 35 플로린 정도면 임대할 수 있었다. 괜찮은 저택은 1,000 플로린 정도였고 하인은 1년에 10 플로린에 구입할 수 있었다. 이 플로린 금화가 급속도로 신용을 얻고 유럽 전역에 통용되면서 플로린을 만든 피렌체 시와 은행가들도 큰 신임을 얻었다 1422년 경에는 200만 플로린이 통용되었으며 72명의 은행가들과 어음 중개인들이 메르카토 베키오 주변에서 사업을 했는데, 그 중 메디치 가가 가장 번성하고 팽창했다. 로마에는 이 전 세기에 조반니의 사촌 비에리 디 캄비오 데 메디치(Vieri di Cambio Medici)가 설립한 사무실이 있었으며, 베네치아(Venezia)와 제노바, 나폴리(Napoli)와 가에타(Gaeta)에도 지점이 있었다. 사촌 비에리의 견습 사원으로 사업을 시작한 조반니 데 메디치는 제노바에 신규 지점을, 로마에 2번째 지점을, 피사 정복으로 활발해진 무역 성장의 결과로 브뤼헤(Brugge)와 런던(London)에 거래처를 세웠다. 그러나 조반니가 은행가로서 성공한 것은 피렌체 시의 모직업이 번성해서라기보다는 로마 교황(Papa)과의 우애가 돈독한 덕분이었다.
신중하고 성실한 은행가라면 교황으로 선출된 발다사레 코사(Baldasare Cossa)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듯 했다. 나폴리 출신인 코사는 선정적이고 모험을 즐기며 한때 해적질까지 한 적도 있었다. 그가 성직에 입문하기로 결심하자 사람들은 그가 신에게 봉사하기보다는 모험을 추구할 것이라 믿었을 정도로 그의 삶은 모험 그 자체였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로마의 교황과 아비뇽(Avignon)의 교황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1409년, 피사에서 교회를 나누는 이 거대한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한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Gregorius XII)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Benedictus XIII) 모두를 폐위시키고 제 3자인 새 교황 알렉산데르 5세(Alexander V)를 선출할 것을 결의했으며, 이에 따라 새로 선출된 교황은 공의회를 즉시 폐회시켰다. 하지만 이전의 두 교황들이 공의회의 판결을 수락하지 않으면서 교황은 오히려 3명으로 늘어 났다. 알렉산데르 5세가 죽고 코사가 그 뒤를 이어 요한 23세(Ioannes XXIII)가 된 뒤에도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독일 군주 지기스문트(Sigismund)는 새로운 돌파구로서 콘스탄츠(Konstanz)에서 또 다시 공의회를 개최했으며 1414년 말, 요한 23세는 콘스탄츠로 가는 길에 메디치 은행의 대표를 재정 자문으로 동반했다.
당시 메디치 가는 바티칸의 은행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알베르티(Alberti), 리치(Rizi), 스피니(Spini) 등의 피렌체 은행가 가문들이 교항청의 재정 담당으로 활약했다. 조반니가 1386년에서 1397년 사이 로마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 사업량이 증대하기는 했으나 상대적으로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한 23세의 치세 동안에는 메디치 사람들이 교황청의 업무에 가장 밀착되어 있었다. 메디치 가문이 1만 두카트를 제공하여 코사에게 교황직를 매입하게 한 결과로 이 위치를 확보하게 됐다는 설도 있다. 확실히 코사는 볼로냐의 바티칸 사절로 재직하는 동안 조반니와 계속 교류하면서 많은 사업들을 하고 그를 '나의 매우 절친한 친구'라고 불렀다.
코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메디치 가는 교황청의 예산을 집행하는 재무성성과 매우 유리한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또한 그레고리오 12세를 지지하는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Ladislao)와 요한 23세 사이의 전쟁에서도 요한 23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요한 23세가 1412년 6월, 라디슬라오 국왕과 협정을 맺을 당시 협정의 결과로 나폴리 왕국에 지불할 9만 5,000 플로린을 확보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반니는 이런 류의 거래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교황청의 재정를 처리하면서 얻어지는 거대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는 마땅히 치뤄야 할 것이었다. 그 이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메디치 은행의 그 놀라운 수입들 중 반 이상이 로마 지점 두 군데에서 나온다는 걸 보면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메디치 가는 좌절을 겪는다. 1414년 10월, 콘스탄츠에 도착한 요한 23세는 이단, 성직 매매, 배반, 알렉산데르 5세 암살 뿐만 아니라 성직자의 신분으로 볼로냐의 200명 이상의 여인들을 유혹한 죄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았다. 요한 23세는 평민으로 변장해 간신히 콘스탄츠에서 도망쳤으나 또 다시 배신당해 공의회장으로 끌려 갔으며 공의회는 그와 베네딕토 13세 모두를 폐위시켜 대립 교황으로 명명하고 그레고리오 12세의 사임을 수락한 후,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Martinus V)를 선출했다.
병들고 가난해진 대립 교황 요한 23세는 하이델베르크 성에 3년 간 투옥되었다가 메디치 가문의 도움으로 3만 8,500 길더를 지불하고 풀려 난다. 대립 교황은 곧 메디치 가의 로마 담당자가 된 바르톨로메오 데 바르디(Bartholomeo de Bardi)를 동반하고 피렌체로 들어 왔으며, 조반니는 그를 받아 들여 그가 얼마 안 남은 여생을 편안히 지낼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사면을 부탁하여 투스쿨룸의 주교로 임명하게 했다.
당시 교황 마르티노 5세는 피렌체의 고지의 성모 마리아(Santa Maria Novella) 수도원에 2년 간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온화하고 단순했지만, 그와 메디치 가의 관계는 조반니의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대립 교황 요한 23세가 콘스탄츠에서 달아날 때 메디치 가의 수중에 들어 온 주교관이 문제가 되자 조반니는 파문 위협을 당하고 나서야 이를 교황청에 반환했다. 또한 성 유물에 대한 공경심이 대단했던 대립 교황 요한 23세가 유언서에서 자신이 언제나 지니고 다니던 세례자 성 요한의 손가락 하나를 메디치 가에 남긴다고 했을 때에도 갈등이 있었다. 후에 세례당에 안치된 대립 교황의 무덤 바닥에 '교황 요한 23세'라는 비문이 새겨지자 정통 교황인 마르티노 5세는 이것이 자신의 권위를 모욕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1402년 9월 9일, 마르티노 5세는 12명의 추기경들을 대동하고 피렌체에서 로마로 향했는데, 피렌체의 공직자와 길드와 대학교 대표, 제복 차림의 기수들이 큰 대열을 이루면서 포르타 디 산 피에르 가톨리니까지 교황을 수행했으묘, 교황은 그들 모두에게 신의 축복을 기원했다. 그 후 교황은 도시를 떠나 성 가지오 수녀원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그는 말에서 내려 수녀원의 수녀들을 모두 부른 후 한 명씩 축복하고 수녀의 베일 위로 그 이마에 입맞춤했다고 전해 진다.
조반니 데 메디치는 황금 박차를 달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영예로운 시민인 카발리에리의 자격으로 대열을 따라 갔으며, 교황이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은행과 교황청의 관계가 지나치게 경색되었다는 데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디치 가는 교황청의 사업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요한 23세 때 누렸던 각종 특권들은 더 이상 향유할 수 없었다. 이제 교황청의 신임을 얻은 이는 바로 메디치 가의 오랜 라이벌인 스피니 가였다. 그러나 1420년 경, 스피니 은행은 급작스럽게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하게 됐다. 곧 이어 메디치 은행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체가 되고 유럽 전역에서 가장 수익이 많은 가족 사업체로 발전했다. 이 점에서는 그 부친 뿐만 아니라 장남의 덕도 컸다.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는 초기 그리스도교도 신자들인 성 고스마스와 성 다미아노의 축일인 9월 27일에 1389년도에 태어났다. 성 고스마스와 성 다미아노는 의사들의 수호 성인들이었으며, 코시모는 자신이 의뢰한 그림이나 자신을 기념하는 그림에 이 성인들을 자주 등장시키게 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천사들의 모후 성모 마리아(Santa Maria degli Angeli) 수도원 학교에서 독일어와 프랑스어, 라틴어를 배우고 히브리어와 헬라어, 아라비아어도 대충 익혔다. 그 후 다른 부유한 피렌체 가문의 자제들과 함께 로베르토 데 로시(Roberto)에게 수업을 받았다. 로시는 당대의 주도적인 학자였으며 전통 있는 유복한 피렌체 가문 출신이기도 했다. 로시의 통찰력 있는 지도와 그의 중년 때까지 계속한 천사들의 모후 성모 마리아 수도원의 토론 모임 덕택으로 코시모는 고전 학문과 고전적 이상을 존중하고 인간의 삶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인문주의자가 된 것이다.
