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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틀란트 해전(The Battle of Jutland ,German: Skagerrakschlacht)
작성일: 2011-01-04 글쓴이: cursedsoul
유틀란트 해전(The Battle of Jutland, Skagerrakschlacht)은 1차 세계대전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해전이었다. 전함 대 전함이 본격적으로 격돌한 해전은 1차 대전중 이 사건이 유일하며, 해전사상으로도 1905년 쓰시마(Tsushima)에 이어 두번째이자 마지막이다.
[유틀란트 해전(The Battle of Jutland, Skagerrakschlacht)은 1차 세계대전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해전이었다. 전함 대 전함이 본격적으로 격돌한 해전은 1차 대전중 이 사건이 유일하며, 해전사상으로도 1905년 쓰시마(Tsushima)에 이어 두번째이자 마지막이다]
유틀란트 해전은 1916년 5월 31일 덴마크의 유틀란트 근방 북해(North Sea)에서 발발하였다. 라인하르트 쉐어(Reinhard Scheer) 해군 중장이 이끄는 독일 제국 해군(Imperial German Navy)의 대양함대(Horchsee Flotte, High Seas Fleet)와 해군 대장 존 젤리코 경(Sir John Jellicoe)이 지휘하는 영국 왕립 해군(British Royal Navy)의 대함대(Grand Fleet)가 이 해전에 참가하였다. 독일 해군의 목표는 영국 해군을 유인해 함정에 빠뜨리고 궤멸시키는 것이었지만 당시 독일 전투함들의 수는 이 계획을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못하였다. 작전이 성공하였다면 독일은 영국의 북해 해상봉쇄를 분쇄하여 독일 상선들이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반면 영국 해군의 목표는 독일 대양함대를 찾아내 격파하거나 최소한 영국의 항로 멀리 쫓아버리는 것이었다.
[유틀란트 해전은 1916년 5월 31일 덴마크의 유틀란트 근방 북해(North Sea)에서 발발하였다. 라인하르트 쉐어(Reinhard Scheer) 해군 중장이 이끄는 독일 제국 해군(Imperial German Navy)의 대양함대(Horchsee Flotte, High Seas Fleet)와 해군 대장 존 젤리코 경(Sir John Jellicoe)이 지휘하는 영국 왕립 해군(British Royal Navy)의 대함대(Grand Fleet)가 이 해전에 참가하였다]
독일의 대양함대는 16 척의 드레드노트 전함(dreadnought battleship)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전력상 영국의 해군력에 뒤지고 있었다. 영국의 대함대는 28 척의 드레드노트 전함이 있었기 때문에 전면 격돌시 독일이 승리할 확률은 희박하였다. 독일은 영국 함대를 분산하여 각개격파하는 전략을 세웠다. 북해를 통해 영국의 연안을 포격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타나는 영국 전투함들을 전력 우위에 있던 잠수함을 동원해 하나 하나 제거해나가겠다는 것이었다.
많은 수의 유보트(U-boat) 잠수함들이 매복한 가운데 프란츠 히페르(Franz Hipper)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5 척의 최신 독일 고속 순양전함들이 영국 선덜랜드(Sunderland)를 습격, 해군 중장 데이빗 비티 경(Sir David Beatty)의 순양전대를 도발하여 유인하였다. 그러나 독일에게는 불행히도 영국은 과거 1914년 러시아에서 나포된 SMS 마그데부르크(SMS Magdeburg) 경순양함에서 확보한 독일군 암호책자를 가지고 있었다. 5월 30일의 작전을 위해 전 함대에 준비태세 명령을 내리는 독일군의 무선 암호 교신을 5월 28일 포착한 영국군은 추가 교신 내용들을 계속 해독하면서 독일의 계획을 훤히 파악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독일 대양함대 주전력의 출항 여부를 알지 못하였다. 젤리코는 독일이 출항하기 전에 노르웨이 해역을 점거해 독일이 스카게라크(Skagerrak)를 통해 북대서양이나 발틱(Baltic) 해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함대를 출동시켰다. 젤리코의 대함대는 24 척의 전함과 3 척의 순양전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함대는 5월 30일 스캐퍼 플로(Scapa Flow)에 도달하였고 6 척의 순양전함과 4 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비티의 함대는 다음날 포스만(Firth of Forth)을 출항하였다. 젤리코의 계획은 스카게라크와 유틀란트의 170 km 서쪽 해역에서 비티의 함대와 조우하여 독일 함대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유틀란트 해전에 영국군의 최신 고속전함인 퀸엘리자베스급 5척도 참전하여 맹활약을 하게 된다]
이 시기의 해전 전술은 병렬 종대로 늘어서서 가시성을 희생하는 대신 지휘성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깃발이나 조명을 통해 상호 교신하던 시절 만들어진 대형이었다. 대형 내의 함선들은 거의 인접한 함선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제독의 명령은 함선들의 교신을 타고 차례로 전해져야 하였고, 명령 전달 효율성을 위해 기선이 대개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문제는 함선이 풍력 대신 화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막대한 양의 연기를 내뿜기 시작하였고 나쁜 가시성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이었다. 기선으로부터의 명령 전달은 예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명령이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확인하는 과정도 추가되어야 하였다.
적과 조우하게 되면 대형은 대개 일렬 종대로 바뀌었는데, 적에게 아군 함선을 최소한으로 노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선봉에서 정찰을 담당하는 순양전함이나 순양함은 파악한 적의 위치와 속도, 진행방향을 제독에게 전달하였고 적의 정찰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일렬로 늘어선 대형의 강점은 적의 대형과 T자 형으로 조우하였을때 빛났다. 아군은 최대한의 화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반면 적은 제일 앞의 전투함만이 대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개 영국의 전투함들은 독일보다 큰 화포들을 장비하였고, 보다 먼 거리에서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 보다 먼 거리에서 포격이 가능하다면 장갑이 가벼울지라도 적의 사정권 밖에서 안전한 공격이 가능하다. 영국 해군의 재건을 이끈 재키 피셔(Jackie Fisher) 해군 대장은 이와 같은 이유로 대구경포와 속도를 특히 중시하였다.
