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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16)—[안동] 반변천 수계-영양(3)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제5일)] * 제6구간(안동→ 풍산)
▶ 2020년 10월 09일 (금요일) [별도 탐방] ① 안동 반변천 수계 영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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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서 깊은 ‘두들마을’ —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청송군 진보면과 이웃한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에 가면 유서 깊은 ‘두들마을’이 있다. 광제원이 있었던 마을인 두들마을은 두들[언덕]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석보(石保)로 부르고 있었던 이곳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9~1674)이 병자호란을 피해 들어와 살면서 유명해진 곳인데, 이시명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터전을 지키며 살면서 재령 이씨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이 마을 옆 두들에는 석계 선생의 서당인 석천서당이 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주남천 가에 있는 암석에는 이시명의 아들인 이숭일 선생이 새겼다는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의 글씨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곳에는 '석천서당'(石川書堂), '석계고택'(石溪古宅), 유우당(惟宇堂), 주곡고택(做谷古宅) 등 전통가옥 30여 채와 '정부인 장씨유적비' 등이 많아 1994년 문화체육부로부터 두들문화마을로 지정받았다.
명문(名門) 재령 이씨(載寧李氏)
재령 이씨 시조는 알평(謁平)이니 신라태조 혁거세(赫居世)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고려 때 이우칭(李禹?)은 벼슬이 시중(侍中)이었고, 재령(載寧)에 봉해졌기에 그 이후 후손들이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이맹현(李孟賢)이 맑은 덕행으로써 명성이 자하여 성종 때 홍문관 부제학과 해서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니, 이시명의 고조이다. 증조부는 이애(李?)이니, 통정대부 울진현령을 역임 하였고, 비로소 영해부로 옮겨 살았다. 조부는 이은보(李殷輔)이니, 충무위부사직으로서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이시명의 아버지는 이함(李涵)이니, 의령현감으로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두들마을’ — 재령 이씨의 집성촌, 석계고택·석천서당
석계고택(石溪古宅)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 1676년(숙종2) 안동 도솔천에서 세상을 떠나고, 장례를 마친 뒤에 이시명의 넷째아들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1631∼1698)이 석보 원리리의 유지로 돌아와서 지은 집으로, 당시에는 ‘항재(恒齋)’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는 이숭일이 모친인 장계향(張桂香)을 모시고 살았던 집으로, 장계향이 세상을 떠나는 1680년(숙종6)까지 5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석계종택은 석계고택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문중에서 1800년대에 지은 것이다. 석계종택 뒷마당에는 석계 이시명과 첫 부인인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해의 딸 김씨부인(金思安)을 한 위패에 모시고, 후처인 장씨부인(장계향)은 따로 위패를 만들어 모신 불천위 사당이 있다. 석계종택의 불천위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8월 20일에 제사를 지낸다.
1676년(숙종 2)에 이시명의 넷째아들 이숭일(李崇逸)이 석계고택을 짓고 석계초당에서 강학을 계속하였는데, 그의 학문이 뛰어나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숭일이 죽은 뒤 후손들이 선조의 뜻과 학문을 추앙하여 1831년(순조 31) 서당을 세워서 ‘석천서당’이라 이름 하였다. 1891년(고종 28) 2칸을 중수하였다.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 張氏)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張氏, 1598~1680년)는 본명이 장계향(張桂香)이다. 그녀는 1598년(선조 31) 안동의 ‘검제’(안동시 서후면)에서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장흥효는 퇴계선생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현숙하여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시, 글씨, 그림을 익히고 의학에 까지 조예가 있었다. 다음은 장계향이 어린 시절에 지은 시이다.
鶴髮臥病 학발와병 백발 늙은이가 병이 들어 누웠네
行子萬里 행자만리 자식은 만리 밖 수자리에 갔구나
行子萬里 행자만리 만리 밖 수자리가 내 아들!
曷月歸矣 갈월귀의 어느 달에 돌아올꼬?
鶴髮抱病 학발포병 백발 늙은이가 병에 지쳐 누웠네
西山日迫 서산일박 서산에 지는 해는 저물어 간다
祝手于天 축수우천 하늘에 손을 모아 빌고 또 빌어봐도
天何寞寞 천하막막 하늘은 무심케도 대답없이 막막하구나
鶴髮扶病 학발부병 백발 늙은이가 병든 몸을 일으키니
或起或踣 혹기혹북 일어나다가도 다시 넘어지는데
今尙如斯 금상여사 지금은 오히려 이와 같은데
絶据何若 절거하약 아들이 옷자락 끊고 떠나가면 어이할거나?