코시모는 자기 주변의 인문학자들처럼 박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피렌체인들을 전반적으로 무시하면서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돈에 환장한 장사꾼에 불과하며 고귀한 일은 할 줄 모르는 미천한 인간들이라고 격하하던 교황 비오 2세(Pius Ⅱ)조차도 코시모가 매우 교양이 풍부한 지식인이며 다른 보통 상인들보다는 더 학식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가 어려서부터 수집해 온 고전 원고에 대해 그보다 더 폭 넓은 지식을 가진 피렌체인은 거의 없었으며, 공중 생활에서 인문주의자의 이상의 중요성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진 이도 없었다. 코시모는 인문주의자들이 주로 배우는 수사학 등의 학문들을 완전히 섭렵하지는 못했으나, 이러한 학문들에 박식한 자들이 피렌체 사회에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이러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와 출신 배경이 비슷했다. 코시모가 주변의 인문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부친의 권고에 따라 되도록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코시모는 시내 거리를 걸어 다닐 때에도 시종 1명만 대동했으며 언제나 수수한 복장을 하고 노인들에게 길을 양보했으며 행정 관리들에게 극도의 예의를 갖추었다. 그는 언제나 다른 부유한 가문의 자제들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했다. 1428년, 산 크로체 광장에서 열린 마상 대회에서 팔라 스트로치 가의 자제인 로렌초는 승리자의 월계관을 받았지만, 코시모나 그의 가족들은 아무도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거나 사업상의 조언을 구하면 그는 조용히 신중하게 경청하고는 마치 우정을 거부하듯이 퉁명스러울 정도로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그를 좋아하고 신뢰했다. 코시모가 노년기에 접어 들면서 그의 창백한 표정이 마치 냉소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의 짤막하고 애매모호한 논평이 더욱 비난이나 조롱을 뜻하는 것처런 들리긴 했어도 그의 태도에는 경외감보다는 애정을 불러 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코시모는 20대 초반에 콘테시나 데 바르디(Contessina de Bardi)와 결혼했다. 콘테시나는 메디치 은행의 로마 지점의 코시모의 부친의 동업자인 조반니 데 바르디(Giovanni de Bardi)의 장녀였다. 피렌체에서 바르디 가(Bardi)는 오래 된 가문이었으며 한 때 꽤 부유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페루치 가(Ferrucci)와 아치아이우올리 가처럼 바르디 가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Edward Ⅲ)나 나폴리 왕 로베르토에게 빌려 준 돈을 되돌려 받지 못해서 궁지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콘테시나는 지참금을 넉넉히 마련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바르디 저택은 가지고 올 수 있었다. 바르디 저택은 바르디 가가 전부 소유한 적도 있었던 비아 드 바르디에 위치한 저택이었다. 코시모 부부는 이 저택으로 이사를 갔으며, 곧 이어 각 방들에는 메디치 가의 표상이 눈에 띄지 않게 장식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저택에서 장남인 피에로(Piero)가 태어난다.
콘테시나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까다로우며 참견하지 좋아하는 여자였던 것 같다. 또한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유능하며 쾌활하고 가정적이며 비사교적이었다. 손녀딸들보다 훨씬 더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녀는 피렌체의 다른 아내들처럼 남편의 서재에 출입할 수 없었다. 코시모는 콘테시나를 꽤 좋아했으나 푹 빠지는 형은 아니었고, 아내와 오래 떨어질 때면 가끔씩 편지를 쓰면서 평정심을 유지했다.
코시모는 3년 이상 로마 지점을 경영하면서 가끔씩 피렌체를 방문하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시간을 티볼리(Tivoli)에 있는 저택에서 보냈다. 여기에서 막달레나(Magdalena)라는 하녀가 그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는데, 베네치아에서 그의 대리인은 이 하녀를 데리고 오면서 순진한 처녀이며 병이 없고 나이는 22세라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코시모는 이 하녀에게 호감을 느껴 동침하고 아들을 하나 얻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에 따라 이 소년은 카를로(Carlo)라는 세례명을 얻고 콘테시나의 아들들과 함께 양육되었으며 정통적인 고전 교육을 받았다. 체르케스인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소년은 사제 서품을 받고 부친의 영향으로 교황 사절이 된다.
코시모는 사업상 로마에 체류하면서 가문의 경쟁자들이나 피렌체의 적대국들의 질시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렌체에 돌아온 이후, 그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미누토 포폴로에 대한 지지도로 인해 알비치 가의 의혹을 새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언제나 신중하고 사려 깊었던 코시모의 부친은 평생 겸손과 중용을 유지했다. 그는 알비치 가문이 같이 손을 잡아 공화국에 대한 과두 정치의 영향력을 강화하자고 제의했을 때 협조를 거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비치 가의 적대자들이 과두 정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데 힘을 합치자고 하자 이번에는 사업상 다른 일을 할 여력이 없어서 정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알비치 가문이 새로운 유형의 수입세와 재산세를 도입해서 악명 높은 피렌체의 세금 제도를 개혁하자고 했을 때에도 그는 극도로 신중하게 이 제안에 수긍하면서도 너무나 많은 조건들을 내걸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그의 태도는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코시모의 부친은 일생동안 이런 식으로 질시당할 틈을 주지 않으면서 책임져야 할 약속을 피해 갔다. 또한 임종의 순간에도 두 아들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면서 부자와 강자는 거스르지 말고, 빈자와 약자에게는 항상 자비로울 것을 권고했다.
"충고를 한다는 표시를 내지 말고 신중하게 네 의견을 제안하거라. 시뇨리아 궁전에 갈 때는 신중하게 행동해서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환되면 그 쪽에서 요구하는 바를 행하고 절대로 자존심을 내세우지 말아야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송이나 정치적인 논쟁을 피하고 언제나 대중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거라."
자신의 때가 되자 코시모도 자신의 아들들에게 이와 비슷한 충고를 했다. 그러나 그는 외향적인 겸손과 조심성에도 불구하고 부친보다 훨씬 더 야심이 많았으며, 자기 재산을 다른 용도에 사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알비치 가는 이러한 그의 행보를 의혹과 관심의 눈으로 주시했다.
알비치 가의 적들
알비치 가의 수장인 리날도 데 메세르 마소(Rinaldo de messere maso)는 거만하고 충동적이며 보수적이었다. 그는 군인과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는데, 과두 정치의 권력을 유지하고 필요하다면 소수파 길드의 수를 반으로 줄이는 한이 있어도 경쟁자들을 격파하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미 시뇨리아를 부추겨 밀라노(Milano)와 끝나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그는 1429년, 루카(Lucca)와의 전쟁을 촉구했다. 루카 시가 피렌체 시의 오랜 숙적이자 실크 산업의 주된 경쟁자인 밀라노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루카를 공격하자는 의견은 이미 전 피렌체에 팽배했다. 산악 지대에서 해안 지대까지 펴져 있는 루카 시의 영토가 수없는 무력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난공불락이라는 코시모 자신도 나중에 애통해 하고는 했다. 그러나 코시모는 지금이 바로 전쟁의 적기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긴급 위원회의 전쟁의 10인들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도 자신이 마지못해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고, 알비치 가의 지휘 하에서라면 피렌체군이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식의 견해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경계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루카는 밀라노의 원조를 요청했고 이에 필립보 마리아 비스콘티 공작(Philipo Maria Visconti)은 루카에 용장(콘도티에리)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장군을 급파했다. 피렌체 용병은 스포르차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시뇨리아는 5만 플로린의 뇌물로 그를 매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가 매수되자 밀라노 공작은 다른 장군인 니콜로 피치니노를 파견했고 전쟁의 10인들은 세르키오 강의 물 줄기를 바꿔 홍수를 야기해 루카 시의 성벽을 모너뜨리자는 복잡한 전략을 짜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비판자들의 예언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1403년 가을, 코시모는 이렇게 불리하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을 더 이상은 수행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른 이에게도 전쟁 위원회에 참여할 기회를 주자고 주장하면서 피렌체를 떠나 베로나로 갔다.