[유틀란트 해전의 주역인 영국군의 해군 대장 존 젤리코 경(Sir John Jellicoe)이 지휘하는 영국 왕립 해군(British Royal Navy)의 대함대(Grand Fleet)가 이 해전에 참가하였다.우측은 해군 중장 데이빗 비티 경(Sir David Beatty)의 모습으로 독일해군을 유인하는 역활을 잘 맡아 해주었다]
반면 독일 해군을 건설한 알프레드 폰 틸피츠(Alfred von Tirpitz) 해군 대장은 침몰하지 않는 함선의 건조에 총력을 기울여 화포를 다소 희생하더라도 장갑이 두터운 함선을 건조하였다. 독일의 순양전함 데르플링게르(Derflinger)의 장갑판 두께는 영국 순양전함 타이거(Tiger)를 뛰어넘어 전함 아이언 듀크(Iron Duke)에 맞먹을 정도였다. 독일은 또한 승무원들의 쾌적함을 크게 희생하면서 선박 내에 격벽을 많이 설치하였고 출입문의 갯수를 줄임으로써 선체의 약점을 최소화하였다. 때문에 영국 선원들이 함선을 집처럼 생각한 반면 독일 선원들은 함선은 항해의 도구일 뿐이라 생각하며 항구의 병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독일해군에는 라인하르트 쉐어(Reinhard Scheer) 해군 중장(좌) 과 프란츠 히페르(Franz Hipper) 해군 중장 (우)이 영국해군과 일대 격적을 벌이게 된다]
젤리코의 함대는 둘로 나뉘었다. 주력인 드레드노트 전함대는 24 척의 전함과 3 척의 순양전함, 8 척의 순양함과 12 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51 척의 구축함과 1 척의 기뢰함으로 구성되었으며 24 척의 전함은 3개 편대로 구성되었다. 데이빗 비티의 정찰함대는 6 척의 순양전함과 4 척의 퀸엘리자베스급(Queen Elizabeth class) 고속 전함, 14 척의 경순양함, 27 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되었다. 해전에 투입된 사상 최초의 항공모함중 하나인 HMS 엔가딘(HMS Engadine)에는 몇 대의 정찰기가 탑재되어 있었다.
[1916년 3월31을 두 함대는 최초로 조우하게 된다]
독일 대양함대 또한 본함대와 정찰함대로 구분되어 있었다. 쉐어의 본함대는 16 척의 전함과 6 척의 구식 드레드노트 전함, 6 척의 경순양함, 31 척의 어뢰정으로 구성되었으며 프란츠 히페르의 정찰함대는 5 척의 순양전함, 5 척의 경순양함, 30 척의 어뢰정으로 구성되었다. 독일 함대에는 엔가딘과 같은 항모는 없었지만 해군 정찰기들이 북해 상공을 초계 비행중이었다.
독일 함대는 6 척의 구식 드레드노트 전함 때문에 전체적으로 속도를 늦추어 진행하여야 하였다. 영국 함대 측면에서는 8 척의 장갑 순양함이 속도와 장갑 면에서 열세였다. 양측의 이 구식 전력은 근대식 전투함의 공격에 지극히 취약하였다.
유보트들의 매복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들은 단 한척의 영국 전투함도 격침시키지 못하였던데다가 어떠한 정찰 정보도 제공하지 못하였다. 젤리코의 함대는 피해를 입기는 커녕 발견되지도 않은채 비티와의 합류지점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젤리코는 독일 본함대가 아직 항구에 정박중이라는 해군 정보부의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작전부를 담당하고 있던 해군 소장 토마스 잭슨(Thomas Jackson)이 정보부에 콜사인 DK 를 사용하는 독일 함대의 위치를 조사하도록 하였을때 정보부는 그들이 빌헬름스하벤(Wilhelmshaven)에 있다고 하였다. 당시 영국 정보부는 독일이 육지와 바다에서 각각 다른 콜사인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잭슨이 문의한 것이 DK 였기 때문에 해당 정보를 알려준 것이었다.
5월 31일 14:20 시경 아지랑이와 안개를 뚫고 돌아온 비티 함대의 정찰대는 독일 함대가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영국의 정찰대가 양측 함대 사이를 지나던 중립국 덴마크의 증기선(N J Fjord)을 조사하는 동안 마찬가지로 이 증기선을 조사하고자 독일 구축함 두척(B109, B110)이 나타났다. 영국 제 1 경순양함 편대 소속 경순양함 갈라테아(Galatea)와 파이손(Phaeton)은 14:28 시경 자신들을 발견하고 퇴각하는 두 독일 구축함에 첫 포격을 시작하였다. 프리드리히 뵈디케르(Friedrich Bodicker) 소장이 지휘하던 독일 정찰대는 즉각 반격하였고, 엘빙(Elbing)이 14:36 시경 초장거리에서 갈라테아에게 첫 명중탄을 날렸다.
[영국해군의 해군 중장 데이빗 비티 경(Sir David Beatty)의 유인작전에 말려든 독일해군의 함선들은 하나하나 격파당하기 시작했다]
같은시각 비티는 엔가딘의 함상기들에게 독일 함대의 규모와 정확한 위치를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해전사상 최초로 함상기가 정찰에 나선 사례로 기록되었다. 엔가딘의 함상기들은 15:30 시경 독일 경순양함을 발견하여 보고하였다. 독일은 대공포로 맞섰지만 격추에는 실패하였다. 비티는 보고에 따라 항로를 수정하였지만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깃발 신호를 보지 못한 휴 에반-토마스 경(Sir Hugh Evan-Thomas)의 제 5 전투편대는 기존의 항로로 나아갔다. 이때문에 당시 가장 최신 기술로 건조되어 가장 빠르고 가장 잘 무장된 퀸엘리자베스급 전함 네척이 엉뚱한 항로로 항해하게 되었다. 결국 비티의 함대는 전력이 나뉘어 화력 우위라는 이점을 상당부분 잃어버렸다.
독일 함대측의 가시성은 영국측보다 나았다. 히페르는 15:22 시경 28 km 거리에서 비티의 함대가 내뿜는 연기를 포착하였지만 비티의 함대는 15:30 시까지 독일 함대의 위치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15:45 시경 히페르는 남동으로 진로를 변경하여였다. 비티를 85 km 떨어진 쉐어의 대양함대 방면으로 이끌고자 한 것이었다.
영국 함대는 독일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하였지만 좋지 못한 기상상태에다 자신들의 연기와 포연으로 가시성이 나빠서 포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회색빛 하늘 때문에 독일의 회색 전함들의 거리를 측정하기도 어려웠다. 독일측은 우수한 가시성을 무기로 영국 순양전함 6 척중 3 척에 명중탄을 기록하였다. 영국 함대가 첫 명중탄을 기록한 것은 7분이 지나서였다.
