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분. 우리집에서 완도읍까지의 거리(공-시)다.
혼자 먹는 저녁밥은 종종 기분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전화를 했다. 한글에 능통한 동네 형님을 찾아가 할아버지의 시나 몇편 번역하려다가 퇴짜를 맞았다. 완도통신. 전활 하니 완도관광호텔 커피숍에 있다 했다. 내 육체가 날아간 시간이다. 38km.
그는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차림이었다. 잠바 차림에 엷은 연두색 계열의 빵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차가워지기 시작한 바람과도 어울렸다. 그는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게선 안된다고 들었는데도 거푸 두잔이나 얻어마셨다.
바다의, 바다의 이야기. 듣고 싶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어서 먼 섬에는 못나간다고 했다. 대신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시공이 허용하는 동네들을 깊고 넓게 쏘다닌다고 했다. 우리는 지역에 대해서도 말했고, 문화니 예술이니 하는 단어들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는 손암이 흑산도에 가기 전 고금도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말해줬다. 추사의 아버지가 있었다고 했다. 그럴까? 혹 김이제를 말한 건 아닐까? 난, 그런 명망가 중심의 지역사는 우리들의 시각이 아닐 것임을 말했다. 다산의 제자들과 '자산어보'의 기초자료를 만들었던 사람들에 주목하지 않는 한, 건 또다른 식민의 눈에 다름없을 거다.
몸이 좋지 않다고. 동병상린의... 그래 아픈 건, 또다른 어떤 것을 가져다주니깐.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거라고 우리들 스스로를 위로했다. 바다에 떠다니는 네온불빛들이 반짝였고, 돌아오는 길 하늘 위에도 별이 밝았다.
두륜중학교의 권일이... 그는 기억하고 있을까? '근수정'을.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선이, 향숙이, 장열이, 정석이, 용우, 미주... 이런 친구들이 살았던 동네를 지나왔다.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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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드사사의 '관계'가 자꾸 너무 타성적으로 흐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르는 글들이나 멘트들로 봤을때요, 언어학에서 '동어반복'은, 나중에의 그것은 앞의 것에 비해 크게 그 의미가 감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방과 얘기할 때 자신의 말을 더 효과적으로,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늘 신선한 것과 방법을 찾아나서곤 합니다. 때론 일상도 권태롭죠. 사람이라는 동물 자체가 워낙이 복잡미묘하고 허영심이 많은 존재인지라 늘 기존의, 봐오던 것들의, 관성적인 방식의 것들을 싫어하곤 합니다. 제가 무슨 소릴...
- 완도통신을 보고, 박문수씨를 취재해보시길 권합니다. 세상의 아웃사이더지만, 그닥 폼 재지 않고 조용하게 소요하는 그의 생활은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벼운 파랑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요.
- 강진 성전면 무슨 동네의 어떤 할아버지가 젊어서는 머슴으로 사셨는데, 돈을 벌어 말년에는 정말 좋은 정원(집)을 꾸며놓으셨다고 하더군요. 저도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정원이 굉장한 모양이예요, 지인의 얘길 들으니 살아온 얘길 하시면서 펑펑 우시더라는 얘길 하더라구요.
- 해남에는 음식문화연구회가 있습니다. 해남윤씨 종부도 있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시는 사람도 있고, 보통 아줌마도 있구요. 물론 서민적인 것보담은 꽤 우아한 음식들이겟지만... 그분들의 음식에 대한 얘기는 맛깔스러운 부분이 많더군요. 사라져가는 음식의 맛을 지켜낸다는 것, 저는 이것이야말로 지켜가야 할 소중한 것의 정수가 아닌가 생각해보곤 합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한 작가의 전시장에서 받은 감동보다 '한상' 받았을 때의 체감의 진폭이 결코 적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식구들이 현장에 더 밀착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전적인 얘기지만, '소스를 찾는 일은 머리나 앉아서가 아니라 발'이 한다는 말을 기억해서요. 21일(토) 오전시간에 약속이 겹쳐서... 오전에 저는 대인시장에서 '지역미술비평과 이세길'이라는 추모토론마당을 하고, 식구들은 오후에나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강하십시오.