코시모가 없는 동안 그의 적들은 코시모가 엄청난 재산을 이용해 공화국을 침략할 장군을 고용하고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을 꾸민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런 소문을 정말로 믿은 자들도 잇었지만, 대개는 이 소문이 지나치게 성공한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이라고 봤다. 불만에 찬 그란디와 마그나티 대표들이 자신들이 계획한 코시모 공격 작전에 지지를 구하고자 피렌체 내에서 가장 신망 있는 정치가 니콜로 다 우차노(Niccolo da Uzzano)를 찾아 갔다. 니콜로는 비아 드 바르디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대표단을 맞아 들였다. 그는 신중하고 비관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정중하게 경청했다.
만약 메디치 가를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로 알비치 가의 권력이 더 강력해져서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처럼 독재자가 될 지도 모르는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그들을 제거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두 가문의 지지자들 간에 알력이 생겼을 때 알비치 가가 이길 지도 확실하지 않다.
과거의 호의에 감사하는 미누토 포폴로는 여전히 메디치 가의 편이었다.
메디치 가에는 또 다른 동맹자들도 있었다. 도시에서 가장 명망 있는 가문인 토르나부오니 가(Tornabuoni)와 포르티나리 가(Portinari)가 여러 사업상의 거래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 부채나 선물의 부담을 지고 있거나 결혼으로 사돈 관계를 맺은 가문도 있었다. 예컨대 바르디 가는 콘테시나와 코시모의 결혼으로, 카발칸티 가(Cavalcanti)와 말레스피니 가는 동생 로렌초와 지네브라 카발칸티(Ginevra Cavalcanti)의 결혼으로 맺어져 있었다. 더욱이 유대가 긴밀한 인문학 모임에서 코시모에겐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리날도 델리 알비치는 비록 편협하지는 않았지만 신 고전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해로운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적이 많은 편이었다.
니콜로 니콜리(Niccolo Niccoli)와 카를로 마르수피니(Carlo Marsuppini), 포지오 브라치올리니(Poggio Bracciolini), 레오나르도 부르니(Leonardo Bruni), 암브로시오 트라베르사리(Ambrosio Traversari) 모두 코시모의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각기 피렌체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모두들 하나같이 비범했으며, 그 중 가장 연장자인 니콜로는 피렌체의 부유한 모직상의 아들로 준수한 용모에 심미안을 지난 자였다. 상당히 까다롭고 멋쟁이에다가 지나칠 정도로 예술 애호가였던 그는 상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유산으로 저택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서적과 원고, 메달, 동전, 음양각의 보석, 도자기 등을 수집했다. 그래서 피렌체를 방문하는 저명 인사들 가운데 그의 수집품들을 감상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그가 수집을 시작한 것은 그보다 어린 코시모가 아직 어린이였을 때였다. 니콜로의 영향을 받은 코시모는 성장하면서 수집을 시작했다. 이 둘은 팔레스타인을 방문해 헬라스의 원고들을 발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지오반니는 이러한 목적의 여행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아들을 니콜로의 공상으로부터 멀리하기 위해 은행으로 보냈다.
사실 니콜로의 고대 유물에 대한 열정은 거의 광적이었다. 그는 결국 800권의 장서들을 수집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양이었다. 그는 영지를 팔고 코시모에게 돈을 빌리면서 죽는 날까지 서가에 새 책들을 추가했다. 그러면서도 니콜로 자신은 평생 한 권의 책도 저술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까다로운 취향을 만족시킬 만한 완벽한 글을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초서체를 발전시켜 필경사들이 원고를 빠른 시간 안에 단정하고 우아하게 베껴 쓸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이 훗날 초기 이탈리아 인쇄업자들이 사용하던 이탤릭체의 기본이 된다. 그는 피렌체의 방문객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으로, 사람들은 그가 품위 있게 거리를 다닐 때면 그의 위엄 있는 모습을 지켜 보곤 했다. 또한 여행객들은 그가 매우 퉁명스럽고 거만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니콜로가 유일하게 경외한 사람은 자신의 정부였다. 그가 자신의 형제로부터 인계받은 이 여자는 다른 가족들에겐 대단한 골칫거리였다. 하루는 니콜로의 두 형제들이 이 여자의 건방진 성미의 열을 받아 그녀를 집 밖으로 쫓아내 채찍질을 했는데, 쥐가 덮에 걸려 비명을 내는 소리조차도 참지 못하는 민감한 귀를 가진 니콜로는 이 여자의 비명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니콜로의 원고들 중 대다수는 친구인 포지오 브라치올리니가 발굴한 것이다. 포지오는 학자, 웅변가, 수필가, 역사가, 풍자가, 그리고 재미 있고 외설스러운 이야기 모음집의 저자로서 그 명설을 후대에까지 떨쳤다. 1380년, 피렌체 근교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약종상의 아들로, 동전 몇 닢만 달랑 들고 아직 소년이었을 때 도시로 올라 와 스투디오 피오렌티노에 간신히 자리 하나를 얻었다. 1321년, 교황이 볼로냐에서 파문된 이후 세워진 이 대학은 대학 이사였던 코시모가 문법, 법학, 천문학, 의학 등의 기존 학문들 외에도 윤리학, 수사학, 시론을 가르치는 교수를 고용하자고 촉구하면서 더 확장되었다. 포지오는 법학을 공부하고 공증인 길드에 입회했으며, 교황청에서 교황의 서신을 쓰는 일을 맡게 되었다. 또 요한 23세와 함께 콘스탄트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몇 년 후에는 코시모와 함께 오스티아 지역을 고고학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재치가 넘치고 매력적이며 쾌활하고 지성적이었으며, 도움이 필요하면 수도자에게도 서슴지 않고 뇌물을 주었다. 독일과 프랑스, 스위스에서 니콜로의 원고를 찾는 대리인 역할을 훌륭히 해냈으며, 온갖 보물들을 발굴하고 오랫동안 사장되어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걸작들을 온전하게 복원해 냈다. 또한 스위스의 한 수도원 부속 도서관에서 탑의 맨 아랫 부분에 있는 지하 토굴에서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데 레룸 나투라(De rerum natura)>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의 역사서, 아피치우스(Aficius)의 요리서, 퀸틸리아누스(Quintilianus)의 로마 교육에 대한 중요한 작품들을 발굴해 냈다.
포지오는 구입할 수 없는 문서의 경우는 정교하면서도 읽기 쉽고 여유 있는 글씨체를 이용하여 필경했는데, 그가 사용한 필체는 그 당시에 만연하던 딱딱하고 엉성한 고딕체가 아니라 11세기의 카롤링거 왕조풍의 서체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포지오의 필체를 보고 자신의 책 모두를 이와 비슷한 식으로 필경시키기로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필체는 초기 이탈리아 인쇄업자들의 사랑도 받았다. 니콜로의 초서체가 이탤릭체의 기초가 되었듯이 포지오의 필체는 로마자(Roman alphabet)의 기초가 되었다. 포지오의 필체 안에 근대의 필기체와 인쇄술이 녹아 든 셈이다.
포지오는 학문에 전념하느라 인생을 즐기지 못한 여느 인문학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겼으며, 농담하고 연애하는 일도 아주 좋아했다. 그의 이상적인 삶은 아름다운 여자들 사이에서 일하는 것이어서, 한 번은 묘비명을 필사하다가 자신을 쳐다 본 두 아리따운 여자들 때문에 일을 중단한 적이 있었다고 니콜로 니콜리에게 고백한 적도 있었다. 포지오는 작업 중에도 긴 뿔이 달린 물소와 함께 있느니 몸매가 늘씬한 여인들과 같이 있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여러 명의 정부들과 14명의 사생아들이 있었는데, 사업 감각과 교황청과의 관계를 잘 이용하여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잘 돌볼 수 있었다. 그런 그도 결국 나중에는 결혼할 마음을 먹고 물론 18세의 꽃다운 여인과 결혼했다. 신부의 상당한 지참금으로 저택을 마련하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6명의 아이들을 더 얻었다.