16:00 시경 독일함대 기선 뤼초우(Lotzow)의 305 mm 함포 사격이 기선 라이온(Lion)의 함포에 작렬했다. 십여명의 승무원들이 즉사하였으며 해병대 출신 함포 지휘관 프랜시스 하비(Francis Harvey) 소령은 치명상에도 불구하고 탄약고 Q의 문을 닫았다. 16:28 시경 포탄이 재차 명중하면서 탄약고 주위의 모든 승무원들이 모두 사망하였지만 탄약고 문을 닫아둔 덕에 대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데패티거블(Indefatigable) 호는 운이 좋지 못했다. 16:02 시경 폰 데어 탄(Von der Tann) 호의 280 mm 함포 공격을 받은 인데패티거블은 포탄은 얇은 포탑 상면을 관통해 탄약고 유폭을 일으켰다. 인데패티거블은 폭발과 함께 두동강이 났으며 곧바로 침몰해 1,019 명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생존자는 2명이었다. 퀸 메리(Queen Mary) 호는 16:25 시경 데르플링게르와 자이들리츠(Seydlitz)의 협공을 받고 탄약고 폭발을 일으켰다. 퀸 메리는 침몰하며 장병 1,275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생존자는 9명이었다.
15:48 시부터 16:54 시까지 독일 순양전함들은 라이온에 9발, 프린세스 로열에 6발, 퀸 메리에 7발, 타이거에 14발, 뉴질랜드(New Zealand)에 1발, 인데패티거블에 5발, 그리고 바함(Barham)에 2발의 포탄을 명중시켰다. 같은 시간동안 영국은 뤼초우에 4발, 자이들리츠에 5발, 몰트케(Moltke)에 6발, 폰 데어 탄에 2발을 명중시켰다.
16:30 시경 쉐어의 본함대는 멀리서 포격을 주고받고 있는 양측 함대를 포착하였다. 사우스햄프턴(Southampton)에 탑승하여 비티의 제 2 경순양함 편대를 지휘하던 준장 윌리엄 굿이너프(William Goodenough)는 쉐어의 본함대를 발견하고 포격 회피 기동에 들어가면서 대양함대의 전력을 16 드레드노트, 6 구형 전함으로 보고하였다. 비티와 젤리코는 이때 비로소 대양함대가 이미 바다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자이들리츠는 16:57 시경 영국 구축함 페타드(Petard)의 어뢰에 맞아 침수가 시작되었지만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배리 빙햄(Edward Barry Stewart Bingham) 대위가 지휘하는 구축함 네스터(Nestor)가 영국측의 공격을 이끌었다. 영국은 독일 어뢰정 V27을 무력화시켰고 V27은 승무원들이 배를 버린 이후 가라앉았다. 페타드는 어뢰로 V29를 침몰시켰고 S35와 V26은 바다위에 떠있는 아군 승무원들을 구조하였다. 독일은 네스터와 노매드(Nomad)를 무력화시킨후 가라앉혔다. 배리 빙햄은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독일측에 구조되어 포로가 되었으며 종전후 이날의 영웅적인 업적을 인정받아 빅토리아 십자훈장(Victoria Cross)을 받았다.
16:40 시경 22 km 지점에서 쉐어의 전열을 육안으로 확인한 비티는 함대의 진로를 180도 선회하여 북쪽으로 도주하며 독일 함대를 젤리코에게 유인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상황은 반대가 되었다. 16:47 시경 굿이너프로부터 신호를 받은 젤리코는 비티가 독일 함대를 유인해 오고 있음을 알았다. 젤리코는 전 함대에 이동 명령을 내리면서 16:51 시경 사령부에 연락을 취했다.
신호 문제로 뒤쳐졌던 휴 에반-토마스의 전함들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비티는 선회하여 젤리코의 본대 방향으로 향할 것을 지시하였지만 상황에 분노해 있던 신호담당 랄프 세이무어(Ralph Seymour)는 신호를 지연시켰고 에반-토마스의 전함들은 독일 전함들의 사정거리 내로 들어간 16:54 시경에야 선회 명령을 받았다. 영국 전함들은 비티의 후미에 붙어서 독일 함선들의 포격을 감당해야만 했다. 17:45 시까지 라이온은 4발, 바함은 4발, 워스파이트(Warspite)는 2발, 말라야(Malaya)는 7발의 포격을 맞았으며 피해를 입지 않는 전투함은 밸리언트(Valiant) 뿐이었다. 비록 말라야의 피해는 심각하여 많은 승무원들이 전사하였지만 퀸엘리자베스급 전투함들의 내구성이 훌륭하여 침몰된 배는 한척도 없었다. 이들은 반격하여 뤼초우에 4발, 데어플링게르에 3발, 자이들리츠에 6발을 명중시켰으며 독일 전함들에게도 5발을 명중시켰지만 어느정도 피해를 입은 것은 마르크그라프(Markgraf) 뿐이었다.
젤리코는 비티를 구원하고자 호레이스 후드(Horace Hood) 소장의 제 3 순양전함 편대에게 본대를 앞질러 비티의 함대를 찾을것을 지시하였다. 17:33 시경 젤리코 함대 남서쪽에서 항해하던 소장 로버트 알버스넛 경(Sir Robert Arbuthnot)의 제 1 순양함 편대 소속 장갑순양함 블랙프린스(Black Prince)가 비티와 9 km 거리에 있던 팰머스(Falmouth) 호를 발견하였다. 17:38 시경 후드의 편대에 소속된 순양함 체스터(Chester) 앞에 뵈디케르 소장의 독일 정찰함대가 출현하였다. 4척의 독일 경순양함에게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던 체스터는 후드 소장의 편대에 구원을 받았다. 후드의 기선 인빈서블(Invincible)은 17:56 시에 비스바덴(Wiesbaden)을 타격하여 기동력을 상실시켰지만 비스바덴은 어뢰를 발사하며 저항을 계속하였다. 뵈디케르는 후드의 편대가 영국 본함대 전력일 것이라고 착각해 자국의 본함대 방면으로 유인하고자 후퇴명령을 내렸다. 구축함간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영국 구축함 샤크(Shark)가 기동불능이 되었지만 이후 한시간 가까이 저항을 계속하였다.