장계향이 10대에 이웃집 아들이 변방으로 국경을 지키려 떠나자 백발의 노모가 기절했다가 상심하여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런 시를 썼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장씨부인 유물전시관’에 게시되어 있다.
19세에 영해부 나라골 재령 이씨 운악 이함의 셋째 아들인 석계 이시명(李時明, , 1590~1674)에게 재취부인으로 출가했다. 이시명은 아버지 장흥효(張興孝)의 문하의 애제자이다. 시아버지 이함은 의령현감을 지낸 분이다. 결혼 당시 시댁은 손위 두 시아주머니가 죽고 둘째 동서는 순절하였다. 손아래로 아직 살림을 나지 않은 시아주버니 둘과 시아주머니의 유자녀 다섯과 남편의 전취 소생 셋이 있었다. 이 대식구를 보살피는 것이 그녀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현모양처로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대가족 살림을 이끌었다. 그녀는 몸에 밴 경신(敬信)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평등과 애민사상, 그리고 중용의 삶을 몸소 실천하였다.
당시 이시명에게는 전실 김씨부인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고, 장계향 즉 '장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6남 1녀를 두었다. 그녀는 전 부인 소생 맏아들 ‘이상일(李尙逸)’에 이어, 둘째 ‘이휘일(李徽逸)’부터 셋째 ‘이현일(李玄逸)’, 넷째 ‘이숭일(李嵩逸)’, 다섯째 ‘이정일(李靖逸)’, 여섯째 ‘이융일(李隆逸)’, 일곱째 ‘이운일’까지 모두 훌륭하게 길렀다. 그녀의 남편 ‘이시명(李時明)’을 위시하여 맏이 ‘정묵재 이상일’, 둘째 ‘존재 이휘일’, 셋째 ‘갈암 이현일’, 넷째 ‘항재 이숭일’, 그리고 손자 ‘고제 이만’과 ‘밀암 이재’ 등 조손 3대에 걸친 이 일곱 사람을 뒷사람들은 ‘칠산림(七山林)’ 이라 불렀다. 장씨 부인은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여중군자의 삶을 살았다.
아들 이현일이 쓴 『광지(壙誌)』와 『장씨부인실기(張氏夫人實記)』에 장씨 부인에 대한 여러 행적이 실려 있다. '장씨 부인'은 서화와 문장에 뛰어나 훌륭한 필적(筆跡)을 남기고 있다. 흉년이 들어 기근으로 백성들이 고초를 겪자,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두들 마을의 서남쪽에 서있는 울창한 도토리나무들은 당시 장계향이 가족은 물론 고을 사람들을 위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또한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을 돌보고,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고 기르는 등 인덕과 명망이 자자하였다. 장계향은 회임했을 때는 물론이고, 83세에 이르기까지 7남 3녀의 자녀들을 훈도하는데 힘을 쏟았다.
장씨부인을 통하여 재령이씨 가문은 더욱 크게 일어나 훌륭한 학자와 명망 있는 인재들이 대대로 배출되었다. 특히 1687년(숙종13)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조정에서 대학자이자 산림(山林)으로 초청되어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이에 법전에 따라 세상을 떠난 장계향에게 의인(宜人)에서 정부인(貞夫人)의 품계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정부인 장씨’로 불리게 되었다.
장계향은 이시명을 따라서 1640~1653년까지 영양의 석보(石保)에서 살다가, 1653년(효종4)에는 영양의 산골 수비(首比)에, 1672년에는 안동의 도솔원(兜率院)으로 옮겨살았다. 1676년(숙종2) 이시명의 상을 끝낸 뒤에 셋째 아들 이현일, 넷째 아들 이숭일과 함께 다시 석보로 돌아와서 현 석계고택에서 5년 동안 살다가 1680년(숙종6)에 세상을 떠났다. 가문에서 ‘불천위(不遷位)’로서 제사를 받드는 조상이 되었다. 당시 여성으로서 전에 없는 일이다.
이 땅의 수양산, 첩첩산중 수비(首比)에서 20년
이숭일이 지은 석계고택으로 들어와 살기 이전, 장씨 부인(장계향)이 56세 되던 1653년에 이시명 내외는 권속들과 함께 영양의 더 깊은 곳인 수비(首比)로 들어갔다. 두들마을에서 북쪽으로 50여 리 떨어진 곳이다. ‘수비(首比)’라는 이름은 수양산(首陽山)에 비견(比見)된다고 하여 이시명이 붙인 것이라 한다. 스스로 백이와 숙제를 지향한 삶의 자취라 할 것이다. 병자호란 오랑캐로부터 당한 나라의 수모를 자신의 것으로 한 선비의 선택이었으며, 뜻을 펴지 못한 절의 높은 지사의 은둔이기도 했다. 현재 지명은 영양군 수비면인데, 지금은 ‘수산유허비’(신원리 소재)만 남아 있다. 이시명-장계향 내외는 수비(首比)에서 20년을 살았다. 자녀들은 이곳에서 부모와 함께 개간하고 학문하는 충만의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쓴 이시명의 시(詩) 한 수가 내외의 심경을 말해준다. 73세(1662년) 생일을 맞은 이시명이 자녀들을 앞에 두고 노래한 것이다. 이 때 장계향은 65세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단정히 하여 집에 앉았노라니,
문득 마음이 온통 고요해짐을 깨닫노라.