코시모의 인문학 교우들 가운데 하나인 레오나르도 브루니 역시 포지오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소년 시절에 피렌체에 왔다가 스투디오 피오렌티노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교황청에서 일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브루니는 포지오보다는 더 성실하고 열심이었으며, 경계심이 많았다. 한 인문학자의 평에 따르면 브루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변가였다고 한다. 또 니콜로 니콜리가 정부를 둔 것을 강력하게 비난했으며 포지오를 아주 타락한 죄인으로 여겼다. 그는 글 쓰기와 번역에 몰두하면서 피렌체 시민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했다. 브루니는 시민들에게 피렌체를 과거의 모든 공화국들의 후계자로 인정하라고 권고했으며, 대법관이 된 이후 그 자리를 굳게 고수했다. 그의 명성이 드높아지면서 그 장엄한 자태에 에스파냐 대사가 무릎을 꿇기도 했다.
암브로시오 트라베르사리는 브루니처럼 존경받는 위치였으나 그보다 훨씬 더 겸손하고 성인 같아서 코시모가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로마냐 출신인 그는 몸집이 작은 성직자로 절대로 육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들은 로마냐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아 나중에 주교 대리에까지 오른다. 그는 독학으로 히브리어를 배울 정도로 굉장한 학자였으며 헬라스어를 라틴어로 손쉽게 번역할 수 있었다. 헬라스어를 매우 세련된 라틴어로 번역하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 지 피렌체에서 그 누구보다 글씨를 빨리 썼던 니콜로조차 그의 번역 구술을 받아 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코시모는 천사들의 모후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 있는 트라베르사리의 방을 자주 방문했는데, 알비치 가와 충돌하면서 그의 굳은 우정에 크게 감사하게 된다.
카를로 마르수피니 역시 천사들의 모후 성모 마리아 수도원을 자주 들렀다. 아레초의 귀족 출신인 학자였던 그는 대학교서 수사학과 시학을 강의했다. 그는 코시모의 인문학 교우들 중 가장 어렸다. 그러나 이미 학문을 인정받은 상태였으며, 유명한 강의를 하면서 기본의 헬라스와 라틴 저자 모두를 인용하려 한 적도 있었다. 또한 브루니보다는 글을 적게 썼지만 니콜로처럼 까다롭지는 않아서 헬라스의 라틴어 번역본을 한두 권 썼고 그 밖에도 경구 시와 시 몇 편, 그리고 코시모의 모친의 장례 연설문을 썼다.
대학교에서 마르수피니는 동년배인 프란체스코 필렐포(Francesco Filelfo)라는 자와 경쟁 관계였다. 톨렌티노에서 태어난 필렐포는 약관이 되기도 전에 이미 고전학자로서 명성을 얻어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주재원에서 외교직을 담당했다. 필렐포 역시 니콜로의 초청으로 피렌체에서 강의를 했다. 니콜로는 처음엔 필렐포의 다재다능함과 정력을 몹시 좋아했으나 얼마 후, 이 부산한 청년을 불러 들인 것을 후회했다. 필렐포는 허영심이 많고 무례하며 악의적이었다. 코시모의 친구들은 그를 피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카를로와 마르수피니와 다툴 때에도 마르수피니의 편이 되었다. 그 후 필렐포는 알비치 편이 되어 독설가로서의 면모를 유감 없이 발휘했고, 코시모를 가장 악질적으로 비난한다. 그렇지만 다른 인문학자들은 여전히 코시모의 친구들이었으며, 무엇보다 니콜로 다 우차노가 살아 있는 한 그는 알비치 가의 모략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니콜로는 알비치 가의 정치관에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메디치 가를 항상 존중했고 코시모 부친의 장례식에서는 눈물까지 흘렀다.
1432년, 니콜로가 죽자 메디치 가에 대한 알비치 가의 음모는 본격화 됐다. 필렐포가 만든 악성 루머들이 피렌체 시가지를 난무했다.
소문에 따르면 코시모의 행색이 허술한 것은 나쁜 방식으로 긁어 모은 재산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서였다. 또 사람들을 동정하는 것은 계산된 이중성에 불과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선동했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이나 두려움 때문에 정직하게 행동한다고 코시모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가 교회나 건축 기금에 기부하는 것도 순전히 위선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그가 왜 자신이 자금을 조달한 건물에 메디치 가의 문장을 장식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그는 심지어 화장실에도 문장을 새기지 않는가!
마침내 1433년 초, 코시모 저택의 문은 피로 물들었다. 코시모는 또 다시 피렌체를 떠나 베로나에 가서 무젤로 지방의 일 트레비오에 있는 자기 영지에서 수개월 간 머물렀다. 그 동안 그는 피렌체 은행의 막대한 재산을 로마와 나폴리 지점으로 신중하게 이동시켰고, 주화 꾸러미들을 산 미니아토 알 몬테의 성 베네딕토 수도회와 산 마르코의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게 맡겼다.
코시모가 이렇게 시골로 떠나 있는 동안 리날도 델리 알비치는 9월에 구성될 새로운 시뇨리아를 조직적으로 준비했다. 선출된 9명의 프리오리들 중 7명은 알비치 가 지지자였으며, 나머지 2명인 바르톨로메오 스피니와 야코포 베를린기에리만이 메디치 가 지지자였다. 한편 리날도는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된 베르나르도 구아다니에게 직위에 오를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부채를 탕감해 주기도 했다.
9월 첫째 주, 무젤로에 머무르던 코시모는 구아다니로부터 당장 피렌체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맞서기로 했다.
코시모가 돌아온 날은 1433년 9월 4일이었다. 이 날 오후, 콘팔로니에레를 만나기 위해 시뇨리아 궁전으로 갔지만 정작 구아다니는 그를 회피하면서 별다른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구아다니는 코시모를 서둘러 오게 한 중요한 결정은 3일 후, 열리는 시뇨리아 회의에서 논의될 예정이며 그 때까지는 근자에 떠도는 소문을 해명할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
곤팔로니에레와 헤어진 코시모는 친구라고 믿었던 프리오리를 찾아가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로 애매한 태도를 취할 따름이었다. 코시모는 돈을 더 이체하기 위해 은행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일을 다 처리하고 나서는 별 수 없이 시뇨리아 회의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9월 7일 아침, 시뇨리아 궁전에 도착했을 때 회의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코시모는 수비대장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 굳게 닫힌 위원회실 문을 통과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작은 감방에 수감되어 자신이 곧 판명될 충분한 근거로 체포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틀 후, 그의 머리 위 종루에서 커다란 바카가 울리고 시민들은 광장으로 소집됐다. 낮고 애처로운 종 소리가 울려 퍼지자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운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비치 가의 사병들이 광장 입구에 버티고 서서 메디치 가의 지지자이거나 지지자로 의심되는 자들의 입장을 모두 막고 있었다. 감옥의 창문에서 이를 지켜 보던 코시모는 겨우 23명만이 프리오리가 서 있는 석조 테라스 린기에라에 모였다고 말했다. 노타이오 델레 리포르마조니는 이 얼마 안 되는 시민들에게 시뇨리아의 이름으로 공화국의 이익을 위해 개혁을 주도할 200명의 발리아들을 구성하는 데 동의하는지 물었다. 이에 그들은 승인했으며 그 결과 발리아들이 임명됐다.