[유틀란트 해전은 몇배에 달하는 전력차에도 불과하고 영국의 강력한 해군을 상대로 당당하게 맞선 독일해군의 위력을 보여준 전투이다]
차츰 영국측의 가시성이 호전되기 시작하고 18:00 시경 젤리코의 기선 아이언 듀크는 비티의 기선 라이온의 위치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젤리코는 대함대 전력을 전투대형으로 변환할 시간을 재기 위해 비티에게 독일 대양함대의 마지막 위치를 요구하였지만 응답이 온 것은 18:14 시였다. 18:15 시에 전투대형을 명령한 젤리코의 대함대는 이 지연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
독일의 포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비티의 함대는 구원온 후드 및 알버스넛의 함대와 항로가 교차되면서 수차례 아군간 충돌의 위기를 넘겼다. 알버스넛의 장갑순양함 워리어(Warrior)와 디펜스(Defence)는 기동성을 잃은채 떠있는 비스바덴에게 결정타를 날리고자 다가갔다가 뒤에서 나타난 독일 대양함대의 집중포격을 받았다. 디펜스는 대폭발을 일으키며 903명의 장병과 함께 가라앉았고, 워리어는 가까스로 탈출하였지만 심각한 타격으로 다음날 버려져 가라앉았고 승무원들은 엔가딘으로 옮겨졌다. 계속된 고속항해로 과열을 일으킨 워스파이트는 13발의 타격을 입고도 침몰은 면했지만 항구 복귀 명령을 받고 전선을 이탈하였다.
디펜스가 침몰하고 워스파이트가 퇴각하던 18:19 시경 히페르는 비티와 후드의 함대 사정권으로 들어갔다. 영국측의 가시성도 호전된 상태였다. 인다머터블(Indomitable) 호는 데르플링게르에 3발, 자이들리츠에 1발을 명중시켰고, 뤼초우는 라이언, 인플렉서블(Inflexible), 인빈서블으로부터 10발의 타격을 받았다. 특히 인빈서블로부터 날아온 2발의 선체 하부 타격이 심각한 피해를 야기하였다. 그러나 뤼초우는 데르플링게르와 반격을 하여 18:30 시에 인빈서블을 향해 3차례의 일제 포격을 퍼부어 격침시켰다. 인빈서블은 탄약고 유폭을 일으키며 90초만에 가라앉았고 생존자 6명을 제외한 승무원 1,032 명이 수장되었다. 소장 후드도 인빈서블과 운명을 함께하였다. 뤼초우는 복수를 마치고 침수가 심각하여 전선을 이탈하였다. 히페르는 구축함 G39로 옮겨갔다.
18:30 시경 안개를 뚫고 나아간 쉐어의 대양함대 앞에 젤리코의 전투대형이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대함대의 등장에 쉐어는 경악하였다. 만일 젤리코의 함대가 보다 빨리 전투대형으로 전이되었다면 독일측의 피해는 막심하였을 것이다. 젤리코의 기선 아이언 듀크는 독일 함대의 선두에 있던 드레드노트 쾨니히(Konig)에 7발의 포탄을 명중시켰다. 대양함대는 나빠진 가시성에다 전술적 위치도 불리하였다. 쉐어는 18:33 시에 전 함대에 후퇴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일사불란하게 180도 선회하여 퇴각하는 기술은 대양함대가 수많은 훈련을 거친 것이었다.
젤리코는 곧장 추격하지 않고 대양함대와 일정 거리를 둔채 대양함대의 동편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바다에 멈춰 떠있던 비스바덴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국 함대에 어뢰 공격을 가해 18:54 시에 말보로(Marlborough)를 타격, 속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쉐어는 아직 날이 충분히 어두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퇴각시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다시 진로를 바꾸어 제리코의 함대와 맞섰다. 제리코의 함대는 전투대형을 갖춘 뒤였다.
한편 비스바덴과 마찬가지로 바다위에 떠있던 구축함 샤크는 4 척의 독일 구축함과 교전을 계속하여 V48을 기동불능으로 만들고 19:02 시경 S54의 어뢰 공격에 침몰하였다. 열악한 상황에서 끝까지 분전한 함장 로프터스 존스(Loftus William Jones)에게는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수여되었다.
19:00 시경 회피하였던 굿이너프의 편대가 복귀하여 전선에 참가하였다. 젤리코는 완성된 T자 대형으로 독일 대양함대에 맹공을 퍼부었다. 쾨니히, 그로세르 쿠르푸르스트(Grosser Kurfurst), 마르크그라프, 카이저(Kaiser), 그리고 헬고란트(Helgoland)가 타격을 입었지만 영국측의 피해는 콜로수스(Colossus)가 자이들리츠에게 2발의 경미한 타격을 받은것에 불과하였다.
[영국해군은 다수의 전함을 가지고 있엇지만 자만하지 않고 침착하게 독일군의 전함들을 한척한척 격파해내가며 승리에 다가서고 있었다] 그림은 퇴각하는 독일해군을 추격중인 영국해군으 모습]
19:17 시 쉐어는 임전선회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영국의 포격으로 일부 대열이 붕괴되기 시작한 결과 회피기동은 더 어려운 것이었다. 영국의 추격을 방해하기 위해 구축함에 어뢰공격 명령을 내린 쉐어는 정찰편대의 순양전함 네척을 희생양으로 삼아 영국측으로 돌격시켰지만 히페르는 구축함 G39에 탑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함대를 지휘할 수 없었다. 데르플링게르 함장 하르토흐(Hartog)는 히페르를 대신하여 이미 심각한 피해를 입고있던 순양전함들을 해전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포화가 작렬하고 있는 곳으로 돌진시켰다. 18척의 영국 전함들이 동시에 포격을 하였고, 데르플링게르는 포탑 두개가 전파되고 승무원 대부분이 전사하였지만 대양함대가 위기를 벗어날때까지 침몰하지 않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19:05 시부터 19:30 시까지 독일 함대는 총 37 발의 피격을 당하였는데, 이중 14 발이 데르플링게르에게 집중되었다.
순양전함들에게 시간을 벌도록 한 쉐어는 연막탄을 터뜨리며 전장을 빠져나갔다. 19:16 시경부터 19:40 시경 영국 전함들은 어뢰를 발사하며 파상공격을 해오는 쉐어의 구축함들을 상대하였다. 젤리코의 함대는 어뢰를 피해 반격하여 S35와 샤크와의 전투로 기동성을 상실한 V48을 격침시켰다. 쉐어의 이러한 퇴각 전략으로 영국 대함대는 밤이 되기 전까지의 귀중한 시간을 잃어버렸다.