양기(陽氣)가 동지 후 은밀히 자라니,
눈 덮인 산도 북풍이 불기 이전에 완연히 바뀌누나.
세상이 오랑캐를 받아들였단 말 들으니 근심되고,
사람들이 성현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니 걱정이구나.
아이에게 술 한 잔 따르게 하고,
시 읊어 금일이 태평하길 비누나.
* [퇴계학의 대모] ― 여중군자, 정부인 안동 장씨 부인
정부인 장계향(張桂香)은 전인적으로 덕(德)을 갖춘 여중군자(女中君子)로 불린다. 그녀는 평소 자녀들에게 “너희가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며 학문의 실천에 근본을 두었다. 그녀로 하여 퇴계(退溪)의 학통을 잇는 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석계 이시명으로 이어진 학문이, 그녀로 하여 — 아들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그리고 손자 밀암(密庵) 이재(李栽)— 밀암의 외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으로 이어지고, 대산의 외증손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학봉의 후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장흥효와 장씨 부인(장계향)은 퇴계 학파의 학통의 전수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학봉 김성일의 제자인 장흥효를 아버지로, 이시명을 남편으로, 이현일을 아들로 둔 딸이자 부인이자 어머니였다. 일찍이 퇴계학파의 적통인 아버지 경당 장흥효의 가르침을 받아서 항상 몸을 삼가고, 학덕을 갖추고 공경하는 생활을 하였다.
장씨부인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김에도 효도하고 근신하는 절차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남편을 받들어 섬기면서 근 60년 동안을 서로가 손님을 대접하듯이 공경하였으며, 모든 일을 반드시 남편에게 먼저 아뢰어 명령을 받은 뒤에 실행하였다. 계실임에도 전 부인의 아들을 어루만져 주고 사랑하기를 자기가 낳은 아들과 차별이 없었으며, 아들을 가르치고 일과를 매겨 독려하기를 또한 지극하게 하였다. 전 부인의 아들과 딸이 장가가고 시집갈 때에는 혼수와 물건을 주는 것도 자기의 낳은 자녀들보다 많이 주었다.
당시 내외 구분이 심하여 여성에게는 어려운 사회적 정황 속에서도 장씨 부인은 선비의 길을 택한 이시명에게 현명하고 성실한 삶으로 남편을 보필하였고, 이러한 헌신적 삶은 자녀들에게도 이어져 7남 3녀를 모두 훌륭히 성장시켰으며, 일곱 아들을 세칭(世稱) 칠현자(七賢子)로 칭송받도록 하였다. 특히 이러한 장계향의 뒷받침이 마중물이 되어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대사헌 이조판서(정2품)의 벼술이 내려지고 그녀는 사후 ‘정부인(貞夫人)’으로 불리게 되었다.
*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음식디미방〉》 — 조선시대 요리의 백과
늙어서는 마을의 어른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고, 일흔이 넘겨서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음식디미방〉이라는 요리책을 지었다. 석계고택에서 안동 장씨이 펴낸 〈음식디미방〉이다. ‘디미’는 ‘知味’(지미)에서 음을 빌린 말이다. 정부인 장씨부인의 업적 중 특히 빛나는 것은 바로 자신의 경험지식을 정리해서 쓴 순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다. 장씨 부인이 나이 일흔, 눈이 침침한 가운데에서 써내려간 이 책에는 조선 중기 경상도 지방의 음식조리법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빈약한 우리 기록문화 속에서 아주 귀중한 저서이다. 이 서적은 1672년경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서적 표지에는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으로 쓰여 있고 첫머리에는 〈음식디미방〉이라 제목하고 궁체의 붓글씨로 기록되어 있다.