비록 리날도가 정부를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보였지만, 발리아들은 호락호락 코시모의 사형을 승인하지 않았다. 발리아들 간의 격렬한 토론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코시모의 사형을 지지하는 파와 추방, 심지어는 석방을 제안하는 파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알비치 가의 주장에 따라 극단적으로 치우치기를 꺼린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수천 명의 피렌체 시민들이 상황적으로는 겁먹고 있지만 메디치 가에 대한 신임은 여전했던 터라 과격하게 대응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코시모를 체포한 사실로 인해 국제적으로도 강력한 항의가 들어 오고 있었다. 메디치 은행의 고객인 페라라(Ferrara) 후작은 이미 코시모의 대리인 자격으로 중재 역을 맡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코시모에게 빚을 진 베네치아 공화국 역시 코시모의 석방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코시모는 그들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더라도 피렌체에 와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형 지지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날도는 코시모의 오랜 지우인 암브로시오 트라베르사리의 방문도 받았다. 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Eugenius IV)의 대리인이었다. 2년 전에 교황 마르티노 5세의 뒤를 이은 신임 교황은 베네치아 상인의 아들로서 메디치 은행의 매우 영향력이 큰 고객이었다.
이 무렵 리날도는 코시모의 지지자 2명을 고문한 결과 코시모에게 반역 죄를 부과할 수 있었다. 둘 중에 하나는 유명한 공증인이자 시인인 니콜로 티누치로 고문자들에게 코시모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외부에 원조를 요청하려고 했다고 자백하도록 강요당했다. 트라베르사리와 베네치아 대사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피렌체인들도 이 자백을 믿지 않았다. 사실 리날도 또한 심복인 필렐포가 그렇게도 주장하던 사형보다는 추방 쪽으로 마음이 점차 기울었다.
코시모는 시뇨리아 궁전의 감방에서 트라베르사리를 비롯한 몇몇 방문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독살 위험을 구실로 바르디 저택에서 식사를 조달받을 수는 있었지만, 전갈을 보내거나 은행과 교류하는 것은 금지당했다. 음식물 조리와 운반, 배식 과정이 모두 철저하게 관리됐으며, 면담할 때는 경비병이 가까운 거리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경비병 페데리코 말라볼티는 코시모에게 동정적이었고, 그의 감방으로 여러 전언들과 뇌물들이 오고 갔다. 가난한 곤팔로니에레였던 구아다니는 뇌물이 들어오자마자 즉시 1,000 플로린을 챙겼다.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뇌물을 먹은 구아다니는 몸이 아파서 더 이상 위원회에 참여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투표권을 마리오토 발도비네티에게 위임하지만 빈궁했던 그 역시 메디치 은행의 금고에서 뇌물을 받고 만다.
알비치 가는 메디치 은행의 주 고객인 외국의 저명 인사들과 메디치 가의 여러 신실한 동맹자에 맞서야만 했다. 더욱이 팔라 스트로치 등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중도파 인사들이 망명하면서 난관에 봉착했을 뿐만 아니라 무장 봉기의 가능성도 더욱 커지기만 했다. 코시모가 체포됐다는 소식에 동생 로렌초와 그 밖의 친척들이 무젤로에 몰려 들어 그를 석방을 위해 병사들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카파지올로에서도 메디치 가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군대가 결성되었다. 코시모의 친구인 네리 카포니를 통해 자금을 조달받은 니콜로 다 톨렌티노가 한 무리의 용병대를 이끌고 피사에서 라스트라로 이동했다. 더 진군하면 피렌체에 소요가 일어나 코시모가 암살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거기서 일단 정지했다. 그렇지만 그의 존재는 리날도가 그 지긋지긋한 죄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가능성을 포기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9월 28일, 코시모는 10년 간 파도바(Padova)로, 사촌 아베라르도는 10년 간 나폴리로, 그리고 동생 로렌초는 5년 간 베네치아로 추방한다는 판결을 언도받는다. 이들을 포함한 그의 가족들 모두(비에리 가문은 예외)는 그란디 행으로 선고받았고 동시에 피렌체에서 영원히 공직을 맡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피렌체에서 메디치 파 지도자였던 푸치오(Fucio)와 조반니 푸치(Giovanni Pucci)는 10년 간 아킬라로 추방된다. 한편 시뇨리아 회의에서 알비치 가의 노선을 따르지 않은 프리오리 2명은 수익성 높은 보직 대신 한직에 머무르는 불이익을 당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덕성을 갖추었으나 담력은 없었던 코시모는 시뇨리아에 소환되어 꽤 굴육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렇게 소환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자신이 시뇨리아 궁전에 좀처럼 들르지 않았고, 공직에 임명되면 늘 사양했으며, 토스카나 지방의 시국들을 선동해 피렌체 정부에 저항하기는 커녕 이러한 시국들을 정복할 병사들을 모집하는 일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제가 파도바로 가야 한다고 여러분들이 결정하셨으니 가겠습니다. 트레비시아 지방 어디라도, 그 밖에 아라비아처럼 우리와 관습이 다른 그 어디라도 가라고 하신다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명령에 의해 제게 닥친 이 재난을 저는 은혜로, 저와 제 제산에 대한 은혜로 받아 들입니다. 제 곤경으로 우리 도시에 평화와 행복이 찾아 올 수만 있다면 전 그 어떤 어려움도 능히 견뎌낼 수 있습니다. 시뇨리아시여, 제 소원은 오직 이왕 제 목숨을 살려 주시기로 하셨으니 사악한 자들이 제 목숨을 앗아가 여러분들께 치욕을 안기는 그런 불미스러운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유념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광장 밖에서 손에 손에 무기를 들고 제 피를 간절히 열망하는 자들이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도록 조처해 주십시오. 제 고통은 작을 것이나 여러분들은 영원토록 불명예를 뒤집어 쓰게 될 것입니다."
폭도들의 통제할 수 없는 폭력을 바라지 않기는 시뇨리아 측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죄수가 피렌체에서 밤새 몰래 산갈로 항을 거쳐 수송되게 조처했다. 코시모는 무장 경비대에 의해 국경까지 호송되었으며, 그 곳에서 페라라를 거쳐 파도바로 떠났다.
추방자와 지배자
코시모는 유배 길에서 비난보다는 칭송을 더 많이 들었다. 페라라에서 후작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파도바에서도 저명하고 부유한 유배객을 맞게 되어 신이 난 권력층으로부터 영빈 대우를 받았다.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코시모가 투옥되어 있는 동안 파산시키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 데도 그의 재산은 여전했다. 훗날 리날도는 친지들에게 권력자에게는 손가락 하나도 쳐들지 말거나 아니면 일을 확실하게 처리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리날도는 자신의 정적을 얼마 간 피렌체에서 제거할 수는 있었지만, 이제 자신의 위상이 흔들리는 사태로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코시모는 파도바에서 2달 간 지내다가 베네치아에 유배된 동생과 같이 지내는 걸 허락받고, 성 지오르지오 마지오레 수도원에 편안하게 정착했다. 그는 이 수도원의 수사 출신인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이 곳에 애착이 많다는 걸 알고 새 도서관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다. 또한 자신이 위임했던 피렌체의 건축 작업이 잠정적으로 중단되면서 그를 따라 동행한 건축가 피켈로초 미켈로치에게 건축 설계를 맡겼다.
코시모는 베네치아에 머무르면서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피렌체의 정세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1433년 2월 초, 알비치 가의 독재를 비판했던 달변가 아뇰로 아치아이우올리가 체포되어 10년 간 코센차로 추방됐다. 그리고 몇 주 후, 코시모의 먼 친척인 마리오 바르톨로메오 데 메디치 역시 알비치 가의 정책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10년 간 추방되었다.
코시모는 이러한 사태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면서도 신중하게 처신했다. 그는 피렌체에서 알비치 가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으며 로마와 베네치아 모두 메디치 가의 복귀를 바란다는 것을 알았다. 또 메디치 가문이 망명한 이후 그 어떤 은행가도 정부에 자금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았다. 1434년 늦여름 무렵, 밀라노 용병대가 피렌체군을 이몰라에서 물리친 후 반 정부 감정이 더욱 격화되면서 메디치 가의 지지자들 대부분이 시뇨리아로 선출되었다. 이들 중 니콜로 디 코코가 곤팔로니에레가 되었다.