일몰 직후인 20:19 시경부터 20:35 시경에는 영국 순양전함들이 독일 구식 드레드노트들을 포착하여 공격하였다. 영국측은 프린세스 로열에 가볍지 않은 타격을 한차례 입었지만 자이들리츠에 5발 이상, 그리고 다른 독일 함선들에도 3발의 타격을 가했다. 석양이 사라지고 어둠이 뒤덮일 즈음 킹 조지 5세(King George V) 호는 베스트팔렌(Westfalen) 호와 몇차례 포격을 주고받았지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였다. 이로써 1차 대전 마지막 드레드노트 충돌이 종결되었다.
21:00 시경 젤리코는 새벽이 올때까지 대규모 해전을 피하기로 결정하였다. 젤리코는 대함대 후방 5마일 거리에 순양함과 구축함을 배치하여 순시를 시키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쉐어의 예상 철수 경로를 따라갔다. 젤리코의 후방에서 순시하던 순양함과 구축함들은 이날 밤 동안 7차례 독일 함선을 발견하였지만 기선으로의 무선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독일측의 주파수 교란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유사시 독일 함대의 발길을 잡을 것이라는 젤리코의 기대도 빗나갔다. 독일 함대는 남쪽 경로 대신 이들 순시선들을 돌파해 북쪽으로 철수한 것이다. 북쪽으로부터 요란한 포격소리가 들려왔지만 젤리코와 지휘관들은 이것이 잔류 구축함들과의 교전일뿐 대양함대 본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HMS Indefatigable sinking after being struck by shells from the German battlecruiser Von der Tann]
야간의 몇 차례 교전으로 굿이너프의 기선 사우스햄프턴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프로이엔랍(Frauenlob)에게 어뢰를 발사해 침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프로이엔랍은 320 명의 장병과 함께 가라앉았다. 23:20 시경부터 다음날 02:15 시경까지 여러 척의 영국 구축함들이 독일 함대에 어뢰를 발사하였고 교전은 근거리에서 혼란스럽게 전개되었다. 영국측은 티퍼러리(Tipperary), 아덴트(Ardent), 포춘(Fortune), 스패로우호크(Sparrowhawk), 그리고 터뷸런트(Turbulent)까지 총 5척의 구축함을 잃고 여러 척이 피해를 입었지만 독일 경순양함 로스토크(Rostock)에게 어뢰를 적중시켜 수시간후 가라앉게 만들었으며 구형 드레드노트 폼메른(Pommern) 호를 844 명의 승무원과 함께 가라앉혔다. 영국 구축함 3 척이 혼란 속에서 서로 충돌하였다. 독일 전함 낫소(Nassau)가 영국 구축함 스핏파이어(Spitfire)를 들이받아 반파시켰으며 그 자신도 뱃전에 구멍이 난채 속도를 줄여 퇴각하였는데, 낫소의 파편은 스핏파이어의 갑판 위에서 발견되었다. 스핏파이어는 가까스로 항구로 돌아가는데 성공하였다. 독일 순양함 엘빙은 드레드노트 포젠과 충돌하여 버려졌으며 다음날 아침에 가라앉았다.
[독일해군의 포격을 받도 불타는 HMS Queen Mary 의 모습]
6월 1일 자정이 지났을 즈음 독일 전함 튜링겐(Thuringen)과 몇 척의 전함들은 마구잡이 사격을 하다 운나쁘게 사선에 뛰어든 블랙 프린스를 잡았다. 블랙 프린스는 857 명의 승무원과 침몰하였으며 생존자는 없었다. 몰트케와 자이들리츠는 영국 사선에 포착되었지만 지휘관이 포격을 주저하여 운좋게 살아남았다. 전날 인빈서블의 공격으로 입은 피해가 더이상 수습이 어려워진 뤼초우에서는 1,150 명의 선원들이 주위 구축함으로 대피하였으며 함장 빅토르 폰 하르데르(Viktor von Harder)의 명령을 받은 구축함 G38은 뤼초우에 어뢰를 발사해 침몰시켰다. 구축함 V4는 02:15 시경 알수없는 폭발을 일으켰고 V2와 V6이 생존자들을 구조한 후 V2가 버려진 V4를 침몰시켰다. 근방에는 영국 함선이 없었기 때문에 이 폭발은 기뢰 또는 잠수함 공격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02:15 시경 제임스 패리(James Uchtred Farie)가 지휘하는 영국 제 13 구축함 선대 소속 구축함 5척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남하하던중 대양함대의 후미를 발견하였다. 아군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 이들은 조용히 물러났지만 모어스비(Moresby) 호는 고속 어뢰를 하나 발사하고 물러났다. 폰 데어 탄은 다가오는 어뢰를 발견하고 가까스로 회피하였지만 대열로 돌아온 모어스비는 명중으로 주장하였다.
05:20 시경 쉐어의 대양함대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독일 전함 오스트프리슬란트(Ostfriesland)가 기뢰를 건드려 1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하였지만 침몰하지 않았다. 자이들리츠는 침몰 직전인 상태로 귀환하였다. 독일 함대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탈출에 성공한 것은 영국 해군 지휘부의 역할이 컸다. 지휘부는 이날 밤 정보부에서 7차례에 걸쳐 전달한 독일 함대의 위치와 항로 정보를 무시하였다. 정보를 전달해야 할 젊은 장교가 태만했던 탓에 젤리코가 독일 함대의 이동 정보를 받아본 것은 이미 너무 늦은 04:15 시경이었다.
유틀란트에서 독일은 99 척의 전투함을 가지고 115,000 톤에 달하는 영국 전투함들을 격침시켰으며 영국은 151 척으로 62,000 톤을 격침시켰다. 영국은 6,094 명을 잃었고 독일은 2,551 명을 잃었다. 피해는 극심했지만 결과적으로 북해 지역의 제해권은 영국의 손에 남았다. 전술적 측면에서 이 해전은 독일의 승리이거나 무승부로 평가된다.
영국은 숫적으로 우세하였지만 트라팔가(Trafalgar)에서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였다. 대양함대는 전력 대부분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다. 자이들리츠와 같이 극심한 피해를 입은 전투함들도 겨울이 오기 전에 모두 수리를 마치고 복구되었다. 독일 또한 영국 함대를 각개격파하는 당초 목표를 이루진 못하였다.