장씨 부인의 시문 및 저서 가운데에는 『음식디미방』은 우리나라 17세기의 음식 조리법을 알려주는 귀중한 한글 최고의 조리 관련 문헌이다. 이 책은 장계향의 만년인 1670~8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책의 표지에는 『규곤시의방(閨?是議方)』이라고 붓으로 씌어져 있는데, 권두서명은 『음식디미방』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전체 30장으로 된 1권 1책의 필사본으로, 가루 음식과 떡 종류의 조리법을 설명한 ‘면병류(麵餠類)’를 시작으로 모두 146가지의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다. 이 서적은 가문에 대대로 전해오거나 스스로 개발한 조리법을 글로 써 놓은 독자적 기록물이다. 장씨 부인의 〈음식디미방〉은 그의 집안 며느리와 딸들에게만 전해지던 것으로, 종부를 통해서 계속 전해졌으며, 기타 며느리나 딸들은 원본을 물려받을 수 없고, 다만 필사본을 베껴갈 수는 있도록 허락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의 다양한 요리 방법이 기록된 〈음식디미방〉은 1910년에 와서 우연히 대중에 공개되었다. 그녀의 작품으로 〈음식디미방〉외에 〈맹호도〉 그리고 시(詩) 9편이 전해지고 있다.신사임당(申師任堂)과 쌍벽을 이루는 ‘여중군자(女中君子)’로서 문화관광부에서는 1999년 11월에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누구에게나 은덕을 베푼 장씨 부인
어린 여종을 돌보아 주기를 마치 자기의 딸처럼 하여, 그들에게 질병이 발생하게 되면 반드시 그들을 위하여 음식을 먹여 주고 간호하여 온전히 편안함을 얻도록 하였으며, 그들이 과실과 나쁜 일을 저지르게 되면 조용히 가르치고 타일러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가 감화하여 복종하도록 했으므로, 남의 집 종들도 이런 일을 듣고서는, 모두가 종이 되어 심부름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부인이 가는 곳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와 늙어서 자녀가 없는 사람과 늙어서 아내가 없는 사람과 늙어서 남편이 없는 사람과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불쌍히 여겨 구휼하고 도와주기를, 마치 남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근심처럼 여기고는 자신의 가난하고 곤궁한 이유로써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혹시 몰래 남에게 음식물을 보내주고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니, 이웃의 늙은이와 마을의 할미들이 모두가 그의 은덕에 감동하여 오래 살고 복 받기를 빌고서, 죽어서도 반드시은덕을 보답하겠다고 축원하는 사람까지 있게 되었다.
장계향 부인과 항재 이숭일의 유물은 '정부인 장씨 예절관의 유물전시관'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 유물관에 보관-전시된 《전가보첩(傳家寶帖)》은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가 지은 『성인음(聖人吟)』·『소소음(蕭蕭吟)』 2편의 시를, 남편인 석계 이시명이 비단 위에 쓰고, 아들 존재 이휘일의 부인 의인(宜人) 박씨 부인(朴氏夫人)이 그 글자 위에 수를 놓은수첩이다. 《학발첩(鶴髮帖)》은 정부인 장씨(1598~1680)가 10대의 어린 시절에 지은 학발시첩. 글씨도 정부인의 친필이라고 한다.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80세의 노모가 기절했다는 말을 듣고 가련하게 여겨 지은 4언시 3장이다. 학발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을 뜻한다.
▶ 고택 앞에는 정부인 안동 장씨를 기리는 비석(‘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이 있다. 최근 두들마을에는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이 조성되고, ‘장씨유물관’이 있으며, ‘정부인장씨예절관’에서는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146가지의 음식 중 일부를 맛볼 수 있다.
'석간고택’, ‘유우당’ 그리고 주곡고택
석계서당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석간고택(石澗古宅)’이 나온다. 영양 석간고택은 19세기 후반에 학문하는 장소인 정사(精舍)를 가옥 내에 별동으로 지은 흔치 않은 예로 정침(正寢)은 생활기본시설을 설치하기 위하여 일부 변용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석간고택은 이시명-장씨 부인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의 7대손인 조선후기의 학자 이수영이 거주하던 곳이다. 이수영의 6대손인 작가 이문열이 한학을 익히며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석간정사'(石澗精舍)는 이시명이 강학하던 초가를 유림이 중건한 것으로 눈향나무 한 그루가 서당을 지키고 있다.
석계서당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유우당(惟宇堂)’이 나오는데, 유우당은 조선 순조 33년(1833)에 이상도가 건립한 가옥으로, 장자인 이기찬의 호를 따서 ‘유우당’이라 하였다. 후손인 이돈호가 원래 석보면 주남리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이돈호는 3·1운동 때 유림의 대표로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이곳에서 태어난 조카 이병각을 조지훈, 오일도, 조세림 등과 함께 항일애국시인으로 활약했다. 정면 6칸, 측면 6칸의 건물이며 옆에사당이 있다. 석간고택과 석계고택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 가면, 여중군자 장계향의 예절관이 있다.