니콜로 다 우차노 사후, 과두 정치의 중용파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높고 존경을 받는 거부 팔라 스트로치만 반대하지 않았다면 리날도는 이 새로운 시뇨리아 회의를 방해하기 위해 무력이라도 동원했을 것이다. 대신 리날도는 의원들 가운데 그 누구라도 메디치 가에 대해 입이라도 벙긋 했다가는 당장 시뇨리아 궁전에서 쫓겨 난다는 동의를 받고 의원들의 견해를 수용했다. 그러나 시뇨리아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리날도가 9월에 잠시 피렌체를 떠난 틈을 이용해 소환을 발급하고, 그가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시뇨리아 궁전으로 소환했다. 리날도는 자신도 코시모처럼 투옥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직 팔라 스트로치와 조반니 구이치아르디니, 리돌포 페루치, 니콜로 바르바도리 등 몇몇 저명한 시민들이 자신을 지지하리라고 믿었다. 그는 소환을 무시하고 자신의 저택으로 가 남아 있는 지지자들을 모두 소집했다. 또한 자신의 500명의 병력을 지휘하는 경비대장에게 우선 시뇨리아 궁전 맞은편의 성 피에르 스케라조 성당을 점령하고 시뇨리아 궁전을 점령할 채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시뇨리아 궁전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투구를 채울 만큼 많은 돈을 주고 매수하여 시뇨리아에서 문을 잠그라고 명령하더라도 자신의 군대에게 문을 열어 주도록 시켰다.
9월 25일 아침, 리날도의 군대가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으나 시뇨리아 역시 무방비 상태는 아니었다. 그들은 군대를 광장으로 투입하여 거리를 행진하면서 군수품을 거두어 궁전이 포위됐을 경우 저항할 준비를 했다. 그 후 그들은 문을 닫아 잠그고 인근 지역에 도움을 요청했다. 원군이 조성될 시간을 벌기 위해 프리오리 2명을 보내 알비치 가와 협상을 벌였으며 마침 피렌체에 체류 중이던 강력한 중재자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은 자신의 선임 교황인 마르티노 5세가 속했던 콜로나 가문과 격돌한 후 광폭한 폭도들에 밀려 로마를 떠나 피렌체의 고지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 피신해 있었다. 그는 메디치 가에 동정적이었으며, 메디치 가의 자산을 배경으로 한 피렌체의 강력한 정부와 베네치아가 연합하여 로마로 복귀하려는 생각을 했다. 9월 26일 오후, 교황의 사절인 비텔레스키 추기경이 리날도를 찾아 갔고 그를 수도원으로 데려 와 교황과의 알현을 주선했다.
리날도의 상황은 점점 더 절망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성 아폴리나레 광장을 점령하고 바르젤로를 장악하는 선제 조처로써 모든 입구들을 차단하고 시뇨리아 광장을 공격하고 메디치 가와 메디치 가의 지지자들의 집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수많은 용병들이 돈보다는 약탈을 노리면서 도시 외곽으로 모여 들기는 했으나 매우 더뎠다. 이미 시내로 진군해 있던 리날도의 병사들은 점점 이탈하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은 그의 계획을 성사시키는 데 필수인 지오반니 구이치아르디니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한편 리날도라면 500명에 이르는 사병들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던 팔라 스트로치마저 변심하여 시종 2명만 대동하고 성 아폴리나레 광장에서 리날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든 다시 가 버렸다. 리날도의 주된 지지자였던 리돌포 페루치 또한 동요하기 시작해서 시뇨리아에 참석하라는 소환에 따라 그들과 성과도 없는 토론만 하고는 리날도에게 고지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서 교황과 대담할 것을 촉구했다.
리날도는 페루치와 바르바도리를 동행하고 무장한 지지자들이 무질서하게 그 뒤를 따르는 가운데 교황을 알현하러 갔다. 메디치 가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업 동업자이기도 한 마르텔리의 저택 근처에 다다랐을 때 그들의 진행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싸움이 벌어져 몇몇은 심한 상처를 입었으며, 마르텔리의 경비대가 모두 철수한 뒤에도 리날도는 병사들에게 마르텔리 저택을 약탈하는 대신 고지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 가자고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마침내 이런저런 불만들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수도원에 도착해 광장에 자리를 잡았지만 그들 모두 오래 기다리고 싶어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오래 기다린 자는 거의 없었다. 밤이 된 뒤, 리날도가 수도원에서 나왔을 때 광장에는 겨우 몇 명만 남아 있었다. 이제 그는 완전히 사기가 꺾여 있었다. 풍채와 태도가 당당하고 논리적이던 교황은 시뇨리아, 더 나아가서는 교황의 요구에 더 이상 저항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라며 리날도를 회유했다. 그는 알비치 가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주겠다는 교황의 말에도 별로 확신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 왔다.
그로부터 이틀 후, 시뇨리아 궁전의 거대한 바카가 울리자 시민들이 파를라멘토로 모여 들었다. 군대에 둘러 싸인 광장으로 사람들이 모여 들자 비텔레스키 추기경과 교황 사절 2명이 린기에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후 팡파레와 함께 시뇨리아의 모든 의원들과 관리들이 모였고, 노타이오 델레 리포르마지오니는 전통에 따라 "오, 피렌체인들이여! 그대들은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 도시를 개혁할 발리아를 구성하는 데 동의들 하는가?" 하고 외쳤다. 이에 군중들은 동의한다고 대답했고, 350명의 시민들로 구성된 발리아들이 선출되었다.
메디치 가에 선고되었던 유배령은 즉시 철회되고 메디치 가문은 유배지에서 정식으로 소환됐으며, 유배 기간 동안의 선행으로 칭송을 들었다. 같은 날인 1434년 9월 28일, 코시모는 300명의 베네치아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베네치아를 떠났다. 며칠 후, 그는 지나는 곳곳마다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카레지의 별장에 도착했다. 그 곳은 환영 인파로 붐볐으며 피렌체로 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렌체 시내에서는 사람들이 메디치 가의 개선 행렬을 기대하며 길거리에서 서 있었다. 소요를 두려워 한 시뇨리아는 코시모에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급박한 전언을 보냈다. 그래서 그는 일몰 후에 동생 로렌초와 시종 1명과 함께 바르젤로 근처의 작은 문을 통해 피렌체로 입성했고, 그 날 밤 그를 위해 시뇨리아 궁전에 특별히 마련된 처소에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코시모는 교황에게 감사를 드린 후, 거리에 운집한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개선 장군처럼 바르디 저택으로 돌아 갔다.
그의 정적들에게는 이미 선고가 내려져 있었다. 리날도 델리 알비치를 비롯한 알비치 가문에 속한 자는 모두들 피렌체 시에서 추방되었다. 이는 범죄를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집단의 책임으로 보는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추방자 명단에는 페루치, 구아스코니, 구아다니 구이치아르디니 가의 구성원들과 니콜로 바르바도리, 마태오 스트로치 등이 있었다. 모두들 70명 이상 되는 지도층 인사들이 이 명단에 들어 있었던 터라 이러다가 피렌체의 지도층이 모두 바닥나겠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코시모는 이러한 불평에 그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풍자적인 어투로 답변했다.
"78야드의 진홍빛 천만 있으면 새 시민을 만들 수 있지."
메디치 가의 귀환으로 몰락한 알비치 가의 운명이 자기에게도 닥칠 것을 두려워 하던 프란체스코 필렐포는 이미 시에나 시로 도주한 상태였다. 그 곳에서 그는 비스콘티 가를 위해 일하는 한편 메디치 가를 모략하는 편지를 계속해서 피렌체에 써 보내면서 메디치 가에 대항하라고 선동했다. 그는 또한 코시모를 암살하기 위해 헬라인 청부업자를 고용하는 데에도 일조했다고 한다. 사실 이 성가시고 허영심 많으며 이기적인 대학자가 피렌체를 떠난 사실을 섭섭해 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존경받고 정직했던 팔라 스트로치가 파도바로 추방된 점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는 알비치 가를 완전히 지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종국에는 알비치 가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트로치처럼 거부이면서 막대한 영향력을 휘두르는 자가 떠나야만 메디치의 위상이 더 견고해지리라고 생각했던 코시모는 그를 사면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과거의 우정을 생각해서 스트로치를 위해 좋은 말을 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 오자 코시모는 특유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으며, 그를 추방한다는 최종 결정이 내려지자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코시모는 파도바 시에서 스트로치가 자신의 관심사가 아닌 정치에서 손을 떼고 편안히 정착하리라는 점에 위안을 삼은 듯 했다. 실제로도 스트로치는 조용히 공부하고 토론을 즐기며 책을 사랑하는 삶을 누렸다.