전략적 관점에서 영국은 대양함대를 제거하지도 못하였고 더 많은 피해를 감수하여야 하였지만 북해의 제해권을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상처뿐인 영광일지라도 승리로 평가할 수 있다. 독일 함대는 이후 1916년 8월 18일과 10월경 단 두차례의 출항을 하였을 뿐이다. 대양함대는 더이상 영국 대함대와 마주치는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남은 전쟁기간 대부분을 항구에서 보냈다. 독일의 제해권 도전은 실패로 종결되었으며 독일 지휘부는 이 날의 패배가 마지막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영국은 남은 전쟁기간 내내 24 척의 드레드노트와 4 척의 순양전함을 가동함으로써 10 척의 전력을 남긴 독일에게 수적 우위를 유지하였다. 워스파이트와 말라야는 수리에 들어갔지만 퀸 엘리자베스(Queen Elizabeth) 호와 엠퍼러 오브 인디아(Emperor of India), 리솔루션(Resolution), 라미레즈(Ramillies)가 새로 배치되었으며 프린세스 로열과 타이거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호로 교체되어 대함대는 유틀란트 해전 당시보다 더욱 강력해졌다. 또한 피해를 입은 함선들의 수리 및 일선 복귀도 독일보다 빨랐다.
[완성되자 마자 바로 실전에 들어간 퀸엘리자베스급 고속전함의 2번함인 워스파이트에 작열하는 독일해군의 포탄들 이 전투로 워스파이트는 상당힌 피해를 입고 겨우 회항할수 있었다]
유틀란트 해전은 전함간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으로 남았다. 이 해전 이후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전략을 변경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많은 전함들이 건조되기는 하였지만 이는 해군 지휘부의 구습 답보 차원인 경우가 많았다. 실제적으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함이 담당하게 된 몫은 지극히 작아졌으며 항공모함이 해군의 가장 강력한 전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젤리코는 대양함대를 놓쳐 제 2의 트라팔가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는 비난을 받고 전선을 벗어나 사령부로 인사이동 되었다. 그의 자리는 비티가 대신하였지만 비티 또한 전투 초반에 보인 지휘의 미숙함 때문에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젤리코와 비티에게 비난이 쏟아진만큼 쉐어에겐 찬사가 이어졌다. 절대 우위의 적을 대면하여 전력 대부분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퇴각에 성공한 기술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네스터 함장 배리 빙햄, 체스터 함장 존 콘웰(John Travers Cornwell), 샤크 함장 로프터스 존스는 이 전투로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라인하르트 쉐어와 프란츠 히페르는 최고 무공훈장인 푸어 르 메리떼(Pour le Merite)를 받았다.
2006년 유틀란트 해전 90주년 기념일에 영국 안보부는 14 척의 함선이 침몰한 해역을 군사유물 보호법(Protection of Military Remains Act.)에 따라 보호지역으로 선포하였다. 전투 생존자중 최고령자는 2006년 당시 112 세였던 해군 조종사(공군으로 전출) 헨리 알링햄(Henry Allingham)이었으며 작전에 참가한 선박중 현존하는 유일한 전투함은 현재 북에이레(Northern Ireland) 벨파스트(Belfast)에 있는 보존되어 있는 경순양함 캐롤라인(HMS Caroline)이다.
[ 전투 생존자중 최고령자는 2006년 당시 112 세였던 해군 조종사(공군으로 전출) 헨리 알링햄(Henry Allingham) 의 모습]
[유틀란트 해전의 참전 함의 수량으로 영국해군은 독일해군의 거의 배에 가까운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주력함대를 놓치는 바람에 궤멸을 주지는 못했다]
위키사전 발췌. http://www.cursedsoul.com/home/?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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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틀란트 해전은 퀸 엘리자베스급의 뛰어난 성능을 유감없이 보여준 해전이기도 했지만 퀸엘리자베스급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전투이기도 했는데 이 전투에서 예상외의 원거리에서 포격전이 벌어졌고 이로인해 발사된 포탑들은 거의 포물선을 그리며 전함의 측면이 아닌 갑판을 때리게된바, 겨우 46밀리 두께의 갑판을 가진 퀸 엘리자베스급은 이로인해 많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결국 이 전투후에는 장갑강화와 탄약고의 방염대책 그리고 주수장치의 개선등의 개량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유틀란트 해전은 퀸 엘리자베스급의 뛰어난 성능을 유감없이 보여준 해전이기도 했지만 퀸엘리자베스급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전투이기도 했는데 이 전투에서 예상외의 원거리에서 포격전이 벌어졌고 이로인해 발사된 포탑들은 거의 포물선을 그리며 전함의 측면이 아닌 갑판을 때리게된바, 겨우 46밀리 두께의 갑판을 가진 퀸 엘리자베스급은 이로인해 많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결국 이 전투후에는 장갑강화와 탄약고의 방염대책 그리고 주수장치의 개선등의 개량이 이루어지게 된다]
1차대전이 끝난후 유럽에 군축협약에 의해 대부분의 함선들은 ‘함선들의 휴일’ 이라 불리는 긴 휴지기를 갖게 되는데 이때 퀸 엘리자베스급은 유틀란트 전투의 경험을 살려 대대적인 개장을 가하게 됩니다.
이 개장에는 퀸 엘리자베스와 워스파이트 그리고 밸리언트등이 두번에 거친 큰 개장작업을 거치게 되며 이 개장으로 인해 외형의 형태도 많은 변화가 있게 됩니다.
[1차대전 이후 퀸엘리자베스급은 2차례의 개장이 있게 되는데, 이 개장에는 퀸 엘리자베스와 워스파이트 그리고 밸리언트등이 두번에 거친 큰 개장작업을 거치게 되며 이 개장으로 인해 외형의 형태도 많은 변화가 있게 된다.]
이 개장의 주요점은 수중어뢰의 공격으로부터 선체를 보호하기 위한 벌지(bulge) 의 장착 포탑상면의 장갑강화, 주포양각 증대에 따른 포사정거리 연장, 대공포탑 강화 (대공전투력강화), 박스형 신형함교설치등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말라야. 바함등은 그정도의 대규모의 개장이 이루어지지 않아 성능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3척보다는 좀 떨어지게 됩니다.
2차대전의 발발 그리고 노병의 재출전!!