원리의 ‘주곡고택(做谷古宅)’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4호), 이 건물은 조선중기 유학자인 주곡(做谷) 이도(李櫂)의 집이다. 이도는 재령이씨 영해파 입향조인 이애(李璦)의 5대손으로 영해의 인량리에서 태어났으나 조선 숙종 원년(1675)에 주사동(做士洞)에 임시로 거처하여 지어진 것이며, 순조 30년(1830) 후손들에 의해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정침은 정면 4간 측면 4간 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 [남자현 생가] — 영양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뚜렷한 자취를 남긴 남자현 생가와 유적비가 있다. 두들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단지맹세(斷指盟誓)를 한 여장부 남자현이 있었다! 영양에는 여중군자 장계향과 더불어 또 한 분의 훤칠한 여성리더가 있었던 것이다.
영양이 고향인 소설가 이문열(李文烈)
한국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작가
‘두들마을’은 작가 이문열(李文烈)의 고향이다. 반변천 상류인 영양의 북쪽에 한양 조씨 ‘주실마을’ 있다면 그 동남쪽에는 재령 이씨의 ‘두들마을’이 있다. 한양 조씨 주실마을에는 조지훈의 생가가 있고, 재령 이씨 두들마을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 이문열(李文烈)을 배출한 마을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항일시인인 이병각과 이병철도 이 마을 출신이다. 어디 문인뿐이겠는가! 의병장 이현규, 독립운동가 이돈호, 이명호, 이상호도 이 마을의 기운을 받은 의인들이다.
장계향의 일대기를 소설 《선택》(1997)’으로 형상화한 이문열(李文烈)은 장계향의 넷째 아들인 항재(恒齋) 이숭일(李崇逸)의 후손이다. 이숭일은 애민심이 커서 ‘이불자(李佛子)’로 불리웠는데, 장계향이 별세할 때 모신 아들이다. 두들마을 어귀에는 이숭일이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새긴 ‘세심대(洗心臺)’와 ‘낙기대(樂飢臺)’가 있는데, ‘세심(洗心)’은 치심수행(治心修行)을 하는 것이고, ‘낙기(樂飢)’는 직역하면 배고픔을 즐긴다는 뜻으로 안빈수도(安貧樂道)의 삶을 나타낸다. 마을 한 켠에 있는 ‘석간정사’는 이문열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이문열은 몇몇 작품에서 자신의 고향마을을 자세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이문열(李文烈)은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새하곡(塞下曲)〉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능란하고 교양적인 문체와 다양한 작품세계를 지닌 소설들을 발표해왔다. 1960년대에 김승옥, 70년대에 황석영이었다면 80년대의 대표 작가는 명실상부 이문열이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젊은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레테의 연가〉, 〈사람의 아들〉, 〈금시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삼국지〉, 〈수호지〉등이 있다.
작가 이문열의 생애(生涯)와 작품 활동
이문열(李文烈)은 1948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재령 이씨’로 본명은 ‘이열(李烈)’이었다. 대학교수이자 공산주의자였으며 해방정국 시기 남로당에서 활동했던 아버지 이원철(李元喆)이 지어준 이름이다. 어머니는 이문열을 임신하고 있을 적부터 삐라를 돌리는 등 남편을 지원했는데, 그만 경찰에 잡혀서 유치장에 갇히게 된다. 아버지는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뱃속에서도 싸워온 열렬한 투사다’라고 하면서 그에게 '열(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의 부친 이원철은 1950년 6.25 전쟁 중에 월북했으며, 이문열은 그해 세 살에 어머니를 따라 고향인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로 이사를 갔다.
이문열은 유`소년기에 이사를 자주 다녔을 뿐만 아니라 정규교육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중퇴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정규교육을 이수한 기간이 도합 8년여에 불과하다. 1953년 안동으로 이사를 가서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한 이후 1957년 서울로 이사해 종암국민학교로, 1958년 밀양으로 이사해 밀양국민학교로 전학을 가 1961년 졸업했지만, 같은 해 진학한 밀양중학교는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이후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1964년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별다른 이유 없이 1965년 중퇴하고 부산으로 이사를 가서 이후 3년간 하는 일 없이 지냈다. 이문열은 젊은 시절 한주먹 했던 작가로 유명한데 다 이 암울한 청소년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중퇴 후 한동안 주먹질로 세월을 축내며 떠돌았고 그런 건달 시절을 청산하고 새 삶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 〈그해 겨울〉이다.
1968년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인 1969년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는 한편, 이듬해인 1970년 사법시험 준비를 위해 대학교를 중퇴했으나 3번 연속 떨어졌다.