그 후 몇년 동안 코시모에게도 차라리 그런 삶을 누렸으면 하고 바랄 만한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다른 이탈리아 시국들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피렌체에 비해 비교적 단순한 일이었다. 다른 국가에선 대부분 추방보다는 사형이 보편화 한 형벌이었으며, 지도자는 강력한 군대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피렌체에선 전통적으로 사형이나 군사 독재가 배척되었다. 그는 성공적인 지배자가 되기 위해 전혀 지배자가 아닌 것처럼 처신해야만 했다. 정치 구조를 변혁하는 경우에도 되도록 반대를 최소화 하도록 머리를 잘 굴려야 했다. 만약 그가 정치력 없이도 자신의 은행을 통제, 확장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막후에 남는 데 만족했을 것이다.
코시모는 사업에서 가장 만족을 느꼈다. 마법으로 재산을 늘릴 수 있다 하더라도 은행가로 계속 일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선친이 인정한 대로 피렌체에서는 공직 임무를 회피하려는 부유한 상인은 몰지각한 인간으로 치부되었다. 그럼에도 코시모는 수년 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그저 부유하고 관대하며 친근한 은행가 행세를 했다. 그는 정치, 외교적인 임무가 부과되면 무엇이든 떠 맡았으며, 국가의 경제 정책을 지도할 채비도 되어 있었다. 또한 공화국에서 그 누구보다 더 높은 이율의 세금을 냈지만, 다른 신중한 재벌처럼 부채를 강조하고 납세가 가능한 수입을 축소시켰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재산액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3번만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됐으며, 정부에 절대적인 통제력을 발휘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또 국가 안보와 조세 제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콘실리오 마지오레라는 위원회를 새로 조직했는데, 이 기구는 후에 100인 위원회, 즉 원로원(cento)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가식이나 허세를 피해서 말보다는 노새를 타고 다녔다. 또 허영심이 많고 말이 많으며 야심가이지만 머리가 좋지 않았던 루카 피티를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시키기도 했다.
물론 겉과 속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국가의 헌법 제도와 직위가 예전과 동일했지만, 정치적 또는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는 아코피아토리라는 위원회가 시뇨리아의 후보를 선출했기 때문에 메디치 가의 정적들은 후보로 선출될 수 없었다. 아코피아토리 대부분은 메디치당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유배지에서 돌아 온 아뇰로 아치아이우올리 등 저명한 인사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장인 출신으로 코시모 휘하에서 성장한 조각가 포치오 푸치가 계략과 달변으로 경영자 역할을 잘 수행하는 가운데 메디치당은 계속 확장해 갔다. 또 푸치의 의견에 따라 그란디는 모두 포폴라니로 언명됐다. 이것은 귀족들에게도 피선거권이 부여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고, 포폴로 미누토에게는 매우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석됐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찬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밖의 시민들은 아무리 출신이 비천하더라도 능력만 뛰어나면 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직을 맡을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해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과정이 너무 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미리 조처가 취해 졌다. 유서 깊은 가문은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4분의 3 이상의 인구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1453년, 새로 자격을 부여받아 보르세에 명단이 오른 고지의 159명의 시민들 가운데 145명은 1449년, 공무원 피선거권이 주어진 자들의 친지들이었다. 그 후 메디치당의 기반이 공고해지고 피렌체 전체의 이익과 동일시 되면서 코시모는 반대의 목소리를 제어할 필요조차 못 느꼈다. 단지 그의 옛 친구이자 충직한 공화당원인 네리 카포니가 코시모의 권력이 점점 증가하는 것에 대해 우려할 따름이었다. 학구파의 부유한 상인 지아노초 마네티도 이와 비슷한 견해였으나 이들 모두 정당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곧 피렌체를 떠났다.
비평가들의 주장처럼 그렇게 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코시모당은 정적을 타도하기 위해 세금 제도를 이용하기도 했다. 세무관들은 반 체제 인사들에게 세금을 부과할 때 공정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코시모의 대리인으로 이용되던 당 실무자들은 공화국에서 추방된 자들의 재산을 싸게 사 들이거나 정부의 주식을 매매해서 자신의 재산을 늘려 갔다.
이 때문에 메디치당은 대중들의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1458년에는 거의 해체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 해 1월, 오랜 경제 침체로 고생하던 피렌체의 상인들과 지주들은 새로 자산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소식에 경악했다. 그리고 여름이 되자 개헌에 대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또한 개헌 반대자들이 체포됐다는 소문도 있었다. 피렌체에서 그에 대한 적대감이 격화되자 코시모는 밀라노의 은행 지점을 통해 파비아에 집을 한 채 빌렸으며,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를 대비해 가족들과 이주할 준비를 했다.
8월 10일, 곤팔로니에레인 루카 피티는 은밀하게 용병들과 무장 지지자들을 시뇨리아 광장에 집합시키고는 고분고분한 파를라멘토를 소집하기로 결심했다. 담비 털이 달린 진홍빛 겉옷을 걸친 시뇨리아 의원들은 궁전에서 나와 린기에라 앞에 섰고, 노타이오 델레 리포르마지오니는 새 발리아를 선출한다는 법령을 크게 낭송했다. 그런 다음 선행자들의 방식을 좇아 아래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새 발리아를 승인하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3차례 반복하기는 했으나 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 말을 알아 듣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긍정적인 대답을 한 이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몇 명이면 충분했다. 시뇨리아들은 궁전으로, 시민들은 일터로, 용병들은 숙사로 돌아 갔다.
발리아는 즉시 메디치당이 제안했던 여러 조처들을 단행했다. 아코피아토리의 권력은 향후 10년 간 보장되었으며, 그 결과 공직 선거는 단순한 형식으로 전락했다. 곤팔로니에레의 권력 역시 더욱 커졌다. 임기가 거의 끝나 가던 루카 피티와 코시모의 장남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는 10명으로 구성된 아코피아토르이 의원으로 선출됐다. 메디치 가의 지지자들이 시가를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고 깃발을 휘두르는 가운데 코시모의 가족은 피렌체로 돌아 왔다. 메디치당의 우세는 이제 확고해 졌으며, 코시모느 피렌체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원로로 인정받았다. 1458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하면 이제 그는 국가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정치 현안들이 그의 자택에서 해결되었다. 그가 뽑은 자가 직위를 얻었다. 평화와 전쟁을 결정하고 법을 통제하는 자는 바로 그였다. 그는 이름만 뺀 나머지 모든 점들에서 군주였다.
외국 지도자들도 중요한 결정이 필요할 때면 피렌체에서 다른 이와 접촉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와 사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피렌체 역사가인 프란체스코 구이치아르디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가진 대단한 명성은 고대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당대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시민도 누려 보지 못한 것이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 역사적으로 그녀에 대한 평은 그야말로 혹독했다. 검은 여인, 음모와 배신의 세기적 악녀, 등이 바로 그녀에 대한 평이었다. 이는 19세기 대중작가들이 그녀를 음모와 배신, 독살의 주인공으로 폄하해온 탓도 한몫했다. 그녀에 대한 이러한 평가가 근래에 들어 조금씩 바뀌고 있어 불행 중 다행이랄까.
카트린의 출생
카트린 드 메디치(1519~1589)는 유럽 문화의 중심이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든 15세기 말, 예술과 문학의 후원자이자 정치가로서 권력의 절정기에 있던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났다. 당시 카트린의 부모는 빈사 상태에서 헤매고 있었고 그녀 또한 병약하게 태어나 심신의 혼란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만만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마치 그녀 앞에 놓인 삶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고라도 하듯 말이다.