2차대전이 일자 이들 퀸 엘리자베스 급 전함들은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비록 1차대전 당시 개발된 구형전함이였지만 개장을 통한 현대화 작업으로 성능이 높아졌고 속도면에서 25노트를 내는 전함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 개발된 R형 전함 역시 이보다 속도가 늦었다) 마음껏 활약을 펼 수 있었습니다.
이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중 바함만이 1941년 독일해군의 유보트에 위해 격침되지만 네척은 대전 내내 독일해군을 상대로 맹활약을 하게 되는데, 특히 2번함 워스파이트는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당시 벌어진 나르빅해전(Battles of Narvik)에서 독일구축함 10척을 다른 영국군 구축함들과 협동하여 격침시키는 활약을 펼치기도 하였으며 이어 지중해의 마타판 곶 해전(Battle of Matapan) 에서는 이탈이라 중순양함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는등 2차대전중 가장 많은 활약을 펼친 전함으로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됩니다. (이번에 아카데미에서 퀸 엘리자베스 급 전함중 워스파이트를 먼저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는듯) 그밖에 퀸 엘리자베스와 말라야 등은 2차대전 전반에는 선단호위등의 임무에 대전후반에는 동양함대에 배치되어 일본해군을 상대로 맹활약을 하게 됩니다.
나르빅 해전(Battles of Narvik)
눈은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전쟁에서 많은 영향을 주는 기상요소다. 야전군의 시계와 기동을 방해하며, 항공기에는 착빙으로 영향을 준다. 이런 눈의 특성을 이용해 영국은 나르빅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독일은 무기를 만들기 위한 철광석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다. 독일은 철광석의 3분의 1 이상을 스웨덴 광산으로부터 수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스웨덴의 항구는 겨울 동안에 얼어붙어 철광석 확보가 어려웠다. 히틀러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노르웨이의 항구들을 점령하기로 한다.
[나르빅 지역은 북극에서 방하가 흘러들어 녹으면서 생긴 굴곡이 많은 지형이; 특징인 지역이다]
1940년 2월 히틀러는 노르웨이 침공계획을 지시한다. 독일군부는 노르웨이 5대 도시인 오슬로, 크리스티안산드, 베르겐, 트론하임, 나르빅 점령 작전을 수립했다. 해군과 공군의 지원 아래 5개 사단의 육군 병력을 상륙시켜 점령한다는 것이다. 이 중 나르빅 점령 작전은 1940년 4월 9일 실시됐다.
노르웨이 항구들은 다른 항구들과 달리 피요르드(Fjord)-빙하가 흘러내리면서 땅을 깎아 만들어진 계곡에 바닷물이 차서 생긴 협만(峽灣)이라는 독특한 지형 내에 위치한다.
바깥 바다로부터 항구에 도착하려면 급한 절벽을 이룬 좁은 계곡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항구들은 바깥 바다로부터 160㎞나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르빅 항 역시 피요르드 안에 위치해 있었다. 나르빅은 북위 70도 부근에 있어 4월에도 평균기온이 영하를 보이고, 북해로부터 북동진하는 기압골의 영향으로 강한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내리기도 하는 곳이다.
4월 9일 아침 독일군은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와 ‘그나이제나우(Gneisenau)’의 엄호 하에 나르빅 항구로 진격해 들어갔다. 노르웨이 해군 함정 ‘노르게’ 호와 ‘에이즈볼’ 호 2척은 항복하라는 독일군의 지시를 무시하고 저항했다.
[나르빅 지역에서 교전중인 퀸 엘리자베스 2번함 워스파이트의 모습 포연을 내며 포를 발사하는 모습이다 이 전투에서 워스파이트는 독일군 의 각종 함선 10여척을 깨부시는데 일등공신 역활을 하였다]
그러나 독일 순양전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287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제압당해 버렸다. 독일군은 별 어려움 없이 구축함 10척에 나뉘어 탄 2000명의 병력을 나르빅 항구에 상륙시켰다. 너무나 손쉽게 점령에 성공한 것이다.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 작전을 알게 된 영국은 필사적인 저지에 나섰다. 노르웨이의 주요 항구들이 독일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철광석의 독일 수송이 원활해지며, 북해의 제해권이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영국 해군은 동원할 수 있는 전함들을 노르웨이 해안으로 집결시켰다. 최초의 전투는 나르빅 원정군의 호송을 마치고 귀환하던 독일 전함과 영국의 전함 사이에서 벌어졌다. 독일의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영국 순양전함 리나 운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눈발이 날리는 악천후 속에 포격전이 벌어졌다. 독일의 순양전함 그나이제나우가 영국의 포탄에 맞아 사격불능 상태가 되자 샤른호르스트가 연막을 치며 북쪽으로 같이 도망쳤다.
[고속전함 워스타이프를 앞세운 영국군의 공격앞에 독일해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르빅 항에는 독일군 구축함 10척이 있었다. 영국 해군은 나르빅 항구 안에 있는 독일 구축함을 격침하기로 결정했다. 공격함대의 사령관은 ‘워부턴 리(Warbuton Lee)’ 대령이 맡았다. 영국은 ‘하디(Hardy)’ ‘하복(Havoc)’ ‘헌터(Hunter)’ ‘핫스퍼(Hotspur)’ 및 ‘호스틸(Hostile)’ 등 5척의 구축함밖에 없었다. 독일 전력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영국기상대의 예보에 의하면 내일 나르빅 지역에는 눈보라가 치겠다고 한다. 내일 새벽 나르빅의 독일 구축함을 공격한다. 만일 눈이 내리지 않더라도 불시의 기습으로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
[피격되어 좌초된 독일해군의 함선 이 전투에서 독일해군은 10여척의 각종 함선을 잃었다]
4월 10일 새벽 강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이때 나르빅 항에 있는 독일군의 전력은 영국의 기습 전력과 비교하면 2배 이상이었고 나르빅 항이 피요르드 깊숙이 위치한 항구였기에, 독일군은 설마 하며 경계를 소홀히 했다.
“자, 앞도 볼 수 없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하나님은 영국을 돕는다. 용맹한 영국의 해군이여, 가자, 나르빅으로!” 영국의 리 대령은 병사들을 독려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피요르드로 돌입했다. 강한 눈보라는 영국 순양전함의 접근을 철저히 감춰 줬다.