1973년 결혼한 뒤 군에 입대해 통신병으로 근무했으며, 1976년 제대하고 나서 곧바로 경상북도 대구시로 이사를 가서 학원 강사로 일하는 중이던 1977년 대구경북지역을 대표하는 언론인 매일신문의 신춘문예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입선했고, 이듬해에는 매일신문사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이문열(李文烈)’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시 신설됐던 중편 부문에 혹해서 써낸 소설 〈새하곡(塞下曲)〉 이 당선되면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지 10년 만인 32세의 나이에 드디어 중앙문단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같은 해(1979년)에 당시 중편소설이었던 〈사람의 아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순식간에 인기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이 작품은 애당초 1973년 모 잡지의 신인 모집에 투고되었던 소설이라고 한다. 당시 26살이던 이문열은 군 입대를 앞두고 그때까지의 문학 수업을 결산한다는 의미로 1년간 힘을 쏟아 원고지 350여 장의 중편소설을 만들어냈다. 이 소설을 공모에 투고한 뒤 곧바로 입대했는데, 6달 뒤 첫 휴가를 나와 결과를 확인해보니 예심도 통과하지 못했고 이문열은 이 사실을 알고 상당히 낙심했다.
이후 등단 첫 해인 1979년에 문예지 세계의 문학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자 이 작품을 다듬어 내밀었는데, 잡지사 측으로부터 그냥 발표할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문학 측에서 공모하는 오늘의 작가상에 응모하라는 연락을 받았으며, 결국 그 상을 수상하고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이문열은 등단 첫해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이듬해인 1980년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야말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오랜 습작 기간 동안 쌓인 재고가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습작기에 썼던 작품 중 발표된 것만 중편이 3편, 단편이 9편이었다고 한다. 데뷔한 지 5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들소〉, 〈그해 겨울〉, 〈어둠의 그늘〉, 〈필론과 돼지〉, 〈알 수 없는 일들〉, 〈금시조〉, 〈익명의 섬〉, 〈칼레파 타 칼라〉 등의 중단편들을 비롯해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0), 〈젊은 날의 초상〉(1981), 〈황제를 위하여〉(1982), 〈레테의 연가〉(1983), 〈영웅시대〉(1984) 등의 작품들을 정력적으로 발표했다.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1982년 〈금시조〉로 동인문학상을, 1983년 〈황제를 위하여〉로 대한민국문학상을, 84년 〈영웅시대〉로 중앙문화대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이후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약 3년간 잠시 창작을 쉬게 되는데, 그렇다 보니 이문열의 작품 연보를 살펴보면 연도별로 작품 수에 있어서의 편중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 3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단편 소설 복귀작으로 발표한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80년대 후반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도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1986년 대하소설 〈변경〉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1988년에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발표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91년 출간된 장편소설 〈시인〉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평론가들과 해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평론가 김욱동은 이 작품을 이문열 전성기의 마지막 작품으로 보기도 했는데, 이는 이후 발표한 〈오디세이아 서울〉이나 〈성년의 오후〉등의 소설이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완성도가 그저 그런 편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상문학상을, 1992년 〈시인과 도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88년에는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출간해 현재까지 약 1,80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리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웠다. 91년에는 이문열 평역 『수호지』를 출간한다.
이후 1994년에는 뮤지컬 명성황후의 원작인 장막 희곡 〈여우 사냥〉과 《이문열 중단편전집》을 비롯해 소설집 〈아우와의 만남〉 등을 발표했으며, 1997년에는 장편소설 〈선택〉을 출간해 여성주의 진영과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94년부터 97년까지는 세종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1998년 《변경》이 전 12권으로 완간되었고 같은 해엔 ‘부악문원’을 열어 후진 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98년 〈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으로 21세기문학상을, 99년 《변경》으로 호암예술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장편소설로 〈아가〉(2000), 〈호모 엑세쿠탄스〉(2006), 〈초한지〉(2008), 〈불멸〉(2010), 〈리투아니아 여인〉(2011)과 소설집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2001) 등을 출간했다.
2001년에는 한 ‘칼럼’에서 시민단체를 정권의 홍위병에 비유한 것으로 인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결국 책 장례식까지 당하는 일이 일어났지만 이후에도 보수 성향의 발언들을 계속해나갔다. 2003년에는 당시 위기에 빠져 있었던 한나라당의 공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2년 <리투아니아 여인>으로 동리문학상을,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김유신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인 <대왕 떠나시다>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중단했다. 2017년, 작가로서는 실로 오랜 침묵 끝에 1980년대를 다룬 소설인 〈둔주곡 80년대〉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문열은 80년대를 전성기로 보냈다. 80년대 그의 유명세와 다양한 작품세계, 판매량을 따라갈 다른 작가는 없었다. 각종 정치적 논쟁에 휩쓸렸던 90년대 이후의 작품은 전성기보다 비교적 저평가되고 있다는 시각이 있다. 한편 이문열의 소설들 중에선 뜨지 않은 작품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장편의 경우 〈미로의 날들〉(1984),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1989), 〈오디세이아 서울〉(1993) 등이 있다.