정부(情婦)가 있는 앙리 2세와의 정략결혼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 지배권을 유지하려고 자기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자 종손녀인 카트린을 프랑수아 1세의 둘째아들 앙리에게 시집을 보낸다. 이 정략결혼이 카트린을 피렌체에서 음모와 적대감이 난무하는 프랑스 궁정 속으로 내몰았던 것에 다름 아니다. 왕족이 아닌 낯선 외국인의 어려움은 물론, 카트린이 프랑스로 오기 전부터 남편 앙리 2세에겐 20살 연상인 노르망디 법관의 아내 ‘디안 드 푸아티에’란 정부(情婦)가 있었다. 이 디안이 앙리의 총애를 믿고 왕비인 카트린을 우습게 알고 하대했으며 그 삼각관계에 놓인 카트린은 결혼 후 10년 동안 이유없이 아이가 없다가 그 후로 10명의 아이를 낳게 되었지만 앙리 2세가 죽기 전까지 자신의 아들들마저 디안에게 빼앗진 채 허울만 좋은 왕비로 숨죽여 지내야 했다.
이 인욕의 삶도 끝이 있었던가. 남편이 사고로 죽고 마침내 장남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오르나 1년 만에 죽는다. 다시 차남인 샤를 9세가 갓 10살의 나이에 즉위하면서 카트린이 섭정 황태후로 등극하게 된다. 즉, 왕관과 더불어 프랑스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광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분쟁까지도 물려받았다. 바로 종교전쟁을 떠안았던 것이다. 종교 갈등의 골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모든 문제가 서로에 대한 비난과 비판으로 시작되고 반란과 형벌로 이어졌으며 이는 내란도 불사했다.
종교전쟁의 시대
16세기 유럽은 루터가 개신교를 주창한 이후, 프랑스는 로마가톨릭교도와 칼맹주의를 따르는 개신교도(위그노)의 대립이 격한 때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발표된 것이 ‘낭트 칙령’ 이다. 카트린이 사위 앙리 4세가 브레타뉴의 낭트에서 1598년 4월 13일 공표를 해 '낭트 칙령'이라 명명되었다.
그렇다면 낭트칙령 이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26년 전인 1572년 파리에서 2만여 명의 신교도가 구교도 귀족에 의해 대량 학살당한 ‘성 바르톨로뮤의 대학살’ 사건이 있었다. 당시 위그노파 제후의 결혼식 참석차 들렀던 지방의 위그노들까지 뜻하지 않은 참변을 당하는 바람에 민심은 참으로 흉흉했다. 어언 30여 년 동안을 신교도와 구교도는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살육전을 벌였다.
결국 프랑스의 왕조 교체를 바라던 신교도의 정신적 지주였던 영국은 위그노를,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가톨릭의 구교도를 각각 지원해 국제적인 분쟁까지 일어났다. 문제는 이 참변의 배후에 어린 왕 ‘샤를 9세’ 의 뒤에서 수렴 청정하던 카트린 드 메디치의 묵인, 또는 공모가 있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일었다. 사실 금융가문의 카트린을 상인의 딸로 격하시키며 무시하고 적대시하던 그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이탈리아 출신의 사악한 악녀가 한 짓이라고 혐의를 씌우기에 열을 올렸다.
이 파란의 시대중심에 서게 된 그녀, 무슨 수로 요동치지 않을 수 있으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잖은가. 어느 쪽도 섣불리 손을 들어 줄 수 없을 만큼 국가가 신·구교로 팽팽히 맞선 대치상황인지라 그녀는 신·구교도들 사이에서 어느 쪽도 기울지 않는 관용의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곪을대로 곪은 뿌리 깊은 종교적 갈등은 피해갈 수 없었으며, 수차례의 내전을 비롯해 프랑스 종교전쟁 중 가장 치욕적인 사건인 '성 바르톨로뮤 축일 대학살'을 일으킨 배후 조종이란 주범으로 몰리고 말았다.
카트린의 섭정
카트린은 오로지 프랑스 왕권 지키기에만 골몰했다. 첫째아들 프랑수아 2세(1559, 재위기간 1년), 둘째아들 샤를 9세(재위 1560~74), 셋째아들 앙리 3세(재위 1574~89)의 시대를 거칠 그 당시 프랑스는 신·구교도 종교전쟁으로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그녀에겐 사랑하는 아들들이 이끌어가는 프랑스 왕권을 지키는 일이 더 절박했던 것이다. 그 한 수단으로 자녀들을 용의주도하게 활용했다. 말하자면 이 나라 저 나라와 동맹을 맺는 정략결혼을 시켰다. 그녀자신이 삼촌의 욕심에 의해 정략결혼을 하게 되어 프랑스 궁정으로 와서 보낸 암울한 세월을 그새 잊은 걸까?
실제로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첫딸인 엘리자베트를 결혼시켰고 장남인 프랑수아 2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혼인 했으며 둘째아들 샤를 9세 또한, 당시 신교도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녀의 아들보다 두 배나 나이가 많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시키려고 추진했으나 실패하자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와 혼인시켰다.
그리고 ‘마고’로 유명한 바람기 많은 마르그리트와 훗날 ‘앙리 4세’가 되는 앙리 드 나바르와의 결혼식을 성사시켰다. 이들의 결혼식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있었는데 신랑인 칼뱅 개신교도인 ‘앙리 드 나바르’가 성당 안에 들어서길 꺼려 식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신부를 기다렸다. 이 광경을 본 구교도들이 합세하여 결국 그들의 첫날밤에 지방에서 온 개신교도들까지 대학살한 끔찍한 바르톨로뮤의 대학살 사건을 일으켜 그 배후에 카트린을 지목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영국과 평화협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앙리 2세는 물론, 이후 열여섯 살인 막내아들 알랑송을 40대로 접어드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을 넣기까지 했다.
카트린은 그렇게 은근히 메디치 가문을 무시하며 왕권에 도전하는 기즈 가문과 첨예한 대립을 하다 그녀의 마지막 아들 앙리 3세마저 암살당하지만 딸 마르그리트와 혼인시킨 사위를 앙리 4세로 즉위시키면서 나름대로 프랑스 왕권의 기반을 닦게 된다.
모정의 세월
그녀의 이 집요한 모성의 결과를 어찌 보아야 하는가. 애당초 자신이 처한 음모 따위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왕권을 지키지 않으면 당장 자식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판인데 그 뉘라서 이를 태연히 관망만 할 손가. 딸 마르그리트와 관련된 추문들, 아들인 앙리 3세의 광기, 막내아들인 알랑송의 반역을 마주치면서도 그들을 위해 수없이 연회를 베풀고 화해의 장을 마련해준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리라.
그녀는 분명히 왕비였다. 그러나 정부(情夫)를 둔 앙리 2세는 그녀에게 한번도 살갑게 대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카트린은 그가 하는 대로 순종하며 그를 깊이 사랑했던 여인이다. 그 시커멓게 타드는 속정을 자식을 쏟으며 더러 달래고 기댔으리라.
그녀에겐 그런 숨죽인 시간도 사치였을까? 또 한번 그녀에게 급작스런 비보가 날아든다. 그녀의 남편 앙리 2세가 마상시합에서 눈이 찔리는 사고로 곧장 죽었다. 남편의 나이 갓 마흔에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떠난 충격으로 그녀는 검은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비단 옷을 입지 않았다. ‘검은 왕비’는 그래서 붙여진 것이다. 그래도 세인들은 그녀더러 권력의 화신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한 그 권력 너머엔 늘 자식사랑이 있었을 뿐이다.
어쨌든 그녀의 상황은 자꾸만 자식사랑으로 집약이 되지만 모성애와 그녀의 외교정책에서 드러난 태도에서 보듯, 이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분명히 있다. 다만 섭정을 한 그녀가 ‘성 바르톨로뮤 축일 대학살’과 각종 내전의 책임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과거 왕조마다 흔히 벌어지던 일들을 그녀에게 유별나게 적용한 것은 아닌지 되짚어볼 필요는 있으리라. 사뭇, 옛날부터 이어져온 남존여비사상을 그녀에게 슬쩍 덮어씌운 듯하여 조금 찜찜하긴 하다.
30년 동안 오로지 섭정 황태후로서 아들들의 왕관을 지키고 프랑스 왕권 수호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은 여인으로 봐 줄 순 없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