나르빅 항 내로 돌입한 리 대령의 구축함은 독일 기함 ‘빌헬름 헬드캄프(Wilhelim Heldkamp)’를 어뢰로 공격해 침몰시켰다. 구축함 ‘안톤 슈미트(Anton Schumit)’도 어뢰 2발로 격침시켰다. 3척의 구축함은 포격전으로 압도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 사령관 ‘본테’ 대장이 전사했다. 영국 해군은 눈보라를 이용한 완벽한 기습공격으로 독일 구축함 2척 격침, 2척 대파, 상선 6척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 것이다.
[좁은 항구안에서 족일해군의 괴멸을 당하게 된다.]
엄청난 전과를 올린 영국 함대가 철수하는 도중 인근에 있던 독일 전함의 공격을 받게 됐다. 독일 구축함 3척이 갑자기 공격해온 것이다. 눈보라는 그쳤지만 지독한 안개로 독일 전함의 접근을 알지 못해 기습을 당한 것이다. 독일 구축함 ‘틸(Thiel)’이 발사한 함포에 워부턴 리 대령이 승선하고 있던 ‘하디’의 함교가 얻어맞았다. 독일 구축함의 맹공으로 영국 구축함 ‘하디’는 대파돼 해안에 좌초됐다. 이 전투에서 나르빅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리 대령이 전사했다.
[엄청난 전과를 올린 영국 함대가 철수하는 도중 인근에 있던 독일 전함의 공격을 받게 됐다. 독일 구축함 3척이 갑자기 공격해온 것이다. 눈보라는 그쳤지만 지독한 안개로 독일 전함의 접근을 알지 못해 기습을 당한 것이다. 독일 구축함 ‘틸(Thiel)’이 발사한 함포에 워부턴 리 대령이 승선하고 있던 ‘하디’의 함교가 얻어맞았다. 독일 구축함의 맹공으로 영국 구축함 ‘하디’는 대파돼 해안에 좌초됐다. 이 전투에서 나르빅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리 대령이 전사했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적과 계속 싸워라” 동·서양에서 각각 가장 뛰어난 해군 제독으로 불리는 이순신과 넬슨이 전쟁터에서 죽어가면서 남긴 말이다. 자신의 죽음을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싸워 승리하도록 독려하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그런데 리 대령도 이들과 비슷한 말을 남겼다. 그 역시 죽음 직전 “적과 계속 교전하라”고 명령했다.
그렇다.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은 없는 법이다.
날씨를 전투에 적절히 활용한 지휘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를 가진 병사, 그들이 나르빅 해전을 승리를 이끌어 낸 것이다.
영국 정부는 리 대령에게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추서해 그의 공적에 최대의 감사를 표시했다.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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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Queen Elizabeth 급 활약상 HMS 퀸 엘리자베스(Queen Elizabeth)
1913년 클라이드뱅크의 페어필드 조선소에서 완공되었다. 유틀란트 해전에서는 부상자 1명을 제외하고는 피탄되지 않았으며 288을 발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메르-셀-케비르 프랑스함대 파괴작전에 참가했으나 1941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뢰에 부딪쳐 피해를 입었다. 수리 후에는 태평양 전선에서 1944년까지 활약했다. 1944년 8월 8일 실론의 트린코말리에서 부유식 도크 내에서 수리를 받다가 도크가 무너지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고 보수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출처 http://mirror.enha.kr/wiki/%ED%80%B8%20%EC%97%98%EB%A6%AC%EC%9E%90%EB%B2%A0%EC%8A%A4%EA%B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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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최신 전함인 킹조지5세급이 취역하자 구형전함인 퀸 엘리자베스 급은 예비역으로 돌려지다 1945년에는 사실상 퇴역상태로 있다 종전후 가치가 없어져 1948년까지 모든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들은 해체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HMS Queen Elizabeth 급 퇴역일지
[해체중인 퀸 엘리자베스 호의 모습 1915년부터 1~2차대전을 두루 걸친 역전의 노병은 이렇게 고철로 해체되어 사라졌다] |
전장 |
196.22m(취역당시) |
전폭 |
27.56m(취역당시) |
흘수선 |
9.27m(취역당시) |
배수량 |
경하 29,150톤/만재 33,000톤(취역당시), 경하 32,468톤/만재 36,565톤(1940년) |
승조원 |
951명(취역당시), 1184명(1940년) |
추진기관 |
파슨스 직결식 증기터빈 4기, 4축추진 |
보일러 |
Babcock & Wilcox 증기보일러 24기 |
연료탑재량 |
3,400톤 |
출력 |
75,000마력(취역당시), 80,000마력(1940년) |
최고속력 |
25노트(취역당시), 24노트(1940년) |
항속거리 |
10노트 4,400해리(취역당시), 10노트 13,500해리(1940년) |
주포 |
42구경장 15인치(381mm) 연장포탑 4문 |
현측포 |
45구경장 6인치(152mm) 단장포 16문 |
부포탑 |
45구경장 3인치(76mm) 단장포 2문 |
)
참고싸이트 및 참고서적
아카데미과학 (www.academy.co.kr)
미라지의 콤프방 (www,compmania.co.kr)
트럼페터 홈페이지 (http://www.trumpeter-china.com)
유용원의 군사세계 ( http://bemil.chosun.com/)
어둠의 상인님 홈페이지(http://icc.skku.ac.kr/~yeoupx/Project636.htm)
http://www.fas.org/man/dod-101/sys/ship/row/rus/1155_1.htm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russia/1144-pics.htm
(말이 필요없는 군사관련 외국 싸이트)
모든 무기가 잘 소개된 우리나라 최고의 무기블로그 비겐님의 블로그
(http://kr.blog.yahoo.com/shinecommerce/16465.html?p=7&t=2)
http://en.wikipedia.org/wiki/HMS_Queen_Elizabeth_(1913)
http://en.wikipedia.org/wiki/HMS_Warspite_(03)
http://en.wikipedia.org/wiki/Gallipoli_Campaign
http://blog.daum.net/cho7303/5748188
http://www.maritimequest.com/warship_directory/great_britain/battleships/queen_elizabeth/hms_queen_elizabeth_page_2.htm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dh2652&logNo=20131922834 (어드미랄님의 블로그
참고서적
세계의 항공모함 (World’s AIRCRAFT CARRIERS)
(멀티미디아 호비스트 2009.4.10일 홍희범외 ISBN 978-89-85578-18-9)
세계최강의 미해병대 (우에다신 1997.12.31 호비스트 ISBN-13 9788985578011)
* Wrighten By Mirageknight (2011.9.8 ver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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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좋은 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진 올릴 기회가 없지만 저도 전형적인 함선모델러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