이문열 소설의 특징
이문열(李文烈)은 소설을 통해 "참혹한 현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영웅"을 모색하려 했다. 대표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의 소설 속에서 영웅은 일그러진 존재다. 완전무결해 보이지만 실상 컴플렉스와 이루지 못한 욕망에 허덕이는 일그러진 존재들이다. 그 몰락은 누구 할 것 없이 처참하다. 그들은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몰락한다. 역설적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문열은 묻고 있다.
소설에서 내보이는 그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영웅 찬가다. 소설 속에 묘사되는 사회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역사를 만드는 영웅과 말만 많은 지식인, 그리고 이들에게 휩쓸려 움직이는 대중으로 이루어졌다.
소설(대표적으로 〈영웅시대〉)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경우, 주로 빨치산을 하다가 사살당하거나 월북한 걸로 나온다. 이는 작가의 가족사 때문인데, 이문열의 아버지 이원철은 수리학의 권위자로서 한국전쟁 때 전시 점령 서울대 농대 학장으로 임시 임명되어 북한정권에 협조하고 월북하였다. 물론 진짜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정부의 피난과 함께 이동하여 1951년까지 부산에 임시캠퍼스를 차렸다.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대는 말 그대로 괴뢰 국립대학. 따라서 서울대는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대를 완전히 부정한다.
이문열의 아버지는 한때 북한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년엔 조그만 농장의 일꾼으로 초라하게 살았다고. 이문열은 “가족 다 버리고 북에 갔으면 거기서 잘 살기라도 할 것이지...”라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문열은 젊은 시절 아버지가 자신을 포함한 처자식을 버리게 했던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였으나, 1960년대에 아버지가 북한에서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처자식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그곳에 간 사람을 힘든 상황에 몰아넣은 북한이 용서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사찰을 당하고, 이웃에게서 멸시를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게 동네에 소문나면 다른 동네로 이사하고, 이사한 동네에서 또 들통 나면 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하는 통에 그는 젊은 시절 전국 곳곳을 떠돌며 살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떠돌던 삶이 ‘재령 이씨’로서 상당한 양반 가문에 대한 집착과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집착을 가져왔다는 의견도 있다. 모진 고통 속에 살았던 이문열의 모친은 남편이 북에서 새장가를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과거를 겪은 그의 삶과 문학 속에서 좌파에 대한 혐오감이 발견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고픈 시절을 겪어본 사람답게 천민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건 마찬가지이다.(영웅시대와 그 연작 변경 시리즈를 참조). 재미있는 점은 이문열의 작품에 드러나는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를 비판했던 평론가 김명인이, 90년대에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끈 것은 정치적 속성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이야기했다.
세간에서는 이문열(李文烈)을 정치적 행보와 얽히어 진보 진영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소설가 황석영(黃晳暎)과는 대조적으로 보수 진영을 상징하는 문인으로서 서로 대립항을 띄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서로 거리낌 없이 지내는 사이이다. 황석영은 2017년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자신의 자서전 《수인1: 경계를 넘다》에서 본인이 이문열과 겪은 한 일화를 자상하게 회상하고 있다.
이문열 장편소설 《선택》에 대한 논란
조선 시대, 영남의 사대부 집안 외동딸로 태어난 장 씨(張氏)는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한 자질로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장티푸스에 걸리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게 된 그녀는 삶에 대해 새로이 눈을 뜨고, 배움에의 길을 접는 대신 기꺼이 한 남자의 아내와 아이들의 어머니로서의 길을 택한다. 가난하지만 올곧은 선비 집안의 후처(後妻)로 들어가 힘든 생활 속에서도 7형제를 키우면서 모두 훌륭하게 성장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여성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이문열의 소설 《선택》은 1598년에 안동에서 태어나 1680년에 죽은 ‘정부인 안동 장씨’를 화자(話者)로 하여, 오늘의 잘못된 여성 해방론자들의 행실을 조목조목 따지며 일갈(一喝)하고 있는 소설이다. ‘정부인 안동 장씨’는 퇴계 학통을 잇는 대학자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시 · 서 · 화에 일가를 이루는 한편, 전처소생을 친자식처럼 키우고 6남 1녀를 낳아 기른 조선 시대를 대표할 만한 현모양처(賢母良妻)다. 화자(話者)이자 주인공인 정부인 장씨는 탁월한 재능과 교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수리(數理), 초서, 문인화, 의약 등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결혼을 선택하여 남편과 자식, 가문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삶을 산 주인공의 입장에 따라 이 작품에서는 출산 기피와 이혼, 성문란 등으로 얼룩진 현대의 여성들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 진실로 걱정스러운 일은 요즘 들어 부쩍 높아진 목소리로 너희를 충동하고 유혹하는 수상스런 외침들이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 — 이문열, 《선택》(민음사, 1997)
소설 《선택》을 둘러싸고 논쟁이 붙자 공지영 · 김정란 · 전여옥 · 김신명숙 · 권택영 · 이선옥 같은 여성 작가와 비평가 및 운동가들뿐 아니라, 최원식 · 권영민 · 김경수 · 이순원 · 강준만 · 이동하 · 손세훈 같은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도 날선 비판을 가하고 나섰다.
《선택》은, 드물게는 “저속하게 이해되고 천박하게 추구되는 페미니즘의 파시스트적 속도와 전염에 대한 비판”(이순원)이라는 평가가 있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비평가들로부터 “시대착오적이며 복고 취향”이라는 비판과 함께 “영남 남인의 양반·남성·당파성을 철저하게 관철한 작품”이고 여성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불황기 자본의 요구를 대변”(최원식)하는 소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鹿洞故家 廣皐新宅” — 작가 이문열의 문학의 집
작가 이문열이 설립한 영양 두들마을의 광산문우(匡山文宇)
이문열은 사비를 들여 고향 마을에 문학관을 지었다. 이문열이 어린 시절 살았던 두들마을 생가는 다른 분이 살고 있어서 생가 옆에 새롭게 한옥을 지어 광산문학연구소를 설립하여 ‘匡山文宇’(광산문우)라고 현판을 붙였다. 그런데 2018년 대문에 '광산문우'의 현판을 내리고 ‘鹿洞故家 廣皐新宅’(녹동고가 광고신택)이라는 현판을 올렸다. 당호의 연원이 궁금하다. '녹동(鹿洞)'은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연상하게 하고 '광구(廣皐)'는 이곳 '두들마을'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간단하게 생각하면 ‘녹동고가(鹿洞故家)’는 이문열이 살던 옛집을 말하고, ‘광고신택(廣皐新宅)’은 옛집 옆에 새로 지은 지금의 한옥을 말하는 게 아닐까. 모두 내 자의적인 해석이다. 현판은 퇴계선생의 글씨를 그 16세손 정환(晶煥) 공이 근각(謹刻)했다고 적어놓았다. 이곳은 강당, 서재, 사랑채 등 여러 채의 한옥들이 있는데 후배 소설가들이 머물며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설립된 문학의 집이다.
‘이문열문학관’ 설립
"왜 소설가가 됐냐는 질문은 언제나 곤혹스럽다. 십수년간 독학으로 문학에 발을 들여 놓은 뒤 문학책이 나의 스승이 되었고, 서른 살이 넘어서 문단에 올랐다. 1980년대 작가가 된 후 근대화와 산업화 속에서 '낀 세대'가 된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설가 이문열 씨의 문학 업적을 기리는 문학관이 경북 영양군에 들어선다. 경북도는 2020년 4월 29일 ‘이문열문학관’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이문열문학관’은 이문열의 고향인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조성된다. 이문열이 2001년 고향인 이곳에 지은 사택이자 문학사랑방 '광산문우(匡山文宇)'를 지었지만 이웃한 청송군 출신의 작가 김주영의 ‘객주문학관’처럼 공식 문학관은 아니다.
‘이문열문학관’ 설립 작업은 2018년 경상북도 이철우 도지사가 취임한 이후 시동이 걸렸다. 경북도는 지난해까지 작가와 여러 차례 협의를 이어온 끝에 ‘이문열문학관’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타당성 조사용역을 마무리했다. 새롭게 지어지는 문학관에는 총 25억 원이 예산이 투입될 전망이다.
이문열이 세운 기존 광산문우(匡山文宇) 근처에 들어설 ‘이문열문학관’에는 옛 ‘장계향예절관’, 유물전시관, 문학전시관, 영상실, 집필실 재현 공간, 홀로그램 영상관 등이 구성될 전망이다. 이곳에 작가의 육필 원고, 국내 출판도서·해외 번역도서 등을 전시하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드라마 등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콘텐츠 등을 만들 계획이다. 이문열문학관이 건립되면 작가의 문학적 가치를 실현함은 물론 문화인프라 확장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계속] ☞ ‘반변천 청송’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